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발터 모델(Otto Moritz Walter Model, 1891년~1945년)
다음 항목에서 모델 원수를 간략하게 기술하기에 앞서, 서문으로 괴테의 문장을 인용하여 모델이 선사했던 강렬한 인상을 표현하고자 한다. "나는 불가능을 갈망하는 자를 사랑한다.(Den lieb ich, der Unmögliches begehrt.)"
귄터 라이히헬름 대령 《US Army Foreign Military Studies, 1945-1961》 A-925 VII. Field Marshal Model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맹활약한 독일 국방군 지휘관으로 최종 계급은 원수이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장성 중 방어전에서 가장 뛰어났다고 일컬어진다. 오랜 시간 참모 장교로 근무하다가 야전 지휘관으로의 활약은 독소전쟁에서부터였기에 프랑스 침공에서부터 그 명성을 떨친 하인츠 구데리안이나 에리히 폰 만슈타인처럼 널리 이름이 알려지지는 못했었으나, 종전 후 시간이 흘러 기밀 문서가 해제되고 르제프와 오렐 돌출부에서의 전투가 알려지면서 군사 전문가들에게 재평가되고 있으며 현대전에서 가장 뛰어난 방어 전법의 지휘관으로 불리우고 있다.
오늘날의 독일에서도 널리 사용되는 ummodeln이란 단어는 영어로 remodel과 비슷한 의미로, 이는 2차 대전 당시 발터 모델의 무훈과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신조어이다. 영어로 model에 해당하는 독일어는 modell로 18세기, 이탈리아에서 들여온 표현인데 여기에 모델의 이름처럼 l자를 제외시켰던 유행어가 정착된 것이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작센 주의 겐틴에서 독실한 루터회 신자인 음악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제적인 여유는 없어서 생활고에 시달렸으나 김나지움에 다닐 수 있었고 이때만 해도 라틴어와 그리스 문학 동호회에서 역사와 시에 관심을 갖는 조용한 학생이었다. 그런데 모델 일가가 새로 이사한 나움부르크가 포병과 보병 대대 주둔지였고, 군 장교를 아버지로 둔 친구들과 만나면서 큰 영향을 받는다. 이들은 모델을 데리고 육군 기지 내 훈련을 구경하곤 했는데 대표적인 절친이 당시 프로이센 육군 대령의 아들이었던 또 한 명의 우주방어 명장 한스-발렌틴 후베 (Hans-Valentin Hube) 상급대장이다.
모델은 성적이 우수했기에 졸업 시험에 합격하여 대입 자격증(Abitur)을 받았으나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한스-발렌틴 후베를 비롯하여 친구 6명과 함께 군에 보병으로 입대한다. 사관후보생으로 추천서를 받아 입대했지만, 어릴 때부터 병약하고 학교를 자주 결석했으며 체육 시간에도 혼자 그늘에서 쉬고 있었던 모델이 기초 군사 훈련을 견뎌낼 리가 없었다. 참다 못한 교관은 '군인에게 필요한 끈기와 강인함이 부족하다'며 모델에게 군대를 그만둘 것을 진지하게 권유했고, 당사자인 모델도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군인의 길을 단념하고 의대에 진학할 준비를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모델은 군대에 남았고, 교관은 이에 보답하여 병약한 사관후보생이 모든 훈련과 시험을 통과할 수 있도록 단련시켜 준다. 소위로 임관한 모델은 사냥과 승마, 테니스를 즐기며 타 부대와 대항 시합까지 주최할 정도로 외형적으로 달라진 모습이었고, 자신을 단련시켜준 고참 부사관의 거친 언행과 닮아가고 있었다.
2.2.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보병 장교로 베르됭 전투, 솜 전투에도 참전하였고 용맹을 떨쳐 철십자 훈장 1급을 받았다. 이때 여단장이었던 오스카 폰 프로이센 왕자가 프랑스군의 압도적인 포격에 여단이 큰 피해를 입는 위기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모델 중위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장군참모 과정 이수를 직접 주선하였다. 무공을 많이 세운 만큼 부상도 많았는데, 특히 1915년의 어깨 부상과 1916년의 다리 부상은 동맥을 다쳐서 긴 시간 병원에서 치료받아야 했다.
퇴원 후 전선에 복귀한 모델을 오스카 왕자가 자신의 부관으로 임명하였고, 이 기간 동안 참모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를 한스 폰 젝트가 오스만 제국 파견 근무시 연락장교로 동행토록 하였으며 귀국 후 최고육군지휘부(OHL)의 병참 장교로 배치하였다. 1918년 2월, 오스카 왕자와 한스 폰 젝트의 추천을 받아 장군참모 과정을 이수한다. 랭스 공세에도 참전하여 대위로 종전을 맞을 때까지 발터 모델은 중요 전장과 참모 장교를 모두 경험하였고 세 번의 부상에서 살아 남았다.
