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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이야기

엔터프라이즈(USS Enterprise CV-6, 1938년)

작성자管韻|작성시간20.11.13|조회수220 목록 댓글 0

엔터프라이즈(USS Enterprise CV-6, 1938년)

 

 

 

 

 

 

엔터프라이즈는 태평양 전쟁 당시 크게 활약한 미합중국 해군의 항공모함이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미국 해군이 보유했던 항공모함 7척 중 새러토가, 레인저와 함께 종전까지 살아남은 세 항공모함 중 하나로, 잿빛 유령(Grey Ghost), 질주하는 유령(Galloping Ghost), 빅 E, 럭키 E 등의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미합중국 해군과 일본 제국 해군 모두 나름대로 수훈함이 많았지만, 엔터프라이즈는 연이은 격전에 참가하면서 전쟁의 양상을 바꾸는데 일조했으며, 결정적으로 끝내 살아남기까지 했다.

 

1934년 7월 16일 뉴포트 뉴스 조선소에서 기공되고, 1936년 10월 3일 진수, 1938년 5월 12일에 취역했다. 요크타운과 함께 렉싱턴과 새러토가가 있는 태평양 함대에 배속되어 진주만을 모항으로 했으며, 항공기 수송과 훈련에 전념하게 된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요크타운은 대서양으로 이동하였고, 엔터프라이즈는 렉싱턴, 새러토가와 함께 태평양에 남아 있었다.

 

1941년 12월 2일, 웨이크 섬에 와일드캣 12기를 배달하고 돌아오던 엔터프라이즈호는 원래대로라면 12월 6일에 입항했어야 하는데, 오다가 폭풍을 만나 일정이 하루 늦어진다. 일본은 그 다음날인 12월 7일에 나구모 함대(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 쇼카쿠, 즈이카쿠)를 동원해서 진주만 공습을 감행했고, 진주만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일본군의 공습소식을 들은 엔터프라이즈는 서쪽에서 진주만으로 접근중이었고, 남쪽에서 일본 함대를 찾아 공격하는 임무를 받았지만 일본 함대는 북서쪽에 있었기에 허탕을 친다. 게다가 엔터프라이즈의 함재기 중 일부는 명령에 따라 항모로 돌아오지 않고 진주만의 포드 섬 비행장으로 귀환했는데, 공습을 받아서 긴장한 아군 대공포 부대가 함재기가 일본군 인줄 알고 오인사격을 해서 격추당하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엔터프라이즈는 수색을 마치고 다음날인 12월 8일 진주만에 입항했고 급유작업을 마친 뒤 다시 다음날인 12월 9일 재출격했다. 12월 10일 엔터프라이즈는 일본의 해대 6형 잠수함인 I-70을 침몰시켰고 이는 태평양 전쟁이 개전된 이후 미국이 일본을 상대로 처음 침몰시킨 적함이었다.

 

1941년 12월 8일, 웨이크 섬은 일본군의 공습으로 와일드캣 8기를 잃는 등 큰 피해를 입는다. 일본군은 충분히 웨이크 섬의 방어력을 약화시켰다고 판단하고 11일에 상륙함대(기함 유바리)를 보냈지만, 미 해병대는 와일드캣 4대와 군함에서 떼어온 해안포 6문으로 반격한 끝에, 2척의 구축함을 격침시키고 300명이 넘는 일본군을 사살했다. 특히 구축함 키사라기는 (엔터프라이즈가 갖다준) 와일드캣의 폭격으로 격침되었고 승조원 전원이 사망했다. 망신을 당한 일본군은 일본 해군의 명예를 걸고 웨이크 섬을 점령하기로 하고, 진주만 공습에 참가한 2개의 항모전단(소류, 히류)과 제6전대(기함 아오바) 등의 정예부대를 동원해서 간신히 웨이크 섬을 점령한다.

 

1942년 2월 1일, 엔터프라이즈가 포함된 함대는 일본군이 점령한 길버트 제도를 기습하여 적함 3척을 침몰시킨다. 2월 24일에는 웨이크 섬을 공격하고, 3월 4일 마커스 섬을 때린다. 이때 적의 공격으로 인한 지근탄으로 사상자가 발생했다.

 

1942년 4월 8일, 엔터프라이즈는 항모 호넷과 함께 비밀임무를 위해 출동한다. 그러나 4월 18일에 일본군이 그들을 발견했고, 여기서 엔터프라이즈의 전투기가 항공엄호를 담당하는 가운데 호넷이 배에 탑재한 B-25 미첼 폭격기 편대를 발진시킨다. 이들이 바로 둘리틀 특공대였고, 일본은 대낮에 수도 도쿄를 폭격당하면서도 한 대의 폭격기도 못 잡는 치욕을 당했다. 일본군도 둘리틀 특공대가 출격했다는 정보 자체는 입수했지만, PBY 카탈리나 수상기가 아니며 미 해군은 카탈리나 이외의 쌍발기는 운용하지 않는다며 무시했다가 대낮에 대놓고 도쿄를 공습당하고 말았다.

 

사실 도쿄공습 자체가 일본에 엄청나게 피해를 준 건 아니다. 하지만 백주대낮에 미군에게 수도인 도쿄가 빈집털이를 당했다는 것 자체가 진주만 공습으로 잔뜩 기고만장해하던 일제에게 한방 먹였다는 의미가 컸고, “그날 히로히토가 공습을 모면한 건 우리가 봐줘서 그런 거다”라는 루즈벨트의 조롱까지 나오자 일제는 잔뜩 부들부들댔고, 망신살이 뻗친 일제 해군은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할 방안을 찾게 된다. 이 과정에서 과거 야마모토가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던 미드웨이 공격방안이 채택되었고, 일본군은 연합함대를 출격시킨다. 핵심 전력은 당연히 나구모 제독의 항모전단(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였다. 그러나 엔터프라이즈의 숙적이라는 쇼카쿠와 즈이카쿠는 미드웨이 공격에 참가하지 않았는데, 산호해 해전을 참조.

