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흐메트 2세(II. Mehmet, 1432년~1481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결코 사랑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인기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지닌 지성, 에너지, 단호함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그가 한 번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을 포기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과업은 콘스탄티노플 정복이었다.
스티븐 런치만(Sir James Cochran Stevenson Runciman, CH, FBA, 1903.6.7. - 2000.11.1.),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르네상스 시대에 잔인하고 비뚤어진 괴물로 묘사됐던 이 인물은 모순 덩어리였다. 그는 영악하고 용감하고 매우 충동적이었다. 엄청난 속임수를 쓸 수 있었고, 폭군처럼 잔인했으며, 갑작스레 친절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변덕스러워 종잡을 수가 없었으며, 가까운 관계를 맺지 않으려고 하는 양성애자였고, 모욕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바탕이 독실해 사랑을 받게 됐다. 그의 어른스러운 성격의 핵심적인 특징들은 이미 마련돼 있었다. 학자이기도 했던 후대의 폭군, 페르시아의 시와 조경을 좋아한 집착 강한 군사 전략가, 너무도 미신을 좋아해 군사적 결정을 확인하기 위해 궁정 점성술사에게 의존했던 병참 업무 및 실무 계획 전문가, 무슬림이 아닌 신민들에게 관대하고 외국인 무리와 이단 종교 사상가들을 반겼던 이슬람 전사.
로저 크롤리(Roger Crowley, 1951.6.28. -), <비잔티움 제국 최후의 날>
Fatih(정복자)
오스만 제국의 제7대 술탄이자 자칭 로마 제국의 황제. 제국 최대의 정복군주이며 '정복자(Fatih, 파티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또한 오스만 역사상 최초로 카이사르와 칼리프의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몇몇 튀르크계 귀족 가문들이 운영하던 왕국 '오스만 튀르크' 를 다문화, 다민족 전제군주국 '오스만 제국' 으로 발전시킨 인물이다.
2.1. 유년기
무라트 2세가 좋아하지 않던 하렘 후궁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며, 그 때문에 처음에는 부황은 그로 하여금 제위를 잇게 할 생각이 없었다. 5세 때 아마시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아버지 곁을 떠나게 되면서 사실상 버린 자식 취급이었으나 형들이 모두 죽어 제위계승자가 된 이후부터 부랴부랴 제왕 교육을 받게 되었다. 가정교사로는 무라트 2세의 절친한 친구이자 당시 오스만국 대재상을 5명이나 배출한 찬다를르 가문의 할릴 파샤가 임명되었고, 무라트 2세는 아들에게 할릴을 스승님이라 부르게 하였다.
참고로 오스만 제국 초기에는 술탄 계승권자들을 지방의 총독으로 보내는 전통이 있었다. 자세히 설명을 하자면, 이런 식으로 지방의 총독으로 내려간 황자들은 각자의 지방에서 제왕교육을 받는 한편 힘을 쌓아서 자신들의 아버지 즉, 술탄이 사망하면 서로 내전을 벌여서 가장 먼저 수도에 입성하는 쪽이 후임 술탄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현재 술탄이 아들들의 부임지를 재조정하는 등으로 사실상 후계자를 간택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으며, 셀림 1세의 경우에는 황자 시절에 멀찌감치 떨어진 변방으로 나가게 되자 그에 불만을 품고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유년기에 교과서에 한 낙서들이 발견되어 2004년 출판되기도 했다. 자기 서명을 연습한 낙서가 있는걸 봐선 즉위 이후의 것으로 보인다.
2.2. 술탄이 되다
아버지 무라트 2세가 돌연히 은둔생활에 들어가는 바람에 12살 나이로 1444년부터 1446년까지 2년간 임시로 술탄의 자리에 오른 경험이 있다. 당시 메흐메트 2세는 후녀디 야노시가 이끄는 헝가리를 위시한 기독교 연합세력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메흐메트 2세는 갑자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한다!는 개드립을 날렸다. 군대는 이에 반발했고, 군사반란을 막기 위해 할릴 파샤는 공개적으로 무라트 2세의 복귀를 간청해야 했다. 여기서 무라트 2세의 복귀를 청하기 위해 주옥같은 명언을 적은 편지를 보냈으니...
