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영화 협회(AFI) 선정 가장 위대한 남자배우 (01)
1위: 험프리 보가트(Humphrey Bogart, 1899년~1957년)
험프리 보가트 (Humphrey DeForest Bogart, 1899년 12월 25일 ~ 1957년 1월 14일) 는 미국의 배우였다. 그는 문화적 아이콘으로 여겨져 왔으며 미국 영화 연구소는 그를 위대한 남자 배우 25에서 1위에 선정하였다.
그는 예전에 여러가지 직업을 가진 후 1921년에 연기를 시작한 후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브로드웨이에서 일하였다. 이후 검은 목요일로 인해 연극 생활에 문제가 발생하자, 그는 영화계로 가 1936년, 《화석의 숲》에서 뛰어난 연기를 펼쳐, 이후 《더럽혀진 얼굴의 천사》같은 갱스터 영화에 주로 출연하였다.
그는 1941년부터 주연을 맡아, 《하이 시에라》, 《말타의 매》같은 영화에서 뛰어난 연기를 펼쳤다. 다음해에는 《카사블랑카》에 출연하여 주옥같은 연기로 인기를 얻게 된다. 이후 그는 로런 버콜과 함께 출연한 《소유와 무소유》, 《빅 슬립》, 《다크 패시지》, 《키 라르고》에 나왔다. 그는 《시에라 마드레의 황금》에서도 출연하였으며 1951년에는 《아프리카의 여왕》으로 마침내 아카데미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이후로도 《사브리나》, 《케인 호의 반란》에 출연하였으며 마지막으로 《하더 데이 폴》에 출연하였다.
보가트는 1899년 12월 25일에 미국 뉴욕 주 뉴욕에서 아버지 벨몬트 보가트와 어머니 머드 험프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 부부는 1898년 결혼하였다. '보가트'라는 이름은 독일식 이름인 'Bogaert'에서 따왔다. 보가트의 아버지는 장로교로 잉글랜드와 독일 혈통이었으며, 어머니는 미국 성공회로 잉글랜드 혈통이었다.
보가트의 아버지는 외과 의사였으며, 어머니는 화가인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에게서 배운 일러스트레이터였다. 그녀는 적극적인 여성참정권론자였다. 보가트 가족은 유퍼 웨스트 사이드에 위치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에게는 프란시스와 캐서린이라는 두 여동생이 있었다.
그는 1918년, 미국 해군에 들어간 후 다시 나와 선적 처리 업자 등의 일을 하였다. 1921년, 그는 연극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1922년부터 1935년까지 17편이 연극에 출연하였다.
2위: 케리 그랜트(Cary Grant, 1904년~1986년)
아치볼드 알렉산더 리치 (Archibald Alexander Leach, 1904년 1월 18일 ~ 1986년 11월 29일) 는 케리 그랜트 (Cary Grant) 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영국 태생의 할리우드 배우이다. 앨프리드 히치콕, 하워드 혹스, 조지 큐커, 리오 매케리 등 수많은 감독들과 활동하였으며 미국 영화 연구소에서는 최고의 배우에서 남배우로 2위에 선정하였다.
1970년, 아카데미상 공로상을 수상하였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이혼 소동》 (1937), 《아기 양육》 (1938), 《건가 딘》 (1939), 《필라델피아 스토리》 (1940), 《아세닉 엔 올드 레이스》 (1944), 《나는 결백하다》 (1955),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1959) 등이 있다.
케리 그랜트는 '아치볼드 알렉산더 리치'라는 이름으로 1904년 1월 18일, 영국 브리스틀에서 아버지인 '엘리아 제임스 리치'와 어머니인 '엘시 마리아 킹던'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그의 생애는 불우하였는데 그의 어머니가 주요우울장애로 인해 정신 병원으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이때 아버지는 그에게 어머니가 단지 여행을 갔다고 말하였다.
이후 그랜트는 1918년, 브리스틀에 있는 페어필드 그레머 학교에서 퇴학당해 '밥 펜더 스테이지 트룹'에 들어가 죽마를 공연하였다. 이후 단체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이후 같이 온 단체가 영국으로 다시 갔지만 그랜트는 미국에 남게 되었다. 그는 보드빌에 출연하였는데 이때 출연한 보드빌은 《아이린》, 《리오 리타》, 《삼총사》 등이 있다.
1930년대
브로드웨이에서 '아치 리치'로 이름을 활동한 그랜트는 1931년, 할리우드로 가게 된다. 그는 파라마운트 픽처스와 계약을 맺게 되었다.
《다이아몬드 릴》에서 메이 웨스트와 함께
이후 1932년, 드디어 《금발의 비너스》에서 마를레네 디트리히와 함께 활동하였고, 다음 해에는 메이 웨스트와 함께 활동하였다. 또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1935) 에서도 출연하였는데 그는 조연이었으며 주연으로는 게리 쿠퍼가 있었다. 이후 파라마운트가 파산 선고를 받아 그랜트는 자유롭게 스튜디오와 계약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는 컬럼비아 픽처스와 RKO 라디오 픽처스, 핼 로치의 스튜디오에서 일하였다.
1937년에 컬럼비아에서 제작된 《이혼 소동》에서 그랜트는 제리 웨리너 역을 맡았는데 이 역은 그에게 코미디 영화로서의 첫 중요한 영화였다. 이 영화는 리오 매케리가 감독하였으며 아이린 던이 같이 출연하였는데 뒷날 이 영화는 미국 영화 연구소에서 100대 코미디 영화 안에 들었다.
이후 그는 캐서린 헵번과 함께 1938년, 《베이비 길들이기》에 출연하였다. 이 영화는 하워드 혹스가 감독을 맡았는데 영화는 실패하게 되었다. 이후 헵번은 RKO 라디오 픽처스와의 계약을 파기한 후 다시 컬럼비아 픽처스에서 조지 큐커가 감독한 《홀리데이》에 같이 출연한다.
그는 1939년, 조지 스티븐스 감독의 《건가 딘》에 출연하였다. 이 영화는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니어 등이 출연한 인도를 배경으로 한 영화로 성공하게 되었다. 그 해 혹스는 그를 진 아서와 함께 출연한 《천사많이 날개를 가졌다》에 캐스팅하였다.