(1918년 3월, 바트 크로이츠나흐에 위치한 OHL본부에서 촬영된 사진. 앞줄 중앙에 파울 폰 힌덴부르크 원수와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 왼쪽 끝이 발터 모델 대위. 당시 모델은 사적인 자리에서 황제 빌헬름 2세와 만난 경험도 있다고 한다)
2.3. 전간기
장군참모 과정을 마친 엘리트 장교임에도 모델은 베르사유 조약의 군사 조항에 실망하여 이대로 군에 남을지 확신을 갖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1919년 11월, 병력 10만 명과 장교 4000명, 무기 개발과 보유까지 제한된 상황에서 '독일군의 아버지' 한스 폰 젝트가 선발한 4000명의 정예 장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음 해 1월의 대규모 기동 훈련에서 폰 란차우 장군은 모델에 대하여 "상급 지휘관에 걸맞는다"라는 높은 평가를 남겼다.
1920년, 루르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소요 사태가 발생했을 때 중대장으로 치안 부대에 배속되었고 당시 신세를 졌던 주인집 딸 헤르타 후이센과 인연을 맺게 되어 1년 후 결혼한다. 모델은 헬라, 한스게오르크, 크리스타 세 자녀 모두 루터회 세례를 받게 하였는데 그의 결혼식을 집례했던 절친한 친우이자 지난 대전에서 유보트 함장이었던 마르틴 니묄러 목사가 이를 담당하였다.
결혼 직후부터 4년 간 뮌스터에서 프리츠 폰 로스베르크(Fritz von Lossberg) 보병대장의 참모로 근무하는데 로스베르크의 전술에 깊은 감명을 받으며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 계기가 된다. 로스베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최전선의 패잔병들을 체계적인 부대로 재편성하고 종심방어 전술로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내다가 적절한 시기에 공세로 전환하여 큰 타격을 입히는 무훈을 세웠는데 특히 종래의 방어 전법에 반대하며 후방 진지 구축과 예비대의 운용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훗날 '동부전선의 소방수(Feuerwehr der Ostfront)' 발터 모델이 펼쳐낸 방어 전법은 '서부전선의 소방수(The Fireman of the Western Front)' 로스베르크 장군의 수제자임을 입증한 것. 모델과 소위 시절부터 친구였고 뮌스터에서도 함께 참모로 근무했던 에르빈 비오프 보병대장에 따르면 로스베르크 장군과의 인연과 여러 공통점들 덕분에 모델은 마법사의 제자(Zauberlehrling; 괴테의 발라드의 제목이기도 하다)'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한스 폰 젝트 상급대장이 소련과 체결한 라팔로 조약에 의거한 교환장교 훈련에 병무국 교육과장 발터 폰 브라우히치를 수행, 6주 간 소련에 머무르며 기갑 부대를 활용한 기동전 교리를 접하고 소련군의 무장 수준에 대한 심도 있는 보고서를 제출한다. 1928년, 모델은 장군참모 기본과정에서 전술 및 군사학을 강의하는 교관으로 근무하며 아돌프 호이징어, 페르디난트 요들, 지크프리트 라스프, 아우구스트 빈터 등에게 해당 학기의 가장 뛰어난 교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소령으로 진급한 1929년, 모델은 자신이 존경하는 아우구스트 폰 그나이제나우 원수를 연구한 논문 《Gneisenau》를 발표하여 널리 주목을 받게 된다. 그나이제나우 원수의 좌우명이었던 "Fortiter, fideliter, feliciter(용감하게, 충실하게, 성공적으로)."는 모델 자신에게도 좌우명이 되었다.
(1934년, 동프로이센 알렌슈타인 제2보병연대장에 취임한 발터 모델 대령의 사진. 이 무렵 모델은 바르샤바로 가서 폴란드 주재 독일 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던 한스 크렙스를 만나고 왔고, 크렙스 또한 국경을 넘어 모델의 자택에 방문하며 오랜 친분을 다졌다.)
독일 국방군으로 개편된 후에도 병무국에서 신병기 개발, 테스트를 관할하던 8과(8. Abteilung - Technik)에 근무하던 모델은 1938년까지 베를린 참모본부에 재직하며 하인츠 구데리안의 기갑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해외와 독일의 기갑 부대 발전 사항을 연구하며 기울인 엄청난 노력과 열정 덕분에 당시의 별명이 '차량화 부대 광신자(Armee Modernisimus)'.
정치에는 무관심하고 오로지 군사 업무에만 열심이었다고 하나, 그의 오랜 상관인 발터 폰 브라우히치와 뜻을 같이 하였다. 브라우히치는 나치당에 열광하는 젊은 장교들을 혐오했지만 나치의 재군비 정책을 열렬히 지지하였고 모델 또한 독일의 국가 주권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나치에 의한 베르사유 조약 파기와 독일군의 부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귀족 출신 장교들과 그리 원만하게 지내진 못했던 모델에겐 나치에 의한 참모본부 숙청에 따른 브라우히치의 육군 총사령관 취임은 그의 이력에 전환기가 되어주었다. 모델의 친나치 성향 여부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이유.