만약 당신이 술탄이시라면, 이 어려운 시기에 당신의 군대를 이끄는 것이 우리 전통에 맞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술탄이라면 그대에게 명하노니 돌아와 나의 군대를 이끌라.
메흐메트 2세는 무라트 2세가 돌아온 뒤 술탄직에서 물러났다가 1451년 무라트 2세가 사망하면서 다시 술탄의 자리에 올랐다.
2.3. 동로마 제국 정복
그의 가장 유명한 업적이라면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며 동로마 제국을 멸한 일이다. 이때 나이 불과 21세.
이스탄불 군사박물관 소재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기록화.
그밖에 2009년 이스탄불에 파노라마 1453이라는 박물관이 새롭게 문 열었는데 이름부터가 1453년 이 정복을 기념하는 박물관이다. 정말 엄청 큰 그림으로 이 전투를 생생하게 벽화로 그렸다.
통칭 3중 성벽으로 유명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성의 공략을 위해 전통적인 방식 외에도 최초로 '우르반의 대포'로 알려진 거포를 비롯한 화기를 통한 공성전에, 산에 통나무를 깐 다음 기름을 칠해 미끄럽게 만들고 사람들이 끌어 육지를 통해 함대를 금각만으로 옮겨 양방향 공격을 가하는 과감무쌍한 전법을 동원, 동시에 후덜덜한 물량을 아낌없이 퍼붓는 오스만 제국 특유의 전법을 동원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도의 대도시를 불과 7주 만에 공략하는 위업을 세우게 된다. 이후 그리스는 400년간 터키의 지배를 받게 되고, 이를 계기로 발칸 반도의 여러 국가들은 오스만의 칼날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 공방전에서 동로마가 서방 의용군을 포함하여 7천 명을 동원했지만, 오스만 군은- 현재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대략 8만의 병력을 동원했다. 목격자들은 최소 10만에서 최대 30만까지 병력을 부풀려 기록했다.
2.4. 정복군주의 위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과 함께 메흐메트 2세는 이곳을 수도로 삼은 뒤, 자신을 카이사르(황제)와 로마의 계승자라 칭하였다. 이를 위해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 약탈을 엄격히 통제하고, 기존에 존재하던 성당 등의 시설물을 성원(모스크)으로 개조하는 동시에 기존 주민들 중 엘리트들의 신앙의 자유를 제한적으로 허용하여 반항을 무마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여, 자신이 무너뜨린 콘스탄티노플을 새로운 대제국의 수도로 다시 재건하는 원대한 작업을 개시하게 된다.
그 뒤 계속된 발칸 반도의 동로마 제후국 정벌로 오스만의 세력은 현재의 세르비아와 보스니아를 합병하여 발칸 반도 서부 깊숙이에 미쳤고 드라큘라 공작으로 유명한 왈라키아 공작 블라드 가시공과 중세 헝가리 최후의 명군인 마티아슈 1세 등의 저항도 있었지만 결국 1462년에 왈라키아 공국을 제후국으로 복속시켰다.
후임 술탄인 셀림 1세(재위 1512~1520), 쉴레이만 1세(재위 1520~1566) 때엔 제국의 영역이 헝가리 전역과 폴란드 남부, 그리고 알제리와 예멘 및 아제르바이잔에까지 이르지만,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패배함으로서 바다에서의 정복 활동은 사실상 끝을 맺었고 1683년의 2차 빈 포위와 그후 1699년까지 이어진 대(大)튀르크 전쟁(Great Turkish War)에서 패하면서 육지에서부터 유럽 지역으로 세를 넓히려는 시도도 막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레판토로부터 백년 전인 메흐메트 2세 때에는, 이런 쇠퇴는 꿈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었다.
그 외에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 이전에 흑해 연안의 제노바 식민지를 평정하며 흑해를 오스만의 세력권으로 만들고 오스만 제국과 마찬가지로 룸 술탄국에서 떨어져나온 여러 튀르크계 공국들을 마지막 하나까지 멸하고 그 과정에서 카라만 공국과 동맹을 맺고 있던 백양 왕조의 군대를 사실상 궤멸시켜 배후지를 안정시켰다. 또 크림 반도의 몽골계 왕조인 크림 칸국을 굴복시켜(1476) 이후의 제후국으로 만들어, 연공을 받는 대신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이후 크림 칸국의 기병대는 몽골의 피를 이어받은 만큼 대단한 활약을 보이며 오스만 제국의 각종 군사 원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대가 되기에 이르렀으며, 이 관계는 이후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으로 관계가 단절될 때까지 이어진다.
