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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이야기

03. 송대(宋代)의 미술(美術)

작성자管韻|작성시간19.07.03|조회수218 목록 댓글 0


03. 송대(宋代)의 미술(美術)

 

 

 


 

 

 

* 북송

 

북송 회화의 일반 경향이 사실주의를 따랐다. 사실주의 회화는 정밀하고, 숙련된 기교를 요구한다. 화조화에 영향을 미쳐서 정밀하게 그렸다. 황거채가 북송 화원의 대조가 되면서 황전 화풍이 화원 화풍을 지배하였다. 다른 화풍은 배척 당했다.

 

화원에서는 인물은 오도자를, 산수는 이성을, 화조는 황거채의 화풍을 규범으로 삼았다.

 

조창과 염원길이 전통 화원의 화풍을 따랐으나 약간의 변화가 나타난다. 이후에 최백이 나와서 변화가 더 분명해진다.

 

* 화조화의 발달 시기

 

1) 북송 초기 화원에서 후촉과 남당의 화가들이 들어와서 사생과 채색을 하였다.

 

2) 中期로서 形寫를 중시하는 그림에서 정신을 중시하는 쪽으로 변화해 갔다.

 

필묵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내적 표현을 강조하였다. 최백이 대표화가이다.

 

3) 3기는 휘종 때 사실주의 회화가 극치를 이룬 시기이다.

 

. 趙昌

 

사천성 성도 사람으로 진종-인종(1008-1076) 때 사람이다. 지역의 화풍(서촉의 황전)에서벗어날 수 없으모 황전 화파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집안이 부유하여 여유롭게 살았으므로 권세가나 규범에 얽메이지는 않았다. 자기 취향대로 그렸기 때문에 황전화파에서 약간의 변화가 보인다. 그러나 그의 확실한 진적이랄 수 있는 작품은 없다.

 

064 -- 조창

 

, 易元吉(? - 1064)

 

호남 장사 사람으로 민간인 화가이다. 화원 화풍의 엄격함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화풍이 조창과 유사하다.

 

065 -- 역원길

 

,. 崔白(1050-1080경에 활동하였다.)

 

안휘성 봉양 사람이다. 花竹을 잘 그렸고, 영모에 능하다. 민간 화가로 있다가 60세에 화원 화가가 되었다. 황전 화풍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조창과 역원길을 따랐다고 하겠다.

 

신종 때의 화가이다. 화조화를 통하여 상징적 비유로 표현하였다.(두 마리의 까치를 그리고, 까치는 즐기다의 와 발음이 같으므로 즐거움이 두 배라는 식으로 상징하였다.)

 

최백은 필묵적 표현을 강조하고 상대적으로 채색을 가벼이 하였다. 飛白도 보인다. 빠른 붓놀림을 보여준다.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바로 필묵을 사용하였으므로 문인화의 길을 보여준다. 그는 그림에서 운동감(생명력)을 표현하였다. (이전 시기에는 정적인 표현으로 운동감을 거의 볼 수 없었다.) 황전의 정적인 그림에서 한 단계 발전한 그림이라는 평을 듣는다. 황거채의 산자극작도와 최백의 쌍희도는 좋은 비교가 된다.

 

066 -- 최백

 

, 휘종(趙佶 1082-1135)

 

신종의 11번 째 아들로 왕자 시절에는 황제가 되리라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므로 그림에만 몰두하였다. 예상 외로 황제가 되었지만 그림의 취미를 버리지 않고, 오히려 그림을 후원하였다. 자신도 많은 그림을 남겼다. 李瑋, 王詵에게 그림을 배웠다.

 

북송 말기에는 100년 가까이 지속된 평화로 경제적인 번영이 있었지만 사치 풍조도 만연하여 궁궐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다. 왕실과 상류층은 사치스런 생활을 하였고,그림의 완상을 취미로 삼았다. 조길은 황제가 되었으나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그림은 최백에게, 글씨는 설직에게 배웠다. 왕선과 조금양은 왕실의 측근으로서 가까이 지냈다.

 

화원제도를 정비하여 그림과 서법을 배울 수 있도록 후원하였다. 화원 화풍은 纖巧工緻하다. 典雅하고 아름답다. 형상에서는 사실적이다, 詩意的이라서 함축성이 강하다. 엄격하게 규범을 지킬 것을 강조함으로 창의성이 떨어지는 단점도 있다. 회화사에서는 이런 풍조를 宣和體라고 한다.

 

조길의 그림은 20여 편이 전해온다. 화조화가 제일 많다. 생명감이 넘치는 물고기를 그렸다. 화풍은 아주 정밀하고 화려하게 그린 것도 있고, 수묵적 기법으로 그려서 맑고 깨끗하게 표현한 것도 있다.

