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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기독교의 역사(history of Christianity)

작성자管韻|작성시간20.12.17|조회수234 목록 댓글 0

01. 기독교의 역사(history of Christianity)

 

 

 

 

 

 

 

 

기독교의 역사(history of Christianity)에는 예수 시대에서부터 오늘날까지 기독교의 형성과 전파,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사건들과 여러 교파로 나뉘어 있는 교회의 역사 등이 포함된다. 기독교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시작되어 시리아, 아시리아, 메소포타미아, 페니키아, 소아시아, 요르단, 이집트와 같은 근동 지방으로 퍼져나갔으며, 4세기 무렵에는 여러 국가의 국교로 자리잡았다. 아르메니아의 아르사시드 왕조에서는 301년에, 캅카스 이베리아는 319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하였고 325년에는 악숨 왕국이, 로마 제국의 콘스탄틴 황제는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고 380년에는 테오도세우스 칙령을 반포하여 사실상 제국의 국교로 선포하였다.

 

그 후 391년에 이교적 행위를 전면 금지, 392년에는 로마제국 전역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였다. 대항해 시대 이후 기독교는 유럽과 근동을 벗어나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다.

 

 

예수가 팔레스타인지역에서 사도와 함께 설교를 하며 군중을 이끌던 때와 예수의 죽음 이후 사도들이 교회를 이끌던 1세기 무렵부터 베드로, 바울과 같은 사도와 선지자들이 회중을 순회하고 다녔다. 따라서 일치된 신학도 없었고 매우 다양한 견해를 갖는 집단들로 나뉘어 있었다. 초기 기독교는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 곳곳으로 전파되었다.

 

사도들이 회중을 이끌었던 시기의 교회를 초대교회(Apostolic Church)라고 한다. 사도들이 부활한 예수의 가르침을 온 세상에 전하라는 대사명을 받았다고 여겨졌고, 이들은 예수의 지시에 따라 성령을 받기까지 10일간 지속적으로 예루살렘에서 기도했다고 하며, 성령을 받은 사건 이후 이들을 중심으로 신자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기독교 교회들에서는 성령강림절(성령 강림 대축일)로 기념하고 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이었고, 자신들이 유대교와 다른 종교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사도행전 10장에 쓰인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였고, 유대인의 선민사상에 부정적이었다. 사도행전 15장에서는 훗날 예루살렘 공의회라고 불리게 된 회의에서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유대교의 율법을 강요할 수는 없다고 결정하면서, 우상 숭배의 금지,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를 먹거나 짐승의 피를 마시지 말것 정도 만을 지키도록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세기에서 3세기에 이르는 시기 기독교와 유대교는 점차 서로 다른 교리와 집단을 갖는 별개의 조직으로 분화되었으며, 마침내 서로를 완전히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는 전파와 함께 박해를 받았다. 사도행전 7장 59절에는 스테파노가 유대교를 비난하였다는 이유로 돌을 던져 죽이는 형벌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12장 2절에는 대 야고보 역시 참수형을 당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로마 제국은 64년부터 기독교를 박해하였는데,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연대기》(Annales)에서, 네로 황제가 로마에 일어난 화제를 기독교인의 탓으로 돌리면서 박해가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네로의 박해는 일시적인 것이었고, 그 후로도 3세기 무렵까지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특별히 엄단하지는 않았다. 이 시기 기독교가 황제 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는 것은 후대에 부풀려진 이야기이다. 3세기 무렵 기독교는 로마 제국 내의 민중들로부터 극심한 공격을 받았는데, 기독교인들이 도시의 수호신에게 경배하지 않는 것을 매우 무례한 행위로 여기거나, 도시에 재앙을 초래하는 무신론적인 태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팽창이 멈추고, 노예제, 빈부 격차 등 여러 사회적 문제가 심화되자 사람들은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초기 기독교는 신 앞에 인간이 평등하다고 가르쳤고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를 통하여 불안한 삶을 살던 민중을 위로하였던 것이다.

