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일본군 가미카제(神風, Kamikaze)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 자기 목숨을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는지 말이예요.
"조종사라는 고급 인력을 무의미하게 소비하다니. 나였으면 그런 명령을 내린 놈을 그 자리에서 쏴 죽였을 것이다."
- 전후의 더글러스 맥아더
"쪽발이들(japs)도 끝이군."
- 윌리엄 홀시
'카미카제 전술은 실패한 전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5천여 명의 군사가 주 목표인 항공모함을 위해 달려들었지만, 정작 항공모함은 1척밖에 격침시키지 못했죠.'
-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히틀러의 메가프로젝트, 카미카제 편
미국 해군 장병들도 이러한 비상식적인 전술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처음에는 그저 엔진이 고장 난 항공기가 운 나쁘게 우리 배를 들이받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돌진이 공격루트라는 걸 알아차린 후에는 일본군 군부가 바랐듯이 겁을 먹기는 커녕 카미카제에 대한 경계감과 전투의지만 더욱 상승했다. 큰 위협요소를 발견하면 어떻게든 없애버리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안 그래도 개전 직후부터 일본인들을 "Japs" 혹은 "Yellow Monkey(또는 Bastard)"라고 부르며 무시하고 경멸하던 차에 이러한 상식 외의 행동까지 일삼자 일선 장병들은 일본군을 더 이상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는 수준까지 이르렀으며, 그리고 이 때문에 당시 동양계 미국인들은 인종차별적 시선이 한층 강해져 고생해야했다.
게다가 카미카제의 전과는 겉보기에는 대단해보이지 않을지라도 피해를 입은 함정과 그 승조원들의 모습이 전체 함대에 주는 충격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숫자가 아니었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 미군 수병들은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카미카제 때문에 노이로제에 시달렸으며 미군 제독들은 레이더 피켓함을 배치했으며 카미카제로 인해서 빚어지는 전투피로가 심각하다는 증언 혹은 기록도 있다. 물론 실질적인 피해를 두려워 한 게 아니라, 저 미친놈들이 또 온다!는, 상식밖의 행동에 대한 공포였다.
조종사의 심리
일반인들에게는 보통 '절망적인 상황에서 천황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 하던 광신도들'쯤으로 인식되고 일부 일본 극우세력은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쯤으로 선동하기도 하는데, 물론 '진심으로 일본 제국과 천황을 위해 죽으려 하는 광신도들'도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은 사실상 '반강제적'으로 끌려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정말 자원으로 지원했다기보다는, 심리적으로 억압된 상태가 더 많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행진식에서 카미카제에 지원하지 않을 조종사들을 보고 앞으로 나오라고 하는 등, 안 그래도 소집 받기 전부터 황국신민 사상으로 온갖 세뇌를 당했을 사람들인데 이런 분위기에서 누가 앞으로 나갈까?
일본군 특유의 가혹행위와 겹치고 갈굼받다가 자기 자신과 가족에게 불명예나 해코지가 오지 않을까 두려워하다가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리고 결국에는 "나라를 위해 죽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나서게 됐다. 아래에도 나와있듯이 당시 특공대원들의 어록이나 일기를 읽어보면 당시 조종사들의 심리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오히려 자신을 이런 상황에 몰아놓은 조국을 원망하면서 가는 조종사들도 꽤 많았다.
이들 중에는 외국어를 능숙히 구사하고 독일과 프랑스 철학을 전공하는 등, 상당히 교육받은 대학생들도 있었다. 당시에 저 정도로 교육받은 청년들이라면 그 국가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맨발의 겐에서도 이런 식으로 반강제적으로 끌려나온 카미카제 조종사들이 잠깐 나온다.
