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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국강병(富國强兵)만이 살길이다-법가(法家)

작성자管韻|작성시간20.12.31|조회수176 목록 댓글 0

부국강병(富國强兵)만이 살길이다-법가(法家)

 

 

 

 

 

춘추전국 시대의 정치ㆍ사회적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서 유가는 인의도덕을, 도가는 무위자연을, 묵가는 겸애절용을 제창했으나, 세상은 자꾸 어지러워져 갔다. 여기에서 실제 나라를 통치하는 면에 주목하여 철학을 펴고자 한 학파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법가(法家)다. 이들의 특징은 오직 정치사상에만 집중하되 모든 이론을 군주의 관점에서 펼친다는 점에 있다. 법가의 직업은 대부분 군주의 참모들이었고, 따라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나라를 부하게 하며 군대를 강화시키는 일(富國强兵)이었다. 그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극단적인 수단도 가리지 않았는데, 맹자가 공격한 패도정치(覇道政治)가 오히려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정치였다.

 

관포지교, 관중(管仲), ?~기원전 645

 

관중은 어려서부터 곤란한 환경 속에서 자랐고, 거의 반평생을 좌절 속에서 보냈다. 이러한 그의 신세를 두고,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였다.

 

“하늘이 장차 이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려주고자 하면, 먼저 반드시 그 마음을 괴롭히고, 뼛골을 수고롭게 하며, 배를 곯리고, 몸을 텅 비게 하여 행위를 어지럽히고, 심성을 억눌러 불가능한 일을 더욱 불가능하게 만든다.”

 

하는 일마다 실패하여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몰린 관중에게 그나마 한 줄기 서광이 비치니 그가 바로 포숙(鮑叔)이다. 만일 그가 관포지교(管鮑之交)로 널리 알려져 있는 단 한 친구 포숙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벼슬이나 공로는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생활마저 버텨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관중은 어려서부터 포숙과 친했다. 포숙은 그를 매우 잘 이해해줬을 뿐만 아니라, 아끼고 사랑하며 나아가 존경하기까지 했다. 일찍이 둘은 남양에서 장사를 하여 목돈을 벌었다. 마땅히 똑같이 나눠가져야 하지만, 포숙은 관중이 자기보다 형편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게 더 많은 몫을 주었다. 물론 관중 역시 포숙을 위해 여러 차례 일을 도모했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하는 일마다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럴 때마다 포숙은 “자네에게 운이 없어서 그런 것이지,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닐세.”라고 위로하곤 했다.

 

또 관중은 세 차례 벼슬을 했으나 모두 좌천되다시피 했고, 전쟁에 세 차례 참가했으나 모두 패배해 도망쳐야 했다. 이런 치욕적인 일로 인해 그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거의 버림받다시피 했다. 그러나 포숙만은 그의 가슴속에 품은 큰 뜻과 웅대한 포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위로하며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이처럼 극진한 우정에 대해 관중은 이후 이렇게 회고하며 감탄했다.

 

“일찍이 내가 가난할 적에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한 적이 있다.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내가 몫을 더 많이 가졌지만, 포숙은 나를 욕심 많다고 비난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언젠가는 내가 어떤 일을 하다가 실패해 매우 어렵게 되었는데, 포숙은 나를 어리석다고 비난하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 일이 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세 번 벼슬길에 나갔다가 세 번 모두 임금에게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지만, 포숙은 나를 무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시대적 운을 만나지 못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세 번을 싸워 세 번 모두 패하여 달아났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나에게 늙으신 어머니가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나를 낳아준 이는 비록 부모지만, 나를 진정으로 알아주는 이는 포숙이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이런 친구를 한 사람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그 자체로서 대단한 행운이라 해야 할 것이다.

 

비록 작은 일에는 곳곳에서 실패했을망정, 큰일에 대해서 관중은 날카로운 통찰력과 깊은 책략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당시 제나라의 양공(襄公)이 방약무도하게 행동하자 “장차 언젠가 이 나라에 큰 난리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예측하고는, 포숙과 함께 뒷날을 도모하고자 했다. 즉 두 사람은 공자(公子) 규(糾)와 소백(小白)을 따로따로 받들어 모시고, 나라 밖으로 피난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그 뒤 양공이 죽임을 당하고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지면서 “새로운 임금을 모시자!”라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이때 두 공자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귀국했는데, 그때부터 서로 왕위 자리를 놓고 다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에 관중은 규 공자 편에 서서 군대를 이끌고 전격적으로 소백 공자를 공격했다. 드디어 관중의 화살이 소백을 겨냥해 힘차게 날아갔다.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소백의 혁대를 맞추게 되었고, 이로써 소백은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어렵사리 위기를 벗어났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전쟁에서 포숙 쪽의 소백 공자가 승리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그가 바로 제나라의 환공이다.

 

환공은 그 즉시 정치적 라이벌인 규를 죽이고, 관중을 감옥에 처넣었다. 그러고는 지금까지 자기를 도운 포숙을 재상(宰相) 자리에 앉히려 했다. 누가 봐도 이는 당연한 처사였다. 그러나 포숙은 이렇게 간청하기 시작했다.

 

“비록 적의 편에 서서 이번 전쟁에서 패하긴 했지만, 관중이야말로 뛰어난 재주를 지닌 인물입니다. 제발 왕께서는 나라의 앞날을 위해 이번 일을 참으셔야 합니다. 화살 하나 때문에 맺어진 원수의 악감정을 씻어버리시고, 그를 재상으로 등용해주십시오.”

 

결국 포숙의 도움으로 관중은 오히려 재상이 되었고, 이후 관중은 사십여 년 동안이나 환공을 극진히 도와 그가 대군주로 설 수 있도록 했다. 말하자면, 관중의 보좌 덕택에 환공은 제나라의 군주가 된 지 7년 만에 이름뿐인 주나라 왕실을 대신하여 중국 안에 있는 모든 제후들을 실질적으로 통솔하는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늙은 말과 개미에게서 배우다

어느 해 봄, 관중과 습붕(濕朋)이 환공을 따라 고죽국 정벌에 나섰을 때의 일이다. 질질 끌던 전쟁은 겨울이 되어서야 겨우 끝났다. 그런데 돌아가는 길에 큰 군대는 사막에서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그때 관중이 말했다.

