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성(紫禁城, Forbidden City) 궁성
천안문(天安門)
황성 의 남문. 베이징은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어있었고, 내성안에 황성이 있었다. 그 황성안에 자금성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금성의 정문이라 착각하지만 자금성의 정문은 아래의 오문(午門). 1417년(영락 15) 건설 당시에는 승천문(承天門)이었다. 1457년(천순 1) 벼락을 맞고 1465년(성화 1)에 중수했으며 1644년(숭정 17) 이자성 군대의 북경 점령 때 소실되었다가 1651년(순치제 8)에 재건되면서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나라를 편안케하고 백성을 다스리다(受命于天, 安邦治民)'라는 의미의 천안문(톈안먼)으로 개칭했다. 왕조 시대에는 새로운 법률의 반포와 출전 또는 개선하는 군대가 황제를 알현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나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천안문의 문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한 이래 신중국의 상징이 되어 현재는 마오쩌둥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있다.[15] 이곳 앞에 펼쳐진 천안문광장에서 1976년의 4.5 운동(천안문 사태)과 1989년 천안문 6.4 항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1969년에 전면적인 해체수리를 했다.
단문(端門)
천안문과 오문 사이에 있는 중간 문. 1420년(영락 18)에 세워졌고 외형은 천안문과 똑같다. 황제가 조회시, 만조백관들이 이 문 앞에서 꿇어앉아 대기하다가 황명이 내리면 이 문을 통하여 궁으로 들어갔다.
오문(午門)
자금성의 정문이자 남문. 1420년(영락 18)에 세워진 이래 1647년(순치 4), 1801년(가경 6)에 중수했다. 정중앙에 있는 전루는 중첨무전정(重檐廡殿頂)에 정면 9칸(60.05m), 측면 5칸(25m)이며 이 건물과 함께 자리한 4개의 다른 전각의 배치가 봉황이 날개를 편 것과 비슷하다 해서 속칭 오봉루(五鳳樓)라 부른다. 황제가 새 달력을 반포하거나 명절에 신하들에게 물품을 하사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5개의 문 중 가운데의 문은 황제 전용으로, 지금은 굳게 닫혀 있다. 황제 아닌 사람이 여길 지나갈 수 있는 경우는 국혼날 가마를 탄 황후가 입궁할 때와 과거 전시에서 진사급제한 장원·방안·탐화[16]가 퇴궐할 때 뿐이었다. 가운데 문을 기점으로 문무백관은 동쪽문을, 종실들은 서쪽문으로 출입했다.
신무문(神武門)
자금성의 북문. 1420년(영락 18)에 처음 지었을 때는 현무문(玄武門)이었지만 청나라 때 강희제의 이름 현엽을 피휘해 신무문으로 고쳤다. 전루는 중첨무전정(重檐廡殿頂)에 정면 5칸, 측면 1칸이며 곽말약이 쓴 '고궁박물원'이라는 편액이 성문에 걸려 있다. 1924년 선통제가 자금성에서 쫓겨날 때 이곳을 통해 출궁했다.
동화문(東華門)
자금성의 동문. 1420년(영락 18)에 세워졌다. 전루는 중첨무전정(重檐廡殿頂)에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반대편에 있는 서화문과 같은 모양이다. 청나라 때는 황제, 황후, 황태후가 세상을 떠난 후 그 재궁(梓宮)이 이 문을 통해 나갔기 때문에 속칭 '귀문(鬼門)'이라고도 불렀다.
서화문(西華門)
자금성의 서문. 1420년(영락 18)에 세워졌다. 전루는 중첨무전정(重檐廡殿頂)에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반대편에 있는 동화문과 같은 모양이다. 맞은편에는 황실의 원림인 서원(西苑)이 있었기 때문에 황제와 황후가 서원에 행차할 때 자주 사용했다. 1900년(광서 26) 8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서태후와 광서제가 이 문을 통해 시안으로 도망쳤다.
각루(角樓)
자금성의 궁성 네 귀퉁이에 각각 세워진 건물로 황색 유리기와를 얹은 3층의 전각이다. 성벽을 제외한 각루만의 높이는 27.5m이다. 경복궁의 동십자각과 같이 궁성을 수비하는 망루 역할을 한다. 영락제 때 세워진 이래 오늘날까지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었다.
태화문(太和門)
태화전의 전문으로 중첨헐산정(重檐歇山頂)에 정면 9칸, 측면 3칸, 높이 23.8m, 면적 1,300㎡이다. 앞에는 명당수 역할을 하는 내금수하(内金水河)가 흐르고 있다. 1420년(영락 18)에는 봉천문(奉天門)이라 했다가 1562년(가정 41) 황극문(皇極門)으로, 다시 1645년(순치 2) 태화문으로 개칭했다. 1886년(광서 14)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94년(광서 20)에 중건되었다. 태화문의 좌우에는 각각 정경문(貞慶門, 명나라 때는 홍정문(弘政門))과 소덕문(昭德門, 명나라 때는 선치문(宣治門))이 있다.