 

복음서​

 

예수는 자신의 행적을 글로 남긴 적이 없다. 초기 기독교 시기에 전승되어 온 예수의 행적을 모아 다양한 복음서들이 제작되었다. 성서 연구자들은 기원후 70년 무렵 마르코 복음서가 제일 먼저 만들어지고, 이후에 이를 바탕으로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가 만들어졌다고 추측한다. 이 때문에 이들 세 복음서는 요한 복음서와 달리 서로 비슷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어 공관 복음서라고 불린다.

 

초기 기독교는 특별한 교단이나 교리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관점에서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이 기록되었다.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비교종교학 명예교수 오강남은 공관 복음서와는 달리 영성을 강조한 요한 복음서나 정경으로 채택되지 않은 도마 복음서는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고 본다 복음서들은 당시의 기독교인들이 주로 살았던 근동 일대의 공용어였던 고대 그리스어의 방언의 일종인 코이네(koine, 공동)로 쓰였다. 2세기 중엽까지 비슷했으나 통일되지 않은 목록의 복음서과 다른 신약성서 문헌이 사용되었으나 마르키온의 구약제거와 일부 문헌의 사용 주장이 대두되어 전래되던 문헌 가운데 가장 중요한 7개를 정경으로 인정한 목록을 만들었다. 이 목록을 바탕으로 신약성경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신구약 정경에 어떠한 문헌을 정경으로 수록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구약 부문에서 마르키온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교파마다 의견이 다르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 헬레나는 기독교 신자였으며,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 전날 꾼 꿈의 지시대로 병사의 방패에 카이로를 그린 후 전투에 승리하자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325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열고 그 동안 다양한 사상으로 분화되어 있던 기독교의 교리를 정리하도록 하였다. 이 공의회에서는 단성설을 주장하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니케아 신경을 채택하여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형성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를 통하여 정치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324년에서 330년 사이 로마 제국은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면서 새롭게 도시를 건설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칭하였다. 새로 지어진 건물 가운데에는 교회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신학의 집대성도 함께 이루어졌는데, 아우구스티누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 예루살렘의 키릴로스, 암브로시우스 등의 교부들이 대표적이다.

 

테살로니카 칙령​

 

380년 2월 27일 테오도시우스 1세는 테살로니카 칙령을 선포하고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삼았다.

 

일곱 공의회​

 

325년에 열린 제1차 니케아 공의회부터 787년에 열린 제2차 니케아 공의회까지의 첫 일곱 공의회에서 기독교의 중요 신학적인 문제가 논의되었다. 공의회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주교였는데, 이것은 4세기 이후 기독교가 교회 조직과 전례 등을 정비하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초기의 일곱 공의회 이후 동서 교회의 분열이 일어나 동방 정교회는 제2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에 로마 가톨릭교회가 개최한 공의회를 인정하지 않는다. 일곱 공의회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제1차 니케아 공의회 (325년):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는 영원전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닌 피조물이라는 아리우스주의를 배격하고 니케아 신경을 작성했다. 결론적으로 삼위일체론이 공인되었다.

2.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381년): 니케아 신경을 개정했다.

3. 에페소스 공의회 (431년): 사람으로서의 예수와 신으로서의 예수를 구분한 네스토리안주의를 배격하였다. 특히, 마리아의 위상에 있어서 성모 즉 신성이 있다고 공인하게 되었다.

4. 칼케돈 공의회 (451년): 예수에게는 신성 밖에 없었다는 단성설을 배격하고, 예수는 완전한 하느님이며, 사람이라는 칼케돈 신조를 작성하였다.

5.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553년): 기존 공의회 결정들을 재확인하고 새로운 형태의 아리안주의, 네스토리안주의, 단성설을 정죄하였다.

