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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 이야기

태평양 전쟁(The Pacific War)

작성자管韻|작성시간19.03.22|조회수408 목록 댓글 0


태평양 전쟁(The Pacific War)

 

 

 

 


 

 

 

태평양 전쟁의 결과

 

2차 세계 대전 중인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태평양 일대와 동남아시아 지역을 무대로 일본 제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벌어진 중앙 태평양 전선과 국민혁명군이 주도한 중국 전선 및 영국군이 주도한 버마 전선, 오스트레일리아군이 주공을 맡은 남서태평양 전역을 포함한다. (일본 극우들은 이 전쟁을 대동아전쟁이라고 주장한다. 최근에는 중국, 동남아시아 내륙 전선까지 포함되어 있는데 태평양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 하여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태평양 전선 개전은 1941127일 일본 제국 해군이 하와이 진주만에 위치한 미 해군 태평양함대 기지를 기습 공격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 일대를 석권하고 인도, 호주까지 위협하였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의 패배를 기점으로 점차 하락세를 타며 필리핀 해 해전에서 그나마 복구한 전력이 전멸당하고 점령지 대부분을 상실하고 본토 앞까지 내몰리게 된다. 항복을 거부하고 비상식적인 행동을 거듭한 결과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직후 1945815일 항복을 선언한다.

 

태평양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육상전이 주로 일어난 다른 전선과 달리 이 지역의 전투는 해전과 상륙전이 대부분이였으며 전후 미 육군, 미 공군, 미 해군, 미 해병대는 세계 최강으로 거듭난다. 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배경으로 한 전선인 만큼 유럽의 전장에 비해 해전의 비중이 컸으며 일본 제국 해군 주도하에 시작된 거함거포주의의 몰락과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하는 기동전과 나아가 상륙전, 대규모 합동작전의 경험은 변화를 준다.

 

1.1. 대동아 전쟁

 

 

전후 GHQ (General Head Quarter)'신도 지령'을 통해 당시 일본이 사용한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을 금지하였다. 미군정 당시 일본 매체들은 GHQ의 엄격한 검열로 대부분 이전 전쟁이라던가 제2차 세계대전 등의 표현을 사용했지만 GHQ가 물러나고 해당 지령이 폐지됨에 따라 일본 내에서는 대동아전쟁이라는 명칭을 옹호하는 입장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일본이 싸운 것은 아시아의 안정을 위한 것이었다!'라는 흔해빠진 주장부터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이 전쟁을 긍정하고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본 정부가 오래전에 공식적으로 사용한 단어일 뿐이며 해당 전쟁의 역사적 성격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이다.'라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다만 여기에서도 '일본이 동남아와 인도의 독립 운동에 적극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대동아 공영권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이라는 의미도 있다.'라는 주장을 덧붙였다.(솔직히 일본이 대동아 전쟁이라는 표현을 주장하는 건 소위 말하는 대동아 공영권과 연관된 것이다.) 이 외에도 대동아전쟁이라는 명칭이 사상적인 의미가 아닌 단순히 전쟁이 일어난 지역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GHQ가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을 폐지한 것은 단순히 위처럼 사상적인 의미로 오해했기 때문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입장인 이들중 일부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현 일본 정부는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타내는 법령적 근거가 없다라는 다소 애매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동아 전쟁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지는 않는 상황이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일본 식민통치를 기억하는 80대 이상의 사람들은 대동아 전쟁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한 경우가 많은 듯하다. 당시에는 많이 선전해댔을테니 당연한 일이다. 군함행진곡 같은 유명 군가를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사람들도 있다. 현재 한자 문화권이든 어디든 대동아 전쟁이라는 표현을 쓰고있는 국가는 일본 뿐이며 당연하게도 한국과 중국은 대동아 전쟁이라는 표현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일본의 전쟁 목적을 미화하는 것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일본 제국 측의 무기생산량이 미국과 조금이라도 비교라도 해볼 여지가 있는 것은 전투기로 미국 생산량의 76.36%에 달한다. (잠수함은 82.27%) 물론 이는 폭격기와 수송기 등으로 항공기 생산능력을 배분한 미군과 사실상 전투기 하나에 올인한 일본군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미국의 76% 수준밖에 안된다. 미군 전투기는 P-51 머스탱, F4U 콜세어, F6F 헬캣, P-38 라이트닝 같은 전투기이었고 일본군은 초기부터 개량해서 운용한 제로센이다. 제로센은 초반에는 우세였지만 중반부터 더 좋은 성능의 미군 전술기들이 등장하면서 종이비행기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한 것으로도 모자라 자살 돌격 전수로 숫적인 우세마저 잃었다. 게다가 파일럿의 생존성을 조금이라도 더 높여야하는 상황에 베테랑 조종사, 숙련된 조종사들이 소모되었다. 여기에 형편없는 공업력과 인력 부족으로 인해 보수, 수리뿐 아니라 전술기 양산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할 수준이었다. 물론 종전까지 제로센만 운용한 것은 아니라 시덴카이와 같은 신예기가 훌륭한 전과를 세우기도 했다. 다만 안습한 생산량 때문에 대규모로 편성하지도 못했고 대량으로 생산했어도 숙련된 조종사들이 부족해서 힘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일본 제국이 올인을 하는 분야에서조차 양적 생산량에서 미국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으며 그 질적 차이는 더더욱 컸다. 전투기의 질적 차이는 그나마 약과고 미국이 9만대 가까이 생산한 전차 및 자주포 상당수는 M4 셔먼이지만 겨우 2,500대 생산한 일본의 전차라는 물건은 치하가 대부분이었다. 참고로 미국이 1944년부터 양산한 M26 퍼싱 전차는 44-45년간 생산량이 약 2,800대로 대전기 일본이 생산한 모든 전차 & 자주포 총량보다 많았다.