일본 제국은 당시 청소년들에게 비행기와 파일럿에 대한 인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파일럿이 비행기를 타고 학교에 방문한다거나 소년잡지의 삽화, 소학교(초등학교)부터 교과서 등지에 비행기 그림이 나오고 현재의 고무동력기 마냥 만드는 법도 가르쳤다. 한마디로 파일럿=엘리트라는 관념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많은 조선의 소년들도 비행학교에 입학하여 훈련을 받다가 특공대로 끌려갔다. 몇몇은 전쟁이 끝나서 운이 좋게 살아돌아왔지만, 죽은 이들은 일제의 주요 전범들과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 이건 부관참시와 효수조차 능가하는 최악의 모욕이다. 일본 극우들은 조종사들이 자랑스럽게 자폭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애국심이 넘치는 조종사들이 없잖아 있었을 수도 있지만, 당시 관련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연히 조종사들 상당수는 군중심리와 압박, 연좌제의 공포에 마지못해 임무에 참여하여 돌아버릴 판이었고, 죽기 직전에 내뱉은 말이 텐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가 아니라 오카상(어머니)이라는 사실만 봐도 억지로 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군중심리도 있었다. 카미카제 부대에 차출당했으나 출격 며칠 전에 부상을 당해 부대에서 제외되는 바람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한 조종사는 몸이 회복되어 건강하게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해피 엔딩인 상황이었으나, 고향으로 돌아가자 부끄럽지도 않나며 돌부터 맞았다는 사례도 있다. 집에서도 사지가 멀쩡한데 병신 취급 당했다고 하는 등 전쟁 후 몇 년간은 굉장히 힘들게 살았다는 모양이다. 당시에는 일반 일본 군중들도 대단히 비이성적인 시대였기에, 이런 분위기에 자살하라고 위에서 명령하는 걸 일개 개인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카미카제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USS 벙커힐(CV-17). 카미카제의 정말 몇 안 되는 주력함에 대한 성공 사례이다. 대부분의 주력함에 이루어진 카미카제 공격은 부포탑이나 대공포의 파괴로 소파에 그쳤으며, 격침전과는 대부분 호위항공모함같은 2선급 전력이나 구축함, 상륙정 및 기타 함선에 대한 전과이다. 이 공격으로 인하여 USS 벙커힐(CV-17)은 대파되어 진주만의 브레머튼 해군 조선소에서 수리를 받았으며, 수리가 완료되지 않은채로 종전을 맞게 되었다. 참고로 에식스급 항공모함 중 카미카제 공격을 가장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진 항공모함이 USS 인트레피드(CV-11)인데 이 배는 현재 기념함으로 남아있다.
카미카제 이야기가 나올 때는, 보통 형언할 수 없는 비인간성에 중점을 둔다. 따라서 그러한 비인간성에 대한 옹호로 보일 여지 때문에 전술적, 전략적 의미에 대한 지나친 폄하가 동반되기도 한다. 하지만 카미카제도 일본군이 전술로 사용한 만큼 전술로서의 의미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 해군의 공간전사에서도 일단 엄연한 전술로서 인정하고 그 가치를 다짜고짜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도 참조하자. 물론 그들이 겪은 정신적 충격이 가시고 나서 느낀 인간적인 경멸을 빼놓지는 않는다.
1942년 과달카날 전투 이전까지의 일본군 조종사의 숙련도는 대단히 높았다. 처음부터 각 보직에 맞춰 파일럿을 양성하고 더불어 비효율적이나 혹독한 훈련을 통해 정예화된 일본군에 비해 미군의 체계는 대단히 난잡했다. 그나마 미 육군의 조종사들은 전문화 과정을 밟았으나, 미 해군은 1941년까지 조종사가 항공모함에 탑재되는 모든 항공기의 조종을 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러다보니 단 하나의 함재기에만 익숙해지고 정예화되면 되는 일본 해군의 경우와 달리, 미 해군은 총체적인 비행시간은 높았을지언정 그 비행시간이 전투기, 급강하폭격기, 뇌격기로 각 분산되고 전체적인 숙련도도 낮은 편이었다. 따라서 개전초기에는 일본 해군이 미 해군에 비해 높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으며, 통상의 급강하폭격과 뇌격으로 미 해군의 대공포의 사격과 미 해군 함정들의 현란한 회피기동 속에서도 30~40% 명중률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1942~1943년을 거쳐 솔로몬 제도 상공에서의 처절한 소모전과 1944년 6월의 필리핀 해 해전을 거치며 숙련된 일본 조종사들은 빠르게 소모되었다. 뿐만 아니라 위의 원인에서도 언급한 일본군 조종사 양성과정의 문제점 때문에 소모되는 조종사 인력을 일본군이 도저히 충원할 수 없게 되어 일본군의 기량은 점점 더 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이후 수 많은 베테랑 일본군 조종사들이 불귀의 객이 되어 일본군 공중전력은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지경까지 도태되었다.