1940년대
1942년 케리 그랜트는 미국인들에게 유명한 울워스의 상속녀이자 셀레브리티인 바바라 휴튼와 재혼한다. 바바라는 덴마크 왕족인 남편 레벤틀로브 백작이 그녀의 재산을 노리고 폭력까지 행사해 매우 괴로웠던 두번째 결혼을 막 끝낸 후였다. 케리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그녀에게 연민과 애정을 느꼈다. 아마도 그녀의 막대한 재산을 노리지 않은 남편은 케리 그랜트가 유일했을 것이다. 그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인기인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케리 그랜트와 바바라 휴튼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하고 1945년 끝난다.
3위: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ewart, 1908년~1997년)
제임스 메이틀랜드 "지미" 스튜어트 (James Maitland Stewart, 1908년 5월 20일 ~ 1997년 7월 2일) 는 미국의 영화 배우이자 군인이다. 그는 앨프리드 히치콕, 프랭크 캐프라, 존 포드 같은 배우와 함께 작업하였으며 미국 국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미국 공군에 복무하였다.
그는 《필라델피아 스토리》 (1940) 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며 《살인의 해부》 (1959) 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볼피컵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이외에도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멋진 인생》, 《현기증》,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등에 나왔다.
제임스 메이트랜드 스튜어트는 1908년 5월 10일에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인디애나에서 철물점을 운영하는 아버지인 알렉산더 메이트랜드 스튜어트와 어머니 엘리자베스 루스에게서 태어났다. 부모는 스코틀랜드 장로교였다. 그의 조상은 1812년 전쟁과 미국 남북 전쟁에서 복무하였다. 그는 3남매 중에 첫번째 아들이자 밑에가 여동생이라서 그는 가업을 이으려고 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피아노를 잘 쳤지만 아버지가 피아노를 배우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손님 중에 한 분이 그에게 아코디언을 선물로 주어 아버지는 악기를 다루는 것을 허락하였고 그는 빨리 악기를 배우게 되었다. 이후 음악은 그의 가족에게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스튜어트는 1928년, 머서스버그 아카데미를 졸업하였다. 그는 예능 부분으로 나아가고 싶었으며 합창반에 있었다. 여름에 그는 인디애나로 와 마술사의 조수로 일하였다. 그는 또 머서스버그에서 한 연극인 《늑대들》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수줍어 하는 그는 파일럿이 되고 싶어 모델 비행기를 제작하는 일과 기구 설계, 화학일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한 후 아버지가 미국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가라고 주장하자, 파일럿에 관한 꿈을 버리게 되었다.
《그림자 없는 남자 이후》 (1936) 에서의 스튜어트
그의 연기 일생은 프린스턴에서 대학 연극에 나오면서 시작하였다. 그는 1935년 《머더 맨》에 출연하면서 메트로-골드윈-메이어의 영화들에 주로 출연하면서 《그림자 없는 남자 이후》, 《본 투 댄스》, 《인간의 마음》 등에 출연하였다. 이때동안 그는 당시 이혼하고 몇년 후였던 진저 로저스와 친분을 가지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1938년, 스튜어트는 당시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천금을 마다한 사나이》, 《잃어버린 지평선》 등으로 컬럼비아 픽처스에서 활약을 하던 프랑크 카프라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카프라의 영화 《우리들의 낙원》이라는 영화에 토니 키비 역을 맡아 인기를 얻게 되었다. 카프라는 이전 클라크 게이블, 게리 쿠퍼 등의 배우들을 기용하였으나 이후 주로 스튜어트를 기용하기 시작하였다.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우리들의 낙원》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여 카프라는 정치적인 영화,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에 스튜어트를 출연시켰다. 이 영화에서 스튜어트는 부패한 워싱턴의 부패한 의원을 고발하는 제퍼슨 스미스 상원의원으로 출연하였다. 그는 이 영화로 처음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후보로 지명되었다.
이후 유니버설 픽처스에서 마를레네 디트리히와 공동 출연한 서부 영화 《데스트리 라이즈 어게인》에 출연하게 되었다. 또 캐롤 롬바드와 함께 출연한 《메이드 포 이치 아더》에 출연하였다.
1940년, 그는 에른스트 루비치의 코미디 영화 《모퉁이 상점》에 마가렛 설리반과 함께 출연하였다. 그는 이 영화에서 헝가리의 알프레드 크랄릭을 맡았다. 이 영화는 헝가리의 희곡을 바탕으로 제작되었고 이후 1949년에 MGM에서 주디 갈런드를 기용한 뮤지컬 영화 《즐거운 여름》으로 리메이크 되었으며 1999년에는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이 출연한 《유브 갓 메일》로 다시 리메이크 되었다.
《필라델피아 스토리》
이후 그는 MGM에서 캐서린 헵번과 캐리 그랜트가 출연한 《필라델피아 스토리》에 나오게 된다. 그는 이 영화에서 상류층의 결혼을 취재하는 기자 역할을 맡으면서 인기를 얻게 된다. 그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게 되었다.
4위: 말론 브란도 주니어(Marlon Brando, 1924년~2004년)
말론 브란도 주니어(영어: Marlon Brando, Jr. 말런 브랜도, 1924년 4월 3일 ~ 2004년 7월 1일)는 반세기 동안 활동한 미국의 영화 배우이다.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배우 중의 하나이며, 1950년대에 강한 정신적 기술을 강조한 조직적 스타일의 연기로 인기를 끌면서 《전선》(On the Waterfront, 1953)에서 테리 맬로이 역할과 《대부》(The Godfather, 1971)에서 비토 코를레오네 역할로 두번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원래 성은 브란다우(Brandau)로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에서 출생하여 1944년 브로드웨이에 데뷔하였다. 1947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에서 스탠리 코왈스키 역을 맡으면서 명성을 얻었으며, 1951년 동명의 영화판(엘리아 카잔 감독)에서도 같은 역을 맡았다.