 

한편 둘리틀 특공대 작전을 수행할 당시 엔터프라이즈가 호넷과 직접 합류하기 직전인 1942년 4월 12일에는 소소한 사고가 발생했다. 한밤중에 갑자기 비상 사이렌이 울려퍼져 전 인원이 전투준비태세에 들어갔다. 비밀 임무를 앞두고 터진 일이라서 함내가 긴박하게 돌아갔는데, 사실은 당직근무를 서고 있던 인원이 졸다가 비상 사이렌 버튼을 잘못 누른 것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이 도쿄를 공습하러 간 사이에 산호해 해전이 벌어진다. 미군은 요크타운과 렉싱턴을 투입해 일본군에 맞섰으며, 지휘관은 프랭크 플레처 제독.

 

이 해전에서 일본군은 포트 모르즈비 침공부대와 5개의 항모전단(쇼카쿠, 즈이카쿠)을 투입하였는데, 포트 모르즈비 침공부대를 엄호하던 제6전대(기함 아오바)가 미 항모전단의 위치를 발견해서 5항전에 알려준다. 그러나 5항전은 쇼카쿠의 정찰기가 발견한 미군 항모전단을 공격하기 위해 이 정보를 무시했고, 플레처는 포트 모르즈비 침공부대를 일본군 주력부대로 착각해서 총공격을 감행한다. 포트 모르즈비 침공부대의 경항모 쇼호는 중과부적으로 침몰했고, 쇼카쿠와 즈이카쿠의 함재기들도 미군 항모전단을 격파했는데, 그 항모전단은 유조선이었다! 쇼카쿠 정찰기가 함종을 착각하는 바람에 승리의 기회가 날아간 것.

 

오후에 다시금 출격한 쇼카쿠와 즈이카쿠의 함재기들이었지만, 쇼카쿠 정찰기가 또 삽질을 하는 바람에 미 항모전단을 발견하지 못한다. 결국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한 채 함재기들은 귀환하는데, 착함하려던 배는 미군 항모였고 일본기들은 필사적으로 도주했다. 이런 게 엔터프라이즈의 숙적이랍니다. 다음 날 벌어진 전투에서 쇼카쿠는 대파된다. 즈이카쿠는 한 방도 안 맞았지만, 전력을 크게 상실한 일본군은 포트 모르즈비 침공을 포기했다. 미군도 렉싱턴을 잃고 요크타운이 큰 피해를 입긴 했지만, 전략적 승리는 미군의 것이었다.

 

산호해 해전 이후, 미군은 모든 전력을 미드웨이에 긁어모은다. 요크타운은 해전에서 중파당해 전선에서 응급수리와 진주만에서 3일 정도 수리 기간을 받아 완벽하게 수리 되지 않아서 미드웨이에 파견된 시점에도 함선에 기술자들이 남아 수리를 진행중인 상태였다. 이것은 미드웨이로 요크타운을 보내면서 동력과 엘리베이터는 멀쩡하다는 사실을 보고받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 항공모함을 단 한 척도 놀릴 여유가 없다며 수리중인 상태로 전선으로 보내라고 직접 명령하였기 때문이었다. 3개월은 걸릴 배를 3일만에 고치라는 건 무리한 요구지만, 그만큼 항모가 절실했다. 그리고 홀시가 병원에 입원했으므로, 프랭크 플레처가 엔터프라이즈, 요크타운, 호넷을 지휘하는 함대 사령관이 된다.

 

그러나 엔터프라이즈의 숙적이라는 쇼카쿠는 대파된 탓에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하지 못했다. 문제는 멀쩡한 즈이카쿠까지도 미드웨이 공격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전 가능한 일본 항모라면 류조와 준요도 있었지만, 일본군은 이들을 알류산 열도로 보내버렸다. 덕분에 요크타운, 엔터프라이즈, 호넷이 상대할 항모는 4척(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으로 줄어들게 된다.

 

1942년 5월 25일에 진주만에서 출격한 엔터프라이즈는 미 해군의 주력으로서 나구모 제독의 항모전단(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과 격돌하였지만 크게 고전한다. 미군의 구식 뇌격기와 엉터리 어뢰, 훈련이 부족한 조종사들로는 숙련된 일본군의 제로센을 상대할 수 없었다. 미군 미드웨이 기지 소속 항공기와 항공모함 소속 뇌격기 조종사들은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결국 큰 피해를 보며 유효한 타격을 주지 못했고, 일본군은 환호를 올리며 미군을 공격하기 위해 공격대를 발진시킬 준비가 끝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일본군 구축함 아라시의 뒤를 밟은 엔터프라이즈의 급강하폭격기 돈틀리스들이 일본 항모를 발견했고, 그대로 공격을 개시한다. 일본 전투기들은 미군 뇌격기들을 때려잡기에 바빴기에 수면 가까이로 내려와 있었고, 카가의 견시가 황급히 “적기 직상! 급강하!”를 외쳤지만 이미 때는 늦었기에 카가는 엔터프라이즈의 급강하 폭격기들의 공습으로 작살이 났다. 즈이카쿠와 류조, 준요 같은 항모들을 최대한 많이 투입했더라면 미군 급강하폭격기들의 요격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일본군은 그러지 않았고 대가는 참혹했다.

 

나구모 기동부대의 기함인 아카기는 모든 미군기들이 카가로 몰려가는 바람에 살아남았지만, 엔터프라이즈 소속의 리처드 홀시 베스트 대위가 이끄는 급강하폭격기들에게 발각되었다. 일본군도 필사적으로 대공사격을 퍼부었으므로 1발은 빗나갔지만, 1발의 지근탄이 아카기의 키를 고장냈고, 베스트 대위의 베스트 샷이 아카기를 파괴했다. 미드웨이 해전 이전에 일본군이 모의전을 벌였을 때는 9발을 맞지만 우가키가 우겨서 3발의 폭탄이 아카기에 맞고 소파될 거라고 예상했지만, 베스트 대위는 딱 한 발로 그런 계산을 뒤엎은 것이다. 소류도 같은 시각에 도착한 요크타운의 함재기들에게 박살나버렸고, 이것이 바로 태평양 전쟁의 흐름을 뒤바꾼 운명의 5분이다.

