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카프 궁전(Palace of Topkapi)
톱카프 궁전은 15세기 중순부터 19세기 중순까지 약 4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군주가 거주한 궁전이다. 이스탄불 구시가지가 있는 반도,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 해, 금각만이 합류하는 지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 중이다. 총 면적은 70만 평이며, 벽 길이만도 5km나 된다. 톱카프 궁전은 유럽의 다른 궁전과는 달리 화려하지 않은 것이 특색이다. 그러나 건축학적인 면에서 관심을 두고 볼 것이 많고, 특히 자기, 무기, 직물, 보석 등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이곳의 전체 규모는 원래 크기보다 상당히 축소된 상태이다. 본래의 규모는 오늘날의 시르케지 철도역과 귈하네 공원을 포함하면서 마르마라 해 방향의 아래쪽까지 분포했다. 비록 구조적으로는 메흐메트 2세 때의 기본 설계를 간직하고 있지만, 불규칙적으로 넓게 퍼져 있는 건축물의 집합한 형태라서 특별한 건축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새롭게 술탄이 될 때마다 모두 필요에 의해서 궁전에 공을 들였고, 대화재 사건이 네 번이나 일어나면서 당시에는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건축적인 조화를 거의 보존하지 못했다. 톱카프 궁전 단지는 비룬(외정)과 엔데룬(내정) 그리고 하렘 세 곳으로 나뉘어 있다. 제각각 안마당이 여러 개 마련되어 있는데, 이 안마당을 연결하여 많은 문을 만들어 복잡하게 조성된 미로가 갖춰져 있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1453년 이후에 최초로 지은 궁전이 있던 곳은 현재의 바예지드 지역이다. 당시 군주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후 현재의 이스탄불 대학교가 있는 자리를 황궁 터로 정하고 궁전을 지었다. 궁전은 세 번째 언덕에 세워졌다. 이 지역에 지은 궁전은 이후에 지은 톱카프 궁전과 구별하고자 구 궁전(舊宮殿)이라는 뜻으로 ‘에스키 사라이(Eski Sarayi)’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술탄이 사용하지 않은 구궁전은 빛이 바랜 하렘의 여인들이 여생을 마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구 궁전을 세우고 몇 년이 지난 후, 동로마 제국의 성곽이 있었던 첫 번째 언덕 북쪽 끝에 새로운 궁전을 지었다. 이 궁전이 바로 톱카프 궁전이다. 톱카프 궁전이 자리한 지역에는 동로마 제국이 세운 건축물이 있었으나, 톱카프 궁전이 들어서면서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톱카프 궁전은 신 궁전(新宮殿)이라는 뜻으로 처음에는 ‘예니 사라이(Yeni Sarayi)’라고 불렸으나, 궁전 입구 양쪽에 대포가 배치된 데 연유하여 톱카프 궁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톱’은 대포라는 뜻이고 ‘카프’는 문이라는 뜻이다. 톱카프 궁전은 19세기 마흐무트 2세 때까지 약 380여 년간 오스만 제국 군주의 정궁이었다. 1475~1478년에 지어진 톱카프 궁전은 1850년대까지 계속 증축되기도 하고 보수되기도 하였다.
톱카프 궁전은 세 개의 문과 그에 딸린 네 개의 넓은 중정(中庭)을 가지고 있다. 궁전 안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은 ‘바브 휘마윤’이라 불리는 황제의 문 또는 술탄의 문이다. 문의 바깥쪽에 새겨진 글은 메흐메트 2세가 이 궁전의 건축을 1478년에 완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제의 문은 메흐메트 2세 이후의 군주들이 손을 많이 대는 바람에 원래의 모양으로부터 많이 변형되었다. 황제의 문을 들어서면 첫 번째 마당인 제1중정이 있는데, 이곳에는 오스만 군주와 궁전을 수비하는 예니체리라고 불리는 근위대가 위치하여 별칭 예니체리 마당이라고도 한다. 일반 백성은 이곳까지만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조정의 관리나 조정에서 일하는 시종들은 일반 백성들이 드나드는 제1중정을 궁전 마당으로 여기지 않았다. 제1중정에는 진료원, 장작 저장소, 제빵소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동로마 제국 때 지은 하기아 이레네 성당과 화폐 제작소 말고는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성당하기아 이레네 성당은 6세기경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건립되었다. 건축 재료와 구조 면에서 볼 때 전형적인 비잔틴 건축물이다.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제국을 정복한 후에도 모스크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건축물의 원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다. 오스만 제국은 하기아 이레네 성당을 전리품과 무기 저장소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1846년에 오스만 제국 최초의 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황제의 문은 대형 버스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큼의 폭이며, 황제의 문에 연결된 중정 안쪽에는 톱카프 궁전 관람을 위한 매표소가 있다.
