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을 위한 이적(시 78:9-39)
Ⅰ. 시편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패역하게 행했기 때문에 최근 섭리의 경책을 받게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9-11절). 에브라임 지파 땅에는 실로가 있었고, “그 자손은” 병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지만, “전쟁의 날에 물러갔다.” 이것은 엘리 시대에 그들이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수치스럽게 패해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삼상 4:10-11).
이에 대해 시편 저자는 말하기 시작하며, 오랫동안 다른 것을 이야기한 후 다시 이 내용으로 돌아오고 있다(61절). 그 사건이 40년이 지난 다윗 시대에 이처럼 새롭게 상기되는 것은 타당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잊을 수 없는 전쟁으로 블레셋 사람에 의해 빼앗긴 그 궤는, 비록 빨리 되찾아졌다 할지라도, 다윗이 기럇 여아림에서 그의 성읍으로 가져올 때까지는 어두운 곳에 처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1. 에브라임 자손들의 치욕적인 비겁. 호전적인 지파였던 에브라임은 여호수아가 속했던 지파로서, 용맹한 사람들이 많기로 유명했다. 그 지파의 자손들은 여느 때처럼 잘 무장되어 있었지만, 그들이 대적들을 대면했을 때에는 물러났다. 전쟁 무기는 그것에 무사적인 정신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사람에게 거의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그것과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도 없다.
2. 그들이 비겁해진 동기. 그것은 적지 않게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 동기는 다음 두 가지다.
(1) 하나님의 율법을, 그리고 그와 맺은 그들의 언약을 수치스럽게 위반한 것이었다(10절). 그들은 야비하게 배반했고 불성실했다. 왜냐하면 “저희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8절에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야비하고 완고하게 패역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 준행하기를 단호하게 거절했고, 사실상 그들이 그의 다스림을 받지 않을 것을 그와 대면해 말했다.
(2)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은총에 대한 수치스러운 배은망덕. 그들은 여호와의 행하심과 기사를, 그들이 숭앙해야 하는 그의 이적의 행사를 잊었다(11절). 우리가 하나님의 행적을 잊어버리려는 것이 그의 율법을 복종하지 않으려는 마음의 근저에 깔려 있다.
Ⅱ. 그는 여기에서 전례와 상의해보고, 그들 열조의 경우와 비교해 볼 기회를 마련해 놓고 있다. 그런데 그 열조들도 또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마음에 두지 않고, 그들의 조물주와 큰 은인에게 감사하지 않았으므로 자주 그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었다. 여기에 있는 이야기는 매우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람의 악 사이에 있는 일종의 갈등을 언급하고 있으며, 마침내 긍휼이 심판을 물리치고 즐거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하나의 백성으로 형성하셨을 때, 그들을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 “하나님이 기이한 일을 저희 열조의 목전에서 행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목전에서뿐만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서, 또한 그들의 이득을 위해서 행하셨다. 따라서, 그 일이 매우 놀랍고 매우 친절했으므로, 결코 잊혀지지 않으리라 생각될 정도였다. 그가 그들을 위해 애굽 땅에서 행하셨던 것이 바로 여기에서(12절) 언급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후에도 다시 언급되어 있다(43절). 그는 여기에서 계속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1) 하나님은 이렇게 그들을 위해 홍해를 갈라 길을 내셨으며, 비록 물이 무더기같이 서 있었을지라도, 어떻게 그들로 하여금 지나갈 수 있는 용기를 주셨는가?(13절) 이사야 63장 12-13절을 보라. 거기에 보면 하나님은, “그 팔로써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넘어지지 않게” 하셨다고 적혀 있다.
(2) 어떻게 그는 그들이 사람이 다니지 않은 광야의 길을 지나가도록 안내하셨는가?(14절) 그는 “낮에는 구름으로” 그들을 한 걸음씩 인도하셨는데, 그 구름은 또한 태양 옆에서 그들을 보호해 주었다. 그리고 “온 밤에는 화광”으로 인도하셨는데, 그것은 차가운 밤공기를 따뜻하게 해주었다. 적어도 그것은 밤의 흑암을 덜 무섭게 만들었고, 또 들짐승들을 쫓아낼 수 있었다(슥 2:5).
