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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 이야기

이집트 람세스 2세

작성자관운|작성시간18.06.17|조회수1,459 목록 댓글 0


이집트 람세스 2

 

 

 

 



 

 

 

신왕국 시대 제 19왕조의 제3대 파라오로,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파라오 중 한 명이다. 인생 무상을 상징하는 시로 유명한 오지만디아스가 바로 이 사람. 소설 람세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흔히 알려진 람세스는 그리스식 명칭이고, 히에로글리프의 특성상 모음을 표기하지 않기 때문에 당시 이집트인들이 불렀던 정확한 발음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콥트어와의 연결 고리를 통해 '라메수'가 가장 가깝다고 추정할 뿐이다. 최근에는 프티모세, 투트모세, 아흐모세처럼 라-모세('' 신께서 영광을 내리셨다)가 본래 이집트식 이름이라는 주장이 있다. 뭐 성서의 모세도 그렇고 이 모세라는 단어가 들어간 이름이 고대 이집트에서는 매우 흔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주장이다.

 

20(24세 추정)대에 왕위를 물려받았고, 그 후 60년 이상(66년 추정) 이집트를 통치했다. 영조, 건륭제 저리 가라네? 그러니까, 대강 90살에 죽었다. 그 세월만큼이나 위대한 지도자였으며, 신도시 피람세스 아부심벨 대신전을 비롯한 대규모 건축물을 지은 인물이기도 하다. 현재는 이집트 제 19왕조의 황금기 뿐 아니라 이집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

 

 

2. 즉위 이전

 

 

호렘헤브가 동료이자 람세스 2세의 할아버지인 람세스 1세에게 왕위를 물려줌으로써 제 19왕조가 시작되었다.

 

3. 군사적 업적

 

 

세티 1세의 원정으로 이집트는 다시금 북아프리카-소아시아 일대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하였으나, 하트셉수트나 투트모세 3세의 황금기에 비교하면 상당히 많은 문제점을 남기고 있었다. 북쪽에서는 히타이트가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으며, 해상에서는 바다 민족이라 불리는 이들이 지중해 동부부터 나일 강 하구에 이르기까지 노략질을 일삼고 있었다.

 

람세스의 첫 번째 타겟은 바다 민족이었다. 람세스는 재위 2년만에 바다 민족을 토벌했는데,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는 것을 선호하는 작자들을 단 한 차례의 기습작전으로 소탕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람세스가 지상전뿐만 아니라 해상전에도 일가견이 있었으며, 해안선을 비롯한 당시 지형에 대해서도 상당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자신감을 얻은 람세스는 북벌 준비에 착수했고, 재위 4년에 비블로스까지 진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카데시 전투(B.C 1274)에서, 람세스군은 히타이트가 카데시를 포기했다는 거짓 정보에 낚여 카데시에 성급하게 진입했지만, 요새 뒤에 숨어있던 히타이트 전차병의 매복에 당했다. 히타이트의 기습작전으로 이집트는 2개 사단이 궤멸하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람세스 자신도 생명의 위협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람세스는 카데시를 함락하지 못하고 이집트로 돌아와야 했으며, 이후 12년에 걸친 2차례의 원정에도 불구하고 시리아 - 팔레스타인 지역의 점령에는 실패하고 말았다.그리고 람세스는 신으로 변해 히타이트를 다 털었다 카더라

 

 

4. 히타이트와의 평화

 

 

람세스는 결국 더 이상의 전쟁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고, 재위 21년에 히타이트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는 기록이 남아있는 최초의 평화조약이다. 재미있게도 양측 기록이 모두 상대가 청해서 우리가 관대하게 화평을 받아들였다.라는 식이다. 굳이 따지자면, 히타이트 공주와 결혼하고 소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이 축소된 람세스가 좀더 열세였다. 이렇게 국경은 정리되었고, 이 지역에 드디어 평화가 찾아왔다.

 

그리고 이후 이 두 나라는 언제 싸웠냐 싶을 정도로, 히타이트가 멸망할 때까지 친하게 잘 지냈다.

 

비판적인 학자들은, 카르나크 신전의 부조를 비롯한 평화조약과 카데시 전투에 대한 윤색된 선전들이 군사개혁을 비롯한 각종 번영의 싹을 잘라버렸고, 이후 이집트가 쇠퇴하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평가한다. 나쁜 의미로 역사 최초의 언플 거짓말은 자기 스스로가 제일 먼저 속는다.는 말.