 

이러한 생산량의 격차는 전쟁 후반기로 갈수록 더욱 커졌다. 일본의 무책임한 징병정책으로 숙련기술공이 대부분 징집되면서 일본의 생산능력은 떨어져만 갔고 미국의 무제한 잠수함전으로 남방에서 들어오는 원자재도 충분치 못했으며 그나마 1944년 이후로 끊겼다. 1945년부터는 일본 본토 공습으로 그냥 공장들이 초토화되었다. 반면 미국은 본토가 안전하여 전시산업시설이 충분히 가동될 수 있었고 숙련공도 넉넉했고 이들을 징병하는 뻘짓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미국이 일본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유례없는 양면전쟁을 진행 중이었기에 위의 물자가 모두 태평양에 집중되진 않았다는 것, 그리고 생산물자 상당수를 영국, 프랑스, 소련 등 동맹국에게 랜드리스로 퍼줬다는 것은 분명 감안해야 한다. 실제 전차 및 자주포 생산량의 대부분은 유럽전선과 그 동맹국에게 집중되었고 태평양에 할당된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는 트럭이나 야포같은 지상장비 전반에 공통되는 문제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의 주전장은 바다였고, 해군 전력의 90%는 태평양에 투입된 게 맞다. 10%도 절대다수가 U-Boat로부터 대서양 항로를 지키기 위한 구축함이고 주력함들은 레인저 정도를 제외하면 잠깐 얼굴을 비춘게 전부다.

 

그리고 이 장비들을 생산하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석유, 석탄, 철강과 같은 연료 및 원자재의 생산량, 수송 능력의 격차는 매우 크다. 이들 원자재 대부분을 식민지와 남방 점령지에서 조달하던 일본 제국은 해상교통로가 차단되자마자 바로 산업능력 격감과 전투력 유지 불능에 직면했다. 본토 방위를 위한 전투기들이 소나무에서 긁어낸 송근유로 출격을 하는 형편이었고 팔렘방과 브루나이, 쿠칭의 유전은 본토에 원유를 보내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미국은 전쟁 후반에 브루나이, 쿠칭 유전 지대에 상륙한다.

 

그 밖에도 당시 일본 제국은 세계 최대의 텅스텐 산출국(식민지 조선의 상동광산)이었으나 텅스텐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는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설사 자원이 넉넉했더라도 제대로 사용했을 지는 의문이다. 텅스텐은 포탄용으로 사용되는 자원인데 일본 제국은 텅스텐 가공기술이 부족해서 조선의 텅스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같은 시기) 동맹국 나치 독일은 고철더미를 뒤져가며 텅스텐 재활용을 하고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두 중립국에게서 수입을 해오긴 했는데 동부전선에서 소모하는 포탄의 양이 워낙 대규모다 보니 수입물량으로는 도저히 요구량을 맞출 수 없었다.

 

미국은 자원의 부족을 우수한 산업능력으로 해결했다. 개전 초 동남아시아가 일본에게 넘어가면서 미국도 여러가지 천연자원들 특히 천연고무의 부족에 시달렸다. 이는 바퀴달린 모든 것들의 생산에 지장을 초래했기에 개전 초에는 미국도 전 민간에서 안쓰는 폐타이어 등을 회수하거나 하는 식으로 고무를 충당했는데 나중에는 합성고무를 만들어서 천연고무를 완전히 대체시켜 버렸다. 나머지 자원인 석유, 석탄, 철 등이야 미국뿐만 아니라 가장 가까운 동맹국 캐나다에서도 쏟아지는 것들이었다. 이런 전략자원 레벨은 아니지만 DDT 역시 동남아시아에서 수출하는 살충제 원료인 제충국을 입수하지 못하게 되자 미국이 산업능력으로 생산한 화학 살충제였다.