(3) 어떻게 그는 물이 없는 메마른 땅에서 그들의 진영에 신선한 물을 공급해 주셨는가? 그것은 하늘의 병마개를 여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그것은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반석을 쪼개는 것에 의해서였다(15-16절). “저는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셨다.” 반석은 위에 있는 구름으로부터, 또는 밑에 있는 샘물로부터 물을 받아 수용할 능력은 없었지만 물을 냈다. 그는 건조하고 딱딱한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는데, 그것은 증류수처럼 방울방울 새어나온 것이 아니라, 시냇물같이 “물이 강같이 흐르게” 하신 것이며, 또 깊은 수원에서 나는 것 같았다. 하나님은 풍성히 주시며, 긍휼이 풍부하시다. 그는 알맞은 때에 주시나, 우리가 긍휼의 가치를 더 잘 알 수 있도록하기 위해 때로 우리로 하여금 그 긍휼에 대해 갈급을 느끼게 만드신다.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물은 영적인 음료수이므로 더욱 귀중했다. “그리고 그 반석은 그리스도였다.”
2. 하나님께서 이처럼 그들을 축복하기 시작하셨을 때, 그들은 그를 모욕하기 시작했다(17절). 저희는 비록 애굽에서도 악을 행했지만(겔 20:8), 그것 이상으로 “계속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구원을 위한 어려움보다는 노역의 비참함을 더 잘 참았다. 그리고 그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투덜거렸듯이 그들의 공사감독에게 투덜댄 적은 없었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였기” 때문에 구원을 얻은 것같이 행동했다(렘 7:10). 때로는 죄가 계명에 의해 기회를 잡는 것과같이 어떤 때에는 구원에 의해 죄가 기회를 잡아서 더욱 악랄해지기도 한다. “저희는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비록 그가 지존자이시며, 그들은 그들 자신이 그에게 동등하지 못한 상대방이라 함을 알았을지라도, 그를 노하게 했고, 심지어는 그의 공의에 도전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가 광야에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으므로 그를 즐겁게 하기 위해 관심을 가져야 할 의무가 있으며, 그가 그들에게 그처럼 큰 긍휼을 보여주셨으므로 감사한 마음으로 그를 즐겁게 해야 할 의무가 있는 바로 그 광야에서 그렇게 행했다. 그들은 그가 노하리라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말하고 행했다. “저희가 그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다”(18절). 그들의 죄는 그 심중에서 시작되었고, 그곳에서 그 죄의 사악성을 이끌어내었다.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었다”고 했다(히 3:10). 이처럼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했고, 하나님이 그들을 참으실 수 있는가 없는가 하고 끝까지 그의 인내를 시험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장 악한 일을 행하도록 만들었다. 그들이 그를 노하게 한 두 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기에 합당하다고 생각지 않으신 것을 원함으로써, 또는 오히려 요구함으로써다. “저희가 저희 탐욕대로 식물을 구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건강에 유익하고 맛있는 음식 만나를 충분히 주셨다. 그는 그들의 믿음을 위해서는, 그가 “파쇄하신” 악어의 머리에서 식물을 주셨다(74:14).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들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그들의 탐욕대로 식물을 얻어야 했다. 그 호화로운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호화롭고 다양한 식물을 가져야 했던 것이다. 우리의 몫에 대해 다투며 육신의 욕망에 탐닉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것은 없다.
(2)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시는 그의 능력을 불신함으로써다. 이는 사실상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고기를 달라고 촉구했다. 그리고 만일 그가 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것이 그들에게 합당치 않음을 그가 아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려 했다(19절). “저희가 하나님을 대적해 말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자들은 그를 대적해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능히 식탁을 준비하시랴?” 하고 말하는 것은, 가장 치욕적인 비방이다. 그들은 만나를 얻었으나 애굽에서처럼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과정을 거쳐 끓이고 굽지 않고서는 식탁을 준비했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는 고기와 생선, 그리고 양념도 있었고(출 16:3; 민 11:5), 고기접시와 과일쟁반이 있었다. 사치는 얼마나 불합리하고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인가! 이 미식가들은 훌륭하게 차려진 식탁을 매우 거대한 것으로 여겼으므로,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광야에서 그들에게 주실 수 있는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모든 생축”이 다 그의 것이다(50:10-11).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그들의 불신은 더해 갔으므로, 그들은 동시에 그가 행하신 것을 당연한 귀결로 인정했다(20절). “저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매, 그들과 그들의 가축이 마셨다.” 부유한 사람이면 행할 수 있는, 광야에서 식탁을 준비하는 것과 땅 위의 가장 위대한 주권자도 행할 수 없는, 반석에서 물을 끌어내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쉬운가? 결코 불신앙은─언제나 터무니없기는 하지만─ 이처럼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바위를 녹여 시내가 되게 하신 그가 또한 떡을 주실 수 있는가? 혹은 떡을 주신 그가 고기 또한 주실 수 있는가?” 전능자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 있겠는가? 일단 자연의 평범한 힘이 탁월해질 때 하나님은 그의 팔을 드러내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주께서 원하시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함이 마땅하다.
