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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이야기

일본 부락민(部落民 / 部落差別問題)

작성자관운|작성시간18.04.13|조회수1,123 목록 댓글 0


일본 부락민(部落民 / 部落差別問題)

 

 

 

 


 

 

 

부라쿠민은 전근대 일본의 신분 제도 아래에서 최하층에 위치해 있었던 천민이자 그 혈통을 현대 일본사회에서 비하하는 속칭이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서 신분제가 철폐되고 평민계급으로 흡수되나, 기존에 타 계급이였던 평민들이 동일시 되는 것을 거부, ()평민이라고 부르며 차별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신분제의 철폐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일본사회의 최하층에 있다. 물론 다른 자본주의 국가처럼 그 중에서 재벌, 상류층중산층서민층극빈층 하는 식으로 자본과 권력, 명예 등에 따라 나뉘는 다양한 계층이 존재하지만, 부라쿠민의 문제는 다른 계층과는 달리 재산이나 인맥 등이 아닌 혈통과 그들이 모여사는 지역에 의해 차별받는 것이다.

 

 

2. 역사

 

 

어원은 피차별부락민(被差別部落民). 이 단어가 줄고 줄다보니 부락민, 즉 부라쿠민이 되었다. 한국어로 부락은 마을을 일컫는 한자어이다. 일본어에서도 원래는 마찬가지였지만, 이 부락이란 단어가 시간이 지나면서 잘 안 쓰이게 되고 그 파생어인 부라쿠민만 부정적인 뜻으로 남아서 쓰이다 보니, 시나브로 상위 개념인 '부락' 어감마저 나쁘게 뒤바뀌었다. 일본에서는 이 단어 자체를 상당히 부정적으로 여기므로, 만약 일본어로 문장을 쓸 일이 있다면 부라쿠민이라는 단어를 매우 조심해서 작성해야 한다. 상술했듯 이 단어는 일본인들에겐 모욕 그 자체다. 폭언과는 수준이 다르다. 실제로 소설 등에서 '부락'이라는 단어를 썼다가 시민단체에서 항의가 들어와서 이미 전국 서점에 풀린 책을 모조리 회수하거나, 심지어 판매가 금지되는 일도 매우 빈번히 일어난다. 그래서 부락을 대체할 집락(集落)이란 단어를 만들어 사용하고, 인터넷에선 부라쿠민(burakumin) 라틴 표기 앞글자만 딴 B라는 은어가 주로 사용된다. 또한 강 건너(こう)라는 식의 속어도 쓰이고 있다. (부라쿠민 출신이라고 판단되는) 소설가 나카가미 켄지는 "골목길(路地)"이라는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그래도 예외는 있는지, 정말로 저 단어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도 있다. 어쩔 때는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 자신이 매장당할 각오를 하고 이 단어를 내뱉을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일본 천민계급의 기원은 확실한 것이 없다. 이것은 근대 일본이 군국주의화되면서 야마토 사상을 꺼내들었던 것의 여파라고 추정되는데 당시의 일본은 아이누를 비롯해서 일본 인근 지역을 사실은 전부 일본 땅이라는 대일본주의 주장을 펴기 시작했고 이들과 이들의 토지를 흡수하면서 '일본의 위대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소수집단의 역사를 부인하고 일체화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자료들이 사라졌고 이에 따른 연구의 진보는 미미한 상태. 천민계층의 기원 시점은 근대, 중세, 고대로 나뉘어지며 근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집권 기간이었던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중세는 11세기라고 보는 것이 보편적. 에도 시대에는 천민 계급을 에타(穢多), 히닌(非人)이라고 불렸다. 에타는 직업과 상관 없이 혈통으로 결정되었고, 히닌은 터부시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 즉 망나니, 장의사, 백정 등을 주로 뜻했다.

 

에타의 탄생도 일본이 여러 국가나 부족 등으로 쪼개져 전쟁을 하던 시기에 피정복당한 세력이 그 바탕이라느니 외국에서 표류해온 무리를 노예로 삼은 것이라니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민속학자 아카마츠 케이스케의 연구에 의하면 적어도 전국시대에는 이미 에타 내지는 그에 준하는 집단이 존재했다고 한다.

