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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 이야기

아즈텍(Aztec) 문명

작성자관운|작성시간18.03.03|조회수1,926 목록 댓글 0


아즈텍(Aztec) 문명

 

 

 

 

 

 







 

 

라틴아메리카의 멕시코 중부 부근에 존재했던 치치멕족의 국가이다. 아스텍 혹은 아스테카(스페인어 Azteca)라고도 한다. 톨텍 문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6세기에 에스파냐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아즈텍 제국은 후대에 유럽인들이 부른 이름이다. 정확히 말하면 13세기 경 북쪽에서 현 멕시코 고원 쪽으로 이주해 온 종족인 메히카인이 텍스코코 호반의 섬에 도시 테노치티틀란을 세웠고, 점차 강성해진 테노치티틀란이 다른 도시인 텍스코코, 틀라코판(혹은 타쿠바)과 삼각 군사동맹을 맺었고 그들의 말로 '에슈카 틀라톨로얀'(excan tlatoloyan)라고 불렀다. 이 삼각동맹이 주변 지역의 도시들을 모두 군사력으로 제압하고 조공을 받는 지배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스페인이 쳐들어오는 시점에도 이 삼각동맹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으나, 그중에서 특히 테노치티틀란이 주도적 위치를 차지했으므로 이를 아즈텍 제국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아즈텍에는 인신공양 전통이 있었는데 이에 사용할 제물을 위하여 틀락스칼텍을 비롯한 다른 원주민 부족을 강압적으로 지배하였으며, 원주민 부족의 반란을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진압할 정도로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인구는 500~600만에 불과했으나 아즈텍의 중추였던 대도시 테노치티틀란(Tenochititlan)의 인구가 약 15~30만 명인데, 이는 당시 유럽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거대한 규모였다. 그 당시 런던이나 파리는 5~10만 명이라고 한다.

 

스파르타 다음으로 두 번째로 모든 자유민에게 의무교육을 실행한 국가이기도 하다. 물론 말만 제국이지 사실은 수많은 도시국가들로부터 조공만 받고 내정은 일제 간섭안하는 도시국가들의 군집인지라 행정력이 닿는 유일한 직할지 수도 테노치티틀란의 시민들(노예는 제외했다.)들에 한에서였으나, 그래도 모든 자유민에게 의무교육을 실시한 건 상당히 대단한 것이다. 교육열이 뛰어났던 동아시아 유교권 국가들도 의무교육을 제공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후 1500년대 초반에 에르난 코르테스의 공격으로 인하여 쇠락하였고 결국 불과 수년 만에 에스파냐 침략자들과 그들이 선동한 다른 중미계 부족들의 공격으로 멸망해 버렸다. 왜 이 거대한 제국이 그리도 쉽게 망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지만, 에스파냐의 총과 말로 대표되는 강한 군사력과 주변 부족들의 적의, 전염병의 유행 정도로 요약된다. 사실 인신공양도 전술한 원인 못지 않았다. 하지만 아즈텍이 몰락한 제일 큰 원인은 전염병 때문이었다. 원두증 바이러스(monkeypox, 15111512), 단핵구증가증(mononucleosis, 15451548), 그리고 황열병(15761581)으로 인해 인구의 75%가 죽어나갔다. 당시에는 총은 강력하지만 효율적인 무기는 될 수 없었고, 숫자에서도 스페인 측이 훨씬 열세였다. 의외로 총은 등장 당시에는 임팩트는 컸지만, 워낙 원시적인 수준의 물건이라서 별로 쓸 만한 물건은 못 되었다. 가령 조총으로 무장하고서도 외려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과 더불어 조선 군대가 보유한 우수한 대포와 해군에 발리는 바람에 조선 전역을 초토화시켜놓고도 끝끝내 임진왜란에서 패배한 일본이나, 총으로 무장한 정예부대인 스트렐치가 있었는데도 창기병인 윙드 후사르가 주축이 된 폴란드에 발린 러시아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에스파냐의 침공 당시에 아즈텍의 동맹 도시는 2곳이 전부였고 나머지 중소규모 도시들은 인신공양에 저항하던 상황이었으며, 에스파냐의 지원이 시작되자 아즈텍을 공격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났다. 특히 대표적인 아즈텍의 적대 세력이었던 틀락스칼텍인들은 아즈텍 멸망 이후에도 타 부족들보다 좋은 대우를 받게 되었다. , 엄밀하게 말하면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들은 총과 말을 비롯한 상징적 임팩트가 컸고, 콜롬버스 이전의 중남미 현지 경쟁 세력들 사이 외교적 역학 관계를 뒤에서 조종한 것이다. 아즈텍 제국의 멸망 자체는 다른 토착 문명들 손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진 편에 더 가깝다. 이 이후로도 스페인 세력이 나머지 중남미 일대를 근대적 의미로의 식민지로 평정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도만 보면 스페인 제국의 세력과 땅이 엄청나게 커 보이지만, 이 중 많은 지역은 일차적인 '정복'이 이루어진 다음에도 수백 년을 자기들 할 거 하면서 제국의 통치권은 실질적으로 점과 선에 가까웠다. 중남미 토착 문명의 복속과 멸망의 초석을 놓으며 큰 흐름을 주도한 건 콩키스타도르들과 그 뒤에 있는 스페인이었지만, 전근대적 기술력의 한계로 인하여 스페인 정복 후에도 1500년대~1600년대를 통틀어 독자적인 원주민 세력의 자체적인 영향력은 상당히 유지 되었고, 자연스럽게 무늬만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 내에서 원주민 세력들이 따로 따로 서로 항쟁하고 경쟁하는 구도는 오래 지속됐다.

