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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이야기

베트남 전쟁(Vietnam War)

작성자管韻|작성시간18.09.14|조회수504 목록 댓글 0


베트남 전쟁(Vietnam War)

 

 

 

 

 

 









 

 

1956~1975년까지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베트남)이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을 상대로 일으킨 전쟁이다. 2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냉전 시기에 소련과 함께 양대 초강대국이었던 미국의 군대가 남베트남에 파병되어 북베트남과 싸웠지만 북베트남을 지원하던 소련과의 전면전을 우려해 제한적인 작전만을 펼칠 수 밖에 없었고, 남베트남에서 활동하는 게릴라 조직인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들에 의해 고전하게 된다. 결국 미국에서 크게 일어난 반전 운동과 여론에 밀려 미군은 철수하게 되었고, 미국의 군사적 명성이 땅에 떨어지게 된다. 미군의 철수 이후 남베트남은 고전하다가 북베트남에게 패망하였다.

 

한국군이 미군에 합세해 파병된 전쟁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에 이어 대한민국이 경험한 대규모 전쟁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베트남 전쟁/한국군을 참고할 것. 당시 대한민국에서 썼던 명칭은 월남전(越南戰)이며 지금도 국군에서 만든 자료에서 월남전이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창작물에서는 M16을 든 미군 병사가 UH-1 헬리콥터를 타고와 정글 속에서 베트콩과 싸우는 이미지로 대표되고 있으며, 미국이 실패한 전쟁이라는 점 때문에 우울한 분위기와 전쟁에 회의적인 시각이 강한 편이다. 미국 국내에서는 히피 문화가 베트남전의 후유증으로 인해 발생하였다고 보며, 베트남에서 돌아온 병사들의 후유증과 사회부적응 문제 등이 크게 대두되었었다.

 

베트남전의 전쟁범죄 중에는 미국인 학자들도 인정하는 것이 존재하지만, 일부 한국인 만이 주장하고 국제적으로는 일본인 학자조차 부정하는 가설도 존재한다. 이당시 공산주의자들이 비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일으킨 전쟁범죄 또한 존재하기 때문에, 한국전쟁과 같이 어느 한쪽만을 악이라 단정하고 보는 냉전적 사고는 자제해야 한다.

 

2. 상세

 

 

베트콩(Vietnamese Communists, V.C.)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NLF) 산하의 무장단체를 이르는 말인데, 이들은 북베트남 정부 및 군부의 지시를 받는 조직으로 기존의 친미적 성향의 남베트남 정권을 무너트리고 공산주의 노선에 입각하여 남베트남을 북베트남에 통일시키는것이 목표였다. 참고로 베트콩은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와 싸워 독립을 이룬 베트민(Viet minh)과는 다른 조직이다.

 

베트남 전쟁의 배경은 길게는 19세기부터, 짧게는 2차대전 이후인 1950년대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건들은 사실 상당히 긴 시기 동안 발생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미국이 남베트남에 첫 원조를 시작하고부터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진 거의 10여년 가까운 시기가 있었다.

 

참고로 베트남에서는 베트남 전쟁이라는 이름을 싫어한다. 베트남쪽에서는 우리가 미국 쳐들어가서 전쟁 일으켰냐면서 아메리카 전쟁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물론 미국의 시선에서) 걸프전이나 이라크 전쟁, 남오세티야 전쟁, 그리고 우리나라 6.25 전쟁을 영어로 한국전쟁(Korean War)이라고 부르듯이 지명에서 명칭을 따오는 용법도 흔하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이라고 부르는게 틀린 건 아니다.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얻을 것도 명분도 없는 전쟁에 오랫동안 발이 묶여있는 상황이 마치 헤어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것과 비슷하다 해서 The Quagmire라는 약칭으로 부른다. 실제로 이 단어는 '엉망진창'이라는 뜻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맨발의 민병들이 미군의 첨단 공군기를 격추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났으며 상당한 재정 적자를 일으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미국의 국력에도 한계가 있다."라고 선언하게 만든 전쟁이다.

 

당시 미국은 공산주의를 극단적으로 배척하는 태도를 보였고, 그로인해 실질적으로 베트남 국민들의 생각이나 사상과는 관계없이 자신들의 방식인 민주주의에 의해서 뽑힌 대통령을 지지하고, 또한 그들의 부패를 묵과함으로써 베트남 내부의 분열을 조장했고, 그와 더불어 자신들과 상관없는 나라에 전함을 주둔시켰던 것으로 그들의 분노를 사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2차 통킹만 사건의 경우 지금까지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결국 어떤 이유에서던 다른 나라의 전쟁에 참견해서 군대를 파견하는 행위는 베트남전을 시작으로 잘못된 행동이라고 보여졌고, 그로인해 미국 내부에서도 반전의 목소리가 컸었다.

 

'출구 전략(Exit Strategy)'도 베트남 전쟁에서 나온 말이다. 베트남에서 발을 빼기도, 지속하기도 애매해진 미국이 굴욕적이지 않으면서도 별 피해 없이 전쟁을 끝내고 빠져 나오기 위해 찾던 전략을 출구 전략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그 용어가 아직까지 쓰이고 있다.

 

당시 한국에서는 베트남을 한국 한자음대로 월남으로 표기했는데, 특히 남베트남을 정통으로 보았으므로 남베트남 정권을 그냥 월남, 또는 자유 월남이라고 했다. 북베트남은 월남(베트남) 독립 동맹(월맹)의 불법 정권으로 취급해 그냥 월맹이라고 불렀다. 비슷하게 대한민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중국 공산당의 불법 정권으로 취급해 중공이라고 불렀고, 중화민국이 통치하는 대만을 자유중국이라고 불렀었다. 대만에서도 과거에는 같은 용법으로 중국 본토를 중공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당시를 다룬 한국군의 각종 자료에서도 이 용법을 현재까지 변경 없이 쓰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이후 북베트남(월맹)이 남베트남(자유 월남)을 무너뜨리고 통일한 뒤에 세워진 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부터 '베트남'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마치 이전의 '월남'과 단절된 신생 국가처럼 취급하게 되었다.

 

3. 배경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난 이후 이번엔 미국이 베트남 민주 공화국에 끼어들었다. 미국은 이 지역의 복잡한 배경에 대해서는 잘 몰랐으나 남베트남이 공산화 되도록 놔두면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에서 같은 편인 자본주의 국가들이 하나 둘씩 공산주의화 되고 말 것이라 예상(도미노 이론)하고 있었고, 남베트남을 보호하는 데 적극 나서게 된다. (그리고 이 예견은 도리어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현실화되었다.)

 

미국은 전쟁 초반에는 프랑스의 행동에 부정적이었으나 한국전쟁의 발발로 냉전이 본격화되자 태도를 바꾸어 전비와 무기 대부분을 지원한다. 미국의 지원 액수는 1차 인도차이나전쟁 전비의 78%에 달했다. 물론 나름 자유진영에서 구 식민 체제의 해체를 통해 공산세력과 맞서고자 했던 만큼 미국의 지원이 공짜는 아니고, 남베트남을 독립시키는 조건이 붙어 있었지만 그건 미국 입장이고, 북베트남과 베트콩 입장에서 보면 구 식민세력을 아무 생각없이 지원한 또 다른 적이다.

 

덧붙여 미국의 가장 큰 실수는 호찌민이 프랑스와 중국을 경계하면서 미국의 지원을 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외면한 것이다. 호찌민은 일찍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8차례나 서한을 보내 독립을 지지해주길 호소했으나 <불간섭> 소리만 들으며 묵살당했다. 아이젠하워 정권도 마찬가지로 호찌민 정권과의 교섭을 일체 거부하고 남베트남 정부 수립을 방해할 시 미군을 투입하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1954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남베트남에 대한 원조 약속을 하였고, 이듬해인 1955년부터 군사 훈련, 무장 등 일련의 원조가 시작된다.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부패의 극을 달리던 바오다이 황제가 통치하던 베트남국은 쿠데타에 이은 19551026일의 국민투표로 무너지고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이 성립된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응오딘지엠(Ngô Ðình Diệm, 고딘디엠으로 자주 잘못 불림)은 나름대로 능력은 있었는지 일본군이 물러간 초기, 호찌민이 응오딘지엠에게 자신과 손을 잡자고 제안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북베트남의 남베트남에서의 테러 행위 및 폭력선동이 이어졌고, 정치적 기반인 지주 계급의 눈치를 보다 토지 개혁에 실패하며 국민 대다수인 농민들의 신임을 점차 잃어갔고, 미국의 원조로 눈먼 돈이 넘쳐나면서 정권은 급속도로 부패하기 시작한다. 지엠의 일족들이 국가 요직은 물론이고 경제권까지 독점했고 미국 원조금은 경제 개발에 돌려지지 않고 사치품 수입에 낭비된다. 예컨대 베트남은 농경국가인데 농업용 비료 수입에는 고작 200만 달러를 쓰면서, 사치품인 양담배수입에 650만 달러를 쓰는 행태를 보여줬다. 이러한 행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동생인 응오딘누가 두목인 비밀경찰을 조직하여 사람들을 마구 투옥시킨다.

 

이때문에 기껏 안정되었던 치안도 다시 악화되고 응오딘지엠 정권에 대한 국민 여론도 악화되었다. 이틈을 타 공산당이 크게 세력화된다. 196012월에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이 결성되었다.