 

과거의 일본은 지배계급인 무사 층에 불만이 몰리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계급간의 불화(차별)를 부추겼으며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서는 사민평등을 실현하기 위하여 제도적으로 신분계급을 없애면서 이들을 모두 평민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사람들은 에타출신 평민들을 '() 평민'이라 부르며 여전히 차별하였다. 메이지 시대가 화족 등의 소수의 사회 고위계층에 이끌려갔던 시대였던 만큼 결코 차별이 사라지지는 않았고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로도 마찬가지였다. 2차대전 패전 이후에도 문제되는 일부만 잘라내고 나머지 시스템은 그대로 이어간 것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아무튼 그렇게 차별당하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을 피차별 부락,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피차별부락민이라고 부르게 되면서 부라쿠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구 천민계급만이 부라쿠민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피차별 부락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을 부라쿠민 이라고 부르는데 에타나 히닌의 집단 거주지역 이외에도 전쟁포로, 전염병 보균자, 옛 에조, 하야토, 구마소 등의 집단 거주지역이 피차별 부락으로 분류되었다. 부락 내에서 어느정도 성공한 사람이 부락 밖으로 나가거나, 부락 밖에서 빈곤한 사람이 생활비가 싼 부락으로 유입되는 경우는 계속 있었고, 시즈오카 현에서는 민간음양사가 메이지 초기 음양사 폐지령 이후 실직하여 빈곤으로 인해 피차별민으로 간주된 사례가 보고된 바 있다. 그 외에도, 부락 밖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부락으로 유입되는 경우, 식민지 시절 일본으로 넘어간 한국인이 유입되는 경우도 있다.

 

1884년 도쿄대학에 인류학회가 생기면서 부라쿠민의 기원등에 대한 연구도 시작된다. 그러나 당시의 기관지를 보면 신분제가 철폐되었음에도 당당하게 에타라는 멸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당시에 연구 중에는 심지어 안구가 빨갛고 고기를 먹기 때문에 조선인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글도 있었다. (원래 일본에는 육류음식이 없었다. 1871년까지 육식은 금지되었으며, 메이지 유신에 의해 일본인의 신장을 개선하기 위한 방법으로 육식이 권장됐지만 육류 문화가 퍼지는데는 많은 시간이 소비됐다. 1900년 초반이 되어서야 육류 문화가 조금씩 퍼지는 정도였다.) 1908년에는 전국적인 지방개선운동을 시행하며 미에현에서는 부락개선정책도 같이 시행되는데, 이것은 차별대책이 아닌 치안대책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빈곤층에서 범죄가 많이 발생하는데, 당시 미에 현 빈곤층의 대부분은 부라쿠민이였기 때문이다. 이때는 에타의 타인종 도래 기원설을 반영하여 특수부락(特殊部落), 특종부락(特種部落)이라고도 불린다.

 

그렇다고 차별을 가만히 두고 보기만 했던 건 아니다. 1922년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영향으로 수평사(水平社)가 등장하여 부라쿠민 해방운동을 이끌었다. 당시 발표된 수평사 창립 선언문은 일본 최초의 인권선언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수평사는 이후 여러 조직으로 갈라져버렸고 완전한 해방을 달성하지 못 한 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2.1. 오랫동안 유지된 이유

 

 

여기까지라면, 노예, 천민 신분이 유지되던 국가와 다를바가 없다. 문제는 이런 천민 거주집단을 차별하는 사회적 풍토가 일본에 현대까지도 계속 남아있다는 것이다. 인도 공화국에서 불가촉천민이 받던 대접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인도 공화국의 경우 1950년대에 카스트 제도를 법적으로 완전히 철폐했다. 물론 말 그대로 법적으로만 없어진 것인지라 아직 시민들의 뇌리 속에 카스트의 잔재는 상당히 남아있지만, 타고난 직위보다는 경쟁력이 더 중요시되는 21세기 사회의 물결 아래 인도 정부가 경제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하위 카스트에게 복지, 세금 감면 등 많은 사회적 혜택을 제공하는 식으로 계층간 평등화를 꾀했고, 인도로 진출한 많은 외국계 대기업들이 '카스트? 그거 먹는 건가요? 신분이 낮으면 어때, 일 잘하는 사람이 장땡이지' 하면서 그런 거 전혀 신경 안 쓰고 어디까지나 능력만으로 사람을 뽑아다 쓰다보니 점차 인도 대중들 사이에서도 계급이 아닌 능력과 사회적 지위를 더욱 인정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퍼져나갔다. 외국계 기업과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적은 시골 중심으로 카스트의 악습은 아직 남아있으나, 분명 과거 인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고용주 측이야 그렇다 쳐도 인도인 동료 직원들도 과연...?

