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천리교(天理敎)-한국의 천리교 역사
창가학회와 함께 일본이 기원인 (신흥)종교단체 중 대한민국에 제대로 정착한 몇 안되는 사례이다.
조선 천리교는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기 대략 1년쯤 전인 1892년 말, 혹은 93년 초에 사토미 지타로(里見治太郞)가 부산으로 밀항하여 포교활동을 하면서 시작했다. 사토미는 종교적 열정에 휩싸여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조선으로 간다고 알리지 않고 밀입국하여 포교활동을 하였다. 가족들은 사토미가 부산에서 보낸 편지를 받은 뒤에야 행방을 알았다. 93년 10월에는 양자인 사토미 한지로(里見半治郎)까지 양부 곁으로 와서 포교활동을 도왔다. 사토미 부자는 몇 차례 조선과 일본을 오가면서 포교활동을 계속하여 부산에서 조선인 신자 2백 명 정도를 조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어를 할 줄 몰라 포교활동에 한계가 보이자 조선어를 배우기로 하였고, 사토미가 소속된 고치(高知)분교회에서도 이를 지원하였다. 사토미 부자의 조선포교활동이 천리교 잡지를 통해 일본 천리교에 알려지자, 다른 포교사들도 조선어 한 마디도 제대로 할 줄 모르면서 조선으로 건너오게 되었다. 그러나 사토미 부자가 만든 천리교 신자집단은 1894년에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통제가 심해지자 와해되었다.
1901년, 사와무라(澤村)라는 일본인 포교사가 마산 사람 김선장(金善長)에게 교리를 전파하였는데, 김선장은 이후 조선에서 천리교 신자로 계속 활동하고 나중에는 첫 조선인 교회장이 되었기 때문에 김선장을 실질적인 첫 번째 조선인 신자로 간주한다. 이후 1917년 서울역 앞 동자동(東子洞)에 천리교 포교관리소가 세워지면서 포교활동이 활발해졌다.
일제시대에 조선총독부는 조선으로 일본의 신흥종교들이 전파됨을 꺼려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나, 이런 신종교계 포교사들이 대부분 조선으로 밀항하여 들어온 사람이라는 점, 포교사들이 준비도 갖추지 않고 무장적 들어와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다는 점, 그리고 근대화된 일본에서 이런 미신적 종교들이 일어났음을 조선인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점 등을 이유로 꼽을 수 있다. 미개화된 조선을 근대화된 일본이 보살펴준다는 총독부의 입장이었으므로, 이런 '미신적인 종교가 일본에서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상황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비록 천리교가 1908년에 일본에서 합법적인 교파신도로 인정받았지만, 일본 내에서도 미신적 종교, 불교의 적대자, 하층민들이나 믿는 천박한 종교라는 인식이 대중적이었고 '천리교 따위 미신적 종교의' 합법화 인정을 취소하라는 청원 또한 빗발치는 상황이었다.
천리교뿐만이 아니라 다른 일본계 신종교 포교사들도 그렇지만, 별다른 준비 없이 대개 종교적 열정만으로 조선으로 밀항하여 들어온 포교사들은 떠돌이 행상 등을 하며 어렵게 입에 풀칠하였다. 이들은 또한 자기가 믿는 종교를 조선말로 사람들에게 설파할 만한 어학 실력도 없었기 때문에, 병든 사람을 종교의 힘으로 치료하는 정도로 조선인들의 이목을 끌어야 했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조선인 신자를 얻어야 비로소 제대로 포교를 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도 그랬지만, 조선에서도 천리교 포교에서 질병치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다.
다른 일본계 신종교와 비교해서 천리교의 조선 포교 실적은 매우 월등했다. 통계에 따르면 1924년에 천리교 신자가 된 조선인은 8천2백 명으로 집계됐는데, 조선인 신자수 2위인 금광교가 고작 530명임을 고려하면 일본계 신종교를 믿는 조선인 신자는 사실상 전부 천리교인이라고 해도 되는 수준이다. 1923년에 조선인 천리교 신자 최정현은 이에 대하여 "천리교의 의례나 병을 고치는 의식이 조선의 구습(무속)과 비슷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천리교를 접한 일제시대 조선 민중들이 천리교 포교사를 '일본에서 온 무당' 비슷하게 인식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김선장만 하더라도 천리교로 개종했을 때 가족들이 "일본 무당이 되었다"라고 하면서 매우 비난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조선인 천리교 신자들을 가리켜 왜무당이라고 했다고 한다.