 

067 -- 조길

 

. 유채

 

중국인들은 魚樂圖라고 하여, 물고기의 여유로움을 노장사상의 상징으로 생각하여 이상향적 생활의 상징으로 그렸다.

 

* 남송

 

화원화가들이 전통적인 화조화의 기법으로 깔끔한 양식의 그림을 그린 반면에 화원 바깥에서는 사군자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였다. 이런 유형의 그림을 그린 대표적 화가가 왕정균이다.

 

대체로 영종시기(1196-1223)를 경계로 정밀한 운필과 색채화에서 단순하고, 거칠어진 화풍으로 변하였다. 색상도 眞彩에서 淡彩로 바뀌었다. 남송 말에는 선종 불교가 성하여서 화조화도 영향을 받아 常形보다는 常理를 추구하였다.

 

따라서 황전 화풍에서 야일한 서희 화풍을 바뀌어 갔다. 대표 화가는 양혜와 묵계이다.

 

고종이후(남송의 초대 황제) 산수화와 인물화에서도 뚜렷한 변화가 나타났다.

 

1) 화폭이 축소되고, 團扇扇面과 서화첩이 유행하였다.

 

2) 구도의 제재를 취사선택함으로 간결해지고, 절지 화조가 나타났다.

 

3) 채색이 담채화함으로 수묵과 조화를 이루었다.

 

4) 命題가 접차 詩意化 해졌다.

 

. 李安忠

 

항주 사람으로 화원 화가이다.화조화를 잘 그렸다; 특히 짐승과 새를 잘 그렸다.(남송에서느 새와 짐승을 그린 것이 많다.)

 

. 李迪

 

하남성 맹현 사람이다. 화원화가이다.화조화를 잘 그렸다. 호방한 대폭화도 있고, 소폭화도 있다. 황전 화풍을 보여준다.,

 

. 林椿

 

항주 사람이다. 화원의 대조를 지냈다. 조창에게 배웠다. 채색을 잘 하고, 필묵은 중요시 하지 않았다.

 

068 -- 이적, 임춘

 

 

 

<禪畵花鳥)

 

화원에서는 섬세하고, 정치하며, 장식성이 강한 화풍이 전통으로 이어지는 동안에 화원의 밖에서는 禪畵 양식의 인물화와 산수화가 그려지고 있었다. 당시로는 狂氣가 서린 작풍으로 보았으나 원나라 때는 문인사대부가 선호하였다. 대표적 화가는 양해와 법상(목계)이다.

 

양해

 

감필법과 발묵법으로 형체를 표현하였다. 경치나 모습을 간결하게 그렸지만 의미를 담으려고 하였다. 傳神을 하였다

 

.069 -- 마원, 양해

 

. 法常(목계)

 

감필법으로 필묵에 의하여 그렸다.거칠고 간략하면서도 호방하다. 草率하다. 법상의 화조화는 양해의 화법을 닮았다. 文同의 영향을 받았다. 이후에 禪畵風으로 그렸다.

 

양해는 남송 원체화에 뿌리를 두었다. 양해의 필법은 빠른 붓질에 힘이 넘친다. 법상은 中峰 위주로 筆勢가 둥글고 부드러워면서 함축적 의미를 담는다. 법상의 그림이 文氣를 나타낸다면 양해는 의 기상이 넘친다고 말한다.

 

070 -- 법상

 

071 -- 범안인, 진용(구룡도)

 

진용의 구룡도는 묵으로만 그렸다.

 

072 -- 왕정균의 수묵도

 

073 -- 실명 화조화 1 - 19

 

, 왕정균(王廷筠

 

고목과 죽석을 잘 그렸고, 수묵화 양식으로 그렸다. (墨戱라고 함)

 

, 李迪(이적 1100-1197)

 

송대의 궁정회화 양식으로 그렸다

 

074 -- 단풍류록도(-무관)

 

 

 

<文人畵>

 

송대에 100여년에 걸쳐서 태평성세가 이어졌다. 신종 때 유교적 폐단이 가시화되면서 왕안석의 개혁파와 사마광의 구파 사이에 심한 당쟁이 일어났다. 이에 불안을 느낀 문인 사대부들이 자신들의 우울한 심사를 시나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문인화 운동이 일어난 시기를 신종 때로 본다. 문인화풍을 주장하는 사람은 대부분 과거에 통과하여 관료가 된 문인사대부이다. 이들은 서화를 정치 활동의 여기로 그렸다. 그림은 시가처럼 성정을 읊어 내는 것이다.(소식) 따라서 문인화가는 감정 표현이 뛰어나고. 회화에서 물상의 형사나 기본의 법도에 얽메이지 않는다. 거칠 것 없이 자유롭게 그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회화는 形似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寫意나 묵희화 해야 한다.

