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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이야기

진수(陳壽, 233년~297년) 삼국지

작성자管韻|작성시간18.11.17|조회수144 목록 댓글 0


진수(陳壽, 233~297) 삼국지

 

 

 

 

 



 

 

중국 삼국시대의 역사가. 다소 약한 존재감과는 달리, 알고 보면 삼국지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역사서 삼국지의 저자. 자는 승조(承祚). 파서군(巴西郡) 안한현(安漢縣) 출신.

 

제갈량 사후에나 제대로 활약한 삼국시대 후반기 인물인데다가, 그나마 그의 행적들도 거의 조명받지 못해서 삼국지연의만 접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의외로 진수를 모르는 사람들도 꽤 있다. 그러나 삼국지연의도 실제로는 진수가 쓴 삼국지를 참조하여 쓰여졌기에, 애초에 정사(正史)가 없었다면 삼국시대에 관한 이야기 자체가 지금처럼 큰 인기를 끌지 못했을 것이다. 후대에 나온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와 구분하기 위해서 진수가 쓴 역사서 삼국지는 흔히 정사 삼국지라고 부른다. 이후에 생겨난 삼국시대와 연관된 여러 이야기들은, 대부분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아니면 진수의 정사 삼국지를 바탕으로 창작된 것들이다.

 

이하 진수의 정사 삼국지는 별다른 상황이 아니면 삼국지로 표기한다.

 

 

2. 생애

 

 

어려서 학문을 좋아해 같은 군의 초주를 스승으로 섬겼다. 초주는 진수에게 학문으로 이름을 떨칠 것이니 도중에 실패를 겪어도 불행이 아니므로 언행에 신중히 해야 한다고 했다. 촉나라에서 벼슬하면서 관각영사(觀閣令史)가 되었다. 환관 황호가 권력을 잡자 그 위세와 권력에 대신들은 모두 굽실거렸으나, 진수 홀로 이에 굴복하지 않다가 자주 좌천되거나 파면되었다. 진수는 그 당시 여러모로 불우한 삶을 살았다. 아버지 상중에 병이 나서 하녀를 시켜 환약(丸藥)을 만들게 했는데, 마침 찾아온 손님이 이 장면을 보게 되었다. 당시에는 부모의 상중에 병이 나거나 건강을 상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서 사람들에게 불효자라고 욕을 먹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주장하던 주자가 봤으면 피꺼솟

 

촉이 위나라에게 멸망한 뒤 서진의 사마염이 천하를 통일하였으나, 불효자로 낙인이 찍힌 그는 여러해 동안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었다. 다행히 진수의 재주를 아낀 장화의 천거(薦擧)로 진의 관리가 될 수 있었다. 화양국지(華陽國志)에 따르면 같이 촉나라에서 벼슬을 지냈던 이양과 사소한 일로 사이가 틀어져 서로 악담, 욕설을 주고 받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진수가 진의 관직에 오른 뒤에 이양도 진의 벼슬길에 나아가려고 했지만, 옛 친구인 진수가 그 취직 활동을 방해했다고 한다. 소인배? 촉한이 멸망한 후 촉한 출신 신하들인 수량, 이밀, 진수, 이양, 두열, 왕숭과 함께 경도 낙양에 같이 들어갔다. 나중에 이들간의 사이는 소원해졌지만 왕숭만은 성정이 너그럽고 후하며 온화하고 순해 나머지 다섯명과도 여전히 친분을 유지했다고 한다.

 

벼슬길에 오르고 제갈량의 글들을 모아 제갈량집(諸葛亮集)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역사서 저술에 힘썼다. 또한 삼국시대 때의 여러 역사 기록들을 모아서 삼국지를 썼다. 진수는 위나라로부터 선양을 받은 진의 신하였기에 삼국지를 쓸 때 위를 정통으로 썼다. 하지만 그는 과거에 촉의 관리이기도 했기 때문에 촉에 대해서도 많은 기록을 남길 수 있었으며, 오나라가 망하자 오나라 출신 학자들과 공동으로 오의 역사 기록을 편찬하기도 했다. 그의 삼국지는 당대에 이미 뛰어난 글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내용이 간략한 점이 있었으며, 결국 약 한 세기가 지난 뒤에 유송(劉宋)의 문제 유의륭은 대장추(大長秋) 배송지를 시켜 주석을 달게 했고, 배송지의 주석은 이후 삼국지연의창작에 큰 밑거름이 된다.

 

하후담도 당시 위서(魏書)를 지었는데 진수가 쓴 삼국지와 비교해 보고 곧 자신의 책을 없애버리고 더 이상 위나라 역사서를 편찬하는 것은 그만뒀다고 한다. 장화는 삼국지를 매우 훌륭하다고 여기며 "진서를 편찬하는 일도 맡겨야겠소."라고 진수에게 말했다.

