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B 정책과 3C 정책
세계 정책의 일환으로 20세기 초 독일 제국이 추구한 정책. 베를린(Berlin) - 비잔티움(Byzantium) - 바그다드(Baghdad)를 잇는 철도를 부설하는 것이 정책에서 핵심 내용이었기 때문에 이 도시들의 앞 글자를 따와서 3B 정책이라고 부른다.
세계 정책을 내세워 독일의 패권을 전세계로 확장하고자 했던 빌헬름 2세 치하의 독일 제국은 서아시아 일대에도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한다. 그 중에서도 오스만 제국이 추진 중이었던 바그다드 철도는 독일의 군침을 흘리게 만들었다. 만약 이 철도를 독일이 부설할 권리를 손에 넣게 된다면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거쳐 오스만 제국에 이르는 방대한 영역이 독일의 경제권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 이러한 이해 관계 하에 정부의 지원을 받은 도이체방크는 1893년 바그다드 철도 부설권을 수주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다른 유럽 열강들에게 독일의 서아시아 일대에서는 세력 확대는 전혀 달갑지 않은 결과였다. 우선 영국의 경우 독일의 이러한 팽창이 자국의 보물단지 수에즈 운하와 인도를 건드리게 될 것을 심히 우려했다. 게다가 영국은 이 시기 이미 페르시아 만 일대를 자국의 세력권으로 확보하고 케이프타운 - 카이로 - 캘커타를 잇는 소위 3C 정책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과의 마찰은 필연적이었다. 또한 남하 정책으로 오스만 제국을 압박해고, 페르시아 일대에서 영국과 그레이트 게임을 한창 벌이고 있던 러시아 역시 경쟁자가 하나 더 늘어나는 셈이었기 때문에 독일의 3B 정책을 전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독일의 영원한 숙적 프랑스 역시 중동 지역에 나름대로 침을 발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의 철도 부설을 열심히 발목 잡았다.
오랜 외교적 줄다리기 끝에 독일은 마침내 1911년에는 러시아, 그리고 1914년에는 영국을 설득하는데 성공하면서 드디어 꿈에 그리던 3B 정책을 실현하나 싶..었...는데... 같은 해 7월에 1차대전이 발발하고 두 국가가 독일의 적성국으로 변모하면서 일장춘몽으로 끝나고 말았다.
한편 영국의 3C정책이란 19세기 말 20세기 초 영국 제국주의의 기본 정책으로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 이집트의 카이로, 인도의 캘커타를 말하며 이 지역을 연결하는 것이 영국의 전략적 야망이었다. 영국은 일찍이 식민지 경영에 나서 1858년 인도를 직접 통치하고 인도로 가는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1875년 수에즈 운하의 주식을 사들이는 등 이집트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또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까지 아프리카를 종단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3C정책은 독일의 3B정책과 충돌하게 되고 마침내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1914년 6월 사라에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처가 세르비아 청년에 의해 암살 당한 사라에보 사건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발칸반도를 둘러싼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대립, 영국과 독일의 제국주의 대립, 알사스, 로렌을 놓고 벌어진 프랑스와 독일의 대립 등이 뒤엉켜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탐욕 때문에 생기는 불행이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도 명분은 세계평화지만 실제는 살육과 파괴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