 

4.1. 일본군의 한계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일본군의 온갖 병크와 삽질들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헛웃음과 한국 광복에 기여했음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만든다. 대표적인 예로 일본 해군과 일본 육군은 서로 다른 국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기본적인 협력조차 안 되었다. 참고로 독일도 비슷했던지 히틀러의 수기에도 나온다. 독일도 국방군(Wehrmacht)SS 간의 갈등도 엄청나게 심각했고 공군 야전사단 같은 편제가 존재하는 등 엉망이었으며 미군도 육군과 해군의 경쟁과 자존심 싸움이 치열했지만, 그 정도(?)는 애교에 가까울 정도로 일본 육군성과 해군성의 반목/대립은 상상을 뛰어 넘는 수준이었다. 서로 교전까지 벌이려 한 적도 있을 정도로. 뿐만 아니라, 해군 조직 중 하나에 불과하던 연합함대조차 해군 본대와는 따로 놀았을 정도니... 단적인 예로, 일본 육군은 미드웨이 해전, 필리핀해 해전(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의 그 중대한 결과조차 뒤늦게 해군으로부터 통보받거나, 심지어 스스로() 알아내야 했을 정도. 나중엔 육군이 자체적인 항공모함과 잠수함을 운용하는 비범함도 보여주었다. 이런 것은 영상매체에도 반영돼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도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이 나중에야 연합함대의 전멸을 소문()으로 듣고 허탈해하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일본의 대본영은 미국과의 큰 국력 차이를 정신론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전투에서 져도 진 것은 아니며, 근성으로 버티면 언젠가는 나약한 귀축영미가 지쳐 나가떨어지리라는 믿음이었다. 물론 일본군은 통상적인 방식으로는 미군에게 대타격을 줄 수 있는 자원도, 기술력도 없었으므로 병사 개개인에게 자폭과 희생을 강요했고, 전쟁 중 일본이 보인 반자이 어택, 인명경시의 극치인 카미카제 전술, 유인어뢰 가이텐, 유인유도미사일 MXY-7 오카, 무식한 전쟁수행, 집단자살, 인육 섭취의 막장행태는 말도 안 되는 정신론의 말로로 설명이 가능하다.

 

게다가 일본 군부와 정치계는 전쟁터에서 무의미하게 물자와 병력을 반자이 어택으로 낭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개념도 없었다. 미국을 상대로 아껴서 싸워도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운 마당인데 말이다. 이놈들은 그저 반자이만 외치면 그만이라는 마인드로 전쟁에 임했다. 당장 중일전쟁에서 5년째 들이붓고 있는 주제에 미국과의 전쟁을 선택하면서 양면전선을 만드는 패기를 보이더니 이후 식민지를 두고 있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호주에 싸움을 걸어서 싸울 상대를 하염없이 늘렸다. 무다구치 렌야가 활약한 전선도 영국과의 전선이었다. 사방에 적을 두고 전쟁하는 것도 문제인데 여기에 더해서 미국 상대로 뒤통수를 치고 자기들이 유리한 국면을 취할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니 종국에는 개전초기 유리한 점조차도 알아서 까먹고 항복한게 어찌보면 당연하다.

 

사실 일본군이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태평양에서 주도권을 잡으면서 미국 상대로 유리하게 전장을 끌고 갈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 당장 진주만의 피해도 과소평가되는 감이 있긴 해도 심각했던 것은 사실이었고 43~44년 이전에는 미국도 결정적으로 전시경제체제가 돌아서 쇼미더머니를 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드웨이 해전 이전 개전 초기에는 미 해군도 상당히 전력이 핍진하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거하게 선빵을 얻어맞은 탓에 함대 전력이 일본군에 비해 결코 나은 상황이 아니었다. 당장의 전력차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고, 전장의 주도권은 일본이 쥐고 있었으므로 일본이 알아서 나서주지 않는 이상 니미츠가 일본의 항모기동부대를 잡을 기회는 없었다. 당장 종이 비행기 취급받는 제로센도 이 당시까진 그렇게 나쁜 비행기가 아니었다. '내가 맛깔나게 싸대기를 때리면 미국이 협상하겠지?'라는 일본의 방침은 오늘날에는 그저 비웃음거리 정도로 여겨지지만 당시 그 개념 자체는 '미국이 정신차리고 여러 지역을 점령하고 병력을 증강시키기 전에 한번의 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줌으로써 태평양 전선에서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전략적 이점을 우리가 선점하면 미국 역시 협상에 나설수 밖에 없을 것이다' , 꽤나 합리적인 수준의 대전략이었다. 당장 하와이가 먹히고 미 서부 해안까지 위협받았다면 미국 입장에서도 갑갑한 일이었을 것이다.

