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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 이야기

철혈재상(鐵血宰相, IronChancellor)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 1815년~1898년)

작성자관운|작성시간18.06.06|조회수1,595 목록 댓글 0


철혈재상(鐵血宰相, IronChancellor)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 1815~1898)

 

 

 

 

 

 

 





 

 

근대 독일의 기틀을 마련한 주역

 

19세기 후반 프로이센의 재상이자 독일 제국의 재상. 철혈 재상(Eiserner Kanzler)이란 별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Eiserner라는 단어는 철을 뜻하는 단어이고 피를 뜻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직역하면 철의 재상이라 불러야겠지만, 아래의 연설과 피라는 단어가 가지는 냉혹한 이미지 때문에 한국이나 중국, 일본 등의 한자 문화권 국가에서는 철혈재상으로 의역되었다. Eiserner Kanzler를 영어로 쓰면 Iron Chancellor.

 

대중적으로는 '독일 제국 건국의 주역'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비스마르크는 독일 밖으로는 19세기 유럽의 세력 균형을 주도했으며, 독일 안으로는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기민한 회유책으로 국내의 불만을 완화하는 등 건국을 제외하고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여론을 무시하고 본인만의 국가주의적 정책을 밀어붙이던 독단성과 뒤에서 음흉하게 음모를 획책하던 음모론자 같은 인상으로 많이 회자되지만, 알고보면 아이러니하게도 특히 말년으로 갈수록 평화주의자스런 면모도 보여줬다. 어쨌든 정치적인 이해를 떠나 독일을 일으켜세우고 19세기 후반의 유럽 외교를 틀어쥐고 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성격을 본받을 위인은 아니어도 그 기량이 대단했던 사람이었음은 분명하다. 오죽하면 영국 역사가 A. J. P. 테일러는 "19세기 유럽 역사는 나폴레옹과 비스마르크라는 두 거인을 중심으로 쓰여질 수 있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물론 E. H. 카는 이러한 평을 크게 비판했지만.

 

하지만 동시에 (자신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유럽 위주로 흘러가는 세계사의 운명을 뒤바꾼 인물이기도 한데, 전보를 매개체로 프랑스를 패퇴시키고 독일이라는 새로운 커다란 국가를 건국함으로써 유럽의 국가간 형세에 변화를 주었다는 점이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의 유력한 원인 중 하나가 독일 제국이란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한 것이라는걸 생각해보면... 물론 비스마르크도 이런 향후의 미래에 대한 위험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국내에서의 회유책부터 시작해 해외에서는 삼제동맹, 삼국동맹, 그리고 1887년 러시아와의 재보장 조약 등의 여러가지 조약을 체결하면서 외교력으로 인한 안정적인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하필 말년에 팽창 정책을 부르짖는 혈기왕성한 빌헬름 2세가 즉위하면서 갈등을 빚고 정계에서 은퇴하게 된다.

 

 

2. 초기 활동

 

 

작센 주 쇤하우젠(Schönhausen)에서 프로이센 하급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비스마르크 가문은 멀리가면 15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 시절 호엔촐레른가문이 브란덴브르크 선제후직을 하사받기전 부터 브란덴부르크 지방에 정착했었고 이후 통치자인 호엔촐레른 가문을 모셨다. 할아버지 대에는 프리드리히 대왕 밑에서 봉사했고, 큰아버지들은 나폴레옹을 독일에서 쫓아낸 해방전쟁(러시아 원정) 때 군공을 세워서 육군 장군까지 지내는 제법 뼈대있는 가문이었다. 하지만 복잡한 가문의 상속법 때문에 큰아버지들의 영지는 형제인 아버지가 아닌 비스마르크 가문의 먼 친척 연장자에게 넘어간다. 큰아버지 중 한명은 전쟁중에 전사했고 한명은 육군 중장까지 오르는데, 평생 독신이었다. 아버지는 한편 지주였으나 체면치레로 예비역 장교직 지위만 획득한 듣보잡이었다.

 

반면 외가 멩켄 가는 귀족은 아니지만 부르주아 지식인 집안으로 외증조부는 법학 교수, 외조부는 법대를 나와 외교관, 후에 관료 생활을 했는데 비스마르크의 젊은 시절 커리어는 외조부와 많이 닮았다. 젊은 시절 편견으로 관운이 신통치 않았던 것까지왜냐하면 비스마르크의 외증조부는 법학 교수이면서 당시 불온 사상으로 취급받던 급진 자유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 자식이었던 외조부는 위험 인물로 의심 받아 스웨덴 대사 이후 관운이 신통치 않았다. 어머니는 원래 비스마르크의 큰아버지의 결혼 상대로 거론되었는데 나이차가 너무 많다고 생각한 외삼촌이 외할머니를 설득해서 동생에게 시집보냈다고 한다. 어머니는 외교관 가문 출신에 베를린에서 관료 생활을 했고 어릴때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 빌헬름 1세랑 궁정에서 소꿉친구였기 때문에 자부심이 컸고, 베를린에서 곱게 자라고 화려한 성격이라 우유부단한 아버지는 어머니한테 눌려 살았다고 한다. 비스마르크를 비롯한 형제들의 진로와 학습에 일일히 간섭했고 귀족 출신들은 보통 군대로 빠지는데 비해 비스마르크는 부르주아들이 많이 가는 법대로 진학하는데 어머니의 치맛바람 영향이 컸다고 전해진다.

