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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 최고 보물 화씨벽(和氏璧)

작성자管韻|작성시간21.01.03|조회수1,084 목록 댓글 0

춘추전국시대 최고 보물 화씨벽(和氏璧)

 

 

 

 

 

 

 

 

중국의 사기 등 역사책 및 역사에 근거한 글들을 읽다 보면 화씨벽이란 보물이 자주 등장 한다. 이 화씨벽은 춘추전국시대 최고의 보물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이후 진나라 한나라 삼국시대 까지 보물의 대명사로 불리 워 진다. 명성에 걸 맞게 이 화씨벽과 관련된 고사성어도 많다. 흠 잡을데 없이 완전하다는 완벽(完璧), 여러 개의 성에 비할 수 있는 가치라는 연성지치(連城之値), 몸은 망가져도 혀만 살아 있으면 뜻을 펼수 있다는 오설상재(吾舌尙在), 분수에 맞지 않게 귀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 죄가 된다는 회벽유죄(懷璧有罪)가 그것 들이다. 또 이 화씨벽으로 후에 진시황이 전국옥새를 만듬에 따라 옥새의 유래와 기원이 된다.

 

 

1. 초(楚)나라의 변화(卞和)가 옥을 바치고 두 다리를 잘리다.

 

춘추시대 초나라의 변화라는 사람이 형산에서 귀한 옥돌 원석을 얻어 초 여왕에게 바친다. 여왕은 궁중의 옥공을 불러 감정을 시켰는데 옥이 아니고 돌멩이라고 한다. 이에 여왕은 왕을 기만한 죄를 물어 변화의 왼쪽 발을 잘라 쫓아 낸다. 이후 여왕이 죽고 아들이 무왕이 되자 변화는 다시 이 옥돌을 들고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거짓 감정으로 나머지 오른발까지 잘리게 된다. 이후 무왕이 죽고 문왕이 새로운 왕이 되었으나 이 변화는 두 다리를 모두 잃어 갈 수가 없어 이 옥돌을 가슴에 않고 형산 밑에서 4흘 밤낮을 울어 피눈물을 흘린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문왕이 변화를 데려와 옥돌을 다시 감정하니 천하에 둘도 없는 백옥인 것이다. 하여 문왕은 이를 벽옥(璧玉)으로 만들고 이름을 변화의 옥이라 해서 화씨벽이라 명한다. 그리고 변화에게는 대부에 준하는 봉록을 내린다. 이처럼 이 화씨벽은 그 탄생부터 범상치 않다.

 

고서의 기재의 의하면 화씨벽은 가운데 구명이 뚤린 전병 같은 것으로, 이것을 어두운 곳에 놔두면 빛을 내고, 먼지를 제거하며 사악한 귀신을 쫓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야광지벽’이라 불리기도 했다 한다. 그 화씨벽을 방안에 놔두면 겨울에는 따뜻하여 화로를 대신할 만 하고 여름에는 시원하여 100보 이내로 파리모기가 들어오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다른 일반 벽옥은 따를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이 많이 나타나 이것을 지보(至寶)로 여기게 되었다 한다.

 

 

2. 장의(張儀)는 화씨벽을 훔쳤다는 누명으로 곤욕을 치룬다. 오설상재(吾舌尙在)의 고사

 

사마천의 사기 장의열전에 전하는 내용이다.

 

장의는 소진(蘇秦)과 함께 귀곡선생(鬼谷先生)의 동문 제자로 소진의 합종책에 대항하여 뛰어난 변론술로 연횡책(連衡策)을 유세하여 진의 통일을 이룬 전국시대 최고의 책사다. 장의가 아직 출세하지 못하고 초나라 재상인 소양의 집에서 문객 노릇을 하며 지내고 있을 초 위왕 때의 일이다. 이때는 화씨벽이 만들어지고 약 350년 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다. 그때 소양은 위 나라와 싸워 대승한 공로로 왕으로부터 귀중한 화씨벽을 하사 받는다. 소양은 그것을 언제나 가지고 다녔는데, 어느 날 적산 밑의 누대에서 연회를 베풀다 화씨벽을 잃어버린다. 이때 가장 옷이 허름하고 평소에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던 장의가 누명을 쓰고 매를 맞게 되었다. 장의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집으로 업혀 들어왔고 이를 본 아내가 눈물을 흘 리자 “내 혀를 보시오. 아직 있소?(視吾舌 尙在否)”혀만 남아 있으면 됐다고 한다.