 

이렇게 응오딘지엠 정권의 부패가 표면화되자 COSVN은 남베트남 여기저기서 준동을 시작, 1961년에는 미국 추산 30만 명의 군세로 확대된다. 남베트남 정부는 미국의 지원으로 소위 "전략촌 계획"을 추진, 이에 대처하려 했으나 정부의 부패와 미국의 어리버리함으로 인해 그에 지원된 돈은 권력자의 뒷주머니만 채워줬고 지원된 미제 무기는 베트콩의 무기고가 되는 역효과만 낳았다. 남베트남군은 게릴라조차 감당할 여력이 안되어서 1963년의 압박 전투는 2,000 명의 정부군이 200여명에 불과한 베트콩 게릴라에게 처참히 당하는 졸전을 벌였고 이는 결국 미군이 베트남에 본격 개입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로 인해 벌어지는 일련의 전쟁을 '베트남 전쟁'이라고 부르게 된다.

 

전쟁은 시작은 보통 통킹만 사건으로 보지만, 그 이전에도 양측은 1960년대초부터 서로의 후방에서 게릴라 침투공작을 벌이며 교전을 펼치고 있었다.

 

직접적인 발단은 196482일 벌어진 통킹만 사건이다.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통킹만 사건을 명분으로 하여 베트남에 대한 군사 개입을 본격화하게 된다. 196485일 오전 11시 북베트남 폭격을 지시했다. 이것이 일명 피어스 애로우 작전이다. 미 해군 항공모함의 전폭기들이 북베트남 해군 어뢰정 기지와 석유저장시설에 폭격을 실시했다. 북베트남 해군의 대공포가 미국 해군 A-4 스카이호크 공격기 2기를 격추했다.폭격 실시 2일 후에 미국 의회에서 통킹만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피어스 애로우 작전에 대한 보복으로 111일 베트콩이 미국 공군 기지를 공격하여 B-57 폭격기 등 항공기 27대가 파괴되었다.

 

이후 이에 대한 다소 애매한 보복전 성격인 미군의 배럴 롤 작전이 벌어진다. 목표는 라오스에 존재했던 호찌민 루트 타격이었으나, 표면적으로는 라오스 정부군을 돕는다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다만 직접적으로 라오스 국경을 넘어서 폭격을 하는 것은 협정에 의해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야간에 조명탄에 의존해서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공격했다.

 

1224일 크리스마스 이브를 틈타 베트콩이 미군 장교 막사를 연달아 폭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미군은 확전을 원하지 않는지 이에 대한 보복전을 펼치지 않았다.

 

그러나 베트콩은 미군에 대한 일련의 보복전을 이어나갔다. 196527일 베트콩은 미국 육군의 푸레이쿠 기지를 습격해 8명을 전사시키고 헬기 7대를 파괴했다. 이에 분노한 존슨은 즉각 30대의 미국 공군 전투기(A-1, F-100)를 동원해서 북베트남군 병영을 공습을 지시했다(플레이밍 다트 작전 1). 사흘 후인 210일 베트콩이 쿼논의 미군 기지를 습격해서 미군 23명이 전사했다. 미군은 다음날인 11일과 19일 보복 공습을 실시했다(플레이밍 다트 작전 2). 이어 20일 미군은 남베트남 공군과 합동으로 대규모 폭격을 실시하려 했으나 남베트남 내부의 정치적 소요로 작전이 4차례나 연기된 끝에 32일에야 실시되었다. 이것이 롤링썬더 작전이다.

 

그래도 이때까진 교전 수준에 머물렀고, 대규모 지상전투 수준으론 확전되지 않았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북베트남에 위협을 주어 그들의 남베트남 병합을 저지해보려는 수준에 머물렀고 전면전으로 확전을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65330일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 폭파 테러로 218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 터져버리고 만다. 결국 사태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고, 베트남에는 헬게이트가 열렸다.

 

19651114~18일에는 두 번의 큰 전투가 플레이미 서쪽에 있는 베트남 공화국 중앙 고원인 이아드랑에서 일어났다. 이아드랑 전투가 바로 그것이다. 이아드랑 전투에 투입 되었던 미군은 약 4일 간의 전투에서 우수한 화력을 동원하여 북베트남군 1700명 이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미군또한 300명 이상의 사상자가 속출했다.

 

5. 연합군 결성과 미국의 참전

 

 

초기에 양측은 보복전 수준의 교전을 지속하며 전면전으로의 확대는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5330일 사이공의 미 대사관 폭파 테러로 상황은 순식간에 일변했고, 본격적인 베트남전이 시작되었다.

 

미군의 대규모 증강이 이루어지며, 호주, 뉴질랜드, 한국, 태국, 필리핀이 전투병을 파병하고 대만 등 다른 서방 자유주의 국가들은 비전투병 등을 파병하였다. 한편 중국과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 국가들은 무기원조나 유격대 등으로 병력을 투입하게 된다.

 

 

베트콩(+ 북베트남, 소련, 중국을 비롯한 비공식 몇몇 국가)

 

VS

 

미국 + 남베트남(+대한민국, 호주, 뉴질랜드, 태국, 대만 기타 연합군)

 

 

쉽게 이야기 하자면 이런 구도의 대결이었다. 우리가 흔히 베트콩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은 북베트남 정규군이 아닌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과 기타 저항세력들이다.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지키고 있는 지역으로 베트콩에 의한 기습+북베트남군의 공격이 벌어지는 양상이 베트남전이었다. 그러니 실질적으로는 거의 내전 양상을 보였다고 보면 된다.(무기야 북베트남이 제공했겠지만) 물론 이런 행위는 두말할 것도 없이 명백한 북-남 베트남간 휴전협정 위반. 남베트남 측이 제네바 회담에서 약조한 '1956년 남북통합 총선거'의 이행을 거부했는데,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을 통일한다는 미명 아래 테러와 폭력행위를 선동하고 호치민 루트를 통해 물자와 군사를 계속해서 보내고 있었던 상황에서 이미 공산화가 완료된 북베트남과 같이 선거를 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전쟁 발생전까지 지도부는 전쟁 발생 가능성을 "설마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겠지" 하는 시각으로 보고 있었다. 응오딘지엠의 다음 정권이나 역시 독재정권인 티우 대통령은 "지금 우리 정규군 병력이 58만입니다. 또 미국과의 방위조약이 시퍼렇게 살아있고, 북베트남도 북폭으로 거덜이 난 상태인데 저들이 침략할 힘이 남아 있겠습니까?"라는 발언을 하는 등, 유비무환을 잊었다. 그의 머리 속에서는, 북베트남도 경제가 허약하고 식량과 물자 부족이 심화돼 조만간 붕괴할 체제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적을 얕보고 우습게 보는 나라는 결국 망하게 된다.

 

5.1. 베트남 전쟁 한국군 파병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한국도 전투병력을 파병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베트남 전쟁/한국군 참조바람.

 

한국군은 대한민국 육군의 제9보병사단 백마부대와 수도 사단 맹호부대, 그리고 대한민국 해병대 청룡부대가 주축이었다.

 

6. 전개

 

 

1965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전쟁은 미국 공군의 1966629일의 하노이, 하이퐁 유류저장고 폭격으로 크게 확산된다. 717일에 북베트남은 전 국민과 군대에 비상동원령을 선포하였고 중국은 각종 전쟁물자와 무기, 후방 기지를 제공하기 시작한다.

 

물론 19661월에 중국,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기에 비공식적으로는 지원이 이루어져 있었지만, 이때부터 진짜로 엄청난 물자와 장비가 전달되기 시작한다.

 

8월에는 남베트남 주둔 미군이 30여만명으로 엄청나게 늘어나 있었으나, 미국은 10월에 발표한 월남참전 7개국 정상회담 공동성명발표를 통해 전쟁의 조기 종결을 계획하고 있었다.

 

6.1. 게릴라전과 호치민 루트

 

 

미군의 화력이 워낙 압도적이었던 까닭에 아무 무리없이 상황이 종료되리라 정치인들은 기대했으나 실제로는 반대로 돌아갔다. 펜타곤은 전차와 비행기로 밀어붙이는 재래식 전쟁에는 익숙했으나, 베트남에서의 게릴라전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전투였다. 전투가 정글에서 펼쳐지는 탓에 전차 등 중장비는 제대로 활용할 방법이 없었고, 보병이 홀로 정글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베트콩은 땅굴 등을 통해서 자신들이 싸우고 싶을 때 나타나고, 불리할 때는 숨어버리는 새로운 형태의 적이었다. 그래서 이 정글 숲의 풀들을 모두 없애기 위해서 사용한 농약이 현재 사용이 금지된 그 유명한 고엽제다.

 

이 새로운 전장과 새로운 형태의 전투 덕분에, 미군 역시 새로운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방탄복을 입고 M16소총을 든 미군이 UH-1 헬리콥터를 타고 정글로 들어가서 잘 보이지도 않는 적과 싸우는 전형적인 베트남 전쟁의 장면이 계속 펼쳐졌다.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은 몰래 캄보디아나 라오스 등지의 정글을 통과하는 도로를 만들어 북베트남이 베트콩을 지원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는데, 이를 미국에서는 <호찌민 루트>라고 불렀다. 당시 미국과 중국, 소련 등은 주변국가인 캄보디아와 라오스는 중립으로 두고 오로지 전쟁은 베트남 국내에 한정한다는 협약을 맺고 있었기에 이를 막을 수 없었다. 물론 암묵적으로 미국 특수부대가 양 국가에 있는 호찌민 루트를 타격한 흔적이 보이지만, 정규적 공격을 감행하기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게다가 캄보디아나 라오스는 막을 능력도 없고, 자기들한테 크게 피해주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냥 묵인하고 있었는데, 이에 불만을 가진 미국이 캄보디아의 군부에 공작을 벌여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을 쫓아내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시아누크 국왕이라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사라지자 오히려 폴 포트의 크메르 루주 같은 공산계 게릴라가 준동해, 캄보디아의 정국은 더 혼란에 빠져버려 호찌민 루트를 막는 것은 더 어려워져 버렸다.