 

정작 어머니는 가정적이지 않고 사교계를 좋아해서 가정은 뒷전이고 답답한 시골 생활에 질린 나머지 형제들을 기숙사에 처넣고 놀러 다니기 바빴다고 한다. 비스마르크의 형제들은 어머니가 여기저기 놀러 다니기 바빠서 기숙사에서 명절 때도 나오지 못하고 공부만 강요받았고 그 결과 가정적인 시골 지주인 아버지와는 사이가 좋았지만,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못해 훗날 언급조차 꺼릴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비스마르크의 어머니는 대학의 도시 하이델베르크에 보내면 격한 성격의 비스마르크가 술 퍼먹고 싸움질할 게 우려되어 하노버의 괴팅엔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부 시절은 술퍼먹고 싸움질에 결투에 난동으로 악명이 높았다. 학창 시절 '10계명 중 어기지 않은 게 없는 망나니'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친구들이 자신만 빼놓고 파티장의 문을 잠그고 파티를 열자 권총으로 문을 쐈다()고 하니 성격 하나는 불같았던 것 같다. 괴팅엔 시절 25번이나 결투를 벌였다고 하고 대학 감옥의 단골 수감자였다고 전해진다. 대학 시절 처음 가입한 서클은 훗날 행적과 상반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자들 모임인 부르셴샤프트(Burschenschaft) 였다. 이후 이런 행적에 대해서 비스마르크는 별다른 변명없이 "호기심에 가입했지만 그들의 지적 수준이 낮아서 금방 탈퇴했다."며 수준드립으로 얼버무렸다. 아무튼 매우 운이 좋았던게 2년 후 프로이센 정부에선 부르셴샤프트 가입자들에겐 공직 금지령을 내려버려서 하마터면 관운이 막힐 뻔했다.

 

괴팅엔 시절 방탕한 생활로 도박 빚까지 져서 괴팅엔에서 학교를 다니기 어려워지자 자퇴를 하고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 편입한다. 베를린에서도 그다지 학업에 열성적이진 않았으나 6세때부터 어머니의 치맛바람으로 독일 내 최고 등급에 해당하는 기숙학교를 다니면서, 다른 과목엔 흥미가 없었지만 셰익스피어와 바이런에 심취하고 영어, 불어, 러시아어, 라틴어 등은 우수한 성적을 냈기 때문에 당시 현재보다 학업 부담이 매우 적은 대학을 졸업하는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그의 회고로는 공부를 전혀 안 했다고 한다. 실제로 성적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중간 이하졸업 후 법원 서기 시험을 위해 일주일 정도 공부를 한 것 때문에 매우 억울해하고 다녔다고

 

어쨌든 괴팅엔 대학과 베를린 훔볼트 대학을 다니며 인맥을 많이 쌓았고, 이는 후에 유럽 최고의 외교관으로서 발돋움하는데 큰 자산이 되었다. 또한 다양한 경험과 만남을 통해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시골 융커식의 사고가 더욱 유연해지게 되었다. 대학 때 만난 미국인 친구와는 평생 서신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이 미국인 친구는 이 당시에도 하버드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을 온 사람. 당시 미국에도 명문 학교가 있긴 했지만 유럽보다 학문 수준이 떨어져서 미국 상위층은 1차대전 시기 이전까지 유럽 유학이 많았다. 이 미국 친구는 역시 외교관이 되었고 네덜란드 역사에 정통한 저술가이기도 하다. 이름에 von 자를 넣고 다니는 촌스런 시골 귀족과 변방 출신(?) 유학생의 사이는 처음부터 좋았던 건 아니라고 하며, 이후 비스마르크가 새로운 세계에 안목을 여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법대를 나와서 법원에 들어가 처음에는 법관이 되려 판사 서기가 되었다. 이 당시엔 법대를 나와 큰 결격이 없으면 법원서기가 되고 수습을 거쳐 법관이 되는 테크였다. 그러다 적성과 맞지 않다고 생각하고 1년만에 때려 치고 외가의 직업인 외교관에 흥미를 가지게 되고 외교관 시험을 친다. 막상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지만 외교관들의 세계는 귀족 출신인 그에게도 집안이 듣보잡이라 출세하기 어렵다는 데 잠시 실망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외국 강대국이 아닌 프랑크푸르트의 독일연방 외교관으로 발령이 난 게 결과적으로 경력에 도움이 된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며 수습 기간은 아헨에서 하게 되는데 꽃뱀에게 낚여서 약혼까지 하고 빚을 지고 몇 주동안 결근했다가 면직 처벌되지만 외교관 시험 동기(그의 아버지가 매우 유명한 교수라서)의 도움으로 복귀에 성공했다. 여기에다 또 17살짜리 영국 귀족 처녀 꽁무니를 쫓아 다니며 스위스까지 무단 결근하고 넉 달동안 여행을 떠났고 당연히 짤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나 운 좋게도 별 다른 징계 없이() 넘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도박빚을 많이 지는바람에 아헨에서의 생활은 어려워졌고 25세 무렵 나이에 도피성으로 육군에 입대해 버린다.

 

육군 장교 군복을 입고 나온 초상화가 많아서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다른 귀족 출신 자제와는 달리 군대를 싫어했고 대학 시절 결투 시에 입은 오른팔 부상을 근거로 병역 면제를 신청했다가 퇴짜를 맞을 정도였다. 병역은 외교관서 짤린 시기 예비역 육군 소위로 임관해서 소집 기간 1년을 채워야 되는데 귀찮아서 몇 달 다니다가 대충 다니고 땡땡이를 쳤는데도 전시도 아니고 관대한 지휘관을 만나 별 문제 없이 넘어갔다고 한다. 훗날 독일 통일 후에 땡땡이나 치던 이 예비역 육군 소위는 '육군 원수' 계급을 수여받는다.