 

“늙은 말은 지혜가 많은 동물입니다. 늙은 말을 앞장세우십시오.”

 

그래서 환공은 늙은 말 몇 필을 앞세우고 귀로에 올랐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 보니 이번에는 황량한 산이 눈앞에 나타났다. 산에 나무가 없어서 물도 나지 않았다. 여러 날이 지나도록 사람과 말이 마실 만한 물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병사들은 목이 말라 한 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때 습붕이 환공에게 말했다.

 

“개미의 경우 겨울에는 양달에 언덕을 쌓고, 여름에는 응달에 언덕을 쌓습니다. 그리고 개미의 굴은 언제나 물길 위에 있는 법입니다.”

 

 

그 말에 개미굴을 파보았더니 정말로 물이 솟아나는 것이었다. 동물이나 하찮은 미물들의 살아가는 방법에서 지혜를 배울 줄 아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다.

 

어떻든 관중은 포숙의 도움으로 어려운 나날을 극복하고 왕을 잘 모심으로써 후대 사람들의 찬사를 들을 수 있었다.

 

원래 환공의 경우, 자신의 힘으로 천하의 패자(覇者)9)가 될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당시 중국의 거의 모든 영토에 해당하는 지역을 다스리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관중의 덕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마천이 쓴 《사기》에도 “환공이 제후를 호령하여 천하의 도를 바로잡은 것은 관중의 계략에 의한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올 정도다.

 

사람은 무엇으로 평가되는가

관중의 사람됨이나 사상에 대해서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지지 않았던 공자마저도 그가 정치적으로 이룩한 업적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논어》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자공이 공자에게 말하기를, ‘관중은 인의(仁義)가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모시던 군주를 위해 순사(殉死)10)하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자기의 군주를 죽인 환공을 받들어 모시지 않았습니까?’ 했다. 그러자 공자는 ‘관중은 환공을 도와 제후들을 지도하고 천하의 평화를 유지하게 했다. 우리 중국 백성들은 지금도 그 은혜를 입고 있다. 만일 관중이 없었다면, 그 옛날 우리 중국은 오랑캐에게 점령되어 지금쯤 아마 난발(亂髮)에 오랑캐 풍속을 강요당하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답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과연 “사람이 무엇으로 평가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맞닥뜨리게 된다. 사람은 도덕성으로 평가되어야 할까, 아니면 그가 이룬 업적으로 평가되어야 할까?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던 관중이 드디어 병으로 쓰러졌다. 환공 41년 때의 일이다. 이에 환공이 급히 문병을 갔는데, 이 자리에서도 그는 관중과 나랏일을 상의하고자 했다.

 

“만일 그대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장차 누구를 재상으로 삼는 것이 좋겠소?”

 

“그것은 폐하께서 더 잘 아실 줄 아옵니다만···.”

 

그러자 환공이 미리 마음속에 점찍어둔 사람의 이름을 댔다.

 

“역아(易牙)가 어떻겠소?”

 

역아라는 사람은 원래 궁중에 머물며 환공에게 바칠 음식을 요리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환공이 사람 고기를 먹어본 일이 없다고 말하자, 끔찍하게도 자기 아들을 죽여 국을 끓인 다음, 환공에게 바쳤던 인물이다. 관중은 당연히 그를 반대했다.

 

“폐하! 그건 안 될 일이옵니다. 역아란 자는 자기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폐하께 아첨한 인물이 아닙니까? 그것은 인륜을 저버린 행동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재상으로 삼으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이 말에 환공은 또 다른 인물의 이름을 꺼냈다.

 

“그럼 개방(開方)은 어떻소?”

 

“개방이란 자는 원래 위나라 공자면서도 자기 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가족을 버렸지 않습니까? 이는 인간으로서 도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을 줄 아옵니다.”

 

남자의 민감한 부위를 잘라내는 일이 치욕적이었을 것 같으나 최고 권력에 대한 욕망은 그렇게 간단히만 설명할 수는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수조는 어떻겠소?”

 

수조는 호색가였던 환공의 마음을 얻기 위해 스스로 거세하여 후궁의 환관(宦官)이 되었던 인물이다.

 

“수조는 스스로 거세하여 폐하께 아부한 인물입니다. 이 또한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못 됩니다. 그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드디어 관중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환공은 관중의 충고를 무시한 채 그 세 사람을 높은 자리에 등용했으며, 결국 그들 셋은 자기들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렀다. 임금을 무시하고 백성을 깔아뭉개며 자기 자신들의 잇속만을 챙기다 보니, 나라의 기강은 어지러워지고 사회는 혼란스러워져만 갔다.

 

어느 시대나 충신과 간신은 있게 마련이고, 어느 사회나 유익을 주는 자와 해를 끼치는 자가 나타나기 일쑤며, 어느 집안이나 효자와 불효자가 태어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으로 그의 사람됨을 판단할 수 있을까? 모름지기 지도자라면 사람의 중심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의 타고난 성품을 꿰뚫어볼 줄 아는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을 제대로 판단할 줄 알았던 명재상 관중이 죽자, 환공은 급속히 총기(聰氣)를 잃어갔으며, 이에 따라 제나라의 국력도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환공은 관중이 죽은 지 2년 만에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자 그의 아들들인 다섯 명의 공자(公子)가 왕위 계승권을 놓고 서로 치고 박고 싸우기 시작했다. 싸움에 눈이 벌게진 공자들은 아버지의 시체를 67일 동안이나 내버려두었고, 이러한 모습을 《사기》는 “구더기가 우글거려 시체를 문밖으로 팽개쳤다.”라고 기록했다.