 

 

5. 인명 피해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이 입은 인명피해(사망자)는 총 42만여 명이다. 이중 유럽전선에서의 피해가 30만 명에 육박하고 태평양 전선에서의 죽은 미군은 12만 여명이다. 전투행위에 의한 직접 전사자의 경우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106,207명의 병력손실을 입었고 포로로 잡힌 병력 중 일본군의 전쟁범죄 및 기아, 질병, 아군 폭격 등을 합해 12,935명이 추가로 죽었다. 일본으로선 참담하게도, 미국이 이 전쟁에서 잃은 총병력피해는 일본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잃은 병력과 비슷하다.

 

전투 환경 자체는 유럽에 비해 훨씬 열악했음에도, 중국 전선을 제외한 태평양 전쟁 미군 전사자 15만여 명을 포함한 연합군 사상자는 유럽 서부전선 미군 전사자 28만여 명을 포함한 연합군 사상자에 비해 3분의 1 수준으로 적은 편이었다. 이는 유럽에 비해 태평양 전쟁이 주로 섬들을 빼앗는 국지전으로 진행된 것도 있고 미군이 징검다리 작전으로 일본군의 방어 거점을 우회하며 공격했기 때문이다. 미군이 승기를 잡은 1943년 이후 내내 태평양 전쟁은 제해권을 장악한 미군이 고립된 섬에서 방어로 일관하는 일본군을 소탕하는 모습으로 전개되었고, 유럽 전선의 개활지에서처럼 대규모 회전은 볼 수 없었다. 물론 그 때문에 일본군도 해군 함대를 제외한 전투병력 중 사상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본격적으로 일본군, 특히 지상군이 큰 피해를 입기 시작한 건 필리핀 탈환전과 오키나와 전투 등 전쟁 말기의 일. 그래서 태평양 전쟁 말기를 묘사한 지도를 보면, 분명히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임에도 겉보기에는 인도차이나 반도, 말레이, 인도네시아, 중국 등에서 여전히 점령지가 상당히 넓어 보이게 묘사한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이 지역을 일본군이 실질적으로 점령, 경영하는 능력이 있었는지는 둘째치고, 이 시점에서 일본군 점령지의 넓이 따위는 전략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일본의 경우 1937년 중일전쟁 개전 이후 1942년까지 누적 사상자가 3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이때까지의 피해 대부분은 중일전쟁의 수렁 속에서 입은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본격적으로 쇼미더머니를 치고 반격에 나선 1942년 중반 이후부터 종전까지 입은 피해는 전사 및 실종자. 포로 사망자만 도합 150만여 명에 달했다. 그 전까지는 총력전 체제하에서 어떻게든 감내할만한 피해였다면, 본격적으로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그냥 병력이 투입하는 족족 녹아났다는 소리. 거기다 본토가 안전했던 미국과 달리 일본의 본토는 19453월 이후 커티스 르메이가 지휘한 폭격으로 후방의 민간인들까지 엄청나게 죽어갔다.

 

이는 안그래도 동원능력에서 차이나는 양국 상황을 감안하면 더더욱 크게 작용했다. 일본은 식민지 조선과 대만을 합쳐 1억 운운했지만 실질적으로 동원 가능한 본국의 인구는 7,000만 명. 반대로 미국의 경우 본국의 인구가 13,000만 명으로 거의 배에 가까운 차이가 났고 질적으로도 그 차이가 엄청났다. 일본이 병력 동원 측면에서 반란의 우려때문에 조선과 대만 출신 병사를 매우 꺼리며 받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며 태평양전쟁의 전역이 점점 넓어져가던 1943년까지도 식민지 조선과 대만출신의 일본군 입대 자원자 중에 실제로 선발된 인원의 비율은 채 5%가 되지 않았으며, 그나마 선발한 식민지출신 병사들도 전투병과에는 철저히 배제시키고 비전투병과 위주로 배속시켰다. 내선일체, 일선동조론 운운하면서 창씨개명을 시키는 식으로 적극적인 동화정책까지 펴놓고도 반란을 우려해서 입대를 불허하는 모순의 극치였던 것이다. 물론 대전말기가 되어 일본 본토에 대한 위협이 턱밑까지 다가오고 나서는 부랴부랴 식민지에도 강제 징집을 서두르고 동화정책도 강행하게 되지만 이미 완전히 기울어진 전황을 극복할 수는 없었다.

 

전쟁에서 가장 큰 인명피해를 입은 나라는 역시 중국. 중국은 1937년 개전 이래 무려 8년동안 일본과 혈전을 펼쳤고, 그 와중에 일본의 전쟁범죄와 무차별폭격 등으로 최소 1,200만 명에서 최대 2,200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중 군인 사망자는 375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 동남아시아에서도 일본의 가혹한 징발정책에 의한 기아와 질병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3~4백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1~2백만, 필리핀에서 50~100, 영국령 버마에서 25, 포르투갈령 티모르에서 5~7, 영국령 인도에서 150~250만이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영국령 싱가포르에서도 학살 및 기아로 5만 명이 죽었다.

