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카탈루냐 독립운동
스페인의 카탈루냐 지역이 스페인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분리주의 운동.
보통 카탈루냐 독립이라 하면 스페인의 카탈루냐 자치지방(autonomous community)만을 대상으로 한다. 극단적인 일부는 같은 카탈루냐어권이자 문화권인 발렌시아 지방과 발레아레스 제도까지 포함한 '대카탈루냐' 분리독립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카탈루냐 자치지방만을 독립 대상으로 못 박고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발렌시아는 카탈루냐어를 쓰는 카탈루냐 문화권이지만 카탈루냐 자치지방와는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입장의 차이가 있다. 근본적인 이유는 경제적 이해관계로, 발렌시아와 발레아레스가 카탈루냐보다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카탈루냐가 독립하려는 이유가 카탈루냐가 낸 세금이 다른 지역을 위해 쓰이는 꼴을 더 이상 못 보겠다는 것이다. 스페인 17개 자치지방을 1인당 GDP 순위로 나열하면 카탈루냐는 4위, 발레아레스는 7위, 발렌시아는 11위다.
2. 역사
2.1. 통합 스페인 이전 시대
이 곳에 처음 문명을 세운건 페니키아인들로 페니키아인들의 도시중 하나인 카르타고의 식민도시로 시작했다. 포에니 전쟁 후엔 로마의 속주가 되었고 게르만 민족의 남하 이후엔 서고트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전역을 정복한 후엔 알안달루스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다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가 이 지역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피레네의 험난한 지형을 방패삼아 이슬람으로부터 왕국을 보호할 변경백(Marca Hispanica)을 설치했는데 이게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카탈루냐라는 정체성의 시초이다. 이들 변경백들은 이슬람 세력이 강할 때는 움추려 있다가 약해질 때는 점차 남하하기를 약 700년간 반복했고 후대에 이르러 이를 레콩키스타라고 불렀다. 또한 이들은 이슬람이란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서로 친목을 다졌는데 이는 혼인동맹을 넘어 혼인을 통한 동군연합으로까지 발전했다. 바르셀로나 백작령의 백작위으로 시작해 아라곤 왕국의 왕위까지 차지한 바르셀로나 가문이 그 예이다. 허나 이렇게 백작으로 시작해 왕작까지 오른 바르셀로나 가문도 그 영화는 영원하지 못하고 1410년 왕가의 대가 끊기면서 왕국에 영향력을 미치던 이웃 카스티야 왕국의 트라스타마라 가문이 바르셀로나 가문의 외손이란 구실로 왕위를 차지한다. 결국 이 사건으로 같은 가문인 카스티야와 어떠한 계기만 발생한다면 언제든 하나의 나라로 합쳐질수 있는 구실이 생겨나게 된다.
아무튼 중세 시절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카탈루냐 지방은 지중해 무역을 통해 괜찮은 부를 쌓을 수 있었고 대서양을 끼고 있던 카스티야나 포르투갈보다 경제적으로 윤택했다. 때문에 오늘날 카탈루냐 사람들은 중세시절에는 자신들이 카스티야보다 잘 살았고, 마드리드는 근세에 와서 부유해진 졸부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2.2. 통합 스페인 왕국
2.2.1. 이사벨 여왕와 페르난도의 동군연합 스페인 왕국
1469년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이사벨 공주(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자(페르난도 2세)가 결혼하게 되는데 이들은 육촌지간이었다. 이사벨 공주와 페르난도 왕자는 1474년과 1479년에 각각 카스티야-레온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국왕에 오르게 된다. 두 왕은 양국의 공동왕이 되고, 두 왕국은 동군연합이 된다. 1492년 마침내 레콩키스타를 완수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한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스페인 왕국을 선포했다. 이 스페인 연합왕국은 두 왕국이 동등하게 연합한 형태로 두 왕국 간의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과 독립성이 유지된 상태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카스티야-레온이 아라곤보다 4배 많은 인구와 영토를 보유하여 국력에서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실권에 있어서 이사벨 여왕의 입김이 더 강했다.
게다가 이사벨 여왕이 나이도 연상이었기 때문에 페르난도는 아내가 살아있는 동안 주눅들어 사는 상황이었다. 공동왕이지만 페르난도는 카스티야-레온에 대해서는 일절 간섭할 수 없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사벨 여왕은 나라의 중대사를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 한 예가 콜럼버스의 신대륙 원정 지원한 일이었다. 이사벨 여왕은 남편과의 상의 없이 카스티야-레온 여왕의 자격으로 단독으로 콜럼버스를 지원했고, 그 결과 이후 아메리카 대륙에 관한 식민지의 권리는 카스티야 왕국 쪽이 보유하게 된다.