사실 일본계 신종교 중에서는 조선에서 가장 월등했던 천리교조차도 객관적으로 사정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일제시대 천리교 측 기록을 보면, 조선 사람들은 병이 들어 고생하다가 천리교 포교사들의 도움이나 혹은 영검으로 병이 나을지라도 신단에 찾아와서 감사할지언정 내지인(일본인)들처럼 천리교에 입교하는 일은 없다고 한탄하는 내용도 있다. 조선 내 일본인 천리교 포교사들은 대개 일본 안에서도 무식한 축에 속했다. 또한 조선인 천리교 신자들 중에서도 "일본이 뿌리고 다른 곳은 가지라는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하거나, 천리교 본부가 조선에 세운 강습소를 거들떠도 보지 않는 등, 신앙으로서는 천리교를 받아들일지라도 다른 부분으로는 일본을 기꺼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똑같은 외래종교여도, 이미 1921년에 조선인 장로교/감리교 신자수만 24만 명으로 집계됐음과 비교하면, 조선인 천리교인 숫자 8천 명이 어떻게 느껴졌을지는 뻔한 일이다. 일본종교라는 거부감, 조선어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포교사 등에 대한 문제가 겹쳤을 것이다. 일본 천리교 본부에서는 이런 문제를 타파하고자 포교사들의 질적 수준을 높이려고 조선어학과를 개설하는 등 의욕적으로 나섰지만.... 일본이 핵을 맞고 항복해버렸다.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조선인 천리교 신자들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 참고로 대한천리교에서 발행한 자료를 보면 광복 직후 조선인 천리교 신자 수는 약 2만 명이라고 한다.
일제시대에 일본계 종교 중에서는 조선에서 가장 왕성한 천리교였던 만큼, 광복 이후에는 민중의 혐오도 거셌다. 천리교에 대하여 조선 사람들만 인식이 나쁜 게 아니라 당시 미군정 당국자들도 매우 안 좋게 생각하였다. 미군정은 적산재산이라는 이유로 조선 천리교 소유건물 등 거의 모든 천리교의 재산을 압류했으며, 그중 40여 개 부동산을 기독교계에 불하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군정, 그리고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기독교계에 적극적으로 특혜를 주었다. 오늘날 영락교회 자리도 원래는 천리교 소유 부동산이었으나 적산재산 조치로 인해서 불하받은 것이다. 일부 천리교 신자들이 이런 조치에 항의하였으나, "민족반역자"라고 하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이 조선 천리교 해체명령을 내리자, 천리교인들은 조선의 천리교란 뜻에서 조천교(朝天敎)라고 이름을 바꿔 명맥을 유지하였고, 미군정은 국가신토적인 요소를 없앤다는 조건 아래 겨우 승인하였다. 민중들도 천리교인들을 친일종교라고 생각한 만큼 이런 조치에는 아무 불만이 없었다. 천리교단의 자료를 보면 이 시기에 많은 신자들은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 천리교를 버렸다고 설명한다.
미군정 통치기가 끝나고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대중의 인식이 달라질 것은 없었다. 천리교는 왜색종교라는 이유로 국민정서상 상당한 반감을 샀다. 그뿐 아니라 병을 치유한다고 나서다가 사람이 죽는 사례가 드문드문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57년 7월 31일에 마산에 있는 대한천리교 하마산교회 교회장이 4살짜리 남자아이의 목병을 고친다고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장시간 편도선을 만졌다가 치사한 혐의로 수사당국에 끌려갔다는 기사가 있다.(1957년 8월 4일자 경향신문 3쪽)
천리교는 정부가 수립된 1948년, 천경수양원(天鏡修養院)이라는 이름으로 개칭하고 교단을 정비했다. 이미 왜색종교라고 이름이 났기 때문에 일부러 천리교란 말을 피하여 천경수양원이라고 했다고 한다. 천경수양원장은 이순자(李順子)라는 사람이었으나, 6.25 전쟁 때 북한군에게 납북되어 이후 행적을 알 수 없다. 1952년 대한천리교 연합회, 54년에 대한천리교 본원으로 개칭하다가 결국 최종적으로는 재단법인 대한천리교단이 되었다.
<대한천리교>라는 이름으로 모였어도 내부적으로는 서로 생각하는 바가 매우 달랐다. 결국 55년에 세 파로 나뉘게 된다.
