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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이야기

소태후의 전횡

작성자管韻|작성시간19.07.05|조회수357 목록 댓글 0


소태후의 전횡

 

 

 

 

 


 

 

예지황후(소태후, 睿智皇后, 953~ 1009)는 거란 5대 황제 경종의 부인이자 거란 6대 황제 성종의 어머니이다. 그녀의 이름은 소작(蕭綽)이며, 자는 염염(炎炎)이다. 아아극(雅雅克)으로 기록되기도 하고, 때로는 연연(燕燕)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녀는 아들 성종의 섭정을 하였는데, 성종은 그녀에게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라는 존칭을 내렸다. 이후, 승천태후 또는 그녀의 성인 '' 를 따서 소태후(蕭太后)라고 불렸다. 그녀가 성종을 섭정한 시기를 승천후섭정 시기라고도 부른다. 또한, 그녀는 한족이었다가 거란에 투항하여 대승상의 자리까지 오른 야율융운(耶律隆運)과 내연 관계였다는 일설이 있다.

생애

소태후가 역사상에 등장하는 모습은, 거란을 발전시킨 현명하고 대의에 밝은 여걸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남편 경종이 몸이 허약하여 경종이 황위에 있던 시기에도 중요한 국사를 주로 처리하였다. 이후, 아들 성종이 황위에 오르자, 12세의 그를 대신하여 섭정을 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섭정 기간에 법전을 편찬해 공포하고, 과거제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불경을 편수하여 불교 문화를 발달시켰다. 또한 993년 소손녕에게 고려를 침략케 하여 고려와 거란의 1차 전쟁을 일으키게 했으며, 1004년 송나라와 직접 전쟁을 하여 거란에 유리한 화약을 맺었다. 이를 전연의 맹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후로 송은 거란에 매년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세폐로 바친다. 이후, 거란은 그를 기반으로 재정을 닦고, 송과의 무역도 활성화되었다. 거란이 거대한 정복 왕조로 대제국을 이루고, 성종 때 전성기를 이룩하기 위한 기반을 닦은 여인으로 평가된다. 그의 향년이 57세를 일기로 죽었다.

 

 

요 태종 야율덕광

 

 

 

 

 

요 태종 야율덕광(遼 太宗 耶律德光, 902~ 947)은 거란의 칸이자, 요나라의 제 2대 황제(재위: 926~ 947)이다. 본명은 요골(堯骨)이고, 자는 덕근(德謹). 시호는 효무혜문황제(孝武惠文皇帝)이다.

 

 

926년 야율아보기가 죽자 야율덕광의 어머니 술율평이 섭정(攝政)을 하며 조정을 장악했다. 술율평은 장차 나라에 화근이 될 만한 사람들을 제거할 생각으로 내심 껄끄럽게 여기는 장수들과 그 부인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으고는 그들을 모두 죽였다. 또 권력을 바탕으로 횡포를 부리는 자들도 선황제께 내 안부를 전하라면서 백여 명을 계속 죽였다.

9269, 술율평은 여러 추장들을 불러모으고 맏아들 야율돌욕(耶律突欲)과 둘째아들 야율덕광(耶律德光)에게 각각 말을 타고 서 있게 한 다음 황제가 되기에 적합한 사람의 말고삐를 붙잡으라고 했다. 추장들은 술율평의 마음이 야율덕광에게 있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으므로 야율덕광의 말고삐를 잡았고, 이리하여 야율덕광이 요나라의 2대 황제 태종(太宗)이 되고 술율평도 태후가 되었다. 신하들에게서 광덕지인소열숭간응천황태후(廣德至仁昭烈崇簡應天皇太后)라는 존호(尊號)를 받았다.

후당의 명종이 붕어한 후 3남 이종후가 뒤를 이었으나 곧 양자인 이종가에 의해 찬탈되었다. 또한 이종가는 권력의 안정을 노려 명종의 사위이며, 실력자였던 석경당을 배제하기에 이른다. 석경당은 이에 대항했으나, 혼자 힘으로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북쪽의 거란에게 원조를 요청하고 그 대가로 연운십육주의 할양을 약속했다. 이에 응답해 거란의 태종 야율덕광은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후당군을 몰아내고 후당을 멸망시켰다.

이후 석경당은 원군에 대한 대가로 요나라에 매년 비단 30만필을 조공으로 바칠 것을 약속하였고, 국경 지역 연()일대 16()을 넘겨주었다.

936년 즉위하여 후진을 건국한 석경당(고조)은 요나라에게 신종하여 후진은 요나라의 위성국가였다. 중앙의 상황을 본 지방세력은 등을 돌려 남쪽의 오에게 넘어갔고,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도 속출했다. 이 진압에 나섰던 고조는 942년에 병사했다.

후진(後晋)2대 출제(出帝) 석중귀(石重貴)는 그의 큰아버지 고조(高祖) 석경당(石敬瑭)과 달리 요나라의 군신관계를 거부하여 945년 야율덕광이 직접 남하하여 공격에 나섰으나 후진군에 패했다. 술율평은 화친을 맺자고 했지만 야율덕광은 따르지 않았다.

 

946년 후진이 공격해 오자 야율덕광은 이를 격파하고 여세를 몰아 개봉(開封)을 점령한 다음 석중귀를 사로잡아 요나라로 보내고 후진을 멸망시켰다. 947년 태종은 국호를 요나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점차 중국인들의 반격이 거세지자 개봉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오던 중 병으로 죽었다. 술율평은 아들의 시신을 보고 덕광이 화친을 맺지 않고 전국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정벌에 나선 것을 책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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