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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이야기

진(晉)의 춘추오패(春秋五霸)

작성자관운|작성시간17.10.07|조회수203 목록 댓글 0


()의 춘추오패(春秋五霸)

 

 

 

 

 


 

 

 

혹은 . 중국의 주나라 서주 시대부터 존재하던 제후국. 중국어 발음은 Jin(). 춘추오패의 하나다. 기원 전 1042 ~ 369. 37673. 삼진의 분열(기원전 403) 전까지로 따지면 35598.

 

흔히 말하는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진나라()와는 다른 나라로, 비슷한 시기에 공존했던 국가지만 보다 일찍 멸망했다. 춘추전국시대의 전반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인 춘추시대에는 강국이었으나, 말기에 조(), (), () 삼국으로 분할된 나라다. 이는 춘추시대는 막을 내리는 사건 중 하나로 평가 받고, 이후 전국시대가 열렸다고 본다. 삼국이 독립한 이후로도 진나라는 명맥 자체는 남았었지만, 극도로 작아져 곧 멸망하였다.

 

 

2. 상세

 

이건 주나라() 왕실과 동성인 희()성 제후로 작위는 후작이었으며 동천 이전에 분봉 초기부터 이미 노나라(), 송나라()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중원의 대제후의 하나였다.

 

시조는 당숙 우로 아주 어릴 적에 주성왕이 소꿉놀이를 하면서 동생 희우에게 흙과 풀로 작위를 내린 걸 사관이 보고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장성한 후에 빼도 박도 못하고 영지를 수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희우는 진의 시조로서 당숙우라고 부른다.

 

서주 시대의 기록은 많이 산일했으나, 유물에 남은 명문들을 분석해 보면 서주 중후기 주나라의 힘이 점차 쇠해가고 노나라, 제나라 등 초기 주의 주요 제후들이 이탈하는 경향을 보일 적에도 진나라는 주나라 편에 서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목후가 죽자 원래는 아들 구가 뒤를 이어야 했지만 그의 숙부 상숙이 찬탈해 버렸다. 하지만 4년 후에 상숙을 몰아내고 군주에 오른 구, 즉 문후는 자리를 찾게 된다. 문후는 서주가 망하고 동주가 들어서는 혼란기에 주 평왕을 도와 왕실을 다시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워 진나라의 이름을 크게 떨쳤다.

 

그러나 문후가 죽은 후 진나라는 본격적인 내홍을 겪고 만다. 문후의 뒤를 이은 아우 소후는 문후의 동생인 숙부 성사를 곡옥에 봉해 환숙이라고 일컫는다. 이 때의 진나라는 수도를 익 땅에 두었으므로 익나라라고 하기도 하며 점점 익나라보다 곡옥에 봉해진 환숙의 곡옥이 점점 강성해진다.

 

이렇게 익과 곡옥으로 결국 진나라는 두 개로 분열된다. 환숙과 장백은 여러 번 익나라를 쳐 군주를 죽이기도 하고 익에 입성하려고 했지만 익나라 백성들의 반항과 주나라의 정벌로 번번히 실패한다. 그러다 환숙의 손자이자 장백의 아들인 칭, 즉 무공때까지 오게 된다. 곡옥이 훨씬 강성함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익을 접수못한 원인은 주나라의 견제와 백성들의 저항이라고 생각하고 이번에는 철저히 익을 공격한다. 결국 익을 점령하고 익에 있던 진나라의 보물을 모두 당시 주나라 이왕에게 뇌물로 바치고 정식으로 진나라 군주로 인증받았다. 결국 방계가 직계를 몰아냄으로서 혼란은 종식된다. 춘추오패 진문공(文公)의 할아버지인 진무공(武公) 시절 내전을 마무리짓고 춘추시대의 초강국으로 성장할 기반을 닦았다. 진 무공 이후로는 시호를 ''에서 ''으로 바꿨다. 작위는 계속 후국. 춘추에서 보면 진나라 영주를 생전에는 '진후'로 칭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비슷하게 시호가 후에서 공으로 바뀐 위나라에 대한 사마정의 사기색은의 논리를 - 대개는 사기위강숙세가의 주석으로 찾아볼 수 있다 - 그대로 적용하면 시호가 ''에서 ''으로 바뀌는 것은 오히려 대우가 떨어진 것에 해당한다.

 

무공의 아들 헌공 때 국운이 크게 흥성하여 인접 제후국인 우와 괵을 멸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후계자를 둘러싸고 공실과 조정이 사분오열하는 내란이 다시 발발, 둘째 공자 중이와 셋째 공자 이오 두명은 지지세력을 이끌고 국외로 망명하고, 적통의 세자 신생은 강요에 의해 자살하는가 하면, 측실 소생의 어린 아들 혜제와 탁자가 연이어 왕위를 계승하지만 두 명이 연달아 반대파 대신의 손에 암살당하는 등 그야말로 극심한 혼란상을 연출하였다.