 

관중은 나라의 전매사업인 어업과 염업을 통해 큰 이익을 얻게 하고, 그 이익으로 부국강병을 꾀했을 뿐만 아니라 “왕을 받들어 오랑캐를 쳐부수자(尊王攘夷)!”라는 구호를 높이 들어 군주인 환공의 위엄을 세우고자 했다. 당시 중국은 주나라가 수도를 뤄양으로 옮긴 후에 점점 쇠퇴함으로써 암흑과 같은 혼란기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관중의 정치 역량에 힘입어 민족끼리의 전쟁은 그쳐갔고, 오히려 서로 힘을 합쳐 야만족의 침입을 공동으로 막아내기에 이르렀다.

 

관중은 또한 “백성이란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衣食)이 족해야 영욕(榮辱)을 안다.”라고 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도 빈틈이 없도록 했다. 말하자면 대외적인 외교나 국방이든 내적으로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리는 데 있어서든 모든 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상 땅에 봉해진 공손앙

상앙(商鞅), ?~기원전 338

 

관중의 사상에 입각하여 준법정신을 강조한 상앙은 법가의 계통을 잇는 전국 시대의 정치가다. 본래 이름이 공손앙이었던 상앙은 위나라 왕의 첩에게서 태어났다. 그가 나중에 진나라에 등용되어 상(商)이라는 곳에 봉해졌기 때문에, 이후 상앙이라 불리게 되었다.

 

처음에 그는 위나라의 재상 공숙좌(公叔座)의 가신(家臣)으로 머물러 있었는데, 좀처럼 벼슬길이 열리지 않았다. 이에 공손앙의 뛰어난 재능을 잘 알고 있는 공숙좌는 그를 혜왕에게 천거했다. 하지만 혜왕은 그를 중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공숙좌는 죽기 얼마 전, 병이 들어 누운 자리에서 혜왕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소신이 죽거든 제발 공손앙을 등용하십시오. 만일 정히 등용하지 않으시려거든, 그를 차라리 죽여 없애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왕에게 한 말을 공손앙에게 그대로 전하고는, 빨리 도망치라고 다그쳤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은 공손앙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르신의 강력한 천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중용하지 않은 사람이 어찌 어르신의 간언(諫言)을 듣고 저를 죽이겠습니까?”

 

과연 그의 말대로 혜왕은 공손앙을 죽이지 않았는데, 그에게는 놀라우리만치 두둑한 배짱과 더불어 사람을 보는 남다른 지혜까지 갖췄다 해야 할 것이다.

 

얼마 후, 공손앙은 위나라에서 진나라로 건너갔다. 당시 진나라는 국력을 잃은 채 이웃나라에게 오랑캐로 배척당하는, 아주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에 진나라의 임금 효공(孝公)은 마침 과거의 위대했던 전성시대를 다시 실현해보기 위해 널리 인재를 구하고 있었다. 이때 공손앙이 효공에게 다가가 이렇게 건의했다.

 

“진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먼저 낡은 법률과 제도부터 개혁해야 합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대 의견들이 있었지만, 효공은 공손앙의 주장에 찬성했다. 그래서 그를 좌서장(左庶長)으로 삼아 법률 및 제도에 대한 개정 법안을 만들게 한 다음, 드디어 정치 개혁에 착수했다. 이때 공손앙이 만든 법의 내용은 엄벌주의, 연좌제(連坐制), 밀고(密告)의 장려, 신상필벌(信賞必罰) 등 법률지상주의였다. 모든 사항을 법으로 세밀하게 규정하여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에 이르기까지 법률의 적용을 받게 했던 것이다.

 

장대를 옮긴 자에게 황금을 주겠노라

법률을 만든 공손앙은 그것을 널리 발표하기 전에 우선 백성에게 ‘법령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정부의 굳센 의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도의 남쪽 문에 석 자 길이나 되는 높은 장대를 세우고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이 장대를 북문으로 옮기는 자에게는 황금 열 덩이를 상으로 주겠노라!”

 

그러나 백성들은 이 황당한 말을 얼토당토않다 여겼으며, 아무도 옮기는 자가 없었다. 혹시 달려들었다가 뜻밖의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 서로 눈치만 보았다. 그러자 공손앙은 상금을 황금 오십 덩이로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한 어떤 사람이 큰 용기를 내더니 장대를 북문으로 옮겨버렸다. 이때 공손앙은 그 자리에서 황금 오십 덩이를 상으로 주고는, ‘나라가 백성을 결코 속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었다.

 

상앙의 극(戟)

 

갈고리 모양의 무기를 극이라 한다. 상앙이 제조한 것이며, 창과 흡사한 형태다. 날이 위치한 부분은 길고 위쪽으로 약간 구부러졌으며, 위아래에 날이 있고 가운데 부분이 불룩하게 솟아 있다.

 

 

그 후 새로 바뀐 법률을 발표했다. 처음에는 제법 법이 지켜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새로운 법이 시행된 지 겨우 일 년이 지나자, 수많은 사람들이 법률의 불편을 호소해왔다. 그러다가 태자(太子)가 법률을 위반하게 되었다. 이에 공손앙은 “나라에 법률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까닭은 윗사람들부터 법을 어기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며 태자를 법대로 처벌하려 했다.

 

그러나 태자는 임금의 뒤를 이을 사람인지라, 관례상 벌을 가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결국 태자를 대신해 그의 후견인인 공자 건(虔)을 처벌하고, 또 그의 스승인 공손가(公孫賈)에게는 얼굴을 불로 지지는 형벌을 내렸는데, 그때부터 진나라 사람들은 모두 벌벌 떨며 법령에 따르게 되었다.

 

바야흐로 새로운 법령이 시행된 지 십 년이 지나자, 진나라는 점점 질서가 잡혀갔다. 길에서 남의 물건을 주워 가져가는 사람도 없었고, 산에서 땔감을 베어 도둑질해가는 사람도 없어졌으며, 개인끼리의 싸움은 되도록 서로 피하되 나라를 위해 싸우는 전쟁에서는 모두 용감했다. 그렇게 해서 전국 방방곡곡이 잘 다스려졌다.