 

 

5. 토목공사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으레 그렇듯이, 람세스도 자신의 흔적을 이집트 전역에 남기는 데 열심이었다.

 

람세스는 즉위 초에 나일 강 삼각주 북쪽에 신도시인 Per-Ramesesu(페르라메수)를 조성하고 수도를 옮겼다. 페르라메수는 조상의 터전과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시리아 - 팔레스타인 지역에 진출하겠다는 람세스의 의지를 상징하기도 했다. 시골 촌동네였던 페르라메수는 이 때 엄청나게 성장하여 궁전과 사원, 많은 조각상과 장식물들로 꾸며졌고, '호루스의 길' 이라 불리우는 이집트 - 소아시아 교역로에서 들어오는 물산들로 인해 상당히 번영하였다.

 

람세스 이후에도 국경도시로서 중요시되었으나, 후대에 나일 강의 지류가 바뀌면서 페르라메수로 들어가는 수로가 말라붙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버려졌다.

 

천도는 물론이고, 람세스는 통치기간 중 이집트 전역에 많은 토목사업을 시행했다. 수양제 자기 자랑하기 좋아하는 파라오들의 연례 행사인 카르나크 신전에 탑문 기증하기부터 그 유명한 아부심벨 대신전까지 수많은 신전을 세웠다. 신전뿐만 아니라 관공서 등 도시구획을 정비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여 당시 이집트의 생활을 개선하고 일자리까지 창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람세스 2세의 상징이자 이집트의 상징인 아부심벨 대신전

 

특히 람세스는 자부심이 대단해서 그의 얼굴을 새긴 조각상을 이집트 전역에 세웠다. 때로는 이전 파라오의 조각상에 새겨진 이름을 지우고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기도 하였다. 역사상 최초의 뽀샵질 그 대표적 희생양이 바로 투탕카멘인데, 호렘헤브가 시작한 '이단 파라오' 박해는 람세스 시기에 그 끝장을 봤다고 한다. 어차피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이 되었으니 이름 좀 긁어내고 자기 이름 쓴다고 무슨 상관이리오... 단종 돋네요 그러면서 람세스는 후대의 파라오가 자신의 이름을 파낼까 염려하여 석공들에게 그의 얼굴을 굉장히 깊이 새기도록 명령했는데, 이집트 곳곳에 퍼져있는 람세스 거상의 경우 약 15cm 깊이로 파내어진 이름도 있다. 하지만 그 결말은 오지만디아스지롱

 

 

6. 성경의 출애굽기와 람세스

 

 

출애굽기 본문은 출애굽 당시 파라오의 이름을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는다. 아울러 출애굽 사건의 연대를 암시하는 어떤 힌트도 제공하지 않는다. 때문에 출애굽이 과연 있었다면 언제 어느 파라오 시절에 있었을지 학계에서 각종 갑론을박과 온갖 추측이 다 나왔다. 그 중 1명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람세스 2세다.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라므셋, 국고성 비돔 등은 람세스 치세에 조성된 페르라메수를 비롯한 국경도시의 히브리어 음차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치세 내내 토목사업을 벌였던 람세스 2세가 히브리인들을 노역에 동원하여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고 자기 이름을 딴 성을 쌓았다는 논리가 중심을 이룬다. 이렇게 람세스가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탈출하던 시기의 파라오라는 설을 후기설이라 부른다. 한편 출애굽 당시의 파라오가 아멘호테프 2세라는 설은 후기설에 대비해 전기설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아직도 논쟁 중인 떡밥. 람세스라는 데에 동의해도 또 람세스 1세냐, 2세냐, 3세냐 하고 싸운다.(...) 사실 이집트 상형문자 역시 아랍 문자와 마찬가지로 모음을 표기할 수 있는 음소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찌 읽는지를 가지고 말이 매우 많다. 더군다나 람세스를 표기하는 상형문자 기호는 전부 표의기호기 때문에 어찌 읽는지도 확실치 않다.