다만 모델이 나치 인사들과 친했다는 기존의 주장은 사실보다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한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와 친했다는 말이 영국 전사학자들에 의해 정설처럼 주장되고 있으나 괴벨스의 일기에서 모델은 그가 2차 대전에서 주목받기 이전에는 언급되지 않았다. 헤르만 괴링과 친하다는 것은 프란츠 할더의 전쟁 일지에서 1939년 10월 19일, 모델과 괴링이 스스럼없는 대화를 나누었다는 내용에서 유래된 것인데 한나 라이치는 자서전에서 독일 글라이더 연구소의 신형기 테스트에 모델이 에른스트 우데트,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 알베르트 케셀링, 에르하르트 밀히 등 공군 장교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관했다고 기록했다. 병무국 8과는 공군 재군비에도 깊이 관여했기 때문.
1937년 가을의 대규모 기동 훈련 직후 모델은 스페인에 체류하면서 OKH를 대표하여 스페인 국민군 장성들과 세부 사항을 논의했는데, 이때 콘도르 군단의 공군 장교들이 모델 대령과 따로 만나서 전투 보고를 하고 국민군의 훈련 상황과 문제점을 개진하는 등 모델은 원래부터 공군 장교들과 친분이 깊었고 이러한 경험을 기반으로 후일 군 사령관으로서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리터 폰 그라임 장군과 긴밀한 공조 하에 전투를 지휘할 수 있었다.
2.4. 제2차 세계대전 개전 및 서부 전역
1939년 9월의 폴란드 침공 당시 드레스덴에 주둔 중인 4군단의 참모장이었던 모델은 폴란드 남부 침공 계획을 입안하였고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중장으로 승진하여 16군 참모장으로 영전하였다. 프랑스 침공에 참전하여 스당 돌파와 마지노선 우회 공격을 성공시켰으며 이후 영국 상륙 계획을 입안하여 16군의 훈련에 몰두하나 바다사자 작전이 취소되면서 보직을 변경, 제3기갑사단장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야전 지휘관이 되었다. 모델은 여기서 병과에 상관없는 종합 훈련을 창안하여 이를 실시하였다. 참모들은 처음엔 가중된 업무로 인하여 모델을 싫어했지만, 이는 매우 선진적이었고 앞날을 내다본 것이었다.
2.5. 독소전쟁 초기 - Guderian’s Spearhead
귀관의 말은 지극히 옳다. 그러나 지금 낭비하는 1분 1초가 나중에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손실이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지금 진격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위험에 빠지게 된다. 기술적 측면을 서둘러 해결하라. 이미 시간을 많이 잃었다.
- 발터 모델 중장. 1941년 7월 3일 스몰렌스크 포위전에서, 전차 198대 중 128대가 임무 수행이 불가능한 등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진격 속도를 늦추자는 부하 장교의 건의에 대하여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모델은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 휘하로 배속된다. 전차 부대 실전 지휘 경험이 전무하기 때문에 그러한 인사 조치에 불만도 있었으나, 모델은 교량이 파괴된 시하라 강 도하를 포함하여 4일 간 310km를 질주하며 소련군 14기계화군단을 해체시켜버리고 개전 2주 만에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는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모델에게는 제1기병사단의 지휘권까지 주어졌고 제3기갑사단은 '모델 집단(Gruppe Model)'이란 명칭을 사용하게 된다.
스몰렌스크에서 31만 명, 키예프에서 66만 5천 명의 소련군이 포로가 되며 프랑스 침공을 능가하는 독일 기갑전의 신화를 써내려갔다는 민스크, 스몰렌스크, 키예프 포위전에서 모델은 구데리안 기갑군에서도 최선봉에서 진두지휘하였고 그 무훈을 인정받아 기갑대장으로 진급한다. 특히 갑작스러운 키예프로의 방향 전환에 구데리안 기갑집단은 모스크바 방면으로 측면이 150마일이나 노출되었으나 최선두의 모델은 이러한 위험성마저 분쇄하며 돌격을 거듭하여 9월 14일,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제1기갑군의 선봉인 제16기갑사단과 합류하면서 키예프 포위망을 완성시킨다. 이때 16기갑사단장이 학창 시절 급우였던 한스 후베 소장이었다.
사단장으로서 모델은 언제나 선봉 부대를 직접 지휘하며 전황을 정확하게 파악했고, 소련군이 미처 파괴하지 못한 교량을 확보하고 작전 지도를 노획하여 진격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선봉 부대는 적의 강력한 방어 진지에 반격할 틈을 주지 않도록 신속하게 우회하여 중요 거점을 우선 점거하며 전술적 우위를 장악했고 연료 부족과 열악한 도로에 의한 전차의 비전투 손실, 악천후에 후속 부대가 합류하지 못하자 모델은 정예 부대원들을 선발하여 전투단을 재편성, 이들 선발대를 거듭 진격시키는 전법으로 3기갑사단은 3개월 동안 단 하루도 휴식 없이 키예프까지 도달하는 압도적인 전과를 달성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가한 독일군 기갑 부대 지휘관 중에서도 모델의 숙련된 부대 운용과 공격적인 지휘는 가장 돋보였고, 이는 작전 개시 4개월 만에 기갑대장으로 진급, 연이어 4개월 후에 상급대장으로 진급하는 성과로 이어진다.