6.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680-681년): 단의론을 배격하고 그리스도에게 사람과 신으로서의 뜻이 다 있었다고 정하였다. 트룰로 공의회(692년): 제2·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와 관련된 교리가 아닌 구체적인 교회법 102개조 공포하였다.

 

7. 제2차 니케아 공의회 (787년): 성화상에 그려진 성인들에 대해 존경을 표시하는 것을 부활시켰다.

 

고대 후기 기독교의 분화​

 

초기 일곱 번의 공의회 과정을 통해 보편교회주의가 만들어짐에 따라 이들과는 다른 신학을 가져 이단으로 배척된 교파들은 분화되어 서로 독자적인 전파와 발전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가 이단으로 배척된 이후에도, 칼케돈 공의회가 예수의 양성설을 공인하자 단성설을 주창한 콥트 교회, 아비시니아 교회, 야고보 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가톨릭주의와 결별하여 독자적인 교단을 형성하였고, 689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종교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파가 이단으로 배척되자 아시리아 동방교회가 분리되었다. 아시리아 동방교회는 독자적인 선교를 통하여 당나라까지 기독교를 전파하여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중세의 기독교​

 

켈트 성경

중세 초기인 5세기에서 10세기까지 기독교 전파지역은 계속하여 넓어져 갔다. 서유럽과 북유럽에 기독교가 전파된 것도 이 쯤의 일이다.

 

기독교의 서유럽 전파​

 

기독교 전례에 따르면 기원후 423년 성 파트리치오가 아일랜드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한 것으로 전해진다. 5세기 후반에는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북부 등의 서유럽 지역에 있었던 프랑크 왕국은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인 클로비스 1세가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다른 게르만족의 여러 부족들을 정복하면서 기독교도 같이 전파되었다. 앵글로색슨 칠왕국에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600년 경의 일로써 켈트족의 기독교 전파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로마 가톨릭은 598년 아우구스티누스를 초대 캔터베리 대주교로 파견하였다.

 

기독교의 북유럽 전파​

 

820년대에서 830년대 초, 브레멘과 함부르크의 대주교였던 안스가르의 선교 사업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바이킹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다른 지역과 달리 북유럽의 기독교 전파는 비교적 느린 속도로 진행되었지만, 기원후 1,000년 무렵에는 대부분의 지역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기독교의 동유럽 전파​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의 동상

동유럽의 슬라브족에게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9세기 무렵이다. 동방정교회의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형제는 제1차 불가리아 제국과 대모라바 왕국 등의 동유럽 국가를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이들의 선교활동은 동로마 제국 미카엘 3세의 후원을 받아 진행되었다.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는 선교를 위해 옛 교회 슬라브 문자를 만들어 성서의 내용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였다. 이 문자가 키릴 문자의 기원이다.

 

수도원 운동​

 

클리뉘 수도원의 성당

기독교의 전파와 함께 세속에서 독립하여 스스로 노동하며 묵상하는 수도원들이 유럽 곳곳에 들어섰다. 동방 교회에서는 305년에 안토니우스의 수도원이 세워졌고, 서유럽에서도 누르시아의 베네딕토가 530년 몬테카시노에 수도원을 만든 이후 많은 수도원이 세워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도원은 봉건제에 편입되어 그 자체로 영지를 가진 권력 기구로 변해갔다. 각국의 국왕들은 수도원에 봉지를 하사하는 대신 수도원장의 임명권을 행사하여 교회를 자신의 영향 아래 두고자 하였다. 910년 아퀴텐 공 기욤은 클뤼니 수도원을 만들고 이를 베네딕도회의 엄한 계율을 따르는 교황 직속의 수도원으로 삼았다. 클뤼니 수도원은 수도원장을 자율 선거에 의해 추대하였고, 교구 주교로부터도 독립적이었다. 클뤼니 수도원의 성공이후 이를 본딴 수도원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동서 교회의 분열​

 