 

후기설 중에는 아케나톤이 시작한 유일신 아톤 신앙을 믿던 잔당들에 모세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해석이 있다. 아케나톤, 투탕카멘 이래로 몰락한 유일신 사제들이 그 나름의 세력을 유지하다가, 마침내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인 모세를 중심으로 무력을 동반한 대 탈주극을 벌였다는 것. 모세의 이름이 이집트 문자 mese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때 그가 이집트 출신임은 확실하며, 히브리 유일신교의 배타적 성향이 아케나톤의 급진적 종교개혁과 상당히 닮아있다는 것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크리스티앙 자크의 소설 람세스에서 나오는 모세의 이미지는 이러한 이미지의 종합이라고 볼 수 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수 많은 영화 등의 대중매체에서 갸날픈 어린이로 나오는 파라오의 장자도 사실은 대리청정에 준하는 위치의 장성한 아들이었을지도 모른다나. 뭐 람세스가 하도 장수해서 그 아들들이 그보다 일찍 죽었다는 것 자체가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후기설의 람세스 2세와 더불어서 출애굽 당시 파라오 후보로 오른 전기설의 아멘호테프 2세 또한 웨벤세누라고 하는 장자가 있었고, 그 경우에는 진짜로 10살 남짓한 나이에 일찍 죽어서 웨벤세누의 동생인 투트모세 4세가 왕이 된 전례가 있긴 하다. 즉 장자가 죽었다는 것만으로는 후기설과 전기설 중 어느 게 옳은 것인지 판단할 수 없는 것.

 

여하튼 이 후기설은 아귀는 그럭저럭 맞는데 정설은 아니다. 반박도 많다. 모세 항목에서 보듯, 애초에 아케나톤의 아톤 신앙과 모세를 연계시킨 게 사실 프로이트가 던진 떡밥인데, 비록 오랜 떡밥이긴 하지만 그 세월만큼이나 예수 불자설처럼 호사가형 떡밥에 지나지 않는다고. 더구나 아케나톤 이후 람세스 2세까지의 기간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기간에 비해 너무 짧다.

 

또 람세스라는 이름의 도시는 흔했다는 설이 있으며(...), 람세스가 자기 이름을 딴 도시를 지었다는 것도 기록엔 없는 이야기다. 더욱이, 그 방대하고 엄청난 람세스 2세의 치세를 다룬 기록에서 출애굽 이야기는 흔적조차 찾기 힘들다. 그래서 후기설 내에서도 람세스 2세 대신 투트모트 3세나 아버지 세티 1, 람세스 1세 등이 거론되며, 전기설에서는 아예 아케나톤 이전인 아멘호테프 3, 아멘호테프 2세 등을 밀고 있다. 결국 모른다고

 

거기다가 성경에서 나오는 시기에 대한 묘사에 따르면 람세스 2세가 출애굽 당시의 파라오라고 보기는 더 어려워진다. 성경에서는 '모세가 장성하는 기간 동안 선대 파라오가 죽었다'고 나오는데, 람세스 2세 이전의 전대 파라오였던 세티 1세나 람세스 1세 등은 모세가 장성하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만 재위했다는 점이 문제다. , 성경 내용에 맞게 후기설을 굳이 끼워맞춘다면 오히려 람세스 2세보다는 그의 아들인 메르넵타 때가 출애굽 시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이 나오기에 이른다. 람세스 2세는 정말 길게 장수했으니 모세가 충분히 장성할 만하다. 더구나 앞서 말한 성경의 라므셋이라는 단어도 출애굽 당시의 파라오 때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모세가 태어난 시점의 파라오의 치세 때 나오는 말이다.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이 태어날 때 세종 시절이라고 홍길동이 활약할 때의 왕도 세종이라 할 수 없듯이... 따라서 성경의 라므셋과 끼어맞춘다고 해도 람세스 2세는 모세가 태어난 시점의 파라오이지 출애굽 당시의 파라오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이렇게 해석해야 출애굽 당시 80세의 노인이 된 모세의 나이까지 설명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 부분에 한해서 만큼은 오히려 전기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 아멘호테프 2세의 전 파라오인 투트모세 3세는 54년 동안 재위를 했고, 이 기간 동안 모세는 충분히 장성할 만하다. 더욱이 투트모세 3세와의 사이가 껄끄러웠던 하트셉수트가 아기 모세를 건진 후 그가 장성할 때까지 투트모세 3세의 눈을 피해 돌봐줄 권력이 있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투트모세 3세가 죽고 아멘호테프 2세가 즉위하고 나서야 비로소 모세가 복귀했다는 가정에도 무리가 없다.