 

그렇다고 남베트남이 그래도 제정신을 가지고 있었냐면 절대 아니다!! 애초에 베트남 전쟁에서 주로 공세를 펼치는 세력은 북베트남군이라기보다는 남쪽에서 양산된 베트콩이다. 물론, 북베트남에서 지원병력이나 지도를 위한 간부, 싸움을 위한 물자를 계속 내려보내기는 했지만 자국 내에서 반란군이 발생하는 실정이니 자국 통제도 제대로 못했던 셈이다. 더 막장은, 미국에서 지원받은 무기들이 암시장에서 떠돌다가 북베트남군/베트콩의 손에 들어가는 일도 벌어졌다는 것.

 

6.2. 북베트남 공격 금지

 

 

전투 대상이 북베트남이 아닌 남베트남 내의 베트콩 세력이었고, 미군의 신분 역시 <남베트남 정부의 요청에 의한 인도적 원조군>이라는 애매한 신분이었고 "북베트남을 직접 침공하면 소련이나 중국이 끼어들어 제3차 세계대전이 벌어짐!" 하는 입장이었던지라 무슨 일이 있어도 북베트남 영토로 지상군이 쳐들어가지는 못하게 못이 박힌 상태였다.

 

물론 그린베레를 비롯한 특수부대는 잘만 들어갔지만 특수부대는 성격상 절대로 주공이 될 수 없을 뿐더러 숫자도 적어서 국지전에서는 강력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큰 도움을 줄 수 없다. 대신에 Operation Rolling Thunder 등의 북폭이라 불리는 항공 공세 작전은 수차례 했지만, 결정적으로 밀어버릴 수 없기 때문에 북베트남은 몇십 년이 걸려도 남베트남을 어떻게든 군사력으로 통일할 목표를 세운 상태에서, 미국이 뭔 짓을 해도 전쟁을 멈출 수 없는 상태가 돼버린 것이다.

 

북폭이 하노이를 비롯한 북베트남 대도시에 B-52를 동원해 융단 폭격을 가한 작전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당시 북베트남의 주요 도시에는 소련제 SA-2 지대공 미사일 포대가 방공망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술기도 아닌 대형 전략폭격기의 작전은 불가능했다. 흔히 생각하는 융단폭격은 어디까지나 밀림지대, 특히 호찌민 루트 제압을 목적으로 행해졌을 뿐, 도시와 민간지역에 대한 폭격은 어디까지나 군수공장이나 철도망 같은 전략목표에 대한 조준 폭격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폭이나 부수피해로 인한 민간인 사상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미군이 압도적인 공군력을 동원해 일방적으로 북베트남 인민을 학살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당장 베트남 전쟁동안 미국 공군/해군 항공대의 교환비는 역대 최악이었던 것으로 이름 높기도 하고... 이는 F-4로 대표되는 미국 공군의 병크, 즉 미사일 만능주의로 달렸던 결과였다. 이 착각은 심각해서 한국전쟁 시기 121까지 벌어졌던 교전비는 베트남 전쟁 3 1, 2 1을 거쳐서 MIG-21이 등장할 때에는 0.85 1까지 밀리는 추태를 보이기까지 했다. 최종적인 교환비는 F-4 1대당 북베트남기 3.67대로 돌아오긴 하지만. 즉 오히려 밀리는 상황까지 진행된 것이다.

 

더구나 베트남의 북부 영토는 중국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오폭 시 중국을 폭격하게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북부 국경지대는 애초에 폭격 불가. 이래서야 중국 국경을 통해서 들어오는 물자 지원을 끊을 수도 없었다. 그 외에 하이퐁 등 북베트남의 주요 항구에 대규모로 기뢰를 살포했고 이 자체는 효과를 보긴 했지만 전쟁의 전체 판도를 바꿀 수준은 아니었다. 즉 폭격을 통해 북베트남의 전쟁 수행능력을 근본적으로 약화시키기는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처음부터 이 전쟁은 미국이 스스로 전쟁을 포기하기 전에는 끝나는 것이 불가능했다. 호찌민 루트의 존재, 남베트남의 막장 상황, 북베트남 침공 금지 등 발목을 잡힌 상황에서 미국은 북베트남군의 실질 전력도, 전쟁수행 능력도 제대로 손상시키지 못하고 끌려다니기만 했다.

남은 것은 수행의지의 약화, 즉 더 이상 피해를 감당하지 못하게 된 북베트남이 전쟁을 포기하고 강화 협상을 요구하거나, 혹은 북베트남인들이 전쟁 피해로 인해 정부에 대한 불만을 품고 이것이 반정부 활동으로 이어져서 내부 혼란으로 인해 마찬가지로 전쟁을 포기하는 쪽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그것마저도 실패했다.

 

위에서 언급한 호찌민의 발언처럼 북베트남의 통일에 대한 의지는 확고했고, 전면 침공이 아닌 간헐적인 공중 폭격만으로 정부 수뇌부들의 수행 의지를 꺾기는 힘들었다. 폭격만으로 북베트남의 수행의지를 꺾으려면 태평양 전쟁 당시 도쿄 대공습 수준으로 북베트남을 불태우고 갈아엎는 방법 밖에 없었는데, 소련제 무기로 촘촘히 구축된 북베트남의 방공전력은 미군에게는 커다란 부담이었다. 미국은 이렇게 뻔히 보이는 막대한 피해를 무릅쓸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이를 위한 국내외의 명분 역시 미군의 편이 아니었다. 이미 전쟁의 정당성을 상당히 잃은 미국이 북베트남을 정말로 갈아엎었다간 친미 우방국들조차 격렬하게 비난하며 등을 돌릴게 뻔했다. 국내의 반전 여론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북베트남 정부의 내부 통제 능력 또한 남베트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미군은 특수부대를 이용해서 북베트남 내의 반공 세력이나 소수 민족 세력을 포섭, 북베트남 정부에 대한 반정부 게릴라 활동을 시도했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전쟁은 북베트남 정부의 지속적인 지시와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 지역에서의 베트콩 게릴라들의 일방적인 게릴라전으로 흘러갔고, 미군은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지속해야 했다.

 

6.4. 미군의 막장 상황

 

 

베트남 전쟁/미군 항목 참조.

 

7. 구정 공세와 수렁

 

 

1968,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설 연휴 동안의 관습적 휴전기간에 미리 잠입한 병력을 통해 남베트남 주요 대도시에 동시다발적 공격을 감행한 사건이다. 베트남어로는 Sự kiện Tết Mậu Thân, 영어로 Tet Offensive이기 때문에 테트 공세로도 알려져 있다. 이 구정 공세는 베트남 전쟁의 운명을 가른 사건이었는데 베트콩들은 남베트남의 주요 기관들을 공격하였으나 끝내 실패하고, 도리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지만 미국 대사관 1층이 베트콩에게 공격당하고 점령당하는 모습이 TV를 통해 미국에도 중계가 되었고, 1965년 미지상군이 상륙한 시점부터 1968년 베트남의 구정 이전까지"베트남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라는 언론의 보도가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미국인들에게 심한 정신적 충격을 주었고 반전여론이 고조되었다. 물론 미지상군이 베트남에 상륙했던 1965년 시점 부터 일부 학생들과 시민들이 주도한 베트남 전 반전운동이 있긴 했다. 그러나 전쟁이 점차 수렁에 빠지고 1968년 구정 공세 당시의 여러 장면들이 대중매체를 통해 전파되자 반전운동이 격화됐다.

 

 

 

19681월에 벌어진 포위전투로 시작 자체는 구정 공세보다 일렀던 전투다. 디엔 비엔 푸와 마찬가지로 원래는 프랑스군의 요새였던 케산(Khe Sahn)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사이의 국경에 인접한 요충지였다. 이 케산을 미군이 아니라 북베트남군이 포위 공격을 시도한 것이다. 즉 케산에 주둔한 미국 해병대 3,500명과 남베트남군 2,100명을 북베트남군 2개 사단이 포위한 상태로 진행되었다. 애초에 동원된 북베트남군 부대가 디엔 비엔 푸에 참전했던 사단이었고, 디엔비엔푸 당시 베트민을 지휘했던 보응우옌잡 북베트남 국방장관이 이 켄산 전투를 직접 지휘하는 것이 아니냐는 설레발이 서방 기자단 사이에서 나올 정도로 디엔비엔푸와 상황이 유사했다. 지압은 이에 대해 "우리는 야전 지휘관들의 능력을 신뢰한다"며 참가설을 일축했다.

 

 

케산 포위망 격퇴 작전인 오퍼레이션 페가수스

 

하지만 하루 평균 300회라는 어처구니 없는 미군의 공중지원과 미군의 막강한 포병화력으로 인한 피해를 감당할수 없게 되자 결국 케산은 77일의 포위를 버텨내고 북베트남군이 스스로 철수하게 만든다. 케산기지는 하루에 최소 115톤의 물자가 필요했다고 한다. 원래는 비행장 착륙후 지상 하역이었으나 북베트남군들이 수송기가 이착륙 할때를 노려 포격을 해대서 활주로 착륙후 달리는 상태로 화물만 던지고(...) 그대로 이륙하는 걸로 바뀌었으나 이마저도 피해가 커지자 공중투하로 변경되었다. 당시 자료화면들을 보면 거지꼴의 미군들이 벙커에서 튀어나와 이 화물들을 줍고 북베트남군의 포탄이 날아오기 전에 부리나케 벙커로 도망가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물론 이 와중에 포격에 휩쓸려 죽은 미군도 엄청나게 많았다.

