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원래 노블리스는 닭의 벼슬을 의미하고 오블리제는 달걀의 노른자를 뜻한다. 이 두단어를 합성해 만든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닭의 사명이 자기의 벼슬을 자랑함에 있지 않고 알을 낳는데 있음을 말하고있다. 즉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로 사회로 부터 정당한 대접을 받기위해서는 자신이 누리는 명예(노블리스)만큼 의무(오블리제)를 다해야 된다는 의미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로댕의 작품<깔레의 시민>이 회자된다.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때 '깔레'시는 끝까지 영국에 저항하다 구원군이 오지않아 1347년 끝내 항복하게 된다.
영국왕 에드워드3세는 누군가는 그 저항에 책임을 져야한다며 6명의 갈레시민이 목에 밧줄을 매고 영국군 진영으로 걸어와 처형 당할것을 요구했다. 이때 깔레에서 제일부자인 '외스타슈드 생 피에르'가 선뜻나섰다. 그러자 시장인 '장데르'가 나섰고 다음엔 부자 상인인 '피에르 드 위쌍'이 나서자 '드 위쌍'의 아들마저 아버지의 위대한 정신을 따르겠다며 나섰다. 이에 감격한 시민 3명이 또 나타나 한명이 더 많은 7명이 되었다.
'외스타슈드'는 제비를 뽑으면 인간인 이상 행운을 바라기 때문에 내일아침 처형장에 제일 늦게 나오는 사람을 빼자고 제의했다. 다음날 아침 6명이 처형장에 모였을때 '외스타슈드'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시민들이 그의 집으로 달려갔을 때 '외스타슈드'는 이미 자살한 시체로 변해있었다. 한사람이라도 살아남으면 순교자들의 사기가 떨어질것을 우려하여 자신이 먼저 죽음을 택한 것이다.
이에 영국왕비가 크게 감동하여 '에드워드 3세' 에게 깔레 시민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애원하였다. 당시 왕비는 임신중이었기 때문에 왕은 왕비의 소원을 받아들여 처형을 취소했다. 그후 깔레는 노블레스(귀족 ) 오블리주(의무) 라는 단어의 상징으로 등장했으며 몇백년이 지난후 깔레市의 요청으로 로댕이 10년 작업끝에 ' 깔레의 시민'을 만들어 내게된 것이다. 곱씹을수록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는 위대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 기득권유지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사회지도층들이 다시금 되새겨 볼 일이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귀족은 의무를 진다'는 뜻의 프랑스어 표현이다. 이 표현은, 프랑스의 작가 겸 정치가인, 레비 공작 피에르 가스통 마르크(Pierre Marc Gaston de Lévis. 1764-1830)가 <격률과 교훈>(Maximes et réflexions sur différents sujets)(1808)이라는 책에서 처음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와 권력은 그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수반한다는 의미를 가지며, 주로 사회 지도층 혹은 상류층이 사회적 위치에 걸맞는 모범을 보이는 행위를 표현할 때, 혹은 그 의무를 어기는 이들을 비판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단 실제로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단어는 중,근대에 주로 쓰이는 용어로 이후 사회혁명등으로 귀족이란 존재자체가 한바탕 엎어져버린 프랑스와 유럽에서는 사실상 사어가까운 취급으로 잊을만하면 나오는 우리나라완 달리 '그런말이 있다는건 아는데 쓰진 않는다.'정도의 인식을 가지고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 사자성어로는 심계천하(心系天下) 등이 있다.
2. 당연한 것인가?
그야 당연히, 전혀 당연하지 않다.