 

군대 생활은 프로이센 왕실의 거처 포츠담 부근의 근위 연대였는데 당연히 높으신 분들 자제들이 몰려있는 땡보직이었다. 이마저도 1년을 못채우고 땡땡이 치는데 뒤늦게 농사를 배우려고 농업 학교에 다녀서였다. 농업에 깊이 관심을 보이면서,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포메른 농장과 가까운 곳으로 도망가서 농장 일에 몰두했다. 이때 농업에 빠진 건 코스프레가 아니고 진짜였는데 농부들과 격의 없이 사투리를 주고 받을 정도로 농장 일에 깊이 빠졌고, 농업 학교 당시 배운 지식을 이용하여 당시 최신 기술로 만든 비료를 도입하고, 사탕수수 재배와 공장까지 만들면서 수완 좋게 경영하여 대학 시절과 외교관 시절에 얻은 도박 빚을 다 갚았다.

 

성공한 지주가 되자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 들었는데 마침 고향 근처에 수재가 나자 제방 감독관을 탄핵하고 스스로 해 보겠다며 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이 무렵 막 수립된 의회에서 마침 보궐 선거 자리가 나자 본격적으로 공직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공직 생활 초기에는 튀어 보이려는 성향이 매우 강했는데 1848년 혁명 당시엔 강경 진압을 주장하면서 자기 영지의 농민 40명을 무장시켜 베를린으로 쳐 들어 가려 했다. 이후 베를린으로 잠입해서 왕실 인사들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역쿠데타의 주역이 되려고 했는데 이 때 오해로 오히려 빌헬름 왕자의 부인이었던 작센 바이마르의 아우구스타에게 역적 취급을 받고 이런 불편한 관계는 수십년간 비스마르크를 괴롭히게 된다.

 

어쨌든 혁명 진압 이후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부르주아들과 자유주의자들의 요구를 일부 받아 들여 납세액에 비례한 제한 선거를 허용해서 기득권층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왔다. 이들은 의회 같은 건 필요 없다며 자신들의 의회마저 없애달라고 주장하게 되는데, 비스마르크는 이때 국왕의 뜻에 따라야 된다고 주장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이 시기 전후로 비스마르크를 매우 눈여겨 보았는데 혁명 후 비스마르크가 결혼을 하고 베네치아로 신혼여행을 하자, 마침 우연히 그곳에 체류 중이던 국왕이 직접 비스마르크를 불러 독대하고 베를린으로 돌아오자 듣보잡 비스마르크를 일약 독일 연방 의회의 프로이센 대사로 임명하게 된다. 이런 벼락 출세 덕에 사방에서 비난이 쏟아졌는데 그의 예전 행적을 들어 술고래 대학생, 타락한 융커, 포메른의 돼지치기는 안 된다는 여론의 반발이 있었고 왕세제 빌헬름 왕자조차 "한낯 예비역 육군 소위 따위에게 그런 중차대한 임무를 맡기면 곤란하다."라며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어쨌든 이런 해프닝 이후 1851년부터 외교관으로 복귀하여 프랑크푸르트 독일 연방 의회 외교관으로 활약하게 되는데 오스트리아의 주도권에 맞서서 북독일의 프로이센 위주의 복수주도권을 주장하게 된다.

 

연방 회의에서의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일화로 소위 '위신 투쟁'이라 불리는 사건도 있다. 당시 연방 회의 의장국이자 실질적인 맹주였던 오스트리아 대표만이 회의석상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었는데, 비스마르크가 '왜 담배를 피우면 안 되는가?'라며 의장에게 직접 불을 청해 담배를 피운 것이다. 고작 담배 한 개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 행동은 꽤 큰 파장을 불러온 초유의 사태였다. 당황한 각국 대표들은 심지어 본국에 이를 보고하며 '담배를 피워도 될 것인가'를 묻기까지 했고, 결국 바이에른 대사 카를 폰 슈렌크(Karl von Schrenck)를 시작으로 비흡연자를 제외한 거의 모든 대표들이 차례로 담배를 피워 물기 시작했다. 작센 대표 율리우스 고틀롭 폰 노스티츠(Julius Gottlob von Nostitz)는 내각의 허락을 받아내지 못했지만, 하노버 대사가 피우는 것을 보고 고심 끝에 그 다음 석상에서 결국 실행에 옮겼다. 본인 말로는 '칼집에서 칼을 뽑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대사들까지 '조국을 위해 담배를 피우는 희생'을 하였고, 마지막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고 남은 것은 단 한 명 헤센-다름슈타트 대표 뿐이었다. 프로이센이 더 이상 오스트리아의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 담배 한 개피로 주장한 것이다.

 

이후 독일 연방의회에서 임기가 끝나고 1858년 오스트리아의 압력으로 쫓겨나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 편을 들어 중립을 주장한 인연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발령받았다. 이 때 알렉산드르 2세와 차르 가족까지 몰려 나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비스마르크의 외교 기본 방침 중 하나인 대러 친선은 이 시기부터 이어진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죽고 빌헬름 왕세자가 즉위한 후, 군비 확대와 징병제 기간 연장을 두고 의회와 충돌하자 전격적으로 프로이센 수상에 임명된다.

