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일본군 가미카제(神風, Kamikaze)
당시 세이트 로의 승무원이던 Orville Bethard의 증언에 따르면, 카미카제 돌입 전에 투하한 폭탄이 항공모함의 비행 갑판을 관통하고 격납고 안의 연료와 폭탄과 함께 유폭했고, 이후 제로센으로 자살공격 해 갑판에 부딪혔다고 한다. 이어서 격납고 안에서 연쇄폭발이 일어나 침몰했다고 한다. 미국2차세계대전박물관 위에서 유키오 대위가 한 말대로, 그에게는 자신감도 있었고, 전투 의지도 충분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러한 조종사를 그저 1회의 소모품으로 사용하였다.
물론 카미카제를 전제로 한 공격이었기 때문에 통상적인 급강하 폭격기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양의 폭탄과 더 고속으로 그 폭탄을 함선에 직격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만약 카미카제 명령이 없었다면 폭탄을 투하한 뒤 조종간을 당겨 기수를 올리기만 했어도 항공모함을 격침하거나 적어도 큰 피해를 입히는 큰 전과를 세우고 살아돌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출격할 수 있었다. 이렇게 조종사들에게 경험을 쌓을 기회조차 앗아감으로써, 한 마디로 카미카제 공격은 통계 상 유효타를 내기 위해서 여러번 활약할 수 있는 뛰어난 파일럿을 반드시 소모함으로 인해 계속 강조하지만 기량의 개선 가능성을 내다버린 것이었다.
엔터프라이즈(항공모함)의 사례를 보자. 엔터프라이즈에 카미카제 공격을 성공시킨 도미야스 슌스케 중위는 츠쿠바 해군항공대의 비행교관이었으며 1945년 5월에는 신푸특공대 제6츠쿠바대의 대장이었다. 후술하겠지만 이 사람도 카미카제 돌입 전에 신묘한 기술로 먼저 폭탄을 명중시켰다. 그 역시 비교적 적은 경험을 가지고도 이러한 결과를 내었으니, 충분한 경험을 쌓았다면 좋은 파일럿이 되었을지도 모르고 정상적으로 종전하였다면 전후 능력을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군은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조종사들을 그저 소모해버릴 뿐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후술할 카미카제 공격의 전략적인 여지조차 없애버린다. 이러한 조종사들의 막대한 소모로 인해 일본 해군 항공대는 전투 지속력을 더더욱 빠르게 고갈시켰다. 더군다나 통상공격을 통한 조종사들의 피드백은 교리를 수정하거나 접근 방법을 바꾸는 등 이후 대응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정보이므로, 이를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카미카제를 통한 공격은 조종사를 100% 소모시키므로 그 어떠한 정보도 회수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일본군의 자살특공은 이미 승리할 방법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그저 미 해군을 상대로 발악한 것에 불과할 뿐, 그 어떠한 주요한 전략적 결과도 내지 못하였다 봄이 타당하다.
전략적 의미에서 보자면 대본영을 위시한 군인/관료/재벌들의 체면과 기득권을 잠깐이라도 더 유지해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자살공격이었을 뿐이다. 다른 방송도 아닌 NHK 특집 다큐멘터리에서도 지적한 내용이다. 전략적 의미고 뭐고 일본은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전력이 궤멸당해버렸기 때문에, 이성적인 군대 및 국가였다면 이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윤리적이고 최선의 선택지는 항복을 전제로 미국에 대한 종전협상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랬다면 한국의 입장에서는 끔찍하겠지만 일본 국민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식민지의 일부를 보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물적 및 인적 자원을 소모해버리고 난 일본 군부는 최소 이에 대한 책임으로 실각하여 완전히 권력을 잃어버리거나, 최악의 경우 전범으로서 처형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의 보전을 위해 일본 국민 전원을 수렁으로 같이 끌고 들어가는 선택지를 선택하였고, 나치 독일의 주요 인사들이 그랬 듯 이미 전쟁의 승패보다는 책임회피와 자기보전 밖에 관심이 남지 않은 일본 군부의 눈에는 그런것이 보일 리가 없었다.
