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강유(徐庶, 202∼264년)
강유가 촉한에 남았던 이유
앞서 말했듯 강유는 위로 돌아오라는 가족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촉에 남는다. 정사의 서서전이나 정욱전에서 보듯 당대에는 가족의 요청이라면 적국에 있던 자라도 넘어 오는 것이 상례였다. 그럼에도 강유는 거절하고 촉에 남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원래의 소속 국가였던) 위나라를 공격하는 북벌에 가장 적극적인 촉한의 인물이었고 마지막까지 촉을 부흥시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기까지 한다. 촉 입장에서는 충신이겠지만 위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으뜸가는 역적이다.
당대의 풍습과 어긋나게 강유가 왜 촉에 남아 일생을 촉을 위해 충성을 바쳤는지 당대에 강유가 자신의 행동을 시원스럽게 설명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두고두고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 강유가 자신을 위가 아닌 한의 신하로 생각했을 가능성
◦신빙성이 낮다. 이 주장은 제갈량이 강유가 투항한 직후 장예와 장완에게 편지를 보내 강유를 칭찬할 때 '한실(漢室)에 마음을 두고 있고'라는 말을 한 것이 최대의 근거이다. 그러나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 마준에게 촉군을 막기 위해 기현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진언하고 마준을 따라 상규로 들어가려 했다는 점으로 미뤄볼 때 신빙성이 낮다. 처음부터 자신을 한의 신하로 생각했다면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 전황은 마속이 가정에서 장합에게 패하기 전까지 촉군에 유리했으므로 가족들을 데리고 촉군에 투항했어야 앞뒤가 맞다. 제갈량의 편지에서의 내용은 그냥 강유가 능력은 뛰어난데 항장 출신이라는 이유로 중용되지 못하면 촉에 손해니까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에 근거없는 미사여구를 덧붙인 것일 가능성이 크다.
•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북벌을 이용했을 가능성
◦ 신빙성이 낮다. 강유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당귀를 받았을 때, 위에서 설명했듯 당시의 관습대로 위나라로 돌아가버리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 제갈량에 대한 개인적 충성심 + 위나라에 대한 원한
◦현재로서는 가장 신빙성이 높은 이야기이다. 위에 있는 '강유의 귀순 과정 재구성'을 살펴보면 강유는 상당히 억울하게 위나라와 고향인 기현으로부터 버림받았다. 강유의 아버지는 위나라를 위해 싸우다 전사했으므로 강유는 오늘날로 따지면 국가유공자 집안의 사람이며, 강유 본인도 어떻게든 위나라에 충성해보려고 '기현으로 돌아가셔야 한다.' 고 상관인 마준에게 진언도 하고 상규로도 따라가보려 했다. 그럼에도 내쳐졌으니 당연히 위나라에 대한 원한이 사무칠 수 밖에 없다. 그에 비해 제갈량은 그야말로 강유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하며 기대를 걸었다. 제갈량의 강유에 대한 기대는 예사로운 수준이 아니다.
실제 강유의 촉한에서의 강유의 관직생활을 정리하면 27세에 창조연/봉의장군에 봉해지고 당양정후가 더해지고 29세에 정서장군 행후호군으로 봉해진다. 36세엔 대사마 장완에 따라 사마로 봉해지고 41세에 진서대장군+영(領)양주자사로 봉해졌다. 45세엔 위장군을 달고 비의와 더불어 녹상서사를 역임했으며 51세엔 독중외군사, 54세엔 마침내 대장군으로까지 임명된다.
강유전의 기록들을 참고할 시에는 이러한 결과가 나오는데 항장으로선 매우 순조로운 출세가도라고 볼 수 있다. 투항하자마자 제갈량과 더불어 유비의 고명대신인 이엄이 맡았던 봉의장군이 되게 하였고, 위나라에서 하던 일과 비슷한 업무를 맡겨 촉에 적응하도록 배려하였으며, 다름아닌 그 조운과 장비가 활약하던 지역이라는 상징성이 있는 당양의 정후로 봉해지지 않나, 29살의 젊은이를 정서장군으로 봉했는데 조운에 버금가는 명성을 갖고 있다던 진도가 최종적으로 오른 관직이 정서장군이다. 항장을 곧바로 중진급 정서장군으로 꽂은 셈이다.
