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임어당(林語堂) - 생활의 발견(The Importance of Living)
내가 여태껏 읽어본 책 중 가장 유쾌하게 자신의 철학을 표현한 책이다. 정말로 재미있게, 감명깊게 읽었다.
다소 논지가 과격한 측면이 없진 않지만, 나에게 있어 '글을 쓴다고 하면 이런 식으로 써야 겠다' 라는 모범이 되는 글이다.
지나치게 차갑고 냉철한 글, 완벽에 가까운 글은 인간적인 친밀감을 느끼기에 어딘가 조금 모자란 감이 있다.
다소 부족하나마, 진실이 담긴, 그러면서도 유쾌한 어조의 글을 나는 좋아한다.
제1장. 깨우침
중국의 철학자들은 한쪽 눈을 뜨고 꿈을 꾸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랑과 달콤한 풍자로 인생을 주시한다. 회의와 온화한 인종(忍從) 정신을 혼합하여, 인생의 꿈에서 깨어났다간 다시 졸고 졸다간 다시 깨어난다. 그리고 깨어 있을 때보다도 잠자고 있을 때 사물을 더 생생하게 느낀다. 따라서 깨어 있을 때의 인생에 꿈과 몽환세계의 황홀함을 지니게 하려 한다. 그러고는 신변의 잡다한 일이나 스스로의 노력이 헛된 것임을 반쯤 뜬 눈으로 관망한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살아가고자 결심할 만한 현실감은 겨우 잃지 않고 있다. 환상이 없으니 환멸을 느끼는 일도 적으며, 대망을 품고 있지 않으니 실망하는 일 또한 많지 않다. 이런 심경 때문에 중국인의 정신은 해방되어 있는 것이다.
막연하고 비판력이 없는 이상주의는 언제나 웃음거리가 되고, 그것이 지나치게 많으면 인류에게 위험을 가져오는 경우가 있다. 공연히 공식적인 이상을 쫓아다니다가 백해무익한 것이 그 결말이 된다. 어느 사회나 민족 중에 이같은 환상적 이상주의자가 지나치게 많으면 반드시 혁명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인간사란 서로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큰 부부와 같아서, 한 곳에 정착했다가도 금새 싫증을 느껴 석 달에 한 번은 꼭 이사를 해야만 되는 속성이 있다. 이사하는 것은 어느 곳도 이상적인 데가 아니고, 자기가 살지 않는 곳은 그저 자기가 살고 있지 않으므로 좋게 보인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나는 인류 진보의 구조와 그 역사적 변천을 나타내는 공식에 대해 간혹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일 듯하다.
현실 - 꿈 = 동물
현실 + 꿈 = 마음의 고통(이상주의라고 일컫는 것)
현실 + 유머 = 현실주의(보수주의라고 일컫는 것)
꿈 - 유머 = 광신
꿈 + 유머 = 환상
현실 + 꿈 + 유머 = 예지
그 때문에 예지, 다시 말해서 가장 좋은 사고방식은 우리의 꿈이나 이상주의를 현실에서 기인하는 훌륭한 유머 감각으로 완화시키는 것에 있다.
논리적 필연(가끔 '신성한' 필연이라거나 '깨끗한' 필연이라고도 불린다)을 확신하는 것, 즉 어떤 목표 주위를 맴돌지 않고 일직선으로 거기에 뛰어들려고 하면 인간은 이따금 엉뚱한 곳까지 가버리고 만다.
우리가 인생을 비극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가는 봄의 슬픔을 깊이 느끼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며, 인생에 대한 미묘하리만큼 다정한 감각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드는 꽃을 슬퍼하는 다정함에서 우러나는 것이다. 우선 애수와 패잔(敗殘)의 감회가 있으며, 그후에 저 고대 철학자의 각성과 큰 웃음이 있는 것이다. ...
한편 중국인에게는 강한 현실주의를 나타내는 R4가 있다. 그것은 인생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태도, 즉 숲속의 두 마리 새보다도 손에 쥔 한 마리의 새가 낫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뜻한다. 그 때문에 이 현실주의는 인생은 덧없고도 아름답다고 하는 예술가의 확신을 뒷받침하고 보충해 주며, 그들이 인생으로부터 아주 도피해 버리는 것을 구제한다. 몽상가가 "인생은 한순간의 꿈이다"라고 말하자, 현실주의자는 "정녕 그렇다. 그렇다면 이 꿈을 되도록 아름답게 살리라"라고 응답한다.
결국 인생의 예지란 불필요한 것을 배제하는 데 있으며, 갖가지 철학 문제를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줄여버리는 것이다. 즉 가정의 즐거움(남편과 아내와 자녀의 관계), 생활의 즐거움, 자연의 즐거움, 인류문화에 접촉하는 즐거움으로 단순화하고 다른 일체의 과학적 훈련이나 무익한 지식 추구를 추방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중국의 철학자에게 인생문제는 그 수가 적고 단순한 것이 된다.
