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 사형 집행관 히믈러(Heinrich Luitpold Himmler, 1900년~1945년)
"세계의 역사에서 아돌프 히틀러 총통께서 위대한 지도자이자 위대한 아리아인이라 기록되신다면 그의 선택된, 충성스러운 기사단인 우리들은 영웅의 신화가 될 것이다."
-1943년 베벨스부르크 성에서 친위대 대원들에게 한 연설
나치 독일의 SS와 게슈타포의 수장인 Reichsführer-SS(제국지도자 SS)이자 유대인 대학살 최고 책임자로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학살을 저질렀던 인물이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폴란드에서 이른바 AB 작전을 벌여 수천에서 수만 명에 이르는 폴란드인을 학살하였으며,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를 탄압하여 수만 명을 학살하였다.
또한 그 악명 높은 학살 부대인 아인자츠그루펜을 조직하고 설립하였으며, 그 아인자츠그루펜 부대를 이용하여 독소전쟁 당시에 학살을 저질렀다. 또한 나치 독일의 첫 강제수용소인 다하우 강제수용소를 연 이후 자신의 측근인 테오도어 아이케에게 수용소장을 맡기는 것을 시작으로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수많은 강제수용소들을 세우고 루돌프 회스를 비롯한 강제수용소장들과 함께 강제수용소에서의 학살을 진두지휘하여 무려 1000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학살시킨 학살자이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자신 주변에 있는 과학자들을 이용하여 그 악명 높은 나치 독일의 생체실험을 세세한 부분까지 명령하고 지휘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생체실험으로 사망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악명 높은 행각으로 인해 가끔은 자신의 상관인 아돌프 히틀러를 누르고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인간으로 꼽히기도 한다. 사실 이게 당연하기도 한 게. 히틀러는 홀로코스트 등의 타인종, 민족에 대한 학살 계획에 대해 그저 필요성을 설파하고 어떻게 처리할 지에 대해 대략적인 이론만을 제시했을 뿐이다. 물론 지시한 건 맞지만 세부적인 집행 방향까지 지시한 건 아니다. 이런 지시 내용을 연구하여 효과적인 학살 방식과 학살 정책을 만들고, 그 뒤 운영한 장본인은 바로 하인리히 힘러다. 어찌보면 나치당 내부에서 히틀러조차도 능가하는 악마라고 할 수 있다.
유년기
학교 교장인 아버지와 평범한 가정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3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바이에른 왕가의 왕족에게 개인교사를 한 인연이 있을 정도로 뮌헨의 높은 어르신이었고 이 연줄로 출생시 비텔스바흐 왕족 중의 한 명이 그의 대부가 되어주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의 취미는 책읽기와 공부였던 착한 아이였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많은 독일 청년들이 그랬듯이 전쟁에 들떠서 자원 입대하려 했었고 병사보다는 장교로 참전하려 했는데 애초에 1순위였던 해군에서는 시력 때문에 거부당하고, 육군에서도 신검 기준에 미달했지만 아버지가 사회경험 해보라고 빽으로 밀어줘서 사관후보생으로 제11바이에른 연대에 입대했으나, 단 한번의 훈련도 못해보고 전쟁이 끝나버려 결국 참전 못했다. 거기서 한거라곤 장교 구두닦기나 장교전용 변소 청소, 세탁물과 감자 깎기, 접시닦기 기타 등등 잡일만 하다가 나왔다.
그러나 명목상으로는 사관후보생으로서 제11바이에른 연대 베테랑 반장이었기 때문에 종전 후 기술학교 입학과 함께 비참한 독일의 현실에 분노하는 참전병들이 모여 결성한 자유군단에 들어가 활동했다. 이 시기 동거녀 살해 혐의를 받아 체포됐는데, 관련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훗날 SS의 수장으로서 독일 경찰권 전반을 손에 넣은 이후 관련 기록을 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재판 결과는 증거 불충분이었다.
나치당에서
대학에서 농경제학을 전공하고 석사로 졸업한 후 1921년부터 부친의 도움을 받아 양계장을 차려 운영했다. 그 대가로 정치활동 중단을 부친에게 요구받았으나, 정작 하인리히 힘러는 부친의 말을 따르는 척하면서 우익 농민단체에 가입,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이후 1923년 과거 자유군단 활동 경력을 배경으로 해서 나치당에 입당, 돌격대 대원이 되었다.
이 시기의 하인리히 힘러는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아, 학력 때문에 임용됐던 나치당 당수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비서 자리에서 모가지를 당할 정도로 나치당 내에서 별 것 아닌 인물이었다. 여기에 나치당 역시 1923년 뮌헨 비어홀 폭동으로 정당 활동이 금지되며 궁지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정치 활동을 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하인리히 힘러는 나치당의 절대적인 존재였던 히틀러가 수감 중일 때 수 차례 서신을 보내 히틀러에게 충성을 다짐했고, 히틀러는 이를 기억하고 하인리히 힘러를 중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시기의 힘러는 운영하던 양계장이 망해 가세가 크게 기운 상태였다. 이후 1927년 돌격대 내의 하부조직으로 히틀러의 경호를 담당하는 목적으로 창설된 친위대의 부사령관으로 임명, 당 내에서 보직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1929년에 친위대 사령관이 되었다. 이 시기 친위대는 대원이 290명밖에 되지 않는 소규모 조직이었다.
그러나 하인리히 힘러는 자신의 슈츠슈타펠의 영향력과 힘을 차츰차츰 키워나갔고 많은 사람들이 슈츠슈타펠에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게슈타포의 악명을 만든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유대인 대학살을 저지르게 되는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아돌프 아이히만, 하인리히 뮐러나, 다카우 강제수용소의 책임자가 되는 테오도어 아이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책임자가 되는 루돌프 회스 등이다. 힘러는 이들을 슈츠슈타펠에 등용하면서 점점 자신의 세력을 불려나가기 시작했다.
한편, 히틀러는 돌격대가 나치당원보다 10배나 많은 회원을 가질 정도로 큰 조직에다가 에른스트 룀을 필두로 한 과격좌파 떨거지들이 모여 너무 많은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게 되자 이의 견제를 원했다. 이에 유사시 돌격대 참모장 에른스트 룀을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히틀러는 SS에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고, 그 대장으로 자신에게 충성을 다짐한 하인리히 힘러를 앉힌 것이다. 결국 1933년에 히틀러가 집권한 후 다음 해, 에른스트 룀과 돌격대는 히틀러가 꾸민 당내 쿠데타 "장검의 밤"으로 숙청되었고, 하인리히 힘러는 돌격대를 대신하여 당과 히틀러의 개인 사병 집단의 수장으로 떠오르며 막강한 권한을 손에 넣었다. 에른스트 룀의 처형 다음날, 하인리히 힘러의 SS 제국지도자 직함은 SS의 계급이 되었고 한 달 후인 7월 30일에 SS는 SA와 분리되어 나치당 내의 독립 조직이 되었다. 1936년 하인리히 힘러는 모든 정복경찰을 새로운 질서경찰로 통합하면서 더 많은 권한을 획득했다. 주요 간부는 하인리히 힘러가 독일 경찰의 수장 직책을 수여받으면서 SS에 차출되었다. 그렇지만 하인리히 힘러는 정복경찰 전체에 대한 운영 통제권을 가질 수는 없었다. 전체 경찰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내무장관 빌헬름 프리크에게 있었고 하인리히 힘러가 가진 실제 권한은 내무장관에게 사전에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1943년이 되어서야 하인리히 힘러는 프리크를 밀어내고 내무장관에 임명되면서 모든 행정권한을 완전히 인수받았다. 독일의 정치경찰에 대한 권력은 1934년에 힘러가 이미 장악했고, 강제수용소 및 게슈타포 운영권도 그해 헤르만 괴링으로부터 인수받았다.
