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 시스티나 경당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과 가까운 곳에 있는 경당으로, 15세기 후반에 건설되었다. 평소에는 교황이 직접 미사를 집전하는 곳으로 자주 사용되지만, 무엇보다도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콘클라베가 이루어지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내부를 구성하는 사면의 벽과 천장이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으로 가득 차 있으며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필생의 역작인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도 이곳을 장식하고 있다. 관람객들이 벽면과 천장의 성화에만 시선을 집중하는 통에 덜 주목받긴 하지만, 코즈마테스크 양식으로 장식된 대리석 모자이크 바닥도 아름답다. 1984년 바티칸의 일부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여담으로 이곳은 상술한대로 콘클라베가 이루어지는 곳이므로 여성의 출입이 불허되어 있었으나, '여교황'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수녀 파스칼리나 레네르트는 이런 전례를 깨고 역사상 최초로 시스티나 경당에 출입한 여성이 되었다.
천장에 천장화가 아니라 별이 그려져 있다.
지금의 시스티나 경당 자리에는 14세기 중반부터 마조레 경당(Cappella Maggiore)이 있어 교황청의 각종 미사와 의전이 행해졌지만 1세기 가량 지나자 건물이 노후화되었고, 이에 따라 교황 식스토 4세는 마조레 경당을 헐고 새 경당을 짓기로 결정했다. 피렌체 출신의 바치오 폰델리가 설계하고 조반니노 데 돌치의 감독으로 진행된 공사는, 1473년에 시작되어 1483년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 축성되었다. 신축된 경당은 건축을 의뢰한 교황 식스토 4세의 교황명에 따라 시스티나 경당(Cappella Sistina)으로 명명되었다.
시스티나 경당의 외부는 장식적인 요소가 거의 없고 창문도 적으며, 경당에서 바깥으로 직접 나갈 수 있는 출입구 없이 교황 궁전을 통해서만 출입할 수 있기 때문에, 외부의 접근을 차단하는데 용이해 콘클라베를 여는 장소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경당의 평면은 길이 40.23m, 너비 13.41m인데 이것은 구약성서에 언급된 솔로몬의 예루살렘 성전의 치수를 그대로 본뜬 것으로, 바티칸이 예루살렘을 대신하는 새로운 성전으로 자리매김했음을 의미했다. 이외에도 바닥의 중앙부를 가르는 대리석 칸막이를 통해 경당을 두 구획으로 나누어 각각 교황 일행과 일반 신자를 위한 자리로 삼았는데, 이것 또한 솔로몬의 성전을 재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교황 일행의 수가 늘어나면서 이들이 사용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칸막이를 옮기는 바람에 지금은 한쪽에 치우친 상태다. 경당의 높이는 20.7m이고, 내부의 천장은 아치형이며, 그 밑에 있는 남쪽과 북쪽 벽면에는 각각 6개의 창문이, 동쪽과 서쪽 벽면에는 각각 2개의 창문이 있다. 이 중 서쪽 벽면의 창문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최후의 심판을 그리면서 폐쇄했다.
1564년 최후의 심판은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으로 인해 나체와 성기를 가리는 옷이 덧그려졌다. 이 작업을 맡았던 화가 다니엘레 다 볼테는 일 브라게토네(Il Braghettone), 즉 ‘기저귀 화가’라는 굴욕적인 별명을 얻어 오늘날까지도 회자된다.
1549년 화가 마르첼로 베누스티가 덧칠 이전의 모습을 그린 최후의 심판 모사품이 이탈리아 나폴리 카포디몬테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현전하는 시스티나 경당의 최후의 심판이 얼마나 수정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마르첼로 베누스티가 그린 최후의 심판 모사품
바티칸 미술관을 방문하면 언제든지 볼 수 있으나, 항상 그렇듯이 가이드가 필요하다. 그리고 절대로 절대로 사진을 찍으면 안 되며 말조차도 해선 안 된다. 들어가면 "silence (please)"라는 말만 울려퍼진다(…) 제발, 제발 좀 찍지 말자. 걸리면 개인관람시 최소 사진 삭제 최대 즉각 쫓겨남 단체관람시 업체 3달간 출입금지... 같이 보는 사람 여행객 전체에게 피해가 간다. 보는 건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나 목이 아프니 적당히 목 생각하며 관람하도록 하자.