 

 

3. 재상

 

 

3.1. 독일의 통일을 이끌다

 

 

프로이센 왕국 재상으로 취임하자마자 맡은 난관은 징병제 기간 연장과 육군 조직 개편이었다. 명목은 세금 내는 부르주아들이 세금 내기 싫어서 빼애액거리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당시 프로이센 육군 편제는 1815년 해방 전쟁 시기 편제와 동일하게 15만명에 불과했는데, 19세기는 인구가 폭증한데다가 , 1848 혁명 진압 시 드러났듯이 군부에서 인원 부족을 호소했고, 군인을 늘릴 필요성은 부르주아들도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부르주아들이 보기에 가장 큰 문제는 예비군 지휘관을 현역 프로이센 장교가 지휘하도록 바꾸는 것이었다. 군대는 상명하복 조직이라 권위주의를 젊은이들에게 강요할 것인데다가, 현역 장교가 유사 시 예비군을 지휘하게 되면 자유주의자들을 탄압하는 용도로 악용할 소지가 높아서 너무 위험하다는 것. 게다가 부르주아들은 군국주의 국가 프로이센군에서 융커들이 독점하고 있는 현역 장교 직위는 접근하지 못했으나 예비역 장교 직위를 일정한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가 있으면 보상으로 하사받기에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가 축소되는것으로 여겼다. 이런 국면에서 일반적인 정치인이라면 타협으로 가장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마지 못한 척 다른 요구를 일부 들어 주기도 하겠지만 비스마르크는 협상 비슷한 것도 없었다. 아예 의회라는 제도 자체를 무시해버렸다. 의원들을 비아냥거리면서 의회 예산권은 무시하고 국가는 항시 존속해야 하기 때문에 예산 승인이 없어도 세금 때려서 걷을 수 있다는 발상으로 밀어 붙여 버린다.

 

 

 

보불전쟁 승리 이후 베르사유 궁에서 독일 제국 수립을 선포하는 유명한 그림. 원래 비스마르크도 검은색 육군 예복을 입고 있었으나 빌헬름 1세 황제의 특별 지시로 그림에서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흰색 예복을 입은 것으로 그려졌다.

 

 

빌헬름 1세를 도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보불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독일 제국 건국을 이뤄낸 주역이다. 취임사에서 한 "언론이나 다수결이 아닌, (=무기)과 피(=전쟁)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는 말에서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는 현대적 관점으로 볼 때 국가를 준전시상황으로 상정하여 정치적 반대파들의 입지를 없애고 헌법을 무시하며 방식의 국가 운영을 이끌어 간 것으로 분명 비민주적인 정책이기는 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딱히 민주적이지는 않았다. 제국 정체가 유지되고 있던 러시아, 오스트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조차 나폴레옹 3세가 독재를 하던 시절이다. 정작 비스마르크가 무너트리긴 했지만그리고 그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백색테러, 사형 남발 등을 오히려 자제했다는 점에서는 평가를 좋게 줄 수 있다. 즉 보수반동으로 불리나 강압적 수단에만 의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부르주아들을 엿먹이기 위해서 사회주의자 페르디난트 라살이 운영하는 출판지의 빚을 갚아주기도 했다.

 

이시기 비스마르크의 초기 외교는 전쟁을 회피하지 않았다.. 재임 시절에 프로이센은 덴마크(슐레스비히-홀스타인을 점령),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전쟁을 해서 승리했는데, 육군 수뇌부인 몰트케와 갈등을 빚을 정도로 정치 우위를 강조했다. 어디까지나 전쟁은 외교의 (강압적) 수단이라는 발상이었다. 이 때문에 몰트케를 비롯한 독일 육군 사령부들과 계속하여 갈등이 생겼으나 프로이센 육해군최고사령관인 빌헬름 1세의 신임을 이용해서 끝내 관철시켰다.

 

비스마르크가 특히 유명한 것은 1860 ~ 1870년대의 외교 정책과 전쟁 과정 때문으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때는 프랑스가 제시한 보상책에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은채 모호한 태도를 취해서 프랑스의 기대감을 이용했고, 오스트리아를 물리친 뒤에는 엠스 전보 사건등을 이용하여 국내외 여론에 불을 붙혀 구실을 찾던 프랑스에게 미끼를 던져주고 선제 침공을 유도함으로써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발발시키고독일은 물론 국제 여론도 우호적으로 돌려놓았다. 그 결과는프랑스는 제 2제정은 패망하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북독일 연방에 남부 독일 국가들이 결합하여 독일제국이 성립하여 중부유럽 강대국이 탄생했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 비스마르크는 근대사의 중요 인물이다.

 

이 시기의 일을 알려주는 일화가 있는데, 독일 제국 성립 전에 독일계 연방 국가들이 모인 프랑크푸르트 연방회의에서 비스마르크가 가슴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나타나자 군인 출신이었던 오스트리아 대표가 "얼마나 많은 전쟁에 나갔길래 그렇게 많은 훈장을 달았소?"라고 말했다. 이것은 비스마르크가 문관 출신임을 비꼰 것이었는데, 비스마르크는 주눅 들지 않고 "외교전에서 딴 것이라오."라고 능청스럽게 받아 넘겼다는 일화가 있다.

 

그 유명한 알자스-로렌을 빼앗아 온 것도 당시의 일이다. 백년전쟁 때 알자스의 동레미에서 잔 다르크를 배출해낸 지방이라고도 하는데, 이후 독일지역의 제후령이었다. 그 후 17세기에 30년 전쟁의 결과로 프랑스가 재점령했는데, 이백 년이 조금 지나 비스마르크시대인 19세기들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독일이 다시 점령해 반 세기 정도 통치하다가 1차대전의 결과 이 지역은 다시 프랑스에게 돌아갔다. 역사적으로 독일과 프랑스 경계에 있는 이 지역에 얽힌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유럽 경제통합, 나아가 유럽연합 구상의 기원이기도 하다.