또한, 일본군 전력의 주류를 차지하던 A6M 제로센, D3A 급강하폭격기, B5N 뇌격기 등은 전후까지 큰 업그레이드 없이 계속 유지되어 태평양 전쟁 말에는 이미 구식기체로 전락해버린지 오래였다. 일본군 역시 이를 대체하려는 노력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일본군은 기술적 역량도 부족했고 자본도 부족했다. A7M 렛푸는 동시대 배치된 미군기인 F6F 헬캣이나 F4U 콜세어에 비해 열세였고 D4Y 스이세이는 일본군의 고질적인 항속거리 집착으로 인해 물장갑 특성을 그대로 유지했으며, B6N 텐잔은 엔진트러블로 인해 신뢰성이 낮았다.
반면 미군은 300,000명의 조종사들을 본토에서 양성하고 있었다. 이 숫자는 14,000명 수준의 사단 20개 이상을 구성할 수 있는 수다. 1944년도부터 연합군은 이미 보유한 조종사만으로도 몇 년간은 문제 없다는 판단으로 비행학교 수를 줄이고 훈련 시간을 늘려서 베테랑 조종사 양성을 도모하고 있었으며, 수십 회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베테랑들은 무조건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여 후배들에게 자신의 생생한 노하우를 하루 종일 교육시켰다. 그런데도 중간 탈락율은 비슷했고 1944년부터 미 해군의 신규 조종사들은 선배들보다 더욱 치열한 경쟁을 뚫고 조종사가 되었으며 최종 기량도 좋았다.
더불어 미군은 신형 전투기의 개발/생산에도 적극적이었고 그 신형기체들을 다수 투입할 수 있는 여력도 존재하였다. 미군기들은 카탈로그 스펙상으로는 일본군기에 비해 열등할지언정 전반적인 기체의 신뢰성이 월등했으며 방호능력도 뛰어나 파일럿들의 생환율도 높았을 뿐만 아니라 정비성 등도 일본군기에 비해 좋았다. 거기다가 미군은 일본군에 비해 항상 기술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결국 위에 언급된 미군 방공능력의 강화와 미 해군 항공대의 역량 상승, 일본 해군 항공대의 역량 하락 등으로 인해 일본군이 통상적인 방법으로 미군에 대해 더 이상 유효한 타격을 입힐 방법이 사라지자, 그러한 열세를 뒤집을 방법으로 일본군은 끔찍하게 비윤리적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상대방이 고려하지 않을 전술을 사용하여 미군의 허를 찔렀다. 이로 인하여 미 해군은 34척의 군함 격침, 368척의 군함 손상, 4,900명의 선원 사망과 4,800명 이상의 선원 부상의 피해를 입어야 했다.
카미카제가 시행된 1944년 말의 상황에서 도덕적 측면을 제외하고 철저히 통계적으로 바라본다면 카미카제 공격이 일본 해군의 통상공격에 비해 더 효율적이었다.
말레이 해전 이후 1942년 말까지 미 해군과의 전투에서 일본군 조종사들은 보통 시속 250에서 280km 속도로 항공어뢰를 투하했는데, 숙련된 조종사들이 이 정도 속도로 떨궈도 맞출까 말까하는 수준이었다. 연합군 측 항공 엄호가 전혀 없었던 말레이 해전 당시 일본의 육상공격기들은 어뢰 51발을 투발해서 9발이 명중했다. 약 18%의 명중률인데, 이는 오키나와에서 카미카제 공격의 명중률과 대동소이하다.