제1중정을 지나면 ‘바뷔스 쎌람(Bâb-üs Selâm)’ 또는 디완 광장(Divan Meydanı)이라 불리는 두 번째 문인 경의의 문이 있다. 첫 번째 문과 중정은 일반 백성도 드나들 수 있는 곳이지만, 경의의 문부터는 일반 백성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경의의 문 양쪽에는 방추형의 석탑이 세워져 있다. 이 문의 오른쪽 벽에는 사형 집행자의 손과 칼을 씻었다는 우물이 있었다. 그리고 문 옆에는 참수된 사람의 머리를 놓아둔 두 개의 대리석이 있었다고 한다. 경의의 문 뒤에 있는 넓은 마당은 제2중정(II. Avlu)으로 이곳에는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하던 디완 건물과 거대한 황실 주방인 부엌 궁전이 자리하고 있다.
디완 건물은 중정의 왼쪽에, 주방 건물은 오른쪽에 위치한다. 디완은 오늘날의 내각(內閣)을 말하는 것으로, 조정의 주요 업무가 이곳에서 논의되고 결정되었다. 디완 건물을‘쿱베알트’라고 부른다. 콥베는‘돔’이라는 뜻이고, 알트는‘아래’라는 뜻이다. 내각회의는 톱카프 궁전 초기에는 매일 열렸으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줄어들다가 18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일주일에 하루만 열리게 되었다. 디완 회의 초기에는 군주가 직접 회의에 참여하였으나, 얼마 안 있다가 디완 회의는 총리대신이 주재하게 되었다.
부엌 궁전마당 오른쪽에 있는 부엌 궁전은 군주를 비롯해 궁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직분에 따라 열 개의 별도 주방을 갖고 있었다. 하루에 두 번 궁중음식이 준비되었고, 해가 긴 여름철에는 해지고 두 시간 후쯤 군주와 하렘의 황실 가족들에게 음식이 제공되었다. 주방에서 만들어진 음식은 200여 명의 사람이 줄을 서서 접시를 손에서 손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식탁에 올려졌다. 궁전의 주방에서는 주로 양고기를 포함한 육류가 준비되었는데, 하루에 양 200마리가 소비되었다고 한다. 생선은 원하면 요리할 수도 있었으나, 거의 먹지 않았다.
‘바쉬스 싸데(Bâbüssaâde 또는 Bab-üs Saadet)’라 불리는 세 번째 지옥의 문은 군주와 군주의 측근만이 통과할 수 있는 문으로, 이 문 뒤에 있는 제3중정(III. Avlu)에서는 군주의 즉위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이곳에서는 남성출입금지 구역으로 알려진 하렘이 있는데, 하렘 건물에는 약 250개에 이르는 방이 있다. 오스만 제국 전성기에는 쉴레이만 1세 시대에는 하렘에 사는 사람들의 수가 1,000명에 이르렀고, 군주가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는 곳으로 가는 비밀 통로도 만들어졌다. 지복의 문 바로 뒤쪽에는 외국 사절을 접견하는 알현실이 있다.
또한, 이곳에는 오스만 제국 시대의 각종 보석과 보물을 전시한 보석관이 있다. 수없이 많은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가 박힌 선물들이 즐비하다. 성물관(聖物館)에는 1517년 셀림 1세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가져왔다는 무함마드의 수염과 이빨, 그가 들었던 군기, 그의 발자국 주조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집트를 정복한 술탄 셀림 1세는 1516년 8월 칼리파직을 이양받음으로써 이스탄불이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다. 칼리파란 이슬람 세계의 최고 통치자의 칭호인데, 이전에는 바그다드와 카이로가 이슬람 세계를 통치하는 주요 도시였다. 최근에는 이슬람 과학과 기술을 설명한 이슬람 과학관이 개설되었다.
