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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이야기

04. 의화단 운동(義和團運動, 1899년∼1901년) 8개국 연합군의 톈진, 베이징 함락

작성자관운|작성시간17.04.21|조회수243 목록 댓글 0


04. 의화단 운동(義和團運動, 18991901) 8개국 연합군의 톈진, 베이징 함락

 

  

 

의화단이 확대되면서 제국주의 열강은 공포와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각 국의 중국 주재 공사관들은 청조에 대하여 강력한 방법으로 의화단을 진압해주도록 요구하였다. 19001월에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공사는 각각 총리아문에 청 정부가 의화단의 활동을 엄금하는 상유를 공개 발표하도록 요구하였다.

 

 

19004월에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4개국 공사가 연명으로 '청 정부가 2개월 이내에 의화단을 진압하지 않으면, 육군과 해군을 산둥 성, 즈리 성 두 성으로 진입시켜 청을 대신하여 평정하겠다.'는 조회를 보냈다. 521일에 베이징 주재 외교단은 다시 청 정부에 대하여 의화단을 엄하게 진압하여 주도록 하고, 만일 진압하지 못하는 관리가 있다면 그 관리를 징계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어 베이징 주재 외교단은 다음과 같이 최후통첩을 보냈다.

 

 

 

단민이 권술을 연습하여 무리를 만들고 전단을 붙이거나 선전하지 못하도록 단속해 줄 것

 

단민이 모여 있는 사원이나 주택의 주인은 모두 수감할 것

 

권민을 체포하는데 소극적인 관리를 징계할 것

 

 

 

 

 

 

 

8개국 연합군.

 

그리고 1900528일부터 530일까지 각 국 공사들은 몇 차례 토의를 거쳐 연합, 출병하여 공동으로 의화단을 진압하기로 결정한 다음, 우선 베이징에 있는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이름으로 군대를 베이징으로 불러들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청 정부가 제공하는 열차 편으로 베이징으로 들어왔다. 190067일 전후에 서양 열강의 각 국 정부는 중국 주재 공사들에게 전권을 부여하고 각 국의 중국 주재 함대사령관에게 공사의 명에 따르도록 지시하였다.

 

 

각 국 공사는 '400명의 병력으로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1900610일에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미국,일본,이탈리아,오스트리아의 8개국이 연합군을 조직하기로 하여 우선 2129(-915,-512,-312,-111,-54,-157,-42,-26)을 구성, 영국 해군사령관 시모어(E. H. Seymour)의 지휘아래 톈진의 다구 포대로 상륙하여 톈진을 경유 베이징으로 들어오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의화단의 강력한 저지와 청군의 공격을 받아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톈진 조계로 물러나게 되었다.(이들 8개국 연합군의 사상자 수는 총290명이었다.)

 

 

 

 

 

 

 

8개국 연합군 해군과 해군기.

 

 

당시 다구 포대 밖에는 32척의 외국 군함이 정박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617일 상륙하여 다구 포대를 점령하고 톈진으로 향하여 714일 톈진을 함락시켰다. 이때 연합군은 톈진을 몇 구로 나누어 점령하고 다음 날 톈진 점령하 관리 문제를 토론하였다. 결국, 러시아, 일본, 영국이 지정한 세 사람이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공동으로 행정을 처리하기로 하고, 722일에 열강의 의지를 반영한 식민통치 기구로 '톈진 도통아문'이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이때는 이미 연합군의 숫자가 11000명으로 늘어났고, 7월 말에는 34000명이 되었다.

 

 

 

 

 

 

 

톈진 점령한 연합군.