 

무엇보다도 아멘호테프 2세 다음 대의 왕인 투트모세 4세는 그의 장자가 아닐 뿐더러 당시에는 화산 폭발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으니 출애굽기에 나오는 장자의 죽음과 이집트의 재앙과도 연결지을 수 있게 된다.

 

결국 전기설은 대략 15세기 경, 즉 아멘호테프 2세 등을 대표로 그쯤의 파라오들이 출애굽 당시의 파라오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후기설은 앞에서 말했다시피, 람세스 2세를 대표로 대략 13세기 무렵의 파라오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양상이다. 2개의 설 다 나름대로의 논리와 허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논쟁떡밥으로는 출중한 역할을 다 하고 있다.

 

물론 이집트 탈출 자체가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서 일어난 사건일 수도 있다. 이것이 후대에 책으로 기록되면서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되었을 수도 있다. 고대 사서의 형성 과정을 살펴본다면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이거나 규모가 큰 사건이 람세스 2세의 치세에 일어났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비교적 확실한 것은, 일단 출애굽 사건은 람세스 2세의 다음 파라오인 메르넵타의 치세 이전에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메르넵타의 비문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므로...

 

하지만 람세스의 상징성이 워낙 강하다보니 영화나 애니 등에서는 탈출기의 파라오 = 람세스설(즉 후기설)이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유지되고 있으며, 이집트 왕자나 엑소더스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첫 번째 정비인 네페르타리를 비롯해 여러 명의 왕비 및 후궁을 두었다. 아버지인 세티 1세가 평생동안 튜야 한 사람을 정비로 둔 것과는 대조적. 그들과의 사이에서 카엠와세트, 형들이 모두 아버지보다 먼저 죽는 바람에 다음 왕위를 물려받은 메렌프타 등 매우 많은 자식들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하도 오래 산 나머지 자기 큰딸이 자라자 큰딸도 후비로 맞아들여 그 사이에서 외손자 겸 아들인 자식도 얻었다... 이집트에서야 흔한 일이지만, 그야말로 개족보근친상간의 극치. 이 때문인지 람세스의 자식들이 친자인가 양자인가에 대한 논란도 몇 차례 있었다.

 

가족 중에서도 첫 번째 왕비 네페르타리를 무척이나 사랑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녀를 위해 직접 신전을 지어 줄 정도로, 아부심벨 소신전이라 불리우는 아부심벨 대신전 근처의 신전이 바로 그 곳이다. 람세스가 조성한 건축물, 기념물에 이시스 여신과 함께 그려지거나 람세스 2세와 함께 조각된 모습 등으로 유명한데, 일반적으로는 '람세스 2세와 함께' 조각된 곳에서는 람세스 2세의 수십분의 일 크기로 람세스 2세의 발치에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아부심벨 소신전에서는 람세스와 같은 크기로 새겨지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그녀에 대한 사랑을 곳곳에 새겨둔 네페르타리의 무덤은 왕비들의 계곡에서도 가장 유명한 관광 명소로 자리잡았다.

 

람세스 2세는 66년 동안 통치를 했고 90살에 죽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젊었을 때 낳은 자식들은 다 죽었고 그보다 먼저 죽은 손자, 손녀들도 많았다. 고대 이집트 전체 역사에서 2번째로 오래살고 2번째로 오래 재위했다.

 

오랜 치세동안 이집트 신왕조의 국경을 확립하였으며, 가장 훌륭한 파라오 중 한명으로 지금까지도 존경을 받고 있다. 그가 세운 유적, 유물도 매우 많고.. 어찌나 존경을 받았는지 혈족상으로 그와 전혀 관계 없는 후대의 파라오들이 람세스라는 이름을 사용할 정도이니 말 다 했다. 사실상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명군인데, 한 세대 뒤 선대의 후광을 이어받은 제20왕조의 람세스 3(기원전 1183~1152)의 문화 번영기를 끝으로 이집트는 남북으로 분열되거나 람세스가 정복했던 리비아나 누비아 출신 왕조가 계승을 주장하는 등 여러 모로 영락하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마지막 황제.

 

...후손들을 위해서도 열심히 준비해두셨는데, 유네스코 등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된 엄청난 건축들도 많이 남겼다. 본문에서 계속해서 언급했던 아부심벨 신전은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관광객으로 붐빈다. 막말로 쿠푸의 대피라미드나 스핑크스, 20세기에 유명해진 투탕카멘의 묘 정도를 제외하고 남아있는 웬만한 이집트 유적들은 모두 이 시대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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