아무튼 나치당의 전위대 역할로 SS의 입지는 날이 갈수록 강해졌고 거기다 독일의 각종 수용소와 비밀경찰, 나아가서는 경찰권까지 장악하게 된 힘러는 이후 벌어지는 나치당의 온갖 악행에 가담하였고 나치 독일의 모든 심각한 전쟁범죄에는 하인리히 힘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하인리히는 자신의 무장친위대 슈츠슈타펠을 독일군 정도의 군사 조직으로 키우려고 했고, 이런 목적 하에 힘러는 헤르만 괴링으로부터 게슈타포 지휘권을 인수받고 독일 전국에 있는 경찰들을 장악한 이후 슈츠슈타펠을 독일군 정도의 군사 조직으로 만드는 것을 시도했다.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자신이 더욱 더 큰 권력을 가지려는 욕심 때문이었다는 것이 이유로 지목된다. 그러나 히틀러는 무장친위대가 국방군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키워줄 생각은 없었다. 히틀러는 돌격대가 무지막지하게 커져서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뻔했고 이를 위해서 장검의 밤으로 숙청한 기억을 갖고 있었고, 국방군과의 갈등을 우려한 히틀러는 슈츠슈타펠이 돌격대 정도의 영향력과 군사조직을 가지지 못하도록 막아버렸다. 그러나 히틀러는 국방군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국방군을 견제한다는 목적으로 독일 국방군과 슈츠슈타펠의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무장친위대가 무장을 하고 전투부대를 편성할 수 있도록 국방군이 양보하도록 했고, 대신에 무장친위대가 사단을 편성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고 병력도 국방군의 10분의 1 정도로 제한한다는 협상을 성공시켰다. 하인리히 힘러는 이러한 히틀러의 협상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으나 별 수 없이 결국 히틀러의 결정을 따라야만 했다. 그래도 무장친위대는 독소전쟁 직전부터는 사단을 편제할 수 있게 되었고 1942년이 지나게 되자 군단을 편성하는 것도 허락될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다.
1933년 3월 22일, 하인리히 힘러는 다카우 근처에 악명 높은 나치 최초의 수용소인 다카우(Dachau) 강제수용소를 설립했는데, 수용소는 나치가 집권하고서 얼마 되지 않아서 세워졌으며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될 정도로 떠들썩했다. 그 당시에는 '자꾸 까불면 다카우로 보내 버린다'라는 말이 통용될 정도였다. 장검의 밤으로 에른스트 룀과 돌격대를 숙청하고 난 이후 SS 백골단(SS Totenkopfverbande)에 독일 지역에서 나치 강제수용소의 관리임무가 배정되었고, 1941년 이후에는 점령지인 폴란드의 절멸 수용소의 관리도 위임받았다. 그리고 하인리히 힘러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이끄는 SD를 이용하여 유대인, 동성애자, 공산주의자, 집시, 사제, 반체제주의자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구금하여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하인리히 힘러는 1933년 3월 22일 다카우에 첫 수용소를 설치한 이후 수많은 수용소들을 세우고 나치가 내세운 이른바 정의라는 이름으로 끌고 가는 것을 시작으로 수백만 명의 대학살을 자행하였으며, 폴란드인들에 대해서도 유사한 정책을 세우고, 도로 표지판을 겨우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제외한 많은 폴란드인들을 수용시설에 가두고 학살하였다. 그렇게 하인리히 힘러는 독일인 우월주의에 깊이 빠졌으며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대량학살하고 그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나치즘에 광신적인 믿음을 가져서 홀로코스트를 자행했고, 이로 인해서 그는 홀로코스트의 조직가 또는 사형집행관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41년에 러시아 침공, 즉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소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하인리히 힘러는 공산주의자 척결기구를 조직했다. 힘러는 나치 독일의 독소전쟁을 중세의 십자군 원정과 비교하는 것을 즐거워하였으며 무장친위대(Waffen-SS)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덴마크인, 스웨덴인, 노르웨이인, 벨기에인, 네덜란드인, 스페인인, 프랑스인 등의 지원자들, 그리고 러시아를 침공한 이후에 자발적으로 참가하는 우크라이나인, 에스토니아인, 리투아니아인, 라트비아인 등의 지원자들도 받아서 독소전쟁에 투입시켰다. 그리고 하인리히 힘러는 이렇게 독소전쟁에 자발적으로 지원하는 이들을 "신을 믿지 않는 볼셰비키 야만인 무리"로부터 오랜 전통적 가치를 가진 유럽을 수호하는 다국적 범십자군이라고 불렀다. 특히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난 후 러시아 등지에서 나치에 가담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옛날에 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소련군 및 소련 경찰 출신 지원자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소련에 대한 적대심으로 인해서 열정적으로 모병을 권유하고 소련과의 전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서방 연합군과 싸우기 위해서 조직된 사람들은 위기가 닥치게 되자 곧바로 항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소련군에 대해서 맞서 싸웠던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걸고서 죽기 아니면 살기식으로 소련군과 끝까지 맞서 싸웠다, 그 이유는 독일군이 벨라루스 초토화작전이나 우크라이나에서의 대학살 등과 같은 전쟁범죄를 자행했기에 소련 사람들이 독일군에게 엄청나게 분노했으며, 소련군이 독일군에게 사로잡혔을 때 위 사진의 소련군 포로들이 전부 굶어 죽은 것처럼 독일군이 소련군에게 무자비했기 때문에, 소련군 또한 보복으로 사로잡힌 독일군 포로들을 죽이거나 무자비하게 학대하고 있어서 독일군은 소련군에게 끈질기게 끝까지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독일이 점령한 소련 영토에서 모집했던 자원자들은 대부분이 보조경찰이었기 때문에 소련군과 맞서 싸우는 기간이 오래될수록 소련군에 포로가 되면 아무런 자비를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방 연합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자원한 사람들의 경우 연합국은 그들에게 별 원한이 없었기 때문에 소련군과 같이 가혹하게 대하지는 않아서 서부 연합군에 맞써 싸우려고 전투에 투입된 병사들은 쉽게 항복해버렸다.
이후 힘러는 그 유명한 반제 회의를 열고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정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42년 하인리히 힘러의 오른팔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프라하에서 영국이 파견한 체코 특공대들에 의해 프라하(Prague)에서 공격을 당해 사망하자 힘러는 즉각적인 보복조치를 단행했다. 그는 그들이 탈출했다고 생각되는 리디체 마을로 제7 SS 산악사단 프린츠 오이겐에서 차출한 분대를 보내 마을 남자 전체를 죽이라고 명령했고 그들은 마을의 모든 남자 주민들을 학살하며 악명을 떨쳤다. 다만 당시에 힘러와 하이드리히의 사이가 좋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힘러가 하이드리히를 치료하라고 파견했던 의사가 그의 충복 카를 게브하르트였기 때문에 그가 하이드리히를 죽게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그를 골라 보낸 것이며, 일부러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서 하이드리히를 의도적으로 죽게 만들었다는 의혹도 있다.
그러던 중 바르샤바에서 이른바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발생하자 하인리히 힘러는 친위대에게 이를 진압하라고 했으나, 첫 시도들이 봉기 진압에 실패하자 힘러는 친위대 소장 위르겐 슈트로프(Jürgen Stroop)를 진압대장에 앉힌 뒤 그에게 진압을 맡겼다. 그리고 힘러는 히틀러의 생일인 1943년 4월 20일까지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의 제거를 완료하라고 명령했다. 슈트로프의 지휘하에 약 2천명의 무장친위대가 별도로 국방군 7천명의 지원을 받으며 게토로 이동했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초토화 작전을 실시하여 바르샤바를 생지옥으로 만들고 봉기한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그리고 봉기의 핵심조직이던 "유대인 전투조직"의 사령부 지하호를 발견하여 지휘관을 살해하는데 성공하자 그는 5월 16일에 정식으로 바르샤바 게토 봉기진압작전의 종료를 선언하고는 그 기념으로 유대인 교회당을 박살내버렸다. 슈트로프의 보고서에 의하면 이때에 56,000명의 유대인을 체포하였고, 약 7천명을 사살하였으며, 체포한 유대인들을 이송하던 중에 또 다시 약 7,000명을 처형하여 이전에 죽인 숫자를 합쳐서 무려 총 14,000명을 죽였다고 한다. 거기다가 간접적인 화재 피해와 유탄에 맞아 사망한 폴란드인들만 해도 6천명이 넘었다. 저항이 6월까지 이어지는 가운데 한 달 동안의 전투로 6만명의 유대인이 사망했고 100명의 유대인만이 생존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포로가 되어서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1943년 10월 4일, 하인리히 힘러는 폴란드의 도시인 포즈난에서 친위대원들과 비밀 회합 중 유대인들의 절멸에 대해 노골적으로 연설했는데, 이를 포젠 연설이라고 한다.