로마 제국 말기 서쪽의 서방교회인 로마교회와 동쪽의 동방교회인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 이스라엘 교회, 안디옥 교회,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점차 분열의 조짐을 보여왔다. 원래는 로마지역 교회의 대주교인 로마교회 교황은 대주교들에 대한 존칭이었을 뿐인 이 용어를 절대적 의미로 변화시켰다. 로마교회 대주교 자신이 베드로의 후임으로서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의 주교이며, 이는 모든 주교들에 대해 수좌(首座)로서의 권리를 갖는다고 천명하였다. 이와 함께 신학적으로 5세기 무렵 기독교는 대주교들이 이끄는 교구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는 모든 지역의 주교들의 대표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대주교의 이러한 주장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교황 레오 1세는 이 땅에서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대표이기 때문에 교황은 베드로의 직접적인 계승자로서 모든 사도들의 머리라고 선언하고 자신의 관할하에 있던 서유럽과 북유럽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직접 주교를 임명하였다. 동서 교회는 이 때부터 사실상 별개의 교회로 분할되었고, 이전의 대주교에 대한 존칭인 교황은 명목상 명칭에 불과하였던 것을 레오 1세는 서방교회의 실질적인 국가로 대규모 국토와 백성을 거느린 봉건제 황제 자격의 교황이 되었다.

 

레오 1세는 아틸라와 담판을 지어 로마를 지켰고, 이후 반달족의 침입으로부터도 시민의 안전을 지켜 로마의 민중들로부터 지지를 받게 되었다. 서로마가 멸망한 뒤 동로마 제국은 서유럽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은 서유럽의 여러 국가와 민족을 아우를 수 있는 단일한 조직으로 자리를 잡았다. 뿐만아니라 프랑코 왕국의 피핀 3세가 교황령을 기증한 뒤, 교황청은 실제 영토를 가진 국가가 되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교회 조직과 지역으로 나뉘게 된 동서 교회는 점차 서로에 대한 주도권을 잡고자 하였다. 신학적인 문제에서는 삼위일체의 한 축을 이루는 성령에 대해 동방정교회가 381년 독자적인 공의회를 열어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나왔으며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예배를 받고 영광을 받으실 분”이라는 내용을 니케아 신경에 삽입하자, 성령이 성부와 성자 모두에게서 나왔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따르던 로마 가톨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필리오케 문제라고 불린 이 문제는 동서교회 분열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영국의 종교학자 캐런 암스트롱은 필리오케 문제는 서로간에 타협할 수 없는 근본적인 신학적 차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십자군 전쟁을 비롯한 여러 갈등의 증폭때문에 결국 해결이 불가능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867년 비잔틴 황제 미카엘 3세의 섭정이던 바르다스가 포티우스를 콘스탄티노블의 대주교로 임명하였지만, 로마 교황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 포티우스 분란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동서 교회의 분열이 공식적으로 표출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 뒤로 동서 교회는 사실상 별개의 교회로 있는 채 마지 못해 서로를 인정할 뿐이었다. 이후 1054년 동서 교회는 서로를 상호 파문하였다.

 

서임권 투쟁​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에 로마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성직임명권을 놓고 서임권 투쟁을 벌였다. 로마 가톨릭의 성직은 교황이 임명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중세 초기부터 서유럽의 국왕들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주교나 수도원장을 임명하여왔다. 주교와 수도원장은 대성당이나 수도원에 따르는 봉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서임과 동시에 군주의 봉신이 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1075년 그레고리오 개혁을 발표하고, 세속인의 교회 고위직 서임을 더욱 엄격히 규제하며 교구에 대한 모든 권리를 세속의 군주로부터 되찾아 올 것을 천명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오의 개혁에 반대하는 의미로 자신의 가신을 밀라노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이러한 행동에 격분한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였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선제후가 추대한 독일의 군주에 대해 로마 가톨릭의 교황이 축성하여 대관식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의 파문은 사실상 하인리히 4세의 지위에 대한 부정과 같은 의미였다. 신성로마제국 내의 선제후들은 하인리히 4세가 그레고리오 7세에게 파문을 취소해 주도록 간청하라고 주장하며 하인리히에 반기를 들고 새 황제를 뽑을 움직임을 보였다. 1077년 겨울, 하인리히는 알프스의 카노사에서 회개의 뜻으로 거친 옷을 입고 성문 앞에서 2일간 기다리며 선처를 구하여 간신히 파문을 철회받았다. 카노사의 굴욕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성직의 서임권은 교황에게 있다는 것이 확고하게 되었고, 하인리히 4세에 대해 반기를 든 선제후들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은 내전에 빠졌다.