 

 

 

한국에서 이런 집단적인 신분 차별이 고려시대에는 향, , 부곡 등의 지역명을 붙인 천민 집단 거주지라는 형태로 존재했다. 그러나 고려 중기만 가도 군현제의 변동과 맞물려 변하다가 고려 말기엔 차별이 약화됐다. 조선시대에는 야인(野人·여진족)과 일본인(倭人)과 같은 귀화인이 존재했고, 그들 역시 고려 시대와 같이 고립된 구역에서 살게 했다. 조선 정부는 향화(向化)라고 하여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여진족이나 왜인을 귀화시켜 노략질을 못하게 하는 회유책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직업은 대부분 백정과 같은 직종으로 한정되었으며 호적에 출신이 기록되어 사실상 조선인과의 혼혈이 불가능했다. 조선 말기에 들어와서 신분제도가 붕괴되고 이들 또한 평민 신분으로 상승되면서 천민, 노예계급에 대한 차별은 사라졌다. 특히 일제강점기, 6.25전쟁의 2연타로 계급의식 자체가 사라진 것이 큰 이유이다.

 

 

 

중국도 마찬가지로 노예나 천민의 비중이 매우 낮고 실질적으로 신사계급(양반)과 평민의 2단계로 분리되어 있었기에 천민 계급이 드물었으며 더구나 중국도 중일전쟁의 혼란과 전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문화대혁명으로 계급의식이 와해되었기 때문에공산 국가답게 기존 지주계층이 차별의 대상이 되기는 했지만 천민출신에 대한 차별이 없어졌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6.25 전쟁과 문화대혁명의 결과가 매우 부정적이었음에는 변함이 없으나 대체로 이런 진통이 전화위복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서에 등장하는 내로라 하는 명문가들은 거의 대부분 중일전쟁때 가문이 무너지거나, 그때 살아남았어도 문화대혁명 시기에 홍위병들의 습격으로 거의 대부분 멸문지화를 당했다. 가장 대표적인 명문가인 공부(孔府, 공자의 가문)도 국민당 정부가 무너지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자 대만으로 도망가서 그나마 겨우 명맥을 유지한 상태다. 본토에 남아있던 공부저택이나 공묘(공자의 사당), 공림(공자와 그 자손들의 묘)는 당시 거의 다 파괴되었던 것을, 지금은 간신히 외형만 복원해 놓은 상태이다. 지금 중국 정부가 내세우는 공자의 후손이네 뭐네 하는것도 따져보면 직계가 아닌 거의 남남이나 다름없는 것을 가져다가 문화 전통 과시용, 선전용으로 이름만 내세우는 것이다. 중국도 형식상으로는 공화국이므로 신분제를 인정할 수 없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 말기 원폭 투하를 비롯한 짧은 시기의 본토 폭격 외에는 한국처럼 국가 기반을 뿌리째 흔들 만큼, 범국가적 규모의 대전쟁이 장기화될 정도로 시스템이 뒤집힐 만한 변화를 겪지도 않았고, 빠른 항복 선언으로 행정력이 박살나는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기본 사회 틀은 그대로 유지한 채 상대적으로 느리고 차분히 성장했으므로 기존 사회의 질서에 변화가 거의 없었다. 특히 농촌은 도시와는 달리 주된 폭격 대상도 아니었기 때문에 전쟁에도 큰 피해를 받지 않았던 편이고, 향촌의 작은 사회 질서는 뿌리 깊게 남아있었다. 몰락 작전이 차라리 이뤄졌더라면 일본 전역에 초토화가 되었을지언정 최소한 그 안에서 사회 구조가 바뀌었을 여지가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런 계기가 없었다.

 

 

2.2. 일본과 유럽의 차이

 

 

그나마도 비슷한 섬나라에 같은 군주국인 영국의 경우는 적어도 내부에서부터 끊임없는 개혁을 하려는 시도가 수 차례 있어왔다. 하지만 일본은 어느 쪽에도 들지 않았다. 일본은 지방 명문가를 비롯한 지역의 고유 특색이 매우 강한 데다가 과거 천민, 중인, 무사들이 살던 거주지가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누가 누구의 후손인지 구분도 쉬워서 과거 천민들의 후손들은 차별을 받았다. 다행히 현대에 와서는 취직이나 면접 따위에서 출신 성분은 별로 상관이 없다고 여겨졌지만, 부락지명총람사건으로 인해 여전히 천민 출신이 차별받고 있음이 드러난 바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계층 간 혹은 지역 간 유동성이 떨어지는 사회라서 일본 사회에 부라쿠민이 존속했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흔한 계급제도의 잔재가 영국, 일본 이상으로 은근히 심하고 프랑스나 스페인, 오스트리아처럼 몇 번이나 나라가 뒤집어졌음에도 옛 지방 토호나 왕족, 귀족들이 가까스로 살아남아 지방의회에서 유럽 연합 의회 의원까지 하는 사례들은 생각보다 많다. 또한 위에서 말한 독일도 2차대전에 패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도입되고 군국주의가 사라진 것은 맞지만 그 이전에도 주로 유대인, 집시 등을 차별하고 학살했지 독일인 내에 천민계급을 만드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점점 없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독일 내에서도 전통적인 명문 가문들이 계속해서 지도층을 이루는 경향은 이어진다. 여기에 잘 나가는 재벌들이 합쳐지기도 한다. 스웨덴은 역사적으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거의 없었고, 19세기부터는 아예 중립국으로 나라를 꾸려와서 귀족들이 총리 자리를 다 해먹던 나라임에도 천민계급 자체가 없었다.