 

그 후 장의는 진나라의 재상이 되어 연횡책으로 소진이 이룩한 합종책을 깨는 데 성공했다. 그는 소양에게 이런 격문을 써 보냈다. “지난 날 내가 그대와 술을 마실 때 나는 그대의 구슬을 훔치지 않았건만 내게 매질을 하였네. 이제 그대는 그대의 나라를 잘 지키게. 내가 그대 나라의 성읍을 훔칠지니.”

 

책사 들에게는 세 치 혀야말로 그들의 생존수단임을 나타내는 이야기이다.

 

 

3. 회벽유죄(懷璧有罪)의 화를 모면한 목현

 

그 후 50년이 지났다. 조나라의 혜문왕은 이름이 목현이라는 환관을 총애하고 있었다. 어느 날 목현은 어느 손님으로부터 진귀해 보이는 백벽 하나를 5백금이란 거금을 주고 사게 된다. 옥공이 화씨벽이라 하자 목현은 애지 중지 하여 꼭꼭 감춘다. 조왕이 소문을 들고 화씨벽을 바치라고 말하나 목현은 헛소문이라고 하면서 응하지 않는다. 조왕은 결국 사냥 갔다 돌아오는 길에 목현의 집을 수색해서 화씨벽을 빼앗아 간다. 거짓말이 들통난 목현이 목숨을 구해 이웃 연 나라로 달아나려고 하자, 당시 목현의 식객으로 있던 인상여가 나서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것이 현명하다고 충언 한다. 결국 목현은 인상여의 도움으로 회벽유죄의 화를 모면하고 인상여는 상객으로 대접받게 된다.

 

 

4. 여러 성에 해당하는 가치가 있다는 화씨벽, 연성지치(連城之値)의 고사

 

사기 염파,인상여 열전의 내용이다.

 

이렇게 해서 조나라 혜문왕이 초나라가 잃어버린 화씨벽을 손에 넣게 되었다. 그 시절 강대한 진나라는 조나라를 여러 번 침략했으나 조나라의 대장군 염파에 부딪혀 그냥 되돌아가곤 했다. 기원전 283년, 조나라에 화씨벽이 있다는 것을 안 진나라 소양왕은 사신을 보내어 혜문왕에게 이렇게 전한다.

 

“소문을 듣자니까 전하께서는 희귀한 보옥을 가지고 계시다는데, 과연 얼마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뭐, 그저 ‘성 여러 개에 해당하는 값(連城之値)’이라고 하면 이해가 되실지 모르겠구려.”

“그렇다면 정말 대단한 보석이군요. 사실은 저희 임금께서 우리 나라의 15개 성과 그 화씨벽을 교환하고 싶어하십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5. 인상여가 화씨옥벽을 온전히 찾아온다. 완벽귀조(完璧歸趙)의 고사

 

사기 염파,인상여 열전 계속이다.

 

조나라 혜문왕은 대장군 염파 등 대신들을 불러 대책을 상의한다. 화씨벽을 넘겨주었다가 만약 진나라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성도 못 얻고 화씨벽만 잃게 될 것이었다. 그렇다고 진나라의 요구를 거절하면 그것을 구실로 조나라로 쳐들어올 것이 뻔했다. 오랫동안 논의했지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사신을 진나라로 보내어 그 진의를 알아보기로 했다. 이때 사신으로 천거 받은 사람이 인상여(藺相如)다.

 

인상여는 화씨벽을 진나라 왕에게 바치고 15개 성의 반환을 요청한다. 그러나 인상여가 반나절이나 기다렸지만 왕은 언약대로 성을 주겠다는 말을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러자 인상여는 화씨벽에 잘 보이지 않는 흠을 알려 주겠다고 하여 화씨벽을 돌려 받는다. 화씨벽을 다시 받은 인상여는 진나라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화씨벽을 깨뜨리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그런 인상여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진 나라는 15개 성을 줄 생각은 않고 어떻게든 화씨벽만 빼앗을 궁리를 한다. 그날 밤 인상여는 몰래 하인을 시켜 조나라로 화씨벽을 빼 돌린다. 닷새 후에 이를 눈치챈 진나라 왕은 인상여를 포박하여 위협한다. 그러나 인상여는 “천하의 제후들이 진나라는 강대국이고 조나라는 약소국임을 알고 있습니다. 대왕님께서 진심으로 화씨벽을 원하신다면 먼저 성 15개를 조나라에 넘기십시오. 그러면 조나라는 반드시 화씨벽을 진나라에 바칠 겁니다. 약소한 조나라는 대왕의 징벌이 두려워 절대 언약을 어기지 못할 겁니다. 만에 하나, 대왕님이 저를 죽이신다면 천하 사람들이 대왕의 탐욕을 알게 될 것이고 진나라는 신용을 지키지 않는 나라라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대국이라는 인상여의 말에 흡족한 진 소양왕은 대범하게 외국의 특사를 환송하는 예식을 차리고 인상여를 조나라로 돌려보낸다. 성 15개와 화씨벽을 바꾸려는 생각이 애당초 없었던 진나라 소양왕은 다시는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고, 조나라 혜문왕은 인상여를 상대부로 등용한다.