 

1084년 하인리히 4세는 내전에서 승리한 후 대립교황을 세워 그로부터 황제권을 인정받은 뒤 로마를 점령하고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시켜 설욕하였지만, 카노사의 굴욕 이후 200여 년간 로마 가톨릭의 교황은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권위로서 군림하여, “교황은 해, 황제는 달”이라는 말이 나왔다.

 

1122년 교황 갈리스토 2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5세가 보름스 협약을 채결하여 서임권에 대한 타협이 이루어졌다. 국왕은 주교에게 지팡이와 반지를 수여하는 종교적 의식을 포기하는 대신 주교가 통치하는 지역에 대한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는 홀을 하사하기로 한 것이다. 이는 서임권에 대한 교황의 승리로 평가되고 있다.

 

십자군 전쟁​

 

중세 초기 지중해를 둘러싼 유럽과 서아시아, 그리고 북아프리카는 큰 격랑에 놓여 있었다. 이슬람의 등장이후 우마이야 왕조는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삼는 한편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였고, 우마이야 왕조 이후에도 아바스 왕조와 파티마 왕조가 아랍 세계의 맹주로서 자리잡았다. 한편, 동서 교회의 분열 이후 로마 가톨릭은 동방정교회를 해체하여 흡수하고자 하였고, 당시 이슬람교가 기독교에 대해 관용적인 정책을 취하며 성지 순례를 허용하고 있었음에도 성지 탈환을 명목으로 십자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는 명분일 뿐 실재 십자군 전쟁은 참여 세력간의 주도권 확보, 동방 교회에 대한 정복 등 다양한 목적을 위해 이루어졌다. 제4차 십자군은 목표였던 이집트 대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 동로마 제국을 점령하여 라틴 제국을 세웠다.

 

로마 가톨릭은 동로마 제국의 알렉시오스 1세가 파티마 왕조와의 전쟁에 도움을 청하자 이를 명분으로 십자군 전쟁을 시작하였다. 예루살렘 탈환을 목적으로 한 십자군 전쟁 이외에도 알비 십자군이나 북방 십자군과 같이 유럽 내에서 진행된 것도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무력을 사용하여 교회의 우위를 확보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십자군은 성지를 회복한자는 교회의 요청에 서유럽의 많은 세력들이 동참한 것이었으나, 참여한 사람들의 실제 동기는 다양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부유한 동방에 가서 한 몫 잡기를 위해 십자군에 참가하였고, 실제 1096년 기층 민중을 중심으로 결성되어 제일 먼저 출발한 군중 십자군은 “거지 십자군”으로 불렸다.

 

십자군은 예루살렘과 다마스커스, 안티오크 등을 점령하고 십자군 국가를 세우기도 하였으나, 살라딘과 같은 이슬람 군주들에 의해 결국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축출되었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성당 기사단, 몰타 기사단과 같은 기사 집단은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서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군주를 중심으로한 봉건 왕국으로서 성장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과 동방교회의 변화​

 

메흐메트 2세의 입성. 19세기 프랑스 화가 장조세프 벤자민-콘스탕스의 작품

 

라틴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이 후 동로마 제국의 영토는 크고 작은 국가로 분할되었고, 각 국은 저마다 동로마 제국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였다. 이 시기에 동안에도 투르크 세력은 아시아의 옛 로마 영토를 점령해 나갔고, 동유럽에는 몽골 제국의 침입이 있었다. 이 때문에 실제 동로마의 문화와 제도를 이어받아 유지할 수 있었던 국가는 니카이아 제국 정도였다.

