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글씨 / 나다니엘 호손(Nathanial Hawthorn, 1804년∼1864년)
저 : 나다니엘 호손 (Nathanial Hawthorn, Nathaniel Hawthorne)
1804년 미국 메사추세츠주에서 태어났다. 청교도의 사상, 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많은 작품을 썼다. 1825년 보든 대학을 졸업한 후 12년간 칩거 생활을 하며 독서와 습작으로 시간을 보낸다. 1828년 첫 소설 ❮팬쇼❯를 출판하지만 작품에 불만을 느껴 모두 수거해 파기한다. 한동안 주로 단편을 집필했고, 여러 잡지에 발표했던 작품 중 18편을 추려 ❮트와이스 톨드 테일스❯라는 단편집을 출간해 호평을 받으며 이름을 알리게 된다.
독실한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신의 이름으로 선조들이 저지른 죄악에 개탄하며 성을 Hathorne에서 Hawthorne으로 개명했다. 초월주의자들의 농촌공동체에서 일 년간 생활했고, 소피아 피바디를 만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갔다. 청교도 식민지 시대의 뉴잉글랜드를 배경으로 하는 그의 작품들은 그의 삶과 결을 함께한다. 초현실주의와 로맨스를 결합하여 인간의 본성이 내재한 악을 경고하면서 인간의 내면을 상징적이고 엄밀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30세 무렵 「로저 맬빈의 매장」, 「젊은 굿맨 브라운」 등의 소설들이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하지만 작품의 문학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수입은 얻지 못해 경제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보스턴 세관에 취직하기도 했고 협동 농장에 들어가 살기도 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1850년 청교도주의가 지배하던 17세기 미국의 어두운 사회상을 그린 소설 ❮주홍 글씨❯를 발표했다. 이외에 작품 ❮일곱 박공의 집❯ 등이 있다. 1864년 여행 중 60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흔히 사회에서 주홍 글씨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주홍 글씨가 찍혔다. 씌였다.' 등 어떤 대상에게 부정적인 이미지가 각인되었을 때 쓰인다. 부정적인 이미지가 사라지거나 사실과는 다른 것으로 밝혀지면 '주홍 글씨를 벗었다.'라는 표현도 쓴다. 주홍 글씨가 대중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나다니얼 호손의 '주홍 글씨'라는 작품의 영향이다.
작품의 사회에서는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는 주홍색 글씨로 죄명의 첫 글자 써 평생 가슴에 지니게 한다. 살인이라면 주홍색 M자 간음이면 A자다.
책의 주인공인 헤스터 프린은 남편이 없던 오랜 기간 동안 누군가와 간음을 하여 아기를 출산하고 그로 인해 사회(청교도 사회)로부터 간통을 뜻하는 상징인 글자 A를 가슴에 달고 살아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 때 마침 이 장면을 지켜보던 낯선 이방인이 있는데, 이 이방인이 바로 헤스터 프린의 남편인 칠링워스다. 칠링워스는 자신의 아내가 간음을 저질렀다는 것을 보고 분개하기보다 차분하게 그녀에게 다가가 간음 상대인 남자가 누구인지를 묻는다. 헤스터 프린이 끝까지 누구인지 밝히지 않자 칠링워스는 그녀에게 '그렇다면 나의 정체도 끝까지 숨겨주시오'라고 말하고 그녀의 곁에 머물며 간음을 한 남자를 찾는다.
헤스터 프린은 감옥에서 나온 이후 마을을 떠나지 않고 죄를 용서받고자 외곽에 딸인 펄과 머물며 마을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맡은 일을 하며 지낸다. 형벌을 받았으니 이대로 이야기가 흘러갈 것 같지만 책은 한 인물을 조명한다. 그 인물은 작품 초반 헤스터 프린을 변호해 준 목사이자 그녀의 정신적 지주인 딤스데일 목사다. 딤스데일 목사는 마을에서 굉장히 명망이 높은 젊은 목사로 이대로만 가면 그를 위해 교회도 지어질 수 있을 정도로 신임 받는 목사다. 책을 읽다 보면 독자들은 이 사람이 바로 헤스터 프린과 간음을 한 남자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다. 물론 칠링워스 또한 어렴풋이 딤스데일이 자신의 아내와 간음한 자라는 것을 조금씩 눈치 채고 있다.
명망이 높고 신앙심이 강한 딤스데일 목사이기에 목사는 죄를 숨기고 떳떳하게 살아가지 못하고 죄책감에 하루하루 병들어간다. 딤스데일은 죄를 고할까? 이대로 숨기고 살아갈까?라는 고민을 반복하며 피폐해져가다 우연한 기회로 헤스터 프린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는 이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딸인 펄과 함께 마을에서 도망가자고 결심한다.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하기 바로 전날 마을에서는 큰 행사가 열리게 되고 딤스데일 목사는 어떠한 끌림에 의해 헤스터 프린이 죄를 선고받았던 심판대로 몸을 향해 자신의 죄를 대중들에게 고백하고 죽고 만다. 이후 남겨진 헤스터 프린은 딸인 펄과 마을을 떠나고 몇 년이 지난 후 헤스터 프린이 다시 마을에 돌아오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책은 주홍 글씨로 표현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저지를 죄에 대해 헤스터 프린과 딤스데일 목사를 대비하여 극복과 한계를 보여준다. 둘은 똑같이 죄를 저질렀고 둘 모두 구시대의 산물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 끝은 다르다.