 

8.2. 케산 전투와 구정공세를 포괄한 배경 및 영향

 

 

케산 공세는 대놓고 디엔 비엔 푸를 흉내낸 것에 알 수 있듯이 미군에 그 공포를 심어주는 것이 목표였고, 그것은 멋지게 성공하였다. 실제로 미국의 매스컴들은 구정 공세로 불타는 대사관 만큼이나 포위된 케산이 제2의 디엔 비엔 푸가 될 것인가를 두고 논쟁을 벌였으며, 게릴라전이나 벌이던 북베트남군이 이제는 미군을 포위 섬멸하는 시도를 할 정도로 나오게 된 것에 대한 공포를 드러내게 되었다. 결국 대통령은 핵이야기는 하지 말아달라고 사령관에게 부탁하고, 사령관인 웨스티모얼랜드는 케산과 디엔 비엔 푸는 다르다고 해명하느라 진땀을 빼게 된다.

 

그리고 이는 구정 공세와 같은 맥락에 있었다. 애초에 구정 공세와 케산 전투는 모두 전술적으로는 실패한 전투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왜 같은 시기에 시도되었는가에 대한 해답은 시기에 있다. 1968. 이는 바로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였다. 북베트남은 미국의 존슨 행정부를 엿먹이기 위해서, 그리고 반전운동을 강화하기 위한 전투를 벌인 것이다. 보 구엔 지압이 말한 우리는 전투에는 몇 번 진 적이 있지만 전쟁에는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다라는 말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 북베트남군은 전쟁과 정치를 동시에 실행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완벽한 기습을 당한 것은 미국 내 언론과 여론, 그리고 남베트남의 여론이었다. 미국은 당시 "전쟁은 이제 막바지로 치닫고 있으며, 우리의 승리가 확실하다"라고 선전을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불타는 미국 대사관과 포위된 케산요새는 대단히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었고, 500여명의 사망자와 2,500여 부상자는 그 10배가 넘었던 베트남쪽 희생자보다 더욱 받아들일 수 없는 희생으로 평가되었다. 여기에는 명분도 포함되는데, 북베트남 입장에서야 이건 독립과 통일전쟁이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개막장 남베트남을 도와주는 우호전쟁이었던 것이 컸다. 이 때문에 기존 베트남 전쟁 찬성측마저도 구정 공세기간에 20% 가량이 반대로 돌아서는 등 전쟁혐오와 반전은 미국 전체를 거세게 몰아갔다.

 

그리고 린든 존슨이 대통령 재선 불출마와 함께 북폭의 중단을 선언하고 북베트남측에 협상을 요구하면서, 베트남 전쟁은 지루한 타협협상과 전쟁의 마지막 진창으로 넘어가게 된다.

 

구정 공세 시기 1달간의 공격기간 동안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30000명 이상이 죽었던 데에 비해, 미군 2천명이 사망했고, 3천명 이상이 부상자가 나왔다. 참고로 1968년 기간 동안 전사한 미군은 총 16000명이 넘는다. 이는 1965~1967년까지의 미군사상자 숫자와 거의 맞먹는 수준이다.

 

 

9. 전쟁의 종결과 남베트남의 멸망

 

 

9.1. 미국 정치 정세의 변화

 

 

미국 내에서 반전여론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게 되고, 결국 19691월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베트남에서의 단계적인 철군을 발표하였다. 게다가 반전여론과 경제 인플레이션 및 재정적자로 인해 아시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대폭적으로 감축시키겠다는 요지의 "닉슨 독트린"이 발표된다.

 

닉슨 독트린으로 인해 아시아의 군사적/정치적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베트남은 말 할 것도 없거니와 한국과 북한에서도 긴장이 흐르게 되어 각각 강력한 독재 체제를 구축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또한 미국은 중국과 대립하는 노선에서 선회하여 친중국적인 노선으로 바뀌게 된다.(핑퐁 외교)

 

196992일에는 북베트남 주석 호찌민이 지병인 심장병으로 사망하였다. 하지만 호찌민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레주언, 똔득탕 등 그의 뒤를 이은 북베트남의 2세대 지도부들도 전쟁을 계속 수행하면서 베트남 전은 호찌민 사후에도 이어졌다.

 

9.2. 끝없는 전쟁과 미국의 철수

 

 

미국의 동맹국들은 처음부터 이 전쟁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전통적인 동맹국인 영국을 포함해서 다른 친했던 나라들이 파병을 일부 하긴 해도 전투병은 잘 안보낸다든가 하는 식으로 크게 협조적이지 않았다. 여기서 유일한 예외가 한국. 미국 다음으로 전투병 숫자가 많았다.

 

아무튼 미국은 단계적 철수 발표 이후로는 희망도 없는 전쟁에서 지리멸렬한 전쟁을 이어져 나간다. 미군의 철수는 1969년부터 시작되었으며 매년 순차적으로 부대들이 떠났다. 큰 전투도, 목표도, 뚜렷한 적도 보이지 않는 마치 안개 속에서 칼을 휘두르는 듯한 전쟁이 수 년간 이어진다. 그리고 도와주려고 했던 놈(남베트남)까지 막장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펼쳐진다. 1971년이 끝날 무렵에는 지상전투부대의 대부분은 떠나며 19723월 북베트남군의 춘계공세가 일어날 때 미국은 지상군 재파병이 아닌 공군과 해군의 항공력을 재소집하여 대응하고 지상군은 그대로 나가게한다.

 

1972년에는 닉슨이 재선에 성공하게 되고, 단계적인 철군은 계속 이어진다. 곱게 철군하기 싫었던 닉슨 정부는 1972년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1218~29일까지 11일 동안 또 한번의 대규모 폭격을 하노이와 하이퐁을 비롯한 북베트남 도시에 감행했다. 결국 19731월에 북베트남과 미국은 파리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미국은 완전 철수하게 된다. 한국군도 이때부터 철수하기 시작했고 19733월 한국군 또한 베트남에서 완벽히 철수했다.

 

이 때도 보기 좋은 철수를 위해서 핵 협박을 했다. 이 과정에서 나온 표현이 바로 출구전략으로, 핵 협박을 통해서 덜 쪽팔리는 퇴각을 이뤄낸 인물이 그 유명한 헨리 키신저이다. 물론 소련도 핵을 가진 상황이었고, 전쟁을 끝내려는 마당에 핵전쟁을 벌리기는 싫었으므로 일단 위협만 하고 쓰지는 않았다. 사실 소련의 핵실험 성공이 1949년이었으므로, 애초에 프랑스에 제의하던 시기에는 이미 소련도 핵은 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핵 협박은 핵을 쏘지 않기 때문, 혹은 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애초에 상대도 핵 보유국이 아닌한 핵 협박 자체는 그 다지 눈치를 보지 않았다.

 

9.3. 미군이 떠난 남베트남의 혼란

 

 

그래도 이왕 도와준 놈인데 그냥 손 빼기는 좀 찝찝했는지, 미군은 철수하면서 남베트남에게 많은 수의 무기를 공여했다. 남베트남이 그거 갖고 잘 싸우라는 거였는데... 1975년에 북베트남군이 쳐들어 오자 대부분은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박살나버렸다. 결국, 남베트남군은 대패했고 북베트남군은 미군이 갖다준 무기를 빼앗아 노획하여 남베트남군을 역공격하는 사태까지 갔다.#

 

사실 미국이 무기는 줬지만, 이 무기들의 유지를 위한 예산 비용을 주지 않았다. 그 결과 남베트남군은 일상적인 전투에도 지장을 받을 지경이었다. 일례로 미군 철수 전에는 전투 한번에 100발을 쏘던 포대가 단 3발만을 쏠 수 있었다. 특히 유지 보수에 민감한 공군의 타격이 커서 전투기는 많았지만 부품과 기름, 탄약이 없어서 제대로 출격할 수 없었다. 급기야 C-130 수송기에서 폐유 드럼통과 폭탄을 함께 투하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본래 공산주의자로서 군 내에 위장 잠입해 있던 전투기 조종사가 남베트남 대통령궁에 폭탄을 떨구고 북베트남에 귀순하기도 했다. 조종사들이 출격을 위해 금전을 요구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래서인지 남베트남이 멸망할 때가 닥치자 태국이나 말레이시아까지 날아가서 태국 및 말레이시아에 망명한 조종사들이 수십명이다. 공군참모총장이자 전 부통령 응우옌까오끼의 탈출명령이 있었다고 한다. 귀중한 조종사와 전투기를 공산주의자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던가 이때 탈출한 항공기들은 태국이 임시로 보관하다가 미국에 반환하였다.

 

보병들은 미군 따라서 싸운 기억이 남아있었는지 공군 지원 없이는 한 발도 못 움직인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19753월 초에야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은 더이상 지탱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국에 흩어진 군대를 재배치해서 좀 더 버텨보려고 시도했으나 이게 잘못되면서 오히려 패망을 앞당기는 자충수가 되었다.