이전 버전에서는 부유층과 빈민층이 빈민층이 부유층의 지위와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대가로 부유층이 빈민층에게 베푸는 상호호혜적인 사회계약이므로 부유층이 빈민층에게 베푸는 것이 당연하다는, 어설픈 사회주의적 마인드에 집단주의, 전체주의적인 헛소리가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 재산이 타인을 그 사람의 의사에 반하여 착취하여 얻은 것이 아닌 이상, 재산을 남에게 베풀든 말든 그것은 전적으로 그 소유자가 선택할 사항이며 베풀지 않는 것이 옳지 않다며 헐뜯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글러먹은 태도다. 세월호 참사 당시 일부에서 지나치게 연예인이나 기타 상류계급에게 "왜 기부를 하지 않느냐?", "기부를 안 하다니 잘못이다" 라는 식의 비난이 이어져 논란이 일기도 했고 조용히 선행을 베풀려던 일부 연예인들이 해명을 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수행하지 않는 자들이 비판받는 이유는 한국에 만연한 갑질, 꼰대, 상명하복 문화 때문이다. 가진 자들이 먼저 "나 이런 사람이니까 알아서 모셔!"라고 먼저 존경을 요구하면, 상대방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래? 네가 그렇게 존경받을만 하다고? 네가 어떤 일을 해왔는데?"하고 물을 수밖에 없다. 이른바 갑질 혹은 진상이라고 압축되는, 존경 받을만한 행동을 하지도 않았으면서 존경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 또한 한국사회의 현실이므로 감안하자.
3. 포퓰리즘 관점의 비판
지나치게 엘리트주의적인 느낌이 강하다는 이유로 이 단어의 사용이나 그에 입각한 일체의 개념 자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정치인, 기업가의 아들이나 서민 김모씨의 아들이나 똑같이 병역법 앞에 동등하게 국가에 대한 의무를 지는 대상인데 왜 전자의 것을 더 가치를 부여해주냐는 식. 선민사상적인 느낌도 있고, 부자가 되어야 사회에 봉사할 수 있다는 식의 성공지향적 사고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위에 언급한 실용적인 이유에서 더 나아가서 다음과 같은 비판도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그 자체가 기득권 계급과 그렇지 않은 위치의 계급 격차를 인정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시민 사회에서 의무와 권리는 항상 똑같이 다니게 되므로, 기득권층의 이런 의무는 결국 그들이 기득권을 가지는 것을 합리화시키고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의 불만을 무마시키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것.
그래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흔한 좋은 이미지와는 다르게, 진보좌파들이 본질적으로 싫어하는 개념이다. 다른 면에서 자유지상주의나 자본가, 신자유주의를 대변하는 우파들도 극히 싫어하는 개념이다. 전통적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귀족 계급을 대변하는 보수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개념이며 귀족이 없(던)는 국가에서는 '사회 지도층'들의 의무로서 강조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상류층의 부담을 늘리는 정책에 상류층이 기꺼이 동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일부 유명 부자들의 기부행위로서 실천되는 정도이다.
4. 외국 상류층들도 부패한 건 마찬가지
애초에 뭘 근거로 그러한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많은 한국 국까들의 생각과 달리 외국도 자세히 보면 엄청나게 더러운 이야기들이 많다.
예를 들자면 영국만 해도 여러 추문에 휩싸이는게 사실이다. 엘리자베스 2세의 경우는 철면피스럽게 빈민기금에다 궁전 난방할 비용을 달라고 징징댄 사실이 폭로되었고. 윌리엄 왕세손은 집수리에 450만 파운드(한화로 78억원)를 써서 비난을 받고 구설수에 올랐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국민들을 등쳐먹고 애인이랑 코끼리 사냥이나 하다가 엉덩이뼈가 부러졌다는 사실이 폭로되어 국민들의 비난을 받고 결국 퇴위해야 했다. 후임으로 즉위한 현 국왕 펠리페 6세의 매형은 뇌물수수와 횡령 혐의로 구속되었다.
스웨덴의 칼 16세 구스타프는 문란한 성생활로 인해 곤욕을 치루었다. 이 문제는 후계자인 왕자들도 마찬가지라 크나큰 스캔들거리가 되었다.