 

고도의 천문학적 지식과 문자 사용, 대규모 도시, 무상 의무교육 등 나름대로 고도의 문명을 세웠음에도 인신공양, 식인등 상당히 야만적인 풍습들 탓에 대중문화에서 야만인의 대표주자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한편 아메리카 원주민의 문명이 다들 그렇듯이 15세기에 최전성기를 누리던 아즈텍을 원시 문명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당시 유럽과 중국 등의 유라시아 세계에 비해 아즈텍의 문명이 낙후되어 있었지만, 호수 위에 도시를 건설하고 농사를 지어 15~30만 명을 부양했다거나 고대 이집트 수준의 천문학 역법을 보유하고 있었다거나 하는 점에서는 원시적이라고 불릴 이유가 전혀 없다.

 

정글에 둘러싸인 도시국가적인 모습, 주변국에 대한 지배 형태나, 잔혹한 인신공양 등 고대 중국의 상나라와 유사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물론 시간, 공간적으로 문화적 연결이 있었다기 보다는 '비슷한 환경'이었기 때문에 '비슷한 문화'가 나타난 것으로 본다.

 

 

2. 아즈텍이 에스파냐인들에게 정복된 이유

 

 

아즈텍의 패배 원인으로 흔히 거론되는 것중 하나가 천연두 등의 전염병이지만, 에스파냐의 정복은 '전염병 등이 문제가 될 정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한 전염병은 정복 과정에서가 아니라 정복 이후 인디오들의 저항 역량을 약화시킨 요인이었다. 에스파냐인들을 케찰코아틀로 인정해서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사실과 다르다. 아즈텍인들은 에스파냐인들이 케찰코아틀을 자처하기 전에는 그들을 케찰코아틀로 부르지 않았고, 그 뒤에도 콩키스타도르들의 탐욕스러움 때문에 그들이 신이 아니라는 것을 곧 인식했다. 무엇보다도 아즈텍인들은 에스파냐인들의 공격에 맞서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아즈텍이 패배한 주요한 원인은 전투 능력에서의 차이였다. 아즈텍에도 흔히 '전멸 전쟁'이라고 부르는, 상대방의 도시를 완전히 말살시키는 방식의 전쟁은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전쟁은 그다지 흔하지 않았고, 주로 아즈텍의 지배 체제가 확립되기 전에 벌어졌다. 따라서 에스파냐인들과의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아즈텍의 무기 체계와 전술 등은 '꽃 전쟁(La guerra de las flores)'이라고 부르는, 상대방을 죽이기보다 부상을 입혀서 포로로 잡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에 특화된 상태였다. 촉이 뭉툭한 화살을 쏘고, 마카후이틀(Macahuitl)이라 불리는 석제 무기의 흑요석 날을 빼놓는 식으로...괜히 죽이는 것보다 공양을 바치든 노동력을 얻건 먹든 간에 포로로 잡는 쪽이 훨씬 좋았다. 덕분에 아즈텍의 무기는 근접전용 무기건 발사무기건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기보다 부상을 입히는 데 적합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갑옷을 받쳐입은 에스파냐인들을 상대하는 데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아즈텍인들도 바보는 아니었으므로 에스파냐인들과 싸울 때는 '꽃 전쟁'처럼 포로로 잡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았으며, 에스파냐인들에게서 노획한 검을 사용하는 등의 노력은 했다. 하지만 새로운 적과의 싸움에 적합한 무기와 전술을 개발하고 훈련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특히 아즈텍인들은 에스파냐의 기병에 맞설 효과적인 방법을 찾지 못했으며, 게다가 지휘관이 사망하면 전의를 상실하고 흩어지곤 했다. 따라서 에스파냐인들은 수적으로 압도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도 기병 돌격 등으로 아즈텍인의 대열을 무너뜨리고 지휘관을 골라 죽임으로써 비교적 쉽게 승리를 거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아즈텍 군대의 지휘관들은 각종 꽃과 새 깃털로 다른 전사들보다 화려하게 치장한 경우가 많아 찾아 죽이기가 쉬웠다. 아니, 대열을 무너뜨릴 건덕지조차 없는 게 에스파냐인들은 멀리서 화승총이랑 쇠뇌로 저격해서 지휘관을 사살하면 그것 하나만으로 전투는 종료되었다.