 

, /서유럽은 왕도 존재하고 계급도 고착화되어 있음에도 달리 전통적으로 고정된 천민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고, 있었다고 해도 완전히 폐지되었으며 현대에까지 과거에 천민이였다는 이유로 차별을 가하는 경우는 인도 등 카스트 제도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이는 기후와 문화적 차이로도 이해할 수 있는데, 유럽은 그리스도교 문화 기반인데다 육식이 보편화되어 있었으므로 도축업자나 피혁업자에 관해 생필품을 제공해주는 실력자들로 대접해주었다. 유럽에서 전통적으로 고기나, 기타 고급 음식을 나누는 역할은 부족에서 가장 권력이 센 사람이 도맡아 했다. 당연히 도축이나 해체도 힘있는 사람들이 전부 도맡아서 할 수 밖에 없었고, 그 흔적이 남아서 이후에도 도축업자나 피혁업자는 차별받지 않고 엄연한 전문가로 대우받았다. 오늘날 서양의 바비큐 파티에서 고기를 손수 굽고 배분하는 역할을 상급자나 연장자가 맡는 것도 이러한 풍습의 잔재라 볼 수 있다. 반면 불교 문화를 기틀로 살생을 금기시했던 일본에서 고기나 가죽을 다루는 직업은 천시당해, 인간이 아니(非人)라고 불리었다.

 

3. 인구

 

 

부라쿠민의 인구 수에 대한 정보는 자료마다 다르다. 1993년 일본 정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4,533"동화지구"892,751명의 부라쿠민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실제 인구는 200~300만은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화지구"는 주로 서일본에 많으며, 각 동화지구의 세대 수는 적게는 5가구로부터 많게는 1,000가구까지 있는데, 평균 155가구 정도. 4분의 3은 농촌에 있다. 홋카이도, 토호쿠 일대, 도쿄, 토야마, 이시카와, 오키나와에는 동화지구가 없다.

 

 

4. 차별

 

 

일본 사회는 근대가 되도록 한 가문이 계속해서 같은 지역에서 같은 직업에만 종사했다. 전후가 되어서 민속학의 연구가 활발해진 덕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일본의 무라 사회에 있어서는 법률이나 제도적으로 명문화되지는 않았어도 강고한 신분계급이 존재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직업인데 예를 들자면 사람들이 꺼리는 질병이나 죽음에 관련된 직업을 가진 자는 사회적으로 직분이 낮아서 같은 무라 사회의 구성원이라도 차별의 대상이 되는 일이 있었다. 말하자면 직업 = 계급인 셈으로 현대 일본에서도 가업을 몹시 중시하는 것은 그 잔재에 해당한다. 특히 이러한 차별의식에 대해서 이해하기 쉬운 예는 혼인인데 혼인은 집안끼리 격이 차이가 나지 않는 가업을 가진 가문끼리 맺었고 이에 따라서 계급이 대물림된 것. 그 밖에도 중병을 앓은 경우 원래의 가문의 격보다 한두 단계 정도 낮게 계산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폐쇄적인 신분 차별은 심지어는 무라 단위로도 이루어졌는데 예를 들자면 동과 서에 각각 무라가 있다면 특정한 직업에 종사하는 구성원이 많은 쪽을 더 높은 격으로 쳤다. 따라서 무라와 무라는 기본적으로 소통이 되지 않는 폐쇄적인 사회였다. 일례로 에도 시대에 어떤 마을이 인구 때문에 둘로 갈렸는데, 그 중에서 한 마을이 당시 유행하던 가부키로 사업을 벌였다. 하지만 가부키에 대한 수요가 어쨌건 간에 사회적인 인식은 안 좋았기 때문에, 무라 단위로 차별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근대가 되기까지 출신지와 이름으로 어떤 정도의 삶을 살았는지 그 간략한 내력을 알 수 있었다. 이 점을 악용한 것이 바로 부라쿠민 차별. 일본 사회에서 최하위층에 속하는 부라쿠민과는 같은 부라쿠민 이외에는 혼인을 맺지 않고 당연히 주거도 제한되기 때문에, 출신지를 보면 단번에 부라쿠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점을 이용하여 이력서 등에 적힌 출신지를 보고 부라쿠민을 불합격시키는 것이다.