3. 하나님은 당연히 그 자극에 분노하셨고, 그들을 매우 불쾌하게 여기셨다(21절). “여호와께서 듣고 노하시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불만과 불신을 아시는 증인이다. 그는 그것을 들으시고 매우 언짢아하신다. 이 때문에,“야곱을 향하여 노가 맹렬하였다.” 즉,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사르게 하셨다”(민 11:1). 또는, 이것은 이스라엘을 향해 불붙는 하나님 진노의 불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친히 불이 되신다. 하나님의 긍휼의 능력을 믿지 않으려는 자들은 그의 분노의 능력을 맛볼 것이며, “하나님의 손아귀에 빠지는 것은 두려운 일이로다” 하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읽을 수 있다.
(1) 왜 하나님은 이처럼 그 자극에 노하셨는가?(22절) 그 이유는 이것에 의해,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아니한다”는 사실이 나타난 “연고”였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 자신에 대해 계시하신 것을 신용하지 않았다. 즉,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께 맡기거나 그에게 나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시작한 “그 구원을 의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처럼 그 과정을 탐구해 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전히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양식을 위해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하는 마음을 자신들 안에서 발견할 수 없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구원을 자기들의 지극한 축복으로 의지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의 불신앙을 한결 무겁게 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을 체험했다는 일이다(23, 25절). 그는 그들에게 아래에 있는 땅에서뿐만 아니라, 위에 있는 하늘에서도 자기의 능력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보내주셨다. 즉, “저가”, 궁창을 창조하시고 그것이 존재하도록 명하신 자로서 “위의 궁창을 명하셨다.” 그는 하늘을 마음대로 이용하시는 분이시다. 하늘은 비를 내려 땅에서 열매를 내는 곡식에 기여한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명하셨을 때는, 양식을 비같이 땅에다 쏟았다. 그러므로 그것을 “하늘 양식”이라 부르고 있다. 따라서 하늘은 땅 없이도 일할 수 있으나, 땅은 하늘 없이는 일할 수 없다. 궁창의 열쇠를 지니신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셨다.” 그리고 그것은 “창문을 여는 것”에 불과하나, 큰 축복으로서 언급되어 있다(말 3:10). 믿음과 기도로써 묻고 구하고 두드리는 자들에게는 언젠가 이 문들이 열릴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의 하나님은 그를 청하는 모든 자들에게 긍휼이 풍성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훌륭한 집을 지니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 집을 열어놓고 계신다. 그가 그들에게 매우 친절하시어 “만나를 비같이 내려 먹이셨을 때, 즉 각자에게 충분한 실속 있는 양식을 매일 알맞게 먹이셨을 때, 그들이 그를 불신하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언짢게 여기심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이 천사의 떡”, 즉 천사들이 음식을 먹을 경우가 있다면, 그들도 감사하며 먹을 정도의 떡을 “먹었다.”
또는 그 만나는 천사들을 통해 주어졌고(갈대아역에 적혀 있는 것처럼), 천사들의 거처에서 내려왔다. 각 사람은, 심지어 이스라엘의 가장 작은 아이도(난외에 적혀 있는 것처럼) “권세있는 자의 떡을 먹었다.” 위가 가장 약한 사람도 소화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영양이 풍부했으므로, 강한 자들에게 강한 힘을 주는 양식이 되었다. 그리고 매우 훌륭한 그 양식을 인색하게 분배하지는 않았다. 또 그 할당량이 감소되지도 않았다. 즉, “하나님이 식물을 충족히 주셨던” 것이다. 그들이 조금밖에 모으지 못했다면,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었으며, 그러할지라도 그들에게는 부족함이 없었다(출 16:18). 하나님께서는 일용할 양식을 우리를 위해 만들어주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이 비록 이처럼 큰 경이는 아닐지라도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래 계속 만들어오셨으며, 긍휼 또한 그에 못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불신한다는 것은 큰 죄다.
(2) 그는 그들이 지나치게 탐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허락해 주심으로써, 그러한 죄악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셨다.