이들은 외교관 등 그나마 일본의 제정신 박힌 사람들이 "이제 다 끝났으니 인정하고 항복하자"고 했을 때도 "1억을 다 죽여서라도 항복할 수는 없다"며 자존심을 세우는 시늉만 하다가 핵 맞고 천황이 항복하자, 핵심 주모자로 미군에 처형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바로 자신들의 지위 보전을 댓가로 미군과 협조하여 살아남아 패전의 책임을 부정하고 패배한 전쟁의 망령이 되었다. 즉 일본 군부는 군국주의의 말로가 대부분 그렇듯, 국민을 지키기 위한 군대가 아니라 천황을 명분으로 삼아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국민을 이용했던 집단이었을 뿐이다.
이들은 미 해군의 본토 상륙을 막고 미군을 지독한 소모전으로 끌고가면서 비이성적인 전쟁을 지속하면 미군이 제풀에 나가 떨어질 것이라 믿었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모든 일본의 국민이 저항한다는 의지를 표현한다면 설령 미군이라도 인종 절멸이라는 비윤리적인 가치를 위해 일본에 상륙하려고 들지는 않을 것이라 오판했다. 그렇게 전략적 목표로 미 해군의 지연과 일본 본토의 방어를 목표로 하였기에 카미카제나 그 외 자살성 공격에 더 큰 투자를 지속하였다.
그러나 미군은 일본군이 비인간적 행위를 지속할때마다 전의를 상실하기는 커녕 더 불태웠으며, 일본인을 사람으로 보는게 아닌 절멸시켜야 할 동물로 보는 시각이 늘어났다. 그리고 이런 일본군부의 안이한 판단에서 나온 비윤리적 전술들이 미국에서 대서특필 될수록 미국에서 전쟁에 대한 지지는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결국 일본군부의 자신들의 보신을 위한 객기에 대한 화답으로 미군은 몰락 작전의 입안과 2번의 버섯구름을 일본 본토에 피움으로써 답변하였다.
결국 '카미카제'란 일본 군부의, 일본 군부에 의한, 일본 군부를 위한, 일본 군인들에 대한 자국민 행정살인 명령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일본 군부는 핵심적인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가담자들도 전범재판에서 사형까지 간 경우가 드물었고, 문화권이 다르기에 당장의 관료가 필요했던 더글러스 맥아더의 GHQ는 사형되거나 종신형을 받은 주요 전범들을 제외하고 상당수를 다시 등용하면서 책임이 희석되었다. 일본 군부에서 알량한 자기 목숨을 가지고 할복을 하거나, 간에 씨알도 안 먹힐 도게자라도 한 책임자들은 극히 일부였고, 대부분은 종전 후에도 미군과 협조 아래 잘 먹고 잘살고 출세도 했으며, 카미카제로 죽인 부하들 팔아먹으면서 극우 행세로 잘 살면서 패전의 망령으로 살았다. 실제로 정치계에 진출하거나, 패전의 절망을 자극하는 우익적인 책을 저술하여 돈을 버는 경우도 있었다.
1945년 일본의 상황은 누가 보아도 닥치고 항복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완전히 사라졌다면, 그리고 상대국이 자국의 완전한 파멸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조국을 재건하기 위한 젊은이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려야 하는 것이 위정자들의 의무이다. 더구나 자동차 운전면허 소유자도 그리 많지 않았던 일본에서 '미숙하게나마 비행기 조종이 가능한' 젊은이가 지니는 의미는 상상 외로 큰 것이다. 군사전략 이전에 정치전략적으로 도저히 정식으로 시행되어서는 안 되었던 선택지가 카미카제였다.
