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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 이야기

19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신고전주의와 네오 바로크

작성자관운|작성시간16.11.06|조회수320 목록 댓글 0


19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신고전주의와 네오 바로크 


  

19세기 역사주의는 과거의 모든 양식사조가 총출동하는 절충주의였는데 이는 크게 고전주의와 중세주의로 양분할 수 있다. 두 사조는 19세기 역사주의 흐름을 양분하면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는데 이를 ‘양식들의 전쟁(battle of styles)'이라 불렀다. 두 사조는 다양한 하부 양식을 거느렸는데 고전주의에는 신고전주의, 도릭 리바이벌, 네오 르네상스, 네오 바로크 등이, 중제주의에는 고딕 리바이벌, 네오 로마네스크, 네오 비잔틴, 룬트보겐 슈틸(Rundbogen Stil), 비더마이어 양식(Biedermeier Style)등이 각각 속했다.


역사주의와 고전주의 

 

이상의 흐름을 둘러싸고 영, 불, 독 세 나라 사이에 차이도 있었다. 영국은 빅토리안 고딕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서 중세주의를 주도했으며 상대적으로 고전주의는 약했다. 프랑스는 두 흐름이 균형을 이루었는데 고전주의는 프랑스 제국과 프랑스 왕국을 오가며 다양한 논쟁과 양식을 창출했다. 중세주의는 역사주의 이외에 프랑스 고딕에 내재된 구조 합리주의를 신건축 운동과 접목시킨 점이 독보적이었다. 독일 역시 두 흐름이 균형을 이루었는데 프랑스와 달리 국가양식을 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대립이 많긴 했지만 독일의 국가 정체성이라는 공통의 명제 아래에서는 통합 양식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펠릭스 뒤방. 에콜 데 보쟈르 교육관. 나폴레옹의 제1 제정이 지나간 뒤 프랑스 왕국의 차분한 분위기에 따라 이탈리아 팔라초 양식이 유행했다.



19세기 프랑스의 역사주의는 전반부의 신고전주의와 후반부의 네오 바로크로 크게 나눌 수 있으며 중반을 전후해 고딕 리바이벌과 로마네스크 리바이벌 등의 중세주의가 가세하는 형국이었다. 시작은 나폴레옹의 등장에 따른 제1 제정 건축(1804~14)이었다. 나폴레옹의 명성에 비해 건축은 크게 활성화되지 못해서 개선아치 두 개, 방돔 광장 기둥, 몇 건의 왕궁 개축 등이 대표적 건축 활동의 전부였다.


프랑스 왕국의 고전주의 건축 

 

나폴레옹이 물러가고 들어선 부르봉 왕가의 프랑스 왕국은 건축 활동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민간분야의 자발적 활동에 맡겨 놓는 편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대표적인 건축 경향 두 가지가 등장했다. 하나는 르네상스 팔라초를 리바이벌시킨 경향으로 펠릭스 뒤방(Felix Duban, 1797~1870)의 에콜데보쟈르 교육관(Palais des Etudes, Ecole des Beaux-Arts, 파리, 1832~9)을 대표적 예로 들 수 있다. 나폴레옹 때의 과시경향에 대한 반발적 대안으로 섬세하고 우아한 경향이 주를 이루었다. 복고 정권 아래에서 차분하게 가라앉은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팔라초 모델의 단정한 윤곽, 명확한 몰딩, 선형장식 등은 이런 분위기에 잘 맞았다.



루이 피에르 발타르. 리옹 대법원. 19세기에 불바르라는 대 가로가 등장하면서 이를 면하는 대형공공건물 입면에 열주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러스티케이션의 1층과 열주 분할의 2층으로 구성되는 브라만테의 라파엘 하우스 모티브를 사용했다. 1층은 줄눈을 두껍게 해서 기단의 튼튼한 축조다움을 표현했다. 2층은 열주와 넓은 창으로 처리해서 가벼운 율동감과 경쾌한 열린 분위기를 주었다. 애틱 층인 3층은 낮은 높이에 맞게 얕게 돌출한 벽기둥으로 처리했다. 장식은 가능한 한 절제했으나 꼭 필요한 곳에는 빠지지 않고 들어갔다. 디테일은 고전 표준문법을 잘 지켜서 안정적 분위기를 주었다.


다른 하나는 열주 파사드를 사용하는 경향으로 알렉상드르 피에르 비뇽(Alexandre Pierre Vignon, 1763-1828)의 마들렌 사원(L‘Eglise de Madeleine, 파리, 1807~42)과 루이 피에르 발타르(Louis Pierre Baltard, 1764~1846)의 리옹 대법원(Palais de Justice, Lyon, 1835~)을 들 수 있다. 이 경향은 나폴레옹 때 부르봉 궁전 파사드에 나타났던 기법을 이어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8세기 국제적 신고전주의가 부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8세기는 바로크의 벽체구조에 대한 대안으로 사용하던 데 반해 19세기에는 가로에 대한 건축적 대응의 역할로 바뀌었다. 19세기에는 불바르 같은 대로가 생겨나면서 이것을 면하는 새로운 건물 파사드 개념으로 도입했다.