 

이 와중에 미국 정부는 의회에 97,200만 달러의 남베트남 지원 예산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의회는 더 이상의 예산지원은 용납되지 않는다고 거부했다. 물론 남베트남군이 무능력했던 면도 있긴 했으나 그밖에 지휘체계의 붕괴와 전략, 전술적인 문제도 상당히 컸다. 무엇보다도 보급과 병참이 여의치 않았던 데다가, 북베트남군의 대공세에 당시 남베트남 대통령 응우옌 반 티에우가 내린 무모한 철수 작전으로 인해 피난민들과 군이 뒤섞이는 대혼란에 빠지면서 일개 야전군이 북베트남군의 공격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궤멸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이 철수 작전은 대규모 철수작전이었음도 사령관은 그자리에 없었고, 사령관 대리는 막 진급해서 별을 단 여단급 지휘관에 불과했다. 게다가 보안을 유지한답시고 철수작전 자체가 부대장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이 재배치를 틈타서 호찌민 루트로 우회해서 진격한 북베트남군에 의해 이후 1, 2군단이 통째로 붕괴되고 휴전선인 북위 17도선과 중부 고원지대가 넘어가면서 남베트남은 내리막장으로 치닫게 된다. 결국 1975326일 중부에 고립된 최대의 기지겸 도시인 다낭이 함락되고 남베트남군은 궤멸된다.

 

게다가 이 와중에도 수도 사이공에서는 정쟁과 쿠데타 음모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레민다오 준장이 지휘하는 5천명 남짓의 18사단은 소수의 증원병력 사이공 북동쪽 60km 지점에 있는 소도시 쑤안 록에서 1개 군단, 4만여명 규모의 북베트남군의 공세를 49일부터 13일까지 4일간이나 막아내는 저력을 보였다. 이 전투는 사실상 이 전쟁 마지막 국면에서 벌어진 유일한 정규전이었고, 당시 북베트남군을 지휘하던 반티엔둥 장군이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전투"라고 말할 정도였다. 사이공에서는 축제 분위기가 살아났다.

하지만 북베트남군은 병력을 7개 사단으로 늘려서 2차 공세를 감행했다. 주변지역부터 제압당해 보급로가 끊기고 포위당한 18사단은 결국 3군단 사령부의 명령을 받아 21일부로 쑤안 록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1개 사단이 아무리 분투한들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되돌릴 수는 없었고, 이 전투는 남베트남군이 불태운 마지막 불꽃 이상은 되지 못했다. 18사단은 이후 사이공 동부 방어선에 배치되어 끝까지 싸우다가 사이공이 함락되던 날 항복하고 사단장 다오 준장은 포로로 잡힌다.

 

쑤안 록이 무너진 421일에는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이 사임하고 바로 베트남을 탈출한다. 이후에 430일에는 결국 사이공까지 함락되면서 전쟁은 종결된다. 북베트남군과 북베트남의 지도부들은 최소 2년이 걸릴 것 같던 미군 철수 이후의 남베트남 점령작전이 55일만에 끝난것에 대해 매우 놀랐다고 한다.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 중국과 소련까지 동원해가며 맺었던파리협정은 단순한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남베트남의 패망과 아비규환에 빠진 남베트남 국민의 절규에 대해 침묵으로써 대답했다. 물론 남베트남이 망한 뒤 보복이라는 걸 해주긴 했지만 문제가 좀 있었다.

 

하나는 자신들의 친미쿠데타로 인해서 생겨난 캄보디아의 공산 게릴라 크메르 루주를 지원했다. 이 때문에 캄보디아는 최소 100만명 이상이 학살되는데 이것이 바로 킬링 필드이다. 이 때문에 킬링필드 학살은 전세계적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는데, 크메르 루주를 지지했던 미국과 이후 베트남과 전쟁을 벌인 중국이 크메루 루주에 의한 학살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오히려 베트남 공산 정권의 정당성만 보태 주는 꼴이 되었다. 나머지 또 하나는 이전부터 하던 경제제재라 별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타이밍도 부적절한 게, 리처드 닉슨은 데탕트를 주장하던 상황이었는데, 그나마 그도 워터게이트로 물먹으면서 제럴드 포드가 올랐다. 닉슨은 자신의 집권기였으면 당연히 군사를 파견했을 것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여하간 참 절묘한 타이밍. 전쟁의 막바지에서 공산화되는 베트남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사람들의 아우성이 남았다.

 

미국을 비롯한 한국 등 동맹국가에서는 베트남전의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프리퀀트 윈드 작전을 입안했다. 남베트남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경우에 대비하여 세운 작전의 일환인데, 흔히 프리퀀트 윈드 작전 하면 당일 새벽 미국 대사관 철수작전을 떠올리지만 이것은 최종 탈출작전인 옵션 4이며, 프리퀀트 윈드 작전은 옵션 1~4로 구성되었다.

 

옵션 1은 탄손누트 공군기지 및 남베트남의 다른 공항을 통해서 민항기로 공중수송하는 것이었다.

옵션 2: 군용기로 공중수송.

옵션 3: 사이공 항만을 통해서 해상수송.

옵션 4: 최종계획으로서 헬리콥터로 공중수송.

 

일단 작전이 수립되자 비행기편 및 배편을 통해 자국민들을 베트남 밖으로 피난시키고 있었으며, 한국 역시 베트남에 있던 한국인들을 소개하기 위해 LST 2척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긴 전쟁기간 동안 나름대로 베트남 사회에서 자리를 잡은 민간인들은 자신의 재산을 놓고 떠나기를 주저했고, 설상가상으로 428일 탄손누트 공군기지가 폭격당한 후에는 비행기편을 통한 탈출이 불가능해져 버렸다. 미국 대사 그레이엄 마틴은 비상시 미국 대사관 직원 및 미국인, 그리고 호주, 영국, 태국, 싱가포르, 프랑스 등을 비롯한 동맹국가 시민들을 탈출시키기 위한 프리퀀트 윈드 옵션 4를 요청하고, 이것이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마지막 군사비 지출이 된다.

 

 

미국 국제개발청 직원 숙소 옥상 LZ로 몰려드는 사람들. 미국 대사관으로 흔히 잘못 알려진 사진이다. 아래 나오는 영상에도 이 장면이 마치 그레이엄 대사의 탈출 장면처럼 나와있다.

 

429일 오전 11시 프리퀀트 윈드 작전의 최종단계인 옵션 4가 발동, 탄손누트 공항 내 DAO 및 미 대사관의 LZ(Landing Zone) 등 사전에 선정된 LZ를 통해 미국인과 동맹국가 시민의 탈출이 개시된다. 29일 저녁까지 사전 탈출대상자로 지정된 5,000명의 사람이 전원 탈출을 완료하고, DAO를 비롯한 시내의 LZ가 폐쇄되어 마지막 탈출구는 이제 미국 대사관 옥상만이 남았다. 미국 대사관으로 헬리콥터를 타고 탈출하려는 미국인들과 주로 유산계층이나 남베트남에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베트남인 및 소수의 일반 베트남인들이 몰려들어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430일 새벽 5, 헬기편으로 미국 대사 그레이엄 마틴을 포함한 2,100여 명의 피난민이 탈출했고, 2시간 후 대사관을 경비하던 미국 해병대 병력 11명 역시 탈출헬기에 오르며 미군의 베트남 전쟁 개입은 프리퀀트 윈드 작전의 종료와 함께 그 종지부를 찍는다. 이때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후 추가로 탈출한 사람들까지 합쳐 보트피플로 전락했고 이 작전으로 인해 약 13만명의 베트남 민간인이 탈출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남베트남은 베트콩이 정권을 잡고, 이듬해인 1976년 북베트남과의 통일을 선언하고 통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작전중 미군은 총 78대의 헬기를 동원했는데, 남배트남군 조종사들이 헬기나 경비행기 등을 몰고 미군 함정으로 날아오면서 착륙할 자리가 모자라 바다에 헬기를 버리기까지 했다. 미군에 구조된 민간인 대다수는 배를 이용해 바다로 탈출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예상처럼, 또는 의도와는 반대로 미국의 베트남 전쟁 수행을 위해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국정에 혼란을 초래해 버린 결과로,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쪽 절반이 공산화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 당시 미국이 우려했던 바가 그대로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 쿠데타가 밥 먹듯이 일어나는 태국도 공산화 되는 일은 없었다. 단 태국의 경우는 원래 막장국가급은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지금은 아니지만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태국은 한국보다 잘 살았다. 다른 것으로는 미국이 악몽스럽게 생각했던 인도의 공산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인도는 친소련이지만 반중적인 입장이 된다.

 

그리고 이 당시 탈출하지 못한 한국 교민 100여명과 중앙정보부출신 이대용 공사 등 한국 대사관 직원들은 이후 식량부족과 납북의 두려움 속에서 지내야 했다. 북베트남은 한국 교민들 대부분을 조건 없이 석방했지만 이대용 공사와 2명을 북한의 요구로 체포. 5년 간 억류했다. 한국 정부는 원조 등을 조건으로 이대용 공사 등 3인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북한과의 관계를 이유로 대답을 하지 않다가 1979년 중월전쟁이 터지고 북한이 중국 편을 드는 한편, 이대용 공사 등 3인이 북한의 전향 권유를 끝까지 거부하자 한국 측이 원조를 어느 정도 하는 조건으로 석방하기로 합의. 1980년에 석방되어 한국으로 귀국했다.