심지어 이때 징집된 파일럿 대다수는 대학교 재학생, 졸업생 등 고등 교육을 받은 인재들이었다. 1960~70년대 우리나라만 해도 대학교 나오면 출세가 보장되고 엘리트로 인정을 받았는데 1930~40년대면 오죽하겠는가? 그땐 대학도 얼마 없었다. 그나마 미국이 일본을 항복시키려고만 했을 뿐 일본인 자체를 멸종시키려 들지는 않았고, 결정적으로 무지막지한 미국의 자본이 일본에 흘러들어가게 된 원인인 한국 전쟁이 일어났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이런 막장짓 한 번에 일본이라는 나라의 재건이 영영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한 예로 위에 언급된 오가와 소위와 도미야스 중위는 둘 다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 출신이다. 이런 인재들은 인간폭탄으로 쓰지않았다면 전후 부흥기에 일본사회에 엄청난 도움이 될 사람들이었다.
만일 일본이 원폭을 맞고도 항복을 하지 않고 끝까지 1억 총옥쇄를 계속해서 주장했다면, 연합군 측은 일본 본토를 향해 총공격을 하는 계획인 몰락 작전을 진행했을 것이고, 그렇게 일본은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맞이했을 것이며, 모 제독의 말마따나 일본어는 저승에서나 들어볼 수 있는 언어가 되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일본군이 전략적으로 카미카제를 통해 유의미한 결과를 얻은 것은 없을 뿐더러, 그 일본군 스스로의 전략목표를 고려하여도 그들이 카미카제를 통해 얻어낸 성과는 전략적인 건 하나도 없다. 결국 자신들의 보신을 위해 헛된 망상을 품고 아무런 대책없이 카미카제라는 지연책을 시행한 결과, 최종적으로 일부의 지위 보전이라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성과 외에는 그 어떤 유의미한 성과도 없고, 결국 카미카제는 일본에게 어떠한 전략적 성과도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전략의 오류 - 항공격멸전의 한계
이번의 기술과 상황으로는, 해군은 항공전력 운용의 원리원칙을 지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육군은 항공운용의 원리원칙을 제쳐두고 신속한 임기응변으로 전황에 대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사례에서는, 신속한 임기응변으로 대응한 육군의 손을 들어줄 수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하지만 역사를 조사해 보면, 해군처럼 눈 앞의 이해에 사로잡히지 않고 원리원칙을 지킨 것으로 최종적인 승리를 얻은 사례도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생이 육군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해군은, 1944년 이후 침공해오는 미 함대와 수륙양용부대를 요격함에 있어. 함대의 주 전력인 기동부대의 항모, 특히 정규항모를 공격 목표로 삼는 것을 고집했습니다. 그에 비해 육군은, 해병대나 육군 병사를 수송하는 수송선을 공격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미 기동부대의 방공능력으로는 그 방공망을 돌파해 방공망의 중심에 위치하는 항모를 공격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또한, 미 기동부대의 내습은 해병대, 육군의 육상 병력과 함께 그 작전 목적인 요지(구체적으로는 도서지역)을 공략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하지만 기동부대와는 달리 수송선단의 직접호위는 정규항모와 비교해 소형인 호위항모 등의 비교적 취약한 전력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엄중히 방어된 기동부대의 정규항모보다 공격 성공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육상 전력에 큰 피해가 나오거나, 상륙한 육상 전력에 대한 보급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면 요지 점령 목적은 달성 불가능합니다. 적의 작전 목적을 저지한다는 의미로 보면, 육군의 견해가 목적에 적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해군은 '적 함대의 주력을 격파하면, 그 재건에 시간이 걸려 전쟁 지속이 곤란해진다. 그러니 적의 주력을 공격한다'라는 생각을 러일전쟁의 승리로 굳히게 되었습니다. 그 가상적이 미국으로 바뀐 이후에도, 이 생각은 유지됩니다. 이 점에서 보아 해군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주적을 격멸한다는 것에 총력을 기울인 것이 됩니다. 또한, 진주만 공격까지는 그 주적은 전함이었지만, 미드웨이 해전 이후 그 주적은 항모가 됩니다. 전쟁의 양상이 변화했는데도 불구하고, 종래의 발상이 거의 고정관념화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해군이 항공운용의 원리원칙을 지킨 것은 어떤 의미로는 종래의 관념에 사로잡힌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편 육군에서는, 육군항공의 중견 클래스 즉 전문가의 반대를 억누르면서까지, 전투기 초중점주의로 이행했습니다. '현재의 우리 나라의 기술력에 기반하는 전력으로는 연합국군에 대항할 수 없다. 연합국보다 질, 양 모두 열세인 전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조금이라도 불리점을 개선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라는 판단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결과 '지상군을 줄여서라도 항공부대를 확충한다, 그 가운데 지금까지의 전훈을 반영해, 요원 양성이나 기재 생산이 비교적 용이하고 전장 상공의 항공우세를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전투기에 중점을 둔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후술하는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의 저자가 날개회에 기고한 요약문에서 발췌.