 

 

3.2. 비스마르크 동맹 체제

 

 

보불전쟁 이후 절묘한 외교술로 프랑스를 고립시키며 독일의 안전이 보장되었던 1890년대까지의 유럽의 외교 구도를 흔히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부른다. 베르사유 체제라든가 냉전 체제와 다르게, 한 시대의 프레임에 인명이 부여된 몇 안 되는 사례이다. 메테르니히 체제의 사례도 있으니 유일하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빈 체제라는 명칭이 더 일반적으로 쓰이는 것도 사실이니까

 

사적인 보수적인 가치관과는 별개로 재상으로서 활동한 공무에서 유일하게 까이는 점이, 비스마르크 같은 능력자가 아니면 유지하기 곤란한 체제를 만들었다는 점인데, 비스마르크는 퇴임 이후에도 자신을 멀리하는 황제에게 간언하거나 언론을 통해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하는 노력 하는 등, 계속 업무를 유지했으면 체제는 더욱 굳건해져 뛰어난 외교관이 없어도 유지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독일 제국의 수립 이후 비스마르크는 숙적 프랑스가 세력을 재건하여 독일에 복수할 가능성을 극도로 경계했으며, 이에 따라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을 외교 정책의 제1 과제로 삼았다. 또 비스마르크가 평생 일관되게 관철한 외교 철칙은 "외교란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다."라고 전해지며, 프랑스의 고립도 이 수준의 원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영국이 각지의 식민지 확장 등으로 기타 강대국들과 갈등이 심한 가운데 유럽 내에서는 중립적 태세를 취하자, 공통의 이해 관계가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손을 잡는 동시에 친러시아 정책을 펴면서 프랑스의 우방국이 될 만한 강대국 자체를 없애버린 것이다. 통일 이후에는 전쟁을 벌였던 오스트리아와 관계를 회복시키고 프랑스를 고립시켰으니 비스마르크의 외교력이 어떤 수준이었는가를 잘 나타내주는 사례다. 이렇게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러시아 사이에 맺어진 동맹 관계를 3제 동맹이라고 하는데, 세 국가가 모두 제정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19세기 후반 유럽 내 세력 균형의 효시로 평가된다.

 

그러나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범슬라브주의적 팽창을 시도하면서 잦은 위기가 벌어졌는데, 1877년 러시아-투르크 전쟁 당시 러시아의 지지를 받는 발칸 국가의 영토 확장을 베를린 조약을 통해 축소시키면서 갈등이 심각해져 한때 3제 동맹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 본인은 러시아가 다시 독일과 손을 잡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이렇게 1881년 재건된 3제 동맹은 1884년에 재확인되고, 1887년에는 독일과 러시아 간에 재보장 조약이 맺어져 비스마르크의 해임까지 생명을 유지한다.

 

자유주의자인 프리드리히 3세와는 성향상 자주 대립했고,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 황후와는 사이가 매우 나빴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독일 통일 후에는 사람이 바뀐 것마냥 평화주의자로 돌변했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항상 보수적 현실주의자였고 더 이상의 전쟁은 독일에 해롭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때문에 빌헬름 2세를 비롯한 팽창론자들에게 밀려 물러나면서, 비스마르크는 "이런 식으로 가면 내가 떠나고 15년 후에는 파멸이 올 것이다."라고 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15년 후 삼국 협상이 성립되고 독일은 외교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어 양면 전쟁에 위협에 쳐하게 되었다.

 

실제로 해임된 1890년 이후 17년 만에 유럽 내에서는 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의 대립이 심해졌고, 그 원인도 빌헬름 2세의 반영 - 반러시아 정책이었다. 다만 기폭제가 된 발칸 반도 문제는 오히려 1870년대 이후로 계속 심각해지던 문제로, 비스마르크도 여리박빙의 상황에서 다루었던 문제이다. 일례로 러시아와 재보장 조약을 맺고 오스트리아와 2국 동맹을 각각 맺었지만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관계는 갈수록 나빠졌다. 이 난제를 잘 다룬 것이 비스마르크의 업적에 포함된다. 하지만 결국 2국 동맹은 빌헬름 2세의 재보장 조약 거부로 인해 깨지게 되었고, 빡친 러시아는 1892년에 프랑스와의 러불동맹을 맷어서 독일 포위를 사실상 완성시켰다.

 

이렇게 보면 비스마르크 체제를 유지하는것이 독일 입장에서도 더 낫겠지만, 식민지 쟁탈전에 막차를 탔던 당시 독일(=빌헬름 2) 입장에서는 비스마르크 체제를 유지하면서 팽창하는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는데. 중립을 지켰던 과거와 다르게 아프리카와 뉴기니 그리고 산동반도를 차지하게 되니 기존 식민지를 많이 확보한 영국과 프랑스와의 충돌을 피할수가 없었고. 이는 보어인들에게 간접적으로 지원을 해준 보어전쟁과 직접적으로 프랑스와 외교로 싸운 모로코 위기로 영국과 프랑스와의 극심한 외교적 분쟁이 일어났는데. 하지만 당연히 물러설리가 없는 빌헬름 2세가 해군을 팍팍 밀어주면서 영국의 역린을 건들었고, 비스마르크 체제에서 러시아와 함께 중요했던 영국이 등을 돌리고 프랑스와 영불협상이 성사가 되는 결과가 일어났다.

 

 

3.3. 통일 이후의 내치

 

 

반면 국내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민주주의의 제대로 된 정착을 방해하는 헌법적 규범과 의회의 의사를 제멋대로 개변하고 무시하는 등의 행태를 보였다. 제국 재상은 제국 의회가 아닌 황제에게만 책임을 진다는 규정인데, 이 때문에 독일의 학자들에게서는 국내정치에 관한 한 그리 좋은 평을 받지 못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자본주의를 윤리적 측면에서 정당화한 막스 베버이다. 베버는 아예 대놓고 비스마르크를 가리켜 독일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막은 사람이라고 깐다. 다만 이 규정은 사실 비스마르크가 의회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반면 빌헬름 1세는 말 그대로 좌지우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 자신의 보수성도 엄청난데 1848년 혁명 당시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정신이상을 일으켜 노동자들의 시위를 무력진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켜 국왕을 폐위하고 무력진압에 찬성하는 동생 빌헬름 1세를 국왕으로 올리려는 계획을 주도했을 정도로, 그 계획 때문에 차후 빌헬름 1세의 재상이 되었을 때도 빌헬름 1세의 왕비는 비스마르크가 실제론 영국으로 일시 망명한 빌헬름 왕세제 대신 야심가인 국왕과 왕세제의 조카를 왕위에 앉힐 음모로 여겼기에 상종하지 못할 역적이라고 생각했다또한 수십명의 소작농을 거느린 대지주로서, 소작농을 무장시켜 수도로 진격하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로 전통적 군주제와 반혁명 정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런 과격성은 이후 어느 정도 누그러지게 된다.

