CAFE

먼나라 이웃나라

19세기 건축 역사주의 대 신건축 운동

작성자관운|작성시간16.11.06|조회수760 목록 댓글 0


19세기 건축 역사주의 대 신건축 운동 


  

19세기 유럽은 나폴레옹의 복고주의와 함께 시작되면서 보혁 대립의 세기로 진행되었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총 집결된 18세기 계몽 정신은 혁명 정신으로 남아 19세기를 계속 이끌었으며 산업혁명과 합해지면서 신문명을 이끄는 축을 형성했다. 그에 대한 반작용도 커서 보수주의라는 하나의 큰 흐름으로 집결했다. 18세기에 서구 문명이 나아갈 방향을 놓고 과학혁명과 계몽정신을 합한 모던 진영과 고전의 지혜와 권위에 의존하는 고전 진영이 벌였던 ‘신구논쟁’이 보혁 대립으로 강회된 것이었다.


역사주의 대 신건축 운동 

 

장-밥티스트 라쉬. 생니콜라스. 낭트, 프랑스. 1840-50. 과거 양식을 직접적으로 리바이벌시켜 사용하는 역사주의는 19세기 건축을 이끈 가장 큰 흐름이었다.



보혁 대립이라는 단순 구도 이면에는 산업혁명, 자본주의, 사회주의, 제국주의, 민족주의, 자유주의 등 다원적 요소가 상호 작용하며 19세기 역사를 이끌어갔다. 이런 배경 아래 19세기 유럽의 정치문화사는 1789-1848년 사이의 혁명의 시기, 1814-30년 사이의 보수주의 시기, 1848-1870년 사이의 자본과 산업의 시기, 1860-1917년 사이의 사회주의 시기, 1870-1914년 사이의 제국의 시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혁명의 시기에는 18세기 혁명 정신의 확산과 계승이 있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중간에 보수주의가 일정기간 득세했지만 다시 혁명운동이 발발하는 등 교차현상이 있었다. 자본과 산업의 시기에는 산업혁명이 구체적 결과를 내기 시작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부를 운용하는 산업 자본주의, 금융 자본주의, 상업 자본주의의 세 가지 대표 자본주의 유형이 기틀을 닦았다.


이에 대한 반발로 1864년 제1 인터내셔널과 1867년 칼 마르크스(Karl Marx)의 [Das Kapital(자본론)]등을 거치며 사회주의가 탄생했다. 제국의 시기에는 이렇게 형성된 자본주의와 강력한 중앙정부가 연합하면서 산업 제국주의가 탄생했다. 제국주의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식민지를 갖는 군국주의와 식민 제국주의 등으로 분화되었다.


19세기는 이분법의 극단적 대립이 대표적 문명 현상으로 나타난 시기였다. 18세기 신구논쟁이 민간 차원의 문화적, 예술적, 학문적 성격을 띠었던 반면 보혁 대립은 법제 차원의 정치적, 권력적, 국가적 성격이 강한 개념이었다. 다양성을 생명으로 삼아 발전을 지향하던 논쟁이 소모적 충돌인 대립으로 격화되었다. 보혁 대립은 19세기 중반을 넘기면서 사회주의가 가세한 이념과 계층 투쟁으로 확장되었고 후반부에는 보수주의 내에서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물리적 경쟁으로 변질, 악화되었다.



프란츠 폰 젱엔슈미트. 빈-쉔부른 야자수실. 역사주의 옆에는 산업혁명 이후 새로 등장한 신건축 운동이 맞서며 19세기 보혁갈등을 형성했다.



19세기 건축은 문명 차원의 보혁 대립을 좇아 ‘역사주의 대 신건축 운동’의 이분법 구도로 진행되었다. 역사주의는 제국주의가 이끈 보수주의에, 신건축 운동은 문명의 주체를 미래를 향한 기술 발전에 두는 진보주의에 각각 대응될 수 있다. 실제 지어진 건물 수는 역사주의가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신건축 운동은 20세기를 준비한 첨단 양식이란 점에서 이를 능가하는 시대적 중요성을 가졌다. 역사주의는 역사 양식을 직설적으로 복사하며 여전히 석재를 주 재료로 사용한 반면 신건축 운동은 산업혁명의 결과 새롭게 등장한 철물과 철골 구조, 철근 콘크리트 등에 맞는 건축 양식을 창출하려던 운동이었다. 대부분 각종 철물을 그대로 노출시키며 유리와 함께 사용했다.



토머스 콜. 건축가의 꿈, 1840. 19세기 역사주의는 이전 시대의 거의 모든 양식을 사용하는 절충주의로 나타났다.



이런 점에서 둘은 대립적 경향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두 건축을 이끈 진영은 여러 경로로 서로를 비판하며 대립, 경쟁했다. 에펠탑이 상징하듯 만국박람회의 대표 양식을 둘러싼 충돌이 좋은 예이며 이외에도 수 없이 많았다. 20세기 이후로 시간의 끈을 늘려서 봐도 마찬가지였다. 19세기 역사주의는 아무런 시대적 의미를 갖지 못하고 따라서 건축사 책에 기록될 가치가 없는 단순 모방 양식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반면 신건축 운동은 20세기 모더니즘으로 이어지며 현대 건축을 잉태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이분법 시각은 상당부분 옳은 것이긴 하지만 19세기 건축이 실제 진행된 내막을 보면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무엇보다 모든 역사주의가 무기력한 복사 양식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새롭게 성장한 시민 계층을 위한 다양한 근대적 사회 인프라 시설을 담당하는 포괄성도 가졌다. 신건축 운동으로는 다양하게 분출되는 사회적 욕구를 포괄하는 데 한계가 있었으며 이것을 담당할 건축 양식은 당시로서는 역사주의밖에 없었다. 또한 표면적 대립 이면에 상호 교류도 많았다. 신건축 운동은 세부 디테일과 양식 어휘에 역사 모티브를 많이 빌려 썼으며 역사주의 건물도 구조 골격은 철골이나 철근 콘크리트로 짜는 경우가 많았다.