 

반면 코르테스의 에스파냐 병사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국토 회복 운동, 즉 이슬람 교도들과의 오랜 전쟁을 통해서 단련된,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정예병들이었다. 당시 상대적으로 이슬람권에 비해 열세였던 유럽 기독교 사회에서 유일하게 우세를 보인 지역이 이베리아 반도였다. 에스파냐인들은 빠른 속도로 상대편을 죽이기에 알맞은 검과 검술을 갖추고 있었고, 수적 열세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실력과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당시 유럽은 아즈텍에 비해 기술적으로 크게 앞서 있었으므로 화약이나 조립식 전함과 같은 무기를 동원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들은 단지 유럽에서 가져온 무기를 사용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현지에서 재료를 모아서 화약과 포탄을 제조했고, 호수에 띄울 조립식 전함 역시 우호적인 현지 원주민들의 협력 하에 직접 제작한 것이었다. 틀락스칼라에서는 원주민들로부터 구리를 공급받아 자체적으로 화살촉을 제작하기도 했다.

 

또한 치명적인 것은 바로 아즈텍에는 금속제 무기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마카위틀(Macahuitl)'이라고 불리는 흑요석 검으로, 나무 몽둥이에 날카로운 흑요석 날을 여러 개 박아넣은 무기였다. 이 무기는 금속제 갑옷이 아닌 일반적인 직물이나 가죽, 그리고 맨살에는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했으나 에스파냐인들의 갑옷에는 의미가 없었고 이는 다른 흑요석 무기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찬가지로 금속제 갑옷도 있을 리 없었다. 아즈텍의 갑옷은 솜을 넣은 두꺼운 누비옷 수준이었고, 에스파냐인들도 나중에는 무거운 강철 갑옷 대신 아즈텍 방식의 갑옷을 종종 입게 된다. 금속제 갑옷보다 가벼워서 활동하기 편한 데다가, 원주민들의 무기를 막아내는 데는 그 정도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에스파냐 군인들은 금속제 도검과 쇠뇌는 물론이고 심지어 화약을 사용하는 총이나 대포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러니 아예 화력 면에서 아예 게임 자체가 되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인신공양 관습과 과도한 공물 요구 탓에 제국의 지배를 받던 인근 도시국가들과 부족들을 핍박했던 것도 영향이 컸다. 인근 원주민들의 도시국가들과 부족들은 아즈텍에게 너무나 핍박 받고 살아 아즈텍이라면 치를 떨며 증오한 터라 에스파냐가 본격적으로 아즈텍 정벌에 나서자 자발적으로 에스파냐와 동맹을 맺고, 꽤 큰 규모의 병력까지 제공했다. 쉽게 말해서 인근 도시들과 부족들을 핍박하니 그들이 도와주기는커녕 멸망하라고 부추긴 것. 아무리 화력에 무기/갑주가 좋아도 에스파냐인들만으로는 무리 또는 굉장히 힘들었을 전쟁이 원주민들 덕택에 유리해진 것.

 

특히 제물 대상자들의 스페인 정복자들에 대한 지지가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들에게 스페인 정복자들은 자신들이 제물이 되는 것을 막아줄 유일한 사람들이였기 때문이다. 특히 그 대표격인 틀락스칼텍인들은 슬픔의 밤에서 에르난 코르테스가 탈탈 털려서 도주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코르테스를 도운 보답으로 영토 보존, 자치권, 세금 면제, 아즈텍 영토 할양 등의 혜택을 약속받았고, 이 약속은 스페인이 물러날 때까지 지켜졌다. 추가로 코르테스는 끝까지 자신을 도운 틀락스칼텍인들에게 스페인에서 가져온 돼지 수십 마리를 선물로 주고 잠시 스페인에 다녀왔는데 그 사이에 돼지가 3만 마리에 달할 정도로 크게 증가했다. 물량과 동원 전력의 측면으로 보면 사실 코르테스의 아즈텍 정복은 틀락스칼텍인들 주축으로 한 다양한 반아즈텍 동맹군의 업적에 가깝고, 이 중에서 스페인 세력은 분명히 주도적인 지도 세력이긴 했지만 머릿수로는 훨씬 더 많은 반아즈텍 토착 협조 세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당장 테노치티틀란 공방전 자체도 스페인인들은 2천 명도 안 되는 규모였지만 텍스코코, 틀락스칼텍, 오토미 등의 원주민 동맹군이 주력이라서 이들을 합하면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5만 정도 규모의 아즈텍 방어군을 압도할 수 있었다.