 

톈진 함락 이후 연합군은 지휘권 문제로 대립하고 있었다. 우선 8개국 연합군의 통수권 문제였다. '각국 군의 지휘관 계급의 높고 낮음에 따르자'는 것과 '파견 군대 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합리적이지 않았고, 영국은 시모어를 생각했으나 이미 한 번 톈진에서 패한 경력 때문에 고집할 수 없는 입장이며, 그렇다고 러시아 장군에게 통수권을 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여기에 일본도 러시아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에 비하여 독일은 적극적이었다. 결국, 독일 장군 알프레트 폰 발더제(A. L. Waldersee)가 사령관으로 결정되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어느 때에 베이징으로 진군할 것인가?'에 대하여도 쟁론이 끊이지 않았다. 영국,미국,일본은 일본군이 많이 상륙하자 러시아를 압도하기 위하여 즉각 출발하기를 주장하였고, 러시아는 이때 만주침략에 목표를 두고 있어(당시 러시아는 '만주에 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수십만명의 병력을 파병, 만주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서태후에게 호감을 사기 위하여 천천히 진군하기를 희망하였다. 독일도 야심만만하여 국내에서 병력을 동원하고 있었으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하므로 적극적으로 천천히 진군하기를 주장하여 그들의 대군이 오기를 기다리는 실정이었다.

 

 

 

 

 

 

 

베이징 전투.

 

 

 

 

 

 

베이징에 입성하는 연합군.

 

727, 81일과 3일에 걸쳐 톈진에서 각 국의 지휘관이 모여 협의하고, 다음날 18300명이 베이징을 향하여 톈진을 출발하였다.(-9000, -3500, -2500, -2000, -1000, -200, ,- 100) 다음날 이들은 송경, 직례 도독 섭사성, 총병마옥곤의 청 관군을 패배시키는 격전을 치렀으며, 또 다음날에는 양촌(楊村)을 점령하여 즈리 성 총독 유록이 자살하고, 10일에 마두(馬頭)가 함락되자 이병형도 자살하였다. 그리고 814일에야 베이징에 도착하여 공사관은 의화단에게 포위당한지 55일 만에 비로소 풀리게 되었다. 공사관들은 거의 두 달 가까이 버텼는데, 이는 주로 북양대신인 영록이 서태후의 '선전포고' 명을 어기기 어려워 공사관을 공격하긴 했지만 겉만 떠들썩했지 실제로는 형식적으로만 공격을 가한것 때문이었다. 베이징 공격 당시 8개국 연합군의 피해상황은 일본군이 제일 많았고, 그다음이 러시아였다. 사상자는 총 합쳐서 437명이었다.

 

 

서태후의 피신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자금성으로 진격해 들어오자 815, 서태후와 광서제 및 소수 측근들은 베이징을 탈출했다. 이때 서태후는 감금하고 있던 진비(珍妃) 를 영수궁(寧壽宮)의 우물에 밀어 넣어 죽였다. 황제 광서제는 자금성에 남아서 연합군에 강화를 모색하려 했으나 서태후는 그를 억지로 데리고 떠났다. 서태후는 자금성을 탈출할 때 머리를 한족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수수한 옷차림에 서화문 밖에서 노새가 끄는 수레를 타고 베이징을 탈출, 태원을 거쳐서 길고 험난한 도주 끝에 1026일 시안으로 도주했다.

 

 

 

8개국 연합군의 베이징 입성, 약탈과 민간인 학살

 

 

 

의화단원 간부 처형.

 

813일에 8개국 연합군은 베이징에 입성함으로써 점령하였고, 15일에는 서태후가 시안으로 도주하면서 청나라 수도 베이징은 혼란의 상태가 되어버렸다. 연합군은 베이징을 점령한 뒤 3일 간, 의화단 색출을 명분으로 끔찍한 살인, 약탈, 강간 등 범죄를 자행했는데, 희생자의 대부분은 의화단과 전혀 무관한 민간인들이었다. 연합군들은 베이징 시내 거리와 집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잡아갔다. 잡혀간 사람들은 각국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던 성 밖으로 보내져 수수와 옥수수,잡초 등을 가꾸고 군마(軍馬)를 돌보는 강제노역을 해야했다. 조금이라도 열심히 일하지 않는 눈치가 보이면 두둘겨 맞고 괴롭힘을 당했다.