 

십자군 전쟁이 끝난 뒤 십자군 국가는 하나 둘 멸망하였으며, 라틴 제국 역시 점차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근에서만 영향력을 유지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1261년 니카이아 제국의 미카엘 8세는 동방정교회 성직자들의 지원을 받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고 동로마제국의 재건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재건된 동로마 제국은 여러모로 취약하였다. 영토 확장을 위해 고용한 용병들은 제국 내 도시와 마을을 약탈하기 일쑤였고, 14세기에 들어서 오스만 제국은 발칸반도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로마 가톨릭과 서부 유럽 국가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이들은 동방 교회가 로마 가톨릭으로 흡수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되었고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도시 이름을 이스탄불로 개명하면서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메흐메트 2세는 꾸란의 가르침에 따라 종교에 대해 관용을 배풀어 이스탄불에 동방정교회 신도뿐만 아니라, 유대교와 로마 가톨릭 신자도 거주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멸망 후 동방정교회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주교의 동방 교회와 모스크바 공국에 의해 분리된 러시아정교회로 분화되었다. 모스크바 공국의 이반 3세는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질녀였던 소피아와 결혼하였는데,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이를 근거로 로마 제국의 정당한 계승자임을 선포하고 모스크바의 정교회 또한 동방정교회의 유일한 계승자임을 주장하였다. 이로써 동방정교회의 여러 교구들은 서로 독자적인 교회로서 남게되었다.

 

르네상스 시기의 기독교​

 

아비뇽 교황청​

 

교황청은 세속의 군주에 대해 교권이 우위를 갖는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고, 교회의 칙령을 통해 서유럽 각국의 정치에 개입하였다. 1077년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로부터 성직자의 임명권이 교황에게 있음을 확인받은 일은 교황의 위상을 확인한 사건이었다. 십자군 전쟁 기간 중에 교황청은 점차 서유럽의 정치·외교에 깊숙히 관여하게 되었다. 특히 알비 십자군은 교황이 카타리파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파문한 이후 유럽 내의 영주를 축출한 사건으로 이 일을 통해 교황의 권위는 크게 강화되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돌아가자 교황의 권위 역시 실추되기 시작하였다.

 

1294년, 프랑스의 필리프 4세와 잉글랜드 왕국의 에드워드 1세가 전쟁을 하면서 성직자들에게 과세하자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이를 금지시키는 칙령을 발표하였고 두 군주는 모두 교황의 칙령이 부당하다고 반발하게 되었다. 필리프 4세는 1302년 프랑스 최초의 삼부회를 열고 교황의 주장에 반대하여 자국의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도록 하였다.

 

프랑스의 삼부회 이후 필리프 4세와 교황 보니파시오 8세 사이의 갈등은 점차 격화되었다. 필리프 4세는 1303년 자신의 부하들과 일부 신학자를 교황에게 보내 교황의 이단 혐의와 성직 매매에 대한 공의회에 출석할 것을 요구하였고, 보니파시오 8세가 이를 거절하자 구금하고 폭행하였다. 보니파시오 8세는 이 일로 사망하였고, 추기경들은 보르도 출신의 교황 클레멘스 5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클레멘스 5세는 로마로 가지 못하고 아비뇽에 머무르게 되었고, 로마 가톨릭은 이후 1377년까지 아비뇽 유수라 불리는 아비뇽 교황청 시기를 맞게 된다.

 

서방 교회의 분열​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귀환하면서, 아비뇽 유수기가 종료되었다. 1378년 그레고리오 11세가 선종하자 로마에서는 교황 우르바노 6세가 새 교황으로 선출된다. 하지만 프랑스의 추기경들은 이는 무효라고 선언하면서, 제네바 출신의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대립교황으로 선출하였다. 이로써 로마와 아비뇽 양 쪽에서 교황이 존재하는 서방 교회의 분열이 1418년까지 이어지게 된다.