 

일본 불교에서는 장례식에서, 혹은 장례식을 치른 후에 승려를 청하여 망자의 영혼에게 계명(戒名)을 지어줌이 일반적인 관습이다. 계명은 원래 승려로 출가해야 받는 것인데, 여기서는 사후에라도 출가한다는 의미. 그런데 일본 불교에서는 부락민 장례식에서 다른 데서는 사용할 수 없는 모욕적인 의미를 담아 계명을 지어주곤 했다. 계명에 귀축(鬼畜), 하인(), 도살() 등의 단어를 넣어, 부락민 망자의 직업이나 천한 신분을 조롱한 것. 부락민들 대부분은 어차피 글도 모르니까 그런 계명을 지어주어도 모욕적인 줄도 모르고 받았다. 이러한 계명을 차별계명이라고 부른다. 현대에 들어 이런 사실들이 알려지면서 과거에 지은 차별계명을 사찰에서 바꿔주기도 한다. 2010년에는 정토종이 종단 차원에서 과거에 지었던 차별계명 1600여 개를 바꾸는 법회를 열기도 했다. 리콜

 

 

4.1. 차별 현황

 

 

부라쿠민은 과거에 이유 없이 많은 차별을 받곤 했다. 다른 일본 내 소수 집단들인 아이누, 재일 한국인, 재일 중국인, 류큐인들은 각각 일본 정부 차원에서의 선주민 인정, 한류, 중화가, 동화정책 등으로 어느 정도 사회 내 포용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아직도 불평등한 구석은 많이 남아있지만 과거에 비해선 장족의 발전이다. 일본은 부라쿠민에도 비슷한 노력을 기울여서 사람들의 차별 의식은 과거에 비해 많이 약해졌으나 아직 부정적 인식이 꽤나 남아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부라쿠민 출신은 노골적으로 차별받는 일이 다반사였고, 관동 대지진 때나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이들은 특히 일본 극우 세력들로부터 '화풀이' 식으로 차별당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이에 대항해 차별 받던 부라쿠민들의 상당수가 좌익 운동에 투신하기도 하였고 개중에는 아예 야쿠자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역시 차별 받던 집단인 재일과 함께 같이 사회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 일본에 왔던 한 사업가는 그때 남아있던 부라쿠민 동네를 이렇게 얘기한다. '여자들은 가끔 관청 허가를 받아서 감시하에 일반인 동네로 나와서 생필품을 사갈 수 있으나, 남자들은 절대 나오게 하지 못한다. 또한 그 동네에 일반인이 들어가면 살해당할 것이 자명하므로 절대 접근하지 말라.'

 

일본 공동 납골 묘지를 방문했을 때 묘지 안에 철책이나 담벼락을 둘러 다른 묘비들과 격리시킨 구역이 있다면 그 구역은 100% 부라쿠민의 무덤이다. 죽어서도 일반인과 차별하는 것이다. 2010년 이후 각 지역마다 행정지도를 하고 있다지만 묘지 내 격리구역이 철거되는 것도 아니라서 딱히 없어지는 건 아니다.

 

구글 어스에서 고지도와 현재 지형을 겹쳐볼 수 있는 기능을 이용하면 부라쿠민이 살았던 마을을 볼 수 있다고 해서 한때 문제가 되었다. 구글 어스 기능 자체의 문제라기보단 2차 사용에 따른 악영향이 문제된 것. 일본 총무성에서도 처음에는 이 기능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았지만, 부라쿠민 단체들의 건의에 의해, 그들에게 악영향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해줄 것을 구글에게 총무성 이름으로 요청한 것이다. 이에 대해 구글은 이러한 문제가 완전히 발생하지 않도록 그 기능을 삭제하였다. 오늘날은 일본 경제의 급성장과 정부 주도의 처우 개선 노력 등으로 인해 부라쿠민 거주지의 주거 환경은 상당 부분 개선됐지만, 아직도 암암리에 '부라쿠민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취직, 결혼 등에서 감당할 수 없는 불이익이 있으므로, 일본 사회가 풀 민감한 문제로 떠오른 지가 오래다.