 

겨우 살아남은 히류는 반격에 나서서 요크타운을 대파시켰지만 1시간만에 배를 수리했고, 다시 공격해온 히류의 공격대는 그걸 보고 “저건 요크타운이 아니라 다른 항모다!”라고 착각해서 다시 공격을 퍼부었으며, 요크타운 혼자서 일본군의 공격을 모두 흡수하는 결과를 낳았다. 요크타운의 함재기들은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으로 대피한 후 복수를 다짐했고,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은 함재기들을 발진시켜 최후의 전투에 나선다. 이들에게 발각된 히류는 어떻게든 회피하려고 했으나 폭탄 4발을 맞았고, 마지막 명중탄은 아카기를 박살낸 엔터프라이즈의 급강하폭격기 조종사 베스트 대위의 베스트 샷이었다.

 

이후 요크타운은 전투가 끝난 직후까진 대파된 상태로나마 간신히 살아있었지만 전투가 마무리된 후 진주만에서의 수리를 위해 예인하던 도중 근처를 배회하던 伊-168의 뇌격에 의해 예인중이던 구축함 해먼이 침몰당하고 요크타운도 어뢰에 명중당해 회복불가능 상태가 되면서 함생을 마쳤다.

 

이렇게 해서 미드웨이 해전은 미군의 대승리로 막을 내렸고, 일본군은 가장 강력한 항모 4척을 모조리 잃고 말았다.

 

연합함대의 정규 항모 4척을 침몰시키는 대승리를 거둔 엔터프라이즈는 1942년 7월 15일에 진주만에서 출격, 새러토가와 와스프와 합류한 후 8월 7일에 시작된 미 해병대의 과달카날 점령을 지원한다. 이날 일본군의 제8함대가 다가오는 것을 미군이 발견했지만, 함종을 착각한 탓에 과달카날이 아닌 다른 곳으로 하는 함대라고 오판한다.

 

8월 8일, 기동부대 지휘관인 프랭크 플레처 제독은 기동부대의 피해를 우려하여 함대를 철수시켰다. 과달카날 상륙함대를 지휘하던 리치몬드 K. 터너 제독은 “주력함대가 비열한 핑계를 치면서 도망쳤다!”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엔터프라이즈를 비롯한 항공모함들은 이미 떠난 후였다. 다만 플레처 제독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도 무리가 아닌 게, 미군의 입장에서 항공모함은 굉장히 중요한 병기였다. 전함이 진주만에서 괴멸되었기에 엔터프라이즈 같은 항모들이 주력함이 된 것인데, 이들마저 사라지면 미군은 연합함대에 맞설 수가 없었다. 플레처 제독으로서는 무슨 짓을 해서든 항공모함을 지켜야 했으므로 위험을 최대한 피하는 것도 당연했다. 게다가 상륙함대를 엄호하기 위해 다수의 순양함과 구축함들이 남아있었으므로, 상륙함대가 무방비인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일본군 제8함대의 구성을 보면 미군이 질 이유는 없었다. 기함인 중순양함 초카이만 그럭저럭 신형이고, 주축인 제6전대(기함 아오바)의 중순양함 4척은 미군 중순양함보다 성능이 뒤떨어졌던 것. 게다가 텐류, 유바리, 유나기는 기함과의 무선통신도 안 되는 고철덩어리였으니, 미 함대가 경계만 제대로 한다면 일본군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놀라운 전술로 모든 것을 극복했다. 일본군 중순양함 아오바가 정찰기(아오바 1호기)를 날렸던 것. 이 정찰기는 뻔뻔하게도 한밤중에 불을 켜고 미 함대의 머리 위에 나타났고, 과달카날의 모든 미군이 이 정찰기를 목격했지만 “한밤중에 불을 켜고 우리 머리 위로 날아올 정도로 정신 나간 일본기가 있을 리 없다. 그러니 저건 우리 비행기다”라는 착각을 해버렸다. 결국 아오바 1호기는 미 함대의 모든 정보를 싹 털어갔고, 제8함대의 미카와 제독은 이 정보를 토대로 야습을 감행, 상륙함대를 엄호하던 미 함대를 탈탈 털어버렸다. 미 함대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30분 내에 당해버렸고, 중순양함 퀸시가 홀로 대항했지만 아오바에게 격침당했다. 이 해전이 바로 미 해군 역사상 최악의 참패라는 사보섬 해전으로, 철수 명령을 내린 플레처 제독은 평생까임권을 얻고 말았다.

 

그러나 플레처 제독의 실수가 사보섬 해전의 패배를 불러온 건 아니다. 어차피 엔터프라이즈가 야간작전 능력을 획득하려면 1944년은 되어야 했으니, 현장에 있었다면 그냥 거대한 표적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전함 노스캐롤라이나가 있기는 하지만, 사보섬 해전에서 보여준 미 해군의 오판을 보면 엔터프라이즈와 다른 항공모함이 있었다고 승리가 아니라, 표적함 신세로 제8함대의 산소어뢰 공격을 받고 격침되는 대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이 해전의 패배로 인해 미군은 일본군에게 과달카날의 초반 제해권을 빼앗기고 미 해병대는 과달카날에 고립되어 일본군의 집중공격을 당하게 되었으며 함대 사령관인 플레처 제독은 철수명령을 내린 탓에 온갖 비난을 받게 되었다. 플레처 제독이 철수명령을 내린 이유는 엔터프라이즈를 비롯한 항공모함 전력을 보존하기 위해서였고, 미군은 어떻게든 제해권을 되찾고 해병대를 구해내야 했다. 이렇게 해서 태평양 전쟁의 과달카날 전역이 시작된다.