네덜란드의 전 여왕 베아트릭스는 히틀러 유겐트 단원이었던 클라우스 폰 암스베르크와 결혼해서 네덜란드인들의 엄청난 분노를 샀다가 빌럼 알렉산더르를 낳고 나서야 여론이 해소되었다. 그나마 현 국왕의 왕비인 막시마 소레기에타도 아르헨티나에서 독재자에게 아부했던 호르헤 소레기에타가 아버지라서 말이 많다.
위 사례들을 보면 이들이 결코 순수한 애국자이자 진정한 상류층인 것만은 아니고 비도덕적인 행태도 자주 보이는 걸 알 수 있다. 유럽 왕실이 정말 모범적인 엘리트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역시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걸 보여준 좋은 예시.
사실 자세히 보면 혼란기에 사고 친 왕족들도 많다. 국왕 경력이 있던 영국의 에드워드 8세는 친독적인 성향이 있어 2차 대전 기간 동안 바하마 총독으로 쫓겨났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왕족들은 전쟁을 일으키는데 동조했고 전쟁이 패전으로 끝나자 다시는 왕좌에 복귀하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유럽의 왕족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잘 실천한 게 아니라 비교적 잘 실천한 왕족만이 살아남은 것이며 아무리 이전까지 잘했다고 해도 국민사정도 나쁜데 깽판을 쳤다가 왕실의 위상과 존재가 위기에 처하는것은 스페인의 예로만 봐도 분명하다. 영국의 예를 봐도 분명하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고위층이 가진 도덕적 의식이 선행된게 아니라 고위층들이 시대의 변화에 맞춰 살아남기 위해 선택하고 그것이 의무화되어 도덕적 의식으로 정착한 사례에 더 가깝다. 그리고 애초에 왕족은 병역 의무가 주어진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닌 각종 의전에 대한 급부이다.
5. 대한민국의 청빈론
지난 정변의 난리때요, 그 오랑캐놈들이 마을에 처들어 와서, 보이는대로 싹 다 죽이고 여자들은 싹 다 겁탈했습니다. 그때 그 임금님이나 지체 높으신 양반님들은 몽땅 강화도로 도망가셨다면서요? 대감님은 그때 어디 계셨습니까? 저는요, 저희 부모님 시체도 못찾았습니다.
- 영화 〈남한산성〉중 칠복이 김상헌에게 따지는 대사中
대한민국의 기득권층은 밑에도 언급될 유일한 등의 소수를 제외하면 노블리스 오블리주와는 거리가 먼 건 차치하고 자신들 배 채우기 바쁜 사람들이 많다. 잊을 만하면 뉴스에 보도되는 병역기피, 재산 해외도피, 원정출산, 이중국적, 2005년의 대규모 국적포기 사태, 땅콩 회항이나 라면 상무 사건 등 기득권층이 자신의 재력과 사회적 위치를 스스로의 보신을 위해 남용하는 사례들은 이런 주장의 근거가 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와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아예 방향부터 정 반대를 향해 달려가는 사례가 수도 없이 많고 현재진행형으로 계속 늘어나는 중이기 때문에 각박한 사회실정과 함께 작용하며 반감만 커지고 있다.
물론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데는 원인이 있는데 대체로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과 5.16 군사정변 후 군사 독재를 겪는 등 혼란스러운 근현대사를 거친 한국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특권층들의 사회적 위치에 걸맞는 책임의식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다는 것이 그 원인으로 꼽힌다.