 

실제로 일본 기업의 인사 담당자들이 특수부락지명총람 등 사립탐정사무소, 흥신소 등에서 비밀리에 발간, 유통하는 리스트를 구입하여 지원자의 출신지를 가려내는 데에 사용하는 등의 문제가 꽤 있었다. 특수부락지명총람의 존재는 일종의 도시전설로 여겨졌으나, 1975년에 최초로 부락지명총람사건이 언론에 드러나면서 그 실체가 드러났고 최소 9종류의 책자가, 채용, 결혼 문제 등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해 시대의 정서에 역행함을 알고도 발간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게다가 부라쿠민 차별철폐운동이 진행될수록 색출 작업도 고도화되어, 1990년에는 도쿄 도내의 행정서사들에 의한 부라쿠민 의심자 족보구매사건, 1998년에는 오사카 시내의 대형 흥신소가 기업들로부터 차별신원조사를 의뢰받은 사건 등이 일어났다. 위의 링크 기사에서도 대기업에서 부라쿠민으로 의심되면 끝까지 뒤쫓아서 기어이 떨어뜨린다는 익명 제보까지 있다. 결국 이러한 신상털기 시장도 아직까지 살아남았다. 이러한 필터링은 물론이며, 어쩔 때는 없는 죄조차도 무고한 이들에게 뒤집어 씌운다. 실제로 196351일 발생한 사야마 사건(狭山事件)으로, 사이타마 현 사야마 시에서 일어난 여고생 납치피살사건에서 경찰측이 납치범을 잡지 못하자 대신 시 근처의 부락에 쳐들어가서 당시 24세의 이시카와 카즈오(石川一雄)를 붙잡아 고문 후 엉터리 자백을 받아내는 대규모 병크를 저질렀다. 이시카와 카즈오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1994년에 가석방되었다.

 

아소 타로가 자기 파벌의 회합 자리에서, 자민당 총리 후보 중 하나였던 노나카 히로무를 비난하면서 한 발언이 "노나카 히로무 같은 부라쿠민을 일본 총리로 세울 수는 없다"였다고 한다. 격분한 노나카 히로무는 자민당 총무회에서 "장래의 총리대신 자리를 약속받은 아소 타로 정책조사회장(원내대표 격), 당신은 파벌 회합 자리에서 "노나카 히로무 같은 부라쿠민을 일본 총리로 세울 수는 없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는 이 사실을 당시 회합에 참석한 의원 중 세 사람을 통해서 이미 확인했습니다. 당신과 같은 사람이 당의 정책을 담당하고, 앞으로 대신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면, 앞으로 인권 계몽이 가능할 리가 없다. 나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라고 일갈했다. 우오즈미 아키라, <노나카 히로무 차별과 권력(野中広務 差別権力)> 2003911일 아소 타로는 이 말에 반박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웬만해서는 화나도 돌려서 말하지만, 노나카 히로무는 너무나 부아가 치밀어서 대놓고 소리를 질렀다. 일본인이 상대에게 대놓고 화낼 정도면, 이미 폭발했다는 신호다. 그리고 일본에서 '용서할 수 없다'는 표현은 선전포고다. 이 발언을 했던 아소 타로는 정치 귀족 출신으로, 기득권 세력이 부라쿠민을 얼마나 무시하는지를 제대로 보여준 일이다.

 

부락해방동맹, 전일본동화회, 전국부락해방운동연합회, 자유동화회 등의 단체는 부라쿠민 차별 해소를 명분으로 정부 보조금을 받고 있는데, 이 중 부락해방동맹과 전일본동화회에서 엄청난 양의 비리를 저질러서 밝혀진 사건만도 적지 않다. 그리고 일본 최대의 사기 사건인 이토만 사건의 주범으로 유명한 재일교포 출신 사기꾼인 허영중도 부라쿠민 해방운동 계열에서 일을 했었다. 그러나 분명히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은 암암리에 남아있는 문제로, 단체의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을 "그래서 부라쿠민은 차별받아 마땅하다"라는 당위성으로 연결시키는 오류를 범해선 안 된다.

 

 

5. 대책

 

 

일본 정부에서도 많은 대책을 세웠으며,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이나 부정적 인식은 과거에 비해 많이 희석되었으나 아직도 잔존해있다. 우선 가장 큰 문제가 되는 소득 격차에 대해서는 교육 기회 확대, 일자리 제공, 공무원 채용 우대 등으로 격차를 좁혀 삶의 질을 올리는 것으로 부라쿠민과 다른 일본인들의 차이를 없애려고 하였으며 이러한 움직임을 동화대책사업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사업에 상당히 많은 예산이 배정되고 이에 따른 이권도 상당하기 때문에 부락해방연대나 전일본동화회 같은 권력화된 부락보호단체 측 간부가 횡령하거나 단체내에서 탈세, 사기를 치는 일들이 종종 발생했고 이런 사건들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부라쿠민들의 이미지를 떨어지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2000년대까지도 부라쿠민이라는 단어가 방송금지용어로 지정되었다. 그래서 부라쿠나 부라쿠민 등이라는 단어가 방송에서 나오면 항의전화를 받거나 경고를 받았다. 이 규정은 현재 해제되었지만 이에 따른 영향은 남아있어 보통은 동화라고 표현한다. 일본인과 대화를 할 때는 "부락민"이라는 말 자체를 꺼내지 않는 것이 권장된다. 한 일본인이 비유를 들기를 "미국에 방문해서 흑인차별 문제를 토론하면서 "미국에서는 깜둥이 차별 문제가 심각하다면서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며 "도와(同和)"라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내뱉었다가는 바로 사회에서 매장당하고, 당사자들과도 사이가 나빠진다.