 

동부 솔로몬 해전

 

사보섬 해전의 패배로 고립 상태에 빠진 미 해병대는 헨더슨 비행장을 완성하고 공중과 해상에서 지원 병력과 물자를 보급 받아 전력을 보강하여 이후 테나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일본군의 공격을 버티어냈고 8월 중순이 지나 일본군은 추가적인 병력과 함대를 파견하였고 이 움직임을 파악한 미군은 제61임무부대와 제17임무부대를 파견, 제61임무부대에 소속된 엔터프라이즈는 병력수송함대를 동반하고 남하하는 일본함대를 저지하기 위해 새러토가와 함께 8월 24일 동부 솔로몬 해전(2차 솔로몬 해전)에 참가했다. 당시 항공모함이 소속된 임무부대는 새러토가, 엔터프라이즈, 와스프로 구성된 제61임무부대와 하와이를 지키고 있던 호넷 중심의 제17임무부대로 동부 솔로몬 해전 당시 와스프 중심의 제18임무부대가 해상급유를 받기 위해 전열에서 이탈하여 해전에 참가하지 않았고 호넷 중심의 제17임무부대는 솔로몬 제도로 이동했지만, 합류가 늦어 해전에 참가하지 않았다.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엔터프라이즈는 적 정찰기에 발견 되어 집중 공격을 받게 되었고 3발의 명중탄을 제대로 맞아 이 해전에서 엔터프라이즈는 사망 74명, 부상 95명이란 함생 중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게다가 명중탄에 조타 기능 상실로 제자리에서 뱅뱅 돌고 있던 엔터프라이즈를 끝내기 위해 적의 추가 공습 시도가 이어져 요크타운급 항공모함 중 두 번째로 저승길을 건널 뻔 했으나 스콜 덕분에 적이 엔터프라이즈를 찾지 못하는 행운이 있었고 조타가 되지 않는 최악의 상황에서 끝끝내 다시 복구를 해냈지만 더 이상 싸우기 힘든 상황이라 후퇴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군은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전략적 승리를 거머쥐지 못했다. 엔터프라이즈를 쫓아낸 뒤, 쇼카쿠와 즈이카쿠로 편성된 일본의 주력 항모전단이 그냥 퇴각해버린 것. 문제는 과달카날로 가던 일본군 수송선단을 놔두고 후퇴했다는 거다. 원래 이 수송선단은 일본 항공모함 류조가 공중엄호를 제공할 계획이었는데, 일본 항모전단을 지휘하던 나구모 주이치가 엔터프라이즈를 잡는다며 류조를 미끼로 던져서 침몰시켰다. 항공모함이 모두 후퇴했으니 제공권은 자연스럽게 핸더슨 비행장을 소유한 미군에게 넘어감에도 불구하고 일본 수뇌부는 계속해서 나아갈 것을 명령했다. 수송함대를 호위하던 일본군 제8함대와 제2수뢰전대는 안간힘을 썼지만 제2수뢰전대 기함 진츠가 폭탄을 맞아 큰 피해를 입었고, 구축함 1척과 수송함 1척을 잃은 끝에 퇴각해야 했다. 일본군은 해전에서 이기고도 제해권 절반을 빼앗긴 것이다.

 

자력으로 9월 10일 진주만에 귀환한 엔터프라이즈는 즉각 수리를 받고 10월 23일에 남태평양으로 돌아와 8월 31일 초계 중 적 잠수함 뇌격으로 동력 계통이 대파당한 새러토가와 9월 15일에 침몰한 와스프를 뒤로하고 혼자 남아 전선을 지키고 있었던 호넷과 합류하게 된다. 그리고 새러토가에서 지휘하다가 적 잠수함 뇌격으로 부상한 플레처 제독을 대신해서, 윌리엄 홀시 제독이 함대를 지휘하게 된다.

 

산타크루즈 해전

 

엔터프라이즈 함생 최대의 위기였던 시기로 1942년 10월 26일에 벌어진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일본군은 항공모함 4척(쇼카쿠, 즈이카쿠, 준요, 즈이호)를 끌고 왔고, 엔터프라이즈는 자매함 호넷과 함께 전투에 돌입한다.

 

본격적인 전투가 일어나기 전 25일 아군 정찰비행정에서 보내온 정보를 바탕으로 적함대를 찾기 위해 돈틀리스 12대로 구성된 정찰대와 29대로 구성 된 공격대를 적함대가 목격된 지점에 보냈으나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한 상태라 결국 아무런 성과 없이 귀환해야했고 이때 야간착함 상황에 직면하게 되어 엔터프라이즈는 1대가 비행갑판에 불시착, 6대가 부근 바다에 불시착하여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7대의 함재기를 손실하는 등 석연치 않은 징조들이 있었다.

 

그리고 26일 전투 당일, 엔터프라이즈는 다시 돈틀리스 16대로 구성 된 정찰대를 보내어 그 중 2대가 적함대를 찾아내는 것에 성공하였고 곧장 즈이호에 급강하 폭격을 시도하여 비행갑판에 손상을 입혔다. 하지만 적함재기는 이미 전기 출격하여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을 노리고 오는 중이었다.

 

적함대를 발견한 미함대 측도 공격대를 보내기 시작하여 제1, 3차 공격대는 호넷 편대 제2차 공격대는 엔터프라이즈 편대로 구성 되어 있었다. 호넷의 편대와 함께 일본군 함대를 찾다가 일본의 공격대와 마주친다. 처음엔 서로 무시하고 지나가는 듯 했으나 히다카 모리야스 소좌가 이끄는 즈이호의 전투기대가 갑자기 반전해 엔터프라이즈의 공격대를 덮쳤다. 이때 다시 한 번 6대의 함재기를 손실했는데 그중 하필 지휘관기가 2대나 끼어있었다.