단적으로 고평릉 사변 이후 사마씨가 정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사마소가 임시 정서장군에 오른게 40대 이후다. 물론 관직체계가 촉과 위와 다르다보니 1:1에 비교할 수 없지만 강유가 어마어마하게 일찍 출세했다고 볼 수 있다. 강유 자체도 군사적으로 장완과 비의를 이은 3인자 정도의 포지션에 꾸준히 임했다. 계한보신찬을 참고할 시에는 기록이 부족한 촉한의 거물들이 여럿 수록되어 있는데 인재가 아무리 부족하다고한들 장완과 비의를 이은 3인자 포지션을 어린 항장이 꿰찼다는 것은 단순히 인재부족으로 설명할 수 없다.
5차 북벌에서 강유는 승상+녹상서사+익주목 제갈량과 지휘부에서 사마의의 견벽수비 전략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거기에 주위 사람들, 특히 다름 아닌 최측근인 장완과 장예에게 ‘마량이나 이소도 강유에게 못 미친다.’ ‘능력이 뛰어나고 근면하다.’ ‘황제를 뵙게 해야 한다.’ ‘중앙군 5~6천명을 맡겨야 한다.’ 며 중용할 뜻을 밝혔다. 장예는 승상부에서 승상의 보좌관 최고 지위인 유부장사였고 장완의 경우에는 제갈량의 후계자로 익히 알려진 인물로 친형 제갈근 정도를 제외한다면 제갈량과 가장 많이 서신을 교환한 인물이다. 이들은 제갈량의 확고한 신임을 받고 있는 인물들로 볼 수 있는데 다름 아닌 그런 인물들에게 강유를 잘 봐달라고 한 것이다. 괜히 장완이 후일 강유의 군사적 재능을 신뢰해 그를 전폭지원하고 자신은 그를 뒷받침하겠다고 계책을 짠게 아니다.
강유가 먼 훗날 제갈량의 제자로 인식된데 있어선 이러한 승진가도가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게다가 오장원에서 제갈량은 만약에 위연이 후미를 맡지 않는다면 강유에게 퇴각에서 가장 중요한 후미를 맡도록 명하고 강유는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이와 더불어 제갈량 휘하에 이뤄진 출세가도에 제갈량 사후 강유가 실제로 군사 전문가로써 장완과 비의를 보좌하는 역을 맡았던데다가 항장에 낙하산인데도 이에 대한 반발이 아예 없었다는 점에서 ‘강유는 제갈량의 후계자이되 제갈량의 군사적 방면을 이어받은 후계자’로 인식해도 정사의 기록과 어느정도 부합한다. 진수만해도 강유를 장완과 비의와 같은 전에 함께 엮은 바이기도 하다.
갈 곳 없는 항장 출신이었던 강유에게는 그야말로 뼈에 새길 만한 은혜였으며,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제갈량 사후에도 그의 뜻을 이어받아 (비의, 장익 등 여러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북벌을 진행하고 그가 지키고자 했던 나라를 위해 일생을 바쳤다는 이야기가 개연성과 신빙성이 높다. 여기에 더하자면 원래 강유는 공명(功名, 공을 세우고 이름을 날림)에 뜻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을 버린 위로 돌아가는 것보다 아무런 공도 세우지 않았는데 자신을 높이 대우해주는 촉에 남는 것이 입신양명에 유리하다는 생각도 한 몫 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제갈량이 평생 충성한 유비를 만난게 27세인데 강유가 제갈량을 처음 만난게 27세이니 상당히 공교롭다고 할 수 있다.
강유가 가족을 버린 이유에 대한 소고
강유는 나쁘게 말해서 모친의 안위보다 자신의 출세, 자신의 신념만 중요시한 인물이라는 시각도 있다. 당장 손성부터가 ‘강유는 가족을 버렸는데 무슨 본받을 것이 있느냐?’라고 일갈했고, 강유의 행적에 대해서 손성의 의견을 모두 반박하며 강유를 옹호한 배송지 역시 이 부분은 손성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러나 '강유의 귀순 과정 재구성' 탭에 있는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꼭 그렇게 볼 수 만은 없는 여지가 생긴다.