 

 

베이징을 점령하고 머물렀던 연합군의 수는 늘어 9월에는 약 11만명이나 되었다. 이어 '의화단을 색출한다'는 명분하에 '의화단 잔당 소탕 작전'을 전개했다. 이는 보복성을 띄고 있어서 약탈과 폭행은 광분에 달할 정도로 심각했는데, 특히 독일군이 가장 심했다. 이는 독일 외교 공사관 케텔러 남작이 살해당한 이후 독일 원정대가 출정할 당시 황제 빌헬름 2세가 연설에서 청나라를 '야만국으로 취급하라'는 이른바 '훈족연설'에서 자극받은 영향이 컸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도 독일에 못지 않은 약탈과 민간인 학살 행위를 자행하였고, 미국과 일본이 비교적 기율을 지켰다. 베이징을 점령한 연합군은 19019월 신축 조약이 체결되기까지 13개월간 주둔했다.

 

 

 

의화단원들 처형 직후. 효수 장면.

 

연합군은 베이징에 군영을 설치하고 황궁과 아문, 왕부 앞에 있었던 돌사자를 공사관과 병영의 정문 앞으로 옮겨 놓아 자신들의 위신을 내보이려 하였고, 독일과 프랑스는 서로 다투어 직경이 2m가 되는 흠천감의 천문 관측기기를 탈취하려고 하자, 지휘관 알프레트 폰 발더제가 중재하여 일부는 독일에 일부는 프랑스가 갖는걸로 협약을 맺었고, 일부는 프랑스공사관에 일부는 베를린으로 운반해갔다.

 

 

연합군이 베이징에 입성한 다음 자금성은 일본군의 보호아래 들어갔다. 일본군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궁 안에 전해오던 역대로 전해오는 보물을 닥치는대로 약탈해 갔다. 당시 한림원(翰林院)에서 소장하고 있던 '영락대전'을 비롯하여 귀중한 전적(典籍) 46천여 본을 대부분 일본,영국, 프랑스, 독일 4개국이 청나라의 문화재를 약탈해갔다. 뿐만 아니라 각 아문(관청기구)에서 보관하고 있던 은 약 6000만 냥과 각 창고에 보관되어있던 은전을 비롯하여 녹미(祿米)까지 남김없이 약탈해갔다. 또한 서태후가 복원한 이화원도 이때 연합군이 약탈했다.

 

 

한편, 베이징에서의 전투가 끝난 뒤에도 의화단은 각 지역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특히 러시아군이 침입한 동북 각지에서는 의화단이 교회를 부수고 철도를 파괴했다. 이어 의화단은 각지로 흩어져 소규모 전투를 벌였다.

 

 

 

만주에서의 러시아군

 

 

 

의화단이 베이징과 톈진등 일대를 점령하고 철도,전신등 공격했을 무렵, 러시아 제국은 의화단 전쟁을 빌미로 20만명의 러시아군을 만주로 내려보낸다. 러시아 제국은 1900723일 아이훈을, 830일에는 치치하르를, 101일에는 센양을 점령했다. 1130일 랴오둥 반도의 러시아 총독이었던 알렉세예프(Alexeiev) 제독은 성징 장군 증기(曾祺)에게 강제로 '임시 협약'에 서명하도록 했는데, 이 조약은 사실상 만주에서 청나라의 통치권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청나라는 증기에게는 서명할 권한이 없다고 하면서 이 협약의 비준을 거부했다. 그리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작된 협상에서 러시아는 190121612개 항의 조약을 제안했는데, 이 조약은 명목상으로는 만주를 청나라에 반환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철도 경비'라는 이름으로 러시아군의 만주 점령을 공인하는 것이었다. 이 조약은 러시아의 동의 없이 청나라가 군대를 파병하고 만주의 철도 운영권과 채굴권을 타국에 양여하는 것을 금지했다. 또한 만주 점령과 동청철도 파괴에 대한 청나라 측의 배상금 지불과 함께 러시아가 만리장성까지 철도 연장 부설권을 부여하도록 규정했다. 이렇게 러시아는 자신들의 영향권인 만주 내 '철도 보호'를 이유로 주둔하게 되었는데, 이는 만주 진출을 노리는 일본 제국과 충돌하게 되어 훗날 19042월 러일 전쟁이 터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신축조약 체결과 결과

 

 

청나라 조정의 화의 모색

 

 