그것은 또 형이상학에 염증이 났다는 증거이며, 인생 그 자체에 실제적 의의를 조금도 가져다주지 않는 지식 추구에 염증이 났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또 지식을 습득하든지 물건을 얻든지 온갖 인간적 활동은 먼저 인생 자체에 비추어보아 그 필요 여부를 물어야 할 것이며, 생활 목적에 필요한가를 검토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거듭 말하거니와 여기서 중대한 결론이 나오는 것으로, 삶의 목적은 어떤 형이상학적 실체가 아니라 정녕 인생 그 자체인 것이다.
...공자의 친구 한 사람이, 자기는 행동을 하기 전에 언제나 세 번 생각한다고 말했을 때, 공자는 "두 번만으로도 충분하다"라고 재치 있게 대답했다. 철학의 한 학파를 신봉하는 학도는 철학의 한 연구원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은 인생의 학도이다. 아니, 그 스승일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존엄은 인간이 짐승과 다른 다음의 여러 사실들에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인간에게는 유희적 호기심과 지식을 탐구하는 천부적인 재질이 있다. 둘째 여러 가지 꿈과 높은 이상이 있다(막연하여 매듭이 없이 자만에 빠지는 수도 있지만, 그래도 대단한 것이다). 셋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간은 유머 감각으로 꿈을 정정하고, 보다 씩씩하고 건전한 현실주의로써 이상주의를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동물처럼 기계적이고 획일적으로 환경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생각에서 반응을 결정하고 자기 의지로 환경을 바꾸는 능력과 자유를 가지고 있다.
이 마지막 사실은 인간의 개성은 결코 기계적 법칙에 복종시킬 수 없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어떻든 인간의 마음은 영원히 파악할 수 없고, 포착하기도 힘들며, 예언하기 어렵다. 정신이상자가 된 심리학자나 독신의 경제학자들이 사람에게 강요하려 드는 기계적 법칙이나 유물론적 변증법으로부터 어물머울 빠져 나가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기묘하고 꿈이 많으며 익살스럽고 변덕스런 동물이라고 하겠다.
...나는 또 어떤 인간이라도 현인의 지혜를 터득한 어리석은 자의 지혜로 진보하며, 먼저 인생의 비극을 느끼고 이어 인생의 희극을 느끼고 웃는 철학자가 되기 전에는 그를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웃기 전에 울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슬픔에서 깨달음이 생기고, 그 깨달음에서 온정과 관용을 겸비한 철학자의 큰 웃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제2장. 여러 가지 인간관
기독교도, 고대 그리스인 및 중국인
가장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기독교도가 신과 닮기를 바라는 데 반하여 고대 그리스인은 신이 인간을 닮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인간은 모두가 어떤 번뇌와 욕망, 그리고 이 활력을 가지고 인생을 출발하는 것이며, 그것들은 유년시절, 장년시절, 노년시절 및 죽음을 통하여 여러 가지 주파(周波)를 가지고 활약한다. 공자는 "젊었을 때는 여색을 경계해야 하고, 장년에는 다툼을 경계해야 하며, 노년에는 이득을 경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청년은 이성을 사랑하고, 장년은 투쟁을 사랑하며, 노년은 돈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한 남자가 지옥에 떨어졌다가 막 환생하려 할 때 염라대왕에게 말했다. "대왕께서 저를 인간으로서 사바세계에 환생시켜 주신다면 제가 바라는 조건이 아니면 싫습니다." 대왕은 물었다. "조건이란 대체 무엇인고?" 그러자 그 남자는 대답했다. "이번에 인간으로 환생한다면 장관의 아들로서, 아니면 장래의 '장원(과거에 장원급제한 사람)'의 아버지로 태어나지 않으면 싫습니다. 집 주위에는 1만 정보의 땅, 물고기가 노는 연못, 온갖 과실, 어질고 상냥한 아내와 아름다운 첩들이 없으면 싫습니다. 천장까지 황금과 진주로 아로새긴 많은 방, 곡물이 가득 찬 많은 창고, 돈이 잔뜩 든 가방이 없으면 싫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은 왕후장상이 되고 명예와 번영을 마음껏 누리고 백 세까지 장수하지 않으면 싫습니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말했다. "사바세계에 그런 인간이 있다면 내가 환생해서 사바세계로 가지, 너를 보낼 것 같으냐?"
우리에게는 인간성이라는 것이 있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것이 당연한 태도이다. 인간성으로부터 도망치는 길은 없다고 볼 수 있다. 번뇌나 본능 따위는 본디 좋은 것이다, 나쁜 것이다 따져 보았자 별로 유익할 것이 없다. 오히려 인간이 그 때문에 질질 끌려다닐 위험이 있으므로, 모름지기 중도에 머물러 있으라.
이러한 중용적 태도에서 관대한 철학이 생긴다.
결국 도교든 유교든 그 철학의 결론과 최고 목적은 자연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 자연과 완전히 조화되는 것이다. 이 사상을 분류할 적당한 용어가 필요하다면 '중용주의적 자연주의'라고 해두겠다. 이 중용주의적 자연주의자는 일종의 동물적인 만족을 느끼고 이 인생에 정착하는 것이다. 어느 무식한 중국 유성이 "누군가 우리를 낳았고, 우리는 누군가를 낳는다. 그 밖에 무엇을 하라는 것인가?" 라고 말했다.