 

이들은 전통적인 화원화가들이 그린 산수화나 화조화와 다른 화풍으로 그렸다. 枯木竹石, 宋蘭水仙 등에 함축된 의미를 담아서 새로운 양식의 그림을 남겼다. 소위 墨戱라고 할 수 있고, 사의라 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

 

남송의 수묵 산수화와 미불의 미점 산수화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대표적 화가는 문동과 소식. 그리고 미불이다.

 

1)당쟁의 와중에 놓여 있는 문인, 사대부들이 주로 그렸다.

 

2) 수묵적 逸品 양식을 선호하였다.

 

3) 수묵 중에도 강남적 전통인 동원-서희의 영향을 받았다.

 

4) 만당의 수묵 일품의 화풍인 禪畵의 영향을 받았다.

 

5) 엄격한 서법으로 붓 다루기가 익숙한 문인들이 쉽게 그렸다.

 

6) 枯木竹石은 문인들의 의취를 다루기 좋은 소재이었다.

 

, 文同(1018-1079))

 

사천성 사람으로 북송 말기에 당쟁이 치열하였던 시기에 살았다. 소식의 외사촌 형이다. 정치 성향은 소식과 조금 달랐다. 그는 신당이 득세할 때 그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하게 표시하지 않았다.

 

그가 그린 묵죽화는 이 시대를 살아간 그의 고민과 우울함이 표출되어 있다고 한다.

 

문동은 특히 대나무를 잘 그렸다. 문인화풍의 그림은 실제의 형사보다 물상이 담고 있는 常理를 추구하였다. 자기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빠른 붓질로 표현하였다. 그래서 형사가 아닌 의취를 나타낸다고 믿었다. 묵으로 색을 대신하였다. 대나무를 통해서 자신의 심정을 표현했다.

 

소식은 문동을 이런 이유로 높이 평가하였다.

 

075 -- 문동의 묵죽도

 

, 소식(1037-1101)

 

사천성 사람으로 호는 동파(東坡)이다. 일찍 관리가 되었으나 당쟁 때문에 감옥도 가고, 귀양을 가고, 임종 직전에야 사면이 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문동에게 그림을 배웠다. 그림을 그릴 때 먼저 가슴 속에 그린 후에 손으로 그린다. 는 문동의 주장을 따랐다. 그는 형사도, 오랜 수련을 통하여 손의 기예를 익히는 것도 무시하였다. 그림에서 진적을 남긴 것은 거의 없으나 중국 미술사에서 문인화론을 주창함으로 아주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소식은 문인화의 창도자로서 書畵本一律을 주창했다. 화원화가 중에 일부가 그의 주장을 따랐다. 대표적인 화가가 최백이다. 이후에 화풍에 점차 변화가 오기 시작한다.

 

그는 유교 사상과 도교 사상을 모두 수용하였다. 유가에서는 그림을 교화용으로 이용하였으나 소식은 단지 즐거움을 취하는 것으로 이용하였다.

 

그는 자연 현상에 상형은 고정되어 있지 않지만 常理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문인들은 자연 경관을 물상으로 대할 때는 완벽한 교양을 구사하여 눈에 보이는 물상 뒤에 있는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세계를 읽어내어야 한다. 즉 형상을 넘어서 상리를 얻는 것이라고 하였다.

 

소식의 이런 주장은 송대의 사실주의적 화풍에 대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외형의 형상만 모사한 송대의 화원 화가 작품은 가치를 폄하당하고, 문인화풍이 새롭게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것은 그림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문인화가들은 흔히 쓸쓸하고, 간략하고, 심원하고, 심오하며, 청신함, 담백함, 평담천진을 추구하였다.

 

076 -- 소식의 괴목도

 

, 왕무구

 

077 -- 왕무구의 매화도, 사매도

 

,. 왕정견

 

. 조맹견

 

 

 

<書法>

 

서법의 기본 요소는 필법, 結構, 章法이다. 당대에 五體가 완성된 후로는 새로운 書體를 만들지는 않았다. 二王歐顔의 기본서체에서 약간의 변화만 있었다. 에서 으로, 에서 으로, 또 여러 서체를 융합하여 를 겸하는 새로운 서체를 만들었다. 그러나 새로운 서법을 만들지는 않았다. 법도를 무시한 체 미친듯이 쓰는 글씨도 유행하지 않았다. 예술적인 표현, 성정에서 일어난 개성미의 표현을 하였다.

