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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철학∙인문학

05. 불교(佛敎) 미술로서의 탑(塔)

작성자관운|작성시간16.12.30|조회수125 목록 댓글 0


05. 불교(佛敎) 미술로서의 탑()

 

 

 

 

 

 

 

우리나라 고대의 문화재 가운데 불상과 함께 주류를 이루는 것은 탑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옛 탑은 약 1,500여 기에 이르며, 국보와 보물의 상당수를 탑이 차지하고 있다.

 

불교가 국교가 된 이후 우리나라에는 많은 탑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중국인들은 백제를 가리켜 절과 탑이 매우 많은 나라라고 했으며, 삼국유사에는 경주를 가리켜 절은 밤하늘의 별처럼 널려 있고, 탑은 기러기 행렬처럼 줄지어 있다고 하였다.

 

 

 

탑은 부처의 무덤 - 탑의 의미

 

 

 

부처가 열반한 후 부처의 시신을 불에 태우고 남은 뼈를 사리라고 하며, 사리를 안치한 무덤이 탑이다. 처음에는 석가모니의 사리를 나누어서 8개의 탑을 세웠는데 이것이 탑의 기원이다.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왕(재위 기원전 268~232)은 불교 전파를 위해 인도 전역에 84천 기의 탑을 세웠다 한다.

 

그 후 불교가 여러 나라로 전파되면서 각지에 탑이 세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사리의 수는 한정되어 있어서 건립되는 모든 탑에 부처의 사리를 모실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금, , 옥 또는 깨끗한 모래알 등으로 대신하거나, 혹은 불경, 작은 탑 등 부처를 상징하는 다른 유품을 넣었다. 앞의 석가의 사리를 진신 사리라 하고, 뒤의 것을 법신 사리라고 한다.

 

탑은 부처의 사리를 모신, 즉 부처가 영원히 쉬고 있는 집이다. 그러므로 탑에 대한 예배는 불상에 대한 예배와 마찬가지로 부처에 대한 예배의 의미를 갖고 있다. 불교에서 절을 건립하는 목적이 탑과 불상을 봉안하고 예배를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즉 불교에서 신앙의 대상의 하나가 탑이며, 따라서 탑은 절의 중심부에 세우는 것이 원칙이다.

 

탑은 불교에서는 신앙의 대상이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중요한 고대 예술품의 하나이다. 따라서 탑을 고찰할 때는 그것에 깃든 의미와 상징성을 살펴보아야 하고, 그것을 전제로 탑의 건축적인 예술성을 찾아보아야 한다. 대개 탑의 예술성을 고찰할 때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한다. 그 하나는 안정감의 측면이고 또 하나는 상승감이다. 이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추고 상하 좌우 잘 조화된 균형미를 형성한 대표적인 탑으로는 석가탑을 들 수 있다.

 

 

 

탑의 층수는 탑신의 개수 - 탑의 구조

 

 


 

 

탑의 외형은 크게 위로부터 상륜부, 탑신부, 기단부의 세 부분으로 나눈다.

 

상륜부는 탑, 즉 부처가 머물러 있는 집에 대한 장식적인 의미를 갖는다. 특히 보개와 같은 부분은 왕이 행차할 때에 쓰는 우산을 표현한 것으로서 부처의 고귀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탑의 상륜부는 그 모양을 보면 전체적으로는 인도의 봉분형 탑을 간략히 공예화시켜 놓은 것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탑신(몸돌)은 부처가 머무는 방이다. 즉 사리공(사리 구멍)을 파고 사리를 안치하는 곳이 탑신이다. 대개는 1층 또는 2층의 탑신의 윗 부분에 사리공을 판다. 목탑은 석탑과 달리 목탑의 중앙 기둥이 놓이는 초석에 사리공을 파고 사리를 안치한 다음 그 위에 기둥을 세운다. 탑신은 초기의 큰 탑은 돌을 판자 모양으로 깎아 잇대어 만들었으나, 탑의 규모가 작아지면서부터는 탑신을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탑의 층수는 탑신의 갯수를 세어 보면 알 수 있다.

 

탑신을 덮고 있는 것을 지붕돌(옥개석)이라 하는데, 말 그대로 지붕의 모양을 하고 있다. 탑신을 정확히 구분해 내기 힘든 경우에는, 이 지붕돌을 세어 보면 층수가 확실해진다. 지붕돌의 처마 부분은 층급받침(옥개받침)이라 하여 계단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전탑(벽돌탑)을 쌓을 때 생기는 처마 모양에서 유래한 것이다. 신라 전성기의 석탑은 층급받침이 5단으로 되어 있지만, 신라말 이후 고려 시대에는 4, 3단으로 줄어든다. 그래서 탑이 어느 시대에 만들어진 것인지 판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부분이다.

 

기단부는 집을 지을 때 땅을 다지고 축대를 쌓는 것처럼, 탑의 받침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초기에는 기단을 단층으로 만들었으나, 삼국 통일 후에는 대개 2층 기단으로 만들었다. 기단부에는 집의 기둥 모양을 양각(돋을 새김)으로 새겨 놓았다. 바깥쪽 모서리의 기둥을 가기둥(우주)이라고 하고, 안쪽 기둥을 안기둥(탱주)이라고 한다. 안기둥의 숫자는 대개 2개였으나, 신라 말 이후 고려 시대에는 1개로 줄어드는데, 역시 탑의 시대 구분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탑의 전래 - 삼국 시대의 탑

 

 

 

본래 인도에서의 탑은 반구형의 무덤 모양을 하고 있었다. 중국으로 전해져서는 중국적으로 변한 고층 누각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그것이 우리나라에 전해져서 삼국에서는 고층 누각 모양의 목탑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삼국 시대의 목탑은 현재는 1기도 전하지 않는다.

