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야마토급(大和) 전함 이야기
6.5.5. 다른 함대의 운명
야마토에게 레이테 만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기 위해 미끼 노릇을 한 오자와 함대는 항모 4척을 잃고 산산조각났고, 엔터프라이즈의 숙적이라던 즈이카쿠도 이 해전에서 격침되었다. 겨우 살아남은 항공전함 이세와 휴가는 잔여세력을 수습해서 일본으로 도망쳤다. 그래도 미끼 작전 자체는 성공했다.
야마토를 돕기 위해 조공 겸 양동함대 역할을 한 니시무라 함대는 수리가오 해협 해전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미군의 올덴도르프 함대를 만나는 바람에 집중포격과 뇌격을 당해 괴멸당했다. 함대의 주력인 후소급 전함 2척도 격침당했지만, 이들은 마지막까지 도주하지 않고 싸우다가 침몰했다.
야마토를 돕기 위해 출전한 시마 함대는 니시무라 함대가 괴멸되는 것을 보고 도망가다가 니시무라 함대의 중순양함 모가미를 들이받아 격침시켰다.
레이테 섬에 병력을 증원하기 위해 파견된 16전대(기함 아오바)는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끝내 레이테 섬 오르목 만에 도착해서 병력을 내려놓는데 성공했다. 계획대로라면 야마토가 레이테 만의 미군을 박살내서 이들을 도와줘야 했지만 사마르 해전에서 야마토는 임무를 포기하고 도주했고, 16전대는 탈출하다가 미군의 공격으로 괴멸했다. 그러나 미군이 16전대를 공격하느라 전력을 분산시킨 덕분에 야마토에게 가해지던 압력이 약해졌고, 덕분에 야마토는 더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철수할 수 있었다. 16전대에서 살아남은 배는 수송선 1척, 그리고 불침함 아오바 뿐이었다.
시나노 격침
3번함 시나노는 일단 개전 후 건조가 중지되었으나, 미드웨이 해전 이후의 항공모함 부족을 타개하고자 항공모함으로 개장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준으로는 세계 최대의 항공모함이었다.
1944년 11월 29일, 마무리 공정을 위해 구레 항으로 향하던 시나노는 미 해군의 발라오급 잠수함 SS-311 USS 아처피시 (Archerfish)의 매복에 걸려들어 어뢰 4발을 맞는다. 아무리 항모로 개조되었다고 해도 야마토급 전함 3번함이니 정상적이라면 격침될 수가 없지만 4발을 맞고도 전속력으로 무리하게 항행하다가 들어찬 해수로 격벽들이 무너져 8시간도 못 버티고 침몰해버렸다. 그리고 시나노는 미 해군에게 단 1척의 잠수함이 잡은 역대 최대의 군함이라는 위업만 헌납한다. 함장의 미숙한 조치와 대미지 컨트롤의 부족이 낳은 대재난이었다.
1개월 후 12월 28일 조사위원회의 결과로는 나사가 제대로 조여지지 않고 방수해치에 2cm나 빈틈이 있고 수밀시험 자체도 생략되는 등 부실공사의 실상이 밝혀진다. 애초에 완공되었다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던 것. 부실공사, 미숙한 대미지 컨트롤, 위험한 항로 선정에 3척뿐인 호위함 등 총체적 난국으로 책임을 물을 당사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처벌을 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결국 1945년에 들어서며 일본 제국의 전황이 악화일로를 달리자, 야마토는 '천1호 작전'의 일환으로 편도 연료와 1170발의 주포탄을 싣고 오키나와로 상륙해오는 미군을 막기 위한 '키쿠스이 작전菊水作戦'에 나선다.편도연료로 오키나와 해안에 도달해 그 상태로 해안 모래밭에 올라타(좌초) 고정포대 노릇을 하는 작전이었다. 숨겨둔 비밀 무기로 일거에 전황을 바꾸는 소설같은 이야기가 전혀 아니라 그저 죽을 자리를 찾는 마지막 여정이었다.