강유가 어머니의 편지를 받고 당시 풍습 대로 위나라로 돌아갔다고 가정해보자. 투항자라는 꼬리표 때문에 출세에 제약이 걸리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강유가 기현 사람들에 의해 등 떠밀려 제갈량에게 항복 사절로 갔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강유 본인과 기현 사람들은 위나라 정부에 의해 몰살당할 수도 있다. 당연히 이 몰살당할 사람들 중에는 강유의 모친과 가족들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강유가 모친의 편지를 받고도 당대의 풍습과는 반대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나 딱히 자신의 촉 귀순과 충성에 대한 정당성을 말이나 글로 상세히 남기지 않은 것은 위나라에 남아있는 모친과 가족들을 살리기 위한 일환이었을 수도 있다. 강유 자신이 본의 아니게 투항하고 가족들의 설득에도 자신이 돌아오기를 거부하는 것이면 가족들이 사면받지 못하는 선에서 끝나지만, 돌아갔다가 기현이 촉에게 항복하려 했고 자신을 항복 특사로 보냈던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자신을 포함하여 전 가족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평가
강유에게는 낙곡 전투를 참전한 것은 물론이고 246년의 곽회, 하후패 격파, 이를 압도하는 도서 전투의 공로가 있었으나 호제와의 연계가 실패한 단곡에서의 패배가 오점이 되었다. 그러나 제갈서를 따돌리던 기동을 보면 그가 전술적으로는 훌륭한 장수였음을 보여준다.
낙곡 전투는 방어전에 왕평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소수군으로 험지에서 적의 발목을 붙잡는데에 있지 이를 실질적으로 섬멸한 것은 비의의 본대였고 왕평의 역할이 작은 것이 아니지만 왕평이 모루 역할을 했다면 비의는 더불어 망치 역할과 퇴로 차단의 역할을 충실히 했는데 그의 공로는 잘 언급되지 않는 면이 있다. 255년의 도서 전투의 경우에는 공격전에서 왕경의 수만군을 통째로 섬멸시킨 전투로 강유 자체가 총사령관으로 출전한 경우이기에 비의와 그 공을 갈라먹어야 하는 낙곡 전투의 왕평보다 지분이 훨씬 높다.
강유의 실질적인 전술적인 패배로 유추되는 것은 256년의 단곡 전투와 262년의 후화 전투 밖에 없으며, 나머지는 소소한 출혈이 있으되 큰 피해라고 단정짓기 어렵거나 잠시 맞붙은 다음 성과를 얻지 못하면 후퇴하는 경우,전술적으로 승리를 거두되 전략적으로 소득을 얻지 못한 전투들이었다. 그나마도 후화의 전투는 실제적 전과가 의심되는 기록이다. 강유의 북벌 전적에 대해서는 너무 두루뭉술하게 저평가 분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며 당대에 그 나름 대로 성과도 올렸으나 지나친 북벌정책 때문에 내부에서도 비판을 받았고 한편으로는 촉한 최후의 기둥으로 여겨졌던 것도 사실이다. 여러모로 평가가 갈리는 장군.
희힌하게 유독 국내에서는 강유의 전략 + 정략 능력이 저평가를 받지만 당시 강유의 상황을 고려하면 ‘전략/정략은 전술 능력보다 떨어진다’고 평하기도 그리 쉽지않다. 적국인 위나라와 비교하면 항상 국력, 군사적으로 열세적인 위치였고 항장이면서 군부의 1인자라는 자리는 정치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이고 아예 숙청 1위 대상이다. 강유를 흔히 제갈량의 후계자로 알고 있지만 실제는 제갈량의 직계 후계자 장완과 비위를 이은 3대이니 그쯤엔 내부의 경쟁자가 상당히 많은 편이였다. 즉, 판은 이미 시작부터 극단적으로 강유에게 불리한 상황이였음으로 사마의 부자처럼 아예 판을 뒤집어 엎지 않는한 강유의 유일한 선택은 전술적으로 전략/정략적으로 수세에 몰린 상황을 뒤집는 방법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악조건에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촉의 대장군으로써 지속적으로 위-촉의 열세를 뒤집으려는 노력을 전략-정략 부재로 폄하기 어렵다.