 

대책 자체가 아예 효과가 없는 건 아니어서 젊은층 사이에서는 차츰 차별의식이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러나 차별의식이 배제의식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라는 견해도 있다.

 

6. 온라인에서 나타난 반응

 

 

2ch 넷 우익들이 시도 때도 없이 비난하는 계층이기도 하다. 지자체로부터 온갖 특혜를 받고 있어 오히려 역차별을 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도 부라쿠민이 되고 싶다는 식의 스레드가 2ch에서 자주 보이는데 직업이 없는 니트가 만드는 쓰레드로 나도 부라쿠민이 되면 니트 신세에서 벗어나 지자체의 지원을 받고 자영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건 말 그대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바보같은 소리다.

 

물론 지자체에서 부라쿠민 자영업자에게 세금감면 등 혜택을 주고 있는 것 자체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부라쿠민이 정상적인 직장에 취업할 수 없기 때문에 죽으라고 놔둘 순 없으니 지원을 해주는 것일 뿐이며, 게다가 지원해주는 자영업이 그럼 좋은 일이냐면 그것도 아니다. 그동안 원래 부라쿠민이 해오던 일(즉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의 근거가 되었던 직업) 즉 장의사나 음식 쓰레기 처리 같은 3D업종 뿐. 그리고 부라쿠민은 부라쿠민이 운영하는 사업체에 취업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영업자를 지원해 주는 것 뿐이다.

 

따라서, 말이 같은 빈곤층이지 출세의 기회가 작게나마 존재하는 이들과 아예 일반적인 생활의 기회조차 박탈당해 국가가 도울 수밖에 없는 이들을 구분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헛소리인 셈. 오히려 이런 바보들 때문에 부라쿠민들이 일본 사회에 소외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 기득권층도 부라쿠민에 대한 인식이 영 좋지 않기는 해도 대놓고 이들에 대한 국가적 차별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혐한초딩이나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 일명 "재특회"에서는 이들에 대한 강제추방과 국가적 차별을 주장을 해대는 것을 넘어서서 부락민에게 증오발언과 폭력을 휘둘러 일본 정통 우익들에서도 국민 분열시키는 얼간이 집단으로 보고 있다.과연 명불허전

 

다른 의미로는 지방도시를 비하하는 의미로 쓰인다. 예를 들어 지방도시에서 지자체 단위의 투자유치 사업을 벌이면 "부라쿠민 따위가 아무리 노력해봤자 촌티는 못 벗는다"라는 식으로 비하하고 조롱하는 의미로 쓴다.

 

과거 조선시대의 백정처럼 도축업과 연관되어있다 보니 인터넷 상에서는 애먼 정육점 주인이나 도축업자를 부라쿠민이나 재일 취급해버리는 개념없는 네티즌들이 좀 보인다.

 

2015년에도 부라쿠민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며, 이에 관련된 상담이 인터넷상에 올라오고 있다.

 

다만 외부인이 일본의 부라쿠민의 문제를 거론하거나 외국에 부라쿠민이 언급되었다는게 일본의 인터넷에 알려지면, "부라쿠민은 언제적 얘기냐? 벌써 예전에 사라졌고 법적으로 인정하지도 않는데 괜히 차별문제를 침소봉대해서 일본을 차별국가같이 보이려고 과도하게 부풀려낸 프로파간다다", "부라쿠민? 그게뭐냐? 먹는거냐? 그런거 들어본적도 없는데.", "2ch 종자들이나 차별하지" 등등의 모습을 보이고있는것도 특이점이다. 사실 외부인에게 자국의 치부를 보이는 것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영 좋지 않을테니.

카이카이 채널에도 부라쿠민에 관련하여 글이 올라 온 적이 있다.

 

 

 

7. 관련 사례

 

 

그레고리 하우스(House M.D.) - 그레고리 하우스 본인이 부라쿠민이라는 게 아니고, 군 대위인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갔을 때 병원 청소부 취급을 받던 부라쿠민 출신 의사가 실력만으로 주변을 입 다물게 만드는 것을 보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비슷한 경우로, 재일교포들이 의료계에 많이 진출해 있어서 오사카, 고베 등지에는 재일교포 출신인 의사가 많다. 의료계는 어차피 실력만으로 승부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영화 <떠오르는 태양>에서 부라쿠민이라는 말이 대사에 직접 나와서 일본에서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상기한 대로 보통은 공적인 자리에서 언급하지 않기 때문.