여기에 적에게 본격적인 전투초계세력이 존재할 경우 손실률까지 극심해지는데, 산호해 해전에서 18대의 뇌격기가 투발한 어뢰 중 렉싱턴에 2발이 명중했다. 반면, 이 중 10대가 손실되었으므로 명중률은 11%에 손실률은 56%가 된다.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토모나가 공격대에 소속된 10대의 뇌격기가 요크타운에 2발을 명중시켰던 반면, 5대가 격추되고 3대가 파손이 심해 폐기된다. 이 당시엔 일본 해군에 숙련된 조종사들이 상당수 있었지만, 그 조종사들마저도 어뢰를 명중시키기는 힘들었던 반면, 그렇게 맞춰놓고서도 손실이 극심했다. 하물며 대전 말의, 나는 것만 배운 조종사들이 뇌격을 실행해 명중탄을 낸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필리핀 해 해전에서는 48대의 뇌격기가 참여했고 이들이 낸 명중탄은 없었다. 반면 손실률은 대략 60~70% 수준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944년 말엽에는 미 항공모함의 함재기 중 전투기의 비중이 40%에서 70%까지 확대되어 공중초계능력이 대폭 강화되었다. 지속적으로 고갈되어가는 일본의 숙련병 자원들을 경험이 부족한 조종사들이 채워나가고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이들에게 뇌격을 시키더라도 결과적으로 돌아오는 전과는 사실상 제로가 될 뿐더러 카미카제 공격을 하면 무조건 죽는다 뿐이지, 통상공격을 실행하더라도 어차피 살아돌아오는 조종사는 2~3할 남짓일 뿐이다. 즉 일본이 시간을 끌기 위해 뭐 하나라도 격침시키는 발악을 해보기 위해서는 카미카제가 그나마 해답이었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들은 전부 항공어뢰를 이용한 공격 사례지만, 급강하 폭격 역시 뇌격과 마찬가지로 웬만큼 숙련된 조종사가 아니면 명중을 기대하기 힘든 공격방식이었으므로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다. 통상공격을 실행했더라면 돌아오는 조종사는 몇 있었을지언정, 미 해군에 준 손실은 카미카제 공격을 할 때보다 훨씬 적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실제로 계산해보면 같은 인력을 소모시킨다고 가정했을 때, 통상공격보다 카미카제로 격침시킬 수 있었던 군함의 숫자가 얼추 4~5배가 더 많다. 문제는 4~5배 많은 숫자가 47척 정도라는 거고, 이 정도는 대전시기 750척에 가까운 함정을 뽑아낸 미군에겐 별 타격도 안 된다.
카미카제의 명중률은 숙련 조종사가 소규모로 동원되었던 1944년 말 필리핀 전역(戰域)에서는 40~50%, 카미카제로 쓸 숙련 조종사마저 고갈되어 카미카제에 동원할 목적으로 속성으로 육성시킨 조종사들이 대규모로 투입했던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14%의 명중률을 기록한다. 350기의 함재기가 출격하여 220기가 격추되고 명중탄은 단 1발밖에 기록하지 못한 1944년 6월의 필리핀해 해전과 비교해 보면, 자살공격은 당시 압도적인 미 해군의 방공망 상대로 확실히 나은 결과를 보여주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총 1,465대의 특공기가 돌입해 33척의 미 해군의 군함과 미 상선단 소속 수송함을 격침시켰다. 그 밖에도 368척의 미 해군 군함에 다양한 규모의 피해를 주었다. 물론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는 당연하게도 특공기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순수하게 특공기만으로 이루어진 편대를 조직했다면 당연히 돌입하기도 전에 모조리 격추되었을 것이다. 때문에 폭격기를 호위하는 전투기 편대처럼 특공기를 호위하기 위한 편대도 출격했고, 자폭이 아닌 통상 폭격을 위한 항공기도 출격했다.
과거 특공기와 호위기를 합친 전체 일본군의 손실은 오키나와에서만 모두 7,830대 이상의 항공기를 손실했다고 알려졌었다. 그러나 이는 미군의 예상치로, 전후 일본군의 기록과 크게 차이가 있다. 당시 수 개의 부대에서 올린 전과를 모두 합산함으로 인해 중복된 전과가 포함되는 바람에 크게 과장된 수치이며, 실제로는 500대의 통상 항공기와 900대 이상의 특공기를 손실하여 약 1,430대 이상의 항공기를 손실하였다. 이는 미군이 손실한 768대의 항공기에 비하면 많으나, 당시 일본군의 열세와 동원된 특공기의 상당수가 훈련용 복엽기였음을 고려한다면 단순히 1:1 숫자로 비교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 카미카제로 인한 대부분의 피해는 레이더로 적 공습을 감시하던 피켓함들이었고, 이 와중에 알렌 M. 섬너급 구축함 USS 래피(DD-724)는 6번의 카미카제 직격을 받고도 살아남아 불침함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 외에도 많은 상륙정이 손상을 입었는데, 오키나와 전투가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것임을 고려하면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고 볼 수 있다. 그 외 인상적인 전과로는 당시 영국 태평양 함대 소속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 HMS 포미더블(R67)이 카미카제 공격을 받아 배 자체에는 큰 타격을 주지 못하였으나, 폭발과 화재가 발생하여 18대의 함재기를 손실하여 운용능력이 대폭 저하되었다.