이 지상의 존재
그래서 필경 이렇게 되고 만다. 어쨌든 살고는 싶다. 그러나 결국 지상의 생활이다. 천국에서 산다고 하는 문제는 다 훌훌 털어버리자. 영혼에 날개를 돋게 하여 신 곁으로 날아올라서 지상을 망각해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자. 한정된 목숨이 아닌가.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다. 주어진 인생은 겨우 70년이다. 영혼이 불손한 생각을 일으켜 영생을 원한다면, 이 70년은 너무 덧없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소나마 자기 자신에 대해 안다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50년쯤 되면 대강은 알 수 있고, 웬만한 즐거움은 다 맛볼 수 있다. 인간의 우매함을 바라보고 또 스스로 예지를 쌓는 데 아버지와 아들과 손자의 3대는 긴 세월이다. 3대에 걸친 세태의 변화를 통하여 세상의 풍습, 도덕, 정치의 변천을 몸소 바라본 현인이라면 인생의 막이 내렸을 때 진심으로 만족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참으로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는 말을 남기고 영원히 가야 마땅하다.
우리는 지상의 존재이다. 지상에 태어나 지상에서 자란다. 말하자면 70년 동안의 길손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조금도 불행한 일은 아니다. 설사 그것이 움막일지라도 그곳을 가장 즐거운 움막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물며 그것이 움막이 아니라 아름다운 지상이며, 이곳에서 6,70년 동안을 사는 것인데도 즐겁게 지내지 못한다는 것은 배은망덕한 행위이다. 때로는 야심이 너무 지나쳐서 겸손하고 관대한 지구를 경멸하는 일도 있겠지만, 정신의 조화를 깨뜨리고 싶지 않다면 이 육체와 정신의 임시 거처인 지상에 대하여 '어머니이신 대지'라는 기분과 참된 애정과 집착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지상의 생명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보는 동물적 신앙과 같은 일종의 동물적 무신론을 가져야만 한다. 또 자기 자신을 흙과 동일한 것으로 느끼고, 겨울에는 봄볕을 고대하는 흙처럼, 느긋한 참을성을 가지고 있는 저 숲을 찬양한 시인 소로(Henry David Thoreau)와 같은 건전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 소로는 아무리 실망에 빠져 있을 때라도 '정신을 찾는 일'은 자기의 할 일이 아니며, 자기를 찾는 일이야말로 정신의 할 일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그의 행복은 스스로 말했듯이 두더지의 행복과 흡사한 것이었다. 하늘은 실재가 아니지만 지구는 실재이다. 실재의 지구와 실재가 아닌 하늘 사이에 우리가 태어났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생물학적 인간관
"앎은 용서이다"라는 옛 속담은 우리의 육체적 과정과 정신적 과정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육체적 기능을 좀더 잘 이해하게 되면 육체를 그다지 경멸하지 않게 된다.
형이상학자는 이(齒)는 악마의 것이라느니 어쩌니 하면서 점잖은 체하고, 신플라톤 학파는 이 하나하나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철학자가 치통에 시달리거나 낙천적인 시인이 소화불량에 걸리거나 하는 것을 보면 나는 일조으이 짓궂은 기쁨을 느낀다. 어째서 치통 따위는 무시하고 잘난 철학적 논고를 강행하지 못하는 것인가? 어째서 여러분이나 나나 이웃집 여자처럼 손으로 뺨을 누르고 있는 것인가? 어째서 낙천주의는 소화불량의 시인에 대해 그토록 무력한 것일까? 시인이라면 어째서 좀더 소리 높여 시가를 읊지 못하는 것인가? 그래서 내가 뭐라고 하던가, 창자가 제대로 작용하고 있어 인체에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는데도 창자에 대한 것은 잊고 정신에 대한 것을 읊다니, 이 무슨 배은망덕인가!
인생, 이 한편의 시
유년시절이나 장년시절이나 노년시절이 저절로 갖추어지는 이 인생이, 아름다운 자연의 배치가 아니라고 그 누가 단언하겠는가? 하루에 아침, 낮, 저녁이 있고 일년에 봄과 가을이 있으니, 그대로의 모습이 좋은 것이다. 인생에 정사선악(正邪善惡)은 없다.
셰익스피어는 종교적인 면이라곤 없었으며, 종교에 그다지 흥미를 갖지도 않았다. 이것은 좀 기이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야말로 그의 위대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인생을 넓게,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다. ...그는 지상의 모든 섭리에 대해서 주제넘은 소리를 하는 일이 없었다. 셰익스피어는 대자연 그 자체였던 것 같다. 이것이 곧 세상의 문인이나 사상가에게 보내는 최대의 찬사이다. 그는 오직 살았고, 인생을 바로 보았고, 그리고 죽은 것이다.