 

이렇게 엔터프라이즈가 제대로 된 전투 전부터 함재기 손실을 입긴 했지만 일본군의 첫 공격은 엔터프라이즈가 스콜에 가려져 있는 상황이었기에 호넷에 집중되었다. 호넷은 일본군에게 집중 공격을 받고 있는 모습이 15km 떨어진 엔터프라이즈에서도 “아 호넷이 위기구나...”라고 할 정도로 잘 보였으나, 그 정도로 호넷에만 공격이 집중된 후에야 일본기 하나가 엔터프라이즈를 발견했고, 그 소식에 놀란 나구모는 바로 엔터프라이즈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당시 엔터프라이즈 주변을 맴돌며 CAP(Combat Air Patrol, 전투 공중초계) 중이던 전투기가 있었지만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요격하기에는 함대와 너무 가까워 적기를 놓치게 되었고 일본군 공격대는 함대 상공에 도달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엔터프라이즈는 폭탄 두 발을 얻어맞았지만, 살아남기 위한 격렬한 회피 운동을 하여 지근탄 두 발과 어뢰 아홉 발을 회피하고, 전함 사우스다코타를 비롯한 호위 함정의 지원과 모함을 지키기 위해 방공망 안으로 목숨을 걸고 들어온 함재기들과 스콜에 가려져 적의 공격이 분산된 덕분에 엔터프라이즈는 구사일생 할 수 있었다.

 

적의 공습을 버틴 엔터프라이즈는 일본군 공격대의 집중 공격을 받아 빈사 상태에 빠진 호넷과 자신의 함재기들을 수용하기 시작했으며 적정 대수인 85대를 넘어가게 되어 함재기를 수용할 공간이 부족하다는 경고가 나왔지만 착함유도장교는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 착함을 유도했다. 승조원들은 전방 엘리베이터가 손상으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함재기 수용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사투를 벌였고 수용 결과 95대의 함재기를 채우게 된 엔터프라이즈는 적의 공격에 대단히 취약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현 상태로는 전투할 수 없다고 판단한 킨케이드 제독은 전선 이탈을 명하게 된다.

 

엔터프라이즈는 빈사 상태에 빠진 자매함 호넷을 전장에 남겨둔 채 이탈하였고, 호넷은 예인되어 전장에서 이탈할 수도 있었겠지만, 일본군의 추가 공격에 버틸 수가 없었고 결국 홀시 제독은 호넷을 포기한다. 미군은 호넷을 처분하기 위해 포탄과 어뢰를 호넷에 잔뜩 쐈지만, 호넷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안 가라앉았고, 일본 해군 함대가 다가오자 결국 미군은 호넷을 버려두고 도망쳐야 했다. 일본군은 방치되어 있던 CV-8 USS 호넷함을 어떻게든 노획해보려고 했으나 손상이 너무 심해서 결국 뇌격으로 처분했다.

 

이 해전에서 사망 44명, 부상 75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방 엘리베이터가 작동 불능에 명중, 지근탄에 선체가 손상된 엔터프라이즈는 어쩔 수 없이 수리를 위해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 부닥친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요크타운이 침몰당하고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호넷 역시 침몰당하며 이제 3척이었던 요크타운급 항공모함 중 엔터프라이즈 홀로 남게 되었다. 이때 엔터프라이즈 승무원들은 비행갑판에 Enterprise VS Japan란 글을 게시해 놓아 당시의 심정을 표현했다고 한다.

 

이 해전 이후 미 해군의 상태는 진주만 공습 이후 가장 급박한 상황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개전 직후 가지고 있던 정규 항공모함 7척 중 어뢰를 맞아 수리를 위해 전선에서 이탈한 새러토가와 대서양에서 활동 중인 레인저를 제외하면 미 해군에는 항공모함이 하나도 안 남았다. 이때 일본 해군은 엔터프라이즈를 붙잡아서 침몰시키려고 했으나, 빈사 상태에 빠진 호넷 함을 전장에 남겨 둔 채 이미 전선에서 이탈하였고 일본 해군으로서는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 해전으로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고 말았다. 쇼카쿠는 대파되었고 즈이호가 중파되었으며, 즈이카쿠와 준요는 무사했지만 다수의 비행대를 잃었다. 일본 항모전단의 항공세력이 사실상 와해된 것이다. 결국 일본군은 쇼카쿠와 즈이호, 즈이카쿠를 일본으로 돌려보냈고, 과달카날에 남은 것은 함재기도 모자란 준요 한 척 뿐이었다. 그리고 엔터프라이즈가 한계치를 넘어서면서 수용한 함재기들과 파일럿들은 살아서 돌아갔기에 베테랑 파일럿들의 대다수를 잃은 일본군과 달리 나중을 기약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 해전에서 일본군은 값비싼 희생을 치러 전술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 과달카날은 일본군에 함락될지도 모를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과달카날의 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엔터프라이즈는 11월 11일에 수리작업 중인 베스탈 함의 승조원을 태운 채 가용 가능한 마지막 미 해군 태평양 함대 항모부대가 되어 버린 전함 워싱턴 및 사우스다코타와 몇 척의 순양함, 구축함으로 구성된 제16임무부대(Task Force 16)에 복귀하여 출항 11월 13일, 과달카날 해전(3차 솔로몬 해전)에 참가한다. 이 TF16에는 항모 엔터프라이즈 말고도 전함 워싱턴과 사우스다코타 역시 과달카날에서 마지막 가용 전함들이었다.

 

11월 13일 새벽에 1차 과달카날 해전이 벌어졌고, 아직 엔터프라이즈가 도착하지 못했기에 미 해군은 전함 히에이를 필두로 한 막강한 일본 함대에 맞서다가 큰 피해를 입었다. 일본함대를 일단 저지하기는 했지만, 11월 14일 새벽에 일본군 제8함대가 핸더슨 비행장에 나타나서 야간포격을 가해온다. 루즈벨트 대통령조차도 이 소식을 듣고 과달카날에서 철수하는 걸 검토했을 지경. 그러나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던 제8함대 앞에 엔터프라이즈가 보낸 함재기들이 나타났고, 엔터프라이즈가 격침된 줄 알았던 일본군은 혼비백산했다. 아오바는 에스페란스 곶 해전에서 대파되었기에 현장에 없었지만, 기함 초카이와 키누가사는 엔터프라이즈 함재기들의 집중공격을 받았고 초카이는 중파, 키누가사는 침몰했다. 제8함대의 다른 배들도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하면서, 사보섬 해전의 굴욕은 씻겨졌다.