순전히 격침 전과만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그나마 카미카제의 전과가 낮은 편인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미 해군 소속 군함 1척을 격침하기 위해 평균 30대의 특공기가 소모되었는데, 이는 당시 일본 해군의 통상 공격에 의한 교전비에 비해 월등한 수치이다. 일본 해군의 공격기는 1945년 초에 이르러서는 자살공격이 아닌 통상공격으로는 그저 미 해군 함정 대공포병의 주말 외박 티켓용 불나방에 불과했다.
당시 미군 방공망이 얼마나 촘촘하고 무지막지하였냐면, 대공원형진을 짜고 있는 함대 1개가 미드웨이 해전 당시에는 분당 평균 14500Kg의 탄약을 소모했으며, 1944년쯤 되어서는 그 5배쯤 되는 분당 평균 73500Kg의 탄약을 소모하며 그야말로 하늘 위에 미칠듯한 탄막을 구사하고 있었다. 괜히 일본 해군의 통상적인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것이 아니었다. 더 무서운 점은 저 무지막지한 숫자의 탄약은 레이더에 의해 중앙화기관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키나와 전투 기간 전사한 미군은 12,281명인데 이 중 4,907명이 카미카제에 의해 전사한 해군 함정 승조원, 항공 요원들이다. 결국 일본군은 최후의 발악으로써 그 만큼의 미 해군 인원들을 길동무로 데려간 셈이다. 더군다나 오키나와 전투에서 이렇게 대규모로 카미카제 공격이 동원된 덕에 노이로제가 걸린 미 해군은 카미카제를 대비하기 위해 함재기들이 함대방공에 힘써 오키나와의 공중지원이 힘들어진 면도 있고, 커티스 르메이를 여러 장성들이 간신히 제지하고 B-29를 도시폭격을 잠시 돌려 비행장 폭격으로 돌리기도 하였다. 이처럼 카미카제 공격은 미군에 대해 지속적인 피해를 입히며 미군을 지연시키는데 어느정도 역할을 하기는 하였다.
그 외에 굳이 더 의미를 찾자면, 미 해군 장병들 중 후송되는 전투피로증 환자를 조금 늘렸다는 정도다. 물론 이러한 부분은 미 해군의 전체적인 운용에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인간 방패
전후 서방의 연구에서 카미카제가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원인은, 이러한 비정하고 비윤리적인 전술이 지연책으로써의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의 교전비만 보더라도 일본군은 미군에게 지속적인 피해를 강요할 수 있었다. 생환을 고려하여 안전고도와 최소거리 등을 지키면서 공격할 경우, 그에 대한 고려는 적도 당연히 하기에 그에 맞춰 상대방이 방어전략을 구성하며, 동시에 공격 시점으로부터 타격 시점까지의 시간차도 있기 때문에 회피를 시도한다. 그에 반해 자살공격은 상대방의 전술의 공백을 파고들며, 동시에 그 상대방인 미 해군의 회피가능성을 줄여 더 효과적인 타격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결국 수 많은 파일럿들을 인간 방패 삼아 지연책으로서의 효과 밖에 없다. 카미카제는 통상공격과 달리 파일럿이 100% 사망하므로, 이는 결국 통계적으로는 인적 및 물적 자원을 덜 소모할지 몰라도 파일럿의 기량 향상에 있어서는 이를 포기한 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결국 아무리 일본군이 기술적 격차를 줄이려 부족한 자원과 공업력 하에서도 신형기를 양산하려 시도했지만 결국 이를 운용할 조종사들의 기량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미군이 F4F 와일드캣으로 보여줬던 졸전처럼 그저 더 비싼 물적 자원을 낭비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 대본영은 이렇게 더한 언 발에 오줌 누기 식 미봉책에 의지함으로써 당장은 미군을 지연시키고 체제유지를 꾀할 수 있었을지언정, 이런 지연책만으로는 절대로 승리할 수 없었으며, 그 비인간성에 분노한 미국에 의해 일본 국민들에게 더 큰 피해를 강요하고 자신들도 파멸하였다.
