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북서부의 도시. 모스크바에 이은 제2의 도시이며, 과거 러시아 제국의 수도로, 과거 열강에서도 손꼽혔던 제국의 유산이 산재해 있어 지금도 러시아를 대표하는 관광도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모스크바와 세바스토폴과 더불어 러시아에 3곳뿐인 연방시 중 하나다. 인구는 2010년 인구주택총조사 기준 4,848,700명, 주변 도시를 포함하는 연방단위의 면적은 1,439㎢이다. 러시아 최대의 항구도시이기도 하다. 레닌그라드 주에 둘러싸여 있다. 1924년부터 1991년까지 도시명이 레닌그라드였고 이 이름으로도 상당히 유명했다.
2. 상세
러시아 서북부 발트 해의 오른쪽 끝부분인 핀란드 만으로 흘러들어가는 네바 강을 품고 있다. 러시아를 동유럽으로 흔히 보지만, 상트의 위치는 북유럽 국가들과 더 가까워서, 핀란드, 에스토니아와의 지리적 거리가 매우 가까운 편으로 북극에 가까워 한여름엔 새벽에도 어두워지지 않는다. 특히 핀란드 헬싱키와 가까운 편인데 고속철 '알레그로'가 개통된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헬싱키를 3시간 30분 ~ 4시간 사이에 오갈수 있기 때문에 인적 교류가 크게 늘어났다. 덕분에 한국에서도 기존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한항공 직항노선 뿐 아니라 핀에어를 이용하여 헬싱키에 도착한 후 고속철을 타고 헬싱키와 탈린,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동시에 여행하는 관광객들이 늘어났다. 모스크바로부터는 북서쪽으로 700 km 정도 떨어져 있다. 러시아 땅 크기를 생각하면 멀리 떨어지진 않은 편. 두 도시는 UTC+3이라는 같은 시간대에 속해서 서로 간에 시차도 없다. 원래 상트페트르부르크는 UTC+3보다는 UTC+2가 더 자연 시간에 가깝지만 모스크바와의 편의성을 위해 모스크바와 같은 시간을 쓴다.
3. 역사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포함한 잉그리아 일대는 원래 중세 러시아계 국가 중 하나인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영토였다. 리보니아 기사단, 덴마크, 스웨덴 등 발트 해의 패권을 노리던 서유럽 국가들은 잉그리아를 노렸으나 노브고로드 공화국은 수세기에 걸친 이들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 15세기 말 러시아의 패자로 등극한 모스크바 대공국이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정복하면서 잉그리아 일대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모스크바 대공국이 루스 차르국으로 이어질 때까지 유지되었으나 16세기 후반 리보니아 일대의 패권을 두고 루스 차르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스웨덴 등이 엮인 리보니아 전쟁의 결과 잉그리아는 스웨덴의 영토가 되었으나 1595년 튜지나 조약으로 루스 차르국에게 반환해야 했다.
하지만 스웨덴은 잉그리아를 계속해서 노렸고 17세기 초 혼란 시대로 인해 루스 차르국이 만신창이가 되자 기회를 살린 스웨덴은 1617년 스톨보바 조약으로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정교회를 믿는 러시아인이 다수이던 이 지역을 루터교화시키려던 스웨덴은 개종 시 세금 감면 및 병역 면제 등 여러가지 당근을 제시했으나 여의치 않자 에스토니아, 핀란드 일대의 루터교 신자들을 잉그리아로 이주시켰다. 그 결과 대북방전쟁 직전인 1695년에 이르면 잉그리아의 루터교 신자는 잉그리아 인구의 74%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잉그리아는 한대 기후와 늪지대 투성이인 척박한 땅이었기에 이 지역의 인구는 겨우 2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발트 해로 통하는 유일한 출구인 잉그리아를 상실한 루스 차르국은 이후 잉그리아의 탈환을 목표로 하였다. 마침내 대북방전쟁 때 잉그리아 지방을 점령한 차르 표트르 1세가 서구화정책의 일환으로 서유럽과 통하는 창구인 잉그리아 지방으로의 천도를 결정, 네바 강 기슭의 스웨덴 요새인 녠스칸스(Nyenskans) 요새 근처의 늪지대를 매립해 1703년 5월 27일 도시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9년 간의 작업 끝에 도시의 건설이 어느 정도 완료된 1712년 표트르 1세는 정식으로 이 도시로 천도한 뒤 '성 베드로의 도시'라는 의미의 상트페테르부르크라 이름지었다. 이후 루스 차르국의 차르들, 아니 러시아 제국의 임페라토르들은 새로운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계속해서 발전시켜나갔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에 대한 반감으로 독일어식 명칭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페트로그라드로 개칭되었다. 