 

아즈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은 25만 명이 살던 초거대 도시로, 호수 속에 있었던 자연요새였다. 게다가 테노치티틀란의 25만 명의 시민들은 유사시 전부 전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에스파냐인들이 주변 원주민 도시들과 군사 협력을 하고 조립식 전함을 동원해 호수를 장악해서 한 번에 도시에 갇히게 되자, 호수는 오히려 아즈텍인들을 봉쇄하는 치명적인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텍스코코 호수는 석회수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본래 마실 수 없는데, 고립된 상황 속에서 이 물을 마시게 된 아즈텍인들은 병이 들어 더욱 위기에 몰렸다. 고립된 상황과 석회 성분이 많은 호수는 전염병의 대유행도 불러왔다.

 

결국 1521, 에스파냐인들과 원주민 동맹군이 총공격을 했고 아즈텍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그들의 주도면밀한 공격을 당해내지 못해 테노치티틀란이 함락되어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이때 원주민 동맹군은 아즈텍에 대한 원한이 단단히 쌓여 있었던지라 에스파냐인들보다 더 잔혹하게 아즈텍인들을 학살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아즈텍인들이 학살당한 것은 아니고 항복한 사람들은 용서받았고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저항한 사람들만 학살되었다.

 

항복한 아즈텍인 중에서 귀족이자 아즈텍 군사령관인 틀라쿳신의 경우 아즈텍이 멸망하고 나선 바로 친스페인 인사가 되어 멕시코 시티를 재건하는 직책까지 맡았고 이를 잘 수행해내어 에스파냐 총독에게서 작위를 받고 상당한 수의 하인과 땅, 고급 주택을 보유한 고위인사가 되었다. 모테소쿠마 2세의 딸인 아즈텍 공주 테쿠이츠폿신도,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코르테스의 배려로 에스파냐인 장교 알론소 데 그라도의 아내가 되어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다.

 

 

아즈텍의 경제

 

 

아즈텍에서는 지역마다 다른 통화가 사용되었다. 물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본 화폐단위는 카카오이다.

 

 

토끼: 카카오 30

 

칠면조 알: 카카오 3

 

칠면조: 카카오 100

 

소녀: 카카오 500-700

 

0.62kg의 금괴: 카카오 250

 

 

 

카카오는 밀납이나 점토, 야생 카카오 아종 등으로 위조화폐를 만들 정도로 귀중하였다. 요즘의 물가 가치로 환산해보면 편차가 꽤 심하다. 현대의 인신매매는 범죄행위이므로 소녀를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고, 칠면조 알을 기준으로 하면 작은 토끼 1마리에 2만 원, 칠면조 알은 2천 원, 소녀는 40만 원, 0.62kg의 금은 20만 원이 되는데 반면 금을 기준으로 하면 작은 토끼 1마리에 500만원, 칠면조 알은 50만원, 소녀는 8,000만원, 0.62kg의 금은 4,000만원인 셈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과거 금값에 비해 지금 금값이 훨씬 비쌀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사치품, 치장, 제사 같은 경우에만 활용 되었고, 오늘날엔 온갖 전자 제품에 대부분 금이 소량이라도 들어가며, 옛날부터 금은 계속해서 채취해왔기 때문에 공급이 줄어든 것도 한몫 한다. 게다가 멕시코 지역에서는 그때 당시에만 금광이 많았다.

 

더군다나 신대륙 문명에서는 구대륙처럼 금이나 은이 화폐로 쓰인 사례가 전무했다. 그나마 잉카문명에서는 금은 태양과 태양신을 상징하는 금속, 은은 달과 달의 신을 상징하는 금속이여서 종교적 측면에서 매우 중시해서 특권계층은 온갖 금은 장신구들을 두르면서 왕과 귀족임을 알리는 증표로 쓰이는등 계급체계에 깊이 관여한 매우 중대하게 여겨지던 금속이였으나 메소아메리카에서는 그냥 자연에 있는 금속1 이었을 뿐이다. 메소아메리카에서 구대륙 문명의 금은의 위상을 차지한것은 비취석과 터키석, 케찰새의 깃털이였다. 결국 당시 메소아메리카의 금의 가치를 현재 금시세를 대입하는것은 넌센스라는것이다.

 

다른 화폐로는 카치틀리(quachtli)라고 불리는 면직물이 있었으며 테노치티틀란의 일반인들은 1년에 20개의 면직물을 소비할 여력을 가지고 있었다. 카치틀리 1필은 카카오 65개의 가치가 있었다.

 

아즈텍 인들은 시장(티안키스)에 가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매일 6만 명이 틀라텔롤코라는 곳의 큰 시장에 갔는데, 한 에스파냐의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시장에 가는 것과 천당에 가는 것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면, 대개의 아즈텍 부인들은 천당을 고른다. 그러나 먼저 천당에서 시장에 갈 수 있는지 물을 것이다."

