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년∼1895년)
독일의 사회주의 철학자, 경제학자로 마르크스주의를 창시했다.
독일 라인란트의 바르멘시(오늘의 부퍼탈)에서 방직 공장주의 집에서 태어났다. 아들을 자신 같은 자본가로 키우려는 아버지의 뜻에 의하여 엥겔스는 김나지움을 중퇴하고 브레멘 상사에서 일했다. 이 시기에 그는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의 착취와 법과 결탁한 계급 투쟁 탄압으로 고통받는 현실을 보고, '도이칠란트 통신'에 지배 계급을 비판하는 수많은 글을 내었다. 1841년에 엥겔스는 베를린에서 지원병으로 포병 연대에 들어 갔으며,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청강하며 헤겔리안 좌파가 되었다. 군 복무를 끝마친 그는 영국의 맨체스터로 건너가 영국 노동 계급의 비참한 삶을 깊이 연구하였고, 차티스트 운동 관련자들과 연계를 맺었으며, 영국의 출판물들에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앵겔스의 이러한 현실 비평은 마르크스가 이상적 사회주의를 비롯한, 현실에 맞지 않는 사회주의 조류들을 극복하고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고유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1844년, 마르크스와 만난 그는 그 뒤로 마르크스의 열성적인 동지이자 후원자가 된다.[2] 마르크스와 함께 의인동맹에 가입한 후 의인동맹을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바꾸고 저 유명한 공산당 선언을 함께 작성하였다. 마르크스 사후에도 그가 미처 다 쓰지 못한 자본론의 2권과 3권의 원고를 정리하여 출판하고 제2인터내셔널을 설립해 국제공산주의 운동에도 힘썼다. 말년의 주요정당으로 등극한 독일 사회민주당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1895년 8월 5일 식도암으로 세상을 마쳤으며,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그의 유지(遺志)에 따라 해저에 가라앉혀졌다. 저서로는 자연변증법 등이 있다.
엥겔스는 1863년 1월에 사실혼 관계였던 아내 메리 번스가 사망했을 때 마르크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메리가 죽었다네... 월요일 저녁까지는 아주 건강했는데 내 감정은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가 없네. 그 가엾은 여자는 온 마음으로 나를 사랑했는데."
그러자 마르크스는 다음날 답장을 보냈는데 의례적인 조의를 한 마디 표한 후 곧바로 아이들 학비와 집세 독촉으로 힘들다는 푸념을 주절주절 늘어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메리가 아니라 어차피 병도 들고 또 살 만큼 산 우리 어머니가 죽었어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 . 환경의 압박에 시달리는 '문명인'의 머릿속에는 별 이상한 생각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 안녕."
닷새동안 엥겔스는 아무런 답장도 하지 않다가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이번에는 내가 당한 불행과 자네가 그 일을 바라보는 차가운 태도 때문에 자네한테 더 일찍 답장을 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네 , 자네도 그럴 만하다고 생각할 걸세. 내 모든 친구들과 그저 알고 지내는 사이일 뿐일 속물들까지도 이번에 나에게 깊은 충격을 준 이 일을 두고 내가 바랐던 것 이상으로 나에게 동정과 우정을 보여주었네. 하지만 자네는 이것이 자네의 '냉정한 태도'의 우월성을 보여줄 적당한 기회라고 생각한 모양이지. 그럼 그렇게 하게나!"
엥겔스가 이렇게 크게 화를 내고 경제 지원을 끊어버린 후 3주 동안 마르크스는 돈이 너무 궁해져서 아내와 날이면 날마다 부부싸움을 한 것과 동시에 엄청난 생활고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사과 편지를 썼고 엥겔스가 그것을 받아줌에 따라 관계를 회복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 후일담이 있는데 연인 메리 번즈의 사망 이후 그녀와 동거하던 여동생 리디아 번즈와 연인이 된다. 엥겔스는 당시의 결혼 제도에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리디아 번즈가 죽기 전 종교적 이유로 결혼을 간청하자 혼인 성사를 치르고 혼인 신고를 했다.
인간의 진화에 대해 의견을 피력한 적이 있다. 당시 어떤 학자들은 인간의 두뇌가 손보다 먼저 진화했을 거라고 주장했는데, 엥겔스는 그게 부르주아식 사고라고 비판하고 이족보행을 통해 손이 자연스러워져서 두뇌가 발달했을 거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게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