영화 배우로서 첫 데뷔작은 《사나이》(The Man, 1950)이다. 그의 초기 출연작으로는 《사나운 인간》(The Wild One, 1953), 《8월 달의 찻집》(The Teahouse of the August Moon, 1956)과 《어린 사자들》(1958)을 포함한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작품 《대부》의 비토 코를레오네,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 1979)의 월터 E. 커츠 대령 역으로 유명하며, 1978년 리처드 도너 감독의 《슈퍼맨》(Superman: The Movie)에서 조르 엘 역을 맡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브란도는 흑인과 인디언들을 위한 양쪽의 인권 운동에 후원한 자유주의 정치 활동을 펼쳐오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양성애 성향도 숨기지 않았으며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그의 다른 출연작으로는 《파리의 마지막 탱고》(Last Tango in Paris, 1973), 《돈 후안 데마르코》(Don Juan DeMarco, 1995), 《모로 박사의 섬》(The Island of Dr. Moreau, 1996), 《더 스코어》(The Score, 2001) 등이 있다.
그의 저서로는 자서전〈나의 어머니가 나에게 가르쳐 준 노래들(Songs My Mother Taught Me)〉(1994)이 있다. 2004년 7월 1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하였다.
5위: 프레드 아스테어 (Fred Astaire, 1899년~1987년)
프레드 아스테어 (Fred Astaire, 초명은 Frederick Austerlitz, 1899년 5월 10일~1987년 6월 22일) 는 미국의 영화와 브로드웨이의 댄서, 안무가, 배우이다. 그는 브로드웨이와 이후 영화까지 76년 동안 활동하였으며, 31개의 뮤지컬 영화에 출연하였다. 그는 미국 영화 연구소에서 위대한 남자 배우 25에서 5위에 선정되었다. 그는 자신의 뮤지컬 영화 중에 10개의 영화에 진저 로저스와 함께 파트너를 이루어 명성을 얻었다.
아스테어와 함께 뮤지컬 영화를 이끌었던 진 켈리는 '영화에서 춤의 역사는 아스테어와 함께 시작했다'고 말하으며 그는 영화와 텔레비전을 오가면서 많은 댄서들과 안무가들은 그가 끼쳤던 영향을 인정하였다.
아스테어는 1899년 5월 10일, 미국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에서 조한나와 프레드릭 아스테리츠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스테어의 어미니는 동프로이센와 알자스에서 온 독일 루터교 이민자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로 바꾼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892년 10월 26일 뉴욕에 도착해 엘리스 섬에 있을 때, 아스테어의 아버지는 양조업을 하려고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로 거주지를 옮겼다. 아스테어의 어머니는 자식들의 재능을 알게 되어 오마하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그녀는 자식들을 보드빌에 있도록 계획하였다. 아스테어는 처음에는 춤 연습을 거부했지만 빠르게 누나의 스텝을 따라하였으며 피아노, 아코디언, 클라리넷을 배웠다.
6위: 헨리 폰다(Henry Fonda, 1905년~1982년)
할리우드 황금기에 절대 빠질수없는 영원한 레전드
선량하고 정직해보이는 이미지로 에이브러햄 링컨의 젊은 시절을 다룬 존 포드 감독의 젊은 날의 링컨에 나오기도 하고 서부영화에서는 개척정신이 있는 역할로 나왔으며 존 스타인벡의 유명한 명작소설 《분노의 포도》를 다룬 존 포드 감독의 동명의 영화와 톨스토이의 원작을 다룬 《전쟁과 평화》와 같은 명작영화에도 출연했다.
이렇게 선량하고 정직한 이미지의 그가 스파게티 웨스턴 장르인 무법자 시리즈로 유명해진 세르조 레오네의 작품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에 출연을 하는데... 예상을 뒤엎고 악역이었다.
그 결과 당초 배급을 맡은 MGM 영화사가 배급을 취소할 지경이었다. 미국인 관객들 역시 그의 악역 변신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하지만 그는 악역으로도 명연기를 보여줬다. 사실 레오네의 작품엔 선역과 악역의 구분이 애매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누가 봐도 그가 악역이다. 이 작품에서 그가 맡은 악역 묘사가 어느 정도냐면, 한 가족을 몰살시키고 남은 어린아이마저도 자신의 이름을 알았다고 쏴죽이고, 젊은 시절엔 재미삼아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정직하고 정의롭고 선한 이미지의 미국인을,미국을 대표하는 배우였기 때문에 그가 악역을 하는것은 미국의 이미지에도 치명적인 묘사였기 때문에 당초 배급을 맡기로 한 영화사는 미국에 개봉될 경우의 파장을 두려워하여 배급을 취소해버렸다. 하지만 폰다는 악역을 연기하는것이 마음에 들어 즐겼다고 한다.
이후 《무숙자》에도 출연하기도.
전쟁 영화에도 다수 출연하였는데, 이 분야에서 손꼽히는 1965년작 《벌지 대전투》에서는 경찰 출신으로 날카로운 분석력과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는 육군 중령 카일리를 연기하였다. 1970년작 《불타는 전장》에서는 주인공의 상관 역으로 특별 출연, 오만 불손한 주인공을 "말 안 들으면 해군 이등병으로 강등시켜서 최전선으로 보내버리겠다"고 협박해 데꿀멍시킨다. 이후 1977년작 《미드웨이》에서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해군 대장 역을 맡아 열연, 온화하면서도 단호하고 냉정 무비한 니미츠 제독을 제대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자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작에 참여한 《12인의 성난 사람들》에서도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차후에 이 영화의 감독이었던 시드니 루멧이 연출한 《핵전략사령부》에서도 좋은 연기력을 보여준다. 영화 자체도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잘 부합하기도 했고.
다양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상복이 없었다가 유작인 《황금 연못》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다. 그의 딸 제인 폰다와 함께 출연했는데, 영화 속 캐릭터처럼 실제로도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으나(아내와 이혼하고 다른 젊은 여인과 재혼했던 점이 컸다.) 이 영화로 화해했다.