 

공손앙은 법에 반대하는 사람은 물론, 심지어 법을 찬양하는 사람마저 처벌을 가함으로써 법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금지시켰다. 그저 아무 소리 말고 무조건 따라오라는 식이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게 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게 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게 한 채 그저 숨만 쉬며 복종하기를 강요하는 체제였다.

 

나라가 부유해지고 군대가 강해질 즈음, 공손앙이 효공에게 건의했다.

 

“우리 진나라와 위나라는 서로 불편한 사이입니다. 결코 함께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직 먹느냐 먹히느냐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우리가 먹히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나라의 힘이 모아진 지금이야말로 위나라를 공격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효공은 이러한 공손앙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즉시 그를 장군으로 삼아 위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이에 위나라는 공자 양(良)을 장군으로 세워 진나라에 맞섰다. 양쪽 군대가 서로 마주 보고 대치하자, 공손앙은 사람을 통해 양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내가 옛날 위나라에 있을 때 당신과 서로 친하게 지내던 사이인데, 이제 모두 두 나라의 장군이 되어 싸우게 되었구려. 그러나 옛정을 생각하면 차마 서로 공격하지 못할 처지가 아니오? 그래서 당신과 내가 서로 만나 화친의 조약을 맺고 기분 좋게 술을 마신 다음, 양쪽의 군사를 모두 거둠으로써 두 나라가 편안하게 지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오.”

 

양은 공손앙의 말이 그럴듯하다 여겨 이에 찬성하고, 서로 만나 주연(酒宴)을 열기로 했다. 그러나 공손앙은 그 자리에 군사를 숨겨놓고 있다가 양을 사로잡아버렸다. 그러고 나서 위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위나라 왕은 다음과 같이 탄식해 마지않았다.

 

“아! 내가 애초에 공숙좌의 의견을 듣지 않은 것이 한스럽구나!”

 

당시 공숙좌는 공손앙을 중용(重用)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이라고 건의했는데, 혜왕은 이 말을 비웃고 듣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공손앙은 위나라를 격파한 공로에 의해 상(商) 땅에 봉해졌는데, 이때부터 그는 상앙 또는 상군(商君)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태자를 대신하여 벌을 받았던 후견인 공자 건이 다시 법을 어기게 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의 코를 베어내는 형벌을 가했으니, 그는 집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나아가 2차로 시행된 개혁에서는 부자와 형제가 한방에서 기거하는 것마저 금했으니, 이것은 인간성에 도전하는 잔인하고 악독한 법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상앙이 재상으로 있은 지 십여 년 동안에 그를 원망하는 사람은 점점 늘어만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앙이 오랫동안 재상으로 머무를 수 있었던 것은 그에 대한 효공의 신임이 두텁기 때문이었다. 이 말은 효공이 죽고 나면 그 역시 실각(失脚)하리라는 것이 너무나 뻔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우연치 않게도 효공이 죽기 다섯 달 전, 조량(趙良)이란 사람이 상앙을 만났다. 그는 자신이 바른 말을 하더라도 문책(問責)하지 않겠다는 상앙의 다짐을 받고 나서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제가 생각건대 상군(상앙)의 위태로움이 아침이슬과도 같은데, 오히려 수명을 더 늘리려고만 하시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차라리 봉지(封地)로 받은 상(商) 땅의 열다섯 고을을 나라에 반납하고 시골로 돌아가 농사를 지으시는 것이 상책인가 하옵니다.”

 

조량의 말뜻은 ‘내가 객관적으로 보건대, 현재 당신의 목숨이 매우 위태로우니 나라로부터 받은 땅을 깨끗이 반납하고 농촌으로 돌아가 농사나 지으며 목숨을 보전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권세에 한껏 교만해진 상앙이 이 말을 들을 리 없었다. 그러고 나서 겨우 다섯 달 만에 효공이 죽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진나라의 혜왕이었다.

 

상앙으로부터 너무나 혹독한 처벌을 받은 적 있는 공자 건과 그 무리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모름지기 신하 된 자의 권력이 너무 크면 나라가 위태롭다고 했습니다. 지금 모든 백성들은 상앙의 법에 따라 나라가 다스려진다고 말합니다. 더욱이 그의 봉읍이 열다섯 개에 이르니, 그 권력이 막대해 후일 언젠가는 반드시 모반(謀叛)을 일으키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태자 시절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물어 스승의 코를 베어버린 상앙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졌을 리 없는 혜왕이었는데, ‘모반’이란 말까지 나오니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를 관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그러나 상앙이 사직하고 상읍으로 돌아가는데 그의 행렬은 제후에 못지않으리만치 화려했고, 아직도 상앙의 세력을 두려워한 대신들이 그를 전송하기 위해 나가 있는 통에 조정이 텅 비다시피 했다. 혜왕은 이 기회에 아예 상앙을 제거해버려야겠다고 결심하고, 군대를 보내 그를 체포하도록 했다.

 

이 같은 사실을 전해 들은 상앙은 급한 마음으로 도망가다가 관하(關下) 지방의 객사(客舍)에 도착하여 하룻밤 자고 가기를 청했다. 그러나 객사의 관리들은 그가 상앙임을 알아채지 못하고 단칼에 거절했다.

 

“상앙이 제정한 법률에 보면, 여행권이 없는 자를 잠재우면 벌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상앙은 속으로 탄식했다.

 

‘아, 내가 만든 법률의 폐단이 이 지경까지 이른 줄 미처 몰랐구나!’

 

자신이 만든 법률에 의해 죽다

상앙은 그 길로 위나라에 갔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은 상앙이 자기 나라의 군사를 쳐부순 데 대해 원망하고 있던 터라, 그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진나라로 추방하고 말았다. 다시 진나라로 쫓겨난 상앙은 상 땅으로 달아나, 그를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상 땅의 군사를 동원하여 북쪽의 정나라를 공격했다. 이 와중에 진나라가 군대를 출동시켜 상앙을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혜왕은 상앙을 ‘두 대의 우마차에 나누어 묶어놓고 각각 반대 방향으로 말을 몰아 몸을 찢어 죽이는’, 이른바 차열(車裂)이라는 무시무시한 형벌로 처형하고는, 그 시신을 여러 사람에게 돌리면서 보여주었다. 또 상앙의 일가족까지 모두 몰살시키고 말았다. 사람들은 상앙에 대해 ‘자신이 만든 법률에 의해 죽은 자’라고 놀리며 조롱했다.