1941년 10월부터 시작된 모스크바 전투에서는 라인하르트 상급대장이 지휘하는 3기갑군 산하의 41기갑군단장으로 참전하여 모스크바 20km 앞까지 도달하였으나, 강추위 및 소련군의 거센 반격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모델은 최후미에서 완강한 저항을 계속하며 3기갑군의 후퇴를 엄호하였는데 갑작스러운 상황에 무너져 버린 군율을 바로 세우기 위해 권총을 손에 든 채로 한계 지점의 전선까지 오고가며 지휘를 하여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가장 선두에 진격해 있었기에 전군 퇴각 시 최후미를 맡게 된 모델은 역시 모스크바 13km 앞까지 진격했던 제6기갑사단장 에르하르트 라우스(Erhard Raus)와 처음으로 작전을 함께하는데, 동부전선의 특성을 반영한 독창적인 전법을 창안하여 명성을 떨치게 되는 두 장성이 각별한 전우애를 이어가며 수많은 전투를 함께했던 나날의 시작이기도 했다.
2.6. 독소전쟁 중기 - Germany’s biggest and most powerful army
대부분의 장비를 잃어버리고 인적 손실도 보충받지 못한 채 철도망마저 차단되어 3면이 포위된 9군의 암담한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은 발터 모델 기갑대장, 저돌적인 야전 지휘관이자 냉철하고 치밀한 장군참모이기도 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곳의 간격을 닫는 것이다."
모델의 손이 작전 지도 상에 르제프 서부와 니콜스코예, 솔로미노 방면의 소련군 화살표를 가리켰다. "소련군 사단들의 병참선을 차단하고 돌파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모델은 9군 사령부가 위치한 시쵸프카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우리는 소련군의 측면에 역습을 가하여 궤멸시킨다."
제1기갑사단장 크뤼거 소장과 작전참모 발터 벵크 중령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낙관적인 의견에 감탄하고 말았다. 9군 작전참모 블라우로크 중령이 회의실에 있는 모든 이의 의문을 대표하여 방금 전에 도착한 신임 9군 사령관에게 질문했다.
"그렇다면 장군님, 이 반격작전을 위한 증원군이 왔습니까?"
모델은 가만히 자신의 작전참모를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Mich)!"
갑작스레 찾아온 거대한 안도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웃음에 동참했다. 이후로 오랜 기간동안, 유쾌한 웃음소리가 자주 들려오게 되는 시쵸프카 9군 사령부의 첫 번째 날이었다. 새로운 정신이 시작되고 있었다.
(1942년 1월, 모델이 처음 9군 사령관에 임명될 당시인 1차 르제프 전투의 부대 배치도. 전역의 폭이 최대 450km나 되었고 단 하루도 전투가 벌어지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모델은 항상 격전의 중심에 있었다)
종전 후 오랜 시간 동안 스탈린그라드 주위를 둘러싼 남부가 주요 전역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뒤늦게 르제프 공방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특히 소련의 붕괴 후 공개된 사료에 의하면 1년 여의 시간 동안 적어도 4차례의 대규모 작전이 중부 르제프 전역에서 행해졌다고 한다.
1942년 1월, 9군 사령관으로 갑작스레 임명된 모델은 강추위가 독일군의 발을 묶은 것만큼이나 소련군의 발을 묶었기에 충분히 방어해낼 수 있다고 판단, 돌출된 지형 탓에 포위되고 후방에 소련군 공수부대까지 강하하여("하느님 맙소사, 우린 완전히 섬 안에 갇혀 있는 셈이로군." 첫 전선 시찰 후 모델의 소감.) 수적으로도 4:1의 열세인 상황에서도 예비 부대의 정확한 투입과 화력을 집중적으로 운용하여 사방에서 몰아치던 소련군의 공세를 모두 무력화시켰을 뿐 아니라 최상의 타이밍에서 공격으로 전환, 오히려 소련군을 궤멸시키며 간격을 닫아 버린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겨울 공세로 인하여 와해 직전까지 갔던 9군을 도중에 지휘하게 된 1차 르제프 전투에서부터 1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모델은 르제프 돌출부에서 끊임없이 격전을 거듭하며 소련군의 명장인 게오르기 주코프, 이반 코네프,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부대를 특유의 공세적 방어로 모조리 패퇴시키는 위업을 달성하여 '방어의 사자(Abwehrlöwen)'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2.6.1. 전상장 금장과 자이들리츠 작전
1942년 5월 23일, 2기갑사단이 위치한 벨리 전선을 시찰한 모델이 9군 사령부로 귀환하기 위해 피젤러 슈토르히에 탑승하여 50m 가량 이륙했을 때, 숲에서 소련군 파르티잔에 의한 기관총 사격이 가해졌다. 파일럿인 빌헬름 하이스트 상사는 '마치 거대한 창에 꿰뚫린 것 같았다.'고 진술하였는데 탄환이 모델의 상반신을 아래에서 위로 관통하여 어깨로 빠져나가면서 특히 좌측 폐의 손상이 가장 심각했다.