청나라 조정은 선전포고하고 베이징 공사관 구역을 공격한 지 8일도 못되어 해외의 중국 공사관에 대하여 '공사관을 이전과 같이 보호할 것이며, 기회를 찾아 의화단을 징계할 것'이라고 주재국에 통보하고 '화의를 모색하라'는 전보를 보냈다. 그리고 73일 러시아 제국, 대영 제국, 일본 제국 3개국에게 화의를 요청하고 3국이 나서서 8개국 연합군의 공격을 중지시켜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톈진과 베이징을 점령하려는 마음만 있었던 이들은 이를 모르는 척 하였다. 형세가 위급해지자 청나라 조정은 78일에 급히 이홍장을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으로 임명하여 속히 북상하여 서양 열강과 화의하도록 명령했다. 그런데 이홍장은 먼저 안의 비적을 치고 다시 양병(洋兵)을 물러나게 하자면서, 해로가 막히고 광둥 성의 신민(臣民) 또한 두려움에 빠져있으니 잠시 머물러 이를 진정시킬 수 있도록하여 달라며 북상하려 하지 않았다.

 

 

 

84일에 열강 8개국 연합군이 톈진을 출발하여 베이징으로 오기 시작하자 청나라 조정은 다시 이홍장을 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그에게 즉일로 각국 외교부와 먼저 정전을 상의하게 하였다. 이틀 후 이홍장은 상하이에서 각 국에 담판문제를 상의하자고 연락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리고 베이징이 점령당하게 되자, 서태후는 베이징을 떠나면서 경친왕 혁광,영록,서동,숭기 등에게 베이징에 남아 일을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서동은 베이징이 함락되자 자진하고, 숭기는 영록을 따라 보안(保安)으로 도망갔다가 가족이 연합군에게 당하였다는 소리를 듣고 자살하였으며, 영록은 붙잡힐까 두려워 베이징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혁광만 홀로 93일에 일본의 호위아래 베이징으로 돌아와 백림사를 '유경판사왕대신공소'로 삼아 그 날로 각 지방의 독무들에게 외국인과 교회, 교민을 보호하고 만일 비도(匪徒, 의화단을 지칭.)들이 소란을 피우면 즉시 엄하게 다스리라고 지시하면서 이홍장이 북상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안으로 도주한 서태후는 '동남호보'를 추인해, 이홍장과 경친왕 혁광을 통해 베이징에서 열강과 강화를 추진하는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리고 침략군이 계속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청나라 군대가 어느 지방에서건 침략군에게 저항하지 못하도록 명하여 강화가 깨지는 것을 피하려 하였다. 서태후는 이홍장을 전권대신으로 임명해 강화를 추진했다.

 

 

 

918일 이홍장이 상하이에서 톈진으로 왔는데, 처음 대고에서 영국과 일본 제국은 이홍장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고, 독일 제국도 그의 상륙을 반대하였지만 러시아 제국이 그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1010일에 이홍장은 러시아 제국의 호위아래 베이징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청나라와 러시아 제국 밀약을 체결한 러시아 제국가 그를 전권으로 승인한 것이며 다른 열강들에게 그와 가깝다는 뜻을 과시하고자 하였던 것이었고, 협상에서 보다 많은 이익을 얻으려는 속셈이었다. 이때 러시아 제국은 '철도를 지킨다'는 명분하에 군대를 파병해 만주 지역에 상당한 수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이홍장은 1016일에 각국 대표들에게 강화 초안을 제시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이 공사관을 포위한 것은 국제법을 위반한 것으로 이후에는 이와 유사한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임을 보증한다.

 

중국은 각국에 대하여 배상책임을 질 것이다.

 

중국은 각 국의 요구에 따라 통상조약을 다시 체결할 것이다.

 

8개국 연합군은 총리아문기관과 그곳의 문서를 돌려주어야 한다.

 

강화가 시작되면 즉지 정전을 선포한다.

 

 

 

다음날 이홍장은 8개국 연합군 총사령관 알프레트 폰 발더제가 베이징에 도착하자 즉시 그를 방문하여 의화단의 잔당을 평정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하루라도 속히 화의를 체결하였으면 했으나 열강의 이해가 제각기 달라 이홍장의 초안은 즉시 열강에 의하여 거부되었으며 화의는 지연되었다.