 

 

강을 통해서 물자가 오가고 상인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를 했으며 아즈텍의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5일장이 섰다. 그만큼 귀족들과 왕족의 소비력이 막강했으며 새의 깃털과 재규어의 가죽, 카카오와 황금 해안지역에서 가져온 굴, 거북, 가재등 온갖 물자들이 몰려들었으며 밀수가 이루어졌다.

 

아즈텍에 바퀴가 있었는지 여부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거리지만, 대체로 바퀴가 물류 수송에 커다란 역할을 하진 않았다는 점엔 동의하는 편이다. 수도 테노치티틀란부터가 운하도시였고, 물류에서 카누가 차지하는 부분은 현대의 자동차 그 이상이었다. 아즈텍에선 상인의 카누를 부수는 것은 전쟁을 의미하는 행위였다. 실제 바퀴 유물도 아이들 장난감 같은 형태로만 발견되고 있다.

 

 

서양문명에서 귀족으로 불리는 계층인 지도자 층을 아즈텍에선 '피필틴'(Pipiltin)으로 불렀다. 이들의 지위는 상속되며 힌두교의 브라만 계급처럼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고위직을 담당했으며 공무원, 제사장, 대상인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하는 전문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유럽의 대학과 같은 고등 교육기관인 '칼메칵'(calmecac)을 운용하였으며 이곳에서 제례, 전쟁 수행, 행정 기술과 같은 실무 능력과 고위층으로서 요구되는 사교 예절에 대해서 배웠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교육기관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피필틴들뿐이었다.

 

일본의 다이묘처럼 피필틴들은 행정 업무에 대한 보상으로 일정한 크기의 봉토를 하사받았는데 이를 '필랄리'(pillali)라고 불렀다. 이 봉토는 아즈텍 사회에서 실질적인 농노 계층인 '마예케'(mayeque)들이 운영하였다. 마지막으로 피필틴들이 정부로부터 받는 가장 큰 특권은 바로 조세의 완전 면제였다.

 

 

 

사회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농민, 장인 그리고 소수의 상인들로 구성된 이들을 마세우알틴(macehualtin)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자신들의 소득의 일부를 국가에게 바쳐야 하는 의무를 지닌 일종의 신민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주로 마을 규모의 공동체 경제 단위를 구성하며 살았는데 이를 '칼풀리'라고 불렀다. 칼풀리는 일종의 지연과 혈연으로 묶인 집단을 말하며 각 칼풀리는 공동으로 땅을 소유하고 이를 후대의 구성원에게 물려주었다.

 

이런 칼풀리를 운영하기 위한 마세우알틴 계급의 교육을 위한 교육기관이 따로 존재하였는데 이를 '텔포치칼리'(telpochcalli)라고 불렀다. 이 교육기관은 기초적인 종교 신앙과 전쟁에서 징집병의 역할을 수행할 마세우알틴들의 전투 교육, 그리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전수했다.

 

 

테쿠틀리, 테칼레케, 칼풀레케

 

 

마세우알틴들의 사회체계를 결정하는 칼풀리는 그들 사이에서 지배와 피지배 계층을 나누기도 하였다. 칼풀리를 지도하고 법적, 경제적 책임을 지는 이들을 '테쿠틀리'(techutli)라고 불렀으며 칼풀리 내에서 나오는 일정량의 생산물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마세우알틴들은 이 테쿠틀리를 통해서 중앙에 세를 납부하였는데, 자신이 속한 칼풀리에게 세수를 바치는 이들은 '테칼레케'(tecaleqe)라고 불렀으며 틀라토아니(아즈텍 사회의 종교체계)에게 세수를 답부하는 이들은 '칼풀레케'(calpuleqe)라고 불렀다. 칼풀리라고도 불리는 이 사회 체계는 아즈텍 사회 체계 전체를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노예 계급 / 탈르코틴, 마예케

 

 

노예로 번역되는 아즈텍의 노예계급을 탈르코틴, 또는 마예케라고 불렀다. 이들은 정복한 도시의 공물로서 끌려오거나 채무관계가 얽혀있는 경우 빚을 갚을 때까지 노예로 삼았는데, 일을 태만히 하면 종교적 제물 혹은 식용으로 팔아 버리기도 했다.

 

자유민의 경우 채무를 불이행 하거나 죄를 지을 경우, 일차적으로 벌금을 납부하였고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노예신분으로 편입되었다. 만약 여기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위에서 언급했듯이 제물로 바쳐졌다. 하지만 노예들도 (성실하게 살 경우에 한해서지만) 개인의 일상생활에는 전혀 제약을 받지 않았으며, 결혼하거나 돈을 모아서 스스로 자유를 사는 것도 가능했다. 심지어 노예가 노예를 소유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주인이 자신을 학대한다고 느꼈을 경우 지역 내 특정 신전으로 도망치면 그 자리에서 해방을 인정받을 수도 있었다 한다.