치사량의 출혈로 혼수상태였던 모델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하이스트 상사가 피탄당한 슈토르히를 필사적으로 독일군 야전 병원 근처에 착륙시키면서 신속한 응급 조치와 수혈이 이루어진 덕분이었다.
며칠 후 중부집단군 사령부가 위치한 스몰렌스크의 병원으로 이송된 모델은 슐츠 교수의 집도로 수술을 받았지만 여전히 중태였고, 에르푸르트 중령은 계속된 실혈로 인해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9군 사령관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다행히도 고비를 넘기면서 회복이 무척이나 순조로웠고 충분한 휴식과 요양이 필요했던 만큼 6월 16일, 모델은 드레스덴의 자택으로 보내졌다. 이때 5번의 전상을 인정받아 전상장 금장이 수여되었는데 장군참모 출신 장성이 전상장 금장을 받은 경우는 매우 극소수라고 한다.
그의 부재 중에도 9군은 7월 2일의 자이들리츠 작전(Operation Seydlitz)으로 소련군 39군을 포위-양단-섬멸하며 점령지를 더욱 넓히는데 성공하였고 르제프 돌출부의 남부 간격을 완전히 닫아버렸다. 이어진 소련군의 하계 공세마저도 9군의 방어 앞에 돈좌되었던 8월 7일, 발터 모델은 9군 사령관에 복귀하였고 격전을 거듭한 부하들을 추스르며 다음 전투를 대비하였다. 자이들리츠 작전의 성과가 없었으면 11월, 주코프의 화성 작전은 압도적인 대병력에 의한 완벽한 포위망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6군처럼 9군을 가둬버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2.6.2. 화성 작전
3주 동안 4개 방면에서 동시에 진행된 르제프 동계 전투의 승리는 특히 독일군 지휘관 모델 장군의 역량 덕분이었다. 비교적 위험도가 낮은 전역에서 예비 부대를 만들어내어 최적의 순간에 승부처가 되는 전장(그는 모든 전역을 동시에 파악하고 있었다.)에 투입하는 탁월한 재능은 그의 방어전 승리에 가장 큰 요인이 되어 주었다.
- 호르스트 그로스만 보병대장 《Rshew, ECKPFEILER DER OSTFRONT》
1942년 9월과 10월에 걸쳐,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독일군 주력이 집중되는 가운데 르제프 방면 소련군 대공세에 관하여 독일군은 정보 기관마다 그 예측이 다르고 내용이 몇 번이나 번복되는 등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모델과 9군 정보참모 분트록 중령은 감청과 항공 시찰, 소련군 포로의 진술 등을 통해 11월 25일의 소련군 동계 대공세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폭설에 정찰기와 차량이 운행하지 못하자 모델은 무한궤도 군용 바이크로 매일 최전선을 오가며 주요 방어 진지를 보강하고 지휘관들과 논의하여 이를 기반으로 중부집단군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 원수에게 증원 부대와 보급 물자를 요청했다.
(11월의 화성작전 부대 배치도로 위의 지도와 비교해 보면 1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9군의 공세적 방어가 다대한 전공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1942년 9월, 스탈린이 미국 대통령 특사 웬들 윌키에게 제2전선의 개전을 요구하며 르제프 전투를 참관시켰을 만큼 이곳은 동부전선 최대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11월 25일 새벽, 이반 코네프의 서부 전선군과 막심 푸카예프의 칼리닌 전선군이 4개 방면에서 동시에 9군을 협공하여 대규모 포위망(화성 작전; Operation Mars)을 완성하려 했으나 눈과 안개 때문에 목표물을 상실한 소련군 20군 포병대의 서전 포격은 아군의 진격에 방해가 될 만큼 지형을 파헤쳐 놓은 반면, 한스-위르겐 폰 아르님(Hans-Jürgen von Arnim) 기갑대장의 39기갑군단은 이에 대비하여 후방 진지로 물러나있었고, 독일군 포병과 라이플은 방어 진지에 의해 제한된 소련군의 돌격로를 정확하게 예측하여 배치되어 있었다. 서부 전선군은 첫날에만 투입한 보병의 절반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2개의 전차여단도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주코프와 코네프는 공세를 강행했으나 비좁은 돌파구에 6전차군단과 제2근위기병군단이 몰리면서 병목현상이 발생, 이들은 모델의 주특기인 포병 집중 운용(HArko 307- Higher Artillery Command 307)의 희생양이 되어 버렸고 여기에 모델이 직접 지시한 슈투카 폭격까지 더해지며 20군과도 단절, 고립되고 말았다. 아르님은 증원 기갑 부대가 도착한 11월 29일에 이미 공세로 전환, 교과서적인 포위 섬멸전으로 각개격파를 지휘하였다.