 

 

열강의 이해 대립과 화의 교섭

 

 

열강은 서로 이해대립 때문에 처음부터 이홍장의 전권대표마저 문제 삼으려 하였다. 러시아 제국은 이홍장을 '친러시아파'로 간주하여 그를 대표자로 인정하였으나, 영국, 일본 제국, 독일 제국은 '러시아가 이홍장과 통하여 어떤 비밀 교섭을 진행하여 자기들에게 불이익을 가져오지 않을까 두려워 즉각 승인하지 않았다. 당시 청나라를 둘러싼 열강의 대립은 영국과 러시아 제국의 관계였다.

 

 

영국은 '동남자보'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동남지역에 친영세력을 부식하였고, 러시아는 만주와 몽고,신강을 점거할 계획이었다. 여기에 베이징이 점령된 이후에 군대를 대대적으로 증파한 독일도 만만치 않았다. 이처럼 서로 열강 세력들이 이권다툼을 할 동안 미국이 중재에 나서 현재의 청나라 정부가 '완전한 중국'을 유지시키면서 열강이 중국에서의 이익을 균점하자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과 독일도 협약을 맺어 중국에서의 이익과 조약 상에서의 권리를 존중하도록 하였으며 이 뜻을 다른 나라들에게도 통보하였다. 미국은 이와 같은 협약이 그들의 문호개방과 같다고 인정하였고, 일본 제국도 미국의 정책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어느나라도 할지(割地)를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

 

 

중국에서 열강의 목적이 다 달라 합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8개국 연합군 사이에서도 대립, 충돌할 기미가 보였다. 그러므로 가급적 빠른 시간 안에 다 함께 받아들일 수 있는 화의 조건을 만들어 안정을 찾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다. 결국, 이들은 1223일에 '의화대강 12'를 경친왕 혁광과 이홍장에게 넘기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일본 제국, 미국, 이탈리아 왕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8개국에 네덜란드,벨기에,에스파냐가 합세한 11개국이 공동으로 청나라 정부에게 이 조건을 고칠 수 없다고 조회하였다.

 

 

경친왕 혁광과 이홍장은 화의대강의 내용을 삭감하기가 어렵다고 보았으며, 그리고 전쟁을 조속히 끝맺도록 하기 위하여 서태후가 이를 동의하여 주도록 청하였다. 서안에 있었던 서태후도 하루 빨리 열강의 화의 조건을 받아보려고 기다렸다. 그런데 당시 서태후의 바람은 청조를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가혹한 어떤 조건이라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서태후는 열강이 제시한 '화의대강 12'에 염려스러웠던 조항이 없는 것과, 그리고 자신이 사건의 우두머리로 처벌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는 것을 보고 1227일에 경친왕과 이홍장에게 그대로 따르도록 하라는 지시를 보내 비로소 세부적인 내용을 토의하기 시작하였다.

 

 

의화단과 관계자 처벌

 

 

그러나 강화의 기본적인 원칙이 정해졌다 하더라도 세부사항의 토의는 간단하지가 않았다. 우선 독일제국이 들고나온 의화단 처벌과 책임자의 징계문제, 즉 의화단을 지지한 왕과 대신들의 처벌문제가 제기되었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1900925일에 장친왕 재훈, 이친왕 부정, 패륵 재렴, 단군왕 재의, 보국공 재란, 도찰원좌도어사 영년(英年), 협판대학사 이부상서 강의(剛義), 형부상서 조서교 등에 대하여 작위를 박탈하고 파직하는 등 처벌을 내렸다. 그러나 열강들은 그 처벌이 약하고 처벌받은 사람이 적다고 항의하였다. 이에 1113일에 두 번째 처벌이 있었는데도 열강은 여전히 불만을 나타냈다. 결국, 1901213일과 221일에 걸쳐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처벌을 단행하여 재훈,영년,조서교,육현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고 몇 사람을 사형시켰다. 그리고 의화단의 소탕을 요구하다가 파직되었던 사람을 복직시켜 명예를 회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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