 

구양수는 集古錄(金石 碑刻을 모아서 千卷으로 만든 책)에서 서법에는 서정성이 있어야 하고, 意態가 드러나야 한다고 했다. 서법을 배우는 것은 즐기고, 소일하기 위해서 이다. 性情을 헤쳐서는 안 된다. 고 했다.

 

송나라 서가들은 안진경의 서체를 많이 따랐다. 불교의 선 사상과 문학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서가들은 문인 사대부로서 지식인이었고, 선을 잘 알고 있었다.) 예술성을 강조하면서 유가의 제세 사상은 많이 완화되어 있었다. 구양수는 書家가 아니고 文人이다. 송의 대표적 서가인 소식은 君子可寓於物而不可留意於物我書造意本無法이라고 하여 를 강조하였다.

 

송나라 서가의 風格은 당과 다르다. 모양 보다는(常法) 뜻을 숭상(崇意)하였다. 세속에서는 행서와 초서로 인품과 성정을 펼쳐내는 것이 일반화 되었다. 행서도 行楷, 行草로 변하여서 쓰여졌다. 일반에서 비석 글씨(해서로)와 간찰 글씨(행초로)의 구별이 있었다.

 

송왕조는 숭문경무 정책으로 국가가 무력해지면서 북방 이민족과 대치하는 사대부들이 심리적으로 불안을 느꼈다. 이 때문에 서법에서 초연한 자세를 나타냈고, 스스로 風氣를 표현하였다.

 

송나라의 서법은 숭문 정책과 관계가 깊다. 文治 정치는 과거가 중심이다. 과거 시험에서는 문학의 우열로 뽑지 않고, 지식 형성(주로 논어 등 유가 경전)이 얼마나 이루어져 있는가를 따졌다. 사대부는 과거를 준비하면서 서법보다는 경전 공부를 우섢시 하였다.

 

당나라 때는 이와 달랐다. 과거 시험을 치루면서 시험관의 비위에 맞게 글씨를 쓰고, 답을 구하였다. 시험관이 좋아하는 서체를 반듯하게 쓰는 것이 중요하였다. 반듯하게 쓰고, 시험관의 눈에 들기 위해서는 법도를 따라야 했다. 눈도장을 직어 두기 위해 미리 行卷(행권이란 미리 시험관의 취향을 파악하여 좋아 하는 서체로 자기가 지은 글을 반듯하게 써서 보여준다. 시험을 칠 때 좋은 인상으로 기억해주기를 바라면서, 이것이 행권이다.) 그러나 송조에 와서는 행권의 풍조는 거의 없어졌다. 서법도 시험관취향에 맞게 연습을 거듭함으로 을 아주 중요시 하였다.

 

송대에서는 서법의 법도보다는 글의 내용(理學)을 중요시 하였으므로 법도가 아닌 개인 취향을 더 우선시 하였다. 한편으로 송대의 유학은 이학(성리학)으로 흘러갔다. 따라서 서화도 유가의 成敎化 助人倫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 서법에서 송시대의 특징을 들면

 

1. 행서가 유행하였다.

 

2. 를 숭상하고 을 가벼이 여겼다.(이때의 는 심중의 性情이다.)

 

(家學으로 부자지간에 전수되던 서법도 중단되었다. 서법을 스스로 익히므로 독창력을 발휘하였다.)

 

3. 송의 서법은 을 높게 보았다.

 

4. 人品書品은 서로 관련성이 있다.

 

 

 

. 淳化刻帖

 

송의 태종이 칙명으로 王著에게 二王의 서법과 위진시대의 유명 서가의 글씨를 하여 을 만들도록 하였다. 방법은 硬黃(종이에 밀랍을 먹여서 글씨 위에 얹고 베껴 쓴다.), 탑본, 雙鉤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예 사람은 서법을 서법의 범본에서 배웠다. 해서는 주로 의 탁본을 이용하였고, 행초는 묵적에 의하였다. 왕저는 교양이 높지 않고, 감정하는 안목도 높이 않아 이왕의 서에는 위작이 많았다.(반 이상이라고 한다.) 그래도 칙령으로 만든 각첩이므로 서법사에 미친 영향은 크다.

 

송대의 첩본은 약 20여 종이 된다.

 

,蔡襄(1012 - 1067)

 

북송의 초기에는 유명한 서가들이 많다. 李建中(945 - 1013), 李宗顎(964 -1011). 范仲淹(989 -1052). 歐陽修(1007 -1072), 韓琦(1008 - 1075) 그 중에도 채양이 제일 유명하다.