 

 

계급간의 사회 이동

 

 

아즈텍의 계급 사회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근대적인 국가들의 딱딱한 그것과는 매우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아즈텍의 계급은 고정된 것이 아닌 자유롭게(물론 그에 상응하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넘나들 수 있었으며 이 벽을 가장 쉽게 넘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전쟁이었다.

 

사회 지도층이자 귀족인 피필틴의 경우에는 전공을 세우거나 포로를 잡아오는 수에 따라서 더 많은 봉토를 선사받았다(이는 아래에 설명된 꽃 전쟁과도 관련이 있다). 평민계급인 마세우알틴도 피필틴들의 무공에 버금가는 능력을 보여주면 피필틴의 자리에도 오를 수 있었으며, 그의 자녀도 피필틴 계급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노예 신분인 틀라코틴의 경우에는 전투에 나가서 공을 세우면 자유민이 되었는데, 이를 재규어 전사나 독수리 전사라 불렀다. 오늘날로 따지면 장교에 해당하는 자유민이였다. 이 중에서 재규어 전사는 복장이 특이했는데 재규어의 가죽을 조각으로 절단내지 않고 통짜로 벗겨서 그걸 그대로 입고 다녔다. 재규어의 입 부분에 얼굴을 내놓고...여러 모로 유라시아의 노예와는 개념이 좀 많이 다르다.

 

아즈텍 사회의 법률은 굉장히 엄격하였고, 계급 간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진행되었다. 피필틴의 경우에는 법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처벌을 통해서 마세우알틴으로 강등될 수 있었으며 심각한 경우에는 틀라코틴으로 더 강등시키거나 아예 제물로 바쳐버리는 경우까지 있었다.

 

이러한 계급 간 이동은 다른 메소 아메리카 국가들과는 다른 아즈텍 사회의 경쟁력 중 하나였으나 마지막 황제였던 몬테수마 2세가 제위 관련된 문제로 큰 곤혹을 치른 후 계급간 이동을 상당히 경직되게 되었으며 특히 재규어 전사와 독수리 전사를 폐지하면서 국방력에 심각한 문제를 안기게 되었다.

 

 

꽃 전쟁

 

 

아즈텍의 전쟁 방식으로 대표적인 것은 '꽃 전쟁'이다. 꽃 전쟁은 이후 서구 역사가가 붙인 이름인데, 서로를 죽이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포로로 잡기 위한 전쟁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아름다운 이름과 달리 실상은 상당히 추악한데, 이 전쟁이 사람을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아 이후 인신공양을 위한 용도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아즈텍제국은 초기에 제국을 건설하면서 저항하는 여러 도시민들을 완전히 섬멸시키고 도시 자체를 말살시키는 일반적인 '전멸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이러한 전멸 전쟁은 당연히 아즈텍인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에서는 우세한 세력을 중심으로 한 봉건제도로 뭉치거나, 동아시아식 조공제도 형태로 통해서 충돌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갈만 하지만 아래에서 서술할 인육 문제 때문에 평화적인 외교 관계가 성립되기도 힘든 상황이였다. 결국 아즈텍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쟁으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해야 했지만, 대규모 원정은 부담되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부담이 적게 드는 의례화된 전쟁으로 아즈텍 제국의 힘을 과시하면서 동시에 인육도 확보하는 방법을 선택하고 그것이 바로 '꽃 전쟁'이다. 아즈텍 제국은 이 꽃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상당히 독특한 제도(?)를 두었다. 귀족이나 평민 계층에서 상업에 종사하며 주변 지리에 정통한 자를 뽑아서 일종의 외교관인 '포치테카'(pochtechah)를 만들었다.

 

이 포치테카들은 아즈텍의 속주나 주변국에 일종의 외교사절로 파견되어 일하였으나 실상은 아즈텍 제국을 위한 스파이 활동을 수행하였다. 포치테카들은 적당한 시기에 속주와 주변국들에서 아즈텍 제국에 위기가 닥쳤다는 거짓 소문이나, 반 아즈텍 주의를 부추키는 선전활동을 통해서 그들이 전쟁에 나서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전쟁에 참여한 이들은 대부분 아즈텍의 압도적인 군대에 밀려 포로로 잡혔고, 그대로 인신공양을 위한 제물이 되었다.

 

 

인신공양과 인육

 

 

다만, 아즈텍의 인신공양 및 식인행위는 과거에는 인신공양이 단백질 부족으로 인한 고기 공급을 위한 목적으로 했다는 주장이었지만 테노치티틀란이 새와 물고기가 풍부한 호수 가운데의 섬이라는 점을 망각한 주장이라는 이유로 반박되었다. 더군다나 식용으로 삼을 만한 가축이 없어서 대신 사람을 먹었다는 이론조차 칠면조, 토끼와 같은 식용으로 삼는 가축들이 존재했고 이를 사고 파는 시장도 존재했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반박되고 있다. 더군다나 전쟁이 끝나고 수만 명을 한 제단에서 살해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정작 평상시에 식량으로써 식인 행위를 한 것은 톨텍 부족이었다.