러시아 제국의 수도인 만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격동의 사건 또한 여러 차례 일어났다. 1830년 데카브리스트 반란, 러시아 혁명의 시발점이 된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 군주제를 무너트리고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을 알린 러시아 혁명의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이 시작된 곳 또한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하지만 러시아 내전 당시 발트 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외국 함대의 수도 공략을 우려한 소비에트 당국이 1918년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기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수도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1924년 소련의 국부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망하자 페트로그라드는 그의 이름을 따 '레닌의 도시'라는 뜻의 레닌그라드로 개칭되었다. 수도의 지위를 잃었지만 레닌그라드는 제2의 도시로서 소련 제2의 도시로 기능하였다. 독소전쟁 당시에는 독일군 북부집단군의 주요목표로 레닌그라드로독일군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핀란드군과 협공하여 레닌그라드를 900일 가까이 포위하였다. 나치 독일은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면 도시의 이름을 '아돌프의 도시'라는 뜻의 '아돌프스부르크(Adolfsburg)'로 바꿀 계획이었으나 레닌그라드는 수백만 명의 희생으로 끝내 그 이름을 지켜냈다.
독소전쟁 당시의 영웅적인 사투를 인정받아 레닌그라드는 1945년 종전 직후 영웅 도시로 지정된 최초 4개의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이를 위해 레닌그라드가 치른 희생은 너무나 커서 수만 동에 달하는 유서깊은 건물들이 잿더미가 되었고 3백만 명에 달하던 도시 인구는 6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레닌그라드는 전쟁 피해를 복구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전쟁을 피해 도시를 떠났던 주민들이 돌아오고 이후 소련 인구가 크게 늘고 도시로 인구가 유입되면서 소련 해체 직전에는 인구가 500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 연방이 수립되면서 원래 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다만 소련의 이미지가 강하게 박혀 있는 중년 세대에게는 아직도 레닌그라드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듯하다. 박노자의 고향도 이곳인데, 그도 이곳을 레닌그라드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지 그렇게 부른다. 사실 세대를 막론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레닌그라드가 별개의 도시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20세기 초에 태어나 소련 해체 시점까지 살았던 노인들은 ''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태어나 청소년기를 페트로그라드에서 보내고 죽을 때까지 레닌그라드에서 살 줄 알았는데,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임종하게 되었다"라는 농담을 즐겼다. 1914년 6월 이전에 태어나 1991년 12월 이후에 임종했다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페트로그라드와 레닌그라드를 거쳐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임종하게 된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두 차례의 격변기를 거치며 인구가 급감한 바 있고, 러시아의 평균 수명 상승이 오랜 기간 지체되었기 때문에 저 테크를 실제로 이룬 사람은 많지 않다. 레닌그라드라는 이름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둘러싸고 있는 행정구역인 레닌그라드 주에 아직 남아 있다. 모스크바에도 이곳으로 오는 열차가 발착하는 역의 이름은 여전히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아닌 레닌그라드 역이다. 풀코보 국제공항의 IATA 코드도 ULLI로, 레닌그라드 시절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풀코보 공항을 비롯한 많은 곳에서 레닌그라드 시절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소련에서는 이 도시를 기려 레닌그라드 수방메달과 레닌그라드 250주년기념메달을 만들었다.