제3장. 인간의 동물적 유전
원숭이의 서사시
...이런 뜻에서 나는 중국인이 쓴 원숭이의 대서사시 <서유기>에 나타난 예지와 통찰력을 높이 사고 싶다. 인류사의 진보는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보면 한층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즉 인류사는 저 불완전한 반인간적 동물들의 서방정토(西方淨土) 순례와 유사한 점이 많은 것이다. 즉 인간의 지력을 상징하는 원숭이 손오공, 좀더 미련한 성질을 상징하는 저팔계, 상식을 상징하는 사오정, 예지와 정도(淨道)를 상징하는 현장, 삼장법사 일행이 그것이다. 삼장법사는 이 진기한 동행들의 호위를 받으며 불전을 손에 넣기 위해 중국에서 인도로 여행한다. 매우 불완전한 동물들로 구성된 이 일행은 어리석음과 장난 때문에 곧잘 위험에 빠지기도 하고 우스꽝스런 꼴을 당하기도 하지만, 인류사의 진보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무리한 이 순례여행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장난꾸러기인 원숭이, 색골인 맷돼지, 이런 것들은 딱한 자들로 그 비열한 생각 때문에 천신만고를 겪게 되는데, 삼장법사는 수없이 그들을 책망하고 징계해야만 했다. 인간의 온갖 본능, 즉 약한 의지와 힘없는 행동, 분노, 복수, 성급함, 호색, 관용심의 결핍, 특히 자만과 겸양심의 결여 등이 성인의 영역을 향해 고된 수행을 하는 이 순례여행 중에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다. 파괴가 점점 심해지자 기술 또한 진보한다. 우리는 오늘날 신통력이 있는 손오공처럼 구름 위를 걷고 공중에서 빙빙 돌 수도 있다. 원숭이의 다리에서 털을 뽑아 많은 작은 원숭이로 바뀌게 하여 적을 괴롭힐 수도 있다. 삼엄한 천계의 문을 두드려 그 문지기를 난폭하게 몰아내고는, 신들의 자리에 한몫 끼게 해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원숭이의 모습을 본뜨다
밸푸어 경은 "인간의 두뇌는 돼지의 코와 마찬가지로 먹을 것을 찾는 기관이다"라고 말했는데, 그는 이 경구 하나만으로도 후세에 전해져야 할 인물이다. 나는 이것을 진정한 풍자라고는 보지 않고, 오히려 인간을 널리 이해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그 문명을 만들어내자 만물을 창조한 창조주까지도 당황할 정도의 발전상을 보이는 것이다. 자연에 적응하는 능력에 대해 언급한다면, 자연계의 온갖 생물은 놀라우리만큼 완전한 것이다. 완전히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자연계에서 멸종되고 만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자연에 적응하라는 명령은 받고 있지 않다. 오히려 자기 자신, 즉 이른바 문명이라는 것에 적응해야만 하는 것이다.
생자필멸에 대하여
중국의 옛 속담에 '만석지기 땅이 있을지라도 5척의 평상에서 잔다'는 말이 있는데, 모든 이치는 이 가운데 있다. ...
재산 역시 그렇다. 인생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제 몫을 가지고 있지만, 인생의 저당권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인생이라는 것을 좀더 소탈하게 볼 수 있다. 즉 우리는 이 세상에 영원히 사는 존재가 아니고 일시적인 손님이다. 그리고 누구나 지상의 나그네로서 씨를 뿌려 수확을 거두는 농부도 되고, 토지의 소유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지주' 라는 말의 뜻은 다소 애매해진다. 주인이라는 것은 좀 괘씸하다. 참으로 집을 소유하는 사람도 없고, 밭을 소유하는 사람도 역시 없다. 중국의 한 시인은 노래한다.
황금 같은 산기슭의 옥토여!
새로 온 자 다른 사람이 가꾼 곡식을 추수한다.
그러나 기뻐하지 마라, 새로온 자여.
그대 뒤에서 다른 사람이 또 기다린다.
무상관(無常觀)은 모든 중국 시가의 배경이 되어 있다. 서양의 시가도 대개는 그렇다. 즉 인생을 사물에 비유하면, 아름다운 황혼녘 강물에 흘러가는 조각배 안에서의 한낱 꿈에 불과하다. 꽃은 피었다 지고, 달은 차서 기울며, 인간의 목숨도 첫 울음과 함께 태어나서 성장한 후에는 다음에 오는 자에게 자리를 양보하고는 죽어간다. 이런 일을 반복하며 동식물계의 영원한 행진에 참여하는 것이다. 덧없는 세상의 공허함을 깨달을 때에 사람은 비로소 철학적이 된다.
인생은 본래 한순간의 꿈이며, 인간은 영겁의 강의 흐름을 타는 나그네에 불과하다. 어딘가의 강변에서 배에 오르고, 강 아래쪽에서 승선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자리를 비워주기 위해 어딘가에서 다시 배에서 내리는 객과 같은 것이다. 인생은 남가일몽(南柯一夢)인가, 승객을 태운 뱃길인가, 아니면 배우 자신이 연극인 줄도 모르는 일막인가? 아무튼 이런 감상(感像)이 없으면 인생의 시가의 절반은 잃어버릴 것이다. 중국의 철인 유대성(劉大聲)은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모든 것들 중에서 우리가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관리가 되려는 욕구이며, 가장 시시하게 여기는 것은 연극배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생각은 모두 어리석은 것이다. 무대의 배우들이 저마다 현실의 인간이라고는 믿으면서도 노래하고, 울고, 서로 욕하고,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을 몇 번인가 본 일이 있다.