혹자는 위의 이론은 '이게 다 일제 때문이다,' 즉 모든 나쁜 것은 일제와 소위 '친일적인 보수세력'에 갖다 붙이는 주장의 연장선으로서, 조선시대의 문제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이론적 약점을 보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중세부터 귀족과 서민 간 give and take 계약관계가 강했던 서구와 달리 (물론 그 계약도 공정계약이 아니어서 결국 혁명이 났다) '유교전통이 강한 사회에서는 권력을 쥔 쪽의 의무가 강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비로운 양반 지주 이야기를 예로 들어 반박할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랫사람인 농민들의 충성과 헌신이 먼저 요구된 후 거기에 ‘기특하다’며 따르는 상일 뿐이며, 군위신강, 부위자강, 부위부강의 삼강을 따르는 유교윤리에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위해 죽거나 희생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위의 '유교 전통 때문이다' 라는 주장은 유교를 상당히 왜곡해서 해석하고 있다. 위 주장에서는 유교전통이 강한 사회에서는 권력자의 의무가 강조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다. 공자의 행적만 봐도 위 문단 같은 주장은 펼칠 수 없다. 중국과 조선 등 유교사회에서 상위 계층을 사대부, 군주의 지향점을 군자라고 부르는 까닭은 적어도 원론적으로 이들이 먼저 모범을 보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들과 온전한 의미의 양반 사대부들은 경연과 죽을 때까지 하는 공부 및 수양을 통해 자신들이 먼저 유교의 4서 5경을 깨우치고 성리학적으로 심성을 맑게 닦아서 백성들의 모범이 되어 그에 따라 백성들을 교화할 자격을 얻는 것으로 생각했다. 향약만 봐도 조선의 지배계층이 얼마나 아래계층을 의식했는지 알 수 있다. 조선사회를 양천제 위주로 보는 학자들은 양반 역시 양인이므로 적어도 15세기에서 16세기 초반까지는 양반들이 양인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했다고 보고 있다. 고급 관료들의 자제들도 고급 군인이라 할 수 있는 갑사로 복무했다. 또한 역사적으로 봤을 때 국란기에 전 재산을 털어 의병을 모집하거나 환란기 정세에 뛰어드는 이들은 대부분 지역 유지나 양반층이었다. 임진왜란 때도 그러하였으며 구한말의 최익현 등 의병장들 또한 대부분이 이름난 양반 실력가들이었다. 이시영, 이회영 가문은 당시 조선의 손 꼽히는 역대급 부잣집이자 경주 이씨 명문이었으면서도 전재산을 쏟아부어 간도에 독립운동기지를 지었다. 이전 버전의 주장 같이 유교적 전통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말은 더 말할 가치가 없는 말이다.
영국 귀족의 전쟁 수행과 같은 상무정신을 기반으로 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우리 역사에서도 동일하게 있었다. 신라가 바로 그것으로, 삼국사기 열전들을 보면 삼국시대 신라 귀족층은 대대적으로 전투에 참여해 수많은 희생을 낳았으며 화랑도의 임전무퇴에서 알 수 있듯이 전장에서 물러서지 않는 것이 권장되는 일이었고 실제로 수많은 신라 귀족층이 전투에 투신해 죽었다. 김유신 본인 역시도 젊은 시절 고구려와의 낭비성 전투에서 자살돌격에 가까운 작전을 수행한 적이 있었고 나이가 70에 달한 시기에도 젊은 장수들 대신 고구려 수도 앞까지 접근하는 위험한 작전을 자원해 나서기도 했다. 신라 문화에서 귀족층은 모범을 보여야 했기에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이 당군과의 전투에서 살아 돌아오자 김유신은 문무왕에게 아들을 참할 것을 청했고 의절했으며, 문무왕이 죄를 면하게 하였으나 끝끝내 용서하지 않아 김유신 사후 매소성 전투에서 김원술이 치욕을 되갚았음에도 김유신의 부인이자 김원술의 어머니 또한 끝내 아들을 용서하지 않았기에 김원술은 관직을 버리고 세상을 비관하며 살았을 정도였다. 이렇게 귀족층이 병사보다 먼저 나서 목숨을 아끼지 않는 신라의 특기할만한 사회 분위기는 역사학자들의 신라의 삼국통일의 원동력 중 하나로 꼽기도 한다. 바람직한 것은 둘째치더라도, 계백 역시 자신의 처자식들을 죽여서 5천 결사대의 군기를 다잡았고 본인 역시 황산벌에서 전사했으므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할 만 하다. 그리고 어느 성웅께서도 모두가 질 것이라고 생각한 바다에서 대장선에 타서 직접 전투하며 적들을 격퇴한 바 있다.