알렉상드르 피에르 비뇽. 마들렌 교회. 불바르를 면하는 교회에도 열주 파사드가 등장했다.



마들렌 사원은 'T'자형 도로의 결절 점에 8개의 대형 기둥이 신전 파사드 전면을 형성하며 서 있어서 전면 도로 뿐 아니라 주변 지역 전체와 소통하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가로가 확장되면서 건물의 존재가 묻힐 염려가 생기자 이를 막기 위해 건물의 존재를 강하게 드러냄과 동시에 가로와 건물 사이에 연속성을 주려는 목적을 가졌다. 리옹 대법원은 강을 따라 난 도로에 길게 면해서 앞의 도로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강 건너 시내 전체에 자신의 위치를 알리며 공공건물에 합당한 권위를 표현하고 있다.



자크 이그나스 히토르프. 색채주의를 이끈 히토르프의 대표작인데 외관은 역사 절충주의를 보여준다.


히토르프와 색채주의 

 

색채주의(polychromy)는 1820~70년 사이에 유행했던 ‘색과 장식을 강조해서 사용한 건축 경향’을 의미한다. 고대 건축과 예술에서 색과 장식이 중요하게 사용되었다는 주장 및 이를 증명하기 위한 고고학 발굴과 연계해서 진행되었다. 카트르메르 드 켕시(Quatremere de Quincy)가 이 주장을 처음 제기했고 이후 고고학 연구가 뒤를 이으며 이를 뒷받침했다. 이 과정에서 고대 건축의 색과 장식을 19세기 신고전주의에 응용하려는 움직임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면서 색채주의가 탄생했다.



자크 이그나스 히토르프. 실내에 부분적으로 사용한 장식은 히토르프의 색채이론을 반영한 것이다.



건축 운동으로서 색채주의 자체는 크게 활기를 띠지 못했으나 빅토리안 고딕, 그릭 리바이벌, 네오 바로크, 이집트 리바이벌, 비잔틴 리바이벌 등 여러 역사주의 사조와 연계되어 19세기 건축 전반에 퍼져서 나타났다. 외관보다는 실내장식에서 더 인기가 있었다. 독일에서도 유행해서 클렌체와 게르트너 등의 주요 건축가들이 동참했다. 가장 적극적으로 이끈 대표 건축가는 프랑스의 자크 이냐스 히토르프(Jacques Ignace Hittorff, 1792~1867)였다. 그는 이탈리아에 머물며 과거 그리스 식민지 지역의 신전을 연구한 결과 색이 매우 적극적이고 광범위하게 쓰였음을 발견하고 이를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했으며 자신의 작품에 직접 적용하는 시도를 했다.


생 뱅상 드 폴(Saint-Vincent-de-Paul, 파리, 1833~48)이 대표작이었다. 전체 구성은 히토르프의 복합적 경향을 잘 보여주는데 확장하면 19세기 절충주의를 대표하는 예이기도 하다. 색채주의는 실내에서 부분적으로 사용했다. 여러 종류의 고전주의를 활용한 절충주의를 기본 특징으로 가졌다. 로마의 삼위일체 교회(Trinita dei Monti) 구성을 기본 모티브로 삼아 그리스 고전주의로 재해석해냈다. 전체 구성을 뒤쪽 몸통과 앞쪽 출입구로 이등분한 뒤 출입구에 열주 파사드를 사용한 처리가 삼위일체 교회의 기본 구성이었고 열주는 그리스 이오니아식 오더를 사용했다.


실내에서는 바실리카 교회를 모델로 삼아 로마 기독교 고전주의 모티브로 전체 골격을 짰으며 디테일 처리에는 그리스 고전주의를 사용했다. 1층은 아케이드가 아닌 이오니아식 오더의 콜로네이드로 처리해서 열주효과를 노렸다. 2층에는 천측창이 아닌 갤러리를 두고 역시 콜로네이드로 처리해서 동일한 효과를 노렸다. 1층과 2층 사이에 높은 벽면을 두어 천장 높이를 높임으로써 1층에서 2층으로 이어지는 기둥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실내는 화려한 장식으로 채웠다. 색채주의에 따른 원색을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성화, 디테일, 몰딩, 재료 등 장식 처리가 가능한 수단을 여럿 동원했다. 1층과 2층을 구획하는 벽면에는 성화를 그렸으며 지붕을 받치는 2층의 프리즈도 마찬가지였다. 천장은 별모양을 기본 모티브로 삼은 소란반자로 처리해서 기하 장식주의를 추구했다. 크로싱 앞쪽 천장에는 아치형 벽체를 올려붙여서 장식을 더할 수 있는 면적을 확보한 뒤 낮은 돋을새김을 새겼다. 2층 주두는 코린트식으로 처리했다. 크로싱 천장은 유리 돔으로 만든 뒤 스테인드글라스를 끼웠다. 대부분의 주요 장식들은 황금을 주재료로 사용해서 화려한 장식효과를 높였다.



·사진 임석재 |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동서양을 막론한 건축역사와 이론을 주 전공으로 하며 이를 바탕으로 문명비평도 함께 한다. 현재까지 37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공부로 익힌 건축이론을 설계에 응용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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