도자기관에는 특히 14~19세기 중국과 일본산 자기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톱카프 궁전은 중국산 자기 1만 2,000점과 일본산 자기 8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중국산 자기는 원, 명, 청 시대의 것으로 청자기와 백자기가 주를 이룬다. 중국산 도자기는 9~10세기경 중동 지역에 수출되기 시작하였는데, 오스만 조정에서는 중국산 자기를 대량 수입하여 즐겨 사용하였다. 일본 자기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에 들여온 것으로 큐슈 지방의 아리타에서 생산된 것인데, 선적한 곳의 이름을 따 붙인 이마리 도자기가 대부분이다. 일본산 자기 중에는 오스만 군주가 특별 주문하여 제작된 것도 있다.
제4중정에는 오스만 조정 근위대의 지휘관과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궁전 학교가 있었다. ‘엔데룬’이라 불리는 궁정 학교는 톱카프 궁전 안에 설립된 관리 양성 교육 기관이었다. 궁전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주로 데브쉬르메 제도에 따라 기독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그리스도인 가정 출신의 젊은이들이었으나 오스만 고위 관리의 자제들도 입학하였다. 그들은 터키어, 아랍어, 페르시아어는 물론 꾸르안, 역사, 수학, 음악 등을 배웠다. 엄격한 체력 단련을 통해 기마술과 무기 다루기에 능했으며, 궁중 내 예의범절도 익혔다. 궁전학교를 졸업하면 무사이면서 학자와 신사의 면모를 겸비하게 되었고, 건전한 무슬림인 동시에 나라에 충성하는 헌신적인 신하가 되었다. 궁정학교 출신들은 주로 오스만 조정의 행정관리로 배치되었고, 그들은 능력과 공적에 따라 고위직으로 승진하였다. / 위키백과
○ 돌마바흐체 궁전(Dolmabahce Palace)
돌마바흐체 궁전의 모델은 베르사유 궁전이다. 1843년 31대째의 술탄인 압둘 메지트가 짓기 시작한 이 건물은 유럽의 바로크 양식과 전통의 오스만 양식을 접목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접목시켰다지만, 방문자들은 유럽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인상을 받는다.
현존하는 궁전 중 가장 화려한 궁전이라는 평을 듣는 이곳을 꾸미기 위해 들어간 금만 해도 14톤. 은은 40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15,000㎡의 면적에는 방 285개, 연회장이 43개, 터키식 욕탕이 6개 있다. 홀은 43개, 화병은 280개, 시계는 156개가 있으며, 크리스탈 촛대 58개와 샹들리에 36개가 찬란하게 그 호화로움을 밝히고 있다. 카펫이나 커튼, 좌석커버 등은 터키제이지만 가구와 샹들리에는 대부분 유럽에서 주문한 것인데, 그중에는 외국 왕실이 보낸 선물도 없지 않다.
그토록 화려한 궁전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대형 연회장인‘황제의 방’은 넓이가 가로세로 40m에 중앙 돔의 높이는 36m에 달한다. 그곳에 걸려 있는 샹들리에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기증한 것으로, 무게가 4.5톤이나 되며 750개의 등이 달려있다 하니 그 사치를 짐작해볼 수 있다.
‘터키의 아버지’ 아타튀르크로 불리는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은 수도를 앙카라로 이전했지만 이스탄불에 머물 때는 돌마바흐체 궁전을 사용했는데, 그가 죽은 1938년 11월 10일 9시 5분을 기념하기 위해 현재 돌마바흐체 궁전 안의 모든 시계는 9시 5분에 멈춰 있다고 한다. / 네이버 캐스트
○ 비잔틴 지하 저수지(Yerebatan Saray)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nici)는 '지하 궁전'이라는 뜻으로, 성소피아 성당 근처에 있는 지하 저수지입니다. 바실리 카 저수지(Basicilica Cistern)이라고 불리우기도 합니다. 이스탄불에는 이러한 저수지들이 여러개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이 곳이 가장 큰 곳입니다. 이 곳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건설을 하였고, 그 후에 유스티아누스 1세가 532년의 니카 반란(Nika riots)후에 보수, 확장하였다고 합니다. 비잔틴 제국 시대에 비상시에 사용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저수지는 길이 143m에 폭이 65m에 달하여, 80,000㎥의 물을 저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저수지는 336개의 대리석 기둥에 의해 지지되고 있습니다. 28개의 기둥이 12열로 4.9m간격으로 나열되어 있고, 높이는 9m에 달합니다. 기둥의 주두는 주로 이오닉양식이거나 코린트양식이고, 소수의 도릭양식도 있습니다. 이 기둥들 중 2개는 메두사의 머리가 기단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1984년 저수지 보수를 하면서 지하에 쌓인 2m 두께의 진흙을 제거하다가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 다른 모양의 기둥들 중에서도 가장 이색적인 것은 거대한 메두사 얼굴이 초석으로 사용되고 있는 기둥. 옆으로 뉘어 있거나 거꾸로 놓여 있는 메두사의 얼굴은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메두사라는 괴물자체가 마주보면 돌이 되는 저주에 걸려있기에 눈길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얼굴을 뒤집어놓은 거라는 얘기도 있고, 건설하던 기독교도들이 이교도를 멸시하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놓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19km 떨어진 벨그라드 숲에서 끌어온 물을 최대한 8만 톤을 채울 수 있는 이 저장고에서 메두사의 얼굴은 가장 낮고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가, 현재는 가장 각광받는 전시물이 되어 있다.