이렇게 무모한 작전을 세운 이유는 당시 일본 제국의 해군 함정용 중유의 비축분이 바닥을 드러냈던 것도 있지만, 출격 자체가 제국해군의 상징답게 "장렬히 죽어라"였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끝나고 난 뒤, 높으신 분들에게 '우리 해군은 이렇게 열심히 싸웠음에도 지고 말았습니다'라는 변명을 하기 위해서는 해군의 최대전력이었던 야마토가 살아남아있어서는 안됐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작전 자체가 미군을 막아내기 위한 것이 아닌 야마토를 가라앉히기 위한 것이었고 아무도 야마토가 미군을 막아내리라는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다.
미 해군의 대함대의 방해를 뚫고 오키나와까지 가는 것부터가 문제였지만 만일 오키나와 해안에 계획대로 좌초하더라도 오키나와 전투를 수행중인 일본군 수비대의 도움 없이는 그냥 고정표적 1호가 되어버린다. 재수없으면 미군에게 육박공격이나 당해서 점령당하는 막장 상황이 벌어지며, 그런 일이 없더라도 좌초된 군함의 탄약이 떨어지면 그냥 거대한 고철덩어리로 전락하는 데다 앞서 말했듯이 이동능력이 전무하므로 공중에서 폭격하는 비행기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타겟이 없다. 따라서 애초에 이 작전의 성공확률이 극히 낮은데다가 고정포대 노릇을 하는 것은 설령 야마토가 작전지역에 멀쩡하게 도착했더라도 불가능하다.
거기에 출격시기 자체도 문제가 있었다. 일기예보상 2~3일 뒤에 항공기 운용에 지장을 주는 비가 내릴 것으로 예상되었던지라 그나마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날이 흐려 시야확보가 제대로 되지 않는 날을 골랐다. 결국 구름과 안개속에서 갑툭튀하는 미국 함재기들을 상대로 한 대공사격은 거의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나마 당시 유류탱크 담당 장교가 윗선과는 다르게 생각이 있어서인지 유류 탱크 펌프가 닿지 않는 아랫쪽까지 인력으로 퍼내서 '적어도 멍청하게 꼬라박느니' 중간에 회항할 것을 어느 정도 가정하고 왕복연료로 메꿔서 줬다고 한다. 물론 상부에 보고한 것은 편도분 연료만 넣은 걸로 되어있었다고 한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유류 탱크 바닥에 남아있는 연료는 서류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분량이기 때문이다. 해군 선임자들도 알면서 눈감아 줬다고 한다.
그리고 사실상 자살임무에 가까운 작전이었으므로 만일 배가 격침될 경우 살아남은 승조원이 주변 섬에 표류할 것을 생각해서 약간의 돈과 비상용 물자를 승조원에게 배급하기도 했으며 출격 전에 술판을 벌여서 최대한 사기의 저하를 막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출항 직전에는 B-29를 개조한 장거리 정찰기에, 출항해서는 일본 근해를 벗어나기도 전에 잠수함에게 들켰으니 이미 그 상황에서 미국은 야마토의 출항을 알아냈고 오키나와에 근처에 가기도 전에 미군 함재기 부대에 포착되었다. 일본군 함대가 출항했다는 것을 포착했다는 보고를 들은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제독은 마크 미처 제독 휘하의 항모들에게 처리를 맡겼다.
무사시가 양현에 골고루 어뢰를 맞아서 함내 구획이 균등하게 침수되는 바람에 오히려 격침까지 시간이 오래 걸려서 무사시는 잠수함에게 최후를 맞았다는 낭설까지 돌았었다. 해당 전투의 전훈을 살려 미군의 조종사들은 독자적인 판단으로 야마토를 공격할 때 좌현에 집중적으로 공격을 가했다. 그래서 야마토는 이 해전에서 좌현에 9발의 어뢰를 맞은 반면 우현에는 단 1발의 어뢰만 피격당했다.
약 117대의 항공기에게 다수의 어뢰와 폭탄에 피격 당하고 배가 기울어지자 2시 2분, 작전 중지와 퇴함 명령이 내려졌다. 2시 23분 야마토의 탄약고가 유폭하면서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고 야마토는 버섯구름을 피워올리며 순식간에 해저 밑바닥으로 침몰하고 만다. 폭발이 위력이 매우 거대하여 폭음은 100㎞나 떨어진 규슈 남부까지 들렸고, 폭발연기는 160㎞ 거리에서도 관측되었으며, 퇴함한 승조원중 대부분이 폭발에 휘말려서 사망했다. 일단 버섯구름 옆에 있는 함선의 크기와 비교해도 엄청난 폭발인게 보인다. 버섯구름은 6㎞ 고도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함께 출동한 함정 중 피해가 적었던 3척의 구축함이 살아남은 야마토의 승조원들을 구조하여 귀항하였다. 구조된 승조원은 전체 3000여 명 중 단 269명에 불과했다.