 

교회의 분열을 우려한 지식인들은 1409년 피사 공의회를 열어 아비뇽과 로마 양쪽 교황을 모두 인정하지 않고 제3의 교황을 세웠으나, 아비뇽과 로마 양측이 모두 피사 공의회를 부정하여 오히려 세 명의 교황이 난립하는 사태를 빚기도 하였다.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가 콘스탄츠 공의회를 열어 세 명의 교황을 모두 폐위하고 교황 마르티노 5세를 새로운 교황으로 추대하여 서방 교회의 분열은 끝나게 되었지만, 교황의 권위는 전보다 크게 실추되고 말았다.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년경 ~ 1384년)는 영국의 기독교 신학자이며 종교개혁가이다.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374년 교황이 납세 문제로 영국왕 에드워드 3세를 불러들였을 때 위클리프도 사절단으로 따라갔다. 그 후 교구장이 되어 로마 교황청의 부패를 탄핵하기 시작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로부터 이단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나, 계속해서 교황의 권력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에 공격을 가하였다. 후에 종교 개혁 운동의 여러 원리는 모두 그의 교설 가운데서 싹텄다고 여겨지기도 하며 위클리프의 교설은 롤라드 즉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각지에 퍼졌다. 민중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라틴어로 된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마침내 1382년에 완성하였다. 순교자 윌리암 틴데일에게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화체설을 반대하고(transubstantiation), 수도원제도를 비판하고 교황의 권위를 반대하였다. 얀 후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얀 후스(Jan Hus, 1372년? ~ 1415년 7월 6일)는 체코 프리하의 기독교 신학자이며 종교개혁가이다. 그는 존 위클리프의 영향으로 성서를 믿음의 유일한 권위로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 지도자들의 부패를 비판하다가 1411년 대립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파문당했다.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1415년 화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그가 화형당한 이후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보헤미안 공동체라는 공동체를 만들고, 그의 주장은 마르틴 루터 등 알프스 이북의 종교개혁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현재에는 18세기 이후에 설립된 모라비아 교회 혹은 체코 개신교라는 명칭으로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인문주의​

 

초기 르네상스 시기 교황청은 사실상 독자적인 영토를 지닌 세속 국가이면서 동시에 다른 군주들의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무소불위의 권위였다. 게다가 실재 교회의 운영은 성직의 매매가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교황이 자신의 사생아를 조카라 부르며 요직에 앉히는 네포티즘이 횡횡하는 등 부패가 만연하였다.

 

르네상스 인문주의 시기의 학자들은 교회의 타락에 대해 비판하였다.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과 같은 저술을 통해 당시 로마 가톨릭 교황청의 오만과 어리석음을 질타하였고, 존 위클리프는 성서의 참 뜻을 대중이 알아야 한다고 여겨 라틴어로 된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였다. 보헤미아 왕국의 얀 후스는 존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성서를 기독교 믿음의 유일한 권위로 인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였다. 후스는 지기스문트의 신변 보장 약속을 받고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하였으나 이단으로 몰려 화형에 처해졌다. 로마 가톨릭은 인문주의 학자들의 이러한 비판을 수용하지 않았고 탄압하였지만, 이들의 사상은 큰 호응을 얻어 종교개혁에 영향을 주었다.

 

프로테스탄트의 대두​

 

16세기에 들어 로마 가톨릭이 신봉되던 서유럽과 북유럽에서 여러 개신교들이 세워지는 종교 개혁이 있었다.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여 새로운 기독교를 세운 이유는 각 지역과 교회마다 달랐지만, 로마 가톨릭이 부정 부패에 대한 비판을 탄압하여 자정 능력을 상실하였고, 로마 교황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각 국 군주의 불만이 쌓여 있었다는 것을 공통점으로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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