 

유럽 전쟁의 참혹함에 묻히는 경향이 있지만 태평양 전쟁의 참혹함과 인명피해는 유럽의 전쟁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피해 대부분이 유럽 강대국이 아닌 중국이나 동남아 식민지에서 발생한 것, 홀로코스트처럼 체계적인 약탈과 학살을 저지른 게 아니라 전국시대나 임진왜란 처럼 전근대의 전쟁처럼 점령지에서 약탈/살해/강간하고 잊어버리는 식으로 일본 자신조차 전쟁 범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경우가 많은 점. 그리고 태평양 전쟁 종전 이후 국공내전과 한국전쟁 및 베트남 전쟁 등 동아시아에 새로운 전쟁이 계속 터지면서 정확한 피해집계나 통계가 이뤄지지 않은 점 등이 태평양 전쟁의 참혹함을 무디게 만들었다.

 

반면에 태평양이 차라리 양호한 모습도 있는데 그건 포로 사망률. 소련군 포로는 30~57.5%이상이 사망했고 미군 포로는 27%가 사망했다. , 중국군 포로가 들어가면 최대 40%까지 올라가므로 나치가 죽인 포로보다 많아질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일본군에게 다소 묻힌 감은 있으나 나치 독일도 위안소 설치와 강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확인된 건수만 1942년 한해의 수치만 1,000만에 달한다고 한다.

 

 

5.1. 태평양 전쟁의 참혹함

 

 

태평양 전쟁은 잔혹함으로는 독소전쟁과 동급인데 독소전과 비슷하게 추축국인 일본이 각종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치치지마 식인 사건같은 식인 사건인데 이는 극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한 일이 아니라 사기를 고양한다는 명목으로 한 거라 다른 식인과 비교할 수 없다. 치치지마 사건의 내막은 술자리에서 안주가 떨어지자 특별한 술안주라며 살아있는 사람을 죽여서 인육을 먹은 것이다. 치치지마 이외에는 '재미로' 식인을 한 사례는 없기는 하다. 그러나 저 사건을 일으킨 다치바나 요시오의 행태는 동시기 일본군조차 경악할 수준이었다.

 

또한 자국 민간인까지 거짓 선전으로 집단자살하게 만들고, 정신대/강제노동에 끌려가 인간성을 유린당한 조선인 등 식민지 주민들, 식량이 떨어진 일본군에게 잡아먹히는 등() 살해당하고 착취당한 원주민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당장 일본군과 원주민이 우호적으로 지냈던 섬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남태평양 군도에서 나이 지긋한 원주민들은 JAPJ자만 나와도 이를 부득부득 갈며 욕을 하기 바쁘다. 오죽하면 식민지배하던 백인들이 압도적으로 낫다며 백인, 미국, 영국, 호주 같은 군대를 솔선수범으로 도왔다. 예를 들어서 과달카날에서 해안 감시원을 하다 일본군 이치키 부대에 잡혀서 고문 당하고 목을 총검으로 찔린 뒤에도 놀라운 투혼으로 탈출에 성공해서 미군에 일본군의 공격을 알리고 은성 무공훈장을 비롯해 영국 기사작위까지 받은 자콥 C. 보우자(Jacob Charles Vouza)라는 원주민도 있을 정도다. 일본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면 기미가요를 잘 부르는 원주민 노인들이 나온 바 있는데 못 부르면 죽여서 살기 위해서 불렀다고 했다. 일본의 피해자 행세에 대해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어처구니없어 하는 가장 큰 이유.

 

게다가 일본군의 민간인 학살 피해자 중에는, 당시 일본의 우방국 시민도 있었다. 1945년 필리핀 탈환전 당시 마닐라의 일본군은 마닐라 주재 스페인 영사관에 쳐들어가서 민간인 50여명을 학살하고 건물에 방화했다. 당시 프랑코 정권 하의 스페인은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 측을 지원한 독일, 이탈리아 등 추축국과 매우 사이가 좋았고, 당연히 같은 추축국인 일본과도 관계가 좋았다. 그러나 이 사건 때문에 19454월 스페인은 일본과 단교해버렸다. 이에 앞서 19443월에는 카비앵 항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인과 독일인 목사들을 학살했다. 당시 일본과 독일의 관계가 얼마나 긴밀한 관계였는지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는 일.

 

그런데도 불구하고 반성하기는 고사하고 당시의 일본의 위세에 취한 인물들은 이 전쟁을 '대동아 전쟁', '백인 압제-착취로부터 아시아 해방을 위해 일본이 총대를 맨 성전'이라 부르며 온갖 미화를 일삼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다. 한 대 남은 가이텐은 야스쿠니 신사에 전시 중. 그리고, 이 때의 전범들을 일본에서는 영령이나 신으로 모시고 있다는 웃기지도 않을 사실 역시 문제다. 이런 신사나 사묘 같은 시설들은 일본 열도 내 각지에 퍼져 있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 참배를 하면서도 참배를 받는 대상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곳도 많다는 게 더 문제이며 한 독일인 기자가 참배를 한다는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하자 참배를 하던 일본인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그 독일인 기자에게 욕을 했다.