카미카제 전술은 주로 일본 해군에 의해 시행되었다. 오키나와 전투 즈음에 달해서는 육군도 항공기를 이용한 특공을 시도했지만, 적어도 일본 육군은 항공전에 있어서는 그저 항속거리와 기습에만 신경쓰면서 구시대적 교리를 발달시키지 아니한 일본 해군에 비해 선진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폭격기무적론이 내세운 주장과는 달리 항공기에 의한 공격은 전투기의 호위 및 제공권 확보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적 전투기에 매우 취약하며 이는 영국 본토 항공전 등 수많은 실전에서 검증되는 바, 일본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는 대전기 일본 해군의 항공운용에 큰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한다. 육군은 중일전쟁과 42년 남태평양에서의 항공 소모전을 겪으면서 폭격기의 높은 소모율과 능력의 한계를 실감한 후 전투기 중점 체제를 비교적 이른 시기에 확립하게 된다. 43년 9월부터 육군은 지상군을 줄여서라도 항공 전력 확충에 집중하며 폭격/공격기보다 탑승원 육성 및 생산이 용이하고 전장 상공의 항공 우세를 획득할 수 있는 전투기에 중점을 두기로 결정하고, 항공병력을 약 2.5배 확충하는 한편 일명 '전투기 초중점주의' 에 입각한 신규 교범을 작성, 전투기:폭격기:습격기:정찰기:수송기의 비중을 56.4 : 8.4 : 7.7 : 12.8 : 15.4로 맞출 것을 계획한다.
그렇다고 육군이 카미카제나 특별공격대를 안 쓴 건 아니지만, 단순히 탁상 위의 계획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육군에서는 전투기를 중시한 전력 개편이 이루어져 대전기간 중 육군이 생산한 전투기는 13,700기, 그중 43년 이후의 신형기가 6,800기, 2000마력급 고성능기가 3,500기였다.
반면 해군은 43년 8월까지 벌어진 남태평양의 항공 소모전을 겪고도 체질개선에 실패해, 해군의 총 전투기 생산량은 12,300기로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 것 같지만 그중 1만기 이상이 대전 초반 티어 전투기인 A6M 제로센이었고, 43년 이후의 신형기 및 2000마력급 고성능기는 1,900기에 불과했다.
신형기의 개발역량 면에서도 육군이 신규 채용한 공격기는 4식 중폭 Ki-67 히류(600여기 생산)에 그치고 반대로 1식전 Ki-43 하야부사 이후 거의 매년 신형 전투기를 개발해 채용했으며 말기에 등장한 5식전 Ki-100을 제외하면 하야부사, 라이덴과 동급의 요격기인 2식단전 Ki-44 쇼키, 3식전 Ki-61 히엔, 4식전 하야테가 모두 1천기 이상 양산된 반면 해군의 공격기는 원샷 라이터로 악명높은 G4M 일식육공을 비롯해 개전 후 신규개발된 모델도 B6N 텐잔, D4Y 스이세이, B7A 류세이, P1Y 긴가 등 다양하며 생산량 면에서도 1식육공 2,200기, 스이세이, 텐잔, 긴가가 각 1천기 이상으로 전투기에 쓰기도 모자라는 고성능 엔진을 대전 후반기까지도 공격 전력에 상당량 할애했다.