•대한천리교 본원: 일본 천리교로부터 독립하여 토착화해야 한다고 생각한 파. 현재의 대한천리교가 된다.
•대한천리교 교리실천회: 영남지방의 교회가 중심이 되어, 일제시대처럼 일본 천리교와 연계해야 한다고 생각한 파.
•대한천리교 연합회: 아웅다웅할 게 아니라 한국에 있는 천리교회가 연합하여 외부문제에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한 파.
이해(1955)에 천리교 포교사 최재한(崔宰漢 1908-1983)이 밀항선을 타고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 열정적인 포교활동을 하였다. 그 결과 한국 천리교 내에서도 최재한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상당한 영향력이 생겼다. 위에서 언급한 3파 이외에도 최재한파가 있었다고 말하는 신자도 있을 정도이다.
1956년, 대한천리교 본원은 대한천리교 진흥대제전을 거행하였는데, 식순에 애국가 제창, 국군장병 위령제, 대한민국 만세 삼창, 대통령 만세 삼창이 들어 있었다. 아마 자신들이 반민족적 종교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한복을 입고 전통 아악으로 의례를 진행하는 등 일본색을 지우려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내부에서도 이런 변경에 대한 반발이 극심하여 결국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정부는 58년에 천리교를 유사종교단체로 규정하여 교단이 법적 지위를 상실하였다.
1960년대 들어 한일국교정상화 논의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1961년, 일본 천리교 해외전도포교부에서는 한국전도청을 설치하여 대한천리교를 천리교 한국교구로 끌어넣으려는 시도를 하였다. 일제시대에 조선포교관리소 소장이었던 이와타 초자부로(岩田長三郎)를 파견하여 한국전도청 설치를 타진하였다.
이해에 박정희가 5.16을 일으켰다.
1963년, 대한천리교 본원이 다시 종교단체로 등록, 문공부 인가를 취득하였으나 교리실천회와 연합회는 그러지 못하였다. 결국 교단이 다시 통합되었으나 내부적 갈등은 여전히 상존하였다. 재단운영과 재산문제로 서로 비방하고 고소하여 엄청난 갈등이 생긴다. 최재한이 대한천리교의 2대 교통으로 취임하였지만, 전도청이나 연합회 사람들, 그리고 일본 천리교 본부 사이에 끼어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다가 결국 나중에는 제적당하는 등 정상적인 교단 운영이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여 혼란스러웠다. 최재한도 이러는 와중에 상당히 내적 갈등이 심했던 듯하다.
이해 12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의료보험법을 제정하였다. 의료보험은 천리교의 교세확장을 억제한 요소일 수 있다.
1964년부터 언론에서 천리교를 주목하고 신문기사를 쓰기 시작했음이 눈에 띈다. 64년 2월 12일자 동아일보에서는 경남 진해시를 중심으로 천리교가 영남 일대로 퍼지고 있다고 우려하는 어조로 기사를 썼다. 동년 3월 20일자 동아일보 사설에서는 (한일협정 타결을 위한) 한일회담에 앞서 우리의 정신과 자세를 확인해야 한다면서, 일본 종교인 창가학회나 천리교가 교세를 확장하는 것을 우리 자세에 문제가 있다는 예시로 들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 무렵 천리교는 신도수가 약 15만 명이었다.
1965년 6월 22일에 한일협정이 조인되자 국민들 사이에서 반일감정이 다시 들끓었고, 천리교는 이러한 국민감정을 감당해야 했다. 65년 8월 5일자 경향신문 보도를 보면, 양찬우 당시 내무부 장관이 "헌법상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만, 우리 헌법이 3.1 정신에 입각하므로 민족정기를 침해하는 종교단체를 경찰력으로 단속하겠다. 위헙행위와 사기행위에 대해서는 형법을 적용하겠다."라고 말했다고 보도하였다. (당시 신문기사에서는 특히 천리교와 창가학회를 예로 드는데, 그중에서도 창가학회가 교세를 확장하면서 정치적인 방법을 사용하므로 천리교보다 더 위험하다고 서술했다.)