태화전(太和殿)
자금성의 정전. 중첨무전정(重檐廡殿頂)에 정면 11칸, 측면 5칸, 길이 64m, 너비 37m, 전각 높이 26.92m, 면적 2,368m², 기단 높이 8.13m, 기단까지 합친 높이 35.05m로 중국에 현존하는 궁전 건축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목조 구조물이다. 한백옥으로 된 3단의 기단 위에 세워져 72개의 남목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데 가장 큰 것은 높이 12.7m, 직경 1.06m에 이르며 이 중 옥좌와 가까운 곳의 6개 기둥은 금박으로 덮여 있고, 지붕 처마에는 11개의 잡상이 있다. 태화전이 자리한 월대에는 황제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일구(日晷)와 가량(嘉量), 장수를 상징하는 청동거북과 청동학, 그리고 동정(銅鼎) 18개가 진설되어 있다. 1420년(영락 18)에는 봉천전(奉天殿)이었으며 1562년(가정 41) 중건하면서 황극전(皇極殿)으로 개칭했고 1645년(순치 2)에 태화전으로 개칭했다. 자금성에서 가장 넓은 광장이 여기에 있어서 황제의 즉위식, 국혼, 황후 책봉, 조회 등 국가적인 중대사 때 주로 사용되었다. 태화전 좌우의 담장은 원래 회랑이 있었던 자리였으나 청나라 때 화재를 막기 위해 지금과 같은 담장으로 바꿨다.
중화전(中和殿)
태화전 뒤편에 있는 전각으로 평면은 정방형이며 단첨사각찬첨(單檐四角攢尖)에 정면 3칸, 측면 3칸, 높이 29m, 면적 580㎡이다. 1420년(영락 18)에는 화개전(華蓋殿)이었고 1562년(가정 41) 중극전(中極殿), 1645년(순치 2) 중화전으로 개칭했다. 전각의 이름은 예기(禮記)의 중용(中庸) 중 '중이란 천하 모든 것의 가장 큰 근본이며, 화란 천하 모든 것에 두루 통하는 도이다(中也者天下之本也, 和也者天下之道也)'라는 의미에서 유래했다. 태화전에서 공식 행사를 치르기 전에 잠시 대기하며 휴식을 취하거나 평소에 상소문을 읽고 처결하는 공간으로 사용했으며 청나라 때는 황실의 족보를 7년마다 개수하는 작업을 해 그 결과물을 중화전에서 진상받았다.
보화전(保和殿)
중화전 뒤편에 있는 전각으로 중첨헐산정(重檐歇山頂)에 정면 9칸, 측면 5칸, 높이 29.5m, 면적 1,240m²이다. 1420년(영락 18)에는 근신전(謹身殿), 1562년(가정 41) 건극전(建極殿), 1645년(순치 2) 보화전으로 개칭했다. 명나라 때는 황제가 의복을 갈아입는 공간이었고, 청나라 때는 매년 제야와 정월 15일에 황제가 소수민족 왕공대신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1789년(건륭 54) 이후에는 이곳에서 전시가 치러지기도 했다.
문화전(文華殿)
서쪽에 있는 무영전과 짝을 이루도록 지어진 전각. 공(工)자 형태의 평면으로 되어 있는데, 앞쪽에는 헐산정(歇山頂)에 정면 5칸, 측면 3칸인 문화전이 있고 천랑을 통해 후전인 주경전(主敬殿)과 연결되어 있으며, 동서 양쪽에는 배전인 본인전(本仁殿)과 집의전(集義殿)이 있다. 명나라 초에는 황제의 편전이었으나 이후 천순제, 성화제 때 태자가 황제를 대신해 정사를 돌보기도 했다. 청나라 때는 매년 봄과 가을에 황제가 경연을 하는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1776년(건륭 41)에는 문화전 뒷쪽에 문연각(文淵閣)을 세워 <사고전서>를 비롯한 황실에서 소장한 중요 문헌을 보관했다.
무영전(武英殿)
동쪽에 있는 문화전과 짝을 이루도록 지어진 전각으로 헐산정(歇山頂)에 정면 5칸, 측면 3칸, 길이 33.4m, 기단 높이 1.5m다. 뒷쪽에는 후전인 경사전(敬思殿)과 천랑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동서 양쪽에 배전인 응도전(凝道殿)과 환장전(煥章殿)이 있다. 명나라 때는 황제가 정무를 보거나 대신들을 접견하던 장소였다. 1644년(숭정 17) 자금성을 점령한 이자성이 바로 이곳에서 4월 29일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청나라 때는 이곳에서 흠정본(欽定本)의 편집과 간행이 이루어졌는데 이를 무영전판, 약칭 전판(殿版)이라 해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869년(동치 8) 화재로 인해 무영전 일대가 불타면서 건물은 같은 해에 중건했으나 전판들은 소실되었고 잔존한 전판은 현재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에 있다.
홍의각(弘義閣)
동쪽의 체인각과 마주보고 있는 단첨무전정(單檐廡殿頂)에 정면 9칸, 측면 3칸, 높이 25m의 전각이다. 태화전 광장 서쪽에 있다. 1420년(영락 18)에는 무루(武樓), 가정제 때 무성각(武成閣), 청나라 초에 홍의각으로 개칭했다. 영락제 때 편찬된 <영락대전>이 소장되어 있었다.
체인각(體仁閣)
서쪽의 홍의각과 마주보고 있는 무전정(廡殿頂)에 정면 9칸, 측면 3칸, 높이 25m의 전각이다. 태화전 광장 동쪽에 있다. 1420년(영락 18)에는 문루(文樓), 가정제 때 문소각(文昭閣), 청나라 때 체인각으로 개칭했다. 1678년(강희 17)에 이곳에서 143인의 학사들을 모아 <명사(明史)>를 편찬했다. 1783년(건륭 48)에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같은 해에 중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