 

전쟁 중반 이후 보급선이 씨가 마르다시피한 일본군은, 그저 미군이 손실을 줄이기 위해 지나친 섬에 남겨진, 본국으로부터의 보급이 끊긴 일본군들은 실제로 둔전()과 사냥, 낚시가 중요한 일과였다. 그나마 라바울(Rabaul)처럼 안정적인 식량을 확보한 곳도 있긴 있었다. 개구리 뜀뛰기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곳이 이 곳이다. 일본의 최정예 비행대였던 '타이난 항공대'도 이곳에 본거지를 오래 두었으며, 최대 20만 명 이상의 육/해군 정예 병력을 배치했을 정도로 일본군의 남태평양 최대 전략거점. 병력이 워낙 많아 우회를 결정했으며, 종전 후 이는 대단히 현명한 선택이었음이 드러났다. 하지만 라바울 같은 사례는 극히 드물며, 부겐빌(Bougainville) 섬처럼 전 병력의 1/3이상이 굶어 죽어버린 곳이 대부분이다.

 

전쟁 후반에는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일본군은 섬을 철저하게 요새화했고,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도 항복을 거부한 채 옥쇄하거나 아예 카미카제 같은 야만스러운 전술까지 구사하면서 끝까지 버티려 했다. 그리고 미군은 이런 일본군을 제압하기 위해 출혈을 각오하고 더 높은 강도의 무력을 행사하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니 병사들이 더욱 심하게 소모될 수 밖에 없었다.

 

 

5.1.1. 미군이 겪은 참상

 

 

미국의 입장에서는 전쟁이 인간성을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고 얼마나 참혹한지를 잘 보여준 전쟁이기도 하다. 개발도 잘 되어 있고 평탄한 지역이 많았고 문화권도 비슷했던 서유럽과 달리 태평양의 섬들은 상상을 뛰어넘는 빡빡한 정글과 험악한 산악 등 '문명'과는 거리가 먼 걸 넘어 아예 천만 광년은 떨어진 곳들이었다. 후일 미군이 전쟁을 치른 지역 중 가장 낙후된 아프가니스탄조차 이 정도가 아니었으니 한마디로 말해서 일반적인 서구문명에서 산 사람이 거주하기 힘든 낙오지에서 전투했다는 이야기다. 유럽 서부전선에서는 독일군을 몰아내고 도시들을 해방시키면 현지 주민들의 호의를 받든 거래를 하든 해서 조촐하게나마 파티를 벌이며 승리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겠지만, 태평양에서는 전투에서 승리한 병사들에게 돌아오는건 미군과 일본군 할 것 없이 진흙과 말라리아, 그리고 만연한 전염병 뿐이었다.

 

그리고 현지 장기거주자나 원주민이 아닌 이상 인간이 견디기 힘든 끔찍한 극한의 기후에서 싸워야 한다는 점이 더 큰 문제였다. 당장 시간당 100mm 정도의 폭우(스콜)는 일상에 가까우며, 어딜 가나 축축한 진흙탕, 그리고 모기, 거머리 등의 독충 뿐. 더 퍼시픽에서는 이런 극한의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권총자살해 버리는 병사가 나오며, 실제로도 유럽에 비해 대단히 높은 비율로 전투피로증 환자가 속출하였다. 게다가 1942, 43년 등 전쟁 초기에는 일본군에 비해 지원 규모상으로 크게 나을 게 없었고 특히 과달카날의 해병대는 외부 화력 지원까지도 일본군 우세였으니, 결국 감투정신으로 싸워야 했다. 그리고 싸움 상대인 일본군, 협력 상대인 원주민은 문화권도 완전히 달랐다. 그나마 일본군이 워낙 막장이라 원주민들이 연합국을 적극적으로 돕긴 했다. 그나마 전쟁 초에는 동남아 일대와 오스트레일리아 북쪽 섬들이 주요 전장이라 영국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의 도움을 받았는데도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게다가 인종주의에 찌들었기는 하지만 일단 영국과 미국 사람은 열등인종으로 분류하지 않았으며(유대계는 당연히 제외) 그래도 비슷한 문화권이니 비슷한 상식이라도 통하는 서부전선 독일군과 달리 일본군은 지도부의 무능에다가 전국시대의 16세기식 전쟁 문화가 자리잡아 하라는 전쟁은 안하고 이상한 짓만 하는 별종이었다. 또 오랜 전쟁으로 사기가 떨어져 있던데다 애시당초 서부 전선에서는 가급적 정상적인 전쟁을 치르려 해서 SS를 제외하면 싸워도 어차피 개죽음에다 적이 항복을 정식으로 권고하면 손을 들고 자비를 청하는 독일군과 달리 일본군은 죽을 때까지 무조건 항복하지 않고 싸우도록 세뇌되어 있어서 대화도 통하지 않았다. 게다가 포로 문서에 보다시피 미군이 서부전선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히면 유대인이 아닌 이상 힘들지언정 최소한 포로로서 대우는 받았겠지만, 일본군에게 잡히면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힌 소련군처럼 뭔 일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당장 정식절차를 밟아 항복한 미군 병사들에게 죽음의 행진을 시켜 엄청난 수의 사망자를 고의로 양산해낸 미친 작자들이 일본군이다. 아니면 아예 술자리에서 안주가 부족하다며 특별한 술안주라는 명목으로 잡아먹은 사례도 있다.