 

이 혼란상은 결국 이웃한 진(, 2번 항목의 진나라)의 두 차례에 걸친 개입으로 간신히 수습되고, 훗날의 패자가 되는 문공, 공자 중이가 최후의 승자가 되어 후작위에 오른다. 두 차례에 걸친 내전으로 진의 공실은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했으나, 문공은 자신의 즉위에 공훈을 세운 신하들에게 봉토와 군권을 나눠주어 그 공백을 메꾸었다. 이에 내정이 안정된 진은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중원의 제후국을 위협하던 초나라를 물리치고, 제의 뒤를 이어 중원의 패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문공 이후로도 진은 중원의 최강국으로서 사실상의 패권을 행사했으나, 그 위세는 문공 시절만 못했다. 서쪽의 이웃 진()나라의 진출을 경계하느라 중원의 정세에 소홀했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문제로 봉토와 군권을 나눠받은 공신 일족들이 자기들끼리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신들의 막장 행각은 초장왕과 중화의 패권을 두고 싸웠던 필 전투에서도 볼 수 있는데, 공신들이 한자리씩 차지하고 지휘체계가 전혀 통하지 않아 각개전투를 벌인 끝에 개박살이 나고 말았다.

 

진의 불행은 이렇듯 자기 목소리를 크게 낼 공신을 컨트롤 할 수 있을만한 군주가 없었다는 점에 있다. 문공은 비록 자신을 수십년간 보필했음에도 불구하고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지위를 박탈하거나 목을 베어버릴 정도의 권력이 있었고, 불타죽은 개자추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성깔도 무시할 수 없을정도로 깐깐한 노인네였다. 이런 진 문공 밑에서 굴러왔던 공신 1, 2세대들을 제어하는것은 애초의 불가능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군 통수권자이자 초를 패배시킨 성복 전투의 제 1 대공을 세웠던 중군 원수 선진이 진 문공의 친아들 진 양공의 얼굴에 침을 뱉을 정도였으니. 문공 사후 100년동안 8명의 군주가 즉위했고, 암군이라 공신들에게 제거당하거나(혹은 공신들과의 싸움에 밀려 죽은 뒤 기록이 조작되었을 수 있다. 단적인 예로 암군을 죽인 조씨 일가를 반역행위라 기록한 사관의 경우가 있을수 있겠다.), 너무 어린 나이에 권좌에 앉아 권위는 커녕 공신들이 설칠 판을 깔아주었고 그나마 뭘 좀 해볼만한 명군이었던 진도공은 젊어서 죽고 말았다. 어딘가 하자있는 군주가 계속 권좌에 오르고, 바지사장격으로 앉아있는 동안 공신들은 아귀다툼을 벌여댔다. 그래도 강국의 기본 가락은 남아있었던지 필 전투 이후로 이를 갈고 있다가 언릉 전투에서는 초왕을 애꾸눈으로 만들어 버리는 등 대 굴욕을 안겨주며 마지막으로 패권을 지켜내는듯 했으나.....

 

경쟁자가 많은 권력투쟁이 늘상 그렇듯이 유력 씨족들은 자기들 중에서 제일 센놈을 조지고 보는 식으로 무력항쟁을 거듭했고, 이 와중에서 공신 출신인 호씨(狐氏), 선씨(先氏), 극씨(郤氏), 난씨(欒氏), 순씨(荀氏), 서씨, 범씨(范氏)등의 유력한 일족들이 몰살당하거나 추방당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특히 이 권력투쟁 초기에 망한 씨족 중 많은 수, 예를 들면 호씨, 속씨, 극씨, 난씨 등은 진 공실과 혈연적으로 비교적 가까운 집안들이었다. 그러다보니 왕실의 권위도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당연지사. 좌전에 보면 숙향이 진나라 공실에서 갈려나온 집안들이 대부분 다 끝장났다고 말한다. 양설씨(羊舌氏) 역시 진나라 공실에서 갈려나온 집안이고, 마지막에는 진나라 공실들이 다 망해가는데 양설씨만 살아남을 도리는 없고 결국은 양설씨마저도 망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됐다. 양설씨는 지씨의 모함으로 멸족됐다.

 

결국 춘추시대 말 즈음엔 지씨(智氏), 조씨(趙氏), 위씨(魏氏), 한씨(韓氏)의 네 집안이 나라의 권세를 좌지우지하게 되었고, 그 중에 No.2였던 조씨가 위씨와 한씨를 끌어들여 No.1인 지씨를 무너트리면서 이 기나긴 권력투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셋만 남은 이들 삼가(三家), 결국 진나라를 셋이 사이좋게 나눠갖기로 합의하고, 각자 조(), (), () 삼국을 건설하게 된다.

 

이 진나라의 삼분을 역사가들은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경계가 되는 사건으로 간주한다. 왜냐면 원래는 명목상으로나마 종주국인 주의 천자가 명분을 가지고 있는 진의 편을 들어주면서, 다른 제후국을 동원해 세 가문을 깨갱시키고 진나라를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질서유지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주나라의 천자가 그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기원전 403년 패도로써 이루어진 진의 삼분을 승인해 버리면서 이 사건은 주의 권위가 이미 땅으로 추락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명분도 필요없고 패도가 짱이다'. 이것이 바로 전국시대인 것이다.

 

진의 삼분 이후로도 사실 진나라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 영토가 익과 곡옥의 두 도시를 다스리는게 고작인 성읍국가가 되어버렸다. 후대 사람들이 없어진거나 다름없다고 취급해버릴 정도로 망했어요. 진나라의 공은 한때는 신하였던 조, , 한나라의 군주들에게 문안인사나 올리고, 성 밖으로 계집질을 하러 다니다 강도에게 순삭당하는 등 끝없는 굴욕의 연속. 그렇게 100년을 더 버티다 나중에는 그 두 마을조차도 빼앗기고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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