 

복건성 출신이다. 채양의 서풍은 이왕과 안진경을 따른다. 그러나 이왕과 안진경을 넘어서지는 못 하였다는 평을 듣는다. 채양의 주변에는 한기 등 문사들이 모여들어서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서법에서 유파를 만들지는 못 하였다.

 

후대의 사대부들이 채양의 서법을 익혔다. 오대-북송 초기에 전통적인 서법이 쇠퇴할 때 채양은 전통을 이어 받아서 다음 세대인 소식과 황정견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당나라 때는 사대부 사이에 파벌을 만들어서 다투는 당쟁을 찾기가 어렵다. 개인의 권력 다툼만 있었다. 송나라 때는 관료들이 과거를 거친 사대부이어서 지식 수준이 아주 높았다. 단지 시부만 읊조리는 정도가 아니고 책론을 논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자연히 유학에 기본한 치국 논쟁이 일어났고, 치국제세 이론에 따라서 파벌도 생기면서 당쟁이 나타났다.

 

학자들은 당의 권력 다툼은 관료 사회의 구조에 기인하고, 송의 당쟁은 사대부 사회의 의식 구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대부 사회에 변화가 온 것이다. 송대는 고대의 경학에 근거하여 유교의 이상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 이상이다.

 

서법에서도 소식과 황정견은 법도에 맞게 서법을 표현하기 위해서 기예를 수련하고 익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였다.

 

. 蘇軾(1037 - 1101)

 

소식은 사천성 사람으로 시, ,.화에 모두 능하다. 소동파는 어릴 때 이왕을 공부하였고, 나중에는 안진경 서를 공부하였다. 채양은 기교의 습득에 관심을 쏟았다면 소식은 기교에서는 안진경을 벗어나서, 정신을 담아내려고 하였다.

 

소식이 말하기를 글씨를 아름답게 쓰고자 하지 않더라도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아름답게 쓰려고 굳이 법도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서가들이 모두 법도를 지키지 않고 자기의 취향에 맞추어 글씨를 쓴다면 바로 개성이 표현되는 것이다. 이로서 意趣를 담아내는 것이 바로 尙意이다.

 

이것은 서법에서 하나의 혁명이었다. 소식이 기교를 부정하듯이 말 하지만 의취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기교의 숙련이 반드시 필요하다. 소식 자신은 기예도 완숙하였다고 한다.

 

그는 시, , , 인을 모두 잘 하였다. 송의 사대부는 단순히 민을 통치하는 관료가 아니었다. 소식에서 보듯이 지식인이었다. 송의 사대부가 지식인 사회를 형성하였으므로 소식이 서화 이론이 나올 수 있었다.

 

. 黃庭堅(1045 - 1105)

 

강서성 사람으로 소식에게 배운 제자이고, 친우였다. 時文에 대한 조예가 깊어서 강서詩派를 결성하였다. 황정견은 禪學도 공부하였다. 그의 서법을 전형적인 禪書라고 말 한다. 그러나 생각은 비록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더라도 표현은 구체적이라서 선서라고 보기 어렵다.

 

황정견은 기교를 따지지 않았다. 이왕과 전통의 풍격도 무시하였다. 이런 이유로 황정견의 서법에는 개인적인 풍격이 너무 강해서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기교와 전통을 무시하지만 완전히 익히고 난 뒤에 무시하는 것이 황정견의 특징이다. (아로헌 특징을 그의 작품에서는 찾기가 어렵다. 그가 남긴 기록 자료에서 보면 그렇다.)

 

행초를 잘 했고, 초서가 성취도가 더욱 높다.

 

. 米芾(1051 - 1107)

 

복고주의자라고 한다. 이왕에게 돌아가서 객관적인 법을 익힌 후에 자신이 생각하는 정신적 가치를 표현하였다. 미불은 회화에서 서정적으로 표현하였다. 미불은 소동파처럼 문학과 회화에서도 소양이 아주 놓았다. 자연히 서정성과 의취를 나타냈다.

 

. 曺佶(휘종)

 

瘦金體의 창시자이다. 화가인 휘종은 글자의 겉 모양에 관심을 기울였다. 내재적인 의취는 조금 소홀하였다는 평을 듣는다.