실제로 해군이 전투기의 비중을 공격기/폭격기보다 우선한 것은 1945년 들어서의 일로, 44년 2월 제1함대(일본군)의 해대와 함께 뒤늦게 거함거포주의를 포기하는 것보다도 더 늦게까지 함대결전사상과 폭격기무적론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 실상이다.
물론 개념이나마 파악하고 있었던 육군 역시 미국을 상대로는 방공전이나 항공대치전을 효과적으로 해낼 수는 없었던 것이지만,그런 육군보다도 항공전에 대한 개념이 후진적이었던 해군이 가지고 있는 얄량한 공격 전력으로는 결국 카미카제가 고작이었던 것. 그 카미카제조차도 주력 전투함으로 방비가 가장 튼튼한 정규항공모함이 최우선 목표였고 앨프레드 세이어 머핸의 해양전략사상을 수박 겉핥기로 흡수해 러일전쟁 이후 해체 순간까지도 통상파괴는 뒷전으로 밀어두고 적 전투함 격파만 우선하는 함대결전사상에 매달린 나머지 효율은 한없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결과는 일본 해군에게 항공전력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라는 신랄한 평가가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의 결론이다.
미국의 경우
카미카제는 전략적 의미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미군은 1945년 7월 30일에 작성한 '일본의 비밀무기:자살'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일본군이 '죽으면 야스쿠니 신사에 간다'며 자살공격을 적극적으로 조장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덕분에 일본인의 완전 소멸 또는 국가존속이 위협받아야 일본이 항복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미국의 높으신 분들은 원자폭탄을 일본에 투하하기로 결정했다.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참조할 것. 역설적이게도 이들의 무차별 공습을 막아낼 일본군 항공기 에이스와 신병기들은 일본 군부가 자기 손으로 바다에 묻어버렸다.
결국 카미카제는 일본 군부가 일본 국민들과 군인들을 인간방패로 내세워 항복을 거부하는 일종의 인질극에 불과했고 당시 이러한 비인도적인 카미카제 전략에 미국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는 연합국과 미국 측에서 도쿄 대공습과 원폭 투하에 대한 반감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사실 당시는 원자폭탄을 그냥 '좀 쎈 신형폭탄' 정도로 인식했으니 굳이 카미카제에 대해 몰랐더라도 별로 거리낄 것이 없었다.
필연적인 전략적 실패의 이유
일본군은 가망이 없는 전황을 역전해보기 위해서 무의미한 발악으로서 공격의 효율을 높여보고자 자살공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는 목숨을 내다버리는 행동이었고, 그렇게 얻은 전과도 희생에 비해 미약하기 그지 없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는 위에서 부분적으로 설명된 전략적 목표 실패의 이유를 다시 정리한다.
연합군의 방공망
F4U 콜세어, F6F 헬캣, VT신관, 보포스 40mm 포를 대표로 하는 연합군(특히 미군) 방공능력의 비약적인 향상으로 인해 함대에 접근하기도 전에 하늘에 날아다니는건 그냥 전부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여기에 더해 미해군의 방공전술이 무르익어 대공원형진을 내놓게 되면서 더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더불어 대전 후반으로 갈수록 태평양에 있는 섬들을 점령한 미군이 그곳에 비행장과 격납고를 짓기 시작하면서 단순 함재기 뿐만 아니라 P-51 머스탱, P-38라이트닝 같이 무장이 더 강력한 육군기들이 하늘을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거기에 더불어 섬에서도 항공정찰과 지상 레이더를 통해 항공기들의 이동경로를 파악하고 대비를 할 수 있었던 연합국 측에 비해, 일본 해군의 경우 미드웨이 해전에서 다수의 항공모함을 잃고 전략적 요충지인 섬들마저 빼앗기니 작전반경은 매우 제한적이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연합군의 방공능력은 계속 강력해진 반면, 일본군의 그에 대한 대처능력은 점점 떨어졌다.