그러나 현실은 이렇게 연출되는 옛날의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인물로 분장하는 배우 자신들인 것이다. 그들은 모두 부모와 처자가 있으며, 모두 부모와 처자를 부양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노래하고, 울고, 웃고, 욕하고, 농담을 해서 그 양식을 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자기들이 분장하려는 진짜 무대의 인물인 것이다.
배우 중에는 관복을 입고 관리의 모자를 쓰고 자기 연기로 진짜 관리라고 생각해 버리는 자가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본 일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연극이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연기를 하는 동안 굽실거리고, 조아리고, 착석하고, 이야기하고, 주위를 둘러보고, 아니 엄숙한 관리로 분장하고 그 앞에 죄인들이 떨고 있을 때조차 노래하고, 울고, 웃고, 욕하고, 농담을 해서 부모와 처자를 부양해야만 자신이 하찮은 배우에 불과함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정말 자기 창자와 오관(五官 : 본능과 감정)이 모조리 연극에 지배당할 때까지 자기가 실은 배우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어떤 연극, 어떤 배역, 어떤 대본, 어떤 대사의 억양이나 모양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많은 것이다.
위(胃)를 가졌다는 것
사람에게는 위라는 밑 빠진 구덩이가 있다. 이것은 인간이 동물임을 입증하는 가장 중대한 사실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문명을 채색하고 있다. 중국의 쾌락주의자 이립옹은 생활방법 전반을 논한 그의 저서 <식물편>의 머리말에서 인간에게 이 밑 빠진 구덩이가 있다는 사실에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인체의 여러 기관, 즉 귀, 눈, 코, 혀, 손, 발, 몸통 등이 각기 필요한 기능이 있음은 모두가 아는 바이다. 그런데 아무 필요도 없이 조물주로부터 받은 기관이 둘 있는데, 즉 입과 위가 그것이다. 입과 위가 있기 때문에 인류는 오랫동안 궁하게 시달려 온 것이다. 이 입이 있고 이 위가 있기 때문에 먹어야 한다는 복잡한 문제가 생겼으며, 인간 생활에 교활과 거짓과 위선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교활과 거짓과 위선이 나타나면 형법(刑法)이 생긴다. 그러면 국왕은 어진 정치를 펴서 백성을 감싸 줄 수가 없게 되며, 부모는 뜻한 대로 그들의 사랑을 베풀 수 없게 되며, 친절한 창조주마저 자기의 뜻과는 반대되는 행동으로 나와야만 하게 된다. 이런 사실은 모두 창조에 즈음하여 창조주가 인체의 설계에 다소 선견지명이 모자랐던 결과이다. 즉 인간에게 입과 위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인 것이다.
식물은 입과 위가 없이도 살 수 있고, 바위나 흙은 아무 영양이 없어도 존재한다. 그런데 인간은 왜 입과 위라는 쓸데없는 두 기관이 있어야만 했단 말인가? 꼭 필요한 것이라면 왜 어류나 패류가 물에서, 귀뚜라미나 매미가 이슬에서 양분을 취하듯 해주지 않았단 말인가? 이런 것들은 다 이슬이나 물로 성장해서 정력을 얻고, 헤엄치고, 날고, 뛰고, 울고 있지 않은가. 만일 그런 식으로 해주었다면 이렇게 인간이 허덕이는 일도 없을 것이며, 슬픔도 없어질 것이다.
공자는 인간의 성품을 너그럽게 해석하여 큰 욕망이 둘이라고 했다. 영양과 생식, 더 쉽게 말하면 음식과 여자이다. 용케 성욕에서 벗어난 사람은 많지만, 그 어떤 성인도 먹지 않고 살지는 못했다. 금욕생활로 수도한 고행자는 있지만, 어떤 정신적인 인간일지라도 네댓 시간 이상이나 음식에 대해서 잊어버릴 수는 없다. 몇 시간마다 뇌리에 스치는 변함없는 생각은 '언제 먹을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적어도 하루에 세 번은 일어나며, 어떤 때는 네 번 혹은 다섯 번도 일어난다.
(황신혜밴드의 '밥중독'이라는 곡이 있다. 언젠가 그 곡을 포스팅할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원인은 무엇이었던가? 루소나 볼테르나 디드로인가? 아니다. 오로지 먹을 것 때문이었다. 러시아 혁명과 소비에트 제도 실시의 원인은 무엇이었나? 거듭 말하거니와 오로지 먹을 것 때문이었다. 전쟁을 예로 들면, 나폴레옹은 "군대는 그 위로 싸운다"고 말했는데, 이 말로 그의 예지의 물질적 깊이를 충분히 깨달을 수 있다. 횡격막 밑에 평화가 없을 때 '평화, 평화' 하고 부르짖어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사실은 개인과 국가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민중이 굶주렸을 때 숱한 제국이 붕괴하고, 어떤 강력한 정권도, 공포정치도 쓰러지고 만다. 굶주리게 되면 민중은 노동을 거부하고, 군대는 전쟁을 거부하고, 프리마 돈나는 노래하기를 거부하고, 상원의원은 토론을 거부하고, 대통령조차 국가의 통치를 거부한다. 가정에서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기대가 없다면, 세상의 남편들이 무엇 때문에 온종일 땀을 흘리며 사무실에서 일하겠는가. 그러므로 '마음으로 통하는 으뜸가는 길은 밥통이다' 라는 속담이 있는 것이다.