동년 8월 11일에는 몇몇 대학생들이 당시 서울 성동구에 있는 대한천리교 본부에 들어가 "민족정기를 잃지 말라"라는 경고문을 붙이다가 신자들에게 틀켜 도망가고, 광복절 새벽에는 역시 같은 인물이 친구들과 함께 대한천리교 본부에 들어가 태극기로 얼굴을 가리고 신단을 파괴했다가 그중 한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동년 8월 17일, 문교부는 천리교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신앙대상인 천리왕의 개념과 정의, 천리교의 의례와 복장 등을 민족정신에 걸맞게 개정할 것, 일본 천리교와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일본으로 순례하지 말 것, 미신적 포교행위를 금할 것을 요구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유사종교단체로 규정하겠다고 통첩하였다.
결국 9월에 당시 교통 최재한의 이름으로 각 교회에 '시정사항'을 보내어 정부의 요구대로 의복, 의례 등을 고치라고 전달하고, 10월에는 일본 천리교 본부의 신바시라 나카야마 쇼젠에게 "대한천리교는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교회"라는 서한을 보내었다. 하지만 아직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1966년 2월 12일, 경찰이 대한천리교 2대 교통 최재한 등 간부 6명은 입건하고, 대한천리교 본부 재무국장은 사문서를 위조하고 공금을 횡령한 혐의로 긴급체포하였다. 최재한 교통은 경찰 소환에 불응하다가 22일에 성동구 인창동의 어느 길거리에서 검거되었다.
이 시기 신문기사를 보면, 대한천리교 본부만이 아니라 지방교회에서도 신자들이 올린 돈을 주먹구구로 관리했기 때문에 67년에는 교회장이 공금을 횡령하다가 적발되기도 하는 등 많은 파란이 있었다. 정부가 천리교를 유심히 지켜보는 와중에 이런 비리까지 털린 것이다.
경찰은 일본의 종교법인 천리교로부터 한국 천리교로 (불법적인 루트를 통해) 자금이 전달된다는 의혹이 있어서 이쪽으로도 수사를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나온 신문기사에서는 '경찰은 앞서 천리교에 관하여 조사하였으나 무위에 그쳤다'라고 보도하는 것으로 보아, 혐의 입증에 실패한 듯하다.
동년 동월 17일자 조선일보에서는 '파고드는 천리교의 촉수'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보도하였다. 해당기사에서는 "(천리교가) 한국사회의 커다란 정치적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일본문화침투의 첨병적 존재……천리교를 믿으면 만병을 통치할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말로 꾀었다"라고 보도하고, 양찬우 내무부장관이 천리교를 '민심을 현혹하고 민족주의 주체성을 해치는 유사종교단체'로 단정하여 철저한 단속을 다짐했지만, 경찰은 교리면으로는 손도 못 대고 간부들만 범법행위로 잡아들였다고 전했다.
동년 4월 8일에는 대한천리교 충무교회 신도 250여 명이 "일본종교에 우리는 속았다" "민족정신 되살려 천리교 믿지 말라"라는 전단을 뿌리고 집단 탈퇴하기도 하였다. 탈퇴신도들은 "천리교를 믿으면 병이 낫는다는 말에 속아 천리교를 믿었다. (천리교가) 민족정체성을 잃게 하는 왜색이 짙은 종교임을 알았기 때문에 탈퇴한다"라고 말했다. (경향신문 1966년 4월 9일자 7쪽)
이러한 언론보도에서 60년대 한국사회가 천리교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또렷이 알 수 있다. 대한천리교 홈페이지에서는 1960년대 중반의 이런 동향에 대해서는 말을 삼가고, 다만 64년에 1차 자체정비, 65년에 2차 자체정비를 했다고만 설명한다.
이 시기 신문기사에서 '천리교를 믿으면 병이 낫는다고 혹세무민한다'라는 내용이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때에도 천리교 포교에서 질병치유는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중요한 요소였던 것 같다. 위에서 이야기한, 병을 치유한다는 수훈을 전면에 내세워서 포교했을 것이다.
대한천리교는 이처럼 왜색종교, 일본의 앞잡이라고 지탄받음이 한스러웠는지 토착화에 힘을 기울였다. 1984년에 조선일보 기사를 계기로 다시 천리교가 국민적 반일감정과 맞닥트리고 문화공보부도 천리교에 자료를 요구하자, 85년에 아예 신토 냄새가 풀풀 나는 신각(神閣)을 철거하고 감로대를 목표(예배대상)으로 삼으라고 산하 교회에 지시하였다.