○ 보스포러스 해협(Bosporus Str)
아시아와 유럽은 이스탄불에서 만난다. 하나의 도시는 두 개의 대륙에 걸쳐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이스탄불의 서쪽은 유럽, 동쪽은 아시아이다. 오스만 터키가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계책은 배를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골든혼 해협 쪽으로 갈라타지구의 육로를 통해 넘긴 것이었다. 정복자 메흐메드 2세는 골든혼 해협 입구를 쇠사슬로 막아놓고 아시아 쪽에서 유럽 쪽을 넘보는 군대만 경계하던 비잔틴 제국의 뒤통수를 쳤다. 당시 이미 쇠약해있던 비잔티움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결정적으로 멸망했다. 이렇듯 유럽 쪽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오스만 터키는 두 대륙을 갈라놓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곳을 허가 없이 지나는 배들은 사정없이 공격당했다.
이곳에 처음 바다를 건너는 다리가 건설된 것은 1973년이었다. 두 대륙을 걸어서 왕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보스포루스 대교’라 명명된 이 다리가 만들어진 이후, 두 번째 다리는 1988년에 완성되었는데 ‘제2의 보스포루스 대교’혹은 ‘파티하 술탄 메흐메드 교’라 불린다. 1453년에 비잔틴을 정복했던 메흐메드 2세의 이름이 상징적으로 다리에 붙여진 것이다.
○ 루멜리 성곽(Rumeli Hisari)
이스탄불의 보스포러스 해협을 따라 북쪽 흑해로 올라가다 보면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두 번째 대교인 술탄 마흐멧 대교를 만나게 된다. 이 대교의 유럽쪽 언덕을 보면 해변과 언덕을 연결하는 거대하고 강건해 보이는 한 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 성이 바로 '루멜리 히사르' 성이다. 이 성은 오스만 터키 제국 초기에 건축한 성으로 오스만 제국으로서는 걸림돌이 되어온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기 위해 축조된 것이다.
루멜리 히사르 성은 오스만 터키 제국의 메흐멧 2세에 의해 축조 되었다. 메흐멧 2세는 선왕인 무랏 2세의 왕자로서 오스만 제국 당시 아마시아와 마니사의 총독으로 행정과 군사업무를 철저히 익혔다. 그는 선왕들의 꿈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오스만 제국 주변의 약소국가를 통합하고, 주변 강대국들을 점령하여 오스만 제국을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메흐멧 2세의 소문은 이미 유럽 전역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가 술탄(왕)에 오르자, 비잔틴, 제노아, 헝가리 등지에서 사절을 파견할 정도로 그의 등장은 유럽을 긴장으로 몰아갔다. 그의 우선적인 과제는 비잔틴 제국의 점령이었다.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요새인 콘스탄티노플 점령은 국가의 정책으로 확정되었다. 일부 반대자들도 있었다. 반대자들은 비잔틴에 대한 공격이 교황 및 유럽 국가들을 자극하여 또 다른 십자군 원정을 유도하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유럽 진출을 위해서, 또 비잔틴과 유럽 국가와의 군사적 연계를 단절시키기 위해서는 이미 세력이 약화되어 콘스탄티노플 중심의 한 성곽 도시로 전략해 버린 비잔틴을 완전히 점령해야 할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특히 오스만 제국이 지중해와 유럽으로 향하는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도 콘스탄티노플 점령은 필연적이었다. 여기에 덧붙여서 종교적인 배경도 고려되었다. 즉 이슬람교의 무하메드가 콘스탄티노플의 점령을 당부한 하디스(무하메드 언행록)의 가르침이 있었다.