...이른바 식사예법이라는 녀석 말인데, 어린아이가 입맛 다시는 것을 어머니로부터 금지당했다면, 처음부터 인생의 슬픔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라고 하겠다. 진정 그렇다. 기쁨을 숨기면 기쁨을 느끼는 작용마저 멈추어버리고, 이어 소화불량이나 우울증, 그 밖의 성인생활 특유의 온갖 정신적인 질환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이 인간의 심리인 것이다.
음식과 기질 사이에는 자연의 맥락이 있어 상상 외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양, 말, 소, 코끼리, 참새 등등의 초식동물은 천성이 유순하다. 그런데 이리, 사자, 범, 독수리 등 육식동물은 모두 포악하다. 인간이 만일 초식동물이었다면 좀더 유순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자연은 다툴 필요가 없을 때는 호전적 기질을 낳지 않는다.
(그 사람이 먹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나는 현재의 인류에게서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의 두 모습을 보고 있다. 다정한 기질과 그렇지 못한 기질 말이다. 초식동물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일을 생각하며 일생을 보내지만, 육식동물적인 사람은 남의 생활에 참견하여 자기 생계를 꾸린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이런 것이다. 어느 변덕스러운, 어떻게 도리지 추측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이 거기에 있어서, 진전되어 가는 환경의 미로를 더듬어 가면서 어느 순간 헤아려 알 수 없는 결심을 한다. 그러면 독자는 그 뒤를 쫓아가 보는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언제든지 관대해지지 못하는 격하고 가혹한 아버지에게는 인간적인 인상이 없어지고, 남편이라도 언제까지고 단정치 못한 남편으로 일관한다면 독자는 싫증을 느낀다. 누구의 부탁으로도 어느 미인을 위한 가극을 작곡할 수 없었던 고명하고 오만한 작곡가라도, 자기가 극히 혐오하는 경쟁자가 그 일을 하려고 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즉시 그 일에 착수한다. 또 어느 과학자는 원고를 신문에 싣기를 계속 거절해 오다가 경쟁적인 과학자가 단 한 자를 빼뜨린 것을 발견하면 지금까지의 철칙을 잊고 계속 원고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경우를 상상해 보라. 거기서 정신이라는 것의 불가사의한 인간성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 매력이 있는 이유는, 거기에 불합리성이 있고 구제하기 힘든 편견이 있으며, 변덕스러움이 있고 예측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 진리를 배우지 않는다면 1세기에 걸치는 인류심리학 연구도 헛된 것이 되고 만다. 즉 인간의 정신 속에는 아직도 원숭이와 같은 목적없는 암중모색의 지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신의 진화를 생각해 보자. 인간의 정신은 본디 위험을 발견하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기관이다. 이 정신이 마침내 논리학이나 정확한 수학의 방정식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단순한 우연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정신이 그런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정신은 음식물의 냄세를 맡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음식물의 냄세를 맡은 후 추상적인 방정식의 냄세도 맡을 수 있다면 더욱 다행한 일이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이성보다도 정열이다. 이는 뻔한 사실이 아닌가. 위에서 열거한 위인들에게 사랑스러운 인간성을 부여한 것은, 그 이성이 아니라 '이성의 결여'가 아니었을까?
(공감한다. '인간'이란 본래가 완벽할 수 없으며, 그럼으로써 '인간적' 이란 말이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좋으냐 나쁘냐는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인간의 지능이 자연계나 인간관계 이외의 모든 문제를 다룰 때의 능력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나는 과학의 정복에 대해서는 낙관적이다. 그러나 인간적 문제를 다루는 비판적 정신이 어디까지 전반적인 발전을 이룰 것인가, 혹은 인류가 과연 온갖 번뇌를 훨씬 초월하는 항심(恒心)과 오성에 도달할 수 있을지 여부에 대해서는 다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개인으로서의 인류는 고도의 발달을 이루었겠지만, 사회의 집단으로서는 여전히 원시적 욕망에 사로잡혀 가끔 원시시대로의 후퇴와 야만적인 본능을 노출하고, 이따금씩 광신과 집단적 히스테리에 공격당한다.
어떻게 하면 이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 비판적 정신은 너무 약하고 차가우며, 머리로 생각하는 것은 철저하지 못하며, 이성도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오직 이른바 중용적 사리분별이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온정에 불타고 정서가 풍부하며 직관적인 사고방식으로서, 인간을 그 조상의 형태로 복귀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이다. 인간의 생활이 본능과 조화되도록 발전시켜야만 인간은 구제받을 수 있다. 나는 사상교육보다는 오히려 감각과 정서교육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권위에 대해서는 이 책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중국 문학의 찬미 대상인 자유인의 네 가지 특징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유희적 호기심, 꿈꾸는 능력, 그 꿈을 정정하는 유머 감각, 마지막으로 행동의 변덕스러움과 분방함이다.