원래 일본 신토에서 신체(神體), 즉 신의 상징물(혹은 신성이 깃든 물건)로 금속 거울을 모시는 경우가 흔한데, 천리교에서는 신각이라 하여 마치 건물처럼 생긴 목조 구조물(신각)에 거울을 설치하고 이를 신앙물로 삼는다. 하지만 대한천리교에서는 왜색을 없애고자 신각을 파괴하고 대신 육각형 기둥처럼 생긴 목조 감로대(甘露臺)를 그 자리에 안치하였으며, 감로대를 모신 단 또한 한옥풍으로 다듬었다.
야시마 히데오가 이치노모토 분서 사적보존회를 이끌면서 발표한 자료들이 대한천리교가 이러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교리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조치에 반발하여 1986년 6월,대한천리교 부산/경남교구의 일부 신자들이 <한국 천리교 연합회>라는 이름으로 이탈을 선언하면서 양분되었다. <한국 천리교 연합회>는 지금은 <천리교 한국교단>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천리교 한국교단은 61년에 설치된 한국 전도청 산하에 들어갔다. 토착화를 추구한 대한천리교는 (과거에 정부와 사회가 요구한 대로) 일본 천리교와 관계를 끊었지만, 천리교 한국교단에서는 일본 천리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자금지원도 받는다고 한다.
많은 교회들이 한국교단에 가세하여, 대한천리교는 교세가 더욱 줄어들었다. 안 그래도 한국에서 천리교가 소수종교인데, 대한천리교가 더 이상 천리교를 대표하는 단체가 되지 못할 정도이다. 한국교단이 일본에서 자금지원을 받는데 반하여, 대한천리교는 그런 것이 없으므로 더 불리하다.
60년대에는 언론에서 경계할 정도로 교세가 커지던 천리교는 7-80년대를 거치면서 교세가 쪼그라들어, 지금은 정말 존재감을 잃어버렸다.
10.1. 국내 현황
한국에서 천리교는 <대한천리교>와 <천리교 한국교단>으로 양분되었다. 대한천리교 신자와 천리교 한국교단 신자 사이에서는 감로대/신각, 더 넓게는 토착화 문제가 그야말로 불꽃 튀도록 대립하는 주제이다.
상술하였듯 역사는 대한천리교가 더 오래되었으나, 사회적 압박을 피해 왜색을 탈피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생겨 1986년에 천리교 한국교단이 갈라졌다. 대한천리교는 일본 천리교 본부와 관계를 단절하였으나 한국교단은 일본 천리교의 한국 지부로 계통을 유지한다. 대한천리교는 천리교 한국교단을 황도신토와 영합한 일본 천리교에 종속되려는 줏대도 없는 놈들로 간주하고, 천리교 한국교단은 대한천리교를 교단의 원칙을 무시하고 자주라는 이름으로 이단적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놈들로 간주한다.
교단이 분열하면서 산하교회의 소속을 두고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초대 교회장 최재한이 1959년에 세운 원남성(元南星)교회가 그런 경우이다. 초대교회장이 사망한 뒤 대한천리교와 천리교 한국교단이 각각 교회장을 임명하여 충돌하였다. 결국 양 교단이 저마다 원남성교회를 별개의 장소에 세우는 것으로 된 듯? 천리교 한국교단 측 원남성교회는 2001년에 전도청에 토지를 기부하여, 2002년에 전도청이 서울에서 현재의 위치(경남 김해시)로 이전했다. 한국교단 원남성교회 역시 전도청에게 토지를 넘긴 뒤 김해시 화목동으로 이전하였다.
2010년대에 들어서 천리교 한국교단 동래교회의 교회장 자리를 두고 분란이 일어났다. 한국교단의 교통이 동래교회장을 파면하고 다른 사람을 교회장으로 임명하자 원래 교회장과 새 교회장간 싸움이 붙었다. 두 사람이 부산지법에 각각 소송하여 상반된 판결을 받아내자 언론에도 보도가 되었다. 새 교회장은 법정에서 한국교단의 임명장을 근거로 삼아 자기가 정당한 교회장이라 주장하였고, 부산지법은 이를 인정하였다.
그런데 원래 교회장 역시 부산지법의 다른 재판부에 소송을 제기하여, 천리교 한국교단의 교통이 교회장 임면권을 갖는다는 교헌은, 일본 천리교에 예속됐다는 비판을 피하고자 실제로 적용하지는 않을 생각으로 만든 것이므로 천리교 본부가 아닌 한국교단이 교회장을 파면할 수 없다고 판결을 받은 것이다. 같은 법원에서 서로 상반된 판결이 나오자 언론에까지 보도되었고, 결국 두 사람 다 항소하기로 하였다.