일본이 자국민들과 동원된 조선인들을 특공으로 소모하면서 미 해군에게 피해를 강요함으로 인해 그에 질린 미군이 일본에 대해 내놓은 해답은 결국 더 참혹해진 도쿄 대공습과 인류 최초이자 최후의 핵폭격이었다.
확실히 처음 베테랑 조종사들에 의한 카미카제 작전은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이는 현재의 급한 일을 막기 위해 미래의 가능성을 팔아버린 일종의 돌려막기나 다름 없었다. 게다가 일본군은 "여차하면 카미카제를 쓰면 되니까" 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항공기 발전과 조종사의 기량 향상에 힘을 쓰지 않았다. 카미카제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건 1944년 10월부터지만 작전상으로서의 검토는 1942년 미드웨이 해전 이후부터였고, 특공병기가 처음으로 고안된 건 1944년 3월이다. 그리고 이런 카미카제 공격에 고무된 일본군은 지연책에만 의존하며 그 어떤 대책을 내놓지 못하였고, 그저 1억 총옥쇄 따위의 정신론만 내세우며 자신들의 체제유지에만 급급했을 뿐이다.
일본의 함상전투기는 끝까지 제로센뿐이었는데 이처럼 기술 발전이 뒤처진 데는 이런 안일한 생각의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지연책에만 의존하고 그 후의 대책도, 대안도 없이 체제유지라는 헛된 망상을 위해 헛되이 인력을 소모하였기에 카미카제는 전술적으로는 효과가 있었을지 몰라도, 후술하겠지만 전략적인 성과는 거둘 수 없었다.
제군이 나라를 위해 죽을 필요는 없다. 제군은 적들이 자기 나라를 위해 죽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
- 조지 S. 패튼, 미 육군 제 6사단을 상대로 한 연설 中
반면 연합군에서는 전쟁광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호전적이었던 인물이었던 조지 S. 패튼조차 전술 행동에서 적군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는 것 못지않게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라는 말을 남긴 커티스 르메이조차 도쿄 대공습을 야간 폭격으로 한 이유가 아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였다는 것만 봐도 답이 나온다. 사실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아군의 피해는 줄이고 적의 피해는 늘리는 것이 전투, 나아가 전쟁에서 승리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론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적군에게 확실한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으면서 아군의 피해는 무조건 발생하는 카미카제 전술은 극히 비효율적인, 절대로 국가의 정부기관이 정식 시스템으로 편재해서는 안 되는 전술이다.
독일 국방군 공군, 미 육군 항공대, 미 해군 항공대, 이탈리아군은 조종사가 임관을 하면 최소 부사관 계급, 장교로 임관을 시킨다. 일본군 항공대에서는 조종사가 임관을 하면 (훈련을 마치고 임관을 했을 때) 계급이 병 계급이면 계속 병 계급으로 계속 유지시켰으며 진급 역시 소태같이 굴었다. 일본군 에이스 조종사 중 하나였던 사카이 사부로가 장교가 되고 나서 한 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계급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작전의 입안, 계획 단계에서 조종사의 발언권이 없는거나 마찬가지가 되기 때문이다.
'인명과 장비를 경시하는 군대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명제의 매우 휼륭한 증명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군대(군사조직)의 목적은 불필요한 희생을 줄여 국가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인들이 궤멸된 부대가 제 일을 못 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저런식으로 남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어떠한 긍정적 결과도 불러올 수 없다.
군인 하나를 죽여 적 몇을 잡느냐 하는 교환비면에서 카미카제를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처음부터 그럴 의도로 전담 부대를 만든 것은 비유하자면, 전투 속행에 방해되거나 적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니 부상병은 버리거나 죽이고 가자는 교리를 만든 것과 비슷하다. 즉, 내일이 없는 자들의 전쟁. 게다가 헛된 전략적인 의미를 위해 부하는 야스쿠니에 보냈고, 반면 수뇌부는 전후에 파멸을 맞거나 그나마 천수를 누린 자들도 전후 헛된 망상을 퍼뜨리며 자신들의 책임으로 패배한 전쟁의 망령으로써 살았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변명도 될 수 없는 싸움방식이다.