폭발의 여파로 함체는 완전히 두 동강이 난 채 각각 멀리 뒹굴고 있다는 것이 근래의 수중탐사로 밝혀졌다.
이 전투에서 미 해군과 일본 해군의 인명손실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미군은 F6F 헬캣 3대, SB2C 헬다이버 4대, 어벤저 3대가 격추됐고 조종사 4명, 항공승무원 8명이 사망했다. 총 12명. 일본군은 야마토에서 3055명, 야하기를 포함한 제2수뢰전대에서 1187명이 사망했다. 따라서 둘을 합친 일본군의 총 전사자 숫자는 4242명. 미군 한 명이 전사할 때 일본군은 353.5명이 전사하는 더없이 초라하고 굴욕적인 전과를 기록하며 연합함대의 자존심은 그렇게 태평양에 가라앉았다. 거기에 태평양 전쟁을 치르면서 소중한 목숨을 값비싼 수업료로 지불해 가며 입지를 탄탄하게 쌓아온 항공모함에게 주도권을 상실당한 전함은 마침내 초거함 야마토급의 격침과 함께 거함거포주의의 종말을 맞이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당대 최고로 호화로운 스펙으로 만들어졌지만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것이 타이타닉과 닮았다. 그리고 침몰된 야마토를 조사한 것도 타이타닉을 조사한 그 탐사선이었다.
야마토의 침몰 과정에서 일본 해군은 자신들이 가진 최대의 함선이자, 연합함대의 자랑이었던 함선을 미국의 본토 진격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그냥 갖다 바쳤다. 이를 본 미국은 카미카제에 이어 자신들의 최고 전함까지 자살공격에 쏟아붓는 일본 제국을 일반 공격으로 굴복시키기 힘들다고 생각했고, 원자폭탄의 실전 투입 의견이 강해졌다.
여담이지만 야마토를 공격하던 도중 격추된 헬다이버의 조종사는 아주 가까이에서 야마토가 침몰하는 하이라이트를 보고나서 비행정에게 구조되었다고 한다.
연합함대의 체면을 지키기 위한 침몰
야마토의 최후의 출격은 일본 제국 특유의 답이 없는 무의미한 짓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야마토가 오키나와로 출격하는 것은 당시 전황으로는 성과를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자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군부 내에서도 반대 의견이 많았다. 군 수뇌부에서 그런 반대 의견을 누르기 위해 한 말이 "병력을 남긴 채 패전한다면 연합함대의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였고, 그 말에 모든 반대의견이 쑥 들어갔다고 한다. 설득된 것이 아니라 설득을 포기했기 때문이지만.
즉 출격작전 자체가 체면을 중시하는 일본 특유의 사고방식 때문이었던 것이다. 거기다 히로히토도 "해군이 항공작전 말고 수상함 작전은 안 하느냐"며 은근히 부추겼다. 덴노께서 이러시는데 누가 감히 반대하겠느냐 말이다.
그래도 제대로 된 작전이라도 세웠다면 좀 나았을 것이지만 하필 운용자가 일본군이라서 그저 닥치고 적이 진을 치고 있는 오키나와로 반자이 어택을 해버린 것. 도대체 히로뽕을 얼마나 빨았길래 이런 정신나간 발상을 하셨나요?
그리고 해전 결과는 미군 12명 전사에 비해, 일본군은 야마토 3055 + 기타 1187 = 4242명 전사. 겨우 비행기 10대와 12명의 적군을 4242명의 군인과 세계 최대의 전함(+ 경순양함 1척, 구축함 4척)하고 바꿔먹은 거다! 구축함 1척만 격침되어도 비행기 10대 보다 더 손해인데 이건 도대체 얼마나 손해 본 건지 계산도 못 할 지경.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미군의 공격을 얻어맞기만 하다가 죽었으니 연합함대의 체면은 완전히 망가진 셈. 일본 제국의 높으신 분들은 만족했을지 몰라도...