 

 

 

이시키 마코토(一色まこと)가 그린 일본의 예술 만화, 피아노의 숲의 주인공 이치노세 카이가 부라쿠민 출신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있다.

 

 

 

2008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영화 "굿' 바이"(원제 : 오쿠리비토-おくりびと)에 보면 전직 첼리스트가 고향으로 내려와 장의사가 되는데, 부인(히로스에 료코 분)을 비롯하여 모든 친척들이 수치스러워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 마을 사람들도 장의사를 천대하는데, 바로 이러한 역사적 맥락 때문이다.

 

 

 

2011년 말 오사카시장이 된 하시모토 도루가 부라쿠민 출신이다. 아사히 신문 계열의 잡지인 주간이라는 아사히에서는 "하시모토 도루의 과격적인 행동은 그의 혈류에 있다" 라는 취지의 칼럼이 올라와서 온갖 쌍욕을 먹은 적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지향하는 정치적 지향점은 극우 성향이다. 다만 이 부분은 하층민에서 자수성가한 사람이 반체제적인 경향을 보일 경우 빠르게 매장당하는 현실을 고려할 때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다.

 

 

 

2014, 50년 전 사야마 사건의 용의자로 억울하게 피해를 보았던 이시카와 카즈오 씨와 그의 부인,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불명예를 떠안고 사는 그의 형 등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SAYAMA: 보이지 않는 수갑을 벗을 때까지'가 공개되었다. 예고편을 보면 그는 75살의 할아버지가 된 지금도 여전히 거리에서 무고함과 결백함을 주장하고 살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피해자 마을에서는 진범 찾기로 마을 사람들 간의 갈등 발생보단 부라쿠민 출신 이시카와 카즈오를 희생시켜 마을 단결력을 유지하려고 했다.

 

 

 

도축업에 종사하던 부라쿠민들은 아부라카스(あぶらかす)라 하여 돼지껍데기나 곱창 등을 기름에 튀겨먹곤 했는데, 공교롭게도 오키나와 요리의 안다카시나 재일교포들이 고안해냈다고 알려진 호르몬 요리와 유사하다. 이런 점을 흥미롭게 생각했는지 부라쿠민 출신 저널리스트인 우에하라 요시히로는 차별받은 식탁(원제: 被差別のグルメ)이란 이름의 책을 쓰기도 했다.

 

 

 

굳이 대놓고 동화지구가 아니라 하더라도, 유신 이전에 도축장이 있었다거나 해서 부락이 있을 수밖에 없던 지역이면 타지역민들이 해당 지역을 싸잡아서 좀 낮춰보는 경향이 있다. 일본은 특히 각 지자체 면적이 촘촘하기 때문에 기초지자체, 즉 시, , 촌 단위로 이렇게 싸잡기도 편한(?) 면이 있다.

 

 

8. 부라쿠민 차별 사례

 

 

1963: 사야마 사건(부라쿠민이 여고생을 살해한 살인범으로 몰린 사건)

 

 

1971: 일본 포크 그룹 아카이토리()가 싱글로 발표한 부라쿠민의 민요 <다케다의 자장가>(竹田子守唄)가 방송국들에서 금지곡으로 지정됨.(90년대에 해금)

 

 

1975: 부락지명총람사건

 

 

1990: 행정서사들에 의한 부라쿠민 의심자 족보구매사건

 

 

1993: 게이오기주쿠대학 학생의 협박투서사건: 부라쿠민 출신의 가정에 출신지를 폭로하겠다는 협박 투서를 하여 500만 엔을 요구한 사건. 결국 범인은 체포되었고 2000년에 제적 처분을, 2001년에는 징역 1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의 처분을 받았다.

 

 

1998: 차별 신원 조사 사건

 

 

2001: 우체통, 공원 등에서 낙서 사건

 

 

2002: 청소사무소, 공사현장 등에서 낙서 사건

 

 

2003: 부라쿠민 해방동맹 회원 자택에 에타시네(エタ: 부라쿠민 죽어라) 투서사건

 

 

2005: 행정서사에 의한 호적 부정 입수 신원 조사 사건

 

 

2006: 토지 조사 차별 사건

 

 

2008: 연속 대량 악질 투서 사건, 공원 낙서 사건, 호적 부정 입수 신원 조사 사건

 

 

2010: NTT동일본 계열사 건물에 낙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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