군사적 업적들 외에도 정복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한 각종 법률을 마련해 운영하도록 했고, 오스만 제국 건국 이래로의 튀르크계 귀족가문 대신 데브시르메 제도로 징집된 자들을 재상으로 임명함으로써 전제군주체제를 확립했다. 한편 1470년 이후 베네치아 영토에 대한 공세를 시작해 에게 해에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세력을 몰아냈다. 그 결과 오스만제국의 패권은 동지중해까지 확장된다. 베네치아가 이에 대항해 오스만 동부의 강국인 백양 왕조를 끌어들이자 1473년 친히 공격하여 대파하고 동부 방면의 패권을 확립했다. 또 1479년 알바니아 정복을 완료했으며, 이듬해에는 이탈리아 남부의 오트란토에까지 군대를 보내기도 했다. 그가 10년만 더 살았어도 자칫하면 로마가 공격 당했을지도 모른다. 흠좀무.
2.5. 사망
1481년 아시아로 건너가 이집트 원정을 꾀했다고 했는데 너무 무리를 해서였는지 그 해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가 죽자 제위 계승 전쟁에 들어갈 위기에 빠진 오스만 군대는 대부분 제국 영토로 철수했고, 유럽인-특히 이탈리아인들은 성당의 종을 울리고 축제를 열면서 기뻐했다고 한다. 얼마나 메흐메트 2세가 유럽인들에게 공포의 존재로 군림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상기한 기록만 보면 정복전이 승리 일색이지만, 1480년에 이탈리아 공격의 사전작업이었던 로도스 섬 공략을 비롯해 패한 적도 많다. 1456년에는 헝가리의 명장 후녀디 야노시에게 대패하여 라이벌 헝가리가 차지한 베오그라드를 점령하는 데도 실패했으며, 1479년의 브레드필드 전투(또는 케니에르메즈 전투)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 헝가리를 공격했으나 줄줄이 실패했다. 왈라키아 공국도 블라드 가시공에게 유격전술과 기습을 당해 크게 패하고 나서야 물자 공세와 블라드의 동생 라두를 장군으로 보내면서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몰다비아 공국을 공격했다가 슈테판 3세에게 승리는 했으나 큰 타격을 입어 결국 차지하지 못하기도 했다. 알바니아 공략도 10년 이상이나 계속된 알바니아인들의 유격전에 골치를 앓았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워낙에 떠오르는 강국이라서, 결국 저 지역들은 전부 오스만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로도스 섬의 구호기사단은 셀림 1세 시기에 함락되고, 왈라키아 공국은 메흐메트 2세 당대에, 헝가리 왕국은 쉴레이만 1세 때에 함락되면서 오스만 헝가리가 된다. 몰다비아와의 전쟁은 아들 바예지트 2세가 1484년 몰다비아 공국을 복속시키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알바니아의 경우도 스칸데르베그가 사망한 뒤에는 오스만 제국을 막을 상대가 없었다. 간단히 말하면, 메흐메트 2세와 오스만 제국은 당대의 공포로 충분했다. 주변 강국들 역시 그나마 최고 명장 소리 정도 듣는 사람들이 나타나서야 겨우겨우 막아내는 수준이었다.
3. 평가
파티흐의 위엄. 실제 정복한 영토는 손자나 증손자보다는 작으나 후대의 술탄들이 3대륙으로 뻗어나갈 수 있게 확고한 세력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을 것이다.
당시까지 그저 강력한 군대를 기반으로 한 지역형 국가에 불과했던 오스만 제국을 동 지중해 전체의 패권국으로 발돋움하게 한 기틀을 마련한 명군으로서 쉴레이만 1세와 함께 제국의 술탄들 중 가장 유명한 군주이다.