 

성경에도 “심은 대로 거둔다.”라는 말이 있지만,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선을 심으면 선이 나고, 악을 심으면 악이 난다. 상앙이 나라의 기강을 세우고 법이 지켜지도록 시행한 일이야 나무랄 데 없으나, 인간성에 어긋나는 일을 강요하고 잔인한 형벌을 가하는 일은 피했어야 한다.

 

한편 진나라는 상앙이 쌓아올린 부국강병의 기반 위에서 더욱 강성해졌다. 상앙은 비록 비참하게 죽었으나, 그가 새로 고쳐 제정해놓은 법과 제도는 결국 나중에 진나라의 시황제에게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국가를 세우게 한 힘의 원천이 되었다.

 

그밖에 법가로는 정(鄭)나라의 신불해(申不害)와 직하의 신도(愼到)가 있다. 보통 법가의 3파라면 신불해의 술(術)과 신도의 세(勢), 그리고 상앙의 법(法)을 든다. 신불해는 한나라 소후(昭候)의 재상으로서 제나라와 초나라 등의 강대국 사이에서 한나라의 힘을 팽팽하게 유지하도록 했다. 그러나 법치상에서는 별로 큰 공을 세우지 못했다. 그가 주장하는 ‘술’이란 임금이 신하를 조종하는 데 반드시 음모와 권모술수와 계산적인 생각이 있어야 하며, 또한 변하지 않는 얼굴빛과 근엄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주장 등을 담고 있다.

 

한편 신도가 주장하는 ‘세’란 군주가 권위를 갖고 백성들을 다스림으로써 가히 공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기지거기(棄知去己)라고 하는 도가 사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결국 법가를 집대성한 인물은 한비자라고 할 수 있다.

 

친구의 손에 죽다, 한비자

 

한비(韓非), 기원전 280?~기원전 233

 

전국 시대 말기의 법치주의자인 한비는 한나라에서 명문 귀족의 후예로 태어났는데, 그의 본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냥 한자(韓子)라고 불리다가 당나라의 한유(韓愈)와 구별하기 위해, 한비자(韓非子)로 고쳐 불리게 되었다. 그는 비록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날 때부터 말더듬이여서 주위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외롭게 성장했다. 그의 문장 속에서 느껴지는 울분이나 냉혹한 법가 사상은 이러한 영향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소년 시절, 이사와 함께 대유학자인 순자에게서 배웠다. 스승인 순자가 성악설을 주장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그는 ‘사람의 본성 가운데 들어 있는 사사로움을 찾아내어 법으로써 엄히 다스려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당시 한나라는 진나라에게 많은 땅을 빼앗기고 거의 멸망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에 마음이 답답해진 한비는 임금에게 편지를 띄워,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건의했다. 그러나 임금은 그의 뜨거운 충정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성격이 괴벽(怪癖)한 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제는 글로써 자신의 울분을 풀겠다는 생각에서 《고분(孤憤)》 《세란(說難)》 등 십만여 자나 되는 책을 썼는데, 이것이 바로 《한비자》다. 그러나 왕은 그 책을 눈여겨보지도 않을뿐더러, 한비자가 말더듬이라는 이유로 그를 등용하지도 않았다.

 

이사가 진시황의 공적을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책을 가지고 진나라의 시황제에게로 갔다. 진시황은 그것을 읽어보고 이렇게 말했다.

 

“야! 참 대단한 사람이구나. 내가 이 사람을 만나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면, 정말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이사가 자랑스럽게 아뢰었다.

 

“이것은 틀림없이 한비의 저술인데, 저는 이 사람과 함께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한나라에 가면 반드시 그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진시황은 한비자를 만나볼 욕심으로 한나라를 바로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시황의 군대가 국경을 넘어오자 그 목적을 알아차린 한나라 왕이 즉시 한비자를 진나라로 보냈고, 이로써 전란의 화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시황 앞에 나아간 한비자는 다음과 같은 글로 조국(한나라)의 안녕을 도모했다.

 

“지금 진이 한을 치는 것은 나라의 이익에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한비를 직접 만나본 시황은 그의 탁월한 견해를 높이 평가했으며, 또한 크게 환대했다. 그러나 친구인 이사는 학생 시절에 자신이 한비보다 못한 것을 이미 알고 있던 데다, 그가 시황의 총애까지 받게 되자 심한 질투심을 느꼈다. 그래서 요가(姚賈)와 함께 언젠가 기회를 보아 한비를 해치우기로 모의했다. 어느 날 이사는 시황 앞에 나아가 참소(讒訴)하여 말했다.

 

“아시다시피 한비는 한나라의 공자(公子)입니다. 그는 자기의 조국 한나라를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결국 앞으로도 진나라를 위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임금께서 그를 등용하지도 않고 붙들어두었다가 돌려보낸다면, 중국 천하를 통일하는 데 후환을 남기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우리에게 반드시 불리하게 행동할 것인즉, 그에게 죄명을 씌워 죽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비자를 모함하고 있는 이사 자신도 따지고 보면 초나라 사람으로서, 진나라가 조국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미련하기 짝이 없는 시황은 이사의 간교한 말만 믿고 한비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렇지만 그를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이에 조바심이 난 이사는 시황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몰래 하수인의 손에 독약을 들려 보내 한비자가 스스로 자살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한비는 이사의 모함을 눈치 채고 여러 차례 시황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끝내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결국 그의 억울한 죽음은 동문수학(同門受學)한 친구의 손에 의해 이뤄진 셈이다.

 

그러나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사 역시 조고의 참소로 처형당하고 말았다. 나중에야 모든 것을 깨달은 시황이 사람을 보내 한비의 죄를 벗겨주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한비의 몸이 백골로 변한 뒤였다.