 

 

 

 

 

. 송대회화 복습

 

101 -- 무관(이성) 청만소사도

 

102 -- 무관(곽희) 산촌도

 

103 - 계산속리도()

 

104 -- 산변후조도()

 

105 -- 적벽도(, 무원장)

 

106 -- 계산 모설도(남송)

 

107 -- 중계연무도(남송)

 

111 -- 계산춘모도(혜숭)

 

112 -- 계산문진도()

 

114 -- 풍설채송도(이산, )

 

(미점산수)

 

121 -- 운산묵희도(남송)

 

(마하산수)

 

126 -- (남송)

 

127 -- 강천누각도(남송)

 

 

 

<佛敎美術>

 

중국의 남부지역은 비교적 불교가 탄압을 받지 않았던 곳이다. 오대-남송 시대에도 불교가 성행하였다. 특히 항주를 중심으로 불교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불교 소조상에서 특징이라면, 예배의 주요 대상이 아닌 나한상이 많다는 것이다. 500나한, 16나한, 18나한 등이 대표적이다.

 

1) 강소성 보성사 18나한상

 

보성사 나한상은 비교적 초기 나한상이다. 보성사 나한상은 降龍, 達磨 나한상이라고 부른다. ( *달마상은 눈이 깊고 코가 높고 수염이 있다. 외양은 과장하였느나 정신을 표현하기 위한 기법이라고 하였다.)

 

또 하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구어 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 상이다. 그 외에도 講經나한, 聽經나한 등 여러 이름의 나한상이 있다. 나한상은 소조가의 창작성이 나타날 수 있다.

 

2) 산동성 장현의 靈巖寺

 

-송의 불교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사찰로서, 제일 중요한 것은 천부전에 있는 니소상이다. 제작년대는 1034 - 1063년이다. 본래 32구를 제작하였으나 명대에 42구나 만들었다. 현존하는 것 중에 27구가 송대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나한의 명칭은 불경에 나오는 이름으로 지었고(29) 나머지는 고승의 이름으로 지었다. 각 나한마다 표현 형식이 다르다.

 

외양에서 과장이 없고 세속적인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면에서는 종교적 숭고가 보인다.

 

3) 대동의 華嚴寺

 

1038년에 요에서 건축한 사찰이다. 불전에는 요나라 때 만든 31구의 소상이 있다. 을 중심으로 양쪽에 보살과 나한을 배치하였다.

 

불상의 상반신은 과장되게 길고, 하반신의 다리 부위는 너무 짧다. 얼굴은 풍만하다. 연령이 뚜렷하지는 않다.

 

당나라 까지 흥성하던 석굴 개착은 송나라에 이르면 뜸해 진다. 돈황의 막고굴과 天水의 맥적산에 송대의 석굴이 남아 있다.

 

121 - 강소성 보성사 나한상 1-2

 

122 -- 산동성 영암사 천불전 1-2

 

123 -- 산서성 대동 화엄사 1-2

 

124 -- 감숙성 맥적상 유마와 시종상

 

125 -- 감숙성 맥적산

 

<四川지구 석굴>

 

, 大足석굴

 

사천성 대족현 지구에는 40여 곳에 50000여구의 마애 석상이 조성되어 있다. 조상 양식은 사실적이다. 지난 시대의 양식에서는 벗어나 있다.

 

북히 北山k 보정산이 규모가 가장 크고, 수량도 많다. 만당 시기에 시작하여 꾸준히 만들어졌다. 특히 송대에 만든 것이 유명하다.

 

일상 생활에서 가까이 만날 수 있는 내용이라서 친근감이 있다. 특히 136굴의 보살상은 사람의 크기로 만들었다. 표정이 편안하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공양인 상은 현실에서 살고있는 실제의 사람을 표현하였다.

 

131 -- 산서성 숭경사 보현보살 상

 

132 -- 관음 보살상

 

135 -- 사천성 대족 불만 136호 도판

 

136 -- 사천성 대족 불만 보살상

 

북산불만은 규모가 최대이고, 조상들이 아주 풍부하다. 특히 136굴이 유명하다. -당 때 유행하였던 曹衣出水, 중후한 모습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朝元仙仗圖에서 보듯이 회화적 線條를 강조하였다.

 

대불만(불상 유적이 많이 모여있는 대불만과 적은 소불만이 있다.)에는 일반 감굴처럼 qfn과 보살은 조상하지 않았다. 불교의 경전에 나오는 경변고사를 소재로 삼았다. 본래의 의도는 불교의 교화가 목적이지만 실제로는 세속의 생활 모습을 조상하였다. 예로서 목우도는 마음을 다스리는 내용이지만 표헌은 목동의 실제 생활을 그렸다.

 

부모 은중경도 자식의 점지를 비는 것에서 임신, 고생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일 등등을 묘사하였다.조각은 아주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치도록 묘사하였다.