 

10. 전후

 

 

세계사적으로 중대한 분기점이 되었다. 베트남전 이전까지의 세계는 서구 유럽에서 사회주의적 복지 체제를 구가하고 있었고, 금본위제의 고정환율제가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상황이었다. 미국의 패배는 단순히 일국의 패배가 아니라 금본위제를 무너뜨리게 된다. 환율이 널뛰기 시작하고 오일쇼크와 신자유주의 체제가 도래하게 된다. 외교적으로는 냉전을 점차 해소하는 데탕트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다. 여러 모로 현재를 이루는 가장 핵심적 근간이 된 사건이라고 평가하기에 큰 부족함이 없다.

 

 

 

이 전쟁으로 미군은 무려 58,315여 명이 전사 및 실종됐고, 부상 약화로 수년 후 사망하여 집계가 안 됐거나 심한 부상을 입은 군인까지 합치면 참전병 300만여 명의 15분의 120만 명에 달한다. 게다가 이 전쟁으로 인해 전사자 및 유족처리, 미국 사회에 다수의 상이병사, 고엽제 후유증, 베트남에서 돌아온 군인들의 사회 부적응 등으로 인적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1970년대라는 시대상을 감안해보면, 그리고 그 이전의 다른 전쟁들과 비교해보면 미군이 입은 피해는 많은 것은 아니다. 미군이 베트남에 있던 9년 동안 미군 58315명이 전사했는데, 이는 미국 입장에서 1년 동안 126천명이 전사한 제1차 세계대전, 그리고 4년 동안 407300명이 전사한 제2차 세계대전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전사자 수이고 한국 전쟁과 비교해봐도 비록 36574명이 전사한 한국전쟁에 비해선 전사자 수가 적기는 하지만 한국전쟁은 고작 3년 동안 그 정도 인원이 죽은 것이고, 베트남 전쟁은 9년 동안 58315명이 죽은 것이니까 비례식으로 비교해보면 한국 전쟁 때가 미군 사망율이 더 높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1960년대까지의 황금기가 종료되고 거품이 슬슬 빠지면서 어차피 불경기가 시작된 참이었는데 이 때 베트남에서 전쟁까지 하느라 엄청난 돈을 부은 데다 오일 쇼크, 워터게이트 사건 등이 겹쳐 지독한 정치, 경제위기를 겪고 사회적으로는 염세주의와 마약의 확산과 무엇보다 여지껏 전쟁에서 져본적 없다던 미국의 첫 패배라는 굴욕 등 얻은 것은 거의 없고 잃기만 한 끔찍한 악몽으로 남아있다.

 

물론 베트남 전쟁 참전전우회에선 이 전쟁은 한국과 미국같은 연합국이 진게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베트남 전쟁에 해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잡혀 고문 끝에 두 팔을 다쳐 후유증으로 지금도 두 팔을 높이 못 드는 존 매케인은 2000년 베트남 전쟁이 왜 미국이 졌는지 열불난다는 연설을 했다가 베트남 측의 비웃음을 받기도 했다.

 

게다가 전쟁에서 돌아온 미군들이 국민들에게 살인자라는 소리를 듣는 등의 비참한 현실을 마주하고, PTSD등에 의해 마약을 복용하는 사례도 있게 되면서 미국 사회도 한동안 진통을 겪었다.

뉴욕시는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낙서로 향후 20년동안 진통을 겪게 된다.

 

 

위의 사진은 1968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린든 존슨이 사위이자 미국 해병대 중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찰스 로브 대위의 전황 음성기록을 듣고 괴로워하는 장면이다.

 

이런 상황을 잘 표현한 작품중 하나가 람보 1이다. 베트남 전쟁 참전 후 귀국한 람보가 겪는 PTSD와 여러 사건들과 더불어 람보의 동료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죽었다. 게다가 람보 외에도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만화와 영화들 때문에 지금도 당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군 장병들은 고통을 겪을 것이다. 디엔비엔푸 같은 만화 등도 있으니.

 

당연히 진보/좌파계열 사람들에게 미국은 악의 축으로 찍히고, 냉전이 끝난 1990년대를 넘어서야 그런 인식이 좀 잠잠해진다. 심지어 1980년대 독재정권 하에서도 유시민은 그 유명한 "거꾸로 읽는 세계사"에서 골리앗을 구원한 다윗으로 표현하였고, 진보 지식인 리영희는 북베트남을 긍정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국론이 통일되지 않고 국민의 총화단결이 되어 있지 않았다, 정치불안과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즉 집안싸움만 하다가 패전을 당한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읍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점을 특별히 "타산지석"으로 삼고 또 교훈으로 명심해야 될 줄압니다. 그러면 인도지나반도 사태가 한반도 및 우리의 안보에 어떤 영향을 미치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인도지나반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지금 쓰고 있는 "인민해방전쟁"이나 "폭나혁명전략"이라는 것은 우리나라의 북한공산주의자들이 쓰고 있는 소위 "남조선해방"이니 "남조선혁명전략"이니 하는 것과 똑같은 아세아 국제공산주의 전략의 일환이고 또 그 공동전선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가정 호전적이고 악명높은 북한공산집단이 오늘의 인도지나사태를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겠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읍니다.아마도 지금 그들은 어떤 흉계와 음모를 꾸미고 있을 것입니다. 해방후 지난 30년 동안 그들은 이것만을 연구해 왔고 이러한 음모만을 꾸며 왔던 그들이기 때문에 오늘의 인도지나사태와 정세를 보고 가만히 있을리가 만무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크게 용기를 얻고 고무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한반도에서도 소위 "인민해방전쟁"이니 "남조선혁명"이니 하는 것이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김일성은 북경에 가서 "남조선혁명"을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할 것이고 전쟁이 나면 성공할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읍니다. 이것은 우리에 대한 지극히 도전적인 말 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10월유신"에 의해 유신헌법이 제정됨으로써 헌법이 바뀌었읍니다만은 만약에 유신헌법이 생기지 않고 구헌법대로 한다면 금년 봄이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를 하는 해 입니다. 아마 지금쯤 대통령선거를 할 것이고 다음 달에 가서는 국회의원선거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시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선거의 해라는 것은 한마디로 우리의 국력이 가장 약화되는 시기입니다.

 

선거때만 되면 사회혼란, 정국불안, 행정의 공백을 가져 옵니다. 선거때뿐 아니라 선거전 6개월 혹은 1년전부터 선거바람이 불어 사회가 시끄럽고 혼란하고 또 행정의 공백을 거듭하는 양상을 띄다가 선거때만 되면 이것이 절정에 도달해서 그야말로 나라의 기틀이 흔들릴 정도로 시끄러워 지는 것이 우리나라의 선거풍조입니다.

 

(중략)

 

우리나라는 이처럼 매 4년마다 하는 선거를 중심으로 전후 1년 내지 2년동안 여러가지 사회혼란, 정치불안, 행정공백으로 국력이 가장 약화되는 시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지난 71년도의 선거를 보고 이와 같은 시기에다가 "타이밍"을 맞춘것일 것입니다.

 

(중략)

 

그들이 이러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도중에 뜻밖에도 그들로 하여금 크게 용기와 자신을 얻게하고 고무시켜준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바로 인도지나사태인 것입니다. 그들은 인도지나사태를 보고 이시기가 "남조선혁명"의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여하한 적의 공격도 능히 이를 저지하고 격멸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국민 여러분들은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내가 이 자리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만약에 이런 사태가 일어났을때 여기에 대처할 수 있는 굳건한 결의와 각오와 반드시 이겨야 되고 또 이길 수 있다는 필승의 신념이 우리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가슴속에 확실히 서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중략)

 

우리는 이런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국민 여러분들은 잘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힘을 가지고도 왜 우리가 나라를 지키지 못하겠는가, 지키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읍니다. 만약에 있다면 우리들의 각오와 결의에 달려있읍니다. 따라서 앞으로 국민 여러분들은 정부와 군을 믿어 주시기 바라고 또 우리 정부는 슬기롭고 용감한 국민 여러분을 믿고 우리가 일치단결해서 필승의 신념을 가지고 의연한 자세로써 모든 사태에 대처해 나가야 하겠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제가끔 자기가 맡은 직책과 일에 대해서 보다더 충실하고 책임있게 해나가야 하겠읍니다. 이것만이 국난극복을 위해 우리 국민들이 가져야 할 자세요 또 우리들이 나갈길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국민 여러분들의 행운과 건투를 빕니다."

 

-대통령 박정희, 대한뉴스 <[특보] 박 대통령 특별 담화> 보도 중 일부, 1975.04.29

 

 

 

비록 패배한 전쟁이긴 하나 남베트남의 패망은 유신정권에 엄청난 행운이었는데, 6.25 전쟁을 겪은 지 30년이 채 안 된 상황에서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에 의해 공산화 당한 것이 마치 데자뷰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박정희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바쁘게 손을 썼지만 남베트남 패망 후에는 유신에 대한 저항이 싹 사라졌고, 긴급조치 9호 발령에도 별 저항이 없었다.