친위대 대원들은 다음 한 가지 원칙을 절대적인 규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자기 민족에게 정직하고 예의바르며 충실하고 동지애를 가지되, 그 외의 사람에 대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소련인이나 체코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는 전혀 나와 무관하다. 어떤 민족이 우리에게 좋은 혈통을 제공할 수 있는 경우에는 필요하다면 아이를 납치해서 키울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우리 문화(Kultur)를 위한 노예로서 다른 민족들이 부유하게 살든 굶어죽든 관심이 없다. 1만 명의 러시아 여자들이 독일을 위해 대전차호를 파다가 피로로 쓰러져도 독일을 위해 그것이 완성되었다면, 나는 신경쓰지 않는다.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절대 거칠거나 냉혹해져서는 안된다. 동물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세계 유일의 민족인 우리 독일인은 인간 동물들에 대해서도 관대한 태도를 견지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 대해서 걱정하거나 그들에게 이상을 심어주는 것은 우리 자신의 혈통에 대한 범죄이다. 그것은 우리의 아들과 손자가 더 힘든 고통을 겪게 만들 것이다.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해도 좋다. 나는 친위대가 독일 민족이 아닌 다른 이민족, 특히 러시아인들의 문제에 대해서 이러한 태도를 가져주기를 바란다.
나는 유대인을 소개시키고 유대 인종을 말살하려고 한다. 말로는 쉽다. 모든 당원들이 '우리는 유대 인종을 제거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것은 당의 계획이니까. 우리는 유대인을 제거할 것이다.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 일이다. 그러나 착한 8,000만 독일인은 돌아서면 주변에 괜찮은 유대인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물론 다른 유대인들은 모두 돼지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 친구만은 훌륭한 유대인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그것을 지켜보지도 끝까지 수행하지도 않는다. 여러분은 대부분 100구나 500구, 혹은 1,000구의 시체가 나란히 누워 있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유대인을 말살하면서 동시에 - 인간의 나약함에서 비롯된 예외는 제외하고 - 좋은 인간으로 지내는 것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이것은 이제까지 한 번도 기록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절대 기록되어서는 안 되는 우리 역사의 영광스러운 한 페이지다. - 하인리히 힘러의 1943년 10월 4일 연설
1943년, 하인리히 힘러는 독일 내무장관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자신의 새로 얻은 권력을 이용하여 민간기구의 당 기구로의 통합을 백지화하여 원래대로 돌려버리고 게슈타포에 소속되지 않은 나머지 경찰 전체에 대한 모든 권력을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힘러와 권력 갈등을 벌이던 히틀러의 비서실장이자 나치당 서기였던 마르틴 보어만에 의해서 결국 이룰 수가 없었다. 물론 히틀러가 반대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힘러의 행동들은 히틀러를 점차 불쾌하게 만들었다. 군대와 경찰과 같은 권력기관에서 힘러 자신의 권한을 이용해서 독일 내에 존재하는 모든 경찰관들에게 무장친위대 대원의 자격을 강제적으로 준 후 경찰들을 무장친위대로 끌어들이는 등의 일로 인해서 히틀러는 힘러가 에른스트 룀의 돌격대와 같은 존재가 될 지도 모르며 힘러가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불신이 점점 강해졌다. 게다가 마르틴 보어만이 계속해서 히틀러의 망상과 불신을 옆에서 부채질했기 때문에 히틀러는 점차 힘러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게 되었다. 독일군 육군과 무장친위대는 자신들의 기득권 다툼으로 인해서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부터 심각한 갈등을 이어왔고, 결국 히틀러는 이러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위에서 보았듯 국방군과 무장친위대 간의 갈등을 중재해서 무장친위대 병력을 육군의 10분의 1로 제한한다는 합의로 문제를 봉합하기는 했으나 이에 만족하지 못한 힘러가 우회적인 수단으로, 무장친위대의 숫자를 직접 늘리는 것이 아니라 당시 히틀러가 중재한 협상에 들어가지 않은 경찰관들을 이용하여 '제4 SS 경찰사단 폴리자이'를 조직했다. 이에 국방군은 힘러와 다시 갈등을 빚게 되었고, 히틀러는 이렇게 계속 국방군과 갈등을 일으키는 힘러의 행동을 꽤나 불쾌하게 생각했다. 나중에 전쟁이 나치 독일의 패배로 확정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많은 나치당원들은 하인리히 힘러가 아돌프 히틀러의 뒤를 이어서 독일의 총통을 계승할 제1순위 후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전쟁 후 여러 자료들에 의해서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힘러가 히틀러를 배신해서 히틀러가 그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그를 나치당원이 더 이상 아니라고 규정하기 이전에도 이미 히틀러는 이렇게 국방군과 갈등을 일으키며 자신의 명령에도 따르지 않는 힘러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차기 총통으로 지명하는 것은 더더욱 생각조차 없었다.
그러던 중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을 중심으로 첩보부장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까지 가담한 국방군 첩보부(Abwehr) 주도의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이 7월 20일에 발생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 암살 시도 때 죽지 않았고 주모자들은 결국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게 되었다. 한편 하인리히 힘러는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이 터진 1944년 7월 20일 하루 종일 라슈텐부르크에서 약 40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자신의 14량짜리 특별열차 안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히틀러의 암살 시도가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는 엄청나게 놀랐고 공황 상태에 빠질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권력을 누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이 생각은 훗날 히틀러를 배신하게 되는 도화선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히틀러가 아직 생존해 있다는 것과 히틀러가 "반역자 무리"들을 처리하고 싶다는 것을 알게 된 힘러는 베를린으로 갈 준비를 했다. 힘러의 마사지사 펠릭스 케르슈텐(Fellx Kersten)이 증언하기를, 그는 기쁜 마음으로 베를린에 도착했다고 한다. 베를린에 도착한 힘러는 히틀러에게 가서 그의 생존을 축하한 후, 그 곳을 떠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총통 각하, 제게 맡기십시오."
힘러가 곧바로 취한 조치는 반역자들에게 처형 중지를 명령하는 것이였다. 관련자들은 모두 게슈타포의 주도하에서 심문을 받아야 했다. 필요한 경우에는 장기간 동안 고문까지 받아야 했다. 처형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뒤에야 가능했다. 힘러는 폰 슈타우펜베르크와 그의 동료들이 뜨거운 맛을 보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들은 너무 빨리 처형당하는 바람에 철십자 훈장을 단 채로 땅에 묻혔다. 다음날 우리는 그들을 다시 파내서 신원을 확인했다. 그 뒤 나는 시체를 태워서 그 재를 들판에 뿌리라고 명령했다. 그들의 것이라면 작은 흔적 하나라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라 이후 말했다.
암살 미수 사건 이후 히틀러는 독일군을 매우 의심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1944년 9월 14일, 독일 예비군 총사령관 프리드리히 프롬 장군은 히틀러 암살 계획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고 계급과 명예를 모두 박탈당했으며, 히틀러는 프롬의 자리에 하인리히 힘러를 앉혔다. 이것은 힘러가 슈츠슈타펠의 규모를 마구 늘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독일 국방군이 급속히 몰락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심지어 히틀러에게 숙청될까봐 겁을 먹은 국방군 인사들이 자진해서 슈츠슈타펠에 들어갈 정도였다. 이후 하인리히 힘러는 자신이 꿈조차 꾸어보지도 못했던 권력을 손에 얻게 되었다. 그는 예비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제국 내무부를 책임지면서 보안대와 다수의 게슈타포 스파이들이 배치된 무장친위대 제 38사단의 지휘관 역할을 맡고 있었다. 암살음모에 가담했던 친위대원들은 놀랍게도 아인자츠그루펜 지휘관이었던 SS 경찰중장 아르투어 네베 휘하의 부하들이었는데 사실 이들은 친위대라기보다는 자신들 스스로를 경찰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무장친위대와 일반친위대의 경우 배신자들이 나오지 않았는데 정작 이들이 그토록 혐오했으며 인종학살에 가장 열을 올렸던 아인자츠그루펜에서 히틀러 암살음모 가담자가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참 우스운 일. 반면에 히틀러 암살 음모에 연루된 나치당의 관료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힘러는 마르틴 보어만에게 약점을 잡히게 되어, 힘러는 더 이상 보어만 만큼은 건드릴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힘러는 서로 권력 투쟁을 벌이던 보어만의 손바닥에서 놀아나게 되었다. 전쟁에서 독일은 패퇴해가고 있었으나 힘러의 세력 기반은 계속해서 확대되어 갔다. 실패로 끝난 히틀러 암살 시도 이후 힘러는 제 3제국 서열 2위의 권력자가 되었다. 예비군 총사령관으로서 그는 육군 참모본부와 육군 지휘체계에 엄청난 굴욕감을 주었다. 예비군은 완전히 친위대에 종속되었으며, 친위대는 하인리히 힘러의 지휘하에 38개 무장친위대 사단의 편성과 장비, 훈련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했다. 친위대 원수 하인리히 힘러는 인적 자원을 모조리 긁어모아서 15개의 국민척탄병 사단을 급조하고 '인민의 비밀 전쟁'을 수행했다 떨어진 사기를 억지로 올리기 위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나는 귀관들에게 등을 돌리는 자가 있다면 누구든 체포하고 필요하다면 놈을 포박해서 보급트럭에 던져 넣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이 일은 사단 내에서 가장 정력적이고 가장 거친 장교에게 맡겨라. 그들은 순식간에 어중이떠중이들을 모두 체포해올 것이다. 말대꾸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벽을 등지고 서게 될 것이다."