 

그런데 그 사상과는 반대로 세계최초로 1883년 의료보험, 1884년 산재보험, 1889년 연금보험 등을 실행하여 사회보장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즉 현재 4대 사회보험 중 3개가 비스마르크 체제 아래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다. 4대보험중 하나인 고용보험법은 1927년에 만들어졌으며 이는 네덜란드, 영국에 이어서 3번째. 이 부분에 대해선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사회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라는 평가가 있다. 더 큰 것을 요구하는 봉기가 일어나기 전에 미리 적절한 선을 그어버린 것. 사회주의 견제는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비스마르크가 만들어낸 복지제도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유지, 발전되면서 독일이 복지국가로 도약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1871년 이후 "문화 투쟁(Kulturkampf)"이라고 불리는 반가톨릭 정책을 폈는데 단순 종교 탄압이라기보단 통일국가로 의무교육과 과정을 가르쳐야 되는데 가톨릭 교회와 수도원 계열의 학교들이 종교교육을 고수하며 중앙정부의 간섭을 배격하려고 한 탓도 있다. 가톨릭 신자가 많은 바이에른과 라인란트 등의 서남부를 중심으로 반발이 거셌고, 결국엔 사회주의 위협이 더 위험하다 보고 교황청과 타협했다. 1878년 이후에는 반사회주의자법을 통과시켜 독일 사회민주당의 집회, 조직, 출판물 등을 금지했지만 사회주의의 성장을 막을 수는 없었다.

 

 

4. 퇴임과 사망

 

 

반가톨릭 문화투쟁과 반사회주의자법에도 불구하고 1888년에 빌헬름 1세가 죽은뒤부터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프리드리히 3세가 자유주의 성향이라서 충돌이 벌어질것이라고 예상되었는데 프리드리히 3세가 3개월만에 세상을 뜨면서 자리를 이어갈것처럼 보였지만, 막상 빌헬름 2세도 프리드리히 3세처럼 자유주의적인 성향은 아니더라도 사회안정을 위해서 가톨릭 세력과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들과 화해를 모색하려하는 노선을 탔기 때문에 충돌이 이어졌고, 루르 광산 파업에서 비스마르크가 일방적인 진압을 주장한데 반해서 빌헬름 2세가 중재를 하자고 하면서 황제와의 갈등이 커지게 되었다. 이 때는 빌헬름 2세 황제가 작정하고 노동자들의 권리증진과 가톨릭계와의 화합을 외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국은 비스마르크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이러한 분위기에서 치러진 1890년 총선에서 가톨릭계 정당인 중앙당(Zentrumspartei)이 최대 의석을 가진 정당이 되었고, 사회주의 정당인 독일 사회민주당(이 시기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은 주요 정당으로 부상)이 최다 득표를 기록했다. 이 총선에서 비스마르크파의 주요 정당인 국민자유당(Nationalliberale)이 절반 이상의 의석을 잃는 등 친비스마르크파는 대패했고, 이로써 그 동안의 사회주의자-가톨릭탄압정책에 대한 명분을 잃은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2세에 의해서 결국 제국 수상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한국에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비스마르크가 빌헬름 2세에 의해서 쫓겨난다고 알려졌을 때, 독일 내에서는 이 조치를 열광적으로 반겼다. 비스마르크가 반대파들을 기만하는 행태에 보수파부터 시작해서 사회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죄다 질려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장원으로 은퇴할 때는 의장대와 군악대가 기차역 플랫폼에서 송별식을 해주었으며 그 이후에도 프로이센의 영웅으로 환영받았다.

 

 

비스마르크의 수상 퇴임을 풍자한 만평. 배에서 떠나는 선장(비스마르크)의 모습을 바라보는 빌헬름 2세의 모습을 담고 있다. 50년쯤 후, 윈스턴 처칠이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직후 총선거에 패배하여 퇴임할 때도 이를 패러디한 만평이 등장했다.

 

사실 비스마르크가 독일 내에서 인기를 끈 것은 빌헬름 2세가 하도 경망스럽게 구는 것에 질려버린 것이 결정적이었고, 빌헬름 2세와 비스마르크의 관계는 사임 이후에도 악화일로였다. 아들의 결혼식으로 빈에 갔을 때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를 접견하려 했으나, 빌헬름 2세는 프란츠 요제프에게 편지를 보내 접견을 방해했고 비스마르크의 후임자인 제국 재상은 각지의 관리들에게 비스마르크를 접대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을 정도였다. 그러자 당시 황가의 큰어른이 비스마르크가 죽기 전에 화해하지 않으면 황제에게도 큰 흠이 될 것이라고 직언했을 정도였다.