과거의 평가
정사의 저자 진수는 극정의 말을 빌려 강유의 장점을 논한 후 ‘강유는 대체로 문무를 갖추고 공명을 세우는데 뜻을 두었으나 군사들을 경시하며 군대를 남용하고, 분명하게 결단하였으나 주밀하지 못하여 끝내 죽었으니 작은 나라에서 요란하게 일을 벌인 것 때문이다’라고 비판했다. 이렇듯 정사의 평은 좋은 평과 나쁜 평이 갈린다. 애초에 정사 자체가 진나라에 우호적인 시각을 주로 반영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강유에 대한 정사의 평가가 유난히 우호적일 이유는 없다. 게다가 강유는 진수의 스승인 초주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일단 제갈량이 아직 공업을 이루기 전 젊은 시절의 강유를 보고 양주 최고의 인물이라면서 극찬한 건 위에도 나왔으니 이번엔 제갈량 시대 이후 한 세대 뒤인 강유 당대와 그 직후의 평가를 더 보자.
당시 촉(蜀)의 관속들이 모두 천하의 영준(英俊, 영민하고 준수함)이나 강유보다 나은 자는 없었다.
배송지 주 세어(世語)의 평가, 이는 세설신어에도 그대로 실려있다. 그런데 삼국지 집해에 실린 청나라 시대 학자 조일청(趙一淸)은 "蜀(촉) 위에 征(정) 자가 탈락된 것으로 의심된다"라고 하였다.(趙一淸曰, 蜀上疑落征字) 즉, 조일청의 견해에 따르면 세어의 기록은 촉한의 관속이 다 뛰어나지만 그 중에서도 강유가 으뜸이라는 소리가 아니라, '당시 촉을 정벌한(征蜀) 등애나 종회, 두예를 비롯 위진의 인사들은 모두 천하의 영준이나 강유보다 더 뛰어난 인물은 없었다'로 풀이된다는 것이다. 확실히 조일청의 해석이 문맥상 더 자연스럽기도 하고, 당시 위진에서 촉한의 인물 가운데 강유 이외에는 높이 평가하던 인물이 없었다는 걸 감안한다면, 게다가 아무리 공치사라 할지라도 망국의 신하들인 촉한의 인사들에게 굳이 “영준”이라 좋게 표현할 이유가 없기에 조일청의 해석에 더 무게가 실린다.
종회는 강유와 함께 밖으로 나갈 때는 같은 수레를 타고 좌정할 때는 같은 자리에 앉았다. 장사(長史) 두예에게 말했다,
“백약(강유)을 중원의 명사에 비교하자면 공휴(제갈탄)나 태초(하후현)가 그보다 더 낫지는 못할 것이오.”
종회의 평가
“강유는 본래 한 시대의 영웅이었지만, 나를 만났기 때문에 곤궁해진 것일 뿐이다.”
(주위의) 식견 있는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등애의 평가
“‘전란이 끊이지 않으면 스스로를 불태운다’고 하더니 백약을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지모가 적보다 뛰어나지 않고 역량도 적으면서 용병이 끊이지 않으니 어찌 스스로를 보존하리? 시경에서 말하는 ‘나보다 앞서지도 않고, 나보다 뒤서지도 않았다(不自我先, 不自我後)’라는 것이 바로 지금의 일을 가리키는 것이로다”
262년, 4년만에 적도로 다시 출격하는 강유를 보고 말한 요화의 평가
당장 강유와 직접 대적한 동시대의 등애나 종회도, 당대에 세간에 떠돌던 세설의 평가들도 모두 강유를 일세의 영걸로 평가했기 때문에 강유 당대의 평가는 정사보다 높았다고 짐작은 할 수 있다. 요화가 강유를 비판하긴 했지만 그렇게 말해놓고 끝까지 강유와 함께 북벌을 하고 위군을 막아낸 걸 생각하면 '이 녀석아 이제 그쯤 했으면 그만 좀 해라'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이고 또 손성의 진양추에 따르면 환온이 촉을 평정할 때에 촉의 여러 나이든 이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말하길 강유가 이미 항복한 뒤에 은밀히 유선에게 표를 올려 ‘종회에게 거짓으로 항복하여 섬기고 이를 틈타 그를 죽이고 촉 땅을 회복하고자 한다.'라고 말했으나 때마침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마침내 멸망되기에 이르렀으니 촉인들이 지금도 그를 안타깝게 여긴다고 하였다고 한다. 살아생전 촉한 사람들에게 비난도 받았던 강유였지만 그래도 그의 죽음은 촉한 사람들을 안타깝게 한 듯하다.