독일 육군 참모본부가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가 되었는지는 3만 5천명의 빨치산 우두머리인 '부로 코모로프스키'가 바르샤바 봉기를 일으키며 독일군과 대치했을 때를 보면 알 수 있다. 빨치산을 상대한 것은 독일군이 아닌 힘러의 잔인한 보좌관 중에서 특수임무부대에서 복무하면서 잘 훈련된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브스키의 병력이였다. 그의 명령으로 디를레방어 형벌부대 병력 4천명과 소련인 탈주자 6천명, 그리고 죄수들이 잔학행위를 자행했다. 국방군의 하인츠 구데리안 상급대장은 이에 대해서 힘러에게 문제를 제기했지만 힘러는 구데리안을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친위대가 바르샤바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해버리자 1944년 10월 2일 폴란드 국내군은 항복했다.
하지만 힘러에게는 또 다른 걱정거리들이 연달아 생기기 시작했는데, 작은 꼭두각시 공화국 슬로바키아의 반란이 그 중 하나였다. 반스카 비스트리차(Banská Bystrica)에서 내각과 군부의 일부가 반정부를 선언했지만, 이 반란은 요제프 비티스카(Josef Witiska) 친위대 중령이 지휘하는 특수임무부대 H와 게슈타포에 의해서 4주 만에 진압되었다. 힘러는 오래 전부터 정신분열 증세를 보였고, 이즈음부터 그는 망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1944년 말에 힘러는 상부 라인 집단군의 사령관이 되었는데 이 부대는 독일 본토로 쳐들어오는 미 제 7군과 자유 프랑스 1군에 대항하여 라인 강 서쪽 강기슭에 알자스-로렌 지방에서 싸우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국방군이 소련군의 비스와-오데르 대공세를 저지하는 데 실패한 이후 히틀러는 힘러를 새로 편성한 비스툴라(Vistula) 집단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문제는 힘러는 협잡질이나 음모를 꾸미는 일, 또는 정적을 숙청하는 일에만 실력이 출중했지,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군사 경험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 선택은 재앙이 아닐 수 없었고, 결국 두 달만에 히틀러는 그의 무능함을 문제삼아 사령관을 고트하르트 하인리치(Gotthard Heinrici) 장군으로 교체했다. 어느 정도로 힘러가 무능하고 생각이 없었는지는 힘러가 구데리안과 했던 대화에서 드러난다. 구데리안은 임박한 소련의 공세를 막을 병력이 없으니 병력을 좀 보내달라고 요청했는데, 그러자 힘러는 "이것 봐요, 상급대장. 나는 소련군이 공격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그것은 말도 안되는 허세에 불과하오"라는 대답을 보내 구데리안을 아연실색하게 했다고 한다.
집단군 사령관을 비롯한 다양한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로 인해 힘러는 당시 건강이 좋지 못했다. 그는 후두염과 심한 위경련으로 인해 통증을 호소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호헨리헨(Hohenlychen)의 휴양지로 갔다. 베를린에서 북쪽으로 110km 떨어진 그 곳에서 그는 자신의 마사지사 펠릭스 케르슈텐에게 마사지를 받으며 시간을 보냈는데. 그의 마사지사 케르슈텐은 힘러의 고해신부 역할을 했다고 하며 힘러는 그를 '마법의 부처'라고 불렀다고 한다. 괴벨스는 당시 힘러를 방문하고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하인리히 힘러는 말년이 될수록 수척해 보였다. 그는 괴링과 리벤트로프의 욕을 했다. 그는 전반적인 전쟁 수행에서 실패의 원흉으로 괴링과 리벤트로프를 지목하며 폭언을 퍼부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그의 말이 맞았다. ...(중략)... 그는 상황을 정확히 요약하면서 군사적으로는 전쟁에서 이길 가망성이 없어 보이지만, 조만간 이 전쟁을 우리 편에 유리하게 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든다고 말했다. 하인리히 힘러는 동부전선보다는 서부전선이 그럴 확률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동부전선에는 아무런 기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인리히 힘러의 건강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히틀러는 3월 15일에 그를 베를린으로 소환했다. 훗날 증언에 의하면 힘러에게 히틀러는 '전반적인 전쟁 지휘'에 대해서, 그리고 더 이상 자신의 군대가 열심히 싸우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해서 열변과 독백을 토해냈다고 한다. 히틀러의 장광설을 듣다가 지쳐버린 힘러에게 구데리안이 솔깃한 제안을 했다. 구데리안은 건강을 위해 비스툴라 집단군의 지휘권을 포기한다 해도 그는 여전히 명목상 예비군과 무장친위대의 지휘관으로 남게 된다고 그를 설득했다. 힘러의 후임은 고트하르트 하인리치(Gotthard Heinrici) 상급대장이었다. 그는 경험이 많은 노련한 장군이었으며 구데리안만큼이나 힘러의 군사적 무지에 질린 사람이기도 했다. 하인리치는 힘러를 "훌륭한 장성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요소조차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평가했다. 사실 힘러의 해임은 그 자신의 무능함 때문이였다. 여담으로 그와 권력 투쟁을 벌이던 마르틴 보어만은 힘러의 해임을 기뻐했다고 한다, 그는 헝가리에서 히틀러의 요구로 실시된 친위대 정예 사단의 반격이 실패했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를 비난해서 힘러에게 굴욕감을 주기도 했다. 제1친위기갑사단 라이프슈탄다르테 아돌프 히틀러(Leibstandarte SS Adolf Hitler)가 정예 친위대 대원을 의미하는 특별 완장을 박탈당하자 힘러의 권위는 더욱 추락했다. 그 특별 완장은 국가보안본부의 수장인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에게 돌아갔다.
나치당 내에서의 위치
나치당 내에서 초창기에는 개듣보잡으로 그레고르 슈트라서에게 잘린 이후 친위대에 들어갈 때까지는 학력만 좀 있는 그저 그런 당원이었다. 그리고 1934년 6월 30일의 장검의 밤 이후가 그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1936년 제국경무총장으로 임명된 직후 히틀러에 반하는 반체제 인사들을 구속시키고 감찰하는데 경찰과 충돌하는 부분이 많다고 주장하며 효율성을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게슈타포, 사법경찰, 질서경찰 등의 거의 모든 경찰 조직을 친위대에 귀속시키고 1939년에는 제국국민회 의장까지 겸임했다. 모든 독재 정권에서 중요시하는 비밀경찰은 1936년 하인리히 힘러의 휘하에 있었고, 결과적으로 힘러는 제3제국의 첩보 및 치안을 전부 책임지는 실세 중의 실세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힘러가 개인적으로 동경하고 늘 가지고 싶어했던 것은 참모총장 및 군사령관의 직책이었다.
하인리히 힘러는 히틀러가 친위대를 군대로 키워주고 공인해주기를 간절히 소원했지만, 돌격대의 선례를 두려워한 히틀러는 이를 끝내 거부했다. 군사 조직 개편, 무장화, 소속 군수공장 육성 및 친위대 부설 사관학교 설립도 탐탁치 않아했다. 그러나 1942년에 동부 전선이 확대되자 힘러는 히틀러의 묵인 아래에 무장 친위대를 38개 사단으로 구성된, 국방군에 준하는 거대 무장 조직으로 성장시켰다. 1944년에 예비군 최고사령관에 임명되었을 때는 괴링과 마찬가지로 군권과 정권 모두를 지니게 되었다. 1945년 전쟁 말기까지 지닌 직책은 슈츠슈타펠과 경찰의 최고 수장은 물론, 내무부 장관, 제국 국민회 의장, 국민돌격대 지도자 겸 향토방위군 사령관이었다. 자연스레 그는 헤르만 괴링과 함께 히틀러의 유력한 후계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나치당 그리고 정부에서 공식적인 2인자는 헤르만 괴링이었고 3인자는 '총통의 대리인'루돌프 헤스였다. 그리고 괴벨스, 마르틴 보어만보다 히틀러에게 신임을 받았다고 보기도 어렵다. 상술하였듯 보어만에겐 약점 잡혀서 깨갱거리는 신세였고 괴링의 영역이었던 공군에는 친위대의 손길을 뻗으려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전쟁 후 친위대가 덩치를 키워가며 거대한 조직으로 커갔지만 무장친위대와 장군들은 힘러를 대놓고 무시했고 친위대 보안대(SD)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또한 힘러보다 유능한 인물로 딴 주머니를 찼으며, 그의 후임자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역시 힘러를 견제하였으니 친위대 권력이 온전히 그의 수하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친위대가 나치 독일에서 국가 안의 국가처럼 행세하듯이 친위대 내에서도 무장친위대니, 보안대니, 게슈타포니, 인종국이니 하는 조직들이 모래알 처럼 '친위대 내의 친위대'로 행세했기 때문이다.