 

빌헬름 2세는 차후 비스마르크와 만남을 가지긴 했으나 역시 전 재상의 충언을 듣는 체 마는 체할 정도였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젊은 황제와의 불화로 사임한 이후에도 지방신문 사설의 주요인사로 정계에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려 하였다. 국가주의자라는 비난을 들을 수는 있어도 어찌되었건 일평생 일선에서 열심히 뛴 인물임은 분명하다. 한편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말년에는 거의 평화주의에 기울었고 평화주의자로 불릴만한 발언도 했다. "전투를 앞둔 병사의 눈동자를 본 사람은 전쟁을 어렵게 생각한다."

 

 

말년 황제와의 갈등관계 때문에 빌헬름 2세의 신하라는 말을 듣기는 싫었는지, 석관에는 '황제 빌헬름 1세에게 진정으로 충실했던 독일인 공복'(...)이라는, 생전에 자신이 직접 쓴 묘비명을 쓰라고 유언했다. 그래도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가 사망하자 장례식에 참석했고, 국장도 제안했으나 유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한편 비스마르크가 사망했을 때, 임종 자리에 가족들이 비운 사이 일부 기자들이 침입해서 방금 사망한 그의 사진을 찍어 잡지에 돌리는 사태가 벌어진다. 혹자는 이를 가리켜 '세계 최초의 파파라치 사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당연히 병자였던 그의 모습은 엉망진창 지저분한 모습. 결국 기자들은 체포되어 처벌받고, 이후 그의 사진은 온건한 임종 모습이 유포되었다.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병사의 멍한 눈빛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깊이 생각해 볼 것이다.

- 비스마르크

 

 

철혈재상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전쟁보다는 외교적 방법을 선호하였다. 물론 목표를 위해서 불가피할 때는 전쟁도 불사했다. 그러나 그 전쟁도 적에게 필요 이상의 피해나 굴욕을 주는 것에는 매우 반대했다. 비스마르크 재임시절 발생한 전쟁은 보오전쟁, 보불전쟁인데, 이는 독일 통일을 위해서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전쟁을 통해 굴복시키는 것 이외는 길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두 전쟁을 통해 독일 통일이라는 과업을 이룬 후에는 새로 건설된 독일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에 전력을 기울였다. 고로 비스마르크를 고전적 현실주의자, 국익지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외교관 출신 답게 유럽 내 많은 국가들에게 프로이센의 입장을 잘 주지시키려고 노력했고 이것은 일말의 합리성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클라우제비츠처럼 전쟁은 어디까지나 외교, 정치의 연장인 수단으로 보았다. 외교에서 각국의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독일의 외교정책이 성공한 것이며 각국의 첨예한 이익 다툼 속에서 비스마르크가 원하던 대로 정세가 진행된 것은 독일 통일 이후에는 불필요한 식민지는 반대하며 유럽 국경의 현상유지를 주장했기 때문에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독일의 강력한 군사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술과 경제력, 그리고 실전에서의 증명덕분이었다.

 

5. 개인적인 면모

 

철혈 재상의 강인하고 냉혹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상당히 감수성이 풍부했으며, 신경쇠약 때문에 자주 과식했고 사망원인도 과식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눈물도 많았다고 한다. 아들이 반대하는 결혼을 하려하자 울면서 자살하겠다고 말린적도 있으며 보오전쟁의 보상 조약 체결을 둘러싸고 빌헬름 1세와 대립이 생겼을 때는 울면서 자살 소동을 벌여 빌헬름 1세의 뜻을 꺾은 적도 있다고 한다. 한번은 비스마르크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사임하겠습니다!'라고 외치자 빌헬름 1세도 '제국에는 나보다는 비스마르크가 더 필요하다'면서 '그럼 내가 퇴위하겠다!'고 맞받아쳤다. 어찌 됐든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가 설득하면 마뜩찮아해도 들어주었기 때문에, 빌헬름 1세가 91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비스마르크는 큰 상심에 빠졌다.

 

문제는 빌헬름 2세가 자기 말을 안 듣자 똑같은 짓을 했는데, 빌헬름 2세가 무시하자 열받아서 잉크병을 빌헬름 2세의 이마에 던졌다카더라. 이는 당시 찌라시의 보도였고, 실제로는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2세에게 모독에 가까운 구박을 받았어도 결코 예의를 잃지 않았다. 총리 임기 말년에 빌헬름 2세가 비스마르크에게 누구를 만나는지, 어떤 대화를 하는지 일일히 문서로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자 뚜껑이 열려서 잠시 이성을 잃은 적이 있지만, 퇴임 이후에도 아들뻘 나이의 빌헬름 2세에게 훈계하려고 했지 한판 붙자는 식으로 대들진 않았다.

 

그리고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원하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무력을 사용했다. 1870년 독일 통일 이후 실각할 때까지 그의 정책 목적은 철저히 전쟁을 막기 위한 세력 균형을 추구하는데 있었다.

 

자신의 미국인 친구 존 말트리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식료품점 주인이 자기 일을 싫어하는 것처럼 정치를 싫어했다. 말트리는 비스마르크의 대학 동창이었고, 이후 미국의 외교관이 되었다. 비스마르크와는 노년까지 쭉 편지로 교류했다.

 

 

5.1. 일화

 

 

여하튼 사생활 및 사고방식이 꽤나 독특했던 듯하며, 여러가지 일화나 명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독일 제일의 저술가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다만 19세기 독일 산문의 대가라는 평가를 받는 대 몰트케와 비교한다면 밀리기는 한다.