 

앞서 말했 듯, 대한민국 국군도 미국과 남베트남의 편에 서서 파병해 참전해 잘 싸웠다. 그러나 한국군이 아무리 잘 싸웠다 해도 파병으로 전쟁의 전체적인 구도에 큰 영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게 잘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왜 큰 영향이 없었는지 궁금하다면, 글을 위로 올려서 다시 읽어보자. 아무리 잘 싸워본들 전쟁의 주체들이 그 모양이니(...)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한국군이 방어하고 안정화 시킨 지역이 1번 국도를 타는 지역들이었다. 안정화 작전덕에 인구도 유입증가가 될 정도로 안정화 지역이었는데, 한국군이 철수하자마자 남베트남군이 제대로 싸우거나 방어도 못하고 북베트남군에게 그대로 넘겨줬다. 분명 한국군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게 있어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실제로 구정공세 이후 유일하게 선전했던 전투 지역은 맹호부대의 안케패스 지역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대치 소강 상태였던 것에 반해 한국군만 유일하게 성과를 내고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보병, 즉 알보병 위주의 파병과 적은 규모에서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또한 한국 해병대가 크게 패배한 짜빈박 전투는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한국 해병대가 애용한, 짜빈동 전투로 그 위력을 입증했던 중대 전술기지가 당대에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또 다시 입증해준 셈이었다. 게다가 그것도 한국 해병대가 미처 철거하지 않고 넘어간 걸 북베트남군이 차지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남베트남 멸망 당시 한국 해군은 자국민과 라이따이한 그리고 베트남인들의 피난을 도왔고 실제로 한국에 정착하게 해주었다. 공산권에서 한국을 겨냥해 특별히 뭐라고 한 것이 아니라서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 자체가 심각하게 막장이라 미군이든 한국군이든 뭘 어떻게 하건 전쟁의 흐름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이익만으로 정리하고 넘어가기에는, 역시나 한국의 참전용사들도 후유증으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점이 걸린다.

 

유신헌법에 군인 및 군무원, 경찰공무원에 대한 이중배상금지 규정(현행 9차 헌법 292)이 들어가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바로 베트남 전쟁이다. 국가가 군인이나 경찰에게 진짜로 보상을 하면 국가재정이 흔들린다는 이유로, 사법부가 사법 파동까지 일으킨 것을 무시하고 헌법에 집어넣어 버렸다. 2000년대까지 와서도 전상 및 공상자가 푼돈이나 받게 된 것의 배경이 된다. 이 때문에 실질적 후원은 배상이 아닌 연금이나 보험, 동료의 모금 등으로 해결한다.

 

그 외에도 라이따이한 문제 등이 한국-베트남 양국의 응어리로 남아 있다.

 

 

10.3. 고엽제 문제

 

 

가장 심각한 문제중 하나.

 

전쟁 중 미군은 베트콩과 북베트남군들의 전투 패턴이었던 게릴라전에 용이한 밀림지역에 타격을 주기 위하여 에이전트 오렌지 같은 고엽제들을 항공 작전등 다양한 방법으로 살포하는 고엽작전을 벌였고 이 고엽제들은 본래 목적이었던 베트남의 산림과 농업까지 황폐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다이옥신등의 성분이 포함된 강력한 독성으로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이나 베트남 민간인들에게 후세대까지 지금까지도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엄청난 후유증을 야기시키기도 하였다.

 

 

시가전 중 사로잡힌 베트콩 장교로 추정되는 응우옌 반 램(Nguyễn Văn Lem)을 남베트남 경찰서장 응우옌 응옥 로안(Nguyễn Ngọc Loan)이 즉시 자신의 권총으로 사살한다. 경찰서장과 같이 있던 AP통신 사진작가 에디 애덤스와 NBC 취재팀이 그 현장을 취재했다.

 

구정공세는 전술적으로 북베트남의 완벽한 실패였다. 남베트남군만이라도 단독 북진했다면 중국군이 개입하지 않는 한 북진 통일이 가능했을 정도로 북베트남군 주력부대와 베트콩의 병력손실은 심각했다. 그러나 이 사진은 베트남 전쟁 반전 시위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되었고, 미국이 미적거리는 사이에 사실상 궤멸 상태에 빠졌던 북베트남이 기사회생할 시간을 주었다.

 

 

 

1999년 한겨레 21의 보도 이후 파월 국군의 민간인 학살 논란은 한국 사회에서 첨예한 쟁점이 되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1992년 한국-베트남 수교 당시 베트남 측에서 과거사는 묻지 않겠다고 양해하였으며,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 당시 민간인 피해에 대해서 사과하였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베트남전과 관련하여 유감을 표명하였다.

 

그리고 오늘날에 와서 인권유린 면에서 더 주목받는 것은 국내에선 고엽제, 베트남 현지에서 라이따이한 문제다. 두 문제 모두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현재진행형이지만, 공개적으로 논의되는 일은 드물다. 그나마 고엽제 문제는 어느 정도 사회적 공론화가 되었으며 피해보상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라이따이한은 양측 정부와 언론, 시민사회 모두의 무관심 속에 완전히 방치된 상태다.

 

10.6. 전후 베트남의 사정

 

 

전후 북베트남의 전쟁수행을 지원했던 베트콩과 간첩, 좌파 인사들이 전후 대대적으로 숙청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미 구정 공세 이후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주요 인물들은 일망타진 된 상황이었고, 그 빈자리는 북베트남에서 파견된 요원남파간첩들이 메꾸고 있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나자 그냥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베트남 공화국 문서 참조.

 

여러 목적으로 재판없이 처형된 사람은 약 65천명 ~ 1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잘한 일은 결코 아니지만 통계가 좀 과장되어 알려진 측면이 있다. 베트콩 정부가 들어선 뒤, 남베트남 정부 관련인사, 고위 포로, 고위층을 학살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베트남이 통일되기까지 1년의 기간 동안 남베트남 경제의 큰 부분을 좌지우지하던 화교들과 태국인들, 남베트남 정권의 수뇌부에 기생하고 있던 부패관료들, 반공주의자들은 종전 후 많은 숫자가 망명을 하거나 보트피플이 되어 남베트남을 탈출했다. 쉽게 말해 숙청도 하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이미 사라진 상황. 물론 무재판 처형'' 65천에서 10만이라는 숫자를 적다고 평가할 수 있을지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갈릴 부분. 그리고 보트 피플 과정에서 질병이나 기근 혹은 해적 등으로 인해 많은 숫자가 사망(숫자에 관한 항목은 베트남 공화국 참조)해 간접적으로 숙청이 자행되었다. 그리고 군인, 경찰, 공무원, 교사 등은 사상개조 학습 명분으로 인권을 유린당했다.

 

사실 베트남 전쟁 이후 숙청에 대한 논지는 정치적인 성향에 따라서 제각각인데 확실한 것은 남베트남 관련 고위직(100만명)의 재교육을 위한 캠프는 분명히 있었고 거기에서의 대접은 전혀 좋은 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국으로 따지면 삼청교육대 수준이 실상인데 그런 이유로 그런 재교육 캠프를 비판하는 의견과 별거 아니라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여기에 수용된 사람은 약 100만 명 정도라고 한다.

 

베트남에서의 숙청 이후 베트남을 탈출하려는 대규모 보트피플이 발생했다. 그 수는 어림잡아 80만 명이나 되었다. 특히 보트피플이 폭발적으로 늘어난것은 1978년 이후로 종전한지 3년이 지난 뒤였다. 기득권 세력은 미국이 철수한 1973년부터 남베트남이 패망하는 1975년까지 진작에 베트남을 빠져나갔고, 1978년까지 남아있던 사람들은 선생님, 의사, 상인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보트 피플의 또다른 경우는 19792~3월까지 진행된 중국-베트남 전쟁의 여파로 탄압을 받을 위기에 있었던 중국계 화교들도 적지 않았다.

 

대규모 보트피플이 상당 기간 이어졌던것은 단순히 보복이 두려워서라기보다는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캄보디아와 중국과의 전쟁이 10여년 넘게 이어졌기 때문에 전후 복구에 쓸 돈을 전쟁으로 써야했던 판인지라 전후복구가 지지부진하여 한 동안 경제상황이 영 좋지 않았기 때문인 영향도 컸다. 당시 공장에 나가서 일을 해봐야 푼 돈밖에 손에 못쥐고 물가 상승 문제도 심각했던지라 공장에서 일을 해서 먹고살아봐야 생활에 여러가지 애로사항이 있었기에 목숨을 걸고 배타고 외국으로 돈을 벌려고 나갔던 이들도 많았던 것. 물론 이들은 정치적인 문제로 추방된건 아니고 경제적인 문제로 외국으로 나간 것이기 때문에 상당수가 난민 수용소 같은데서 살거나 막노동을 하다가 거금을 손에 쥐고 베트남으로 돌아오기는 했다. 한편으로 중국과의 전쟁으로 화교에 대한 추방도 이어지면서 육로로 중국으로 추방된 사람도 있었는데 이들은 보트피플로 치지는 않으나 배를 타고 별 수 없이 다른 나라로 떠났던 화교들은 보트피플로 분류된다. 의외로 베트남 당국에서는 이들의 탈출을 적극적으로 막을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는데 당장 전쟁 때문에 전후복구가 지지부진해서 먹여살리기 빠듯했던데다가 크메르 루주와는 달라야한다는 인식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초기에는 베트남 패망의 교훈으로 간첩질을 하지 말자거나 우익이 부패하지 말자라는 걸 모토로 했고 한국보다 우익이 개판인 베트남은 망해도 싸지만 한국은 든든하다라는 걸 강조했다.

 

북한은 역설적으로 미국이 베트남의 굴욕을 갚기 위해서 북침을 감행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었다고 한다. 김일성이 이후 했다는 연설인 "전쟁이 벌어지면 잃을 것은 철조망이요. 얻을 것은 조국 통일이다"라는 말은 전쟁하자라는 말이 아니라 (미국이) 전쟁일으키면 우리는 싸울 것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1980년대 군사정권 하에 벌어진 학생 시위나 광주민주화운동 등에 대한 흑색선전으로서 베트남의 막장화와 도시 게릴라들에 대한 공포감을 부풀린 면도 있었다. 이대용 공사의 수기를 극화한 '사이공 억류기'가 김무생 주연으로 극화되었다. 일명 한국판 킬링필드인데 엽기적 재미는 보장하는 작품.