여자는 저항하고 공격하는 것을 배우지 않고 매료시키는 것을 배웠으며, 힘으로 목적을 달성하려 들지 않고 좀더 유연한 수단에 의지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래서 결국 보드라운 맛이라는 것이 문명이다. 그러므로 나는 인간의 문법은 남자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자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오늘날 언어라고 불리는 잔소리의 발달에 대해서도 여자는 남자보다 큰 역할을 해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자의 수다스러운 본능은 뿌리가 깊으므로, 인간의 언어를 창조하는 데 남자보다 크게 이바지했음에 틀림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유리피데스는 노예에 대한 정의를, 사상이나 의견의 자유를 상실한 인간이라고 했다.
(위의 말대로라면 현대 사회는 수많은 노예들로 득실거리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인간성에는 반항삼이 있으며 양심에는 억제하기 힘든 자유가 내재하므로, 반드시 반발하여 전제자에게 복수하는 것이다.
꿈에 대하여
...요컨대 모든 철학은 이 권태롭다는 감각에서 나온 것이리라. 아무튼 어떤 이상에 대해 슬픈 듯한, 종잡을 수 없는 부드러운 듯한 동경을 지니는 것은 인류의 특질이다. 인간은 현세에 살면서도 또 다른 세계를 꿈꾸는 능력과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인간과 원숭이의 차이는, 원숭이는 오직 지루해하고 있는데 반해, 인간은 지루해하는 외에 '상상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옛 상태에서 탈피하고 싶어한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이 하고 있는 것 이외의 다른 일을 하고 싶어한다. 즉 누구나 꿈을 꾸고 있다. 졸병은 하사관을 꿈꾸고, 하사관은 대위를, 대위는 소령이나 대령을 꿈꾸고 있다.
그런데 대령 자신은, 그가 제법 멋있는 인물이라면, 대령인 것을 그저 덤덤하게 여긴다. 점잖게 "아니, 뭐 대수롭지 않은 봉사 역할에 불과하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실 그와 다를 것이 없다. 훌륭한 사람을 보고는 "훌륭하시군요"라고 세상 사람들은 말하는데, 그런 말을 들은 당사자가 정말 훌륭하다면 분명히 "훌륭하다니, 무슨 말이지요?"라고 대꾸한다.
그러므로 세상이란 일품 요리점과 흡사하여, 옆 테이블에서 주문한 음식이 자기 것보다 훨씬 훌륭하고 맛있어 보이는 것이다.
현대의 어느 중국 교수는, 사람의 욕심이 너무 많은 데 비해 이런 경구를 토했다. "마누라는 남의 마누라가 좋아 보이고, 책은 자기가 쓴 것이 좋아 보인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만족하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다. 사람은 모두 누군가가 되고 싶어한다. 그 누군가가 자기 자신이 아닌 한 말이다.
이같은 인간의 특색은 분명히 그 상상력과 꿈꾸는 능력에서 오는 것이다. 상상력이 크면 클수록 그에 비례해서 불만은 더욱 커진다. 상상력이 풍부한 어린아이가 다른 어린아이보다 다루기 힘든 것은 이 때문이다. 인간은 소처럼 행복해하고 만족해하기보다는, 원숭이처럼 슬픈 듯이 모호한 표정을 짓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이혼 등은 아무래도 상상력이 모자라는 사람들보다 이상주의자나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생기게 마련이다. 인생의 이상적인 반려자를 갖고 싶다고 생각하는 환영은, 상상력이 모자라고 이상주의적인 면이 적은 사람은 못 느끼는 강렬한 힘을 갖는 것이다. 인류는 이상주의 때문에 발전하기도 하고 사악한 길에 들어가 방황하기도 하는데, 상상력 없이 인류가 진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꿈꾸는 자는 다른 사람보다 슬픔이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다. 슬픔이 많다는 것은 큰 환희와 감동을 느낄 수 있고, 드높은 황홀경에도 빠질 수 있다는 뜻이다. ... 어린 시절의 꿈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그렇게 종잡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소년시절의 꿈은 일생 동안 가슴속에 남아 있다. 그러므로 내가 만일 세계의 어느 작가라도 될 수 있다면, 나는 누구보다도 안데르센이 되고 싶다. 인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는 따위의 공상을 하거나, 자기가 인어라면 물 위로 떠올라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것이라며 인어 이야기를 쓰기도 한다는 것은, 아마도 인간의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가장 섬세하고 가장 큰 기쁨이 되리라.
어린아이의 꿈 중에는 다른 꿈보다 또렷하고 실현력을 가진 것이 있다. 한편 또 성장해 감에 따라 또렷하지 않은 꿈은 잊어버린다. 그리고 모두 어릴적의 꿈을 남에게 이야기하고자 시도하면서 일생을 보내고, 결국 '이야기의 요점도 파악하지 못한 채' 죽기도 한다.
또 어수선한 꿈,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 꿈을 꾸면 위험한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꿈은 한편으로는 도피를 뜻하는 것으로, 몽상가는 흔히 목표도 없이 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꿈을 꾸기 때문이다.
(스스로는 여러 가지 핑계를 끌어대며 부정했지만, 나는 다분히 현실 도피적인 몽상을 지난 10년간 해온 것 같다. 앞으로도 그러한 몽상을 계속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쯤에서 그런 불안정하고 고독한 몽상은 이만 하고, 보다 안정된 생활 속에서 일상 속의 즐거움을 느끼며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안정과 자유는 양립 가능한가.)