 

게다가 서유럽과 달리 태평양의 섬들은 보급도 어려워 장병들의 생활마저 매우 열악하였다. 휴지 한 통이라도 일일이 배로 실어 날라야 하다 보니 벌어지는 일이다. 과달카날 전투가 양군이 모두 극도로 열악한 보급상황에서 싸워야 했던 대표적인 전장. 유럽이었다면 점령한 도시에서,하다못해 중동이라 해도 곳곳에 소도시와 마을이 있으니 정 안되면 징발이라도 할 수 있다. 대테러 전쟁 당시 아프간/이라크에서 미군도 본격 주둔 이전까지는 보급이 고속 진군하는 부대를 따라가지 못해서 현지인 마을에서 이렇게 징발을 한 적이 여러번 있다. 그러나 아마존 오지나 다름없는 태평양 한가운데 외딴 섬에 그런 곳이 있을 리 만무하고, 그렇다고 원주민을 약탈했다가는 협조를 받을 수 없었기에 결국 모든 걸 스스로 해결했다. 그랬기 때문에 태평양 전구에서 미군이 체험한 보급 난이도는 아주 헬게이트였다. 유럽 전구와는 다르게 장기간 지속적인 보급계획수립이 필수적이었고 보급부대의 규모도 유럽전구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방대하고 컸다. 말 그대로 보급이 곧 생명줄이었다. 보통의 문명사회에서 쉽게 징발가능했을 가장 기초적인 소모품 물자도 여기에 포함되어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조달한 물품들도 있었지만 큰 비중을 차지하진 못했다.

 

이렇게 미군 장병들도 보급품 부족으로 심한 고생을 하고 때때로 진짜 정신력에 의존해야 했는데, 이런 전장이다 보니 장병들에게 '이성'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전투는 언제나 독소전쟁 못지 않게 참혹하게 진행되었고, 고대의 전쟁터에서나 볼 수 있었던 마경이 펼쳐졌다. 미군 중일부 정신나간 병사들은 일본군 시신의 두개골을 따로 떼어내서 차량의 장식품으로 삼기도 하였다. 이는 엄연한 전시 국제법 위반이다. 심지어 이걸 몰래 집까지 갖고 와 창고 따위에 처박아놓기도 했다고. 물론 조직적인 포로학살, 학대 같은 행위를 당연한 듯이 자행하고, 심지어 포로를 잡아먹거나 산 채로 해부하거나 생체실험과 같은 행위까지 저지르고 이걸 미화하거나 은폐하려던 일본군에 비하면 충분히 양반이다. 일본군은 군대 자체가 미쳐돌아가고 일부 개개인이 그나마 정상이었다면 미군은 군대는 정상이고 일부 개개인이 미쳐서 일을 저지르는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참혹함이 워낙 심했기 때문에, 서유럽 전선의 미군을 다루는 매체는 주로 승리의 영광을 다루는 작품들이 주를 이루는 반면 태평양 전선의 미군을 다루는 매체에서는 전쟁의 참혹함과 무의미함을 다루는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더 퍼시픽>, <라이언 일병 구하기><씬 레드 라인>을 비교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6. 관련 인용구

 

 

 

"국제 신의상 어떨지 싶지만 뭐 괜찮겠지."

황국이 총력을 기울여 승리를 결정지을 계기는 바로 오늘날에 있으니, 공들은 기꺼이 백성들보다 앞장서서 분노를 새로이 하여 단결을 굳건히 하고 떨쳐 일어나서 적국의 야욕을 분쇄함으로써 황운을 무궁히 도울지어다.

 

 

쇼와 덴노

 

 

 

 

"1억의 일본인들은 이제 조국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 희생해야 한다. 세계의 평화라는 제국의 목적을 위해 이러한 우국충절을 유지하는 한 우리는 미국도 영국도 두렵지 않다."

도조 히데키, 진주만 공습 후 미국,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 중

 

 

 

"지금은 새벽이다. 3시다. 오전 3시다. 아아! 죽고 싶지 않다. 외롭다. 왜 이리 외로운 걸까."