다른 민족에 비해 동방정교회 신자들과 정교문화에 대해 많은 우대를 해줬던 메흐메트 2세는 일반적인 이슬람 군주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문화에 대해 관용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어 이탈리아의 많은 예술가들을 우대하고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도 하였다. 예전에 동로마 황제가 하던 총대주교 임명은 자기가 하고 십자가 휘장도 직접 하사했다. 또한 동방 정교회, 유대교 등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사회 공동체인 밀레트 제도(Millet Sistemi)를 창설하기도 했는데, 이후 이 제도는 오스만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형식상으로나마 존속했다. 여담이지만 위 사진속의 이콘 같은 기법으로 그려진 그림은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직후 친 오스만파 주교였던 옌나디오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임명하는 모습을 담고있다. 동로마 시절의 글씨체로 각각 Ο σουλτανος Μωάνεθος Β' (술탄 메흐메트 2세), Ο πατριάρχης Γεννάδιος Β' ο Σχολάριος (총대주교 옌나디오스 2세 스홀라리오스)라고 쓰여있으며 메흐메트 2세의 손에는 총대주교 임명장이 들려있다.
메흐메트 2세는 26세의 청년으로, 건장하고, 키는 중간보다 크며, 무기에 정통하고, 덕망이 있어 보이기보다는 무섭다. 거의 웃는 일이 없으며, 매우 신중하고, 대단히 너그러우며, 계획을 고집스럽게 추진하고, 일을 할 때는 용감하다. 또한 그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만큼이나 열렬히 명성을 추구한다. 그는 매일 '안코나의 치리아코'라고 불리는 친구와 또 다른 이탈리아인에게 로마와 다른 역사적인 저작들을 읽게끔 했다...그는 튀르크어, 그리스어, 슬라브어 등 3개 국어를 한다...그는 아주 많은 수고를 들여서 이탈리아 지도를 익혔고...교황과 황제의 의자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 그리고 유럽에는 얼마나 많은 나라들이 있는지 공부했다. 그는 국가와 주가 그려진 유럽 지도를 가지고 있었다. 지배하려는 욕구로 가득 찬 메흐메트는 세계 지도와 군사 문제들에 특히 큰 관심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공부했다. 그는 기민하게 상황을 탐구하는 사람이었다. 우리 기독교도들이 다루어야 하는 건 그런 사람이다. 오늘날 그는 말한다. 시대가 변했다고. 그리고 그는 이전 시대에 서구인들이 동방으로 진출했듯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출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말한다. 세상에는 반드시 하나의 제국, 하나의 신앙, 하나의 군주만 존재해야 한다고.
ㅡ 베네치아 공화국 외교관 지아코모 드 랑구시의 보고서에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호쾌한 무인으로서의 성향이 강했던 선제 무라트 2세와는 정반대로 어느 쪽으로나 조금 복잡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듯, 군사와 외교 정책에 있어서도 신의를 지키는 경우는 그 자신에게 이로울 때 뿐이었으며,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사적으로도 방종과 검소의 극단을 달렸다고 하는데, 남색가로 유명한 것도 그 중 하나. 때이른 죽음도 통치로 인한 과로 외에도 그런 극단적인 생활 태도 때문이라는 견해가 많다.
한편 베네치아와 휴전한 뒤 베네치아의 저명한 화가 젠틸레 벨리니(Gentile Bellini)를 초청하였고 자신의 초상화(위의 초상화) 등 궁중 화가 업무를 맡겼다. 이때 베니치아의 화가겸 작가인 카를로 리돌피(Carlo Ridolfi)의 주장에 따르면 하루는 마호메트가 벨리니의 그림중 세례자 요한의 참수 일화를 소재로 한 그의 그림을 보고, 다 좋은데 목을 잘린 모습이 사실과 다르다면서 곧바로 노예 하나를 불러오더니 그의 목을 싹둑(…) 베어 화가의 그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다만 출처가 벨리니 본인이 아니고 미켈란젤로가 거쳐서 말한거라 신빙성이 떨어지고, 예니체리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궁중노예는 그리 함부로 다룰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후 질려버린(…) 벨리니가 베네치아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메흐메트 2세는 아쉬워하며 황금 사슬과 제국의 귀족 작위를 주었다.