인간 방패를 가장 지능적으로 악랄하게 사용한 예시가 된다.
전술적 성과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카미카제는 얼마나 미국에 피해를 주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자세한 연구 결과가 나왔고 미국과 일본 학자들 모두 이에 대한 자료를 내놓았으므로 교차검증도 잘 되어 있다.
호위항모 3척, 구축함 14척, 소해정 3척, 수송선 3척, 상륙정 14척, 화물선 9척, 탄약수송선 1척. 합계 47척. 전함이나 순양함은 물론이고 정작 일본 군부가 특공대가 잡아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정규항모는 단 한 척도 없다. 뭐 후술하다시피, 이미 수십 척의 항모전단을 굴리던 미국 앞에서는 정규 항모 한두 척을 격침시켜도 전황조차 바꿀 수 없었을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됐지만, 카미카제로 격침당한 미 해군 정규 항모가 한 척도 없는 이유가 한가지 더 있는데,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운용한 정규 항모들은 전부 격납고가 개방식이다. 즉 애초에 카미카제가 아니라 항공폭탄이 비행갑판에 떨어져도 그 충격의 대부분이 함체 밖으로 다 새어나간다는 뜻이다.
이 47척이 비행기 3800여기와 그 만큼의 파일럿을 100% 확률로 폭사시킨 카미카제 전략에 의한 최종성과다.
이 피해는 이오지마, 오키나와 전투만이 아닌 1944년부터 집계된 카미카제로 인해 격침된 모든 미 군함의 수를 포함한 숫자다. 참고로 일본 연구가인 나가츠카와 야스노부의 집계는 49척으로 미국측 집계보다는 2척이 많으나 큰 차이는 없다. 오키나와의 전투에서 카미카제로 격침된 군함으로 한정한다면 그 성과는 더더욱 초라해진다.
고작해야 구축함 11척, 화물선 3척, 소해정 2척, 상륙정 8척, 수송선 2척 및 에 불과하다. 아예 호위항모도 가라앉히지 못했다.
이 정도 피해는 압도적인 미군이 아니라, 훨씬 전력적으로 떨어지는 영국군이라 해도 별 피해가 아니다. 그나마 의미 있는 건 상선을 개조해 임시땜빵으로 만든 호위항공모함 3척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당시 미해군은 항공모함만 100척을 넘었고 정규 항모로만 한정해도 28척이었다. 참고로 일본의 경우는 개전시부터 종전시까지 잠시라도 보유한 경항모, 정규항모를 모두 합쳐서 26척 정도였고 그나마도 준공과 손실이 계속됐으므로, 일본군이 동시에 보유한 숫자는 보통 15척 이하 정도에 불과했으며, 카미카제가 본격적으로 행해진 1945년 초에는 6척 정도만 남아있었으며 이마저도 연료 부족과 함체 손상으로 정상적인 활동은 대부분 불가능한 상태였다.
격침이 아닌 연합군의 전체 피해를 집계하면 300~400척 정도, 피해자는 1만 명 정도 된다고는 하지만, 대다수가 수송선이나 중요도가 떨어지는 중소형 함정이었고, 정규 항모를 격침시켜도 전황을 뒤엎기도 모자를 판이므로 사실상 카미카제로 격침시킨 호위항공모함 3척은 별다른 피해조차 아니었다는 소리다.