칼리닌 전선군은 22군과 41군으로 벨리에 위치한 41기갑군단의 서부 방면을 공격하고 39군은 북부 방면으로 공격했으나 41기갑군단장 요제프 하르페(Josef Harpe) 기갑대장은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도 소련군 선봉 부대들의 합류를 저지하였고, 통신이 두절되자 모델은 직접 벨리 전선으로 와서 지친 전투 부대를 후방으로 배치하여 휴식을 취하도록 하며 중부집단군 예비부대인 12, 19, 20기갑사단을 41기갑군단에 증원, 하르페는 돌출된 소련군 선봉 부대들을 각개 포위하여 섬멸한다.
마침내 12월 14일 늦은 밤, 주코프는 정식으로 소련군의 탈출을 허가하였으나 간신히 확보한 탈출구에서도 HArko의 집중 포격과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예하 기갑척탄병의 맹공이 가해졌다. 결국 화성작전에서 독일군은 사상자 4만 명, 소련군은 33만 5천 명의 사상자와 정예 전차군단 6개가 와해되며 85%의 전차 손실(1852대), 대부분의 중장비들이 독일군에 노획되는 대패를 기록해야만 했고, 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최대 규모의 방어전 승리로 손꼽히며 현대 전사학계에서 르제프 공방전이 재조명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2.6.3. 들소 작전
전시의 모든 군사 작전 중에서도 등 뒤에 적군이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철수 작전이야말로 가장 위험하고 난이도가 높다. 1943년 3월, 비야즈마-르제프 전역에서 실시된 작전명 '들소'(Operation Büffel)는 질서정연하고 능률적으로 진행된 후퇴 작전의 모범적인 예시로 남았다. 이는 상세하게 기술할 가치가 있으며 난해한 철수 작전의 기법을 배우기 원하는 참모 장교를 위한 교재로 다루어질 만하다. 현대전에서 군 부대만의 철수는 있을 수 없으며 어떤 계획에서도 민간인들의 철수 문제를 포함해야 한다.
-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 소장, 《Panzer Battles》
스탈린그라드의 참패 이후, 여전히 모스크바에서 18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점의 르제프 돌출부를 장악하고 있던 중부집단군은 남부 방면에서 치고 올라오는 소련군과 북부집단군의 보급 거점인 벨리키예 루키를 탈환한 소련군에 전면 포위될 위험에 처했다. 결국 히틀러는 9군 전체와 4군의 절반을 르제프 돌출부에서 빼내어 전선을 축소시키는 중부집단군의 퇴각 작전을 승인한다. 사실 모델은 자신의 부재 중 9군이 큰 피해를 입었던 소련군의 하계 대공세 직후인 1942년 9월, 기갑사단의 주둔 없이는 방어가 어려운 돌출부를 포기하고 이들 정예 병력을 전략적 예비대로 활용할 것을 히틀러에게 촉구했지만 거부당했었다.
모델에게는 9군 예하의 25개 사단 – 장교 8691명, 군무원 2325명, 부사관 57083명, 병사 256825명 – 과 독일군에 협조했다는 죄책으로 보복당할 것이 확실시되는 소련 주민 6만 명을 3주 동안에 탈출시켜야 하는 중책이 주어졌다. 2월 4일, 모델은 들소 작전을 총괄하기 위한 특별 참모진을 구성하고 무선 통신을 엄금하며 오직 유선 전화로만 연락할 것을 명령했다. 특별 참모진의 첫 번째 임무는 벨리시와 키로프 사이에 새로운 방어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200km의 주 철수로의 신설과 함께 소그룹으로 이동할 피난민을 위한 600km의 예비 철로 및 도로가 부설되었고 군수품 및 야전 식량 배급소, 의무 및 수의 구호소가 설치됐다. 200개 이상의 열차가 10만 톤의 물자를 수용했고 1만 톤 이상의 수송 차량이 집결했다. 변덕이 심한 3월의 날씨에 대비해 다양한 교통 수단을 마련해야 했다. 공병 부대는 작전 막바지에 1,000km의 철로와 1,300km 가량의 전화선과 전선을 철거, 파괴한다.
민간인과 병원의 환자들이 가장 먼저 오렐 방면으로 이송되면서 3월 1일, 철수 작전이 개시됐다. 전화선을 걷어내고 지뢰 매설 작업을 하던 중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면서 다시금 도로가 얼어붙었지만 미리 준비해 뒀던 썰매에 신속하게 옮겨 실으면서 작전은 치밀하게 계획된 시간표대로 진행됐다.