카스티야와 아라곤 동군연합의 조건은, 동군연합 자체는 한시적으로 유지되고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자식이 공동왕이 되어서 나라를 하나로 합친다였다. 하지만 이사벨 1세가 딸 후아나 만을 남기고 먼저 사망하면서, 페르난도 1세가 단독 통치하면서 이를 벗어나려는 시도를 한다. 딸 후아나의 왕위계승권을 뭉개고 자신이 카스티야도 독차지하려고 시도하는 한편, 프랑스의 공주와 재혼하고 그 사이에 태어난 자식에게 스페인 땅 전체를 넘기려고 시도한 것인데 이 시도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맞닥뜨린다. 자식이 안 태어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카스티야 의회라거나 후아나와 결혼한 펠리페 1세가 소속한 합스부르크 왕조 등의 반발이 있었고, 결국 페르난도 2세 사후의 왕위는 후아나와 펠리페 1세의 아들 카를로스 1세에게 넘어가게 된다.
2.2.2. 카를로스 1세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국왕 사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로스 1세(카를 5세) (재위 1516년~1556년)가 왕위에 오른다. 일반적으로 카를로스 1세를 통합 스페인 왕국의 첫 국왕으로 본다. 그의 치세를 거치며 스페인은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되어 갔다. 그러나 카를로스 1세가 즉위할 당시 스페인의 분위기는 외국 출신의 새 국왕에 대해 상당히 적대적이었다. 게다가 제위 초기에 카를로스 1세가 장기간 독일에 머물면서 카스티야에서 과중한 전쟁 물자를 징발하자 결국 스페인(주로 카스티야)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독일에 계속 머물고 있던 카를로스 1세는 반란이 크게 확산되자 결국 스페인으로 돌아와 각지의 반란을 무자비하게 토벌한 후 스페인에서 강력한 지배력을 구축하게 된다.
스페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독일을 떠날 때 카를로스 1세는 신성로마제국 통치를 아예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위임했다. 그리고 카를로스 1세 자신은 스페인에 눌러 앉게 된다. 카를로스 1세는 톨레도, 바야돌리드 등 카스티야 지방에 머물면서 그곳을 중심으로 스페인을 통치착취했다. 기본적으로 그의 영토 중 카스티야가 인구와 경제력에서 있어서 가장 컸다. 게다가 카스티야의 아메리카 식민지로부터 엄청난 금이 유입되고 있었다. 때문에 자연스레 카를로스 1세는 카스티야를 그의 통치착취의 중심지로 삼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톨레도는 스페인 국토 정중앙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통치하기에 가장 적합한 지역이기도 했다.
카를로스 1세 시절 카스티야가 소유한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막대한 금은이 쏟아지면서 카스티야의 경제력은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엄청난 부를 누리게 된다. 반면 카탈루냐는 경제적으로 지중해 무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는데, 15~16세기에 걸쳐 오스만 제국이 급부상하며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유럽까지 침공하는 통에 지중해 무역이 거의 마비상태에 이를 정도로 크게 위축되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카스티야의 경제 사정이 좋아지자 카를로스 1세는 카스티야를 집중적으로 털어 전비를 충당했다. 유럽 전역에서 수많은 전쟁을 치루었던 카를로스 1세는 막대한 전쟁 자금이 필요했는데, 카를로스 1세의 영지 중에서 가장 심하게 수탈당한 지역이 카스티야였다. 카스티야 지방은 카를로스 1세 제위 초기에 심각한 반란을 일으켰다가 무참히 진압되었기 때문에 끽소리 못하고 과중한 납세의 부담을 져야만 했다. 이에 비해 카탈루냐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과세 부담을 졌고, 특히 군비 측면에서는 거의 부담을 지지 않았다.