매우 리버럴한 성향으로, 딸인 제인 폰다가 어렸을 때, 자신의 앞에서 흑인을 비하하는 말인 "니거"(nigger:깜둥이)라는 말을 쓰자 따귀를 갈겼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제인도 후에 리버럴한 성향을 띠고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 같은 데 앞장서기도 했다. 그렇다고 전쟁중인 적국의 수도인 하노이를 방문해서 자국을 비난한 건 좀 오버고… 훗날 제인은 이에 대해 후회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관련 기사
제임스 스튜어트와는 평생지기로 아주 절친한 사이였는데, 제임스 스튜어트가 공화당 지지자였기 때문에 처음에 정치 논쟁을 하다 싸움이 나서 그 제임스 스튜어트를 일방적으로 패버렸다고. 싸움이 끝나고선 이래선 안되겠단걸 알겠는지 제임스에게 먼저 앞으로 절대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하여 계속 친구로 지낼 수 있었다. 그래도 매번 선거철만 되면 정치 이야기가 아주 없진 않아서 서로 냉대하긴 했었다고.
7위: 클라크 게이블(Clark Gable, 1901년~1960년)
윌리엄 클라크 게이블(영어: William Clark Gable, 1901년 2월 1일 ~ 1960년 11월 16일)은 20세기 미국 할리우드의 영화배우이자 브로드웨이 뮤지컬 배우이다. 또한 무성영화 후반기에 단역으로 무성영화에도 출연하였다. 전성기 때 "할리우드의 제왕"(The King of Hollywood)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99년에 미국 영화 연구소는 게이블을 "현시대의 가장 위대한 남성 스타"에서 7위로 선정하였다. 1917년부터 종종 무성영화의 단역배우로 활동하다가 1930년부터 본격적으로 배우로 활동하였으며, 1939년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1960년대, 그의 사후 대한민국 국내에 소개되었다. 이 작품에서 그는 미국 남북전쟁의 동란기를 꿋꿋하게 버티는 강인한 사나이 역할로 인상을 남겼다.
생후 7개월 만에 어머니를 잃고 두살 때 아버지의 재혼으로 계모 밑에서 구박받으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 야간반 재학 중 밴드부원을 하였고, 동시에 고교 재학 중 1917년 단역배우로 출연하였다. 1920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백화점 점원, 농부, 단역 배우, 일용직 막노동자, 은행의 계약직 사무원, 신문 보급소 사환, 전화 설치공, 석유 시추 노동자, 외무사원, 일용직 노동자, 타이어 공장 노동자, 플라스틱 공장의 노동자, 농장 점원, 목재 벌채 인부 일, 상점 점원, 식당과 레스토랑의 종업원 등을 전전하다가 1923년 단역배우와 엑스트라 일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브로드웨이 뮤지컬 배우, 할리우드의 영화배우가 되었다.
배우 겸 연출가 조지핀 딜런의 연기지도를 받아 1928년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출연하여 이름을 알렸고, 그의 팬이었던 17세 연상의 부유한 리어 랭험의 도움과 인맥으로 여러 영화에 캐스팅되었다. 1934년의 "어느날 밤에 생긴 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고 이후에도 여러번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조연상의 후보의 물망에 올랐다. 훤칠한 키와 말끔한 외모, 부드러운 면과 강인하고 거친 면모를 함께 갖춘데다가 넉살 좋은 성격으로 여성팬은 물론이고 남성팬들에게서도 많은 인기를 얻었다. 여성관객들과 평론가 사이에서는 성적 매력을 가진 남자배우 중의 하나로 손꼽혔다. 세번째 부인이었던 배우 캐롤 롬바드가 1942년 1월 라스베가스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 미 공군에 장교로 입대하여 참전, 항공 훈장을 받고 소령까지 진급하였다. 그는 세번째 부인 캐롤의 흔적을 찾고자 사고현장을 다년간 수색한 끝에 캐롤이 착용하던 스카프 조각을 찾아내었다고 한다.
미국 오하이오 주의 카디즈에서 석유 시추 노동자와 광부, 일용직을 전전하던 윌리엄 헨리 게이블(1870–1948)와 아들린 허셸먼(1869–1901)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몸이 병약하였던 그의 어머니 아들린 허셸먼은 그를 낳고 7개월만에 사망하였다. 그의 부모는 모두 독일계 미국 이민자의 후손들이었다. 어머니 아들린 허셸먼은 탐광 기술자로, 게이블의 외가는 탐광 기술자였다. 그가 생후 6개월이 되자 어머니 아들린 허셸먼은 그에게 가톨릭 세례를 해주었다. 그러나 아버지 윌리엄 헨리 게이블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아버지 윌리엄 헨리 게이블은 한때 처남이자 그의 외삼촌인 찰스 허셸먼에게 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일찍이 어머니를 잃은 그는 어머니와 같은 여성을 갈구하였고, 자신에게 약간의 친절을 베풀어도 청혼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아내가 게이블을 낳고 죽은 지 1년 4개월만에 옆 마을에서 온 제니 던랩(1874–1924)과 재혼하였다. 아들이 걸음마를 막 시작한 두 살 때였다. 계모의 구박과 지독한 가난을 견디다 못한 그는 종종 가출하였고, 고등학교 진학은 야간반으로 하였다. 에든버러 고등학교 야간반 재학 중에는 밴드부원으로 활동하였다. 그가 고등학교 야간반을 중퇴하지 않고 졸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밴드부에서 나팔을 부는 데 낙을 붙였기 때문이라 한다. 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1917년 극장에서 우연히 관람한 한 편의 연극에 감동한 뒤, 이후 종종 무성영화나 연극의 단역배우로 출연하여 활동하였다. 생모에 대해 아무런 기억이 없는 게이블은 어머니라는 존재가 어떤 것인지 의문을 품었다 하며, 새엄마의 신경질도 지독한 가난도 지겨웠다고 한다. 그의 계모 제니 던랩은 그가 24세 되던 해에 사망한다.