 

분서갱유의 현장

 

이사는 통일 후 진시황이 무리한 정책을 남발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삶에 큰 오점을 남겼다. 사진은 분서갱유가 행해진 ‘갱유곡’이라는 곳이다.

 

군주의 잘못을 지적하지 말라

한비는 유세(遊說)의 곤란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었다.

 

“유세하는 일은 쉽지 않다. 상대편의 마음을 잘 알고 거기에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끼워 맞추는 일이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편이 명예욕에 사로잡혀 있을 때 재물의 이익을 말하면 속물이라 하여 깔보고, 반대로 그가 재물의 이익을 바라고 있을 때 명예를 이야기하면 세상일에 어둡다고 욕한다.

 

군주가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하면서 비열한 짓을 하려 할 때, 유세하는 자가 그것을 아는 체하면 목숨이 위태롭다. 임금에게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강요하거나 도저히 중지할 수 없는 일을 그치도록 권유해도 생명이 위험하다.

 

군주와 함께 어진 임금의 이야기를 하면 군주 자신을 비방하는 것이라 의심받고, 말을 꾸미지 않고 표현하면 무식한 자라 업신여기고, 여러 학설을 끌어다 해박하게 말하면 말이 많다고 흉본다.

 

여기서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송나라에 부자가 살았는데, 어느 날 큰비가 와서 집의 담장이 무너졌다. 그러자 그의 아들이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 담을 고쳐 쌓지 않으면 도둑이 들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그때 이웃에 사는 한 사람도 집주인을 만난 자리에서 역시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 과연 그 집에 도둑이 들어 재산을 크게 잃게 되었는데, 그 집주인의 행태는 뜻밖이었다. 자기 아들에 대해서는 참으로 현명하다고 칭찬하면서, 똑같은 충고를 했던 이웃사람에 대해서는 도리어 의심을 품는 것이었다.

 

또 한번은 옛날에 미자하(彌子瑕)라는 아름다운 소년이 있었는데, 위나라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위나라의 법은 군주의 수레를 몰래 타는 자에게 발꿈치를 베는 형벌을 내리게 되어 있었다. 어느 날 미자하의 어머니가 앓아눕게 되자, 한 사람이 미자하에게 그 병세를 알렸다. 그러자 미자하는 바삐 어머니에게 가기 위해 임금의 수레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나중에 임금이 이 말을 듣고 그를 칭찬하면서 ‘참으로 보기 드문 효자로구나. 어머니의 병을 더 염려하여 자신의 발꿈치가 베어지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니.’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미자하는 임금과 함께 과수원에 행차하게 되었다. 그가 열려 있는 복숭아 하나를 따서 먹어보니 너무나 맛이 좋은 것이 아닌가! 이에 미자하는 자기가 먹던 복숭아를 임금께 올렸다. 이에 임금은 ‘아! 이 얼마나 임금을 생각하는 정이 깊은가. 제가 먹던 것이라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을 정도로 나만을 생각하다니.’ 하는 것이었다.

 

그 뒤 미자하가 늙어 그를 향한 임금의 사랑도 식게 되었다. 그리고 미자하가 잘못을 저지르게 되자 임금은 이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미자하는 일찍이 나 몰래 내 수레를 훔쳐 탔으며, 제가 먹다 남긴 복숭아를 나에게 주던 놈이다. 참으로 괘씸한 놈이로구나!’

 

미자하의 행동은 처음이나 나중이나 변함없었지만, 예전에는 훌륭하다 칭찬을 받았고 나중에는 벌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결국 사랑하고 미워하는 군주의 마음에 그 원인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유세하는 요령은 군주의 긍지심을 만족시켜주되, 그의 수치심을 건드리지 않는 데 있다. 군주의 결점을 추궁하지 말 것이며, 그에게 항거하여 분노케 하지 마라! 오랜 시일이 지나서 임금의 온정이 두터워지면 깊이 자기의 뜻을 추진해도 의심받지 않을 것이며, 임금에게 간언하더라도 죄를 입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자기의 몸을 비단으로 장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비는 이러한 일이 《세란》처럼 실제로 자신에게 닥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유세의 어려움을 스스로 후세에 널리 알린 셈이 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비자는 소년 시절부터 이사와 함께 순자의 사상을 배웠지만 유가의 범위를 뛰어넘어 법가 사상을 종합했다. 법가 사상은 한비에 와서 완성되었는데, 그는 법가의 논법으로 유가 사상을 받아들였다. 스승인 순자가 성악설에 기초하여 “예절로써 욕망을 절제시켜야 한다.”라고 주장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제자인 한비는 “사람의 본성 속에서 사사로움을 발견하여 법으로써 다스려야 한다.”라고 했다.

 

즉 순자가 비록 인간의 본성은 악하지만 후천적 노력에 의해 얼마든지 선해질 수 있다고 하여 ‘위(爲)’를 강조한 반면, 한비자는 본성 자체에 깔려 있는 이기심에 주목했던 것이다. 그는 인간이란 모두 자기를 위해 계산하는 이기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에 의해 인간의 모든 감정과 행위가 결정된다고 보았다. 천부적으로 타고난다는 인의충효 등과 같은 도덕관념은 본래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들은 모두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따지는 이기심만을 가지고 있다고 본 것이다. 한비자는 이처럼 인간이 이기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 다음, 자신의 이론을 펴나갔다.

 

한비는 법치와 유가의 덕치를 대립시키면서 사람에게는 ‘은혜와 사랑’의 마음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역설했을 뿐만 아니라, 인의도덕은 현실 상황과 맞지 않다고 비웃으며 그 허구성을 폭로했다.