어차피 살아 남았어도 구레 군항 공습 등 공습으로 격침당했거나, 미군에게 노획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제국의 수뇌부들로선 USS 야마토를 보고 싶진 않았을 테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된 작전도 안 세우고 야마토를 사지로 내보낸 건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었다.
미국
일본 해군의 상징을 격침시켰다!
미국 해군 입장에서 야마토는 무조건 격침시켜야 할 적이었다. 세계 최대의 전함이자 일본 해군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미 해군 항공대의 사정도 한몫을 했는데,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항공모함 전단을 유지하려면 항공모함이 전함보다 세다는 증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사시의 경우도 잠수함에게 격침되었다는 설이 나돌 정도였으므로, 항모의 가치를 보여주려면 일본군의 1급 전함을 함재기로 격침시켜야 했다.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전쟁이 끝나면 국방예산이 축소될 것이므로 이런 어필은 꼭 필요하기도 했다.
그래서 야마토가 출격하자, 미 해군 항공대는 야마토를 침몰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고 결국 야마토를 격침시켰다. 세계 최대의 전함도 격침시키고 항모전단의 가치 어필도 했으며 피해도 매우 적었으니 미 해군에게 야마토는 엄청난 선물 보따리였다.
야마토급의 전과
1번함 야마토의 확실한 전과는 사마르 해전에서 구축함 1척 공동대파에 불과하다. 이설이 있는 호위항모 갬비어 베이와 구축함 호엘 공동격침을 포함시킨다 해도 확실한 전과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거기에 구축함에게 쫓겨서 도망가는 바람에 작전을 말아먹은 건 분명한 사실이고, 그 덕분에 다큐멘터리 <실전최강 전투기대전 시즌1 야마토 전함과 세기의 공중전>에서도 "야마토에겐 아무런 영예도 없었다"며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래도 대공포로 적기를 격추한 전과는 약간 있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 야마토와 무사시가 수량 미상의 적기를 격추했고, 야마토의 최후 전투에서도 비행기 10대를 격추했다고 한다. 이 중에서도 함재기 1대는 자신이 야마토에 떨군 폭탄이 폭발하는 과정에서 휩쓸렸으므로 엄밀히 따진다면 비행기 9대 격추라고 볼 수 있으나, 일단 야마토 공격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므로 10대라고 인정된다. 그리고 희생된 사람은 12명.
2번함 무사시는 레이테 만 해전에서 일부러 타 함선과 조금 다른 색을 도색해서 미군의 화력을 끌어오는 탱킹 역할을 수행하다가 방어력을 상회하는 집중공격을 맞이해서 폭탄과 어뢰를 신나게 얻어먹고는 포격전에 참가하기 한참 전에 격침당한 상태였다. 그래도 무사시가 입은 피해는 어뢰 20발, 폭탄 17발 혹은 어뢰 10발, 폭탄 16발 명중으로 추정되어 단일함에게 이정도의 맹공이 퍼부어진 경우는 적기 때문에 어느 정도 탱커로서의 역할은 충실하게 수행했다고 평가 받고 있다. 그러나 대함 전과은 더 안습해서 마지막 전투말고는 전투에 참여한 전과가 없다.
3번함 시나노는 야마토, 무사시보다 안습했다. 이쪽은 아직 미완성인데다가 항공모함 부족으로 인해 항공모함으로 개장했고 그마저도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전에 마무리 공정과 함재기의 인수를 위해 구레항으로 가던 중 상황 오판과 불운이 겹쳐 울프팩이라 불리는 잠수함 전대도 아닌 단 한 척의 잠수함에게 걸려서 단 어뢰 네 발을 맞고 용궁으로 갔다.
과달카날 해전에 불참한 이유
카도쿠라 소우지 중장 : 연합함대에는 아직 무츠도 있고 나가토도 있고 세계 제일의 위용을 자랑하는 이 야마토도 있다. 거함거포를 지금 쓰지 않고 언제 쓰겠는가?
우가키 마토메 중장 : 하지만, 카도쿠라...