여러 직업 전전
에든버러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클라크는 집을 뛰쳐나와 친구와 둘이서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철길 옆에서 친구와 기다리고 있다가 달리는 화물열차에 뛰어올라 열차가 가는 대로 갔고, 역이 아닌 곳에서 내려서 그 근처의 일자리를 알아보는 식으로 생활하였다. 이후 그는 백화점 점원, 농부, 단역 배우, 일용직 막노동자, 신문 보급소 사환, 전화 설치공, 식당과 레스토랑의 종업원 등을 전전하였으나, 그는 한 직업에 오래 정착하지 못했고 배고픔조차 해결되지 않는 것이었다. 노숙자가 될 위기에 몰렸던 그는 일정한 주거지가 없는 떠돌이가 되었다. 달리는 화물열차에 뛰어올라 아무 곳에나 내려 식당 서빙, 농부, 석유 시추 노동자, 외무사원, 일용직 노동자, 타이어 공장 노동자, 플라스틱 공장의 노동자, 은행의 계약직 사무원, 농장 점원, 목재 벌채 인부 일, 상점 점원 등을 며칠에서 수개월간 하다가 아니다 싶으면 훌쩍 기차를 타고 떠돌아다녔다. 그는 돈을 모으겠다고 결심하였으나, 3년간의 객지생활 끝에 소액의 돈을 모았다.
1923년 12월 크리스마스에는 친구와 함께 로키산맥의 중간을 달리는 열차에 탔다. 기차가 삼림이 울창한 로키산맥을 달리는데 황혼이 지고 이윽고 밤이 왔다. 그 밤에 그와 친구가 지니고 있던 것은 콩 통조림 하나와 담배 두 개비가 전부였다. 이때 '오늘이 크리스마스인데 우리 저녁 식사가 콩 통조림 하나라니 하느님도 무심하시네.'라는 친구의 말에 게이블은 "다 자업자득이지 뭐. 난 10년 뒤에는 반드시 가족과 함께 만찬을 즐길 거야. 두고 봐." 라고 의연하게 대답하였다. 그러나 게이블은 친구한테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열차 틈새 바깥으로는 차가운 달빛 아래 나무들만 보였다. 그는 그때 내 이제부터는 인생을 이렇게 탕진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하였다. 따뜻한 불빛이 비치는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리라고. 하지만 그는 몇년을 더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였다. 후일 클라크는 "이 때가 가장 쓸쓸했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그의 일행 중에는 오리건으로 가는 남자 둘이 함께타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 풍성한 찰면조 구이대신에 콩 통조림과 한 개피씩의 담배로 크리스마스 디너를 떼웠다."며 "그 때의 크리스마스 디너가 지금 할리우드의 호화한 레스토랑의 그것보다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클라크는 이렇게 말하면서, 콩을 나누어 먹고 일행이 건네주는 담배를 피우면 흔들리는 증기 기관차에 앉아 로키산맥 위에 비치는 겨울의 달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하였다. 1923년 12월 말부터 그는 지방을 순회하는 작은 극단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면서 단역을 맡아보았고, 종종 공장의 노동자나 식당의 종업원 등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1924년에는 무성영화에서 단역을 맡아본 이후 영화에 엑스트라나 조연으로도 출연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는 젊었을 때 온갖 잡다한 일을 하다가 오리건 주 포틀랜드의 에드릴리 레퍼토리 극단에 배우 호출원으로 들어갔다. 우연히 뮤직 홀에서 무대를 보게 되면서 그는 배우가 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무명 배우 시절
그는 극단에서 만난 배우 프랑스 드루프라에게 청혼했지만 드루프라는 게이블이 오랫동안 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실망하여 그의 청혼을 거절한다. 상처받았던 그는 14년 연상의 조지핀 달런에게 연기지도를 받으면서 실연을 잊었다. 배우이자 연출가 였던 조지핀 딜런에게 연기지도를 받으면서 1928년 브로드웨이의 연극 머시널 (Machinal) 등에 캐스팅되었다. 이때 그는 처음으로 브로드웨이 주연을 맡았다. 얼마 뒤 자신의 멘토이자 연기스승이기도 했던 딜런과 결혼했지만 몇년만에 이혼하고 만다. 이 무렵 그는 양쪽 윗 앞니가 벌어져있던 것을 교정, 의치로 이용했다. 그러나 치아 관리를 별로 하지 않던 그에게서는 갈수록 입냄새가 심해졌고, 후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영화를 같이 찍던 비비안 리는 그의 입냄새가 싫어서 키스신을 찍기 싫다고 말할 정도였다. 클라크는 평생 치아와 잇몸이 좋지 않았다. 딜런은 클라크를 영화배우로 만들기 위해 치과치료부터 받게 했지만 입냄새 등을 없애지는 못했다.
그는 180cm의 훤칠한 외모와 친절함, 그리고 벌어진 앞니를 교정하여 말끔한 외모가 되었다. 할리우드 여배우들과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염문을 뿌려 화제가 되었고, 결혼식을 올릴 때마다 역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게이블은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여성에게는 금방 마음을 주었다고 한다. 두 번째로 재혼한 17세 연상의 리어 랭험 부인은 사교계의 여왕으로서 무명의 게이블이 유명 영화에 섭외되도록 인맥과 자금을 아끼지 않고 투자하였다. 사교계에서 인기있는 부잣집 유한마담이던 그녀가 게이블을 물심양면으로 돕고, 유명감독의 영화 출연에도 다리 역할을 하자 게이블은 그만 마음이 흔들려 조지핀 딜런과 이혼하고 리어 랭험과 재혼하였다. 랭험은 게이블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는데, 자금과 인맥을 가리지 않고 그를 지원했다. 연극 《더 라스트 마일》에서는 스펜서 트레시가 주연을 맡게 되어 있는 것을 랭험이 인맥을 이용해서 게이블로 교체시킬 정도였다. 이때 촬영한 영화 《바운티 호의 반란》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많은 여성팬이 생겨났고, 게이블 주변에는 여성팬들이 몰려왔다. 또한 여러 여배우들도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그러나 촬영장에서 영화 파트너로 만나는 것이었지만 17세 연상이었던 리어 랭험에게는 스트레스가 되었다.
영화배우 데뷔 초반
유성영화가 도입된 후인 1930년 할리우드로 돌아와 1931년 《파이터 포인트》(The Finger Points), 1931년 《야간근무 간호원 Night Nurs》 등에서 갱 역을 소화해냈는데 이때의 이미지가 인상깊게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1931년 처음 계약한 뒤 54년까지 메트로골드윈메이어사와 계약을 맺으면서 점차 쾌활하고 모험을 즐기는 중년 남성 역을 주로 맡아 유명해졌다. 1930년대에 그는 할리우드의 미남 배우이자 이상적인 미국 남성상으로까지 호평을 얻었다. 1932년 배우 진 할로와 함께 출연한 "붉은 먼지 Red Dust"의 흥행 이후 1934년 《어느날 밤에 생긴 일》에 캐스팅되었는데 영화의 성공과 동시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1934년 《남자의 세계》, 1935년 《바운티호의 반란》, 1938년 《테스트 파일럿》 등의 주연을 맡았다. 1935년, 《바운티호의 반란》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으로 그는 아카데미상 수상 후보자에 올랐다.