 

의사는 사람들이 모두 아프기를 바란다

어떤 부모는 자기가 낳았으면서도 아들일 경우에는 좋아하지만, 딸일 경우에는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그것은 부모 자신의 앞날과 장차 갖게 될 이익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 농경사회에서 자식은 매우 귀중한 재산이다. 자식 가운데 아들은 자라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일손이 되고 또 다른 집의 며느리를 데려오지만, 딸은 커서 다른 집에 시집을 가므로 노동력 손실이 일어난다. 한비자는 부모까지도 자식과의 관계에서 이런 이해타산적인 계산을 하고, 그에 따라 아들과 딸을 서로 다르게 대한다고 보았다.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고대의 정부인(鄭夫人)은 자기 아들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남편을 독살했고, 여희(驪姬)라는 여자 역시 그 아들을 태자로 삼기 위해 본래 태자인 신생(申生)을 독살했다. 이런 일들은 모든 인간이 사리사욕을 위해 어떤 일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가령 의사들은 사람들이 모두 아프기를 바라고, 장례업자는 사람들이 죽지 않을까봐 염려한다. 또 수레를 만드는 사람은 모든 사람들이 부귀해져서 수레를 탈 수 있기를 바라고, 관을 짜는 기술자는 사람들이 일찍 죽기만을 기다린다.

 

그렇다고 해서 수레를 만드는 사람의 본래 타고난 성품이 다른 사람들보다 착하다거나, 관을 만드는 사람의 성품이 본래 악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지 않으면 수레가 팔리지 않고, 사람들이 죽지 않으면 관이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한비자에 따르면, 사람은 자기가 종사하는 직업에 따라 이익과 손해가 서로 다르며, 이러한 이해관계 때문에 결과적으로 사람이 선하게 행동할 수도, 악하게 행동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한 나라의 군주와 신하, 한 집안에서의 주인과 하인의 관계 역시 서로 이기적인 것으로 파악했다. 예컨대 군주가 신하에게 높은 관직과 봉급을 주는 것은 그렇게 해야 그들이 군주 자신을 위해 일하고 군주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신하가 군주를 위해 힘을 다하고 전쟁을 견뎌내는 일 역시 그렇게 해야만 높은 관직과 후한 봉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일 뿐, 어떤 추상적인 도덕관념에서 우러나와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하인이 열심히 일을 하는 것도 주인에 대한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일에 대한 보수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인이 하인을 잘 대우하는 것 역시 친절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서 하인을 더 많이 부려먹기 위함이다.

 

이처럼 주인이나 하인이나 모두 서로를 향한 이용 가치에 마음이 쏠려 있으며, 결과적으로 각자 자기의 이익만을 도모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인성은 악하고 이기적이므로 선한 일에 상을 주고 악한 일에 벌을 주어 이에 대응해야 하는데, 여기서 가장 믿을 만한 특효약이 법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한비자의 생각이다.

 

한비에 의하면, 과거 유가 사상가들이 제시한 방법으로는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고 한다. 긴박한 사회 상황에 당면했을 때 통치자가 인의도덕에 의존하여 무기력한 정치를 편다면, 마치 그것은 고삐나 채찍도 없이 사나운 말을 모는 것과 같아 매우 위험하다. 특히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는 상황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이기적으로 되는 것은 자기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것을 합리적으로 다루기 위해 통치자는 공평무사하고 엄정냉혹한 법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다.

 

말보다 회초리의 위력이 더 세다

그렇다면 법으로 다스리는 일이 얼마만큼 중요할까? 이에 대해 한비자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한다.

 

옛날 어느 마을에 일은 하지 않은 채 말썽만 피우고 다니는 청년이 하나 있었다. 그는 부모가 아무리 타일러도 자신의 행실을 고치지 않았고, 마을의 위엄 있는 어른이 권고해도 막무가내였으며, 스승이 가르쳐도 역시 마이동풍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관청에서 무장을 한 채 법에 따라 범인을 체포하는 포졸을 보고는 뒤탈이 두려워 자신의 행실을 고쳤다는 것이다.

 

순자가 강조한 예(禮)가 귀천을 구별하고 친소(親疎)를 밝히는 것이라면, 한비자의 법(法)은 귀함과 천함을 타파하고 가까움과 가깝지 않음을 구별하지 않는 평등의 정신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살인자는 법에 따라 처형되어야 한다. 물론 살인자를 죽인다고 해서 피해자가 다시 살아난다거나, 또 그 살인자에게 뉘우칠 기회를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를 죽여서 백 사람에게 죄에 대한 경계심을 줄 수는 있다. 백성들에게 선을 권하는 직접적인 방법이 상(賞)이라면, 그 간접적인 방법에 해당하는 것이 벌(罰)이다.

 

상과 벌은 본래 임금의 권한이지만, 그것은 분명한 조건에 근거해야 하며 애매모호해서는 안 된다. 한비자는 법의 집행 과정에서 상과 벌을 엄하게 줄 것을 주장했다. 가령 정승이라고 해도 죄를 저지르면 결코 벌을 벗어날 수 없도록 하며, 평민이라고 해도 잘하면 상을 받는 데 어김이 없도록 해야 한다.

 

나라에서 만든 법이 잘 지켜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군주의 권위가 바로 서야 한다. 군주는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신하를 종처럼 부릴 줄 알아야 한다. 심지어 명령 하나로 뜨거운 물이나 타는 불을 맨발로 지나갈 수 있도록 해야만 비로소 안심하고 법을 운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한비자는 신도의 ‘세(勢)’ 개념을 받아들여 법치가 인치(人治)보다 우수하다는 점과 ‘법’과 ‘세’가 서로 보완해줄 수 있음을 주장했다. 한비자는 군주의 ‘세’를 호랑이의 날카로운 이빨과 표범의 발톱에 비유했는데, ‘세’가 없는 군주는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힘이 없다고 보았다. 그는 ‘세’가 군주의 인격이나 도덕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군주의 지위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한비자는 노자의 ‘무위하지만 결국 행하지 않는 바가 없는 도(無爲而無不爲)’의 원리를 군주의 절대권력론과 신하조종술에서 실용화했다. 말하자면 법을 공포하여 백성들이 군주에게 절대로 복종하게 하고, 술(術)로써 신하들의 직무책임제를 확고히 하는 한편, 신상필벌의 세로써 임금이 신하와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체제를 만들어낸 것이다.