 

 

- 하야시 타다오, 교토제국대학 재학 중 카미카제 징집

 

 

 

"우리의 근성은 대단하고, 적의 정신력은 나약하므로, 우리는 백전백승이다."

 

 

츠지 마사노부

 

 

 

천황 폐하 만세!

 

 

히로타 고키를 제외한 태평양 전쟁 A급 전범들, 사형당하기 직전

 

 

 

 

"드디어 우리 황국이 백인놈들을 지배하겠구나!"

히라누마 기이치로

 

 

 

 

"우리 황국의 운명은 이 일전에 달려 있다."

나구모 주이치

 

 

 

 

"나구모 제독,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오? 내가 생각하기에는 우리 황국의 운명은 이미 결정난 것 같은데?"

노부히토

 

 

 

 

"만약 미국과 전쟁을 하라고 하신다면 처음 6개월정도는 승산이 있겠습니다만, 전쟁이 2~3년 이상으로 길어진다면 어떻게 될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일본제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그 근거! 그것이 듣고 싶습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기름 때문에 전쟁하는 병신들도 있냐?"

이시와라 간지

 

 

 

"황군은 먹을 것이 없어도 싸워야만 한다. 병기가 없어서, 탄환이 없어서, 먹을 것이 없어서 싸움을 포기한다는 것은 이유가 안 된다. 탄환이 없으면 총검이 있다. 총검이 없으면 맨손이 있다. 맨손이 없으면 발로 차라. 발도 없으면 물어뜯어라. 일본 남아에게 야마토 정신이 있다는 것을 잊었는가? 일본은 신이 지켜 주는 나라다."

 

 

무타구치 렌야

 

 

 

"나라가 초토화되더라도 만주국을 승인한다."

 

 

우치다 고사이 외무대신

 

 

 

 

"이제 일본은 망할 것이다. 너희들은 다다미 위에서 죽지 못한다. 그 각오를 해둬라."

사이온지 긴모치

 

 

 

"폐하는 도조에게 속으셨다. 만주사변 중 폐하는 군부에 반대 의향을 표명하셨다. 전쟁은 덴노도 모르는 사이에 또 덴노의 허가도 없이 시작되었다."

 

 

- 루스 베네딕트(1887 ~ 1948), 저서 국화와 칼 제2장 전쟁 중의 일본인 에서

 

 

 

"형은 쉬운 길을 가십시오. 동생은 어려운 길을 가겠습니다."

 

 

왕징웨이

 

 

 

"우리는 3,000만 한국인 및 정부를 대표하여 중국영국미국네덜란드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및 기타 제국(諸國)의 대일(對日) 선전 포고를 삼가 축하한다. 이것은 일본을 쳐부수고 동아시아를 재창조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다."

 

 

- 19411210,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 선전포고 서문.

 

 

 

 

"어제, 1941127- 이날은 치욕의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미합중국은 일본제국 해군과 공군에 의해 고의적인 기습 공격을 당했습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진주만 공습 직후 의회에서 대일 선전포고문을 발표하며 한 연설, 이른바 치욕의 날 연설 서두

 

 

 

 

"그래, 난 이리 될 줄 알았어!"

어니스트 킹이 부관에게서 진주만 공습 보고를 듣고 한 말

 

 

 

 

"다시 돌아오겠다."

더글러스 맥아더

 

 

 

 

"이 전쟁이 끝나면, 일본어라는 언어는 이제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가 될 것이다."

윌리엄 홀시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초토화된 해군 기지를 보고.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

"쪽바리들을 조지고! 쪽바리들을 조지고! 쪽발이들을 더 죽이는 겁니다!"

윌리엄 홀시가 과달카날 시찰에서 앞으로의 전략을 묻는 기자들에게 한 말.

 

 

 

 

"46년에는 오지에서 벗어나기, 47년에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48년에는 골든 게이트로. "

 

태평양 전쟁 당시 미 해병대의 슬로건

 

 

 

''일본 놈들은 정말 정이 안가는 놈들이야... 정말 나치와 비교될만하군. 스테드포드 중위, 그렇지 않나?"

제이미 스터딜슨 (필리핀 미군정의 소령)

 

 

 

 

"태양에서 나오는 힘이, 이제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옥좌가 있는 땅 일본 전체를 일식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해리 트루먼

 

 

 

 

"나와 함께 있었던 해병대원들은 18~22살이었다. 그렇게 침착한 사람들은 처음 보았다. 나는 깨달았다. 승리가 우리것임을."

 

존 포드. 미드웨이 해전의 영화를 촬영하는 중 미드웨이 섬에서.

 

 

 

"내 진정한 바람이자 모든 인류의 소망은 이 엄숙한 의식을 통해서 과거의 피와 대학살을 벗어나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 더글러스 맥아더, 일본의 항복 조인식 후 미주리호 갑판에서의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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