이때 그는 일부 여자배우들과 염문을 뿌렸고, 이때 이름이 거론된 일부 여자배우들과는 실제로 연인관계였다. 1935년 게이블이 주연한 "전함 바우티호의 반란"이 크게 성공할 무렵 그의 새로운 연인들이 공개됐고, 캐롤 롬바드, 조앤 크로퍼드, 로제타 영 등이 그들이었다. 로제타 영에게서는 딸 주디가 태어났지만 영은 이 사실을 철저하게 숨기고, 딸의 귀를 성형수술까지 시켰다고 한다. 영은 곧 재혼한 남편 톰 루이스의 성을 따서 딸을 주디 루이스라 이름하였다. 이는 평생 비밀로 묻어두다가, 영이 죽으면서 남긴 회고록을 통해 공개된다. 클라크는 생전 자신의 딸과는 한번 조우했지만 그는 자신의 딸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결국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리어 랭험과는 8년만인 1939년 이혼하게 된다. 이런 여성편력에 대한 시중의 평은 그가 갓난아이일 때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대신할 존재를 찾는 것이라는 시선과 함께 자신의 성공에 여인들을 이용한다는 비판도 쏟아졌다. 1937년 "새러토가 Saratoga", 1936년 영화 "샌프란시스코 San Francisco", 1939년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1940년 스펜서 트레이시와 함께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신흥도시 Boom Town" 등은 흥행하였다. 치아 관리를 잘 하지 않아서 비비안 리가 키스신을 거절한 것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촬영 중이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1960년대에 한국으로도 소개되었다.
2차대전 중
1937년 영화 《파넬》에서는 아일랜드인 정치가 역할을 맡았는데 크게 실패했다. 한편 1938년 인기 코메디 배우 캐롤 롬바드와 재혼하였다. 그는 특히 캐롤에게 마라라는 애칭을 붙였다 한다. 그러나 캐롤과의 결혼은 3년 만에 끝난다. 1942년 1월 16일 비행기 사고로 아내를 잃고 비탄에 잠겨 있던 게이블은 이를 이겨 내고자 제2차 대전 당시 미국 공군 장교로 입대하여 훈장을 받고 육군 소령까지 진급한다. 클라크는 결혼 3주년 기념일에 둘만을 위한 파티를 준비했다. 그는 멋진 저택에 손수 풍선을 불어 장식하고 그녀가 오면 놀라게 할 초장식도 꾸며놓았다. 그러나 그녀가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켜놓 양초가 타들어 가던 1월 16일 8시경 문을 열고 들어와야 할 캐롤 롬바드는 오지 않고 항공기 추락 소식을 접했다. 전쟁 기금을 모으는 활동을 하던 캐롤 롬바드가 그의 곁으로 오기 위해 탔던 비행기가 라스베가스 교외의 야산에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비행기 사고에 깊이 관심을 가졌고 민간 항공기끼리의 충돌 사고로 밝혀졌다. 1942년 1월 16일 그는 미국 공군에 입해 사관학교(OCS)에 사관생도가 되었다. 그해 8월 12일 공군 포병 주특기를 받고 미국 공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1942년부터는 미군 공군으로 독일과의 교전에 참여했고, 1943년에는 미국-영국군 공군 연합부대에 참여하여 독일 공습에 참가했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는 유독 그에게는 호의를 보이기도 했다. 1944년 5월 공군 소령으로 승진했고, 그해 6월 12일 예편을 신청하여 9월 26일부로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그는 미국 공군 장교로 자원한 그는 소령으로 예편했다. 공군 생활 중 비행기를 몰던 그는 라스베가스 산으로 자주 찾아가 착륙 후캐롤 롬바드가 추락한 지점을 계속 수색했고, 나중에 아내 캐롤의 추락 현장에서 비행기 잔해들 중에 캐롤의 스카프 조각을 찾아오기도 했다. 그는 오랫동안 캐롤을 잊지 못했고 자신이 죽은 뒤에도 캐롤의 옆에 안치된다.
그는 혈관질환과 심장질환을 오랫동안 앓아왔다. 그러나 클라크 게이블은 별로 자신의 건강관리에 신경쓰지 않아, 하루에 포도주 와인 한병 이상, 그리고 담배는 세 갑 이상을 피웠다. 또한 치과에서 벌어진 앞니를 교정하는 과정에서 시술이 잘못되어 입냄새가 심해졌지만, 양치질을 게을리했다. 입냄새는 심해졌고 혈관질환과 심장질환은 심해졌다. 중년기 이후부터는 발기부전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종전 이후
2차대전 종전 후 게이블은 다시 브라운관과 브로드웨이에 출연한 뒤 다시 영화로 복귀, 1940년대 중반부터 할리우드로 돌아와 여러 영화에 출연하였다. 1950년 "스피드 왕"에서는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고, 1953년의 "모감보 Mogambo", 종전의 "붉은 먼지"를 개작한 "붉은 먼지 2", 1958년의 "런 살리언트 런 디프 Run Silent Run Deep"에서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었다. 1960년 "거친 말(馬)과 여자"의 주연을 맡은 뒤 몇편의 영화와 연극, 뮤지컬에 출연한 뒤 1960년 말 아서 밀러의 "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 The Misfits"에 캐스팅되었는데 여기서는 늙은 카우보이 역을 맡았다. 이는 그가 죽기 2주 전에 끝내 그의 유작이 되었다.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은 클라크 게이블의 유작이면서 동시에 마릴린 먼로의 유작이기도 하다. 유명 배우였던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의 전 부인이었던 실러 아실레와 네번째 재혼을 했지만 곧 이혼하고 만다. 실러 아실레는 사교성이 좋고 스포츠를 잘 했다. 게이블은 여성편력을 그만두고 가정에 정착하려 했지만, 전혀 가정적이지 않은 실러 아실레는 늘 일 아니면 집 바깥을 돌았다. 실망한 그는 1952년 실러와 이혼한다. 1955년 그는 세 번의 이혼 경험과 두 자녀가 있던 39세의 케이 스프렉스 윌리엄스와 재혼하였다.
