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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 이야기

마켓 가든 작전(제2차 세계 대전)

작성자管韻|작성시간19.03.06|조회수95 목록 댓글 0


마켓 가든 작전(2차 세계 대전)

 

 

 

 

 


 

 

공수부대를 활용한 전쟁에 대한 개념이 맨 처음 역사에 공식적으로 등장 한 것은 벤자민 프랭클린에 의해서 이다. 그는 구름을 뚫고 나타나서 적 후방을 교란하는 군인들에 대한 개념에 대해 말한바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개념을 처음 전쟁에서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 제안을 한 것은 후에 영국 수상이 되는 윈스턴 처칠이다. 그는 1차 세계 대전이 한참이던 1917년 당시 영국군에 낙하산 부대를 창설해 독일군 전선 후방에 투입하는 것을 제안 하였는데, 이와 같은 그의 제안은 당시로써는 지나치게 파격적이라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미군이 유럽 전장에 투입된 1918년 연합군은 독일군의 후방에 미군 1사단을 공중으로 침투 시키는 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1919년 이를 실행하기 위한 작전 계획이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작전이 실행되기 이전에 전쟁이 종결되어 공수 부대의 실전 투입은 다음 전쟁으로 연기가 되었다. 이후 미군은 1920년대와 30년대를 거치면서 공수 부대 전략을 개발하고 실질적인 장비를 개발하는데 앞장 서왔다. 미국과는 별개로 소련 역시 공수부대라는 전략에 대해 매우 많은 관심을 보이면서 장비와 전략 개발에 주력을 했고, 30년대 이 분야에 많은 연구 활동을 진행해 왔다. 한편 독일은 소련의 공수부대 전략 연구를 검토하고 공동 연구를 진행하면서 이 전략의 전략적인 가치를 확인, 1936년 공수부대 학교를 설립하고 이 분야에 대한 투자를 시작했다. 그리고 공수 부대의 가치는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더욱 높아져, 많은 군인들이 이들 부대를 전쟁의 승기를 가지고 오는 마법 지팡이와 같이 생각하게 된다. 이와 같은 공수부대의 전략적인 사용이 극대화 된 작전이 영국군의 영웅 버나드 몽고메리 원수가 제안한 마켓 가든 작전이다.

 

 

마켓 가든 작전은 공수 부대의 투입과 목표 지점 점령을 의미하는 마켓 작전과 이들 전략적 요충지역을 영국군 기갑 부대가 연결하여 적 방어선을 깊숙하게 돌파하는 가든 작전으로 구성되었다. 마켓 작전을 위해 미국 101 공수 사단과 82 공수 사단이 소집되었고, 영국군의 제1 공수 사단이 투입되기로 결정 되었다. 영국군 제 1 공수 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폴란드 독립 공수 여단 역시 작전에 투입되기로 했다. 101 공수 사단은 아인트 호벤에서 그라브에 이르는 강과 운하에 놓여 있는 다리들을 확보하고, 82 공수 사단은 그라브에서 나이메겐에 이르는 다리들을 그리고 영국군 제 1 공수사단과 폴란드 독립 공수 여단은 아른헴에 있는 다리를 확보하는 목표가 주어졌다. 영국군의 제 30 군단이 수행할 가든 작전은 영국군 가드 기갑 사단과 43 웨섹스 사단, 그리고 52 노덤브리아 보병 사단으로 구성되어 917일 벨기에 국경 지대를 돌파하여 18일에 아인트 호벤, 19일에 나이메겐, 그리고 20일까지 아른헴에 도착하여 적진에 포위된 공수 부대를 포위망에서 구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작전의 성패는 투입된 공수 부대들이 전략적 목표들을 기갑 부대가 도착 할때까지 장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과 기갑 부대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최단 시간안에 공수 부대들을 포위망에서 구출해야 한다는 두가지 조건이 이루어져야 완성이 가능했다.

 

 