일본 천리교와 분명하게 선을 그은 대한천리교와 달리, 천리교 한국교단은 일본 천리교와의 관계에서 매우 어중간한 입장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또한 한국교단에서도 일본 천리교에 예속되었다는 비판을 의식했음을 알 수 있다.
대한천리교 본부는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망월사역 근처에 있고, 천리교 한국교단의 본부격인 한국 전도청은 경상남도 김해시 생림면에 있다.
두 교단을 합쳐 천리교인이 대략 30만 명 남짓이라고 주장한 자료도 있긴 한데 믿기는 어렵다. 문화공보부에서 1974년에 발행한 『종교법인 단체 일람표』에 따르면, 당시 대한천리교(교단 분열 이전)의 신자 수가 36만 8천 명이라고 하는데 1974년 당시 한국총인구수 3470만 명 대비 1 %에 불과하다. 나이든 천리교인들이 "신도 수가 그때와 비교하면 바닥을 쳤다"라고 이야기하므로, 신자 수가 그때보다 줄면 줄었지 절대로 늘진 않았다.
신뢰할 만한 통계자료는 없지만, 2000년대에 발표된 몇몇 논문들에서는 2004년을 기준으로 대한천리교 3만 명, 천리교 한국교단 15만 5천 명이라고 서술한다. 2004년 총인구수 4810만 명 대비 0.38 %라는 안습한 수치.
그런데 2005년에 통계청이 인구주택총조사를 하면서 종교인구를 집계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불교, 개신교 등 8개 종교를 제외한 기타종교인 수가 16만 3085명이다. 천리교는 당연히 기타종교로 들어가는데, 당연히 천리교인이 아무리 많아도 16만 명을 넘을 수 없다. 대한천리교/천리교 한국교단이 이야기하는 신자 수에 거품이 심함을 알 수 있다. 통계에서 별도로 항목을 잡지 않았을 정도로 교세가 미약함을 감안하면, 3만 명 이하일 가능성도 상당히 있다.
천리교인들 사이에서는 실제 신자 수가 4천 명쯤이 아니냐는 비관적인 추측도 나오는 듯하다. 게다가 젊은 신자들이 안 들어오기 때문에 신자들 중에서는 60을 넘어 70대인 사람이 흔하다고 한다.
심지어 2015년에 천리교 한국교단에서 천리교 포교의 집 연수생을 모집하면서 낸 광고에는 꺼져가는 이 길(천리교)의 생명을 두 어깨에 짊어진다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신자가 적을 뿐만 아니라 새로 들어오는 신자도 없다는 내부적 위기감이 드러난 말이다.
천리교의 그 얼마 안 되는 신자들은 서울이 아니라 오히려 경상도에 많다. 초기 천리교 포교사들이 경상도에서 많이 활동했던 역사의 흔적인 듯하다. 전도청이 김해시로 내려간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특히 경상남도 창원시(정확히는 옛 진해시)는 한국 천리교에 있어서는 고향이라고 해도 되는 곳이라고 한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 1960년대에도 진해시를 중심으로 영남 지방에 천리교가 퍼진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그 외에 제주도에도 천리교 신자가 나름대로 있었다. 제주도에는 일본에서 종교를 믿게 된 재일동포 신자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포교하면서 일본종교가 퍼진 경우가 많은데 천리교도 그러하다. 1945년에 재일동포 신자가 제주도로 돌아와 교회를 세우면서 병을 낫게 한다는 소문이 돌아 6-70년대에 교세가 활발했으나 80년대 이후로 수그러들었다.
신자 수는 천리교 한국교단이 더 많지만, 언론에 보도되는 횟수는 대한천리교가 훨씬 많다. 자주교단을 표방하고, 본부가 서울에서 가까운 덕분인 듯하다. 인터넷상에서는 대한천리교 홈페이지와 몇몇 카페가 활발한데 반해서, 천리교 한국교단은 소속 신자들의 블로그나 사이트가 상대적으로 활발한 편이다. 반대로 한국교단의 홈페이지는 정말 간신히 구색만 갖춘 정도라, 홈페이지만 보면 양 교단의 교세가 서로 뒤바뀐 줄 알 지경이다.