1945년 1월 국방군 장군들이 자신의 뒤통수만 친다고 굳게 믿던 히틀러가 일개 사관후보생 출신 하인리히 힘러를 베를린 코 앞의 바익셀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두어 달 만에 히틀러조차도 친애하는 힘러의 무능과 병크를 순순히 인정, 시원하게 그를 경질하면서 힘러와 히틀러의 관계도 멀어진다. 사실 이전부터 전황이 망해가면서 저 혼자 살려고 아웅다웅했었고 연합국에 히틀러 뒤통수를 치려고 비밀접촉도 시도했지만 연합국에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히틀러, 힘러, 괴벨스 등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용만 당한다. 힘러가 접촉을 여러 번 시도한 걸 통해 밝혀진 바로는 연합국에서 파악한 자신의 죄상을 용서받을 수 있을 정도의 가벼운 죄로 봤고, 나치당 내에서 서열도 떨어지니 새로운 주인을 만나 친위대 전력을 그대로 조공으로 바치며 충성을 맹세하면 살아남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하인리히 힘러의 시체
1945년에 하인리히가 소유한 나치의 무장친위대의 전력은 80만 명 혹은 91만 명에 이르는 수준의 규모로 성장했고 여기에다 알게마이네 친위대(Allgemeine-SS)를 합하면 그 숫자는 거의 2백만 명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1945년 봄부터 하인리히는 이런 거대한 수준의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독일이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을 완전히 포기했다. 그는 나치 체제가 살아남으려면 영국 및 미국과 평화협상을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힘러는 덴마크 국경지대 뤼벡(Lubeck)에서 항복하거나 또는 자신이 지배하는 나치 국가의 지도자로 인정받기 위한 교섭을 시작하였다. 힘러는 미군과 영국군이 독일군과 힘을 합쳐서 같이 소련군을 격퇴시킬 생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당시 힘러가 담당하고 있던 직위는 친위대 제국원수, 독일 경찰 총감, 독일 국민회(German Nationhood) 제국위원장, 제국 내무장관, 국민돌격대(Volkssturm) 사령관, 그리고 독일 내 예비군 사령관일 정도로 그는 거대한 권력의 소유자였고, 그 권력으로 자기가 살 궁리를 시작하였다.
하인리히 힘러는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위해 무장친위대를 창설해 전쟁터에서의 전공에도 욕심을 내게 되었으며, 괴링이 스스로의 실책으로 점차 실각하자 힘러도 본격적으로 자기 살 길을 찾기 시작한다. 이미 1944년 여름 힘러의 수하였던 셸렌베르크는 스톡홀름에서 미국 외교관과 접촉하기도 했으며, 셸렌베르크는 이 접촉을 힘러에게 보고했다. 처음에 힘러는 셸렌베르크에게 화를 냈으나, 셸렌베르크가 힘러에게 독일의 패전 속에서 당신의 목숨은 구해야 한다면서 끈질기게 설득하자 힘러는 곧 생각을 바꾸었다. 셸렌베르크는 1945년 초에 스위스에 있는 심복에게 지시하여 미국과 접촉하기도 했으며, 미국과 독일이 동맹을 맺어서 소련과 함께 대항하자는 취지의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폴케 베르나도테 백작과 셸렌베르크가 협상을 위해서 접촉을 시작했는데 그 시기는 1945년 2월에서 4월 정도였다. 베르나도테 백작은 나치 강제수용소에 억류되어 있는 억류자들의 안전이 가장 주요한 관심사였고, 그러자 힘러의 지시를 받은 셸렌베르크는 베르나도테에게 수용소 안전을 확인시켜 주면서 자신과 연합국 측의 협상을 중간에서 도와줄 것을 제안했다. 1945년 4월부터는 힘러가 히틀러의 신임을 잃은 상황이였기 때문에 힘러도 덴마크 국경 근처 뤼베크에서 스웨덴의 폴케 베르나도테 백작과 두 번 접촉해서 협상을 하려고 했다, 1945년 4월 23일 힘러는 베르나도테를 통해 스웨덴 정부에 미국과 평화 협상을 중재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스웨덴은 힘러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힘러는 미국에 망명하기로 결심하고 미국과 직접 협상하려고 했다. 그는 아이젠하워 장군의 사령부와 접촉하면서 자신을 나치의 고위 간부로 고발하는 대상에서 제외시켜 준다면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하게 만들겠다고 말하며, 아이젠하워에게 개인적으로 전후에 새로 구성되는 독일 정부에서 경찰장관의 지위를 얻기를 원한다고 제안했다, 심지어 영화 '몰락'에서도 나오는 내용이지만 힘러는 연합군 최고사령부(SHAEF)와 첫 회합에서 어떤 식으로 악수할 것인지를 고심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하인리히 힘러와의 어떠한 제안이나 거래도 거부했고, 1945년 4월 24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독일이 항복한다는 생각은 모두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결국 힘러는 이러한 협상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하인리히 힘러가 제시한 협상 조건을 요약하자면, 영화 몰락에서도 나온 히틀러의 뚜껑을 열리게 만든 펠릭스 슈타이너의 공세 차단의 장본인이 바로 그로, 슈타이너의 부대를 근처 친위대 병력과 합친 3만 병력을 보존 항복 협상용으로 써먹으려고 한 것이었다. 연합국과 협상하여 연합국에게 나치 정권의 정보를 제공하고, 유대인 처형을 중지하고 여러 수용소를 개방하여 그 대가로 다시 새롭게 세워질 독일 정부의 관직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연합국은 이미 이런 자에게는 관심이 없어진 뒤였다. 힘러는 전후 정세에 대해 일종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을 했던 것이다. 그나마 폴케 베르나도테는 그런 환상에서 깨고서 정신을 차렸지만 힘러는 끝까지 그 생각을 버리지 않았고 결국 베르나도테 백작을 통한 협상과 미국에 망명하려는 협상은 모두 실패했다. 그 이유는 연합국은 이미 그를 주요 전범이며 최우선 체포 대상자 명단에 올려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일고의 가치도 없는 힘러의 제안은 아무 통제 없이 영국 언론에서 방송되었으며, 음모를 꾸미는 데 재능이 있었던 보어만은 이를 들은 뒤, 히틀러의 귀에 들어가게 만들었다. 힘러의 배신에 격분한 히틀러는 체포 사살령을 내리지만 이미 힘러는 멀리 도망간 상태. 여담으로 히틀러는 벙커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손에 보어만이 보낸 전문을 쥐어주며 가장 오랜 동료인 '충성스러운 하인리히'가 자신을 배반했다면서 계속 분노했고, 그 당시 히틀러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히틀러가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서 미쳐서 날뛰었을 정도로 화를 냈다고 한다.
히틀러가 자살하고 베를린이 소련군에 의해서 함락되자 하인리히 힘러는 베를린으로 갈 수 없었기 때문에 플론 근처에 있던 카를 되니츠 해군원수를 찾아서 플렌스부르크 정부에 참여하고자 했다. 카를 되니츠가 서부지역의 모든 독일군을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무슨 일이었는지 힘러를 체포하고 사살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은 되니츠에겐 도달하지 않아서 되니츠는 그를 체포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되니츠와 그 주변 인물들은 힘러와 붙어있어 보아야 영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며, 연합군의 호의를 얻고 싶어했던 되니츠는 결국 힘러를 1945년 5월 6일부로 정부에서 해임하고 말았다. 그 상황에서도 힘러는 살아남으려고 별의별 시도를 했지만, 결국 모든 시도는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고 하인리히 힘러는 전쟁범죄자로 낙인찍혀 체포령이 떨어졌다. 이때 힘러는 거의 실제 역사에 가까운 예측을 했는데 '서방인들이 러시아인들을 싫어하게 될 것이고 이때가 될 때 독일은 구사일생할 것이다. 이때까지 도망자 인생을 살겠다' 고 말하고 사라진다. 이는 힘러가 식견이 남달라서가 아니고 전쟁 말기 패전이 불 보듯 뻔해질 시기에 히틀러고 국방군이고 나치고 일반 독일인 국민까지도 '연합국이 우릴 어느 정도 패면 화가 풀리고 영미 자본주의자들의 철천지 원수 스탈린과 소련 치는데 독일을 선봉으로 세우면 좋지 아니할까?' 라는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영미는 소련은 2번이나 전쟁을 일으켜서 유럽을 박살낸 독일을 어떻게든 두들겨패고 나서 생각할 일이라고 여겼고 항복 이외의 타협은 불가했다.
