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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 이야기

튀니지 전투(1943년)

작성자管韻|작성시간19.03.11|조회수145 목록 댓글 0


튀니지 전투(1943)

 

 

 

 

 


 

 

 

북아프리카 전역에서의 연합군과 추축군 사이의 전투. 장소는 튀니지.

전체적으로 보급 문제로 양쪽 모두 고전했으며 사막이라는 배경 때문에 일반적인 전투와는 상황이 달랐다.

 

23만여 명의 추축국 병사가 포로로 잡힌 독일 패망의 원인 중 하나. 쿠르스크 전투나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비슷하게 명장들의 공백이 얼마나 큰지 보여준 전투이며 대전의 전환점이 되는 전투.

 

영화 발키리의 초반부 부분이 튀니지 전투이다.

 

 

2. 이탈리아의 진격

 

 

이탈리아 왕국의 지도자였던 무솔리니는 당시 동맹국이였던 독일과 군사 수준이 같다고 믿고 있었다. 근대화를 하려고 노력했지만 애초에 빈약한 경제 때문에 성장은 커녕 오히려 약해지는 부분도 있었고 보병과 해병을 제외하면 연합군의 나라들과 비교도 안될정도로 빈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무솔리니는 자신의 확신과 독일은 지원을 믿고 연합군의 식민지가 있는 북아프리카로 군대를 보내게 된다.

 

 

3. 독일의 지원

 

 

이탈리아의 믿음에 따라 독일은 지원을 하기로 결심하고 90경사단과 제15기갑사단 등의 병력을 파견한다. 롬멜이 처음 히틀러에게 요구했던 병력은 4개의 기갑사단이였다. 하지만 제대로 편성되지 못한 2개 사단만이 주어졌다.

 

추가예정

 

 

4. 미국의 개입

 

 

초반부 물자만 지원하던 모습과 달리 중반부에 들어서자 미국은 전차부대와 보병들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특히 신형 전차인 M4 셔먼은 연합군의 전차병력을 크게 증강시켰다. 그러나 시디 부지드 카세린 협곡 전투에서 독일군의 봄바람 작전이 개시되자 미군은 180여대에 달하는 전차 손실과 함께 1만명 가까이 되는 사상자를 낳았다. 일단은 연합군을 상대로 한 전술적 승리로 추축국들은 한숨 돌리는듯 했다. 하지만 미군은 막강한 공군력과 포병지원으로 탈라(Thala)에서 반격을 개시하였고 결과적으로 다시 시디부지드 지역을 탈환 하는데 성공한다. 여담으로 롬멜은 후일 노획했던 미군의 장비를 보고 극찬하였고, 더욱이 미군이 상당히 빠른시간만에 현대적 기동전에 대한 이해 및 적용 한 것에 대해 위기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는 물론 패튼 장군의 업적.

 

 

5. 롬멜의 철수 후의 북아프리카 전선

 

 

5.1. 사막의 여우의 부재

 

 

독일의 아프리카 집단군과 이탈리아의 군대를 모아 마지막 공격인 카프리 공세가 실패로 끝나게 되면서 아프리카 집단군을 이끌던 롬멜은 더 이상 아프리카 전선에 가망이 없는 걸 깨닫고 우크라이나에 있던 히틀러에게 가 철수를 설득하려고 한다. 하지만 '승리 아니면 자살' 이라는 구호를 강요하던 히틀러에게는 이런 일은 허락 될 수 없었고 롬멜을 강제로 병가처리하고 아르님에게 아프리카 집단군의 지휘권이 넘어가게된다.

 

5.2. 추축군의 상황

 

 

10척의 유조선 가운데 1척만 남은 상황에서 전차를 기동할 연료마저 부족했고 전차마저 부족했다. 수적으로도 연합군이 배로 많은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동맹국인 이탈리아마저 불안한 상황이었고 연이은 패배로 사기마저 떨어진 상태였다. 거기에다 롬멜이 없었다.

 

아직도 독일군 5개 사단과 이탈리아 9개 사단이 남아있긴 했지만 물자가 부족했고 결정적으로 영국군과 미국군을 막아낼 충분한 병력이 되지 못했다. 영국 군함들은 계속해서 보급함들을 침몰시켰고 수송기 또한 계속해서 격추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레트 방어선이 전술적으로 뛰어났고 연합군에 비해 추축군은 서로 연락이 잘 통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버텨내고 있었다.

 

게다가 횃불 작전으로 비시 프랑스가 영미 연합군에게 서아프리카를 탈탈 털려버리고 비시 프랑스가 정신 없는 틈을 틈타 독일-이탈리아는 비시 프랑스령 튀니지 총독인 장-피에르 에스테 바에게 협력을 강요해 튀니지는 이탈리아가 사실상 점령하게 된다. 이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추축국 내부에서도 갈등이 많았다.

 

5.3. 전개

 

 

몽고메리의 마레트 방어선을 돌파하려는 작전은 제15 기갑사단의 반격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10군단이 롬멜이 우려했던대로 측면으로 우회해 방어선을 돌파하면서 방어선은 붕괴되기 시작한다. 결국 추축군은 북서쪽으로 60km를 후퇴하고 가베스 부근의 와디 아카리트에 새 방어선을 만들게 된다.

2군단도 협곡을 통해 추축군 방어선 후방으로 이동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미군이 이기는 상황이었지만 지형때문에 미군은 독일군을 추적하는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영군 8군과 미국 2군단의 계속된 공격으로 방어선은 다시 붕괴되고 추축군들은 다시 복쪽으로 후퇴하게 된다.

독일의 후퇴 이후 영국군과 미군의 전선이 연결되면서 다시 소모전의 양상을 띄게 된다.

 

연합군 공군은 추축군의 공수작전을 차단하는데 집중했고 영국 군함들 역시 보급선과 탈출로 차단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때부터 아프리카 집단군의 패배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2군단과 영국 1군과 8군이 포위해오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군은 이들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남쪽부터 시작된 연합군의 공세에 독일군은 다른 방어선의 대전차포와 예비 전차 전력을 돌려 막아낸다. 하지만 이로 인해 중앙의 전차병력에 구멍이 생겼고 이 때문에 미 2군단과 5군단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방어거점 대부분을 점렴당하게 된다.

 

하지만 다음 공세인 엔피다빌 방면의 연합군의 공격은 추축군의 강력한 방어선과 험난한 지형 때문에 당시의 병력으로는 성공이 불가능했다. 알렉산더는 몽고메리에게 수비임무를 밑기고는 병력을 증강해 주변으로 집결시킨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군은 연합군의 병력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55일 연합군의 모든 준비는 끝난 상황이었다. 결국 대대적인 포격 지원을 받은 연합군의 보병은 추축군 방어선을 돌파했고 6, 7기갑사단이 밀고 들어가게 된다.

 

57, 영국전차가 튀니스로 입성하게 되고 북쪽의 비제르테는 2군단에 의해 함락되었다. 결국 6일 후 230,000명의 추축군이 연합군에 투항하면서 북아프리카의 추축군 세력은 개발살나버리면서 추축군의 치명적인 패배로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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