 

11월 14일 밤, 일본군은 다시금 핸더슨 비행장을 공격해왔지만, 엔터프라이즈를 호위하던 전함 사우스다코다와 워싱턴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불행히도 사우스다코다가 전기계통의 고장을 일으키는 바람에 제대로 싸울 수 없어 위기에 몰렸지만, 일본군의 공격은 다행히 사우스다코다를 침몰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전함 워싱턴이 일본군 기함 기리시마를 7분만에 박살냈고, 일본 함대는 워싱턴 한 척에게 밀려 도망쳤다. 엔터프라이즈의 호위를 맡은 전함의 힘을 보여준 순간이었다.

 

그리고 11월 15일 아침, 일본군은 수송선단을 과달카날에 상륙시켰지만, 엔터프라이즈의 비행대는 헨더슨 비행대와 연계작전으로 수송선들을 몽땅 박살을 내버렸다. 이 승리로 과달카날의 제해권과 제공권은 미군에게 돌아갔고, 일본군은 과달카날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과달카날 해전 이후

 

엔터프라이즈는 새러토가가 1942년 11월 말에 복귀할 때까지 태평양에서 실질적으로 활동 가능한 유일한 미 해군 정규항모로 전선에 남아 있었다. 1943년 1월, 새러토가와 함께 과달카날 해역에서 임무를 수행 중이던 엔터프라이즈는 일본군의 항공기 공격에 대파되어 인양 중인 중순양함 시카고를 지키기 위해 전투기를 파견하였고 렌넬 섬 해전이라 불리게 되는 다시 함선을 공격하기 위해 온 G4M ‘베티’ 편대와의 전투가 일어났다. 이때 적의 폭격기를 격추하고 시카고를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으나 결국 시카고를 지키지 못하고 말았다.

 

1943년 2월에 대혈투가 끝나 과달카날을 미군이 완전히 확보하고 엔터프라이즈는 에스피리투산토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1943년 5월에 진주만으로 귀환하여 신규 비행대 훈련에 힘쓰던 중, 1943년 5월 27일에 미합중국 대통령이 니미츠 제독에게 감사장을 수여한다. 이것은 미군 항공모함 중에서는 사상 최초였다.

 

1943년 7월에 엔터프라이즈는 본토로 귀환해 10월까지 대대적인 수리를 받았으며 그동안 전력화가 완료된 미기동함대의 새로운 중핵이 될 에식스급 항공모함과 함께 1943년 11월에 출격, 길버트 제도와 마샬 제도에서 활약한 후 1943년 12월 9일에 진주만으로 귀환한다.

 

1944년 1월에는 마셜 제도 상륙작전을 지원하고, 2월에는 트럭 섬을 공습하는 등 상륙작전 지원과 양동공격 임무를 맡았다. 이후에도 비스마르크 제도, 케롤라인 제도, 팔라우 제도, 뉴기니아 섬 등 태평양 일대를 돌아다니며 상륙작전을 지원했다.

 

필리핀 해 해전

 

1944년 6월 19일, 엔터프라이즈는 에식스급 항공모함들과 함께 필리핀 해 해전에 참가했다. 일본군도 엔터프라이즈에 맞서 쇼카쿠를 포함한 정예 항모전단을 내보냈지만, 당연히 엔터프라이즈가 이겼다. 워낙 공중전이 일방적이었기에 파일럿들이 “칠면조 사냥 같았다”고 인터뷰를 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엔터프라이즈와 몇 번이나 싸웠던 쇼카쿠는 엔터프라이즈와 싸우기도 전에 미군 잠수함에게 걸려 침몰되었다.

 

그러나 필리핀 해 해전 종료 직후, 해전 때보다도 큰 위기가 닥쳐왔는데 돌아오는 과정에서 시간이 너무 늦어 파일럿들이 밤바다를 비행해서 돌아와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파일럿들을 잃은 항모도 꽤 되었고 워낙 절망적인 상황이라 당시 파일럿이었던 한 참전용사는 그 일에 대해 인터뷰를 할 때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엔터프라이즈가 포함된 함대를 지휘하던 마크 미처 제독은 함대의 목숨을 걸고 전 함선에 불빛을 밝힐 것을 지시하는 도박을 감행한다. 야간에 함재기도 없는 항공모함, 즉 호위 없는 함대가 떡하니 불을 밝힌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가장 잘 알면서도 파일럿들을 위해 함대의 목숨을 걸고 야간등화를 켜라고 명한 것이었다. 이런 마크 미처 제독의 목숨을 건 도박은 멋지게 성공하여 대부분 무사히 귀환했으며, 엔터프라이즈에서 돌아오지 못한 파일럿은 제10항모비행단 지휘관인 윌리엄 R. ‘킬러’ 케인 중령 단 한 명 뿐이었고 그도 동월 22일에 아이스크림 25갤런(약 95리터)과 맞바꿔 구조된다. 아이스크림이 언급된 이유는 마크 미처 제독이 구조를 장려하기 위해 ‘파일럿을 구조해오는 배에는 아이스크림을 더 배급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해당 파일럿이 구조되었을 당시, 파일럿을 구조한 배글리급 구축함 패터슨(DD-392, USS Patterson)는 통신 과정에서 ‘이 파일럿은 아이스크림 몇 갤런인가? 이 파일럿은 비행대대장이므로 아이스크림을 좀 더 많이 줘야 한다.’라며 협상까지 시도했다. 물론 이는 자신들의 공적을 자랑하기 위한 농담이고, 항공모함으로서는 매우 저렴한 금액이었다.

 

7월에 휴식을 위해 진주만으로 돌아갔다.

 

8월 24일에 재출격한 엔터프라이즈는 케롤라인 제도, 오가사와라 열도, 오키나와, 대만, 필리핀을 공격했다.

 

레이테 만 해전

 

1944년 10월에는 레이테 만 해전에도 참가했다. 이 해전에서 일본군은 레이테 섬으로 전함과 순양함들을 돌격시켜 미군 상륙부대를 파괴하려고 했지만, 세계 최대의 전함 야마토와 무사시를 거느린 구리다 함대는 엔터프라이즈와 에식스급 항모들로 구성된 제3함대에게 얻어터진 끝에 무사시를 잃고 퇴각한다. 그러나 북쪽에 오자와 함대가 있음이 밝혀졌고, 여기에는 진주만 공습 이후 살생부 명단에 올라간 즈이카쿠를 포함해 4척의 항모와 2척의 항공전함이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윌리엄 홀시는 매우 강력한 적 함대가 나타났다고 판단하고, 오자와 함대를 박살내기 위해 제3함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진격한다.

