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의 군사적 기반과 위나라의 군사 제도
위나라 군사력은 조조 Cao Cao의 사병 personal army에서 비롯한다. 189년 말, 자신의 재력과 일부 후원을 통해 조조는 5천의 병력을 일으킨다. 그의 초기 장수와 관리 즉 하후돈 Xiahou Dun, 하후연 Xiahou Yuan, 조인 Cao Ren, 조홍 Cao Hong 등은 그의 동족 즉 가까운 친척들이었다. 동탁의 몰락 이후, 조조는 연주에 작전 근거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에겐, 다수의 소규모, 일반적으로 씨족 기반의 군사 집단이 합류했다. 이들 가운데 이전 Li Dian, 허저 Xu Zhu의 사병 집단 personal army도 있다.
192년 조조는 사로잡은 3십만의 황건적 Yellow Turbans도 흡수한다. 이들 황건 출신들은 220년까지 청주병 Qingzhou Army으로 알려진 독립 집단을 유지한다. 190년대의 동시다발적 전투에서 이들 부대 모두 조조에게 충성하고, 훗날 위 Wei 나라 군대의 기반이 된다.
조조는 208년 적벽대전 Battle of Red Cliffs에서 결정적으로 패배, 그후 손권의 수군 marine forces (역주: 양자강이 바다처럼 넓기는 하나 바다는 아니므로 해군 아닌 수군으로 번역-_-;)에 대해 결코 주도권을 쥘 수 없었다. 224년과 237년 두 차례에 걸친 위나라의 선박 건조에도 불구, 전문 기술이나 인적 자원에서 양자강의 방어망을 깰 수 없었다.
삼국 시기 내내, 위나라는 인구가 가장 많아서 병력도 제일 많았다. 주유 Zhou Yu는 적벽에서 조조가 2십만 병력을 야전 배치할 수 있다 추정했다. 위나라 총병력은 대략 3십만으로 추정돼 왔다. 263년 촉나라가 정복될 당시, 위나라의 병력 증강과 이어진 촉나라의 항복으로 총병력은 아마 5십만까지 팽창했을 것이다.
기병과 충격 전투 Cavalry and shock warfare
207 년의 오환 정복전 Conquest of the Wuhuan과 북서 지방 전투를 통해 조조는 중국의 기병 전력을 효과적으로 장악한다. 특히 오환은 중국 내 최고의 기병 집단을 보유한 것으로 이름났다. 조조는 또한 상당수의 흉노 Xiongnu 병력을 지휘하고, 아울러 정령 Dingling, 저 Di, 강 Qiang족과 몇몇 북방 유목민족 일부도 그의 군대에 썼다.
상대적으로 소수였지만, 이들 기동성 있는 병력은 결정적 역할을 담당, 이런 경향은 삼국 시대뿐 아니라 그후 중국 중세 시기 전반에 걸쳤다. 이 시기 들어서야 말 갑옷 馬鎧에 대한 언급이 일부 문헌에서 보인다. 말 갑옷을 갖춘 말 겨우 10필로써 적 기병 300을 맞설 수 있다고 조조가 자랑했다. 등자 strirrup의 사용은, 최소한 전투 상황에선 확증할 수 없지만, 위진 Wei-Jin 시기의 중기병의 묘사에 따르면 그 다리를 두꺼운 목제 측판 sideboard으로 싸서 말 위에서 안정되도록 하였다. 최소한, 북 중국에서 기병의 타고난 기동성은 이러한 혁신으로 배가돼, 보병에 대해 상당히 유리해졌다.
전투 개시 전에도, 기병은 정찰에 필요하고, 적 수송 대열을 기습할 수 있고, 전투 후에는 효과적 추격에 필수였다. 그러나 기병의 주된 매력적 용도는, 그 '충격' 전투 능력으로, 기병 돌격에 보병이 동요해서 그 효과가 높아졌다. 그들의 뛰어난 기동성으로 측면이나 후방을 공격하거나 적 대열의 어느 빈틈이라도 재빨리 파고들어 확장할 수 있었다. 기병이 말을 타고 높은 위치에서 공격, 쉽게 적 보병을 위협, 기병의 급습으로 적 보병을 공황에 빠져 도주케 하거나, 그들을 아군 보병의 밀집 대형으로 몰아 넣을 수 있었다.
실제 전투에서, 유럽의 암흑시대처럼, 말을 탄 지휘관과 그 수행원들은 혼란한 적 대열에 대한 공격에서 선봉 역할을 했다. 일단 전투가 개시되면, 그들은 지휘하기보다는, 앞줄에서 스스로 위험에 노출, 싸움을 돋우는 역할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 (역주: 일종의 응원 단장? -_-;) 개별 지휘자와 그들 부하들 간의 위험한 무력 충돌은 의심할 여지 없이 소설 삼국연의의 무수한 영웅적 결투들의 바탕을 이룬다. 이 역사 소설과 다르지 않게, 그 성공은 종종 지휘관과 그 심복들의 개인적 용기에 의해 결정되곤 했다.
