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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 이야기

03. 프랑스 혁명(The French Revolution, 1789~1794) 혁명의 전개

작성자관운|작성시간16.12.05|조회수501 목록 댓글 0


03. 프랑스 혁명(The French Revolution, 1789~1794) 혁명의 전개

 

 

 




 

 

테니스 코트의 서약

 

 

루이 16세는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려 재정 개혁을 단행하려 하였다. 재무 장관이었던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은 명사회를 소집해 특권 계층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받을 것을 우려한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개혁안을 거부하고, 삼부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였다. 1789년의 삼부회가 열리던 당시의 상황은 심각하였다. 1788년의 흉작과 혹독한 겨울로 인한 고통이 전국토를 휘감았다. 정부는 나약했으며 멸시받고 있었다. 관리들은 불복종이 표출되는 것을 진압하기를 두려워하거나 망설이고 있었다. 대의원들에게 주어진 서면 지시 사항은 정치적 · 사회적 · 경제적 관심들을 총망라한 것이었으며 아주 많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소란 가운데, 왕과 그의 신하들은 여전히 수동적인 자세였다. 그들은 삼부회가 개별적으로 열려야 할지 아니면 함께 종합적으로 고민해야 할지 하는 문제도 결정하지 못했다. 178955일 루이 16세는 베르사유 궁전의 살 데 메뉘 플레지르(Salle des Menus Plaisirs)에서 삼부회를 소집하였고, 귀족 188, 성직자 247, 평민 500명이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재무총감 네케르는 재정의 조건을 전제로, 몇 가지 작은 개혁안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표결방식을 둘러싸고 귀족, 성직자 대표와 평민 대표 간에 갈등이 생겼다. 국새상서(國璽尙書)인 샤를 루이 프랑소와 드 폴 드 바렝탕Charles Louis François de Paule de Barentin)은 그들이 신분별로 또는 인원수대로 투표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알려왔다. 제삼부회(Tiers État)는 회의를 개별적으로 할지 모여서 할지도 결정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실망하였다. 귀족들 중 일부와 하위직 성직자들의 다수는 실질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제삼부회에 동의하였다고 알려졌다. 합동 회의를 개최한다면, 다수를 차지하는 평민 계급은 개혁, 특권의 폐지와 부동산에 대한 중세적 권리의 폐지를 통과시킬 것이었다. 분리 회의를 하는 경우, 귀족의 대부분과 상급 성직자는 개혁을 제한하려고 할 것이었다. 따라서, 삼부회를 합동으로 개최하자는 것이 제삼부회의 첫 번째 의제로 부각하였다. 귀족, 성직자 대표는 신분별 표결 방식을, 평민 대표는 머리수 표결 방식을 지지함으로써 자신들이 속한 계급에 유리한 방향으로 회의를 이끄려고 한 것이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시민들에게 공격받는 바스티유 감옥, 장 피에르 루이 로렌트 휴엘, 수채화, 37,8 x 50,5 cm, 1789년 작

 

왕당파가 제헌국민의회의 무력 탄압을 기도하여, 지방으로부터 군대를 결집하고 있다는 것이 전해지자, 1789712일부터 군대와의 사이에 충돌을 반복하였다. 714일 아침, 파리 민중들은 혁명에 필요한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민중들은 도개교(跳開橋)를 내리고 감옥으로 쇄도하여, 감옥을 점령하였다. 이 습격의 성공은 바야흐로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바스티유 습격) 이들이 프랑스 대혁명에 가담한 이유는 기득권층들에 대한 감정적인 불만이나 부르주아의 선동 때문이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가자"면서 평등사회를 추구한 장 자크 루소의 영향으로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저항하는 사회개혁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시민혁명의 영향으로 민중이 지배계급에 저항하는 권리인 저항권을 헌법으로 존중한다. 덕분에 혁명의 불길은 지방까지 확산되었다. 84일에 제헌국민의회는 봉건적 특권이 폐지되었음을 선언하고, 1789826일에는 프랑스 인권 선언을 채택하였다.

 

베르사유 행진

 

 

그러나 국왕이 제헌국민의회의 선언을 인정하지 않았다. 정치적인 혼란과 전년 흉작의 영향으로 파리의 물가가 상승하기 시작하자 1789105일 파리의 수많은 여성들이 무기를 들고 빗속에서 파리 시청 앞 광장에 모여 베르사유 궁전에 난입하여 국왕과 의회에 음식을 요구하는 생존권 투쟁을 하였다. 이들의 압력으로 루이 16세는 압력을 받아 프랑스 인권 선언을 인정하고 그녀들에게 이끌려 파리 튈르리 궁전에 가족과 함께 이주당한다. 이후, 루이 16세 일가는 파리 시민의 감시 속에서 살게 된다.

 

이 시기의 혁명은 온건한 미라보, 라파예트 등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온건파 혁명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시민군은 자유주의 귀족 라파예트를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1790, 그의 제안에 따라 삼색기(현재 프랑스 국기)가 혁명의 깃발이 되었다.

 

입법 의회

 

 

17919월에는 제한 선거와 입헌 군주제를 골자로한 새로운 헌법(1791년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헌법은 군주제 하에서 평민도 일정 이상의 세금을 납부하면 선거권을 인정하는 내용이 있었다. 10월이 되어 첫 번째 선거가 실시되고 새 의회인 입법의회가 구성되었다. 입법의회에는 입헌군주제를 지키려는 온건파인 푀양파와 국왕없이 공화제를 주장하는 지롱드파와 자코뱅파가 힘을 가졌다. 지롱드파는 부유한 상공업자를 비롯한 상층, 중층 시민(부르주아)를 지지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바렌느 사건

 

 

탈출실패 후 파리로 되돌아온 루이 16세 일가

 

혁명 발발로 귀족과 성직자 등 특권 계급의 대부분이 국외로 망명하기 시작하였다. 1791년 국왕과 민중의 중개자인 미라보가 죽자, 과격한 혁명을 거부한 루이 16세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한 관계에 있는 스웨덴 귀족 페르센의 도움을 받아, 왕비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피신할 계획을 세웠다.

 

1791620, 파리를 탈출한 루이 16세 일가는 국경 앞의 바렌느에서 민중들에게 발각되어, 625일 파리로 되돌아왔다. 이 사건은 프랑스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동시에 루이 16세의 반혁명 의도가 폭로되었다. 혁명의 파급을 두려워하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827필니츠 선언을 발표하여, 루이 16세의 지위를 보장하지 않으면 전쟁을 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에 루이 16세는 국왕에 머물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비교적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던 국왕 옹호파 민중의 지지를 상실하였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저항

 

프랑스 혁명의 타깃은 봉건 왕조를 겨냥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가톨릭교회를 겨냥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곳곳에서 앙시엥레짐을 상징하는 가톨릭교회를 습격하고 성상을 파괴했다. 이 때문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프랑스 혁명에 극렬 저항했다. 가톨릭교회는 교종을 통해 프랑스 혁명을 분쇄 시키기 위해 가톨릭 군주들의 군대 파병을 요청하고, 가톨릭 신자들을 내세워 반혁명 선동을 일삼았다. 프랑스 혁명으로 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가톨릭교회는 시민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다. 대표적인 로마 가톨릭교회의 반란이 방데 반란이다. 방데 반란은 수많은 희생자를 낳고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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