 

그러나 이들은 함재기조차 없는 미끼에 불과했다. 마침 진주만 공습에 참여한 항모 중에서는 유일한 생존함인 즈이카쿠도 있었으므로, 일본군은 오자와 함대(기함 즈이카쿠)를 미끼로 내걸었다. 여기에 낚인 홀시가 제3함대를 이끌고 쫓아오면, 그 틈에 레이테섬으로 돌입한다는 계획이었다. 홀시가 미끼를 문 사이에 일본의 모든 함대가 레이테섬으로 돌격했고, 제일 먼저 16전대(기함 아오바)가 레이테섬에 도착해서 증원병력을 내려놓는 것에 성공한다.

 

그러나 레이테섬에 도착한 건 16전대뿐이었다. 니시무라 함대는 울덴도르프 제독의 함대에 걸려 괴멸되었고, 시마 함대는 진입을 포기하고 도주했으며, 일본군의 주력 함대이자 전함 4척을 보유한 구리다 함대는 미군의 2선급 함대인 태피 3하고의 전투를 중단하고 도주하여 패배했다. 그리고 미끼로 던져진 즈이카쿠를 비롯한 일본 항모 4척은 제3함대에 침몰당했고, 엔터프라이즈와 즈이카쿠의 오랜 악연도 끝났다. 일본군이 레이테섬 진입에 실패하고 도주했으므로 해전은 미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유일하게 레이테섬에 진입한 16전대는 탈출하다가 미군의 공격으로 괴멸되었다. 그러나 아오바는 10월 29일, 미 해군 제3함대의 공습과 잠수함들의 공격을 뚫고 일본으로 탈출했다. 12월 24일에는 야간 전투기 훈련도 시작했다.

 

이오지마 그리고 오키나와

 

1월에 출격한 엔터프라이즈는 Carrier Division Seven 소속이 되어 정규항모 새러토가, 경항모 인디펜던스와 더불어 5월 14일 전열에서 이탈 전까지 야간 및 주간 작전에 종사하게 되었다. 일본과 인도네시아를 잇는 교통로를 자르고, 이오지마 전투에 참여한 아군을 지원한다. 이 무렵 일본군의 공격으로 약간의 손상을 입었고, 아군의 오발로 피격을 당하는 등 손상을 입어 울리티로 가서 수리를 받았다.

 

4월 5일에 엔터프라이즈는 오키나와 전투에 참여한 미군을 지원하기 위해 출격한다. 이 무렵 카미카제 공격 지근거리 2번에 손상을 입어 울리티로 가서 수리받고 다시 돌아와 작전을 수행하던 엔터프라이즈는 5월 14일에 26기의 일본 항공기의 내습을 받지만, 6기를 대공포화로 격추하고 19기는 상공초계기에 의해 격추되었다.

 

하지만 도미야스 슌스케(富安俊助) 중위의 1기가 대공포의 포화를 피해 구름 속에 몸을 감춘 후 시시각각으로 구름사이 얼굴을 비친 엔터프라이즈의 위치를 확인하며 살아남았다. 그리고 오전 6시 56분, 이 1대의 기체는 엔터프라이즈를 향해 단기로 자살돌격을 감행했다. 어지간하면 개죽음으로 끝날 돌격이었지만 이 사람은 집중포화를 받는 와중에 함 바로 위에서 180도 좌측으로 선회하여 배면비행의 상태로 급강하해 전방 함재기 엘리베이터 후방에 돌입했다. 덤으로 돌입순간에 폭탄을 기체와 분리해서 폭탄이 격납고에 직격하도록 하는 등 피해면적을 확산시키는 재주까지 부렸다.

 

이 공격으로 엔터프라이즈는 400피트(약 122m) 상공까지 연기가 피어오를 정도로 큰 피해를 보았는데 폭발로 전방의 엘리베이터가 120m 상공까지 솟구쳤고, 비행갑판과 격납고 등 선체가 손상을 입고 화재 발생 및 파이프 손상 등으로 물이 흘러나와 침수가 일어났으며 사망 13명, 부상 68명의 사상자를 냈다. 피해의 심각성에 비하면 사상자가 적은 편이었지만 동부 솔로몬 해전의 사망 74명, 부상 95명, 산타크루즈 해전의 사망 44명, 부상 75명 다음으로 많은 사상자였다. 엔터프라이즈 승조원들은 약 30분 만에 화재를 진압하고 침수된 구역에서 물을 빼는 등 추가 피해를 막으며 작전을 수행했다. 제58임무부대 사령관 마크 앤드류 미처 중장은 자신이 본 가장 훌륭한 데미지 컨트롤이었다고 엔터프라이즈의 승조원들에 대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전방의 엘리베이터 사용 불능 같은 선체 손상 등으로 인해 대대적으로 수리할 필요가 있어서 제대로 된 수리를 위해 본국으로 귀환하여 수리와 창정비(MRO란 항공기가 고유의 신뢰성 및 안전성을 유지하면서 성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항공기를 정비(maintenance), 수리(repair), 재생(overhaul))에 들어간 와중에 종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사실상 태평양 전쟁사 = 엔터프라이즈의 함생이라 보면 된다. 태평양 전쟁에서 적어도 해전에 관해서는 둘리틀 특공대 호위 임무 때문에 불참한 산호해 해전 정도를 제외하고 엔터프라이즈가 참가하지 않은 전투 중 주요 해전은 사보섬 해전밖에 없다. 이하는 참전기록과 중순양함 이상의 주요 전과. 물론 이것 말고도 여러 경순양함, 구축함, 상륙함등의 승조원들을 수중고혼으로 만들어 버렸으며 지상지원이나 항공기지 공습 등에서도 막대한 전과를 올렸다.