 

아즈텍은 인구 500만의 제국이었고 테노치티클란의 거주인구는 30만 명에 불과하긴 하지만 한편으론 도시국가 연합체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보면 또 모를 일이긴 하지만, 현재는 대체적으로 인신공양은 확실시되고 있으며 식인도 규모논란만 있을 뿐 존재했으리라 생각된다. 다만 이것들은 태양신 신앙에 의거한 종교적인 행위로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사실상 이 행사 때가 아니면 아즈텍인들이 인육을 먹을 일도 없었다.

 

인육의 취급이 이렇게 종교적인 행위로서 이루어져서 도리어 인육을 먹을 법한 상황에서도 먹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 당시의 기록을 보면 스페인 군대와의 격렬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아즈텍 전사들은 동료의 시체가 지천에 널렸어도 나무껍질로 연명했다는 것이 나온다.

 

당시의 전쟁은 인구 조절을 위해 문화화된 하나의 커다란 의식이었다. 전쟁을 벌이기 전 가축과 식량을 조절하기 위하여 상대 국가와 큰 축제를 벌이고 며칠뒤엔 한잔 나눴던 그사람과 칼을 맞대게 된다. 부족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전쟁이 아니라 전투가 끝나고 적의 시체를 먹기도 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뒤엔 피로 비옥해진 땅을 개간해 경작을 하기도 하였다.

 

영양학적 관점에서의 식인에 대한 반론으로는

 

 

단백질 보충이 목적일 정도로 인육을 많이 섭취하지 않았다.

 

 

영양 보충이 목적이었다면 영양적으로 부족한 빈궁기때 축제가 열렸어야 하는데 인육 축제를 한 시기는 영양 공급이 충분한 추수 때이다.

 

 

아즈텍인들의 영양 상태를 보니 인육 없이도 단백질이 이미 충분했다.

 

 

인간을 고기로 소비하는 행위는 인간이 육류로 삼기에 효율적인 동물도 아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결코 지속될 수 없는 행태이다.

 

 

인신공양을 하는 종교적 의식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사제들이 제단에 모이고 제물들은 벌거벗겨진 상태에서 포박을 당한 채 기다린다. 한 명 한 명 제단으로 끌고 가 눕힌 후, 사제는 흑요석으로 만든 칼로 정확하게 제물의 심장이 있는 쪽 가슴을 오려내고 심장을 도려낸다. 그리고 그렇게 제단에서 심장을 먼저 태운 다음 죽은 제물은 따로 모아서 교수형 자세로 불에 구워졌다. 이 의식은 아무 때나 하는 건 아니고 태양신과 관련된 시기에 적합한 여성들을 추려내어 의식을 진행했다. 이 의식에 사용되는 여성은 태양신께 자신을 바치는 행위로써 의식이 끝나면 여신으로 추앙받았다.

 

의식을 행하는 방법으로는 대표적으로 5가지가 있는데, 평균적으로 심장을 꺼내 불에 굽는 것과 여성의 경우는 제단에 눕혀 목을 치는 방법이 사용됐다. 이외에도 화살로 벌집을 만들거나 불에 굽거나, 맨몸에 칼 하나만 주고 전사와 겨루게 하는 등의 방법이 있었는데, 이는 제물이 피를 많이 흘릴수록 태양신에게서 더욱 큰 축복을 받는다 믿기 때문이었다.

 

왕의 생일이라든가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거나 국경일로 삼을 만한 기념일에도 수많은 사람이 제단을 지났다. 특히 테노치티틀란에 처음으로 신전을 세운 날에는 그날 당일에만 3만 명을 제물로 바쳤다.

 

 

가톨릭으로 개종되기까지

 

 

아스텍 제국이 정복된 이후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노력했다. 제일 먼저 틀락스칼텍의 왕과 귀족들이 세례성사를 받았으며, 에스파냐에 우호적인 원주민들이 그 뒤를 이었는데 1540년대에 이르면 이미 250만명 가까이 되는 원주민들이 가톨릭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가톨릭 전승에 의하면 이 시기에 과달루페의 성모가 발현했다고 한다. 교회 측의 공식 설명에 따르면, 1531129일 이른 아침, 아스텍 농부인 성 후안 디에고 쿠아우틀라토아친(San Juan Diego - Cuauhtlatoatzin)이 미사에 참례하려고 테페약 언덕 꼭대기를 넘고 있을 때, 신비롭고 찬란한 빛을 내는 구름 속에 푸른 망토를 입은 성모 마리아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는 그에게 나우아틀어로 말했다.