하인리히 힘러는 연합군에 체포되는 것을 피해서 되니츠 정부의 수도였던 덴마크 국경 근처 플렌스부르크 주변에서 며칠 간 숨어지냈지만 되니츠에게 거부당하고 나자 그를 보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게다가 힘러는 이미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핵심 범죄자로 지정되어 다른 나치의 고위 간부들과 함께 재판에 회부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 또한 붙어있어 보아야 영 좋은 꼴이 안 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부하들이 힘러의 곁에서 하나하나 떨어져 나갔다. 힘러가 사라지자 연합군 정보기관들은 A급 전범이였던 그를 체포하기 위해 플렌스부르크 근처를 이 잡듯이 뒤졌고 그의 사진도 점령군에 뿌려졌지만 그의 행방을 찾아내는 데는 실패했다. 패전 이후 힘러는 체포를 피하면서, 바이에른으로 갈 생각을 하며 헌병으로 위장했다. 그는 '하인리히 히칭거(Heinrich Hitzinger)'라는 가명을 쓰며 콧수염을 밀고 안경과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모자를 쓰며 안대까지 한 후 가장 충성스런 SS 대원 두 명과 동행해 그냥 일반 장교인 척 한 후 포로 신분으로 탈출하려 했으나 힘러는 일반 장교는 무조건 체포 후 심문대상인 걸 몰랐고 제대로 된 신분증도 없는 대다수의 난민과는 달리 너무 깨끗한 신분증을 준비해 내놨기에 의심받았다. 그가 비밀헌병 제복을 입고 있었던 것도 의심을 받은 이유였는데, 이유인즉 원래 군사정보국 소속이다가 나중에 게슈타포에 통합된 비밀헌병 대원들은 전부 연합군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기 때문이였다, 이 때문에 힘러는 영국군에게 체포된 후 포로 수용소에 구금된다.
힘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영국군에 체포되어 031 민간인 신분으로 수용소에 호송되었다. 그곳의 수용소장이였던 셀베스터 대위의 회고에 의하면 자신의 사무실에 처음으로 들어선 사람은 키가 작고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바로 뒤에 키가 크고 군인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따르고 있었으며, 그 중 한 사람은 호리호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체격이 좋았고 다리를 절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뭔가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그는 부사관에게 그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자신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그들에게 이야기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독방에 갇힌 힘러는 자신의 신분이 곧 발각될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힘러는 수용소장에게 개인적인 용무가 있다고 요청하여 수용소장에게 불려갔다. 그가 사무실에 들어온 후 안대를 벗고 예전에 썼던 안경으로 바꿔 낀 후 "Ich bin Heinrich Himmler(내가 하인리히 힘러요.)" 라고 독일어로 나직한, 체념한 목소리로 말하자 수용소는 난리가 났다.
그러다가 모두가 진정한 후 여행으로 지저분해진 낡은 옷 대신에 깨끗한 영국군의 제복이 그에게 제공되었지만 힘러는 그것을 거부하고 담요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다 셀베스터가 직접 몸수색을 했는데 수색 방법은 벗은 옷을 부사관에게 하나씩 건네면 부사관이 그것을 다시 조사하는 방식이였다. 힘러는 하인리히 히칭거(Heinrich Hitzinger)라는 이름이 적힌 서류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거기에 신분은 집배원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재킷 안에서 작은 황동 케이스 2개를 발견했는데 타 약통과 비슷하게 생긴 그 케이스에는 유리로 된 작은 약병이 담겨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짐작이 갔지만 일단 힘러에게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묻자 그는 "그것은 내 약입니다. 위경련 치료제이죠."라 대답했다. 하지만 또 다른 케이스에는 약병이 없었고, 그가 몸 어딘가에 약병을 숨기고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셀베스터는 힘러의 옷을 전부 벗기고 그의 몸에 있는 모든 구멍을 조사했다. 머리도 빗기고, 약병을 숨길 만한 곳을 모두 조사해 보았지만 약병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다만 입은 아직 확인해보지 않았다. 셀베스터는 약병이 입 안에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지만 강제로 제거하려고 했다가는 영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사람들을 보내 두꺼운 빵과 치즈 샌드위치, 그리고 차를 가져오게 했고, 그것을 힘러에게 주면서 그가 입에서 무엇을 제거하는지 확인하려고 했고, 힘러가 먹는 동안 그를 유심히 관찰했으나 이상한 점이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치 지도자들이 체포에 대비하여 독극물을 가지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셀베스터는 안심하지 못했다. 예전에 주의가 허술한 틈을 타서 친위대 고급 장교 한 명이 치아 사이에 있던 시안화칼륨 캡슐을 깨물어 죽은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 잡았던 나치의 전범 가운데 가장 핵심인물이었던 하인리히 힘러는 몽고메리 장군의 참모인 마이클 머피에게 인계되었다. 그 또한 힘러가 독약을 숨기고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에드윈 오스틴과 군의관인 C.J.L 웰스와 함께 힘러에게 옷을 벗으라고 한 뒤 수색을 시작했다. 그 뒤 군의관 웰스가 힘러에게 입을 열라고 말하고, 힘러가 입을 열자마자 그의 오른쪽 아래 턱 치아들 사이 공간에 작고 검은 덩어리가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웰스는 두 손가락을 힘러의 입에 집어넣어 그것을 빼려고 했지만, 갑자기 힘러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군의관의 손가락을 세게 깨물었다.
그러자 군의관은 "그가 독약을 삼켰습니다"라고 소리쳤고, 머피와 오스틴 그리고 휘태커 등이 힘러에게 달려들어 그를 엎드리게 해서 독약이 위로 가지 못하도록 한 뒤 토하게 만들려 했고, 혀를 꺼내기 위해 무명실을 꿴 바늘을 혀에 꽂아 넣었고, 그 다음에 독을 씻어내기 위해서 몸을 뒤집어 입에 물을 부었지만 모든 일이 허사였다. 결국 휘태커는 "우리는 지금 승산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 그 악랄한 인간은 23시 14분에 숨을 거두었다"라고 말한 뒤 시체를 바로 눕히고 담요를 덮은 뒤에 그 자리를 떠났다. 시신은 영국 정부에 의해 촬영되어 공개되었다.
이로 보건대 힘러는 처음에는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의 신분을 소장에게 밝힌 뒤 정치적 협상을 하려고 하였으나, 거의 전범 대접을 받게 되자 그제서야 연합국 측이 자신을 협상 대상이 아닌 전쟁범죄자로 간주하고 이대로 가면 재판에 넘겨져 자기가 저지른 범죄가 싹 까발려진 뒤 사형당할 일만 남았다는 걸 깨닫고 결국 자살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치밀하게 홀로코스트를 입안, 계획, 실행한 인물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어리버리하고 황당한 최후라고 할 수 있지만, 원래 본인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게 맞을 지도.