 

태평양 전쟁 기간에 여러 전역 및 작전에 참여하여 태평양 전쟁 종군훈장 20개를 받았다. 이 훈장은 미 해군이 격전에 참가한 함정에게 수여하는 훈장인데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미 해군 군함 중에서 가장 많이 받았다. 다른 미 해군 항모보다는 평균적으로 7개가 더 많고 모든 해군 함정을 포함해도 2개가 더 많다. 그 외에도 미합중국 대통령 부대 표창, 필리핀 공화국 대통령 부대 표창, 필리핀 해방 훈장, 영국 왕립 해군 해군성 깃발, 미 해군 해군성 훈장, 미군 국방 훈장, 미국 전역 훈장, 제2차 세계대전 승전 훈장, 태평양 전쟁 훈장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여 기록을 가지고 있다. 특히 영국 왕립 해군 해군성 깃발(British Admiralty Pennant)은 자국인 영국 해군도 수상하기 힘든 깃발이라 타국 해군에 수여된 사례가 엔터프라이즈 단 1척뿐이다. 사실 장기간 현역 활동한 함선의 경우 수많은 훈장을 받긴 하지만 한 전쟁에서 이정도로 받는 건 드물었다.

 

당연하지만 일본군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엔터프라이즈를 침몰시키려 했다. 일단 엔터프라이즈가 침몰되면 한동안 태평양에 미군 항공모함이 없을테니 그 동안 방어 병력을 증강시키거나 새로운 곳을 침공할 수 있게 되며, 엔터프라이즈의 경우에는 계속 두들겨맞으면서도 반격을 매섭게 하는 바람에 이미 전술적인 면을 넘어서 전략적인 견지에서도 절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일본군에게 지속적인 큰 피해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일본군은 엔터프라이즈를 침몰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가했다. 덕분에 엔터프라이즈는 이들의 어뢰를 피하기 위해 항공모함을 구축함처럼 선회시킨다든지 갑판에 폭탄이 명중해도 20분안에 화재를 진압하고 긴급 수리해서 항공모함을 회복시킨다든지 하는 일들을 많이 겪었다. 심지어 수리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도 재출격하는 등 엔터프라이즈의 함생 자체가 일본군의 공격으로 인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격전이 지속되던 태평양전쟁 중반기에는 아예 수리함의 승조원들이 엔터프라이즈에 눌러앉은 채 수리를 계속하기도 했고, 이것은 자매함 요크타운도 마찬가지였다.

 

엔터프라이즈가 이러한 험난한 해전들을 견뎌낼 수 있던 데에는 요크타운급의 설계도 한몫했다. 요크타운급의 약점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이 유효한 시절에 건조되어 배수량 제한으로 TNT 180kg에 대응하는 방뢰 능력(어뢰 공격에 대한 방어력)으론 부족하다는 점이었으나 대신 개방형 격납고로 인해 급강하 폭격에는 상당히 강한 편이었다. 이 개방형 격납고 덕분에 폭탄을 맞아도 폭발력이 공중으로 새어나갈 뿐 아니라 비상시에 폭발할 위험이 있는 물질들을 바로 바다로 버릴 수 있었다.

 

미 해군도 엔터프라이즈를 지키기 위해 여유가 생기는 대로 추가 개수를 하고, 항모 호위 전술을 새로 만드는 등, 이 함의 임무와 비중은 전쟁의 향방을 가를 정도로 커졌다. 당연히 미국에서는 언론의 영향도 있고 하여 ‘항공모함 = 엔터프라이즈’라는 공식이 생겼고, 곧 엔터프라이즈는 미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이후 에식스급 항공모함과 함께 운영되었고 이전에 실험적으로 시도된 야간 공습에서 더 나아가 장기간 야간작전에 종사하여 오히려 나중에 취역한 신형 항공모함보다 더 힘든 업무를 맡게 된다. 1945년 5월 14일에 받은 피해로 전열에서 이탈 전까지 야간 공습 작전이라는 것이 항공모함에서 단발성이 아닌 지속해서 이루어진 것은 엔터프라이즈가 최초였다. 다만 이착함의 어려움과 레이더에만 의지해 날아야 하는 야간 작전의 특성상 파일럿 손실이 있었고 야간뿐만 아니라 주간 임무도 있었다.

 

종전 이후에는 각지의 미군을 귀환시키는 수송선으로도 활용되었다. 일명 ‘매직 카페트 작전(Operation magic carpet)’. 당시 배에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태우기 위해 승조원의 숫자도 기존 2217명 정도로 운용되던걸 500명으로 줄이고 격납고 데크에 침대를 설치하는 등의 조치를 하여 5000여명의 장병들을 승선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항공기 운용을 하지 않으니 일단 항공 관련 인원들이 전부 빠지고, 핵심적인 항해와 기관부 인원 및 그 잔류 인원에 적당한 지원부서 인원만 남기고 전투 중 대공포 등에 배치되는 인원 등을 하함시키면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굴리고도 남긴 한다.

 

이후 항모들이 점점 대형화되고 제트기로 바뀌기 시작한 함재기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는 엔터프라이즈는 거의 고철신세로 전락했다. 결국 스크랩처리가 결정된다. 엔터프라이즈 함에서 복무했던 해군 장병들은 ‘엔터프라이즈 협회’를 만들어서 엔터프라이즈를 기념함으로 만들려고 했고, 윌리엄 홀시 제독 역시 협회와 협력하여 모금 운동을 전개했지만 돈이 부족했다. 미국 의회는 돈이 없다며 엔터프라이즈를 박물관으로 만드는 계획을 거부했고, 해군 역시 돈이 없었기에 엔터프라이즈를 더 이상 보존할 수 없었다. 결국 협회는 엔터프라이즈의 이름을 새로운 항공모함에 계승시키고, 일부 유물을 보존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1958년 엔터프라이즈는 멋진 마지막 항해의 장식 후 스크랩 처리된다. 스크랩을 담당한 노동자들 중에는 당시 엔터프라이즈 승조원 출신 참전 용사도 있었다고 한다. 이때 자신이 타던 또 하나의 고향같던 배가 해체되어 사라지는 걸 보고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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