내부의 프레스코화
교황 식스토 4세는 경당의 내부 벽면에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공통된 부분을 부각시켜 남쪽과 북쪽 벽에 각각 6개씩, 동쪽과 서쪽 벽에 각각 1개씩 도합 14개의 성화를 그리도록 했다. 이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합일을 나타냄과 동시에, 하느님이 부여한 권리가 모세 → 예수 → 베드로 → 교황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14장면의 성화들 가운데서 제대가 있는 서쪽 벽에 그려졌던 '강에서 발견된 모세'와 '그리스도의 탄생'은 최후의 심판을 그리기 위해, 지워져 현재는 12장면만 현존한다.
시스티나 경당을 보지 않고서, 한 인간이 어느 정도의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직관적으로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Without having seen the Sistine Chapel one can form no appreciable idea of what one man is capable of achieving.)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시스티나 경당에 그려진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프레스코화를 보고 남긴 말, 1787년
천장화
1483년에 축성식을 가진 시스티나 경당은 21년 후인 1504년, 건물의 배수 구조에 문제가 생겨 파란 바탕에 금빛 별을 그렸던 천장에 금이 갔다. 보수 작업 도중 천장화가 손상되자, 교황 율리오 2세는 별이 그려진 기존의 천장화를 지우고 새로운 천장화를 그리기로 결정하면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에게 책임을 맡겼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다른 사람도 아닌 율리오 2세의 의뢰로 교황 본인이 안장될 영묘를 만드는 조각 작업을 진행하는 중이어서 다른 일에 신경쓸 겨를이 없다고 고사했지만, 교황이 강하게 압박하자 하는 수 없이 영묘 작업을 중단하고 시스티나 경당 천장화 계약서에 1508년 5월 10일 서명했다.
원래는 12사도를 그리라는 것이 율리오 2세의 주문이었지만, 그런 구성으로는 천장화를 짜임새있게 그릴 수 없다고 판단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창세기, 예수의 조상, 예언자와 시빌라, 이뉴디와 메달리온 등을 포괄한 장대한 내용으로 주제를 전환해 교황의 허락을 받아냈다. 1508년 12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경당 벽면에 비계를 고정시키고 작업에 착수했다. 고향 피렌체에서 불러들인 조수들과 함께 작업을 했지만, 대부분의 주요 그림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혼자서 그렸는데,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 보니 초반에는 프레스코화가 변색되는 일이 벌어져 당황한 나머지 작업을 중단했다.
그래서 이 기회에 천장화 작업을 그만두고 영묘 조각에 복귀하려 했지만, 율리오 2세가 보낸 건축가 줄리아노 다 상갈로가 사태를 분석한 결과,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그림 실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벽면에 바른 석회의 수분이 너무 많았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상갈로가 수분을 조절하면서 변색 문제는 해결됐지만, 그림은 본업이 아니라 서투르다는 핑계로 율리오 2세의 마수로부터 천장화를 그리지 않으려 했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입장에서는(…).
천장화는 상술한 것과 같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초반에는 작업이 느리게 진행되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작업 속도에 탄력이 붙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을 때는 '빛과 어둠의 분리' 같은 하나의 장면을 밑그림 스케치 없이 하루만에 완성하기에 이른다. 1511년 8월 15일에는 아직 미완성이었던 천장화가 부분적으로 공개되었으며, 마침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지 4년 만인 1512년 10월 31일, 율리오 2세의 축하 미사를 거쳐 같은해 11월 1일에 일반에 공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