4. 트리비아
• 젊은 시절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년 생, 20대~30대 추정)가 메흐메트 2세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갔다가 레오나르도 특유의 질질 늘어지는 제작기간에 질려 도중에 취소되고 돌아갔다는 설화가 있다.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 양성애 성향이 있었다고 하는 썰이 있다.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후 동로마 제국의 재상이었던 루카스 노타라스의 막내 아들 야코보스 노타라스가 미소년이라는 말을 듣고 아들을 하렘에 바치라고 명했는데 노타라스가 이를 거부하자 노타라스와 그의 두 아들을 참수(...) 해버렸다는 일화가 바로 그것. 소년 시절에는 오스만 제국에 볼모로 와 있던 블라드 가시공과 그의 동생 라두를 성희롱했다는 썰도 있다. 이렇게 메흐메트를 양성애자로 묘사하는 기록은 두카스나 라오니코스 할코콘딜리스 등 그리스측 역사가들의 기록에 보이는데, 현대 터키의 역사가인 할릴 이날즉(Halil İnalcık)은 동시대 오스만 제국의 기록 어디를 살펴보아도 황제가 남자를 가까이했다는 기록은 없다며 그리스 측의 기록은 사실무근이라고 강력히 주장한 바가 있다.
• 무술 실력도 꽤 뛰어났던 모양인지, 헝가리의 기사와 일대일 결투를 벌여 죽인 기록이 남아있다. 바로 베오그라드 전투인데 헝가리군이 성문을 열고 돌격하는 바람에 오스만 측의 전열이 무너져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도 퇴각하지 않고 맞서 싸웠던 것으로, 무용에 어지간히 자신감이 있지 않으면 벌이기 힘든 일이다. 단 이 과정에서 화살에 맞고 혼수상태에 빠져서 오히려 오스만군의 붕괴가 가속화되었다.
• 이스탄불 정복 이후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이스탄불 정복 후 10년이 지난 해에 메흐메트 2세는 흐리스토둘로스라는 이름의 그리스인 건축가에게 모스크를 하나 짓되, 돔 크기를 아야소피아보다 더 크게 지을 것을 지시했다. 흐리스토둘로스는 자신이 만든 모형을 보여주면서, "폐하 그렇게 하면 지진으로 돔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메흐메트 2세는 막무가내였고, 흐리스토둘로스는 자기 고집을 꺾지 않은채 아야소피아보다 돔의 크기를 작게해서 모스크를 세웠다. 그러자 메흐메트 2세는 노발대발하여 이 불충한 건축가의 손을 자를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흐리스토둘로스는 자기 주장을 꺾지 않고 증거를 제시하며, 메흐메트 2세의 제안대로 모스크를 만든다면 작은 지진에도 모스크가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고, 졸지에 손을 잃어버린 흐리스토둘로스는 자신이 처하게 된 억울한 상황에 항의하여 메흐메트 2세를 법정에(!) 세우게 된다. 당시 이스탄불의 대법관은 흐즈르 베이(Hızır bey)였다. 흐즈르 베이는 흐리스토둘로스의 고발장과 그가 가져온 증거들을 보고 그의 주장이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도 법정에서 정당한 판결을 내리지 않은 채, 황제 독단적으로 사람의 손을 잘라버렸다는 점을 들어 흐즈르 베이는 메흐메트 2세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샤리아에 따라 메흐메트 2세의 손도 자를 것을 판결한다. 그러자 흐리스토둘로스는 놀라서 재판관 흐즈르 베이에게 간청하여 소를 취하해달라고 요청하는데, 결국 흐즈르 베이는 메흐메트 2세에게 유죄인건 변함이 없지만 손을 자르는 대신 벌금으로 흐리스토둘로스에게 정당한 배상을 할 것을 판결한다. 이후 16-17세기 오스만 제국의 풍물학자이자 여행가인 에블리야 첼레비(Evliya Çelebi)의 기록에 따르면 판결직후, 메흐메트 2세는 칼을 뽑으며 흐즈르 베이에게, "만약 그대가 알라의 법을 무시한채 짐의 손을 자르라고 판결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대의 목을 쳤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흐즈르 베이는 감추어두었던 단검을 꺼내들며, "만약 폐하께서 제 판결을 동의하지 않으셨더라면 저 또한 폐하를 이 칼로 찔렀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상당히 유명한 일화로 이슬람교에서 황제가 되었든 그 누가 되었든 법 앞에서는 평등하다는 교훈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메흐메트 2세도 상당히 대인배였음을 알 수 있다. 여담으로 흐리스토둘로스가 세운 그 모스크는 1766년에 지진으로 무너지고, 현재 그 자리에는 파티흐 모스크 단지(Fatih Külliyesi)가 세워졌으며 메흐메트 2세가 재판을 받았던 그 법정도 2006년에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