① 그들은 그의 능력을 의심했는가? 그는 그가 “광야에서 능히 식탁을 준비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현저히 깨닫게 해주셨다. 비록 바람이 그 원하는 대로 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는 바람을 통해 양식을 운반하는 조달자로 삼을 수 있다(26절). “저가 동풍으로, 그리고 남풍으로 일게 하신다.” 즉, 저가 동남풍이나 동풍으로 하여금 먼저 그 방향에서 메추라기들을 끌어오도록 하신 다음, 남풍으로 하여금 그쪽에서 더 많이 끌어오도록 하신다. 그리하여 저가, 이스라엘의 가장 비천한 자도 충분히 먹을 수 있도록, “저희에게 고기”와 가장 맛있는 종류의 것, 즉 짐승고기가 아닌 들의 새고기를 “티끌같이 내리시니”, 곧 “바다 모래같이” 풍성히 내리셨다(27절). 그들은 그 고기를 위해 비용을 들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산에서 그것을 가져오느라고 수고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이 그것을 “진중에 떨어지게 하사, 그 거처에 둘리셨기” 때문이다(28절).
우리는 그 이야기를 민수기 11장 31-32절에서 읽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악하며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에게까지도 얼마나 선하신가를, 그리고 얼마나 놀랍게 그의 선하심으로 저들의 악을 압도하지 않으시는가를 보라. 이처럼 하나님이 하사하시는 선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부조리한가를 보라. 맛있는 음식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의 표적이 아니다.
② 그들은 그의 의를 무시하고, 그들의 뜻한 바를 이룬 것을 자랑했는가? 그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메추라기에 대해 큰 대가를 치르도록 했다. 왜냐하면, 그가 “저희 소욕대로 주셨”을지라도 “저희가 그 욕심에서 떠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29-30절). 그들의 욕구는 만족할 줄을 몰랐다. 그들에게 충족히 주었으나, 그들은 만족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고있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욕심의 본질이다. 그것은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며, 잘해 줄수록 더욱 변덕스러워진다. 탐심에 빠진 자들은 결코 그것에서 떠나지 않는다. 또는, 그것은 하나님의 후하심이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배은망덕한 욕심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만들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만일 그들이 도의심을 갖고 있었다면, 그들은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저희 식물이 아직 그 입에 있을 때에”, 달콤한 사탕처럼 혀 밑에 구르고 있을 때에, “하나님이 저희를 대하여 노를 발하사 저희 중 살찐 자를”, 즉 매우 호사스럽고 매우 대담한 자를 죽이셨다”(31절). 민수기 11장 33-34절을 보라. 그들은 “도살당한 양”처럼 먹었다. 도살자는 가장 살찐 것을 제일 먼저 잡는다. 물론 알맞게 메추라기를 먹고, 그 도를 지나치지 않는 경건하고 만족할 줄 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 정도 있었으리라 추측할 수는 있다. 왜냐하면 그들을 타락시킨 것은 그 식물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욕심이었기 때문이다. 미식가와 관능주의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파멸을 읽도록 하자. 자기들의 배를 신으로 삼는 자들의 마침은 멸망이다(빌 3:19).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킬” 것이며, 그들의 멸망은 더 클 것이다.
4.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긍휼처럼 그들을 개심시키지 못했다. 또 그 목적을 이루지도 못했다(32절). “그럴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범죄하였다”고 말했다. 그들은 이전처럼 하나님과 모세에게 투덜거렸고 논쟁을 벌였다. 비록 하나님이 “노하여 그들을 치셨으나, 오히려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였다”(사 57:17). “저희가 그의 기사를 믿지 아니하였다.” 비록 하나님의 공의의 행적이 그의 긍휼의 행적만큼 그의 능력을 놀랍고 위대하게 증명했을지라도,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경외하도록 만들지 못했고, 그를 그들의 친구로 삼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가를 깨닫도록 만들지도 못했다.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 녹여지거나 그의 심판에 의해 부러지려 하지 않는 자들의 마음은 정말로 완악한 것이다.
5. 그들이 계속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은 계속 진행되었다. 그러나 갑자기 오는 심판이 아니라, 천천히 진행된 다른 종류의 심판이었다. 그는 지금, “저희 중 살찐 자를 죽이시”는 것과 같은 갑작스러운 병이 아니라, 질질 끄는 만성병으로써 그들을 벌하셨다(33절). “하나님이” 광야에서 “저희 날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 저희 해를 두렵게 지내게 하셨도다.” 취소될 수 없는 멸망에 의해, 그들은 광야에서 38년이나 되는 지루한 해를 보내도록 선고받았는데, 이는 실상 저의 날을 헛되이 보낸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햇수 동안에는 한 발짝도 가나안 가까이로 내딛을 수 없었고, 다시 돌아와 미궁에 빠진 것처럼 이리저리 방황했으나, 그들이 가한 일격도 가나안의 정복을 향해 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월을 헛되이 보냈을 뿐만 아니라, 두렵게 지냈다. 즉, 그들의 시체는 광야에 버려져야 하는 운명을 당했고, 거기에서 그들은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하고 모두 죽어버렸던 것이다. 계속 죄를 범하는 자들은 계속 두려움에 빠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날들을 이처럼 헛되고 두렵게 보내야 하는 이유, 즉 우리가 거의 위로를 받지 못하고, 매우 무익한 상태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6. 이러한 책망 아래서, 그들은 회개를 고백했지만, 그 고백은 성실하고 진실된 것은 아니었다.