이처럼 카를로스 1세 치하를 거치면서 카스티야가 스페인의 중추가 된 반면, 연합 왕국의 양대 축이었던 카탈루냐는 카를로스 1세가 파견한 부왕이 통치하면서 스페인의 일개 지방이 되어 갔다. 그러나 이러한 통치술은 카를로스 1세가 카스티야를 편애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시 경제력이 우세했던 카스티야를 더 쥐어짜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카를로스 1세는 자신을 플랑드르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2.2.3. 펠리페 2세
카를로스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그의 아들 펠리페 2세(재위 1556년~1598년)는 흔히 유럽 절대왕정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언급된다. 톨레도가 제국의 수도로는 너무 비좁았기 때문에 펠리페 2세는 넓찍한 평야지대이며 당시에는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던 마드리드로 천도를 단행하여 번듯한 새 왕궁을 짓고 제국을 위한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다. 그는 새로 건설된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절대주의 통치를 펼쳤고, 카탈루냐는 이제 스페인 왕국의 한 행정지역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자치권은 유지한 상태였다. 펠리페 2세 이후에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카탈루냐는 자치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2.3. 카탈루냐 반란(수확전쟁)
30년 전쟁 막바지인 1635년, 프랑스-스페인 전쟁이 일어나면서 스페인 제국은 프랑스 왕국과 전쟁을 시작한다. 스페인 중앙정부는 프랑스와 국경과 맞닿은 카탈루냐 지방에 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한 군대를 주둔시키고 현지에서 물자를 징발했다. 이러한 조치는 펠리페 4세의 신임을 받던 명재상 올리바레스 공작 가스파르 데 구스만(Gaspar de Guzmán, Count-Duke of Olivares)에 의해 취해진 것이었다. 청백리 재상 올리바레스는 '공평한 과세' 부과를 핵심적 정책 과제로 추진하고 있었다. 그동안 스페인 제국의 군사 활동에 대한 경제적 부담은 거의 전적으로 카스티야가 짊어졌는데, 올리바레스는 이 문제를 바로잡아 이제는 왕국 전체가 보다 '평등한 군사적 부담'을 지도록 하기 위해 카탈루냐에서도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물자를 징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스페인 군대가 카탈루냐에 주둔하며 물자를 징발하자 카탈루냐 농민들이 이에 불만을 품고 1640년에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것이 카탈루냐 반란(Catalan Revolt, Revolt of Catalonia), 혹은 수확전쟁(Guerra dels Segadors)이다.
농민 반란이 일어나자 제네랄리타드를 이끌던 카탈루냐 귀족 지도자들은 이것을 기회로 아예 프랑스 왕국에 편입되기로 결의하고 프랑스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프랑스군이 카탈루냐로 진주하여 스페인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사태는 점차 묘하게 꼬여갔다. 카탈루냐 귀족들은 프랑스에게 자신들이 그때까지 유지해왔던 봉건적 특권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였으나, 프랑스 재상 리슐리외는 단호히 이를 거절했다. 유럽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중앙집권적 절대왕정을 추구하던 프랑스 왕정에 있어서 자치권이나 봉건적 귀족 특권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프랑스 왕정이 절대왕정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최대의 걸림돌이었던 것은 지방의 봉건 영주들이었다. 프랑스 왕정은 지방 귀족들의 봉건적 특권을 빼았고 그들을 왕권의 통제하에 두기 위해 중앙귀족화시키는 과정에서 지난한 노력과 희생을 치루었다.
한편 카탈루냐에 진주한 프랑스군은 자신들이 카탈루냐를 구해주러 왔다면서 갑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카탈루냐인들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절대왕정을 구축했던 프랑스의 통치 시스템이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통치보다 훨씬 엄격하게 통제된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카탈루냐인들은 점차 프랑스에 대해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또 처음 반란을 일으킨 카탈루냐 농민들의 이해관계는 카탈루냐 귀족 지도자들과는 달랐다. 카탈루냐 정치 지도자들은 봉기한 농민들을 전혀 통제할 수 없었다. 반란이 진행됨에 따라 상황이 엄하게 돌아가는 꼴을 본 카탈루냐 농민들은 점차 칼끝을 귀족 지도자들에게 겨누게 된다.
한편 카탈루냐인들이 점점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프랑스군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도와달라고 해서 도와주러 왔더니 오히려 쌩까는 모습을 본 프랑스군은 크게 실망하여 카탈루냐에서 스페인과 싸우려는 의욕도 상실해갔다. 차차 프랑스군은 수세에 몰렸고 마침내 프랑스 정부는 카탈루냐에서 프랑스군을 철수시켰다. 곧 스페인 중앙군이 바르셀로나를 포위하여 공성전에 들어갔고, 카탈루냐는 결국 스페인 중앙군에 항복했다. 그러나 아직 프랑스-스페인 전쟁 와중이었기 때문에 반란이 진압된 후에도 카탈루냐는 계속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보장받는 등 비교적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
1659년 프랑스-스페인 전쟁이 완전히 끝나고 피레네 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에 의해 피레네 산맥 이북에 있는 스페인 영토가 프랑스에 할양되었고, 피레네 산맥 이북에 있는 카탈루냐의 영토 역시 프랑스로 넘어가게 되었다. 현재 프랑스의 피레네조리앙탈(Pyrénées-Orientales) 지역이 이 때 할양된 카탈루냐의 땅이다. 과거 프랑스에 병합된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피레네조리앙탈 지역 역시 카탈루냐어의 사용을 금지당하고 프랑스어의 사용을 강요당하여 프랑스어 사용지역이 되었다.