...이것은 유머의 화학적 작용이라고 생각한다. 즉 사상의 질을 변화시키는 작용이다. 그리고 이 작용이야말로 인류 문화의 근간에까지 영향을 주어 앞으로 인간사회가 중용시대에 이르는 길을 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우리는 생활과 사상의 단순성은 문명과 문화에 대한 최선과 최고의 이상이라는 것, 문명이 단순성을 상실하고 난해한 이론이 순수한 이치로 돌아가지 않는 한, 문명은 한층 고달프고 퇴폐적이 되어 가리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런 사태가 계속되면 인간은 스스로 만든 개념과 사상과 야심, 그리고 사회조직의 노예가 된다. 이같은 개념과 사상과 야심과 사회조직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인류는 그것을 지배할 위치에 서게 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런 모든 개념과 사상과 야심을 초월하며 미소로써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인간의 정신력이 있다. 이 힘이야말로 유머리스트의 묘미이다. 골프나 당구를 치는 사람이 공을 다루듯, 카우보이가 올가미를 다루듯, 유머리스트는 사상이나 개념을 다룬다. 거기에는 숙련에서 오는 여유와 확실성과 처리의 경쾌한 묘미가 있다.
결국 자기 사상을 소탈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사상의 주인공이며, 그러한 사람만이 사상에 예속되지 않는 것이다. 진실성이란 결국 노력의 표시일 뿐이다.
수석으로 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대학강사의 강의는 대체로 난해하고 복잡하며, 사상의 참된 단순성과 표현의 소탈함은 숙달된 노교수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다. 세상에 흔한 이 사실만 보아도 내가 지금 한 말에 수긍이 갈 것이다. 젊은 교수가 현학적인 말을 쓰지 않는다면 정말 존경해 볼 만하며 크게 기대된다. 전문에서 단순으로의 과정, 전문가에서 상식가로의 과정에 내포되어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지식의 소화 과정이며, 단연 신체의 신진대사 작용에 비교할 만한 것이다.
이론가가 지나치게 개념에 사로잡혀 있는 데 반해, 일반적으로 유머리스트는 사실 그 자체에 접근해 간다. 사상이 몹시 착잡한 것은 개념 그 자체에 얽매여 있는 경우 뿐이다. 그러나 유머리스트는 다르다. 개념과 현실의 모순을 번갯불처럼 신속하게 나타내고, 상식이나 기지의 번득임을 마음대로 구사한다. 그 결과 문제를 매우 단순하게 만드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집산주의ㅡ사회적,경제적,정치적ㅡ가 발흥하기 시작하고 있는 현대에는 인류가 인간적 반항성을 잊어버리고 그것을 상실하여, 결국 개인의 위엄마저 잃어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모든 형태의 인간적 사고를 압도하는 경제 문제와 경제 사상이 버티고 있으므로, 인간미가 있는 지식이나 개인적인 문제를 대상으로 하는 좀더 인간미가 있는 철학에 대해 우리는 아주 무지해지고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위궤양 환자가 언제나 위에 대한 것만 생각하듯이, 경제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회는 언제나 경제만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너무도 사물을 간단히 처리해 버리는 것은 아닌가. 이상으로서의 자유인은 아예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그리고 환경에 맞서 자유분방하게 작용하는 훌륭한 자유인적 소질을 가진 사람도 사라져 버렸다. 인간 대신 계급의 일원이 있을 뿐이고, 사상과 개인적 호오(好惡)와 개인적 성벽 대신 이데올로기, 즉 계급사상이 있을 뿐이다. 개성 대신 맹목적 힘이 있고, 개인 대신 인간의 활동 일체를 제약하고 예시하는 마르크스적 변증법이 있다. 결국 모두가 개미처럼 열심히 일들만 하고 있는 셈이다.
개인은 생명의 궁극적 사실이기 때문에, 철학은 개인에서 시작되어 개인에서 끝난다. ... 만일 인간의 최종 목적으로서의 개인생활의 행복을 부정하는 사회철학이 있다면, 병적으로 그릇된 정신의 소산이다.
...미국에서 가장 현명하고 달견을 가진 인물 중 한 명인 월트 휘트먼이 그의 논문 <민주주의의 전망> 속에서 모든 문명의최종 목표로서의 '개(個)'의 원리, 즉 '개성주의'를 밝히고자 노력한 것은 바로 이러한 뜻에서이다.
... '환상이 진실로 빛나는 곳에 자아의 사상은 독존하고 광채를 발한다. 이야기 속의 난쟁이처럼 한번 자유를 얻어 지상을 떠나면 천지에 퍼지고 천상에까지 이른다.'
대체로 미숙한 경제학의 큰 실수는 국민적 문제의 바탕에 작용하는 일종의 불가해한 요인의 탐구가 소흘한 데에 기인한다. ...
이 민족적 기질, 즉 우리가 추상적으로 '국민의 천품'이라 일컫는 것은 결국 국민 전반에 걸친 개인의 총화이다. 왜냐하면 민족적 기질이라는 것은 어떤 문제나 위기에 부닥쳤을 때 그에 대처하는 국민성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