꼭 국란이나 전란이었을 때만 사회 상층부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것도 아니었다. 유명한 경주 최 부자집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평시에도 고귀한 의무와 덕행을 누가 요구하지 않아도 먼저 스스로 실천한 가문은 적지 않았다. 임술농민봉기와 동학농민운동 등 사회가 혼란한 시기에도 이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양반들의 저택들은 농민군이나 심지어 초적들까지도 그들의 덕행을 알았기에 보호했고, 오늘날까지 몇몇 유서 깊은 종갓집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근현대에도 기득권층 중에서도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유일한 박사, 김용환, 언급한 이회영처럼 훌륭한 인물도 있고 최근에야 선행들이 알려진 함태호 명예회장도 있다. 백범 김구의 자손들 역시 대대로 대한민국 공군 장교로 복무하고 있다. 언급한 최부자집가문의 최준 선생도 가문의 거대한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부었으며 광복 후에도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을 세워 민족의 교육에 기여하였다.
따라서 서양 중심 또는 현대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상과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한국 역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지양해야 하며, 대중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소수나마 분명히 존재하므로 성급한 일반화는 삼가야 할 것이다.
물론 과거에 그러했다 치더라도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남들을 말 잘듣는 가축 취급하면서 그야말로 개돼지만도 못한 심성을 가진 금수저가 숱하게 존재하는게 현실인데, 가장 심각했던 사례라면 역시 IMF 사태 당시 금모으기 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 기부된 금붙이들을 처리하겠다고 나섰던 대기업 및 재벌들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당시 형편이 어려웠던 이들조차 결혼반지나 돌반지 등 그야말로 평생 가져가야할 보물이나 가보들마저 앞장서서 기부했는데, 정작 이 보물들을 처리하겠다고 나선 대기업 및 재벌들은 이 기부물품들을 해외에 저렴하게 팔아버리고 바로 비싸게 구매하는 방식으로 부가세 포탈에 이용했다. 당연하지만 안그래도 외화가 부족해서 파산이나 다름없었던 당시 상황을 더 악화시키면서까지 자기 배를 불리는 행위였으며 까놓고 말해 나라 팔아먹는 짓이었다. 기업들 때문에 국가가 망하게 생긴 것을, 국민들이 손해를 감수하며 되살리려 했는데 국가를 망하게 만든 원흉들은 반성하고 죄를 청하기는 커녕 도리어 사람들의 선의를 악용하여 국가를 침체의 구렁텅이로 밀어넣고 제 배를 불렸으니......
최근 헬조선 드립도 살기 힘든 대한민국의 상황 속에서 형성된 서민들의 이런 사회 지도층 혹은 기득권층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반감이 주 원인이며 여기에 상대적 박탈감이 더해진 것. 그리고 이런 분노는 가면 갈수록 강해지는 추세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상황과 체감하는 상황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자극적인 기사를 쓰는 기자들로 인해 일단 논란이 생기면 충분한 사실 확인 없이 기사가 쓰여지고 점점 부풀려지고 확산되지만 정정보도는 잘 하지 않고 대중의 뇌리에 남지도 않는 반면 선행에 관한 기사는 별로 쓰이지 않고 이슈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해외의 사례와 비교하는 경우 더욱 그러하다. 국내에 들어오는 상당수의 해외 기사는 독자취재보다는 그 국가의 기사에서도 특히 화제가 되는 기사를 바탕으로 쓰여지는데 국내에까지 전달될 정도로 이슈가 된 선행관련 기사는 그 나라에서도 드물기 때문에 화제가 된 것이고 국내에도 조회수가 높게 나오니 기사로 쓰여진 것이다. 반면 논란이 되는 해외 기사는 국내에 기사를 써도 비교적 화제가 되지 않으니 실제로 일어난 사건 대비 국내까지 알려지는 비율이 선행관련기사보다 낮다.