2.4.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자치권의 박탈
1700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승하하자 후계자를 두고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필리프 대공(펠리페 5세)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실의 카를 대공(카를 6세)이 서로 합당한 스페인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하게 된다. 프랑스 루이 14세가 재빨리 자신의 손자인 필리프를 스페인에 보내 펠리페 5세에 즉위시켰으나, 영국, 네덜란드, 합스부르크 제국 등이 이에 반발하여 합스부르크의 카를 대공을 옹립하면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1640년의 카탈루냐 반란을 계기로 카탈루냐-발렌시아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대공(카를 6세)을 지지하며 전쟁에 뛰어들었다. 카탈루냐-발렌시아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로부터 그때까지 어느 정도 자치권을 보장받아왔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왕위를 이어받는다면 계속 자치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반면 절대왕정을 추구하는 부르봉 가문이 왕위를 이어받는다면 프랑스 남부 지방처럼 자치권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은 물론이고 카탈루냐어를 금지당하고 중앙정부가 강요하는 프랑스어나 스페인어를 써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한창 전쟁이 진행 중이던 1711년, 카를 대공이 갑작스레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에 즉위하게 되면서 전황이 순식간에 뒤바뀌게 된다. 즉 카를 6세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 열강들이 태도를 바꾸어 부르봉 가문의 펠리페 5세를 스페인 왕으로 차례로 승인하면서 전쟁이 수습단계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카탈루냐는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으며 끝까지 부르봉 왕조의 프랑스-스페인 연합군과 맞서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세력의 차이가 커서 1714년 9월 11일 마침내 바르셀로나가 함락당하며 완전히 진압되었다. 새로 스페인에 들어선 부르봉 왕조는 예상되었던 것처럼 강력한 중앙집권화 정책을 실시했다. 1716년에 새로운 국가기본법(Decretos de Nueva Planta)이 입법되어 카탈루냐는 최소한의 자치권마저 완전히 박탈당하고 다른 주와 완전히 동일한 정치적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한편 전쟁 당시 바르셀로나 시장으로서 바르셀로나 공방전에서 지휘관으로 활동한 라파엘 카자노바(Rafael Casanova i Comes)는 바로셀로나에 동상까지 세워졌으나 오늘날에도 평가가 크게 엇갈리는 인물이다. 일단 다수의 카탈루냐인들은 그를 최고의 애국자 중 한 사람으로 추앙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카자노바는 친 오스트리아 인물로 단지 외세와 결탁한 인물일 뿐 카탈루냐의 애국자는 아니라고 비판하는 카탈루냐인들도 있다.
현재 카탈루냐의 독립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바르셀로나 공방전에서 패한 1714년이 카탈루냐가 스페인에 합병된 때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현재 카탈루냐의 독립을 다루는 전세계 언론을 통해 널리 보도되고 있다. 하지만 바깥에서 보자면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직전까지도 스페인 왕국의 일부였던 카탈루냐가 왕위계승전쟁 시점에서 잠깐 외부세력과 결탁했다고 이전까지 독립국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바르셀로나 백작이 변경백으로 웅거한 시점에서 카탈루냐 세력이 큰 세력권을 형성한 아라곤 왕국까지가 카탈루냐가 독립국으로 존재했던 시기이며,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국왕의 연합왕국 시기 정도가 어느 정도 자치권을 보유한 연합국의 일원이라 할 수 있는 시점의 한계다. 카를로스 1세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들어선 후 펠리페 2세가 중앙집권화를 이룬 시점에서 카탈루냐의 독립적 지위는 완전히 사라졌다고 간주된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카를 대공이 손을 뗀 후에는 카탈루냐 지도부도 카탈루냐만으로 부르봉 왕조의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에 맞서 승리하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고 실현가능성도 없었다. 카를 대공이 스페인의 왕이 되었어도 카탈루냐는 봉건영주들이 스페인이라는 국가 안에서 여전히 자치권을 가지는 형태나 카를 대공이 펠리페 공과 스페인을 분할하여 옛 아라곤 왕국을 부활하는 형식으로 카탈루냐의 왕이 되거나 오스트리아에 편입되었을 것이다. 결국 카를 대공이 이겨봤자 카탈루냐는 오스트리아령 카탈루냐가 된다. 수확전쟁에서 프랑스가 이겼다면 프랑스령 카탈루냐가 되었을 것처럼 말이다.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드 국왕의 연합왕국 이후 카탈루냐의 저항세력들이 독립국으로 존재하겠다 하지 않고 자치권을 달라고 요구했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전부터 존재한 독립국가의 면모가 아니라 특정한 국가 내부에 있는 자유도시나 봉건영주가 자기 권리를 요구하는 모습이다. 실제로 유럽 역사에서 이런 형태로 독립국 취급을 받은 나라는 없다. 이런 자치권이 있는 봉건제후들이 자치권을 잃고 중앙집권국가의 일부 지방으로 변하는 것이 유럽 중앙집권 국가의 탄생과정으로, 프랑스가 대표적이고 스페인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이 늦어져서 현대 막바지에서야 이뤄진 국가가 독일과 이탈리아이며, 재편과정에서 자력으로 독립해서 살아남은 대표적인 지역이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있는 플랑드르, 그리고 스위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