*역주: 삼국연의를 읽다보면, 무수한 일대일 결투를 보게 되고, 정말 실제로도 이러했을까 싶은데, 아주 똑 같지는 않았지만, 비슷하게 전투를 진행한 모양이군요. 정사 삼국지 관우전을 봐도, 관우가 실제 안량을 적진 한 가운데에서 벤 이야기가 있긴 하지요.
군사 제도
한나라의 권위가 붕괴된 상황이지만, 한나라 제도는 위나라 정권에도 상당하게 잔존했다. 그 결과 위나라의 군사 조직은 상당 부분 한나라를 계승했다. 200년 관도 전투 Battle of Guandu 이후, 조조의 군대는, 몇달에 한정된 작전들을 수행하는 단일 부대 운용을 중단했다. 북 중국에서 조조의 주 적수이던 원소의 병력을 흡수, 군사 지휘 계통에 구조적 변환이 일어났다. 고도록 전문화된 '중앙 군대' (중군 中軍)가 상비군으로 출현하고, 다양한 지방 군대는 뭉뚱그려 '외곽 군대' (외군 外軍)로 불리게 된다.
중군의 역할은, 수도 외곽에서 두드러지게 더욱 활동적 역할을 했지만, 동한 Eastern Han의 북군 北軍의 역할과 다르지 않다. 중군의 기원은, 조조의 친위대 이른바 '호랑이-표범 기병대' (호표기虎豹騎)다. 이 엘리트 부대의 초창기 지휘관은 모두 조조의 친척으로 조휴, 조진, 조순이다.
그 휘하에 허저, 전위와 그 부곡 Buqu (군대 조직의 하나)이 포함된다. 220년, 중군에 중견 Zhongjian 中堅이라는 연대가 편성돼 허저가 지휘한다. 그뒤 조비 Cao Pi와 조예 Cao Rui가 추가해 230년대까지 모두 5개의 연대가 있게 된다.
외군 外軍은 수적으로, 아마 결코 5만을 넘지 못했을 중군보다 몇배는 많았다. 222년 조비는 조정에서 임명한 도독 都督이 외군의 지방 부대들을 통솔토록 하였다. 이들 도독은 정규 지방 사령관으로서 국경의 군사 문제를 책임졌다. 그들 휘하의 지방 군대는 때로 동군 東軍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들 부대 외에 향토 부대 (주군병 州郡兵)가 존재, '대 행정관' (태수 太守) 이나 '감찰관' (자사 刺史)이 이끌었다. 이들은 관할지역에서 일반 행정과 군사문제를 모두 제어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런 제도에 잠재한 문제는 당시 정치가들이 인식했다. 두서 Du Shu (杜恕)가 글을 올려, '감찰관'의 군사적 역할을 폐지할 걸 주장했다.
부곡과 세습 군대 Buqu and hereditary armies
부곡 Buqu (部曲) 은 직업적 사병 私兵 조직이다. 부 bu와 곡 qu는 한나라 시기 정규 군사 조직이었지만, 한나라 말기와 삼국시대엔 둘이 합쳐진 '부곡'이란 용어가 개별 군벌이 유지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부리는 사설 용병 집단을 지칭하게 되었다. 지휘관과 부곡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세습이었다. 지휘관이 죽으면, 그 가족의 남성 중 하나가 지휘권을 세습하고 병사가 죽으면 그의 남성 친척이 그 계급을 세습했다. 본질적으로 전체 가구들은 우선 소작농이 되고 필요시 무장한 소작농이 되었다.
광무제가 기원후 1세기에 모병 募兵 부대를 해산한 이래, 지방 군대는 의도적으로 약체화되고, 향토 부대는 위급할 때만 소집됐다. 한나라 모델과의 주요한 단절 중 하나는, 위나라의 정부군은 부곡 모델을 매우 크게 확장한 군역 제도를 채택했다는 것이다. 병사들의 가족은 수도와 몇몇 주요 거점에 집중적으로 거주했는데, 병사들이 작전에 나간 동안 편리한 인질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것은 주로, 인력 손실이 다대할 수 있는 상황에서 안정적이고 신뢰할 만한 인력 공급원이 필요해서다. 병사와 그 가족은 '군사 가족' 지위가 부여돼, 군사 당국의 통제를 받았다. 인력 풀 pool 이 줄어들지 않도록, 병사와 그 친척들은 '군사 지위' 내의 다른 가족들과만 결혼하도록 허락 받고, 평생 복무할 것으로 기대됐다.
한나라와 달리, 평민들은 정규적 군사 복무 의무가 없었지만, 드물게 위급 시에 일시적으로 징집될 수 있었다.
둔전제도 Tuntian policies
둔전 제도란, 군사 농경 집단으로서, 위나라 군대를 부양할 목적으로 조조가 확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