실제로 한국발의 그런 선행류 기사들, 예를 들면 최근 입법된 김영란법 같은 소식이 중국에 들어가자 중국 네티즌들은 한국을 본받자는둥 우리와 똑같은 반응을 이어갔다.
또한 해외 역시 선행과 악행의 상대치가 국내와 비슷하다 해도 나라도 많고 사람도 많으니 선행이 일어난 절대치는 국내보다 많을 수밖에 없는데 어느 특정 국가의 선행이 어느 정도라고 인식하고 기억하기보다는 막연히 뭉뚱그려서 해외에는 선행이 많이 일어난다고 여기게 된다. 따라서 해외뉴스를 보면 실제보다 과장되게 인식해 살기 좋다고 느끼게 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선행의 문제가 아니라 기득권층의 책임의 이행 문제다. 일례로 기업 과세 등의 예를 보면 미국의 경우 워렌 버핏 등의 부자들이 부자세를 증세하자고 주장하고 또 트럼프가 환경부담금을 부담않겠다고 했으나, 지방자치단체, 기업들은 그래도 환경부담금을 내겠다고 발표했다.
<칼레의 시민> - 오귀스트 로댕 작.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인 예시로 꼽히는 이 일화는 백년 전쟁 시기에 배경을 두고 있다. 영국과 오랜 시간 맞서 싸우던 프랑스의 칼레 시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 항복하겠다는 뜻을 전하자, 에드워드 3세는 사절단에게 "모든 칼레 시민의 목숨을 살려 주는 대신에 그 동안 저항한 죄를 물어 6명의 대표를 처형하겠다."는 말을 전한다. 전 시민이 살기 위해서 희생해야 하는 6명은 누가 되야 하는가 의견이 분분하던 가운데, 도시의 최고 부호였던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제일 먼저 자신이 죽겠다고 나섰고, 그 모습을 본 많은 칼레의 고위층들이 스스로 죽음을 자청하여 그 중 6명이 뽑혀 나왔다. 교수대에서 사형당하기 직전, 이들은 오랜 세월 임신을 하지 못했었던 영국 왕비가 임신에 성공해 왕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요청하면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이 전설은 특히 19세기의 애국주의를 고취하는 차원에서 활용되어 독일의 극작가 게오르그 카이저에 의해 '칼레의 시민'이란 희곡으로 쓰여지기도 했으며, 칼레 시청은 조각가 로댕을 압박하여 같은 이름의 동상을 제작하게도 했다. 그런데 매우 중요한 사실은 칼레의 시민 이야기의 유래는 중세 극작가 Jean Froissart 의 허구에 의한 것이며, 역사적 사료 들중에는 칼레의 여섯 시민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는 등 역사적 사실이 아닌 창작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또, 칼레의 시민이야기가 이 표현의 기원이 된 것도 아니다. 'Noblesse oblige' 라는 표현은 19세기 프랑스 극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의 희곡 골짜기의 백합(Le Lys dans la Vallee)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서도 유사한 개념이 언급되는 등, 즉 고대 로마 시절부터 쭉 존재했었던 개념이 통일된 표현으로 정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6.2. 영국 왕실
일반적으로 영국 왕실과 귀족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인 모범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전시에 귀족들이 자원하는 모습으로 많이 나타나는데, 아예 왕실 내부 규율과 영국 병역법에 왕실과 왕실에 속한 귀족들은 죄다 징병검사 후에 예외없이 장교로 군대에 징집을 시키기로 규정되어있다. 당연히 이 의무는 여성도 예외가 아니다. 애초에 여성이라고 의무를 감해주는 거면 모를까 아예 없애주는 나라 자체가 없지만.