수준 미달의 조종사
카미카제에 투입되었던 조종사는 긴급 양성된 신참 조종사가 많았다. 카미카제 대원들은 속성으로 훈련받아 고급전술은 당연히 구사할 수 없었고, 초보 조종사들이 바다에서 방향을 잡고 항로를 유지하는 고난이도의 교육을 제대로 받았을리도 없고, 1회용 전력에 일본군이 그 정도의 노력을 투입할 리도 만무하였다. 거기다 유럽과 달리 태평양은 엄청난 제트기류로 인해 숙련된 조종사들도 상당히 힘들어하는 비행 경로다.
목표까지 가는 길을 못 찾으면 끝없는 태평양 수면에 착수하는 결말이 된다. 태평양의 망망대해 위에서 나침반의 방향과 몇 가지 측량법만 의지해서 목표물을 찾는다는 건 상당한 숙련도가 필요했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 후반에는 카미카제용 양성 조종사도 대단히 귀한 존재였다.
결국 선도기로 숙련된 조종사의 선도가 미군의 촘촘한 초계망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필수였다. 즉, 카미카제를 시도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대원들을 선도해서 적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까지 선도해야 했는데 비숙련자들을 이끌면서 자폭하러 가는 비행이 그들에게 정신적으로 쉬운 일인지 어려운 일인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전후에 선도기 조종사가 회고록에서 밝힌 내용을 보거나, 인터뷰에 응하여 밝힌 바에 따르더라도, 카미카제 작전에 동원된 대원들이 배에 뛰어들 때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친 경우는 없었으며, 모두 "어머니"를 불렀다고 한다. 자폭하지 않는 선도기 조종사들은 무전을 통해 수많은 죽음을 전해들었고 악몽으로 고통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숙련된 조종사도 회피 기동하는 군함을 명중시키기 어려운데, 신참 조종사들이 폭격에 성공하는 것은 사실상 기적에 가까웠다. 하지만 닥돌하게 만들면 비슷한 수준의 조종사가 폭격하는 것보다는 명중률이 더 나왔다. 통상적으로 급강하 폭격시 미 해군의 초계기들과 방공망을 뚫고 유효타를 낼 확률은 4% 정도였으나, 자살공격은 14% 정도였다. 그러나 1941년 12월 7일의 진주만 공습 후에 본격적으로 가동된, 연합국 군인들에게 무기를 제공한다는 무기대여법에 1942년 말부터는 한 술 더 떠서 더는 기다릴 수 없다까지 치면서 물자를 쏟아내고 압도적인 인적자원을 가지고 있던 미국과 정상적인 대결을 펼쳐서는 이렇게 해도 도저히 승산이 없었다.
이성을 날린 당시 군부의 인식
카미카제로 나간 조종사가 자살돌격 대신 적 화물선 약점 요격하는데 성공하여 화물선을 반파시키고 귀환한 경우도 있다. 정상적이라면 조종사에게 훈장을 수여하거나 적어도 전과에 대해 치하하고 격려하여야 하지만 당시 일본 군부는 작전을 거부하고 멋대로 항명하였다 하여 조종사를 총살시키는 것으로 보답하였다.