1955년에는 영화 제작에도 투자하여 제인 러셀과 그의 남편 밥 워터 필드와 공동으로 투자, 제작에 참여하여, 한명의 왕과 네 명의 여왕(1956)을 촬영하였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었던 그는 1958년에 출연한 영화 어느 교사의 애완동물에서는 필름 편집으로 노화된 얼굴과 급격히 증가한 체중을 보정하기도 했다.
혈관질환과 심장 질환을 오랫동안 앓아왔던 그는 1960년 무렵에는 로스앤젤레스의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고, 그 해의 선거는 우편으로 투표를 했다 한다. 병중이었던 그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에선 늙어가는 현대의 카우보이역을 맡았지만, 여전히 밧줄을 던져 마릴린 먼로를 사로잡을 만큼의 매력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1960년 11월 16일 관상 동맥 혈전증과 심근경색으로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사망한다. 1960년 심장질환이 악화되어 입원 중이었던 그는 11월 16일 케이 윌리암스의 전남편 소생 아들로 그가 양아들로 받아들였던 두 아들이 그의 병실에 왔다가 숨진 것을 발견했다. 두 양아들이 아버지가 숨을 쉬지 않는다고 말하자, 의료진은 신속히 응급처치를 했지만 그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바로 데스 마스크를 뜬 뒤, 다섯번째 아내 케이 윌리엄스와 결혼할 때 입었던 청색 양복, 결혼반지, 메달, 그리고 케이 윌리암스의 전남편 소생 아들로 그가 양아들로 받아들였던 두 아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관에 넣어졌다.
사후
그가 사망했던 병원에서 4개월 뒤 그의 유복자 아들 존 클라크 게이블이 태어난다. 마릴린 먼로는 그의 유복자 아들 존 클라크 게이블이 태어날 때 직접 병원에 찾아와서 이를 지켜봤다고 한다. 1977년에 린 토너번이 쓴 그의 일대기 "거장 만세 Long Live the King"가 출판되었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캘리포니아 글렌데일 포레스트론 묘지에 있는 세번째 아내인 캐롤 롬바드의 묘 옆에 안치되었다. 그의 다섯번째 아내인 케이 스프렉스 윌리엄스 역시 1983년에 사망하여 그의 옆에 안치되었다.
8위: 제임스 캐그니(James Cagney, 1899년~1986년)
제임스 프랜시스 캐그니 주니어(James Francis Cagney, Jr., 1899년 7월 17일 ~ 1986년 3월 30일)는 처음에는 무대 공연으로, 나중에는 영화에 출연한 미국의 배우이다. 비록 그가 다양한 방면에서 상을 받고 찬사를 받긴 했지만, 그는 주로 영화 사상 최고의 터프가이로 기억되곤 한다. 제임스 캐그니는 1999년, 미국 영화 연구소가 선정한 최고의 할리우드 고전배우 50인중 한명이다.
그는 1919년, 여장을 하고 시사풍자극의 코러스 라인에서 춤을 추는 것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그는 1925년에 처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기 전까지 수년을 코미디언과 춤꾼으로서 보드빌에 참여하며 지냈다. 이후 여러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았고, 결국 워너 브로스와 3주동안 주당 $500의 계약을 맺었고, 곧이어 7년 계약으로 확대되었다.
캐그니의 7번째 영화였던 공공의 적은 당대의 가장 영향력있는 갱스터 영화가 되었다. 그레이프프루트를 뭉개는 장면 등으로 유명한 이 영화는 제임스 캐그니를 워너 브로스의, 그리고 할리우드의 대스타로 만들었다. 1938년, 그는 더럽혀진 얼굴의 천사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이후 1942년, 양키 두들 댄디에서 조지 코핸을 연기해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는 1955년, 사랑하거나 떠나거나로 세 번째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이후 1961년 뇌졸중으로 인한 요양을 위해 은퇴를 했고 랙타임으로 복귀하기 전까지 약 20년간을 농장에서 요양을 하며 지냈다. 캐그니는 그의 연기생활동안 몇번이나 워너 브로스를 떠났으나 그때마다 더 좋은 조건과 영화등을 제의받고 다시 돌아오곤 했다. 1935년, 그는 워너 브로스를 급부장애로 고소했으며, 승소했고 이는 배우가 계약과 관련해 제작사를 상대로 처음으로 승리한 사례가 되었다. 그는 소송이 해결되는 동안 독립 영화 회사에서 일하기도 했고, 다시 워너 브로스로 돌아가기 4년전인 1942년에는 캐그니 프로덕션이라는 자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9위: 스펜서 트레이시(Spencer Tracy, 1900년~1967년)
스펜서 보나벤터 트레이시 (Spencer Bonaventure Tracy, 1900년 4월 5일~1967년 6월 7일) 는 미국의 영화 배우이다. 폭스 필름을 거쳐 메트로-골드윈-메이어를 거쳐 이후 연기 생활까지 50년 동안 좋은 연기를 보였으며 캐서린 헵번과의 로맨스로도 유명하다.
스펜서 트레이시는 17세에 해군에 입대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연극 무대로 옮겨갔습니다.
십년 정도 탄탄한 연기 활동을 하고났을 때 존 포드 감독이 그를 발견해 할리우드로 데려가 두 탈옥수에 관한 코미디 교도소에 가다(1930)에 주인공으로 출연시켰습니다.
매끈하지 않은 얼굴과 건장한 몸집, 강력한 존재감으로 터프가이 역할에 잘 맞았던 그는 퀵 밀리언(1931)과 씽씽 교도소에서의 2만 년(1932)처럼 갱스터 영화나 교도소 영화에 출연하다가 1935년 MGM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사실적이고 젤제된 연기스타일로 금세 메이저 스타가 된 그는 용감한 선장들(1937)과 보이스 타운(1938)으로 2년 연속 아카데미상을 수상했습니다.