죽어서도 수난을 당했는데, 군 치과의사가 기념으로 힘러의 치아 2개를 뽑겠다고 했지만, 그의 요청은 거절당했다. 그가 죽고 기자와 사진사들 그리고 많은 영국 병사들이 모여들었고 시체는 다음날 하루 종일 손대지 않은 채로 그대로 두었다. 몽고메리의 참모 중 일부 장교들은 죽은 자를 군대식으로 매장할지 기독교식으로 매장해야 할지를 두고 논의했지만, 그가 극악무도한 전쟁 범죄자라는 것이 밝혀지자 어떤 매장의례도 필요없다는 몽고메리의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영국군 바지와 군용셔츠를 입고 독일군 양말을 신은 하인리히 힘러의 주검은 군용모포로 싸서 전화선과 위장망으로 고정시켰고, 그 뒤 뤼넨부르크에서 화장되어 강에 뿌려졌고 1947년 뤼넨부르크 법원에 사망신고가 접수되었다. 영국 정부는 그가 사망한 지역 근처에 화장한 뒤 뿌렸다고만 했을 뿐 위치는 아직도 비밀로 남아있다. 그런데 뤼넨부르크에서 자살한 하인리히 힘러는 본인이 아닌 가짜라는 주장이 있다. 미국인 작가 조셉 벨링거의 '하인리히 힘러의 죽음'에선 1945년 5월에 영국군 심문관에 의해 SS와 국방군의 다른 고급장교들과 함께 살해되었다는 주장이 실렸다. 영국 정보부가 하인리히 힘러와 처칠이 1년 가까운 기간 동안 협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은폐하려고 힘러를 살해하고 사실을 숨기려고 했다는 음모론도 있다. 이러한 주장은 힘러의 딸 구드룬 힘러도 주장했는데, 그녀는 하인리히 힘러가 자살했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했다. '자살 직후에 찍은 사진을 보면 사열을 받는 자세인데 독약을 삼킨 사람의 시체가 그런 자세로 누워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였다.
벨링거의 책은 독일의 아른트 출판사에서 처음 출간되었고, 이와 비슷한 주장을 담은 책으로 마틴 알렌이 쓴 '하인리히 힘러의 비밀전쟁'에서 유사한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담은 책과 문서들은 영국 국립문서보관소로 밀반입되어서 들어온 조작된 문서에 불과하기 떄문에 전혀 근거가 없는 문서이다. 오스트리아의 유사역사학자 데이비드 어빙은 하인리히 힘러가 영국군 심문관들로부터 구타를 당해 죽었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주장에 의하면 구타로 인해 힘러의 코가 부러졌다지만 여러 사진들에서 그런 증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며, 현재에도 이러한 힘러가 살아있다는 음모론은 역사학자들에게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지진 않는다. 애초에 법정에 기소해서 홀로코스트의 진상을 밝혔어야 했는데 조사도 없이 구타해 죽이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야사
이중성이 굉장한 인간으로, 딱 한 번 아우슈비츠에 가서 자신의 앞에서 실제로 SS 대원들이 유대인을 처형하는 것을 보곤 기절할 뻔했지만 다시 베를린으로 가서는 유대인 학살을 계속하라고 지시하는 서류는 잘만 작성했고, 약하고 힘 없어보이는 외모와 분위기인 주제에 온갖 사악하고 음침한 짓거리를 서슴없이 다 해대는 덕분에 아돌프 히틀러의 애인이었던 에바 브라운은 자기 일기에 "가까이 하기 싫은 소름끼치는 인간"이라고 온갖 험담을 다하고 있다. 이런 일을 하면서도 일상에서는 영화를 보면 입장 체크할 때 찢고 남은 반쪽 영화표도 모조리 모았고, 자신의 나이 든 노부모가 자기 관용차를 타고 외출을 하면 그 경비는 꼬박꼬박 자기 급료에서 공제하는 등 청렴하다고 할 수 있는 모습까지 보였지만 그래봐야 본질은 그대로다.
자신이 등용했지만 나중에 대립하게 되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게 가끔 몽골리안이라고 욕했다. 하이드리히가 찢어진 눈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듯. 웃기게도 하인리히 힘러는 자신이 그렇게 몽골리안 같다고 욕하던 하이드리히보다 훨씬 더 몽골리안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당장 둘의 사진만 봐도 하이드리히가 나치의 이상인 금발벽안의 아리안인에 가장 유사한 반면. 힘러는 가히 몽골리안 면상이었다. 당장 사진에 독일 이름만 빼고 일본 이름만 슬쩍 끼워도 일본인으로 착각할 수 있을 용모이다.
에바 브라운이 직접 찍은 영상 필름에서 하인리히 힘러가 그의 부하들과 대화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제2차 세계대전 후 학자들이 하인리히 힘러의 입모양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 확인해 보니, 웃는 얼굴로 유대인 학살 계획에 대해서 논하고 있었다고 추정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입모양만으로 어떤 말을 하는지 완전히 파악하는 게 불가능한 데다가, 하인리히 힘러는 유대인 학살 계획같이 주요 사항은 혼자서 하거나 극비리에 소수의 고위 간부들과 했지 저렇게 대놓고 하지는 않았으므로 추정일 뿐이다. 그리고 어차피 서류로 남은 게 있어서 저지른 건 다 공개됐다. 오죽하면 다른 나치 핵심전범들도 화장하기는 했지만 최소한 사형당한 직후 장례는 치러줬는데 힘러는 그냥 화장해버렸을까.
그외에도 오토 카리우스에게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한 예로 그가 부상에서 회복되자 차와 운전병을 보내 도시를 관람시켜 주었고 카리우스가 친위대의 특별 우대에 대해서 비판하는데도 표정 하나 안 바뀌고 그걸 끝까지 다 듣고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헤어지기 전, 무슨 일이 생겨서 도움이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자신한테 연락을 달라고 했고 증거로 문서를 만들어 줬다. 이후 종전에 이를 때까지 카리우스는 하인리히 힘러가 써준 이 문서들 덕을 톡톡히 본다. 덕분에 카리우스는 하인리히 힘러에 대해서 별로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 편이었다고. 물론 어디까지나 자신을 도와준 부분에 한해서 고맙게 생각할 뿐 그가 유대인 말살을 지휘한 것까지 실드치지는 않기 때문에 딱히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오토 카리우스의 회고록 '진흙 속의 호랑이'를 읽어보길.
나치는 우생학과 관련된 목적으로 상당한 동물애호적인 모습을 보여줬는데, 하인리히 힘러도 예외가 아니였다. 하인리히 힘러는 동물 보호와 관련된 법안들을 만드는 데 많은 일들을 했으며 동물들도 인도적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나치에서 동물 구분을 '인간'과 '동물', '열등한 인간'으로 나눈 것에서 비롯되며 동물은 인간과 닮지 않았지만 인간에 대한 충성심과 인간과의 교류로 사랑을 받을 수 있으니 가치가 있지만 '열등한 인간'은 인간의 형태를 지녔지만 살아있을 가치가 없는 생물로 인류가 동물보다 높은 존재로 가진 우월한 순수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일찌감치 절멸하는 것이 인류의 혈통 보존과 문명을 보존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가족관계
가정에서는 굉장히 다정한 가장이었다. 하인리히 힘러는 7살 연상인 부인 마르가레테 하인리히 힘러 사이에서 딸 구드룬 힘러를 두었는데, 마르가레테는 하인리히 힘러를 상당히 깔보면서 괴롭혔고 하인리히 힘러도 부인을 무서워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도 하인리히 힘러를 '하인리히'라면서 이름으로 부르고 집안일이나 음식에 트집을 잡았다고 한다. 이런 마르가레테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서 하인리히 힘러는 몹시 싹싹하게 굴었지만 마르가레테에게서 돌아오는 건 항상 냉대뿐이었다. 하인리히 힘러의 집에 방문해 이 모습을 본 히틀러 유겐트의 전국지도자 발두어 폰 시라흐와 그의 부인 헨리에테는 하인리히 힘러를 제3제국 최고의 공처가라고 평하였다.
마르가레테 지그로트(결혼 전 성)는 이미 이혼한 경력이 한 번 있는 간호사로, 힘러는 기차 여행 중 그녀를 처음 만났다. 몸이 허약하고 사팔눈에 턱이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등 신체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그는 키가 크고 금발벽안인 이상적인 아리아인의 외모를 갖춘 그녀에게 끌렸다. 힘러의 가족은 아들보다 7살이나 많은데다 종교도 가톨릭-개신교로 서로 다르고, 불안한 성격에 사회생활이 원만치 못한 마르가레테를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결혼식에 힘러의 가족은 누구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마르가레테가 구드룬을 낳은 후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되자 아들을 입양했지만, 이 아이는 가족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기숙학교와 사관학교로 보내져 집에서 떨어져 살게 되었다고.
마르가레테의 성격이 원래 저렇지는 않았다. 힘러가 농학을 전공했기에 양계장 사업을 시도했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딸의 육아와 양계 작업을 하는 데 써야 했고 남편의 부재가 반복되는데다 얼마 못 가 파산하자 의기소침해지고 불만을 품었다고. 전쟁이 시작되면서 하인리히 힘러가 바쁘게 되자 사실상 별거 상태가 되었고, 그러자 더욱더 남편에게 화를 내고, 공격적이고 경멸하는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내에서 입지가 커지고 중책을 맡게 되자 힘러는 점차 아내에게 무관심해졌고, 성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졌다. 아이를 더 많이 낳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내 대신 다른 여자가 필요했다.