절충주의의 사회 통합 기능 

 

19세기 역사주의의 대표적 특징은 차용하는 선례 양식이 대폭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18세기 역사주의가 고전과 고딕만을 선례 소재로 삼아 해석 시각을 다양하게 시도한 반면 19세기에는 반대로 선례 소재가 크게 늘어나면서 해석 시각은 비교적 단순해졌다. 19세기에는 차용할 수 있는 역사 선례에 대한 제한이 사실상 없어졌다. 앞 시대 양식이면 최소한의 근거만 있으면 아무 것이나 빌려 써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아우구스트 스튈러. 베를린 구 국립미술관. 19세기 역사 절충주의는 박물관 같은 새로 등장한 대형 공공건물 유형에 적합했다.



그리스에서 바로크에 이르는 크고 작은 양식이 모두 리바이벌 되는 양식의 홍수 시대가 도래 했다. 동방 양식도 마찬가지여서 이집트, 힌두, 인도, 중국, 일본 등 많은 동양건축도 리바이벌 대상이 되었다.


이런 현상을 ‘절충주의(eclecticism)'라 부른다. 역사주의의 내용과 대상이 확장되면서 다양한 선례를 선별적으로 절충해서 사용한다는 뜻이다. 이 말에는 기본적으로 부정적 의미가 담겨 있다. 각 시대마다 고유의 상황 아래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창출한 역사 양식을 식당의 메뉴처럼 레퍼토리 대상으로 만든 다음 그대로 모방해서 사용한다는 의미에서이다. 18세기 역사주의에는 없던 현상이며, 19세기 역사주의의 많은 부분은 실제로 이런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19세기 역사주의 전체를 무의미한 절충주의로 단정 짓기에는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새로운 기능 유형의 등장이다. 19세기에 근대국가의 기틀이 닦이면서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기차역, 법원, 시청사, 국회의사당 등과 같은 시민 사회를 위한 다양한 공공건물들이 새로 등장하게 되었다. 자본주의가 자리 잡으면서 증권 거래소, 은행, 대형 시장 등의 상업 시설도 새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전에 없던 기능들이기 때문에 그에 맞는 새로운 건축 양식을 찾아야 하는 숙제가 생겼다. 여기에 교회, 왕궁, 극장, 대학교 같은 전통적 기능들도 계속 지어졌다. 신건축 운동이 아직 자신들만의 새로운 건축 양식을 창출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것을 해결할 소재는 선례 양식밖에 없었다.


오랜 역사를 지나오면서 각 양식마다 특징적 이미지가 형성되었는데 이것이 새로운 기능 유형에 잘 대응되면서 역사 선례는 유용한 창작 소재가 되었다. 예를 들어 공공성이 강한 건물에는 고전주의가, 은행이나 상업 건물에는 르네상스가, 교회에는 중세 양식이나 고전주의가 잘 맞는 식이었다.


다른 하나는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경쟁 속에서 국가 양식을 창출하는 역할을 했다. 열강 제국은 자국의 민족적 국가적 정체성을 역사 속에서 찾으려 했고 국가 양식은 이것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물리적 증거였다. 국가 양식을 역서 선례에서 찾아 정의할 경우 그 시대 때 형성되었던 자국의 자랑스러운 역사까지 함께 가지고 올 수 있기 때문에 19세기 제국 경쟁 체제에서 국민을 통합시키고 대외적으로 국력을 과시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바인브레너. 칼스루헤 시청사. 19세기 역사 절충주의는 무기력한 과거 복사일 수 있으나 마땅한 새 양식이 없던 당시 대중성을 바탕으로 사회통합기능도 일정부분 가졌다.



19세기에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건축 매개는 역사주의밖에 없었다. 정치, 군사, 경제, 사회, 종교 등 건축 외적 상황에서 국운을 건 치열한 경쟁이 급박하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순수 예술적 차원에서 새로운 시대정신에 충실한 건축 창작성을 논할 여유는 없었을 수 있다. 가능한 한 많은 수의 국민을 포괄할 수 있는 대중성이 건축에도 요구되었는데 이것을 갖춘 매개는 역사주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프랑스는 네오 바로크가, 영국은 빅토리안 고딕이, 독일은 네오 로마네스크가 각각 채택되었다.


18세기 이후 각국이 모두 자국에 맞는 신고전주의를 모색했지만 고전주의는 국제적 보편성을 가질 수는 있어도 지중해에 뿌리를 둔 이국 양식이었기 때문에 영 불 독 세 나라의 국가 양식이 될 수는 없었다. 세 나라는 자국의 역사 가운데 가장 찬란했던 시대 때 양식을 리바이벌시켜 국가 양식으로 삼았다. 프랑스는 루이 14세 양식이던 바로크를, 독일은 오토 대제 때 양식이던 로마네스크를, 영국은 노르만 영국에서 튜더 왕조에 이르는 고딕 전반을 각각 ‘네오-’ 양식의 소재로 삼았다.



·사진 임석재 |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동서양을 막론한 건축역사와 이론을 주 전공으로 하며 이를 바탕으로 문명비평도 함께 한다. 현재까지 37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공부로 익힌 건축이론을 설계에 응용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