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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철학∙인문학

23-77 고국원왕과 모용황

작성자김인선|작성시간13.12.07|조회수95 목록 댓글 0

23-77 고국원왕과 모용황

 

 

 

그리하여 고구려에서는 태자 쇠(釗)가 등극하고 모용부에서는 모용황이 뒤를 이으니 고구려와 모용 선비의 다툼은 두 번째 마당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쇠는 철(鐵)을 의미하는 순수 우리말이었던 듯한데 음을 빌려 한자로 표기하려니 쇠(釗)라고도 하고 사유(斯由) 혹은 사유(斯劉)라고도 불렀던 듯하다. 미천왕이 태자에게 걸었던 기대를 그 이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어떻든 미천왕의 태자로 등극한 고국원왕(?∼371년)도 만만치 않은 영웅 기질을 타고난 임금이었다. 그런데 모용외의 셋째 아들로 세자였던 모용황(291∼348년) 역시 만만치 않은 인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용을 닮은 얼굴에 이마가 넓적하고 키가 7자8치(약 234cm)나 되는 거구에다 씩씩하고 용감하며 유교 경전 배우기를 좋아하고 천문(天文)에 능통했었다 하니 문무를 겸전한 호걸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모용황은 시기심이 많아 형제들의 능력을 용납하지 못하였으므로 수장의 지위를 물려받고 나자 형제들이 모두 배반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우선 팔이 원숭이처럼 길어 활솜씨가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문무 겸전의 탁월한 능력을 타고난 서장형(庶長兄) 모용한이 숙적인 단(段)부로 망명하고 같은 배 소생의 아우인 모용인은 아우 모용소(昭)를 권하여 함께 반란을 일으킨다.

 

이에 모용황은 아우 소를 잡아다 죽여버리고 평곽으로 달아난 모용인을 치기 위해 막내 아우들인 유(幼)와 치(稚) 및 사마(司馬) 벼슬하는 동수(壽, 289∼357년)를 보낸다. 그런데 이들은 모용인을 정벌할 뜻이 없었으므로 전쟁에 패한 척 항복하니, 이 소식을 들은 요동 일대 군현의 우두머리들이 항복하거나 성을 버리고 달아나서 모용인 세력이 요동 일대에서 크게 떨친다.

 

이에 고국원왕 6년(336) 정월에 모용황은 사마 고후(高)의 꾀를 받아들여 자신이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얼어붙은 바닷길로 얼음을 타고 급속하게 진격하여 육로만을 대비하고 있던 모용인을 격파하여 죽여버린다. 이때 모용인을 정벌하러 갔다가 항복해 합류해 있던 모용유, 모용치 형제와 동수, 곽충 등은 도중을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나는데 모용유 형제는 중도에서 되돌아왔으나 동수와 곽충은 계속 동쪽으로 달아나서 고구려로 망명해 온다.

 

고국원왕은 이들의 형제 싸움을 지켜보면서 내분에 의해 멸망하기만을 기다리며 망명해 오는 자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모용황은 모용인을 잡아죽여 요동일대를 평정한 다음 고국원왕 7년(337) 10월 연왕(燕王)을 자칭하며 대극성에서 나라를 세운다. 이에 하북성 업()에 도읍을 정하고 천왕(天王)을 자처하던 후조(後趙)의 석호(石虎, 335∼349년)는 고국원왕 8년(338) 5월에 수십만 군사를 거느리고 연왕 모용황을 정벌하기 위해 대극성을 포위한다.

사실 석호를 불러들인 것은 모용황이었다. 서남쪽에서 연나라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는 단씨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석호에게 청병했던 것인데, 석호는 모용황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트집잡고 도리어 단씨를 향도로 삼아 연나라 수도를 포위 공격하였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요동과 요서의 많은 성읍들이 후조의 석호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연나라의 운명은 매우 위태롭게 되었다.

 

다행히 장하장(帳下將) 모여근(慕輿根) 등이 성벽에 개미떼처럼 붙어 오르는 조나라 병사들을 물리치며 10여일 동안 악전고투로 성을 지켜내자 조나라 군사가 지쳐 퇴각함으로써 위기를 넘기게 된다. 이때 모용황은 왕자 모용각(恪)으로 하여금 경기병(輕騎兵) 2000명을 이끌고 퇴각하는 10만대군을 추격하게 하여 3만여명을 목베어 죽이는 대승을 거둔다. 강적을 물리친 모용황은 적의 내침 때 항복하여 창날을 거꾸로 댄 반역자들을 토벌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봉추(封抽), 송황(宋晃), 유홍(游泓) 등이 또 달아나 고구려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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