하인리히 힘러는 나름대로 용기를 냈는지 자신의 비서였던 헤트비히 포타스트를 정부로 두고 둘 사이에서 아들 헬게와 딸 나네테를 낳았다. 헤트비히는 종전 후 재혼을 해 성을 바꾸었고, 신분을 숨기고 조용히 살았기에 전쟁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구드룬이 21살 때 이복동생들의 존재를 알고 연락을 취했지만 만남을 반대했기에 배다른 남매들의 상봉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헤트비히는 1994년 바덴바덴에서 세상을 떠났고, 헬게는 피부병이 있고 수줍은 성격에 허약한 체질인 등 건강이 좋지 않아 성인이 된 후로도 독립하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살았으며 나네테는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두 남매 모두 2010년대 현재까지 생존해 있다는 것 외에는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전후 하인리히 힘러의 가족들은 다른 전범의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하인리히 힘러의 악행으로 인한 처벌이나 제도적 차별은 받지 않았는데 이는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는 민주국가 서독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아들은 서독군에서 군복무를 해야 했는데 역시 당시 징병제였던 서독에서의 의무였다. 다만 일상생활에서는 상당한 차별과 냉대를 받았다.
구드룬 부르비츠는 아버지에게 '강아지(Püppi)'라 불리며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랐는데, 그래서 아버지를 좋게 생각하는 것까지야 그렇다고 하지만, 잘못까지 감싸주면서 욕을 먹고 있다. 특히 아버지 하인리히 힘러가 학살에 관여한 일에 대해 "나의 아버지는 그러지 않아!"라고 주장하며 친나치 짓거리를 하는 게 가장 큰 문제. 나중에는 '조용한 손길 (혹은 '침묵의 원조'라고도 번역한다)'이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힘들게 사는 과거 나치 인사들을 도와주기도 하는 등 상당한 막장으로 산 인간이다.
다만 그녀의 성장 과정이 상당히 아스트랄했는지라, 저런 막장 행각을 벌이며 살았음에도 동정심을 가져주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는 편이다. 구드룬이 아버지의 악행으로 인한 공식적 처벌이나 제도적 차별은 받지 않았다지만 하인리히 힘러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독일 패전 직후 연합군에게 체포당해 적잖은 고초를 겪었고 이후 사회 생활에서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종전 당시 아직 10대로, 말 그대로 공주님처럼 살던 사춘기 소녀가 갑자기 수용소 감금생활과 연합군의 거친 심문을 받는 등 삶이 나락으로 떨어져버렸으니 그 충격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게다가 원래 심문 받았어야 할 아버지가 법적 처벌을 받지 않고 자살해버리는 바람에 그 주변에 대한 심문이 더 가혹해진 측면도 있다. 죄가 없다는 게 밝혀져 풀려나긴 했지만 수용소에서 석방될 때는 몸과 마음이 죄다 망가져 반 시체 수준이었다고 한다. 전쟁범죄와 관련이 없다는 게 확인되어 법적 처벌은 받지 않았지만 집안의 재산이 아버지가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한 손해배상으로 다 날아가 거지가 된 채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 건 물론이고 회사 면접에서 아버지가 힘러라는 것 때문에 떨어지거나, 호텔 프론트 일을 하다가 자신을 알게 된 손님이 '아우슈비츠에서 부인을 잃었는데 저런 여자한테 서비스 못 받는다!'고 분개하여 해고당한 적도 있다. 살던 집에서 쫓겨나거나 직장에서 동료들한테 기피당하는 일은 부지기수였고, 만나는 사람마다 "네가 바로 그 인간 쓰레기 하인리히 힘러의 딸이니?"라고 물어봤을 정도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게다가 하인리히 힘러의 유명세를 노린 영국인에게 이용당해 안 먹어도 될 욕까지 들어 처먹는 등 별의별 일을 겪은 끝에 결국 저런 식으로 삐뚤어져 버린 것인지라... 한마디로 아버지 잘못 만나 인생 망친 사람. 적악여앙(積惡餘殃, 남에게 악한 짓을 많이 하면 그 죄에 따르는 재앙이 자손에게 미친다)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이야기다.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나치의 아이들>이라는 책을 참조하자.(다른 전범의 자식들 이야기도 실려있다)
여러가지 기행
하인리히 힘러는 게르만 인종 신화와 오컬트에 심취하였다.
게르만 고대문명 떡밥을 너무 진지하게 믿어서 룬 문자나 아리안족 기원을 찾아서 중동에 탐험대를 보내는 한편 아넨에르베를 비롯한 이상한 조직을 만들어 과학은 물론이고 유사과학에 대한 연구도 진행시켜 전쟁 후에도 계속되는 "나치가 이런저런 비밀병기를 만들었다" 등의 떡밥이 남발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덕분에 울펜슈타인 시리즈에서도 아돌프 히틀러를 제외하면 거의 유일하게 등장 혹은 언급된 적이 있는 실존 나치 고관이기도 하다.
체질이 허약해서 술은 마셨다하면 토하거나 설사를 해서 마시지도 못하지만 게르만족 조상들이 먹었다 카더라로 전해진 '벌꿀술'에는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광천수를 마시면 건강해진다고 심각하게 믿어서 2차대전 말기 독일 내 광천수 심정의 70%를 친위대 소속으로 긁어모을 정도.
엄격한 조건을 가진 SS에 미청년, 미소년들을 긁어 모았고, 이들은 결혼 유무에 관계 없이 성관계를 가져 아이를 낳는 것이 장려되었다. 이를 위해 레벤스보른(Lebensborn, 생명의 샘)이라는 프로젝트까지 만들어서,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는 SS 대원들의 아이를 가졌다고 본 산모(부인 뿐만 아니라 애인이라든지, 혹은 불륜에 의한 임신을 한 여자들도)들을 이곳에서 출산시켜 양육하였다. 사실 자원하는 여성들도 받아서 SS 대원과 관계를 갖게 하여 아이들을 출산케 하기도 하였다. 이른바 순수 게르만족 생산공장.
독일 최고의 과학자들을 하인리히 힘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멍청한 실험에 종사시켰기 때문에 나치당이 집권하면서 유대계 학자들이 추방/탈출하면서 약화된 독일의 학문 인재풀의 역량을 더 낭비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연합국 정보기관들은 이런 하인리히 힘러의 멍청한 경향을 알고 안심했다고 한다.
이런 멍청한 실험에는 생체실험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별의별 잔혹하거나 변태적인 실험도 많았다. 이런 생체실험에 대해서는 그저 새디즘의 발로였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어차피 인간에 대한 생체실험으로 얻을 수 있는 데이터가 동물 시험과 그다지 차이가 없고, 유대인들이나 반체제 인사에 대한 SS 지도자들의 새디즘을 만족시키기 위해 행했다는 것이다.
예수가 마신 마지막 성배를 찾겠다는 아마추어 고고학자 오토 란(1904~1939)의 듣보잡 책자를 눈여겨 봐서 란의 연구를 후원하였고 아예 란에게 SS 대위 자리까지 주었다. 1920년대에서 30년대까지 스위스와 여러 산악지대에 살면서 성배를 찾느라 나치에 대하여 전혀 몰랐던 오토 란은 단지 자신의 연구를 인정하는 것에 기뻐했지만, 나중에 유태인 학살 및 전쟁을 일으키는 나치를 알게 되어 반발했으나 하인리히 힘러는 "게르만 신화에 성배를 연루하여 책을 써라, 싫다면 수용소로 갈 준비를 하고." 이 말에 좌절한 오토 란은 탈영하여 스위스 쿠프슈타인 산(성배를 찾고자 자주 다니던 곳이었다)에서 독을 먹고 35살의 나이로 자살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선 란이 유태인이라서 자살했다고 나왔으나 2004년 란의 탄생 100주기 에 맞춰 KBS-1로 방영한 다큐멘터리에선 일절 그런 이야기는 안 나오며 무엇보다 유태인이라면 하인리히 힘러가 SS 장교로 등용했을까?
기독교를 대체하는 아리안족 종교를 연구한답시고 인도와 티베트에 탐사대를 보내서 많은 자료를 수집하게 했다. 특히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바가바드 기타를 아리안족의 원래 종교라고 극찬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파편적 교리를 나치 이념에 짜맞춘 것으로 사해동포주의(이슬람교)와 비폭력(힌두교, 불교)이 기본 전제인 이들 교리를 왜곡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