 

137 -- 사천성 대족보정산 1-2

 

138 -- 지옥변상도

 

139 -- 보은경 1-2

 

140 -- 소녀상 1-2

 

141 -- 목우도 1-2

 

<佛畵>

 

145 -- 관음보살상 오대(910)

 

관세음보살, 공양인, 비구니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양인의 의복은 전형적인 10세기 사 람의 모습이다.

 

146 -- 보현보살 오대,

 

보현보살이 악사와 수행원을 거느리고 영축산에 석가의 설법을 들으러 가는 장면의 부분 도이다. 돈황 출토, 비단 바탕이다.

 

147 -- 지장보살 十王圖 오대,

 

가운데에 지장보살이 있고, 좌우에 10왕이 있다. 판관도 있다. 비구니, 승려, 공양인도 보인다. 돈황 출토 비단 바탕 그림이다.

 

148 -- 수월관음상 축 961

 

관음상이 남자 얼굴이다. 하단에 남녀 공양인이 각 3인씩 있다.

 

149 -- 부모은중경 변상도 축 991

 

상단에 7불이 있고, 중앙에 설법도이다. 협시 2보살, 10제자, 12보살이 있다. (설법도 에는 많은 보살, 신중, 제자들을 그리는 것이 일반 양식이다.) 아래에는 경변문과 발원 문이 있다. 공양녀도 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내용을 연환식으로 (-> )그려져 있다. 돈황 출토, 비단 바탕

 

 

 

<宋代의 미술이론>

 

唐末의 주경현은 미술품평에 , , , 4격을 도입하였다. 이후로 미술의 품평에서 4격은 순서에서 조금씩 변화가 있었다. 宋初의 황휴복은 文人畵의 품격을 높이려는 의도로 逸格에 높은 가치를 주었다. 이것은 문인화의 寫意論(形神論)과 직결한다.

 

소식은 형신관을 자신의 常理론으로 펼쳐냈다. 常理란 사물의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고유한 성질을 말한다. 이것은 외양의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고 내재된 본성이다. 글씨에서 외관의 형상을 고집하지 않는 행, 초를 그림과 접목시켰다.

 

逸格에서 찾았다. 筆法이 간결할수록 기세는 힘이 넘친다. 경물이 적을수록 의미는 깊어진다. 말하자면 은 욕망을 줄이거나 자신을 낮추는 것이기도 하다. 平淡天眞과 연결된다. 꾸밈과 과장이 없어야 진솔하다는 뜻이다. 은 화가에게 수양적 경지를 요구한다.

 

유도순의 六要는 사혁의 육법을 벗어나지 않는다. 중국 미학에서 변증법으로 해석하자면 이원대립적인 요소의 조화를 뜻한다. 대립과 통일, 강과 약, 평범함과 기이함, 닮음과 다름의 대립적인 문제를 조화시키는 방법을 찾는다. 한졸은 너무 거칠면 를 찾기가 어렵고 너무 섬세하면 기운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거칠음(). 氣韻의 대립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바람직하다. 선화화보의 산수서론에서 自娛의 경지를 天人合一의 경지로 설명한다.

 

자연대상을 관찰함으로 터득하는 이치 즉, 격물(格物=사물의 이치를 따지는 것)을 통해서 인식함으로 느끼는 즐거움은 득도한 자만이 느낄 수 있다. 이럴 수 있는 자는 관료이거나, 사대부이다. 또한 자연산림에 숨어사는 은자가 자연을 가장 잘 알고 조화시킬 수 있다. 선화화보는 천인합일과 격물치지를 할 수 있는 자가 득도한 자라고 하였다. 이것은 전문 화가보다는 문인화가를 우위에 두려는 시도이다.

 

송대의 철학을 지배한 사상은 이다. 이것을 理學 또는 道學이라고 할 때 철학적인 의미가 강함으로 미학으로서만 다루기는 어렵다. 송대의 도학은 유,,도의 三敎에서 공통적인 의미를 끌어낸다. 物我一體, 內外合一, 天人合一의 개념을 지닌다.

 

이전의 유학은 도덕적 가치에 중점을 두었다. 유교는 불교와 도교와 마찰을 일으키고, 논쟁을 하면서 유교도 사물의 이치를 따지는 학문으로 바뀐다.