 

젊은 시절 늪에 친구가 빠졌는데 구해줄 자신이 없자 빠진 친구를 구해주지 않고 총을 친구에게 겨누고 "너를 구하진 못하겠고 차마 천천히 죽는걸 볼 수도 없으니 고통없이 죽여주겠다"하고 말을 해서 친구가 화들짝 놀라 스스로 있는 힘을 다해 알아서 나오게 한 일화가 유명하다. 이에 대해서는 "평소에 너 정말 꼴 보기 싫었지만 내색은 못 하고 있었는데 이 참에 여기서 뒈져라!"라며 도발했다는 판본도 있다. 결국 이 말을 듣고 잔뜩 빡친 친구는 겨우 빠져나오고 나서 "구해주지는 못할 망정 나더러 죽으란 거냐!"라며 비스마르크를 두들겨팼더니 비스마르크는 친구에게 사죄하면서 말하길, "날 용서하게, 내가 겨눈건 자네의 포기하는 마음이네"라고 하자 친구가 그제서야 받아들였다는 이야기. 워낙 황당한(?) 일화라 한국이나 일본 등에서 훈육용으로 지어낸 거짓말이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 하지만 이 일화는 비스마르크 생전인 1882년에 나온 신문기사에도 이미 언급된 적이 있는 유서 깊은 이야기다. 물론 세설신어에 조조와 원소 버전으로 동일한 이야기가 실린 것을 생각해보면 동서고금으로 널리 퍼져있던 교훈적인 민담 내용이 비스마르크의 일화로 각색된 것일 수도 있다고 한다.

 

귀족 여식을 아내로 맞이할 때 장인을 상대로 치밀한 작전과 노력을 해 사기친 일화같은 카더라식 에피소드도 있다. 하지만 결혼에 이르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신론이나 다름없던 이신론(理神論. 신의 존재를 인정하긴 하지만, 종교적인 의미로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규칙의 일환으로서만 인정한다)에서 루터교로 개종한 것이고, 그나마도 33세 때였다. 러시아 대사시절 47세의 나이에도 러시아 대사의 25살난 아내와 연애행각을 벌였다. 아내와 러시아 대사가 대인배라서 눈감아주지 않았다면, 엄청난 스캔들로 비화해서 꽤나 골치아팠을 것이다.

 

개를 좋아했는데 자신의 애견이 죽어가는 모습을 비스마르크에게 보이기 싫어 자취를 감추어버린 적이 있다. 개를 비롯해 무리생활을 하는 동물들은 이런 습성이 있다.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죽기 직전까지 말썽 부리는 줄 알고 개를 야단치려고 찾고 있었던 사실을 몹시 후회한 기록도 있다. 임종시에도 그 개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고 하는데, 그 이름은 술탄. 그레이트 데인이다. 개를 자기 오른편에 놓고 협상을 하기도 했다. 상대방이 흥분해서 주먹쥔 팔을 휘두르자 개가 주인님을 공격하려는 줄 알고 상대방을 공격하려든 일화도 있다.

 

자주 인용되는 비스마르크의 명언으로서 "청년들에게 해줄 말은 단 세 마디뿐이다. 일하라, 더욱 일하라, 죽을 때까지 일하라." 가 있다.

 

훈장에 관련된 일화도 유명하다.

 

 

 

원수 시절, 전쟁에서 화려한 공을 세운 사병이 있었다. 원수인 비스마르크가 직접 훈장을 수여하는데, 이때 철혈재상이네 웃음을 모르네 하던 걸로 소문이 자자하던 비스마르크가 갑자기 씩 웃으면서 그 사병에게 농담을 했다.

"내가 자네라면 이 훈장을 집어치우고 돈으로 100마르크를 받길 원하겠네."

그러자 사병이 질문했다.

"도대체 이 훈장을 현금으로 치면 얼마나 되기에 그러십니까?"

그 즉시 비스마르크는 대답했다.

"이거현금으로 치면 고작해야 1마르크 밖에 안 될 걸세."

그러자 그 사병도 즉각 우렁차게 말하길, "그럼 저는 그 훈장과 99마르크를 받고 싶습니다!"

이 말에 비스마르크도 잠깐 멍해 있다가 껄껄 크게 웃으면서 사병이 원하던 대로 해주었다고 한다.

 

 

단순한 유머 혹은 대담한 병사 개인에 대한 주목을 위한 이야기로 자주 받아들여지지만, 국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가치와 현실 사이의 거리감을 지적할 때 언급되어 국가주의를 비판하는데 자주 인용되는 뼈 있는 일화다. 이 이야기는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탈무드에서 유머로 언급한다.

 

 

또한 사랑의 학교에 따르면 비스마르크가 몰트게를 찾아가기 위해서 마차를 탔다가 소년을 보고 태워줬다. 그 소년은 가난한 연극배우로 홀로 있는 어머니를 위해서 주머니의 돈을 드린 다음 극장으로 가려고 하자 그가 극장에 좀 늦게 가면 어떠냐고 말하자 소년이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냐고 이야기했다. 그 소년의 모습에 감동 받은 그는 극장으로 찾아가 화환을 보내 경의를 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6. 어록

 

 

비록 군비가 우리의 빈약한 몸에 비해서 지나치게 크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면 우리들은 그것을 몸에 지니는 정열을 지녀야 야 할 것이며, 또한 감히 그와 같이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독일이 착안해야 할 것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군비인 것입니다. 지금의 대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철과 피(), 곧 병기(兵器)와 병력에 의해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연설 전문

 

 

 

 

법률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소시지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같아서, 보지 않는 것이 좋다.

 

 

 

 

모든 군인과 정치가들은 전쟁을 가볍게 여겨서도 두려워해서도 안된다.

 

 

 

 

"작금의 유럽은 화약고이고, 지도자들은 무기고 위에서 담배를 피고 있을 뿐이야. 작은 불씨 하나가 우리 모두를 집어삼킬 전쟁을 일으킬거야. 언제 그 폭발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서 일어날지는 말해줄 수 있지. 발칸에서 벌어질 저주받을 바보짓이 그 폭발을 일으킬 거야." - 오토 폰 비스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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