(마켓 가든 작전의 입안자이자 총 책임을 맡았던 버나드 몽고메리 원수. 북아프리카에서 패전에 쫓기던 영국군을 지휘하여 롬멜 장군의 아프리카 군단을 앨 알마메인 전투에서 격파하고 전쟁의 흐름을 영국으로 가지고 왔다. 이후 시실리 전투에서 뛰어난 전공을 세우고 노르망디 전역에서도 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마켓 가든 작전 당시 5성 장군인 원수에 임명 되었다. 하지만 전쟁을 영국군의 손으로 끝내고 싶다는 그의 열망과 개인적인 명예에 대한 욕심으로 무리하게 계획된 마켓 가든 작전을 실시 함으로써 서유럽 전선 최악의 패전을 기록하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이와 같은 두가지 조건이 충족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였다. 일단 공수 부대를 구출하고 보급과 충원을 담당하고 있는 영국군 30군단은 벨기에서 아른햄까지 진격하기 위해 60마일의 도로를 이동해야 했다. 문제는 이 공간에서 활용할 수 있는 도로는 단 한 개 였고, 이 도로는 양 측면이 높게 설계 되어 독일군의 매복에 완벽한 조건을 제공하고 있었단 것이었다. 좁고 보호가 안되는 도로를 탱크가 이동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로 매복에 선두에 있는 탱크가 공격을 받게 될 경우 모든 행렬이 멈출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네델란드 지역으로 후퇴해 있는 독일군은 네델란드 지역에 있는 거의 모든 다리에 폭약을 설치했다는 사실도 간과 되었다. 만일 독일 군이 연합군의 접근을 확인하고 이 다리들을 폭파 해버린다면 30군단이 제 시간에 아른햄까지 도착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런 가능성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공수 부대가 이들 작전 지역을 30군단이 도착 할 때까지 방어 하기 위해서는 이 지역에 독일군 전력이 최소화 되어 있어야 했다. 이와 같은 조건에 대해 영국군 사령관인 몽고메리 장군은 프랑스에서 패퇴한 독일군이 전투 의지를 이미 상실했고, 대부분의 장비도 잃어 버린 상태로 공수 부대가 충분히 제압 할 수 있는 상태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몽고메리와 영국군 수뇌부의 이와 같은 예상에 불구하고 벨기에에서 네델란드를 가로 지르는 이 지역에 독일군은 최근 서부 지역 총 사령관으로 임명된 본 륀스테프 원수의 지휘아래 빠르게 안정을 찾아 가고 있었고, 핵심 지역에는 방어선이 준비 되어 있었다. 여기에 최종 목표였던 아른햄 지역과 아인트 호벤 지역에는 전투에 지친 독일군 9 펜저 기갑 사단과 10 기갑 사단이 재 충전과 보급을 위해 배치 되어 있었다.

 

(영국군 제 1 공수 사단이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던 아른헴의 다리의 전투 이후 전경. 영국군과 독일군은 이 다리는 확보하기 위해 9일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탱크와 장비의 지원을 받은 독일군에게 영국군 대부분이 전사 하거나 포로로 잡히고 만다)

 

 

설상 가상으로 연합군은 4만명에 달하는 공수 부대원과 그 장비를 한번에 수송 할 수 있는 비행기의 절대적인 부족을 겪고 있어 모든 부대가 작전 개시일에 한번에 투입이 불가능했다. 이에 따라 영국군 제 1 공수 사단을 지원하기로 되어 있는 폴란드 독립 공수 여단은 작전 개시일로부터 2일 뒤에 작전 지역에 투입 되도록 계획 되어 있었고, 1 공수 사단 역시 두개 부대로 나누어져서 아른헴 지역에 투입되도록 준비가 이루어졌다. 또한 영국군의 무선 장비는 도심 지역과 숲이 우거져 있는 네델란드 지형에서 작동을 하지 않아 영국군은 일단 투입되면 다른 부대들과의 연락뿐 아니라 사단 내부의 통신 마저도 불 가능한 상황이었는데 이런 사실 역시 테스트 검토 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몽고메리 원수와 영국군 사령부는 마켓 가든 작전이 성공 하게 될 경우 독일군이 서부 전선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지그프리트 라인을 우회하여 단번에 독일 본토로 진격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고 이를 통해 전쟁을 종결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통해 미군의 도움을 일정 부분 받기는 했지만 영국군의 힘으로 독일을 물리치고 전쟁을 끝냈다는 대중의 평가를 받기를 강렬하게 희망했다. 이는 몽고메리 장군의 개인적인 희망 사항이자, 영국군 수뇌부의 희망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희망과 가능성은 이미 얘기한 문제점들에 대해 제대로된 검토도 이루어지지 않게 했고, 작전의 수립에서 집행까지 단 5일의 시간이 소요된 졸속 계획으로 탄생했다.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힌 영국 공수 부대원들. 영국 제 1 공수 사단은 아른헴 전투에서 독일군에 완전 포위되어 9일간을 버텼지만 결국 대부분의 부대원들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포위망을 뚫고 탈출 할 수 있는 부대원들은 대부분의 장비를 버리고 알몸으로 빠져 나왔고, 부상자는 독일군의 포로로 남겨졌다. 1 공수 사단은 아른헴 지역에 투입된 전체 병력의 80%가 전투 불능에 빠졌지만 9일 동안 그들이 보여준 용맹성은 아직도 회자 되고 있다.)