 

장화가 진수를 중서랑(中書郞)으로 천거하려고 했지만, 순욱은 장화의 정적이었고 진수를 미워하여 이부(吏部)에다가 그를 모함하는 말을하여 외지인 장광군(長廣郡) 태수(太守)로 자리를 옮기게 했는데, 진수는 모친이 연로함을 이유로 취임하지 않았다. 두예가 나서 이를 무마하고 황제에게 다시 천거하니, 상서(尙書)의 상주(上奏)에 관련된 일을 돕는 것이 좋겠다 여겼다. 이리하여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에 임명되었으나 모친이 걱정되어 자리에서 물러났다.

 

모친이 사망하자 유언에 따라 낙양에 안장했는데, 이는 고인을 고향 땅에 장사지내는 풍습에 어긋나는 일이 었기 때문에 또 다시 불효자라고 욕을 먹고는 파면당했다.고인의 유언에 따른 것 뿐인데 또 왜? 이때부터 이미 효는 마음이 아니라 단순한 풍습 몇 년 후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로 기용되었지만 사양했고, 원강(元康) 7(297)에 병으로 사망했다.

 

상서랑(尙書郞) 겸 양주(梁州) 대중정(大中正) 범군(范頵) 등의 신하들은 황제에게 상주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 한무제가 명령을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위독하니 사람을 보내 그의 글들을 모두 거둬야겠다.' 사자(使者)가 그가 남긴 글들을 거두어보니, 내용 중에 봉선에 대한 기록이 있어서 한무제가 매우 놀랐다고 합니다. 저희가 보건대, 죽은 치사시어사 진수가 쓴 삼국지는 내용 중에 훈계하는 말들이 많고 옛 일의 잘잘못을 명확히 가렸으니 사회의 교화에 유익할 것입니다. 문장의 아름다움은 사마상여에 미치지 못하나 정직하고 왜곡 없는 점에서는 더 뛰어나니, 이를 모아 기록되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에 황제는 하남윤(河南尹), 낙양현(洛陽縣) 현령에게 명령를 내려, 진수의 집에 사람을 보내서 그의 책을 베끼게 했다.

 

하마터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 했던 진수의 삼국지는 이런 과정을 거쳐 마침내 세상에 널리 전해지게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니, 굴곡 많은 인생을 마친 끝에 참으로 옛 스승의 말대로 학문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3. 삼국지의 공정성에 대한 의문

 

 

정의, 정이 형제가 위나라에서 굉장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진수가 그 자식들에게 "쌀 천 곡을 주신다면 귀하의 아버님들을 위해 훌륭한 전()을 써드리리다." 라고 대가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진수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고, 진수는 정의, 정이 형제의 열전을 저술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진수가 태어나기 13년 전(220)에 조비가 황제에 즉위하자마자 정씨 형제와 이들 일족의 남자들을 모두 처형했기에 자손이 남아있을 수 있을수가 있겠냐는 의문점이 있어 이 기록은 신빙성을 의심받는다.

 

위의 내용에 이어서 <진수전>에서는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壽父為馬謖參軍謖為諸葛亮所誅壽父亦坐被髡諸葛瞻又輕壽壽為亮立傳謂亮將略非長無應敵之才言瞻惟工書名過其實議者以此少之

(진수의 부친이 마속의 참군(參軍)이었는데, 마속이 제갈량에게 처형당하고 진수의 부친 또한 연좌되어 곤형을 당했으며,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 또한 진수를 경시했다. 진수가 <제갈량전>을 쓰며 평하길, 제갈량은 용병술에는 뛰어나지 않았으니, 적과 맞서는 데 재능이 없었다고 하였다. 또한 제갈첨은 글씨나 잘 썼을 뿐인데, 실상에 비해 명성이 지나치다고 했다. 이러한 (개인적 원한에 따른) 평은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 진서(晉書)82·<진수전(陳壽傳)>열전 제 52 출처

 

진서에 나오는 정의 형제와 제갈 부자의 얘기는 각각 지인소설(志人小說)어림(語林)세설신어가 출전(出典)이다. 다만, 아래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이 진서의 기록들, 특히 정씨 일족에 대한 기록들은 사실 진서정사 삼국지이상으로 비판과 논란의 여지가 충분한 기록을 실은 증거가 된다. 정사 삼국지 문서에서 '저자 본인에 관한 문제' 항목도 참조하자.

 

그 외 사마씨에 불리한 서술은 은근히 넣지 않기도 했다, 제갈량의 북벌에서 사마의의 패배나 사마소의 고귀향공 조모 시해를 기록하지 않은것도 유명하지만 당대의 명사이자 많은 인재를 천거하고 인재등용 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한 하후현더러 한 평론이 걸작이다.일찍이 그가 조상의 잘못을 바로잡았다던가 훌륭한 인재를 등용했다는 말을 들어본적이 없다(...) 이건 사마씨가 황제가 된 판국이니 스스로 글조심을 한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진수가 지은 삼국지를 말년에 조정에서 베껴서 보관했는데 이 때 기록이 있었음에도 배제했을 확률도 있다. 더군다나 하후현이 지적한 인재등용 방식인 구품관인법은 사마의가 세력을 확충하는데 제대로 써먹은 법이다. 사마씨의 입장에서는 나름 아픈 부분을 건드리는 것이니.....

