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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이야기

재력을 다툰 왕개와 석숭(石崇, 249년∼300년)

작성자관운|작성시간17.10.29|조회수158 목록 댓글 0


재력을 다툰 왕개와 석숭(石崇, 249300)

 

 

 

 


 

 

 

석숭(石崇, 249~ 300)은 중국 서진의 문인으로, 석포의 막내아들이며, 자는 계륜(季倫), 아명은 제노(齊奴)이며 청주(靑州) 발해군(渤海郡) 남피현(南皮縣) 사람이다.

 

 

무제(武帝) 때 수무령(修武令)으로 관직을 시작해 성양태수(城陽太守) 등을 지내고 안양향후(安陽鄕侯)로 봉해졌다.

 

혜제(惠帝) 때 중랑장(中郞將), 형주자사(荊州刺史) 등의 벼슬을 하였다.

 

형주자사에 부임하면서 항해와 무역으로 큰 부자가 되었는데, <진서(晉書)>에는 "멀리 가는 상인과 상인을 위협하여 치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마충의 황후인 가남풍(賈南風)이 조정에서 전권을 휘두르며 가씨(賈氏) 일족의 권세가 커지자 가남풍(賈南風)의 조카인 가밀(賈謐)과 가까이 지내며 이른바 '24명의 벗(二十四友)' 가운데 하나로 불렸다. 학문과 시에도 능통하여 문인으로서의 명성도 높았다. 6권으로 된 문집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에도 '사귀인(思歸引)', '사귀탄(思歸歎)' 등의 시가 전해진다.

 

또한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는데, <진서(晉書)><세설신어(世說新語)> 등에는 황제의 인척인 왕개(王愷)와 부를 다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낙양[洛陽] 서쪽에 금곡원(金谷園)을 지었는데, 집안을 매우 호화롭게 꾸며 뒷간도 화려한 옷을 입은 십 여명의 시녀들이 화장품과 향수를 들고 접대하게 하여 손님들은 침실인 줄 알고 놀라 돌아올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금곡원(金谷園)에 관리와 문인들을 초대하여 주연(酒宴)을 자주 열며 풍류를 즐겼는데, 주연(酒宴)에서 시를 짓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벌로 세 말의 술을 마시게 하였다고 한다. 이 고사에서 '금곡주수(金谷酒數)'라는 말은 '술자리에서 받는 벌주'를 가리키게 되었다.

 

석숭에게는 녹주(綠珠)라는 애첩(愛妾)이 있었는데, 피리를 잘 불 뿐 아니라 악부(樂府)도 잘 지었다. 그는 녹주를 총애하여 '원기루(苑綺樓)' 또는 '녹주루(綠珠樓)'라고 하는 백장 높이의 누각을 지었다.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의 측근이었던 손수(孫秀)가 녹주의 미색을 탐하였으나 석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300, 사마륜이 가후(賈后)의 세력을 제거하고 전권을 장악하자, 석숭은 황문랑(黃門郞) 반악(潘岳)과 함께 사마윤(司馬允)과 사마경(司馬冏) 등과 연합해 사마륜을 제거하려 했다. 손수가 이를 알고 대군을 이끌고 금곡원을 포위하자, 녹주는 누각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였고, 석숭은 반악 등과 함께 사로잡혀 참수당했다.

 

 

석숭은 관직을 이용해 향료 무역 등을 독점하여 큰 부자가 되었는데, 백여명의 처첩(妻妾)을 거느렸으며, 집안의 하인도 8백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은 물론 한국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오랜 기간 동안 부자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다. 중국에서 석숭은 복(), (祿), ()의 삼선(三仙)의 가운데 녹(祿)을 상징하는 인물로 숭앙되었다.

 

 

사마씨의 진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시기. 진나라에서 유명한 부자가 두명이 있었다. 이름은 왕개와 석숭.

 

 

먼저 왕개는 표류로 유명한 왕랑의 손자이자, 왕원희의 동생으로 진나라를 건국한 사마염 황제의 외삼촌의 위치에 있었고, 석숭은 사도까지 올라간 석포의 막내아들로 진나라 멸먕의 단초가 된 가남풍일가와 친했으며, 문인으로더 이름이 높았다.

 

 

그는 형주자사에 재직했을 당시 상인들과 상선을 습격(...)해서 부를 쌓았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자신들의 부를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왕개는 땅을사서 울타리를 만들 후 돈을 쌓아올려서 그곳은 금전의 제방이라고 불리울 정도였고, 석숭은 화장실을 호화롭게 꾸민다음 십 여명의 시녀들이 화장품과 향수를 들고 접대하게 해서 처음온 손님들은 침실인줄 알고 나갈려고 했다고 한다.

 

 

이런 두 사람이 충돌을 일으킬 것은 명약관화.

 

 

왕개가 집안의 솥을 엿기름으로 닦자 곧 석숭은 밥을 할 때 땔감으로 밀랖(....)을 썼으며, 또 왕개가 집 앞 대로 양쪽으로 20km에 걸쳐 자사포로 천막을 치자, 석숭은 훨씬 비싼 자색비단으로 25km를 쳤다.

 

 

왕개가 밀리는걸 안타깝게 지켜본 사마염 황제는 황실의 보물인 산호수를 왕개에게 급히 보내줬다.

 

 

왕개는 기뻐하며 곧 산호수를 가지고 석숭에게 가서 자랑질을 했는데, 석숭은 콧웃음을 치면서 몽둥이로 산호수를 부숴버렸다. 당연히 왕개는 황제의 하사품을 어찌할거냐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석숭이 미안하다며 보상을 해주겠다고 하인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산호수를 가져오라고 하니 황제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이 대여섯개가 나왔다.

 

 

사마염은 통일당시에는 검소함을 미덕으로 여기고, 훌륭한 정치를 펼치고자 했지만, 타락해서 인구가 2천만명 정도인 시절에 1만여 명의 처녀를 후궁으로 만들어서 심각한 성비불균형을 낳았고, "사치가 심하면 좋지만 술병은 평생 못 고친다"며 술버릇 있는자 보다는 사치벽이 심한자를 지방관으로 임명할 정도였다.

 

 

즉 황제나 호족들이나 미쳐 날뛰던 시절이었으니[사마염의 뒤를 이은 황제는 백치로 유명한 혜제이다] 진나라가 오래갈 수가 없었던 것. 결국 석숭은 팔왕의 난에 휘말려 끔살당하고, 왕개에 대해서는 전해오는바는 없으나 후손들은 석륵일당에게 멸족당했으니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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