 

 

나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믿으며, 내 도움을 요청하는 지상의 모든 백성의 자비로운 어머니이다. 나는 그들의 비탄의 소리를 듣고 있으며 그들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위로하고 있다. 나는 너희가 나의 사랑과 연민, 구원 그리고 보호를 증거로 제시하는 표시로 내가 발현한 이곳에 성당을 세우길 바라고 있다. 그러니 너는 멕시코 주교관에 가서 이곳에 나를 위한 성당을 세우는 것이 내 소망임을 전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성모 마리아는, 자신이 발현한 장소에 성당을 세워 자신을 공경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성모 마리아를 보고 놀란 쿠아우틀라토아친은 그대로 주교관으로 달려가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보고했지만, 주교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테페약 언덕은 과거 아스텍인의 신이었던 토난친 여신의 성소였기 때문이다. 주교는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는 기적의 증거를 가져오라고 요구했다. 쿠아우틀라토아친이 주교를 만나고 나서 테페약 언덕을 지났을 때, 그는 다시 성모 마리아와 마주쳤다. 그는 성모 마리아에게 주교가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는데, 그러자 성모 마리아는 "언덕 위에 장미꽃이 피어있으니, 꺾어다가 주교에게 보여 주라"고 말한다.

 

문제는 테페약 언덕 꼭대기는 꽃이 필 수 없는 험한 바위 언덕이었던데다가, 당시 계절도 꽃이 필 수 없는 겨울이었기 때문에 성모 마리아의 말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후안은 그곳에서 (그 지역 자생종이 아닌 주교의 고향인) 카스티야산 장미들이 만발한 것을 목격하였고, 꽃들을 채집하여 자신의 망토로 쌌다. 그러고는 서둘러 내려와 성모 마리아에게 다시 갔다. 성모 마리아는 그가 가지고 온 장미들을 보고 손수 그의 망토에 가지런히 다시 놓아주었다. 뒤이어 그녀는 쿠아우틀라토아친에게 말했다.

 

 

후안, 이 여러가지 장미송이들이 네가 주교에게 가져가야 할 표적이다. 너는 주교에게 이것들을 가져가서 내 소망을 깨닫도록 하고, 내가 요청한 일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내 이름을 들어 말하도록 하여라. 너는 나의 심부름꾼으로서 신념을 지니고 행동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나는 너의 망토에 싸인 꽃송이들을 주교 앞에 나아갈 때까지 풀어 보이지 않을 것을 엄격하게 명령한다. 그것들을 조심해서 가져가도록 하여라. 네가 그에게 모든 사실을 설명할 때, 내가 너를 산 위로 보냈으며 거기에서 이 꽃들을 발견했다고 전하여라. 그렇게 한다면 너는 그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며 내가 요구한 성당이 세워지는 날까지 너는 그의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주교는 쿠아우틀라토아친이 가져온 장미꽃을 보고 대경실색했다. 그런데 그때 신기하게도 장미꽃들이 마루 바닥에 폭포처럼 흩뿌려지면서, 성모 마리아의 형상이 후안 디에고의 망토에도 새겨져 나타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를 본 주교는 그 경이로움에 놀라 그 즉시 성모 마리아의 형상이 새겨진 망토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성모 마리아의 요청을 믿지 않고 무시한 죄를 지은 자신에 대해 용서의 기도를 바쳤다. 성당이 그대로 세워졌음은 물론이다. 이 성당이 과거 아스텍인이 제례를 행하던 피라미드 바로 위에 세워지긴 했다.

 

이후 후안 디에고로 개명한 쿠아우틀라토아친은, 테페약 언덕에 세워진 작은 성당을 지키면서 자신이 겪은 기적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사람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고 한다. 실제로 많은 원주민들이 개종했는데, 사실 다신교적인 신앙을 갖고 있던 원주민들은 하느님도 우이칠로포치틀리, 토난친, 케찰코아틀 같은 아스텍의 전통적인 신과 동급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 때문에 전통 신에게 지내는 제사 의식등이 여전히 아스텍인의 종교관에 남아 있었으며, 멕시코나 중앙아메리카 지역의 예수상이 그토록 피칠갑(?)을 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멕시코인 개종자는 약 900만명이었는데, 성모 발현의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당시 원주민들에게 엄청난 호응을 얻은 건 사실로 보인다.

 

에스파냐 선교사들은 또한 인신공양으로서 태양이 뜨도록 유지한다는 원주민들의 신앙관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매일매일 피를 흘리시고, 여러분들이 매일매일 그분의 살을 먹으니 태양이 멈출 일은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으며, 실제로 인신공양을 하지 않고도 태양이 뜨는 것을 본 원주민들이 자연스럽게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와 관련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초기 포교 시절에 원주민들이 세례성사를 매우 영험한 주술 정도로 여기고 세례성사를 한 번만이 아니라 수 차례 - 심하면 몇십 차례도 받으려고 했다는 기록은 분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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