 

토끼가 부딪쳐 죽기를 기다리다

옛날 송나라에 한 농부가 있었다. 그의 밭 가운데 나무 그루터기가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토끼 한 마리가 달려오다가 그 그루터기에 부딪쳐 죽고 말았다. 가만히 앉아서 ‘횡재’를 한 농부는 아예 쟁기를 버린 채 토끼가 또 와서 부딪쳐 죽기를 기대하며, 날마다 나무 아래에서 기다렸다. 이른바 ‘수주대토(守株待兎)’라고 하는 유명한 고사인데, 마치 ‘감나무 아래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린다’는 속담을 떠올리게 한다.

 

이 이야기의 끝에 한비자는 “우리가 옛날 통치 방식만 고집하며 백성을 다스리려 한다면, 이 농부처럼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고 덧붙인다. 선현들이 가르친 것을 보면, 가령 유가는 요순을 본받으라 하고, 도가는 황제를 모범으로 내세우며, 묵가는 우임금을 이상적인 인물로 제시한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무시한 채, 무턱대고 옛 선현들의 충고에만 매달리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간혹 정치가나 학자가 어떤 원칙에 매달리다가 눈앞에 벌어지는 현실을 도외시하는 경우가 있다.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정나라의 어떤 사람이 신발을 사러 장에 가기 전에 미리 볏짚으로 자신의 발 치수를 재어두었다. 그런데 깜박 잊고 볏짚을 놔둔 채 장에 갔다. 신발 가게의 점원이 치수를 묻자 그 사람이 하는 말, “집에 가서 미리 재어둔 그 볏짚을 가져와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그는 다시 볏짚을 들고 장으로 달려갔는데, 이때는 이미 장이 파한 뒤였다.

 

이 말을 들은 한 사람이 “신발을 고르는 동안 가게에서 직접 재어보면 되지, 뭐 하러 집에 돌아갔느냐?”라고 핀잔하자, 그 사람 하는 말이 “나는 치수는 믿어도 내 발은 믿을 수 없소.”라고 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흔히 학자들이 글로 써진 이론은 잘 믿으면서도 실제로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은 외면해버리는 데 대한 통렬한 비평인 것이다.

 

순자가 당시의 유가를 천유(賤儒)라 부르면서 비웃었는데, 한비는 이보다 더욱 심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한비에 의하면, 유가는 화려한 옷이나 갓을 걸친 채, 쓸데없는 도 따위나 이야기하고, 백성의 마음을 미혹시키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또한 묵가는 어떤 기강(紀綱)이나 법률도 없는 집단을 만들고 나서 군주가 녹봉으로 우대해주기를 바라기만 한다. 그러므로 나라에서 모든 암(癌)과 맹장을 도려내고 세 가지 기관(器官)만을 남겨놓아야 하는데, 여기서 세 계급이란 군주에게 개처럼 충성을 다하는 ‘신하’와 군주에게 절대 복종하는 ‘군인’, 그리고 이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농민’이다.

 

한비자는 이상적인 국가로 발전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일들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첫째로 백성의 부를 늘려나가기 위해 농사를 장려하고 새로운 토지를 개간해야 하며, 둘째로 부패한 사람을 다스리기 위한 형벌을 강력히 시행해야 하고, 셋째로 군대를 먹여 살리고 나라의 곳간을 채우기 위해 세금을 철저히 매기고 거둬야 하며, 넷째로 나라를 외부의 침략자로부터 지키기 위해 강한 군사 훈련을 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일으킨 듯하다. 학자들은 괜히 쓸데없는 이론과 말에만 치중할 뿐, 나랏일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야만적인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가 오래갈 리 없었으니, 시황은 무식한 폭군이라는 이미지만 남긴 채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의 과거사에도 보면 세종대왕처럼 학문을 장려한 임금은 백성들에게 태평세월을 선사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에 길이 남는 성군이 되었지만, 학자들을 거추장스럽게 여긴 통치자들은 그 치세가 오래가지 못했을뿐더러 역사에 폭군으로 기록되었다.

 

물론 진시황은 한비를 중책에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견해에는 칭송을 보냈는데, 이에 친구인 이사는 시기심이 발동하여 그를 수없이 모함했다. 한비는 친구의 모략을 알아차리고 왕에게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끝내 죽고 말았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인간미를 잃어버린 학설

이제 한비에 대해 평가해보고자 한다. 그가 인간의 본성 가운데 악한 면이 있다고 본 것은 일리가 있다. 어떤 부모는 자식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어떤 신하는 살아남기 위해 신의를 배반하기도 하며, 어떤 군주는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신하들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인간의 본성에 악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인성 가운데는 아직도 도덕적인 관념이 남아 있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생명을 버리기도 하고, 어떤 이는 명예를 위해 수양산에서 굶어 죽기도 하며, 어떤 통치자는 백성을 위해 밤잠을 설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한비는 인간의 좋지 않은 사사로움만 보고 사랑을 보지 못했다. 따라서 그의 학설은 각박하다 못해 인간미를 잃고 말았던 것인데, 그가 처방한 치료약 역시 끝내 보약이 되지는 못했다.

 

한비의 엄격한 법치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백성들에게 감히 법을 범하지 못하도록 위협할 수는 있었지만, 백성 스스로 법을 지켜나가도록 하지는 못했다. 한비가 법을 운용하는 방식이란 누구든지 법망을 피하기만 하면 어떠한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을, 그러한 것에 불과했다. 오직 법으로만 다스리려 했던 당시 법가들은 자연히 도덕을 가볍게 여겼는데, 《사기》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즉 관중은 항상 포숙을 속였고, 상앙은 타고난 인품이 각박했으며, 이사는 친구인 한비를 모함하여 죽게 했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모름지기 한쪽으로만 치우친 사상을 제거하고, 본성의 존엄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세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비극을 방지하고,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세계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국강병만이 살길이다, 법가 (청소년을 위한 동양철학사, 2009. 1. 30., 강성률, 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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