딤스데일 목사는 구시대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끝나버리는 인물이다. 그는 목사라는 신분으로 대중을 좋은 쪽으로 이끌고 깨끗한척하지만 사실은 죄를 저지르고 숨기는 위선적인 사람이다. 목사로서 그간 명망이 높았을지는 모르겠지만 죄를 저지른 후 변한다. 그는 죄를 숨기고 헤스터 프린을 희생양으로 삼는 야비한 행동을 하고 그녀와 자신의 딸인 펄을 돌보지 않고 외면한다. 딤스데일은 죄책감을 느끼고 괴로워하지만 죄를 밝힐 수 있는 몇 번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스치듯 그 기회를 놓친다. 사실 그는 죄를 떳떳하게 밝힐 용기도 마음도 없는 것이다. 그 증거로 그는 헤스터 프린처럼 주홍 글씨를 가슴에 달고 있지는 않지만 보이지 않는 주홍 글씨가 자신의 몸에 새겨진 것 마냥 그 보이지 않는 주홍 글씨를 가리기 위해 의식적으로 가슴에 손을 얹어 가리고 다닌다.
반면 헤스터 프린은 자신의 주홍색 글씨를 당당히 내보이며 죄를 극복하려는 진보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참회하기 위해 마을을 떠나지 않고 외곽에 머물며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열심히 일을 한다. 그녀는 죄를 숨기기보다 오히려 당당히 드러내고 그 죄를 통해 타인을 보듬고 위안을 주며 산다. 그녀의 선한 영향력이 사람들에게 전해졌는지 점차 가슴에 찍힌 주홍색 글씨의 의미는 점점 변한다. 처음 주홍색 글씨가 간음을 뜻하는 Adultery의 A였다면 사람들은 점점 그녀의 착한 마음씨와 능력에 끌려 A를 Able 능력있는 으로 인식하게 되고 결국 마지막 순간에는 Angel 천사의 A로 받아들인다.
죄에 대한 둘의 행동이 결국 서로 다른 결말을 준다. 죄를 숨기고 위선적인 행동을 한 딤스데일은 점점 병들어가고 쇠약해져 간다. 책에서는 얼굴이 점차 변해간다고 하는데, 서양에서도 동양의 관상학과 비슷한 학문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이대로 딤스데일은 병들어 죽어버릴 것 같지만 신부로써 가지고 있는 조금의 양심이 동했는지 마지막 순간에 대중들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결국 죄를 고백함으로 그는 초라한 죽음 대신 평범한 죽음을 맞이함으로 조금의 구원을 받는다. 반대로 죄를 당당히 밝히고 참회한 헤스터 프린은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고 신임을 산다. 딤스데일이 죄를 밝힌 이후 그녀는 펄과 마을을 떠나는 것으로 나오는데 펄은 어디선가 행복한 삶을 살고 헤스터 프린은 다시 마을로 돌아와 끝까지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도우며 늙어간다고 나온다. 둘의 대비로 작가는 죄 자체보다 죄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보이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둘에게 칠링워스와 딸인 펄의 역할은 그들 곁에서 회개 혹은 위선의 행동을 유도하는 천사와 악마이자 구시대와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다.
칠링워스는 직접 딤스데일 목사를 벌하거나 고발하지 않는다. 그는 딤스데일이 계속 위선자로 살도록 종용한다. 죄를 밝히지 않고 겉으로 깨끗하고 속은 더러운 인물. 죄를 스스로 벌하거나 용서할 수 있거나 혹은 숨길 수 있다는 오만함을 갖게 함으로 딤스데일이 계속 위선적인 인물로 남게 한다. 또한 그를 구시대적인 상징으로 볼 때 딤스데일과 헤스터 프린은 죄인이다. 청교도 사회의 관점에서 그 둘은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죄의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칠링워스는 계속 위선적인 삶을 살게 함으로 그들이 죄는 저지른 이상 그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반면 펄은 헤스터 프린과 딤스데일이 죄를 경시하거나 회피하려는 행동을 보이면 그들에게 다시금 죄를 일깨워준다. 죄를 잊지 말고 참회하여 극복하라고 계속 메시지를 던진다. 그뿐만 아니라 헤스터 프린 곁에서 계속 죄를 일깨워 줌으로 헤스터 프린을 죄에서 극복시켜 주홍 글씨의 의미를 변화시킨다. 기존의 기독교 관점과 달리 죄는 저지르더라도 그것을 다루는 것에 따라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후반부 펄이 마을을 떠나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은 구시대로 대표되는 청교도 사회는 결국 도태될 것이며 새로운 시대 더 나은 시대가 앞으로의 미래임을 보여준다.
아이의 시선을 느꼈을 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서 딤스데일의 손은 절로 가슴 위로 올라갔다. 무의식적이 될 만큼 버릇이 들어 버린 동작이었다. 마침내 펄은 아주 위엄 있는 태도로 한 손을 내밀더니 작은 집게손가락을 뻗어 엄마의 가슴을 분명하게 가리켰다.
-주홍글씨-
죄는 신부이던 부자이던, 가난한 자이던 그 누구나 저지를 수 있다. 그러나 죄를 저지르고 안 저지르고 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죄를 저지른 이후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지다.
책의 처음 주홍 글씨는 세상의 멸시와 조소를 받는 죄의 낙인으로 쓰인다. 그러나 헤스터 프린은 이를 존경과 극복의 상징으로 바꾼다. 여자 헤스터 프린에게는 페미니즘의 성공이고, 인간 헤스터 프린에게는 진보이자 구시대(청교도 사회)의 편협함을 무찌르는 성공이다.
지금도 여전히 주홍 글씨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데, 이제는 다른 의미로 바뀌어야 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든다.
죄를 바라보는 나다니엘 호손의 관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