 

북송 중기 이후에 회화의 문학화 경향을 띄면서 문인화가 대두하였다. 회화에서도 새로운 심미의식이 다양하게 반영되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문예 이론가는 구양수이다. 구양수는 의 관계에서 이고, 이다, 고 했다. 그렇다고 을 경시하지 않았다. 자연 사물에 작가의 의취를 반영하여 생명력을 부여함으로 서정화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사물 대상은 , , 이 있다. 모든 사물은 이 셋을 모두 가지고 있다. 대상물을 바라보고 형태만으로 판별하지 않는다. 마음으로 살피고, 나아가서 이치로 따져서 판별한다. 사물로서 사물을 판단하는 것 즉, 객관적으로 관찰하면서 볼 때는 이다. 나의 눈과 생각으로 사물을 보는 것은 주관적 관점으로 판별한다. 이때는 이 된다. 사물의 은 공정하지만 은 편향적이다. 이다. 이고, 이다. 은 편벽함으로 을 살려야 한다.

 

심괄은 을 외양의 형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으로 본다. 뿐만 아니라 시간의 일치성도 무시한다. 겨울 풍경에 여름에 피는 꽃을 그리는 경우이다. 득의망상을 강조함으로 회화에서 을 강조하였다.

 

理氣論에서는(정호-정이-주희) 이 세상을 도덕체계로 보았다. 불교에서는 현실 세상을 으로 본다.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를 환으로 보았으므로 을 찾으려 하였다. 유학자는 불교보다 유교를 우위에 두려는 의도로 도덕체계를 으로 설정하였다. 를 방해하는 행위는 배척하였다. 를 방해함으로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의 철학적 사유는 생략하겠다.)

 

太極에서 나와, 마음을 통해서 지각하고, 보편성을 띈다. 는 감각을 통해서 지각됨으로 개개인에 따라서 다르게 지각된다. 를 통하여 를 터득하기는 어려우므로 격물을 통해서 찾아가야 한다.

 

宋代에는 유, , 도의 三敎合一의 야앙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불교와 도교도 숭앙하였다. 宣和畵譜는 유, , 선 삼교합일의 관점에서 편찬하였다. 미술이론은 유교의 이와 기를 바탕으로 발전하였다.눈에 보이는 것이 이고, 의 현현이 현상이다. 현상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바탕은 도덕체계이다. 이것이 이고, 이고, 이다. 미술은 을 전달하려는 방법으로 을 이용한다. 따라서 形似는 중요하지 않다는 이론을 펼쳤다. 소식의 常理論은 이와 같은 논리로 전개한다.

 

실재적인 이론서로는 형호의 필법기와 곽희의 임천고치가 있다.

 

 

 

1. 郭若虛圖畵見聞志

 

곽약허는 생졸미상이나, 1070년 전후로 활동하였다. 장언원의 역대명화기는 841년까지의 화가에 대한 기록이다. 도화견문지는 841년 이후의 화가 당나라 사람27, 오대 시대의 91, 그리고 송대의 1074년까지 166명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후에 鄧椿1074년에서 1167년까지 219명의 화가를 기록하였다.(畵繼) 곽약허는 문인 관료와는 교류가 없은 듯 하다. 소철, 황정견, 이공린, 미불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화론으로는 論氣韻非師(기운은 배우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가 많이 인용된다. 이 말은 동기창이 남종화의 우위를 주장할 때 인용하였다. 이후의 화론에는 자주 등장한다. 하문선이 도화보감을 편찬하였다.(1365, 여기서도 인용함)

 

도화견문기를 편찬하기까지의 시기는 중국미술사에서 인물화에서 산수화로 바뀌어가는 시기이다. 화조화와 잡화가 발전하는 시기이다.

 

곽양허는 육법 중에 氣韻을 화공의 그림과 문인이 그림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인품이 높으면 기운이 저절로 높아져서 그림의 품격이 높아진다고 하였다. 이것은 사대부 문인화를 우대하는 관점을 표현한 것이다. 그들은 인품을 실재의 인품이 아니고 사회적 신분으로 구분하였다.

 

2. 등춘의 화계

 

1074년에서 1167년까지 화가 219명을 수록하였다. 도화견문지의 체계를 따랐으나 훨씬 더 정밀하고 세세하다. 중국미술사에서 3대 저술로 꿉는다.(역대명화록, 도화견문지)

 

3. 黃休復의 익주명화록

 

생졸미상, 북송 초에 활동하였다.

 

4. 劉道醇五代名畵神遣宋朝名畵評

 

11세기 중엽에 활동하였다. 六要六長을 기분으로 서화 평을 하였다.

 

5. 宣和畵譜

 

송의 희종은 그림을 좋아하여 畵學을 권장함으로 회화가 극성기를 맞이하였다. 희종 때 궁중에서 수장하고 있는 회화의 화보이다. 단순히 기록만 한 것이 아니고, 품평도 하고, 이론도 제시하였다.

 

20여 권으로 기록된 화가와 수장품은 1971344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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