카미카제 특공대의 임무는 전역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미 해군의 항공모함에 피해를 입히는 것이었다. 물론, 초음속으로 날아드는 대구경 함포탄에 얻어맞아도 작전이 가능하게끔 설계된 전함을 상대로 카미카제용 비행기의 폭약과 속력 따위로 충돌하면 아스팔트 위에 내던져진 달걀 신세가 되므로 큰 효과가 없을 것은 일본군 자신도 잘 알고 있었고, 함대결전사상에 따라 항공모함이 없는 미 해군을 상대로는 야마토급 전함으로 적어도 미군의 접근은 어찌저찌 해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일본군은 항공모함을 최우선 목표로 정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조종사들이 날아가다가 아무 배나 보이면 그냥 헤딩했다는 것. 나는 법만 간신히 배웠고 극한의 스트레스를 주는 행위를 강요받아 성급해진 신참 조종사들에게 까마득히 멀리 보이는 조그만 점이 어떤 배인지 알아보는 적 함선 식별 등, 고급 행동이 가능했을 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 전방에서 레이더 피켓(picket) 임무라고 해서 레이더를 장착한 구축함들이 항모의 외곽을 둘러싸고 대공경계를 맡았는데 해당 임무를 하던 구축함들이 더 큰 피해를 본 편이다. 몸빵도 원래 레이더 피켓함의 임무 중 하나긴 했지만... 심지어 이 함선들은 나 항모 아님 이라고 써붙여 놓기까지 했다고 한다. 안습. 게다가 미군의 대공화력은 압도적이었다. 카미카제가 공격하려고 해도 그 전에 전투기와 대공포로 이뤄진 철벽을 뚫어야 했다.
그나마 카미카제 특공대의 성과를 키운 것은 바로 미 해군 항공모함의 비행갑판이 목재였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실제 같은 시기 작전에 참여한 영국 항공모함도 카미카제 공격을 받았지만 피해는 미 해군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이유는 영국 항공모함은 비행갑판에 장갑판이 깔려있었고 그 덕분에 카미카제 전투기가 들이받아도 그냥 납작한 팬케이크가 되고 말았으니 팬케이크 된 잔해를 치워버리고 갑판 살짝 보수하고 물청소 한 번 하면 바로 작전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프라이팬에 뛰어드는 달걀"이라는 비유도 있다.
대신 미군 항모는 현지에서의 응급수리가 가능했지만 영국 항모는 제대로 된 항공폭탄이 명중하는 등 일단 한 번 크게 손상되면 귀항해야 수리를 할 수 있었다. 이게 개방식 격납고와 폐쇄식 격납고의 차이이기도 하다.
카미카제로 격침당한 정규항모는 한 척도 없다. 미국이 진주만 공습 직전에 건조한 에식스급 항공모함들 중에서 카미카제 맞고 비행갑판에 거대한 구멍이 뚫리거나 막대한 인적 피해를 낸 항모는 있어도... 일본군 입장에서는 문자 그대로 현실은 시궁창이다. 전쟁이 시작되기도 한참 전에 건조한 요크타운급 항공모함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2번함 CV-6 USS Enterprise의 경우 전쟁 끝나고 나서도 한참을 살아남았지만 결국 스크랩 처리 되었다. 하지만 그 전설적인 활약상으로 인해 이 함명 자체가 미 해군의 상징이 되었으며, 차기 항공모함의 이름으로 지금도 계속 계승되고 있다.
다만 CVE-63 세인트 로 등 호위항모를 격침한 전과는 있다. 그런데 아래에도 나오지만 미군에서 호위항모는 1주~2주 꼴로 한 척씩 건조→취역시키고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라 미 해군이 운용한 호위항공모함들은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 문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호위항공모함이라는 함종 자체를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만든 것도 아니고, 수송선단과 상륙부대의 호위를 위해서 급조한 것으로, 원래 전시표준선 중 하나인 리버티선이나 유조선, 화물선 같은 수송선의 설계를 기반으로 만든 것들이어서 방어력이 정규항공모함이나 순양함, 전함 등에 비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호위항공모함의 경우 전함의 포격을 받아도 장갑이 없다시피 할 정도다 보니 격침은커녕 과관통으로 인한 구멍만 나고 끝인 경우도 있었다. 레이테 만 해전 참고. 실제로 당대 미 해군의 호위항공모함 수병들이 호위항공모함에 붙은 식별코드인 CVE를 갖고 자학적인 말장난까지 쳤을 정도.