 

 

6. 진 시황제는 화씨벽으로 전국옥새(傳國玉璽)를 만든다. 옥새의 기원

 

사기 진시황본기와 이사열전 주석에 의하면

 

기원전 228년 조나라는 진나라에 멸망한다. 화씨벽도 진나라 손에 들어가게 된다. 진시황은 재상인 이사(李斯)로 하여금 '수명어천, 기수영창(受命於天, 旣壽永昌:하늘에서 받은 명이여, 그 수명이 길이 번창하리라)'이라는 문구를 전서(篆書)로 새겨 이 화씨벽으로 도장을 만들게 하였다. 이른바 전국옥새다. 이후부터 이 옥새는 황제의 상징으로 이를 가진 사람이 천하를 가진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고대 중국의 왕들은 권위의 상징으로 금인을 사용하여 왔었다.그러나 진시황제가 화씨벽으로 이 전국옥새를 만든 뒤부터는 금인은 제후나 친왕들에게 사용되고, 황제들은 이 옥새를 사용하였다.

 

이후 이 옥새는 시황제의 손자인 자영이 함양을 함락시킨 유방(劉邦)에게 바쳤으며, 유방이 중국을 통일한 뒤 한나라 황제에게 대대로 전해졌다. 옥새는 후한 말년의 혼란기에 유실되었다가 손견(孫堅)과 원술을 거쳐 조조(曹操)의 손에 들어갔다. 이후 위진남북조를 거쳐 수나라와 당나라, 후량(後梁)과 후당(後唐)까지 전해지다가 후당의 마지막 황제 이종가가 거란에 망하여 분신할 때 사라진 것으로 전한다. 이후 몇 차례 전국옥새를 찾았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모두 진품이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이 전국옥새는 진시황제 이후로 천하를 제패하는 사람이 소유함으로써 황제나 황권(皇權)을 상징하는 물건이 되었으며, 이를 차지하는 사람이 곧 천하를 차지하는 것으로 여겼다

 

 

 

현대의 최고의 보석은 다이아몬드이다. 다이아몬드가 최고 보석이 된 것은 최고의 경도(10)를 가지고 있어 부서지거나 흠집이 나지 않아서 광채가 흐려지지 않고 또 무엇보다고 귀하여 희소성이 크다는 점에 있겠다. 그러나 옥은 그 경도가 당비취가 경도9를 자랑 하듯이 다이아몬드 다음의 강도를 가지고 있지만 너무 흔하여 희소성이 크지 않아 큰 보물이라고 하기에는 어패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화씨벽은 고대 중국에서 수세기 동안 최고의 보물로 여겨져 왔다. 진 소양왕이 제안한 15개 성의 가치는 측정하기가 어렵다.

 

이렇게 화씨벽이 귀하게 여겨진 데에는 몇 가지 배경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고대인들이 옥을 천지의 정수이며 음양에 있어 지극히 순결한 것이라 생각하고 대지의 정물(精物)로 여겨왔다는 것이다. 옥을 품에 지니고 장식하면 약효가 나타나고 잡귀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둘째 중국인들은 옥을 중요한 의례에 예기(禮器)로 사용했다. 중국 고대의 귀족들은 종묘나 궁실 등에서 의식을 할 때 옥기를 사용한다. 또 옥기는 작위의 상징으로 최고 권력자만이 사용할 수 있었음을 주례(周禮)등의 기록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셋째 특히 옥벽은 천당을 상징하여 주나라 때부터 제천의식에만 사용되었던 신성한 것이었다.

 

넷째 옥은 시신의 부패를 막는다 하여 장례의식에 많이 사용하였다. 중국 진나라 때의 학자인 갈홍(葛洪:283〜343)같은 사람은 저서 포박자(抱朴子)에서 ‘옥을 시신의 아홉 개 구멍에 넣어 두면 시신이 썩지 않는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이 옥벽은 천당의 상징으로 죽은 이에 가슴에 올려 놓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전국시대 최대의 강국 조나라와 진나라가 이 옥벽을 가지고 치열한 외교 전을 벌렸다는 역사적 상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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