 

 

이와 같은 졸속 계획의 이면에는 다양한 당시 독일군과 네델란드 지역에 대한 정보를 무시한 정황들이 등장하여 아직도 논란이 된다. 첫번째로 당시 네델란드의 저항 조직이 독일군의 배치와 방어력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연합군에 제공 하고 있었음에도 이와 같은 정보가 무시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 연합군측이 네델란드 저항 조직 내부에 독일군 첩자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그들이 제공하는 정보에 크게 가치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대규모 전략적인 작전을 수행할 때 작은 정보라도 가볍게 처리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간과한 조치라 할 수 있다. 또한 이와 같은 조치는 두번째 내용으로 인하여 더욱 비판을 받게 된다. 바로 연합군 정찰기들이 네델란드 지역에 배치되어 있는 독일군에 대한 정보를 제공 했고, 이와 같은 사실들이 수뇌부에 제공 되었음에도 이 정보가 무시되었다는 점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유명한 일화는 몽고메리 장군을 보좌하여 마켓 가든 작전을 수립했던 영국군 공수 군단의 사령관인 브라우닝 중장은 정보 장교가 가지고 온 독일군 탱크 사진에 대해 이 탱크들 때문에 우리가 골치 아플 일은 없을 거다. 아마 사용하지 못하는 고장난 탱크일 것이다.”라고 대답하고. 해당 정보 장교에게 많은 정보를 분석하느라 과로에 시달리는거 같으니 휴식을 취하라고 말했다고 전해 지기도 한다.

 

 

그렇게 추진된 마켓 가든 작전의 결과는?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 이후 최대 패전을 기록한 것으로 기억할 수 있다. 연합군은 1944917일에서 25일간 약 9일간에 거친 전투에서 연합군은 17천명에 달하는 병력이 죽거나 전투 불능에 빠졌고, 탱크 88대와 항공기 144대가 격추 되었다. 연합군이 벨기에와 네델란드를 관통하여 독일의 공업 지대인 루르로 진격하여 1944년내에 유럽에서의 전쟁을 종결 시키겠다는 계획은 이렇게 최대 패배로 종결 되었고, 공수부대를 이용한 대규모 공수 작전의 위험성만 확인 되었다. 아른헴 지역을 장악하고 영국군의 독일 본토 진입의 시금석이 될 꿈에 부풀었던 영국군 제 1 공수 사단은 전체 투입 병력 75%에 달하는 8000명의 병력이 죽거나 다치고 포로로 붙잡혔으며, 살아 남은 부대원들도 대부분의 무기와 장비를 아른헴 지역에 버리고 알몸으로 도망쳐 왔다. 독일군은 공식 집계로 약 3300명의 병력이 전투 능력을 상실 했다. 이 모든 작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과 영국군 수뇌부는 마켓 가든 작전을 90% 성공한 작전이라 평가 했지만 군사 작전에서 90% 성공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마켓 가든 작전은 이후 몽고메리 장군의 커리어에 영원한 오점으로 남았고 그로 인해 2차 세계 대전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그의 경력에 불구하고 다른 연합군 장군들에 비하여 높게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철저 하지 못했던 준비와 정보 부족, 그리고 졸속으로 추진에 있었다. 왜 이런 일이 발생 했을까? 심리학적으로 이러한 현상을 증거 왜곡 현상이라 말한다.

 

 

증거 왜곡인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이나 내용을 반박 할 수 있는 다른 증거가 나타날 경우 생긴다. 쉽게 말해 정치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특정 일을 진행하면서 발생 할 수 있는 일들의 위험성을 지극히 작게 평가 하거나 무시하는 현상을 말한다. 최근 들어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각종 지방 자치 단체들의 과거 개발 사업과 관련한 내용에서 우린 이런 현상들을 많이 발견 할 수 있다. 자치 단체장이 자신의 공약으로 제시한 개발 사업의 사업성을 무시하고 추진했다가 문제가 발생하는 일들로 대부분 마켓 가든 작전과 같이 수장의 신념과 생각을 추종하는 아랫 사람들로 인해 발생한 일들이고, 대부분이 마켓 가든 작전처럼 철저한 조사와 분석 없이 졸속으로 추진되었다는 점들이 문제로 지적 되고 있다. 쉽게 말해 이명박 정부에서 있었던 “4대강 살리기사업과 같은 것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4대강 사업과 관련해서 많은 논란이 나오는 것은 당시 행정부에서 이 사업을 추진하면서 발생 할 수 있는 문제를 알고 있으면서도 은폐하고 조작 했다는 것도 논란이 된다. 개인적으로 볼 때 당시 행정부와 사업을 추진 했던 사람들은 전형적인 증거 왜곡 현상에 빠져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들이 추진하는 일이 옳다고 믿고 윗 사람의 의사를 따르고자 하는 충성심이 지나치게 높아서 발생 할 수 있는 문제점을 보고도 믿지 못하고,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는 심리 상태가 조직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일반 기업이나 조직에서도 이와 같은 문제점들은 종종 발견 될 수 있는데 조직의 수장이나 회사의 대표가 강력한 의지로 추진하는 사업의 문제점이나 위험성을 경고할 수 있는 시스템이나 절차가 마련되지 않을 경우 조직 전체가 눈에 보이는 위험성을 간과 하는 증거 왜곡에 시달려 결국 붕괴 할 수도 있다. 반대 증거 무시 졸속 추진 사후에 후한 평가 마켓 가든이 보여준 증거 왜곡의 전형적인 모습이면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많은 논란들의 모습이라 생각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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