독일군은 오직 밤에만 움직였고 주간 이동이 불가피할 경우에는 소련 공군에 발각되지 않도록 차량 운행을 통제하여 분산해서 이동했으며, 르제프에 잔류한 후위 부대의 철저한 기만전술로 인해 소련군은 독일군의 퇴각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뒤늦게 르제프 돌출부에서 독일군이 사라진 것을 파악했을 때엔 주코프가 춘계 공세를 준비하며 5군을 재편성하기 위해 후방으로 돌린 상태여서 더욱 추격이 늦어졌다. 독일군 후위 부대는 기민한 대응으로 소련군 추격 부대를 차단했고, 매설된 지뢰에 휘말리면서 큰 피해를 입은 소련군의 추격이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안전하게 퇴각했다.
(1943년 3월 6일,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4군 사령관이 9군 사령부를 방문하여 모델과 함께 방명록에 글을 남겼다. 9군 방명록은 아군의 전황을 재치 있게 풍자하는 삽화로 유명했는데 이듬해 1월 24일, 9군 사령부 장교들은 시찰 차 방문한 전임 사령관 모델의 생일을 축하하며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사용했던 방명록 책자를 선물했다. 이는 전후에도 모델의 가족이 보관하고 있다.)
3월 22일, 29000명의 공병이 7주 동안 요새화시킨 폭 100km의 방어 진지에 병력, 장비를 무사히 온존시킨 9군과 4군이 도착하면서 들소작전은 성공리에 완수됐다. 중부집단군은 530km의 광대한 전선을 200km로 축소하면서 15개의 보병사단, 3개의 기갑사단, 2개의 차량화사단, SS 기병사단을 예비 부대로 확보했고 4월 2일, 모델에게 곡엽 검 기사 철십자훈장이 수여됐다. 들소 작전은 지금도 독일 연방군 사관학교에서 강의되고 있다.
2.6.4. 쿠투조프 작전 VS 헤릅스트라이제 작전
“모델은 성채 작전을 반대하고 있었다. 모델은 성채 작전이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점은,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 히틀러에게 직언할 용기가 있었던 극소수의 사람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 발레리 자물린 교수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27-4 (2014)
1943년 7월 5일, 모델의 9군은 쿠르스크 전투의 북방 공세를 맡아서 오룔에서부터 남하하여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방어선을 공격, 이를 양단 직전까지 가며 독일군의 손실을 압도하는 피해를 입혔으나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작전 목표인 쿠르스크에 도달하지 못하였고 전투 개시 일주일 만인 7월 12일 소련군의 쿠투조프 작전에 의하여 오렐의 사령부에 주둔 중이었던 2기갑군이 공격당하면서 급히 회군하였다.
쿠투조프 작전은 오렐 탈환과 소련군 입장에서 철천지간 원수인 9군을 궤멸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던 것이나 모델은 9군뿐 아니라 2기갑군의 지휘권까지 인수하여 오렐에서 후퇴하는 헤릅스트라이제(Operation Herbstreise;가을여행) 작전을 개시한다.
7월 12일부터 8월 18일까지 38일 동안, 독일군 49만 2천 명을 섬멸하기 위해 소련군 128만 2천 명이 투입된 상황에서 독일군은 사상자 6만 804명, 전차 손실 250대를 기록한 반면 소련군은 사상자 42만 9,890명, 전차 손실 2,586대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만 했고 참모 1명만 동행한 채 마지막 순간까지 오렐에 남아서 작전을 지휘하던 모델은 최후까지 아군을 엄호하던 12기갑사단과 함께 하겐 라인(모델이 히틀러의 '후방 방어선 구축 금지' 지령을 무시하고 휘하 공병들에게 명령하여 독단적으로 구축해 놓은 브랸스크 방면의 방어 진지)에 도착한다. 특히 소련군 포로 1만 1,732명까지 데리고 와서 퇴각 작전에서 오히려 전술적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전략적 측면에서도 9군은 소련군 전략 예비대의 거대 부분을 약화시켰고, 덕분에 중부집단군은 5개 기갑사단을 비롯한 19개 사단을 가용 병력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사령관 이하 9군 장병 전원은 7주 동안 단 하루의 휴식도 없이 용전을 펼쳤으며 특히 전장의 폭이 400km까지 확장된 상황에서도 모델은 이를 완벽하게 통제하여 끊임없이 최전선을 오가며 시간 단위로 직접 공군 폭격 지시를 내리고 예비대 투입 시기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운용하는 등 지휘관으로서 천재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또한 9군 주력 공격 부대인 하르페 전투단을 지휘하여 하루 평균 200대가 넘는 소련군 전차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린 요제프 하르페 기갑대장, 9군이 양단될 수 있는 상황에서 가장 치열했던 돌출부를 성공적으로 방어해 내며 전선의 지휘 체계를 굳건히 유지한 로타르 렌둘릭(Lothar Rendulic) 보병대장, 혼성 부대를 지휘하여 기갑전에서도 맹위를 떨친 요하네스 프리스너(Johannes Frießner) 보병대장의 무훈도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이들 세 명의 장성은 이듬해 상급대장으로 진급, 집단군사령관에 임명된다.