한편 동진의 간보는 '임금이 모욕을 당하고도 살았으면서 나중에 종회의 난에서야 죽었으니 애석하다, 죽더라도 올바로 죽었어야 하지 않느냐' 정도로 평가했지만 비슷한 시기 인물인 손성은 강유를 비난한것이 가장 심하였다. 손성은 잡기의 저자로서, 강유의 당기-원지 일화의 출처가 잡기다. 손성의 강유평은 다음과 같다.
극정의 말은 잘못되었다. 무릇 선비란 백 가지의 행동과 많은 일을 처리하는 것이 뛰어나더라도 충(忠), 효(孝), 의(義), 절(節)을 다하는 것을 최고의 행동으로 삼는다. 강유는 위를 채찍질한다는 명분으로 촉 왕조를 바깥에서 분주하게 만들었으니 군주의 뜻을 어기고 자신에게 유리한 일만 했으니 충이라고 말할 수 없다. 어머니를 버리고 살 길을 찾았으니 효라고 말 할 수도 없다. 자신이 섬겼던 위나라를 해쳤으니 의라고 말할 수도 없다. 패하고도 죽음을 피하려고 했으니 절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또 덕정을 베풀지 않고 전쟁을 자주 하여 백성들을 피로하게 했으며, 어명에 따라서 임무를 맡았으나 적을 막지 못했으니 지혜와 용기가 있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 여섯 가지 가운데 강유는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그는 사실 위에서 살 길을 찾아 도망친 신하에 불과했다. 이러한 망국의 혼란을 초래한 인물을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된다고 했으니 사람들을 혼란하게 만든 말이 아닌가? 강유가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청렴하게 살았다고 하지만, 이는 도둑이 훔친 재물을 나누어주면서 의롭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손성의 평은 극정의 평에 대한 답이라 할 수 있으니, 진수가 인용했던 극정의 평을 보아야 할 차례다. 극정은 강유에 대하여 우호적으로 평하였다.
강백약은 상장(上將)으로서의 중임을 맡았지만, 초라한 집에 살면서 불필요한 재산을 모으지 않았다. 측실에서는 첩잉(妾媵,첩실)을 총애함이 없고 후정에서는 음악을 즐기는 일이 없었으며 의복은 제공된 것을 입고 수레와 말은 준비된 것을 타고 음식은 절제되어 사치하지도 인색하지도 않았으며 관에서 공급하는 비용은 손에 주어지는 대로 소진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남을 질책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버리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만족을 알던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만 칭찬하고 실패한 사람은 비난한다. 또한 높은 사람에게 기대고 낮은 사람은 무시한다. 많은 사람들이 강유가 종회와 같은 하찮은 인간에게 의지하여 자신과 종족을 멸망시켰다고 비난하고 그의 다른 측면은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춘추》에서 그릇된 사람을 폄하하는 것과 전혀 다른 짓이다. 강유는 배우기를 좋아했으며, 성실, 청렴, 소박, 검소를 행동의 준칙으로 삼았으니 한 시대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송대의 배송지는 다음과 같이 손성과 극정의 평을 종합한다:
신이 보건대 극정의 이 평가는 칭찬할만한 것을 취했지 강유가 모든 측면에서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한 시대의 모범이 될 만한 것은 그가 학문을 좋아했고 검소하게 살았다는 것뿐입니다. 또 강유전이나 위략에선 강유가 본디 배반하려는 마음이 없었지만 내몰려서 촉에 귀순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손성이 어머니를 저버렸다고 비난한 것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머지는 지나치게 가혹하게 질책하고 폄하한 것이므로 손성이 극정을 비판할 이유는 없습니다.
배송지는 또 손성이 진양추에서 촉인들이 강유를 안타깝게 여긴다는 얘기를 듣고 '강유는 절의도 지키지 못하고 촉주를 옹위하지도 못한 주제에 뒷날 도모할 계책을 생각하다가 이랬다 저랬다 했고 기대하기 어려운 기회에서 물정에 어긋나는 것을 희망함으로써 나라를 쇠약하게 만들며 삼진(三秦, 관중關中)에서 여러 번 군세를 과시하였고, 이미 나라가 멸망한 뒤에 이치를 넘은 대단한 성공을 바랐으니 또한 어리석지 않은가!'이라며 비웃었었던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단의 예를 들어가며 반박했다.