1942년에 트레이시는 또 한명의 MGM 스타 캐서린 헵번과 여성의 해에서 팀을 이루게 됩니다.
퉁명스럽고 마초적인 신문기자인 트레이시가 스타 여기자(헵번)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의 불꽃이 튀었고 스크린에서의 두 사람의 관계는 키퍼 옵 더 플레임(1942), 스테이트 오브 유니언(1948) 그리고 두 사람이 결혼 관련 소송에서 서로 상대편을 맡은 변호사로 등장하는 아담의 갈빗대(1949), 헵번이 스포츠 스타로 트레이시가 그 매니저로 등장하는 팻과 마이크(1952)등 여러 편의 영화를 통해 더욱 깊어지고 다듬어졌습니다.
그들의 관계는 스크린 밖에서도 전개되었습니다.
가톨릭 신자인 트레이시는 아내와 이혼은 하지 않으려 했지만 할리우드에서는 누구나 그와 헵번 사이의 로맨스를 알고 있었던 몇 년 동안 아내와 떨어져 살았습니다.
연기가 성숙해 감에 따라 트레이시는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그의 딸로 출연한 코미디 영화 신부의 아버지(1950) 그리고 그가 출연했던 영화 중 두 편의 대본을 썼던 루스 고든의 자전적 희곡을 바탕으로 만든 여배우(1953)에서처럼 때때로 화를 잘 내지만 자애로운 가장의 역할로 무대를 옮겨갔습니다.
트레이시는 나의 아들 에드워드(1949)에서는 동정의 여지가 없는 역할을 맡았고 부러진 창(1954)에서는 가부장적인 농장주로, 배드 데이 블랙 록(1955)에서는 한 팔을 잃은 응징자로 특별한 존재감을 과시했습니다.
1967년에는 헵번과 함께 출연한 마지막 영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1967)에 출연했습니다.
거기서 두 사람은 흑인남자와 결혼하려고 하는 딸을 둔 부모를 연기했습니다.
트레이시는 그 영화의 촬영이 끝난 몇 주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10위: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 1889년~1977년)
찰리 채플린 경(영어: Sir Charlie Chaplin, KBE, 1889년 4월 16일 ~ 1977년 12월 25일)은 영국의 코미디언, 영화 감독이자 음악가로 무성 영화 시기에 크게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그의 캐릭터라 할 수 있는 '리틀 트램프' 캐릭터를 통해 전세계적 아이콘이 되었으며 이 캐릭터는 영화 산업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캐릭터로 인식된다. 그는 어린 시절 빅토리아 시대에서부터 그가 88세를 일기로 사망하기 전까지 75년을 일했으며 그동안 수많은 찬사와 비난을 받아왔다.
런던에서 채플린은 어린 시절동안 가난과 고난을 겪었다. 그의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어머니가 힘들게 살림살이를 하면서 채플린은 9살이 되기 전까지 보육원에 2차례 보내졌다. 14살에 되던 해에는 어머니가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채플린은 5살 때 처음 무대에 섰으며 10살 때 극단에 들어가서 어린 시절부터 뮤직홀에서 연기를 시작하였으며 크면서 무대에서 코미디언으로 활동하였다. 19살에 그는 프레드 카노의 극단에 들어갔으며 1912년에 영화제작자가 미국으로 초청하면서부터 할리우드에 정착하게 되었다. 채플린은 할리우드에서 코미디 분야로 유명하였던 맥 세넷(Mack Sennett)의 키스톤 스튜디오에 발탁되고, 그는 처음으로 《생활비 벌기》 (1914)에 출연하게 된다. 곧이어 그는 자신의 캐릭터인 '리틀 트램프'를 선보이게 되고 많은 팬들을 형성하게 되었다. 채플린은 초기에 출연하던 영화부터 감독을 맡기 시작하였고 이후 그는 키스톤에서 에사네이, 뮤츄얼, 퍼스트 내셔널까지 감독을 맡아 왔다. 1918년에 채플린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들 중 한 명이 되었다.
1919년에 메리 픽퍼드,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D. W. 그리피스와 함께 공동으로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를 설립한 그는 자신의 영화를 혼자 찍을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의 최초의 장편 영화인 《키드》 (1921)을 찍은 후 채플린은 UA에서 《파리의 여인》 (1923), 《황금광시대》 (1925), 《서커스》 (1928)를 찍으면서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된다. 1920년대에 출연한 유성 영화에 대해 혐오해하였던 그는 이어 《시티 라이트》 (1931), 《모던 타임스》 (1936)을 무성 영화로 촬영한다. 이후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그는 아돌프 히틀러를 풍자한 《위대한 독재자》 (1940)을 발표하였다. 1940년대에 각종 스캔들과 논쟁에 연루되면서 채플린의 인기는 추락하게 되었고 채플린은 공산주의자의 사상을 동의하였다는 의심을 받게 된다. 1952년에 FBI는 그의 미국 입국을 금지시켰으며 채플린은 스위스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는 말년에 '리틀 트램프' 연기를 그만두고 새로운 역할들을 하게 되었는데 이 때 영화들은 《무슈 베르두》 (1947), 《라임라이트》 (1952) 등이 있다.
채플린은 대부분의 영화를 감독하고 각본을 썼으며, 제작, 편집, 주연, 그리고 음악까지 맡았다. 그는 자신의 영화에 대해 완벽주의를 고집하였으며 UA를 설립하면서 행한 재정적 독립은 이후 그의 영화가 영화사에서 창조적인 작품으로 기억되게 하였다. 그의 영화는 비애감이 결합한 슬랩스틱 코미디가 특색을 이루고 있으며 내용에는 자신의 자전적 모습이 그려져 있다. 1972년에 아카데미상은 "지난 세기동안 그가 만든 헤아릴 수 없는 기법들이 이후 영화 예술에 영향을 끼쳤다"는 이유로 그에게 공로상을 수여하였다. 그의 영화들은 대부분 위대한 영화 순위에 항상 오르며 1999년 미국 영화 연구소는 그를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배우 50명에서 남자배우 순위 중 10위에 선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