귀족 자제들이 주로 가는 영국 최고 명문사학 중 하나인 이튼칼리지 출신으로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5,619명이 참전해 1,157명이 전사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4,690명이 참전해서 748명이 전사했다.# 오죽하면 대영제국의 몰락의 원인 중 하나가 이렇게 엘리트 계층이 원체 많이 죽어서라거나, 전후 작위 수여가 다른 시기보다 많았던 것이 이때 대가 끊긴 귀족집안이 너무 많아서 그 벌충용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 해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장교 출신인 찰스 왕세자와 그의 동생인 요크 공작 앤드루 왕자는 포클랜드 전쟁 당시 헬리콥터 파일럿으로 참전했으며, 찰스 왕세자의 아들인 윌리엄 왕세손도 육사를 나와 육해공을 모두 순시하고 공군 헬기 조종사로 복무하다가 할머니 여왕이 왕실 전속 부관으로 불러들었으며, 말썽 피우고 다니는 해리 왕자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장교로 참전했다. 물론 호위 병력으로 SAS가 줄줄이 따라다녔지만, 국방부는 "부대원들이 테러리스트들의 표적이 될 수 있으므로 본국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군 복무를 위해 훈련을 받던 왕자들은 "아 내가 옛날에 그 왕자를 발로 뻥뻥 차고 다녔지!" 라고 말하고 싶었던 선임들 때문에 하나같이 훈련소에서 신나게 굴렀다고 한다(...). 일례로 해군사관학교 교장이 지나가다 한쪽 구석에서 생도였던 왕자가 훌쩍거리길래 왜 우냐고 물어보니까 선배들한테 갈굼당해서 라고 했다는 카더라도 있다.
엘리자베스 2세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차량 정비 장교 보직으로 돌아다닌 건 꽤 유명하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여왕은 1926년생으로 나치독일의 영국공격이 한창이던 1941년에는 겨우 15세였다. 당연히 실질적으로 참전했다기보다는 전시에 왕실도 대중들과 함께 고통 분담을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봐야 한다.
게다가 영국의 귀족들은 봉건제하에서 귀족들에게 부과된 병력동원의 의무가 완전히 사라진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소 피트가 추진한 세제개편을 별 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바로 귀족들이 가진 부동산에서 발생한 소득에 대해 부과하는 소득세. 프랑스 혁명의 원인 중 하나가 토지보유를 대가로 부과된 병력동원의 의무가 사라진 귀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려는 시도가 좌절되면서 악화된 프랑스 정부의 재정상태였고, 아시아 대륙의 귀족들이 하나같이 보유한 재산에 대해서 과세받는 것을 격렬하게 저항했다는 점에서 영국 귀족들은 엄청난 결단을 한 것. 다만 영국 귀족들이 정말 백성을 끔찍히 아껴서 이를 실천한 것은 아니며, 프랑스 혁명과 같은 민중혁명에 대한 공포, 혹은 나폴레옹의 유럽 제패와 같은 국가적 위기상황에서의 양보라고 봐야 한다.
고인이 된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빈은 지뢰 제거 운동 등 반전 운동에 앞장서면서 전세계를 돌아다녔다. 이 점 때문에 그녀의 죽음이 죽음의 상인이라고 불리는 무기상인들의 테러라는 음모론이 나오기도 하였다.
6.3. 미국 상류층
비단 귀족만이 아닌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 등의 부유층들도 자선사업 활동을 벌이면서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하기도 한다. 미국의 상류층들은 기부를 사회적 의무이자 또 하나의 투자 수단으로 본다. 즉, "사회에서 이득을 봤으니 당연히 그 부를 돌려줘야 하며, 이는 우리 회사의 이미지를 좋게 심어주어 결과적으로 우리 회사는 더욱 큰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라는 철저한 비즈니스적인 마인드로 접근한다. 미국은 자선사업이 아니라 기부를 통해서 세금감면 혜택을 받는데 그 절세율이 상당하기 때문에 미국의 부자들이 기부를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부자들이 세금내기 대신 기부를 통해 기업 및 개인의 이미지 개선 및 인지도 상승을 꾀하고, 미국 정부는 반대급부적으로 사회환원이 되니 결과적으로는 상부상조인 셈.