4. 지리
주변 도시를 제외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자체만의 면적은 605.8 km2. 지형적으로는 핀란드 만에 접한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저지대에 위치해 있다. 모스크바에 비하면 약 4도 정도 북쪽에 위치해 있다. 위도가 북위 59°57로 북유럽권의 노르웨이 오슬로나 스웨덴 스톡홀름과 비슷한, 절대적으로 봐도 북쪽에 있는 도시다. 위도가 높다보니 낮의 길이가 계절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난다. 비록 북극권처럼 낮만 있거나 밤만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낮 길이가 짧으면 5시간 53분, 길면 18시간 50분일 정도로 계절별로 낮의 길이가 많이 차이난다. 도시 일부는 해발 4미터 밖에 안 될 정도로 도시가 낮은 곳에 위치해서 홍수가 잦았다. 특히 1824년의 홍수는 해발 4미터가 넘게 차오르는 큰 규모의 홍수로서 이로 인해 300개 이상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운하가 많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늪지대에 세워진 곳이기 때문에 도시를 계획할 때부터 운하가 건설되었고 지금도 남아 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북유럽의 베네치아. 덕분에 운하와 바다를 통한 유람선 관광이 크게 발전해 있다. 여름궁전이 있는 페테르고프와도 수상버스로 연결되며 네바강 강투어도 있다.
5. 기후
쾨펜의 기후 구분상으로는 습윤 대륙성 기후(Dfb)에 속한다. 온난하고 습도가 높은 여름과 길고 추운 겨울이 특징이다. 7월의 평균 기온은 18.8 °C, 2월의 평균 기온은 −5.8 °C. 그래도 북위 60º에 가까운 위도를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편인데, 같은 위도의 시베리아와 비교하면 넘사벽으로 기온이 높고, 위도가 훨씬 낮은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보다도 겨울철에 훨씬 따뜻한 편이며, 위도가 약간 낮은 모스크바와 비교해도 겨울철 평균기온이 높다. 다만 같은 위도의 스칸디나비아나 핀란드보다는 추운 편이다. 러시아에서는 온화한 편이라지만, 북쪽 도시다 보니 최저 기온의 기록은 −35.9 °C(1883년)에 이르고, 도시에 흐르는 네바강도 겨울에 대부분 얼어붙을 정도다. 그리고 도시 외곽은 더 춥다. 다만 겨울철에 이상고온 현상이 나타나면 영상권의 포근한 날씨가 이어지기도 하며, 실제로 2011년 12월의 이상고온때는 한국의 서울보다도 평균기온이 높기도 했다! 여름철은 대체로 지내기 좋은 쾌적한 기온 분포를 보이지만, 가끔 폭염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며, 러시아를 강타한 2010년 대폭염때는 37도까지 기온이 오르기도 했다.
6. 인구
현재 인구는 약 484만명 정도인데, 20세기 초/중반에는 인구수의 급격한 변화가 여러번 있었다. 1916년에 240만이었던 인구가 러시아 혁명과 적백내전을 거치면서 불과 4년 후인 1920년에는 74만명 미만으로 떨어졌다. 이후 인구가 늘어 1941년~1943년 300만명에 이르렀으나 독소전쟁으로 인한 차출/인명피해가 있었고, 그리고 특히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많은 수가 굶어죽거나 피난을 갔기 때문에 인구는 60만명 이하로 다시 격감했다. 종전 후 다른 지역으로부터의 이주자로 인해 인구가 늘어났고 80년대에는 500만명을 넘기도 했다. 그러다 90년대 소련 붕괴 직후 러시아의 인구가 줄어들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인구도 같이 줄어들었다.
도심지 주민 대부분은 아파트에 거주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아파트 거주는 역사가 좀 길다. 20세초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소련 정부는 주택건설을 국유화했고 주민들이 공동거주 아파트에서 살도록 강제했었다. 1930년대에는 68%의 주민들이 그런 아파트에서 거주했다. 레닌그라드 당시에는 소련에서 공동아파트가 가장 많은 도시였다. 1950년대 들어서 공동아파트의 숫자가 크게 줄고 흐루숍카가 대거 건설되면서 주거방식에 변화가 생겼지만 아파트라는건 마찬가지이며, 현재에도 저소득층은 공동아파트에서 사는 경우가 꽤 있다.