대한천리교는 왜색을 없애려고 했기 때문에 왜색이 풀풀 나는 핫피나 교복을 입지 않지만, 천리교 한국교단은 핫피도, 교복도 흔하게 입는다. 기모노를 차마 입지 못하는 대신 교복을 입기 때문에, 일본 천리교회보다 교복을 입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하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관공서에서 천리교 한국교단에 "민원이 많이 들어오므로 왜색 복장을 자제해주시길 바랍니다"라는 공문을 보내곤 했다고 한다. 2천년대 들어와서는 과거보다 반일감정도 약해지고 일본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자는 생각이 확산되면서, 과거보다는 천리교에 대한 인식도 부드러워질까....했는데, 아예 존재감을 잃어버렸다.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어른들이나 "그런 종교도 있었지." 하는 수준. 다만 상대적으로 영남에 천리교인이 집중됐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른 지역보다 조금 더 알려졌다.
한국 천리교는 반일감정 + 마이너한 종교라는 불리한 점 때문에 일본 천리교와 분위기가 다르게 형성된 듯하다. 한국에서 천리교인들은 천리교의 내부 분위기를 '상당히 자유롭다'라고 평가하는데, 일본에서 천리교를 뛰쳐나온 사람들이 올린 글을 보면, 부모가 천리교를 강요하여 자신을 세뇌하려 했다고 분노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 젊은 신자들은 가족들이 천리교를 믿기 때문에 자연히 믿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며, 성장하면서 학교 등에서 다른 사람들을 통해 천리교에 대한 인식을 접하고 상당히 큰 종교적 회의를 겪는다. 그나마 이런 젊은이들이 천리교 밖으로 나가지 않게 잡아주는 것은 비슷한 젊은이들이 모인 청년회, 그리고 일본 천리교 본부가 있는 터전으로 순례하는 체험 정도에 불과하다. 모태신앙이 아닌 신자들의 입교동기도 질병치유가 가장 많아, 젊은 사람들의 다른 종교적 욕구를 잘 충족하지 못한다. 비슷하게 일본에서 온 외래종교 창가학회와 비교해도 이 점이 드러나는데, 창가학회의 젊은 층들은 입교동기에서 질병치유는 비중이 적다.
못 살던 시절에는 인맥을 통해 질병치유를 내세우며 하는 포교방법이 정부와 언론이 경계할 정도로 잘 통했지만, 이제 한국도 꽤 잘 살기 때문에 사람들의 종교적 욕구도 변해서 과거의 방법이 잘 통하지 않는다. 똑같이 일본종교라고 탄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창가학회는 사정이 천리교와 비교할 수 없이 좋다.
10.2. 의료보험과 천리교 교세
보통 천리교가 한국에서 세를 잃어버린 이유로 1차적으로는 국가적 탄압을 든다. 60년대 중반에 명백히 국가의 공권력으로 교단이 억압받고 탄압받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똑같이 일본종교라고 탄압받은 창가학회는 멀쩡히 살아남았음을 설명할 수가 없다.
천리교는 창교 당시부터 지금까지 줄곧 병을 치유하는 종교적 영험으로 신자를 끌어모았다. 이것은 교조 나카야마 미키 본인이 질병으로 아이들을 잃고, 또 본인도 아팠던 경험 때문일 것이다. 일제시대 조선인 신자들도 일본 무당이라는 악담을 받으면서도 질병이 나았기 때문에 천리교에 입교한 사례가 많았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새로운 신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종교적 동력/매력이 이것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도 과거의 극심한 반일감정 속에서도 단지 병이 나을 수 있단 말을 믿고 천리교에 입교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 무렵에는 한국의 병원들이 수준이 낮았을 뿐만 아니라, 전국민 의료보험이 없어서 서민들이 병원에 가기가 더욱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서 종교적 치유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63년에 의료보험법이 제정되고, 이후 자영업자 등을 시작으로 부분적 의료보험을 확대하다가 89년에는 전국민 의료보험 실시를 달성하였다. 천리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감수하고 병을 치유하겠다고 천리교에 입교해야 할 필요성이 낮아진 것이다. 병원에서도 치료하기 힘든/치료비를 감당하기 힘든 암 같은 난치병이 아니고서는 종교적 치유에 의탁해야 할 동력이 사라졌다.
또한 이런 난치병을 앓는 환자가 종교적 치유에 의탁한다고 해도 주변에서 보기 힘든 천리교도에게 찾아가기보다는 더 흔한 사찰이나 교회 등을 찾아가게 되므로, 천리교 입장에서는 더욱 악순환에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