카도쿠라 : 지금이야말로 모든 함을 동원해 최후의 총공격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구로시마 가메토 대좌 : 카도쿠라 사령관, 죄송합니다만 저희들도 그러고 싶습니다.
카도쿠라 : 왜 안 하는가?
구로시마 : 하지만...
카도쿠라 : 하지만 뭔가!
우가키 : 사실은... 기름이 없다...
카도쿠라 : ...(말없이 자리에 앉는다)
일본 영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에서 나오는 대사.
야마토는 과달카날 해전에 참가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트럭 섬까지 내려와서 대기중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함 히에이가 미국 구축함들에게 기관포로 두들겨맞거나 기리시마가 전함 워싱턴에게 격침당하는 상황에서도 연료 부족 등을 핑계로 손가락 빨며 구경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위의 영상이나 일본군의 핑계와는 달리 실제로는 미드웨이 등지에서 큰 손실을 입기는 했으나 무츠가 굉침하기 이전의 과달카날 해전의 이전시점에서는 아직 일본이 확보한 유정들과 연결되는 수송라인은 무사히 가동되고 있는데다 비축 물자들도 남아있던 상황으로 넉넉하진 않아도 물자가 부족하다고 전함을 전선에 내보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결국은 야마토를 그런 하찮은 싸움에 내보내면 연합함대 체면이 깎인다는 게 이유.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독일 해군은 최신예 전함인 비스마르크를 그런 사소한 임무에 투입하여 순양전함 후드를 격침시키고, 신예함인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중파시키며 영국 해군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물론 그 뒤에 뭇매맞고 가라앉았지만 적어도 용감하게 전투해 공을 세운 뒤의 일이므로 야마토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저렇게 댄 핑계인 연료가 부족했던 원인 중 하나가 해군과 육군 사이의 알력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국가에서는 정부가 산업체를 통제하거나 직접 석유를 뽑아올려서 정제한 뒤 육군과 해군에 분배하겠지만, 일본군은 정부의 통제를 받지않고 해군과 육군은 견원지간이라는 사정 때문에 이는 불가능했다. 덕분에 일본군에서는 해군과 육군이 각각 따로따로 유전을 배분받아서 제각기 직접 석유를 정유해서 쓰고 있었으며, 원유나 정유소를 공유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해도 심각했을 석유 부족이 훨씬 더 심각해졌다. 과달카날 해전 당시에도 일본 해군이 배정받은 인도네시아의 유전들은 정유시설이 이미 파괴된 상태였고 육군의 정유시설도 공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기껏 배정받은 유전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
야마토가 출격도 안 했는데 기름이 없는 이유는 과달카날에서 작전하는 다른 함들에게 일단 자신의 연료를 보급 해줬는데 위의 이유 때문에 야마토가 그 후에 연료를 보급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는 야마토의 정규 최고속도가 27노트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과달카날 해역으로 출동하는 일본 전투함대의 속도는 라바울에서 과달카날 섬까지 평균 30노트였으니, 만약 야마토가 과달카날로 진출했다면 그 3노트나 느린 속도 때문에 항해 도중에 함대 자체가 미군 항공부대의 등쌀에 시달리다가 과달카날까지 가보지도 못하고 라바울이나 트럭 섬으로 회항하게 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지는 것. 1930년대 초반에 야마토급의 제원을 정하는 과정에서 20만 마력/30노트안이 유력하게 검토되다가 그만한 속도는 앞서 설명했듯이 배수량 폭증과 과도한 비용 문제로 기각당했다는 점에서 만약 20만 마력/30노트가 야마토의 기관과 속력으로 채용되었다면, 야마토는 과달카날 해역에서 보다 유용하게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반대로 미국의 경우 야마토와 속력이 비슷한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 워싱턴,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사우스다코타를 적극적으로 쓴 점을 들어 야마토가 해상호텔로 있었다는 점을 비판하기도 하는데 이는 일본군의 함대결전사상의 문제도 있지만 동 해역의 제공권 문제도 컸다. 