제2의 도시치고는 초고층 건물이 없어서 전체적으로 나지막한 도시 경관을 보이는데, 도심지의 높은 빌딩을 규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도심지의 역사적 건축물들은 주로 18세기, 19세기 건축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스크바와는 달리 잘 보존되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수도에서 밀려난 것이 역사적인 건축물의 보존에는 상당히 많은 보탬이 되었는데, 공산정권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한 현대 건축물들은 주로 수도인 모스크바에 건설되곤 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보존된 건축물 덕에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36개의 역사적인 건축물과 4000여개의 역사적 문화적 기념물의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즈프롬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400m가 넘는 마천루(일명 라흐타 센터) 건설을 추진 중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 당국과 시민들은 격렬하게 반대했고 크렘린도 반대 의견을 내비쳤으며, 유네스코는 "초고층 빌딩 건립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취소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결국 가즈프롬은 건설 장소를 원래 예정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중심부에서 시 외곽으로 위치를 변경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지역을 연고로 하는 축구 구단으로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있고, 아이스하키 구단으로 SKA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있다. 축구, 아이스하키 모두 리그에선 강팀으로 인식되는 팀들이다.
7. 교통
러시아 북부의 여러 노선들이 모이는 러시아 철도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참고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이 없고 대신 목적지 방향 이름을 딴 역들이 있다. 정작 이 도시의 (옛) 이름을 딴 레닌그라드 역은 모스크바에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주요 철도역은 다음과 같다.
• 모스크바 역 : 모스크바 방면 열차가 발착한다. 구 서울역이 구 루체른역을 본따 만들었듯 북한 평양역이 이 역을 본따 만들었다.
• 핀란드 역 : 핀란드 헬싱키 방면 열차가 발착한다.
• 발틱 역 : 발트3국 방면 열차가 주로 발착한다.
• 비쳅스크 역 : 벨라루스 방면 열차가 주로 발착한다.
• 라도지스키 역 : 카렐리야 공화국 무르만스크 방면 열차가 발착한다.
시내 교통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이 있다. 다만 웬만한 곳에서는 조금만 걸으면 지하철역이 있는 모스크바 지하철과는 달리 역간 간격도 넓을 뿐더러 도시 전체를 커버하기에는 선로가 무리가 있다. 지하철이 뚫리지 않은 곳에서도 트롤리버스와 일반버스를 통해 관광지로 접근할 수 있으니 배낭여행객들이 있다면 참고하도록 하자. 단 버스의 경우에는 노선이 임시/상시 폐쇄되는 경우가 많아 구글 지도만 보고 기다리다가는 수십 분을 기다려도 감감 무소식인 경우가 다반사. 조금 정류장이 멀어도 지하철 이용을 추천한다. 트램도 있으나 중심가로 들어가는 노선이 제한적이고 교통정체에 발이 묶이는 경우가 잦으니 별로 추천하지 않는다. "마르쉬루트카"라고 불리는 소형 버스도 있는데 이는 일반 관광객이라면 이용할 일이 거의 없다.(여름궁전이 위치한 페테르고프로 가기 위해서 탈 수도 있다.)
풀코보 국제공항이 있으며, 여기서 세계 각지를 연결한다. 대한항공은 이 공항에 계절편으로 취항한다.
8. 치안
러시아가 혼란스러웠던 2000년대 초중반에는 치안상황이 심각했었는데, 요즘은 상당히 많이 나아졌다. 시의 범죄율은 러시아의 전반적인 치안상황과 연관이 깊다. 1980년대 말~90년대 초에 범죄율이 치솟았는데, 이는 페레스트로이카라는 변혁을 겪으면서 러시아 전반에 사회적 혼란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행정력이 무력해진 틈을 타서 레드 마피아들이 판치고 다녔다. 1990년대 후반에만 해도 부시장인 미하일 마네비치, 국회부의장 갈리나 스타로보이토바 등이 살해당하는 등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치안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러시아 내에서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범죄의 도시로 인식이 되어 버렸다. 최근에는 구 CIS 공화국 출신 외국인들이 불법적으로 체류하면서 범죄를 저질러서 외국인에 의한 범죄가 늘어나는 중이며, 인종차별에 의한 범죄까지 증가 추세였다.
최근 치안 관리와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의 테러 위협을 이유로 시내 주변에 2인 1조로 순찰하는 경찰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다만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소매치기 같은 경범죄는 상당히 빈번하게 일어난다. 치안이 좋아졌다 하더라도 버스나 지하철에서는 늘 휴대폰이나 지갑 등의 관리를 잘해야 한다.
2017년에 센나야 광장 근처 지하철 역에서 알 카에다에 가담한 키르기스스탄 남성에 의한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2017년 12월 27일에 다에쉬에 의한 수퍼마켓 테러가 발생하면서 14명이 부상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