2.7. 독소전쟁 말기 - More Hole Than Front
모델 원수가 중부집단군 사령부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장병들이 자신감을 되찾았다
- 1944년 6월 28일, 9군 사령부 전쟁 일지
나의 최고의 야전원수 (mein bester Feldmarschall). 귀관이 아니었다면, 귀관의 영웅적인 노력과 탁월한 통솔력이 없었다면 소련군은 이미 동프로이센에 도달하였거나 심지어 베를린의 관문 앞에 와 있었을 것이다. 독일 국민은 조국을 위한 귀관의 헌신에 감사하고 있다.
- 1944년 8월, 아돌프 히틀러. 동부전선을 재건한 중부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의 무훈을 거듭 치하하며
1944년 1월, 갑작스레 늑대굴로 호출되어 북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모델은 긴급히 방어선을 재편성했고, 특히 방패와 검(Schild und Schwert) 작전을 입안하여 총통의 승인을 받는다.
특이한 것은 그동안 히틀러 앞에서 후퇴라는 단어를 꺼내면 모조리 해임당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모델은 작전안에 후퇴를 가능한 우회적으로 표현하며 물러서서 전력을 추스르다가 적의 허점을 보이면 그대로 공세로 전환하여 재점거한다는 적극적인 전법임을 강조하여 히틀러의 승인을 받아낼 수 있었으며 덕분에 독일 북부집단군은 소련군에 5배가 넘는 피해를 안기며 무사히 퇴각, 판터 라인(모델의 북부집단군 사령관 부임 첫 번째 명령은 16군 예하 사단의 공병 부대들을 차출하여 판터 라인을 제대로 된 방어 진지로 구축하는 것이었으며 이번에도 OKH의 쿠르트 차이츨러 참모총장과 히틀러에게 들키지 않고 진행해야 했다)에 도착하여 레닌그라드 전선을 안정시킬 수 있었고 1944년 3월 이 공적으로 모델은 원수로 진급하였다.
1944년 3월 말, 남부집단군 사령관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전략적 후퇴를 받아들이지 않는 히틀러에 의해 파면되고 후임자로서 모델이 임명되며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으로 명칭을 바꾸게 된다. 1944년 6월 22일 소련의 하계 대공세인 바그라티온 작전이 개시되었고, 이 공세는 독일군의 예상과는 달리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이 아니라 중부집단군을 겨눈 것이었다.
6월 28일, 모델은 중부집단군 사령관까지 겸임하며 실질적으로 혼자서 동부전선을 책임지다시피 했다. 당시 동부전선의 독일군은 부대의 전체 인원이 1명뿐인 경우나 장비와 보급품은 서류상에만 존재하는, 전선이 사라지고 거대한 구멍(More Hole Than Front)이 생겨난 지옥 같은 상황에서 쉴새없이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모델은 그렇게 무너지던 동부전선의 독일군을 체계적인 군대로 재편성, 어떻게든 전열을 유지한 채 퇴각하며 엷은 방어선을 거듭 만들어냈다. 특히 소련군의 진격 한계점을 포착하여 1944년 8월 1일, 바르샤바 근교에서 특유의 파쇄공격으로 알렉세이 라드지프스키(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Радзиевский)의 제2근위전차군을 궤멸시키고 소련군을 50km나 후퇴시키며 다시금 견고한 전선을 새롭게 형성할 수 있었다. 이 공적으로 모델은 제3제국 최고의 훈장인 다이아몬드 곡엽검 기사 철십자장을 받으며 동부 전선의 수호자(Retter der Ostfront)라는 별명까지 갖게 된다.
바그라티온 작전의 성공 당시 소련군 수뇌부는 1944년 안에 베를린을 점령할 수 있을 거라 판단하였고 영미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인해 공군 지원이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소련군 대 독일군의 전력비가 5:1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에리히 폰 만슈타인,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등 유능한 장성들이 한꺼번에 해임되고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으로 인해 독일 군부의 근간마저 위태로웠던 상황에서 홀로 동부전선의 독일군을 지켜낸 발터 모델의 수완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하인츠 구데리안은 회고록에서 '이토록 어려운 동부전선 중앙의 상황에서 모델 원수는 전선 재건의 임무를 맡을 수 있는 최상의 인물이었으며 오직 자신의 용맹함으로 이를 해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모델이 재건한 방어선은 그의 서부전선 전임 이후 육군참모총장인 구데리안이 동부전선 방어 전략의 요충지로서 활용하게 된다.
후대의 전사학자들도 동부전선을 재구축한 발터 모델에 대하여 '기적을 일으키는 자(Miracle Worker)'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리델 하트는 '전역에서 예비 부대를 만들어 내어 전선을 재건하는 경이로운 재능'이라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