그때까지 아랍의 이슬람 군대가 7차례에 걸쳐 콘스탄티노플 점령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드디어 오스만 제국이 점령을 위해 마지막 공격을 준비하게 된다. 메흐멧 2세는 바지예트가 축조한 아시아 쪽의 아나돌루 성채에 이어 이 성채의 건너편 유럽 쪽에 루멜리 히사르 성채를 건축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실크로드의 마지막 관문인 보스포러스 통행권을 장악하여 흑해로부터의 위협을 차단하고, 비잔틴 제국에 경제적 압박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루멜리 히사르 성의 축조 소식이 전해지자, 비잔틴 황제 콘스탄틴 팔레오로구스 11세는 사절을 보내어 성채의 축조를 중단할 것을 요청하면서, 그 조건으로 비잔틴에 인질로 있는 오르한 왕자의 인질금을 포기하겠다고 제안하였다. 메흐멧 2세는 이 제안을 거부하고 1452년 7월, 5개월 만에 견고한 지금의 루멜리 히사르 성을 축조하고 대포 등 최신 군사 장비를 배치하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비잔틴도 방어 준비에 나섰다. 성문을 수리하고 콘스탄티노플 성으로 향하는 입구 해안인 골든혼 양쪽을 쇠사슬로 연결하여 선박의 진입을 봉쇄하였다. 그리고 로마 교황과 유럽 각국에 오스만에 대항하기 위한 군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때 제노아로부터 1,500여명의 지원군이 도달했으나 오랜 기간 분열과 내분으로 사기가 저하된 비잔틴 군대가 오스만 제국의 군대를 맞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천년을 지켜온 비잔틴 제국의 수호를 위해 콘스탄티노플 군대는 최선을 다했지만, 루멜리 히사르 성의 축조로 흑해로부터 오는 보급로가 차단됨에 따라 곤궁에 빠졌다. 결국 비잔틴 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긴 제국으로서 기록을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루멜리 히사르 성을 축조하는 데는 1,000여명의 기술자와 2,000여명의 인부가 동원되었다. 이 성은 3개의 탑과 이 탑들을 연결하는 성벽으로 되어있다. 12각형으로 된 할릴파샤 탑은 가장 해안에 가깝게 있다. 오른쪽에 있는 사루자 파샤 탑은 높이가 33미터에 직경이 24미터나 된다. 자아노스 파샤 탑은 왼쪽에 위치해 있으며 바다로부터 높이가 57미터이다.
이 성채의 너비는 남북으로 250미터, 동서로 130미터이다. 이곳에는 지금도 당시의 전투에 사용되었던 대포가 전시되어 있다. 전략적 요새로 오스만에게는 환희의 승리를, 비잔틴에게는 비운의 종말을 안겨다 준 이 성채는 지금은 여름에 터키인들의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 갈라타 탑(Galata Tower)
갈라타 타워는 터키의 이스탄불, 갈라타 지역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타워의 전망대에서는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해협인 보스포러스 해협과 골든혼 그리고 이스탄불 시내 전체를 볼 수 있다. 원래 있었던 타워는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파괴되었고, 1348년에 제노아 자치령에 의해 타워 오브 크라이스트 (그리스도의 탑)라는 이름으로 재건축 되었다.
또한 타워는 오토만 시대에 여러 번 재건축 되었고 화재 및 적의 침입을 관찰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1960년에는 목재로 된 내부를 콘크리트로 바꾸고 일반인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공개했으며 윗층에는 전망대와, 터키의 민속춤과 벨리 댄스를 볼 수 있는 나이트클럽, 현대식 레스토랑, 카페 등이 있다.
타워의 높이는 62.59m이며 꼭대기의 장식물까지 포함하면 66.90m이다. 이것이 건축될 당시에는 그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이 타워는 비잔틴인들에게는 큰 탑(The Great Tower)이라는 뜻의 ‘메가로스 피르고스(Megalos Pyrgos)’로 불리워졌고, 후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 시대인 1638년에 ‘헤자르펜 아흐멧 첼레비’라는 사람이 자신이 만든 날개를 달고 이 타워의 꼭대기에서 보스포러스 해협을 지나 아시아 쪽인 우스크다르 언덕까지 날아가는 신기록을 세워서, 일반인들에게는 그의 이름을 딴 ‘헤자르펜 타워’라고 불리기도 했다. / 네이버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