당시 과달카날은 제공권을 활용할 수 있는 낮에는 미국이, 항공기 활동이 제한되는 야간엔 야전에 목매던 일본 제국이 제해권을 지니고 있었다. 30노트의 빠른 속력을 가진 공고급이 아니면 해가 뜨기 전까지 작전을 마치고 돌아오기가 상당히 버거웠다. 반대로 만일 일본군이 제공권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면 미국 역시도 전함을 쉽게 투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문제는 함대결전사상과 점감요격작전에 근거한 축차투입으로 제공권 상실을 자초한 것이 바로 일본군 자신들이었다는 것. 점감요격작전이 상정한 대로 본토 방위전이었다면 침공군의 항공전력을 일본의 항모전력으로 소모시킨 상황에서 주력 전함부대는 본토의 기지항공대의 지원 하에서 싸울 수 있지만(실제로 과달카날 전역 당시 미국의 항모전력은 일시적으로 마비상태에 빠졌다)2차대전에서 실제 벌어진 일본제국의 침략전쟁에서 점감요격작전식으로 함대를 운용한 결과 정작 전함이 투입될 차례에는 상대방 육상비행장의 제공권이 건재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대전 전반기의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항공주병론자/전함무용주의자의 대표격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임에도 항모를 보조전력으로 간주하고 전함은 아끼는 이런 모습에서 실제 가장 큰 문제는 수뇌부들의 보신주의였다는 주장마저 있다. 이런 문제는 야마모토의 후임들도 여전해서, 레이테 만 해전 한 달 전 연합함대 사령부는 함대결전을 지휘한다는 명목조차도 내팽개친 채 사령부를 육상으로 이동시킨다는 명목하에 본토로 도주, 사령부가 본토로 도망치는 와중에 미군 수송선단과 동귀어진하라는 명령을 받은 함대의 사기는 높지 못했고 사령부의 작전목적을 명확하게 이해시키는 것에도 실패, 레이테 만 해전은 처참한 실패로 끝난다. 그나마 항공모함을 기함으로 삼고 전함을 그 호위로 돌릴 개념은 있었던 오자와 지사부로가 최후의 사령장관이 되었을 때는 이미 지휘할 함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연료나 속도보다도 심각한 문제로 야마토가 함대결전사상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져서 운용되고 있었다는 점이 있다. 함대결전사상에서는 한 번의 중요한 결전으로 승부가 갈리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수리해 가면서 계속 운용하기 위한 예비부품을 준비할 필요가 별로 없다. 게다가 야마토의 경우에는 최대급의 전함이라는 특성상 부품 제조 자체가 상당한 난이도와 시간 및 정성이 필요한 문제점까지 있다. 그 결과 주포와 같은 일부 중요한 부품은 전투중 소모 혹은 파손시 즉시 교체할 예비부품량이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즉, 함부로 해전에서 굴리다가 약간의 파손이 발생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부품 수급문제로 상당기간 전력에서 이탈해버린다는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마토는 1회용 전함이란 말도 있다.
아무리 뛰어난 병기라도 '주인을 잘못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
카탈로그상 전투력은 매우 우수했고 실질적인 전투력도 나름대로 우수했으며 일부는 선진적이라 볼 만한 영역도 있었지만, 야마토급의 가장 큰 문제는 당시 국가예산의 1%를 사용해 한 척당 현대 기준으로 1조 엔이나 들어간 전함이면서 정작 한심한 운용으로 인해 실전에 참가할 기회 자체를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레이테 만 해전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구축함한테 쫓겨 달아나는 막장 행각을 보여주고 말았다. 그 결과 위에 있는 '야마토급의 전과' 항목에 나오듯이 실적이 정말로 초라하기 짝이 없다.
사상적으로는 구일본군하면 해군, 그리고 '야마토'하면 그 해군의 상징이었던 만큼, 당시 피해를 입었던 동아시아 주변국들은 야마토란 이름 자체와 그를 이용하는 행위를 일본 극우와 연결지어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당시 일본 해군에서 가장 유명한 전함은 나가토라는 게 함정. 실제로 야마토는 당시 일본 제국 내에서 야마토와 그 자매함의 수병들을 제외하고는 해군의 일부 고위층 인사들만 알고 있었을 정도로 존재가 감춰졌으며, 본토에서 가장 유명했던 전함들은 나가토급 전함의 두 자매함 나가토, 무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