 

 

3.1. 촉까?

 

 

제갈첨과 사이가 나빴다는 설도 있었는데 이런 설들이 생긴 이유는 진수가 기록한 기록에서 제갈량과 제갈첨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인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진수가 속했던 시대 상황을 전혀 생각치 않은 근시안적인 평가이며, 진수가 삼국지를 썼을때 그가 진나라의 관리였고 위를 정통으로 썼는데도 촉을 그 정도로 써줬다는 것을 생각하면 촉까라는 말은 절대 못한다. 애초에 촉빠니 위빠니 하는 한참 후대의 개념을 진수에게 적용하는 게 언어도단이다. 공자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지지하는지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지지하는지 논쟁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각국 군주의 호칭들 위나라는 조조를 무제(武帝), 조비를 문제(文帝), 조예를 명제(明帝)로 호칭했고 촉한은 유비, 유선을 각각 선주(先主), 후주(後主)로 불렀다. 그러나 오나라는 얄짤없이 모두 그냥 이름으로 불렸다. 이렇게 위나라가 정통이지만 촉나라는 오나라보다 더 권위있게 표현했다. 조조가 위왕에 오를 때는 깔끔하게 위왕이 되었다고만 썼지만,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이 될 때는 촉나라의 신하들과 유비 본인이 한나라 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자세히 기록하며 좀 더 비중있게 표현한다. 또 양희의 계한보신찬(季漢輔臣贊)(241)을 끼워넣고 자기가 보충한다던지 극정의 평을 싣는다던지 해서, 촉한의 사람들이 내부에서 촉한의 인물들을 바라봤던 시선을 전하고 촉한 인물등 중 열전을 남길 수 없었던 사람들에 관한 얘기도 실었다. 즉 촉까는 아니라는 뜻이다. 애초에 촉나라 사람이니... 그러나 정작 오나라는 호칭이 없고 이름만 나오니 촉까는 100% 아니지만 고도의 오까아닌가?

 

 

可謂識治之良才蕭之亞匹矣然連年動衆未能成功蓋應變將略非其所長歟

(나라를 다스릴 줄 아는 좋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 할 만하니, 관중과 소하에 버금간다. 그러나 해마다 군사를 일으켰어도 공을 이루지 못 했으니, 아마도 임기응변의 용병술은 그의 장기가 아니었나 보구나!)

 

 

- 삼국지35·<촉서>·<제갈량전>출처

 

진수가 제갈량집을 지은 것으로 알 수 있듯이 그가 제갈량까라는 것도 어폐가 있다. 사실 삼국지≫ㆍ<제갈량전>에서 열전 마지막의 평가 부분에 "임기응변은 제갈량의 장기가 아니었다." 라고 하는 부분도 "우리 승상님이 임기응변만 잘했으면 다 이기는 건데..." 하는 식으로 볼 여지가 있다. 그리고 정사의 제갈량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

 

 

대신 제갈첨의 경우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좋은 일이 일어나면 제갈첨의 것이라고 했다라는 말을 해서 좀 의구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배송지가 단 주에 따르면 진수가 제갈첨에게 치욕을 받아서 제갈첨에 대해 안좋게 썼다는 의혹이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진수는 초주의 제자였는데, 초주는 도참설의 신봉자로 진수 역시 도참설을 믿고 있었다. 그런데 초주 문서에도 언급되지만, 진수의 기록을 약간 과장하자면 초주는 "울 황제님 이름이 재수가 없어 나라가 망하게 생겼네요. 망하는 건 운명이니 쓸데없이 저항하지 말죠."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4. 진식의 아들?

 

 

진수가 230년에 제갈량에게 처형당한 촉의 장수인 진식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연의의 명나라 판본에는 진수가 진식의 아들이라는 대목이 있었는데, 이것이 사실인 양 퍼졌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이다. 하지만 진식이 처형당했다는 건 삼국지연의만의 이야기이며 정사에서 진식은 3차 북벌 때 무도군(武都郡), 음평군(陰平郡)을 공격했다는 걸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기록이 없다. 아니 애초에 진식이 연의에서 처형당한 시점인 4차 북벌은 그 자체가 연의의 허구다. 실제 제갈량의 북벌은 총 5차례인데 연의에서 6차례로 나오는 이유가 이 창작 4차 북벌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즉 실제 4차 북벌은 연의의 5차 북벌이다. 설령 진짜 진식이 230년에 죽었다 쳐도 진수는 233년생이다. , 진수는 진식의 아들이 아니다. 정사 삼국지의 제갈량에 대한 평가가 박한 이유가 진식이 제갈량에게 처형당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간혹 평역(評譯)삼국지에서 나오는데, 이 역시 사실이 아니라는 얘기다.

 

비슷한 얘기로 부친이 가정(街亭) 전투에서 패배해 참수당한 마속의 부하였기 때문에 곤형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진서·<진수전>에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긴 한데, 정사에는 진식이 가정 전투에 참전했다는 기록 또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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