 

1980년대 베트남 수용소라는 애먼 제목으로 출간된 고백수기가 있는데 이 책은 전직 학생운동 지도자가 통일된 베트남에서 고생하는 이야기다. 사실 절반 정도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사이공 티우 정권에 대한 투쟁을 얼마나 잘했으며, 절반 정도는 무식하고 말 안 통하는 북쪽 동무들에 대한 비난, 나머지 절반은 그래서 체포되었을 때의 일이다.

 

현재 베트남 내에서도 베트남 전쟁에 대한 평가는 지역에 따라 미묘하게 다르다. 남베트남의 경우에는 직접적인 전장이 되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에 따라서 평가가 엇갈리는데 반해서 북부 지역에서는 혼란 상태에 빠진 남베트남을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평가다. 물론 현대에는 남부 지역이 상대적으로 잘 살기 때문에 남부 지역이 북부 지역에 상대적으로 경제적으로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기는 하다.

 

11. 베트남 전쟁의 교훈?

 

 

한국에서는 인터넷 뿐만 아니라 군대 및 예비군훈련에서도 남베트남의 패망을 예로 들면서 한국의 상황과 접목시켜 안보 교육을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치명적인 이적행위는 국가에 큰 안보적 위협을 안겨다 준다는 점에서 교훈점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의 역사 및 전쟁의 원인을 고려하지 않고 전쟁의 일부 과정과 결과들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각색하여 팩트를 왜곡하는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와 더불어 베트남의 당시 상황을 무리하게 한국의 상황에 적용하는 것도 큰 문제.

 

광복이 된 이후 남북이 각각 미국과 소련을 후견자로 둔 채 분단이 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대규모 침략을 당해 정당성 및 명분이 한국 측에 있으며 UN군 참전국가들이 일방적으로 한국을 도왔던 한국전쟁 상황과는 달리, 베트남 전쟁은 위의 전쟁 배경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남베트남 및 미국의 정당성과 명분이 대단히 희박했다. 더군다나 미국이 전쟁 당시 했던 짓을 생각하면 과정도 좋았다고 보기 어렵다. 물론 공산 베트남도 문제가 없지 않다.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콩이 자행한 범죄행위들 또한 자못 심각했다. 미국은 정규군과 정부가 고엽제를 뿌려대거나, 사건을 호도하여 확대 개전 하는 등 더욱 조직적으로 광범위한 일을 저질렀다. 결국 당시 대통령이었던 린든 존슨도 자서전에서 베트남 전쟁 참전을 후회하는 심정을 밝힌 바 있다. 이렇게 베트남 전쟁이 워낙 냉전시기의 복잡한 문제라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 건 없다.

 

당시 한국은 베트남 현지의 정치 현황에 대한 정보가 너무나도 부족했으며 그마저도 한국군의 첫 원정이며 공산세력에 맞서는 미국을 지원하는 전쟁이였던 만큼 정당성을 더욱 높이고자 부족했던 정보까지도 전부 차단되었던 상황이였다.

 

현재 베트남은 쿠바와 함께 일당독재정권 가운데서는 그나마 국민들의 선거권이 보장되는 축에 속한다. 베트남은 국회의원 선거에선 한 선거구에 1명만 나가서 당선되는 식이 아니라 여러 명이 나와서 그나마 선택권은 보장되긴 한다. 물론 그렇다고 베트남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얘기는 아니며 그냥 여타 일당독재국가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민주적이라는 얘기.

 

미국이 보는 베트남과 프랑스가 보는 베트남은 완전히 달랐다. 미국 입장에서 베트남의 식민지화 같은 건 고려할 가치가 없는 문제였고 본질적으로는 동남아 공산화를 막기 위한 첨병에 불과했다. 물론 호찌민과 손잡지 않은 건 실책이었다고 평가되지만 이것도 호찌민이 순수한 공산주의자라고만 판단한 오판의 결과물이다. 이 점은 베트남 측도 인정하는 사실이고 당장 프랑스, 중국, 일본 등과 달리 미국에 대해서는 베트남도 별다른 원한이 없다.

 

북베트남의 전신이 되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19세기 말~1910년대 까지 걸쳐졌던 근왕주의, 성리학적 향촌에 기반한 독립 운동이 전멸당하고, 다른 좌익 계열 독립 단체였던 VNQDD 또한 망한 이후 베트남 국내외에서 거의 유일하게 거대 조직화된 체계적인 독립 운동 세력이었다. 그리고 이들 주축으로 터진 1930년의 응에 안 소비에트 봉기는 베트남 국체가 프랑스에 넘어 간 이후 유일하게 베트남인들이 식민 당국을 일년의 짦은 기간이나마 직접 몰아내고 해방구를 성립해 본 경험이었다. 프랑스 식민 정권 아래 가열찬 탄압을 받으면서도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1930년대와 2차대전 시기, 그리고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를 들어 총력전을 벌이는 동시에 전국의 자신들이 손이 닿은 범위 내에서 적극적으로 토지 개혁, 빈농 구제, 교육 사업, 행정 체계 건설을 통해 가시적인 건국 활동을 주도했다. 2차대전 직후 베트남의 해방조차 한국의 사례와 달리 연합군 손에서 이루어진게 아니라 일본의 패망 직전 낌새를 눈치 챈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8월 혁명이라는 봉기를 일으켜 일본을 몰아냈다. 그리고 이 8월 독립 혁명 당시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고도 하노이의 탕롱궁에서 프랑스의 식민 괴뢰 왕정의 마지막 왕이었던 바오다이에게 공식적인 건국식을 치루며 "짐은 오늘부로 평범한 베트남 시민으로 돌아 갈 것이며, 신정부에게 충성을 다짐하고, 결코 구 왕실이 신정부의 건국 사업에 어떤 방식으로도 훼방 놓지 않을 것을 천명한다"라는 발표와 함께 옥쇄와 왕검을 정식 이양 받았다. 말하자면 제도적으로도, 행정적으로도, 이력으로도, 의례적으로도, 대중의 시선으로도 당시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민족 해방 운동의 유일무이한 주도 세력이었다.

 

진짜 평등한 민주적 자유 선거가 벌어졌다면 공산당이 완승했을 거라는 것은 이념에 편향된 좌파만의 평가가 아니다. 그 시절 당시 남베트남을 지지하기로 결정한 아이젠하워 대통령, 응오 딘 지엠을 미국으로 대려와 정계/학계와 커넥션을 깔아 주어 미국이 그를 간택하게 만들고 이후 케네디, 존슨 정부가 대대적으로 베트남에 미국이 개입하도록 여론을 주도한 미시건 주립대학교 베트남 고문단의 윌리엄 피셸 교수, 현대 베트남 역사의 권위자인 데이비드 마(David G. Marr) 교수를 비롯한 고위 군 장성들도 만장일치로 인정하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양쪽 모두 잘 알고 있었기에 미국은 베트남의 민주화 운운하면서도 약속된 1956년 전국 총선을 일방적으로 불이행하도록 조치하였고, 북베트남은 그 약속을 믿고 응오딘지엠 정권이 자신들에게 접촉 하기를 기다리다가 총선을 전혀 해줄 생각이 없었던 디엠 정권 아래 개박살나고 있는 남부 당원들이 제발 무장투쟁 좀 하게 해 달라고 하도 사정복걸해서 아래로부터의 압력 때문에 개전 지시를 한 것이었다. 여기서 '한국의 경우 북한이 총선을 거부했던 것과 달리 베트남 전쟁에서는 미국이 총선을 거부한 것이다.

 

1950년대 후반, 양쪽 정권 둘 다 방금 수립되었고, 북베트남이 토지 개혁 문제와 코민테른의 제재로 제대로 남베트남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지 못하고 두 정권 다 내정에 치중했던 시기, 남반부의 지엠 정권도 나름은 토지 개혁을 해 본다고 농촌에 관료들을 파견 했을 때 분단 정권 수립 이전 이미 북베트남 치하에 토지 재분배가 다 이루어져서 몇몇 관료들은 석연치 않아 하면서도 그 상태를 방치했고, 다른 관료들은 이미 빈농들에게 나누어 진 토지를 지주에게 다시 돌려 주고 사이공 정권의 입맛 대로 재처분 하려다가 지역 베트콩 요원들에게 암살당하는 경우 또한 있었다.

 

남베트남은 1960년대 중반 북베트남이 남반부 해방 전쟁의 개전을 공포하고 베트콩의 무장 봉기를 허락하자 얼마 되지도 않아 수도권 바로 앞에서 벌어진 동호이 전투에서 개박살나고 나라가 망하려고 하는 걸 미군의 지상군 투입으로 그나마 10년 더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응오딘지엠의 통치 아래서는 최소한의 자주성과 방향성을 가지고 국정 운영을 하였으나, 지엠 정권 이후 권력의 핵심 자체가 아수라장에 빠지는 동시에 전쟁 상황은 더욱더 긴박해지자 아예 제대로 된 북베트남 측과의 교섭 과정은 물론, 갈수록 남베트남의 일상적 통치 구조 또한 미국의 관리에 넘어 가며 남베트남은 역설적으로 지엠 축출 이후로는 의미 없는 종이 위의 정부가 되어 갔다.

 

베트남 관광청 홈페이지에선 베트남 전쟁에 대해 '남베트남의 자유화'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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