(1) 그들의 고백은 매우 그럴 듯했다(34-35절). “하나님이 저희를 죽이실 때에”, 즉 저희를 죽이실 것을 선고하실 때에, “저희가 그에게 구하였다.” 즉, 그들은 잘못을 자백했고, 용서를 구했다. 사람이 죽게 되자, 다른 사람은 두려워해, 하나님께 긍휼을 구했으며, 개심해 매우 선하게 될 것을 약속했다. 그때에, “저희가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을 진정으로 하나님 찾기를 원하는 자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비록 이전에는 잊었다 할지라도, 이제 “하나님이 저희의 반석”이시므로 그들이 그에게로 날아가 그 안에 피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또 “지존하신 하나님”이 저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셨으므로 그들이 그에게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저희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행하는 척했다. 환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우리의 반석이시며 우리의 구속자로서 생각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형통할 때는, 우리가 그를 잊기 쉽기 때문이다.
(2) 그들은 이 고백을 진심으로 하지는 않았다(36-37절). “저희가” 마치 그럴 듯한 말로써 그로 하여금 그 선고를 철회하고 그 심판을 취소케 하며, 그 위험이 끝났을 때는 그들의 말을 어길 뜻을 은밀히 품고서, “입으로 그에게 아첨했다.” 즉,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말했다”(렘 3:10). 그들의 모든 고백과 기도와 약속은 고통에 의해 억지로 갖다붙인 것이었다. 그 고백과 기도와 약속이 그에게 그들이 말한 그대로를 의미하지 않았음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햇볕에 녹지 않고 응달에서 얼어버렸다. 그들은 그저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저희 마음이 없으며”, 그 결과로써 나타난 바와 같이, 저희 마음이 그에게 올바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그 언약에 성실치 아니하였음이었다.” 그들의 개심은 진실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꾸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그들은 실상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를 모욕하는 것과 같은 큰 모욕을 그에게 행했다.
7. 여기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을 두렵게 하시고, 부분적으로 수행된 그 심판을 중지하셨다(38-39절). 하나님은 자비하시기 때문에 죄악을 사하시었다. 이 거짓된 회개가 그들의 죄악의 도를 가득 채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을 속이는” 것, 이처럼 그 주된 부분인“값 얼마를 감추는” 것보다(행 5:3) 하나님을 더욱 진노케 할 수 있는 것이 또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오직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이처럼 크게 “죄악을 사하셨다.” 그가 마땅히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멸하시며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하지 않고, 그들이 그 약속된 땅에 들어갈 다른 세대를 일으켜 세울 때까지 그들의 생명을 남겨두셨다. “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사 65:8). 그는 “그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왜냐하면 그는 진노의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그 분을 다 발하지 아니하셨다.” 즉, 그들의 행위대로 보응하시지 않았다. 왜 보응하시지 않았는가? 그것은 그들의 멸망이 하나님에게 어떤 손실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1) 그가 “자비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그들을 멸하고자 하실 때 “그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했으며, 그는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하고 말씀하셨다(호 11:8).
(2) 비록 그가 반석이심을 그들이 바로 기억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는 “저희가 육체뿐임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악으로 기울어지기 쉬운 그들의 부패한 본성을 고려하셨으며, 비록 그것이 실지로 그들의 죄에 대한 변명은 안 되지만, 그들을 아끼시는 마음으로 그것을 실수로 여기셨다(창 6:3 참조). 그는 그들 성품의 연약함과 결점을 고려해 주셨고, 그들을 박멸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가를 생각하셨다. 저희는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이다. 그들은 곧 불려 가버리나 그들이 가버렸을 때, 그것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은 육체이며 바람이다. 따라서 그들은 마땅히 그리고 즉시 가버릴 것이며, 그것은 아무런 손실도 되지 않으리라 주장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주장하셨다. 그 참된 “이유는 하나님이 자비하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