 

삼국 시대의 대표적인 목탑으로는 황룡사 9층탑이 있었다. 신라의 자장이 삼국 통일이라는 염원아래 백제의 아비지를 초청하여 건축한 이 탑은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완성되었다. 그 높이만 225(74.22 미터)나 되었다고 하는 이 거대한 탑은 13세기 몽고의 침략으로 불에 타고 말았다.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목탑은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법주사 팔상전이다. 이 탑을 통해 과거 목탑의 윤곽을 짐작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나무로 만든 탑은 수명이 짧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주로 벽돌을 탑의 재료로 이용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곳곳에 널려 있는 질이 좋은 화강암을 이용하여 탑의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석탑이 등장하게 되었다.

 

삼국 시대 후반 백제에서 만든 최초의 석탑이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이다. 미륵사지 석탑은 본래 9층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현재는 6층만 남아 있다. 나무를 돌로 바꾸어 만들었을 뿐 목탑의 건축 수법을 그대로 따른 탑이다. 따라서 이전의 목탑의 모습을 추측케 해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 하나의 백제 석탑으로는 부여의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있다. 탑의 재료가 돌로 바뀐 후 목탑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만든 것이 미륵사지 석탑이라면,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돌의 특성을 살려 대폭 간소화, 형식화한 것이다. 즉 목탑을 맹목적으로 모방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하고 있다. 이 탑은 백제 멸망 이후에 백제 지역에서 세워지는 석탑의 원형이 되었다.

 

신라 석탑은 경주의 분황사 모전 석탑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신라에서의 석탑 발생 과정은 백제와는 달리 전탑의 모방에서 출발하였다. 분황사 석탑은 벽돌로 만든 탑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벽돌이 아니라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탑을 세운 것이다.

 

 

우리나라 탑의 모델 석가탑 - 통일 신라의 탑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세운 석탑으로는 감은사지 3층 석탑과 고선사지 3층 석탑이 있다. 이 석탑들은 통일 직후 신라의 자신감과 힘, 기상을 느낄 수 있는 거대한 탑으로 우리나라 3층 석탑 중에서는 가장 크다. 기단부와 탑신, 상륜부 등 모두 이후에 세워지는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표본이 되고 있다.

 

이후 신라의 석탑은 두 석탑을 본받으면서도 차츰 그 규모가 작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하여 100여 년이 지난 8세기 중엽, 신라 문화의 전성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이 있다.

 

무영탑의 전설을 간직한 이 탑은 석탑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구가하여 정점을 이룬 탑이다. 또 안정감과 상승감을 모두 갖추어 상하 좌우 잘 조화된 균형미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탑이다.

 

석가탑은 우리나라 탑의 전형이며, 이후에 만들어진 3층 석탑의 대부분은 석가탑을 모방하여 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이때부터 다양한 형태를 가진 이형 석탑이 나타나게 된다. 이형 석탑이란 석탑의 보편적인 양식을 취한 전형적인 석탑과는 달리 특이한 모양을 한 석탑을 말한다. 다보탑이나 화엄사 4사자 3층 석탑과 같은 전혀 다른 모양의 탑에서부터, 탑신에 화려한 장식을 새긴 탑 등이 있다. 탑신에 사천왕상 등 수호 신상을 새겨 장식한 이유는 부처를, 즉 진리의 세계를 수호하고자 하는 뜻이다.

 

통일신라 말 이후 고려 시대에는 대부분의 탑은 여전히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탑의 규모도 작아지고 부분적으로도 간략해지는 양식의 변화가 여러 부분에 나타나게 된다. 나말여초의 정치, 사회의 혼란 때문에 예술 정신이 약해진 탓으로 보인다. 또 통일 신라 석탑은 대개 3층으로 만들어졌지만, 이후에는 3층은 물론이고 5, 7, 9층 등 다양한 층수의 탑이 만들어진다.

 

고려 시대에는 아울러 지방적인 특색이 되살아나고 제나름의 특색을 갖춘 탑들이 많이 만들어진다. 옛 고구려 지역에서는 고구려 계통의 6각 또는 8각으로 된 다층탑이 많이 건립되었다. 옛 백제 지역에서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을 모형으로 한 백제계 석탑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익산의 왕궁리 5층 석탑이나 부여의 장하리 3층 석탑은 한눈에 백제계 양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몽고 간섭 이후에는 경천사 10층 석탑과 같은 라마 양식의 영향을 받은 탑도 등장하게 된다.

 

 

탑의 이름은 원칙적으로 절 이름, 층수, 재료를 순서대로 붙여서 부른다(불국사 3층 석탑). 절 이름을 알 수 없는 경우에는 지명을 앞에 붙여서 표현한다(중원 탑평리 7층 석탑). 그리고 절이 현재 남아 있지 않고 절터만 있는 경우에는 절 이름 뒤에 지()를 붙여서 말한다(정림사지 5층석탑). 탑이 파손되어 층수를 알 수 없는 경우에는 생략한다(미륵사지 석탑). 그리고 특이한 모양으로 된 탑의 경우 그 모양을 이름에 넣는 경우도 있다(화엄사 4사자 3층석탑).

 

그리고 탑을 만든 재료가 돌이면 석탑, 벽돌이면 전탑, 나무일 경우에는 목탑, 그리고 돌을 벽돌 모양으로 만들거나 또는 전탑의 양식을 따를 경우에는 모전 석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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