카미카제의 명중률이나 피해도가 통상 공습보다는 높았고, 전술적으로 미군에 더 큰 피해를 입히고 미 해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후술하다싶이 전략적으로는 무의미했다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일본군이 이러한 일련의 자살공격으로 입힌 미 해군에 대한 피해는 미 해군 입장에서는 충분히 복구가 가능한 피해였으나, 일본은 그런 피해를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며 전황을 뒤집을 수 있는 어떠한 수도 존재하지 아니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일본군이 이러한 일련의 공격으로 이루려고 했던 목적들은 모조리 실패하였으며, 오히려 대국적으로는 자기 자신들의 목을 더 강하게 옥죄어드는 것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일본 군부는 당시 미군에 기술적으로도, 인력적으로도 열세인 상황이었다. 그 병력과 인재들을 아껴서, 지속적으로 방어 위주의 전술로 저항하는 방향으로 주전략을 구성했으나, 이 마저도 미군에게는 부수적인 피해에 불과했을 뿐 미드웨이 해전 이후의 미 해군 상대로는 총체적으로 봤을 때 그 어떠한 유효한 타격도 주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일시적인 효과에 고무되어 지연책에 불과한 자살공격인 카미카제를 정식으로 편제했을 뿐만 아니라, 대대적으로 홍보한 시점에서 일본 군부가 국민들의 생명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유럽 전선의 나치 독일도 패망에 가까워지자 국민돌격대 따위를 구성하여 노인들과 산업인력마저 사지로 내몰고, 도저히 싸울 수 없는 인력들이 후퇴하거나, 피난하는 민간인이나, 자살적인 작전을 거부하는 것을 Greifkommando(그라이프 코만도)라는 헌병 특임대까지 만들어가며 학살하였다. 결국 국가가 국민이 아닌 체제 보전을 위해 이성을 상실하고 당장의 효율에만 집착하여 나오는 광기라는 점에서 나치 독일의 말로나 카미카제를 포함한 일본군의 말로는 그 궤를 같이한다.
영국 해군 항공모함들도 전쟁 후반 시기에 카미카제 공격을 당했는데, 영국 항모는 목재 비행갑판을 쓰던 미군 항모와 달리 아예 비행갑판에 장갑판을 발라놓은 덕분에 대부분 이를 버텨냈다. 장갑판 덕에 급강하폭격에 대한 내성도 있었고, 폭격 후 비행기가 충돌하더라도 잔해 치우고 파인 부분을 메꾸는 정도만으로도 바로 비행기를 띄울 수 있게 되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런 성과들도 반복하지만 카미카제의 특성상 이번 전투에 한정된 효율과 전과일 뿐이었다. 만약 카미카제로 당장의 교전에서 성과를 내더라도 일본이 이길 가능성은 없었다. 장기적인 관점과 승리에 대한 길이 있을 때에는 지연책을 쓰면서 비장의 수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무조건 항복 외에는 선수가 없다. 이기지도 못할 개죽음에 효율성이 있다 해도, 결국 결과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시간을 끌고 타격을 줘도 무조건 항복 외의 길은 일본에게 남아있지 않았고, 적의 공격에 반격을 해도 진정한 의미의 반격인 미국에게 할 공세에 대해서는 어떠한 답도 없었다.
결국 전략적 의미 단락에서 후술하겠지만 일본 방위성의 연구자료에서조차 공격이 아닌 전투기에 의한 방공이 차라리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지적한다.
전술적 성과의 이면
위의 전술적 의마나 성과를 감안하더라도, 카미카제는 총체적으로 좋은 전술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일단 카미카제에 의해 격침된 USS 세인트 로(CVE-63)의 경우를 보자. 이를 격침시킨 것은 세키 유키오 대위이다. 이 사람은 1942년에 일본 해군 항공학교에서 급강하폭격기 과정을 이수하고 카스미가우라 해군항공대의 비행교관으로 근무하다가 1944년 필리핀에 배속되었는데, 그가 배속된 항공단은 바로 필리핀 해 해전 이후 카미카제가 최초로 실시된 그 제201해군항공대였다. 그는 제301전투비행대의 대장이기도 했다. 당시 일본의 전황은 조종경력은 있으나, 실전경력이 적은 사람들조차 당장 배속시켜야 할 정도로 전황이 나빠져 있었다.
그는 오니시 다키지로가 지원자를 모집하였을때 자원하였으나, 카미카제 출격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좀 더 직역에 가깝게 기술한다.
일본도 끝이야. 나같이 유능한 파일럿을 죽이다니. 나라면 몸통박치기를 하지 않아도 적항모 비행갑판에 50번을 명중시킬 수 있을 자신이 있다. 나는 천황폐하라든가, 일본 제국을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야.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가는 거야. 명령이라면 어쩔 수 없다. 일본이 진다면 아내가 미군에게 강간당할지도 몰라. 나는 그녀를 위해서 죽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죽는다. 어때 멋지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