수준 미달의 군용기
일단 항공기 관련 공업능력이 전쟁후반기로 갈수록 저하되었다. 여기에는 공장의 숙련공들조차 일선의 총알받이로 보내버린 일본군의 정책도 한몫 했다. 일선 전투원 못지 않게 숙련공의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던 미국과는 아주 대조적인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전투기의 설계, 제작이 난항을 거듭하여 원하는 성능을 낼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미군기에 비해 일본군기는 압도적인 성능상 열세에 있었다. 덕분에 필리핀 해전 이후로는 통상적인 공격에 낙후된 일본 해군기를 사용하는것 자체가 자살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거기다 후반에는 본토 결전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쓸 수 있는 기체를 온존하기 위하여 그나마 쓸만한 전투기를 모으면서, 구식 비행기들의 처리도 문제되었는데, 급강하폭격기나 전투기와 달리 자살공격으로 사용되는 기체는 생환을 전제하지 않으므로 성능이 떨어지더라도 일단 폭탄만 탑재할 수 있다면 아무거나 갖다 사용하였다. 일본군은 남아있는 95식 1형 복엽 연습기도 오키나와 전투에서 자살 특공작전에 투입하였으며, 이 연습기를 이용한 자폭으로 태평양 전쟁의 카미카제에 의한 마지막 전과인 플레처급 구축함 USS 캘러한(DD-792) 1척을 격침시켰다. 이러한 구식 복엽기의 경우에는 나무로 된 몸체로 인해 레이더 전파가 흡수되어 VT신관이 작동하지 않았고, 속도가 느려 방공포가 닿지 않는 저고도로 접근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전 후반기로 갈수록 항공기 연료의 품질 악화가 발생했다. 이는 태평양 전쟁 전 미국의 석유 수출 동결 및 개전 이후 제해권 상실과 더불어 미군 잠수함들의 방해 같은 전황의 악화로 인해 동남아에서의 연료수급사정은 점점 악화되었으므로 송진같은 일단 굴릴수만 있는 연료들을 이용한 대체연료를 사용할 실정이므로 정상적인 연료를 쓸 때보다 엔진 출력도 약하고 엔진의 작동성 역시 심각하게 저하되었다. 이런 것은 항공기를 만들 재료에도 적용되므로 전쟁 후반기의 일본군 항공기는 세심하게 만들어도 저질 재료로 인해 상당히 위험했다.
이는 일본군 수뇌부도 충분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문제들과 미 해군의 자살공격 대응력의 향상으로 인해 자살특공의 전과가 점차적으로 줄어들자, 막장 일본군답게 이들이 선택한 방안은 이런 미친 짓을 그만두는 게 아니라 카미카제 전용으로 만들어진 자폭병기인 츠루기와 오카를 정식 편제하는 것이었다.
오카의 경우에는 자폭 공격에만 중점을 맞추고 기존의 카미카제가 폭탄 적재까지 해서 안 그래도 느린 비행기가 더 느려진다는 단점을 개선했다고 만든 유인유도식 미사일이지만, 결론적으로는 조종하기 힘들며 사정거리도 짧았고, 무엇보다 이걸 싣는 폭격기가 허구한 날 격추당하는 항공기였다. 결국 오카는 발사까지 안전하게 자신을 호송해줄 수단조차 확보하지 못해서 실제로 출격된 74기 중 56기가 모기와 함께 격추당하거나 요격되는 결말을 맞았다. 그나마 전과를 올린 경우 역시 구축함 1척 격침, 구축함 1척 대파, 구축함 2척 소파였다. 즉 주력함종에 대해서 단 하나의 전과도 내지 못하였다.
실제 카미카제에 사용한(또는 그러려 했던) 항공기를 보면 박물관 차릴수 있을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