하지만 워렌 버핏이나 빌 게이츠 같은 해외 부자들이 거액의 기부를 하며 자선 재단을 만드는 것 또한 내막을 들춰보면 록펠러, 카네기 시절부터 유서 깊은 상속세 회피를 위한 탈세 방법의 일환이자 일종의 위선이라는 비판 또한 존재하고 있다.
6.4. 이오시프 스탈린
의외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대숙청과 독재로 유명한 이오시프 스탈린에게도 관련 사례가 있다. 독소전쟁 당시 성년이던 그의 아들들 전원이 전쟁터에 보내졌고, 장남 야콥은 중위로 복무하던 중 키에프 포위전에서 독일군에 포로로 잡혔다.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에 잡힌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와의 포로 교환 협상을 제의했으나 스탈린은 ''정 그러면 모든 소련군 포로들을 데려와서 독일군 포로들과 교환하자. 수많은 소련인들이 자기 자식을 전쟁터에 보냈는데 내 아들 하나만 뺄 수 없다"는 말로 응수했다. 야콥은 결국 수용소에서 죽었는데, 탈출을 시도하다 죽었다고 하였으나 현재 조사결과는 자살에 가깝다. 경비병에게 "날 쏴라"라고 소리치고 경비병이 멈추라고 하면서 총 겨누고 있는데 전기철조망에 걸어가서 전기철조망을 잡은 상황에서 경비병이 총을 쏘았다. 사인도 쇼크사.
6.5. 마오쩌둥의 가족들
한국전쟁때 마오쩌둥의 큰아들 마오안잉은 그 중요성 때문에 비교적 후방인 항미원조군 총 사령관인 팽덕희의 부관으로 사령부에서 근무했다. 미공군의 폭격이 있을 때 언제나처럼 펑더화이와 부하들은 공습경보를 받고 뒷산에 있는 굴로 들어갔는데, 마오안잉은 태평하게 계란이나 삶으며 피하지 않아서 죽었다. 제임스 밴 플리트(미8군 사령관)의 아들도 전사했다. 제임스 밴 플리트의 아들은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인민군의 대공포에 격추돼서 전사했다. 밴플리트의 아들의 사망 일화는 한국군 장성들의 일대기에서 가끔 볼수 있는데 그야말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밴플리트는 다음날 위험이 따르는 수색작전은 중지해달라고 의연한 태도로 말했다. 심지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둘째 아들인 존 아이젠하워는 아버지에게 "만일 포로로 잡히면 자결하겠다"면서 생떼를 써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엘리트 장교였지만, 현직 대통령이자 2차대전 원수의 아들이 잡히면 골치아파지니까 군 상층부에서 일부러 후방으로만 돌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본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상층부에서 강제한 것이므로 이를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후방에서 일하는 것도 의무를 다하는 일이기도 하고. 그 외에도 제임스 스튜어트도 전쟁에 참가하여 지옥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꾹 참고 자기 아들을 군대에 보냈다.
7. 기타 관련된 것
참고로 비만도를 나타내는 BMI도 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근간으로 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 BMI는 과학계나 의료계가 아니라 보험업계에서 만든 수치인데, 1895년에 메트로폴리탄(현.메트라이프생명보험)에서 고객의 나이, 키, 체중 등을 작성한 신장체중표를 만들었고, 정상 체중을 넘는 사람에게 할증을 부과하도록 만든 것이다.
BMI 수치가 만들어졌던 1895년 당시는 비만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인데다가, 이때 당시의 비만은 부유함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이 BMI를 이용해 정상체중을 넘어가는 사람에게 할증을 부과할려고 했던 것은 당시 부자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 등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