신 송지가 보건대, 손성이 강유를 비난하는 말이 또한 합당하지 않습니다. 당시 종회의 대군이 이미 검각에 이르자 강유가 제장들과 더불어 군영을 벌려세우고 험요지를 수비함으로써 종회가 진격할 수 없어 이미 되돌아갈 계획을 의논하였으니 촉을 온전히 지키는 공이 거의 이루어졌었습니다. 다만 등애가 기만술로 측면으로 침입하여 그 배후로 출병하니 제갈첨이 패한 뒤에 성도는 스스로 무너졌을 뿐입니다. 강유가 만약 회군하여 내부를 구원했다면 곧 종회가 그의 배후를 틈탔을 것입니다. 당시의 사세로 어찌 양쪽을 다 구제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강유가 면죽 아래에서 절의를 떨치지 못하거나 촉주를 옹위하지 못했다고 책망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 않는 말입니다. 종회는 위장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 강유에게 대군을 주어 선봉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만약 위장들이 모두 죽고 군사가 강유의 손에 주어졌다면 종회를 죽이고 촉을 회복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릇 이치를 넘어 공이 이루어진 연후에 이를 가리켜 기(奇)라 하는 법이니 그 일에 차질이 있었다고 하여 그리 해서는 안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설사 전단의 계책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면 또한 그를 가리켜 어리석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화양국지에서도 평가가 갈린다. 우선 화양국지에 실린 촉한-서진 시대 당대의 인물인 왕숭은 강유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중략)등애는 피곤한 병사 2만을 이끌고 강유성에서 쏟아져 나왔다. 강유는 남쪽으로 귀환하여 십만의 군대를 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군을 이끌어서, 등애는 집에서 기르는 (사로잡힌) 동물의 꼴이 되었다. 등애를 사로잡는 것을 이미 끝 마치고, 다시 돌아와 종회를 막아내었더라면, 곧 촉의 존망을 가늠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강유는 파의 도로에 돌아와서, 멀리 오성에 이르었다. 설사 등애가 가볍게 전진하였다 해도, 지름길을 통해 성도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다. 병사가 분할되어 도성이 멸하니,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다. 명백하게 종회의 지략은, 자방의 것이라 칭해졌다고 한다. 강유는 적이 이르지 아니하였음에도 함락되었는데, 강유와 종회가 책략, 지모를 서로 맞아 어울려하여 우열을 가린다면 강유가 승리하여 종회를 물리칠 것이다. 아깝도다!
반면 화양국지의 저자이자 성한-동진 시대 인물인 상거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강유의 재주는 제갈량에 필적하지 못한데도 뜻은 그 넓은 법도를 계승하였으니(志繼洪軌) 백성들이 그 수고로움을 싫어하여 집과 나라를 잃었도다.
요컨대 강유 당대에는 일세의 영걸로 평가받은 반면 그 직후엔 평이 심각하게 갈린다. 평이 극에서 극을 오가고 서로 강유의 이런 점이 잘못이네 아니네 하는 걸 보면 요즘뿐 아니라 과거에도 어지간히 강유는 논란의 대상이었던 듯.
이로부터 약 천여년 뒤, 자치통감의 주를 단 호삼성은 강유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비의가 죽자 촉의 모든 신하는 모두 강유의 아래에 있었으므로 이를 제지할 수 없었다. 석영은 동정의 서남쪽에 있으니 강유는 무도에서 석영으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적도현은 농서군에 속하는데, 강유를 위하여 백성들을 노역시켰으므로 촉이 망하게 된 원인을 제공하였다.(자치통감 권 76권)
강유가 수차례 전쟁을 하여 촉나라를 망하게 했으니 마침내 초주의 말대로 되었다. 험요를 내주고 강역을 개방하여 촉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이다.(자치통감 권 77권)
이처럼 호삼성은 강유의 수차례 북벌과 한중방어선 변경에 대해서 비판했다. 근데 정작 이후 강유가 촉을 부흥시키려 할 때는 진수, 간보, 손성 등의 평을 모두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주를 달았다.
강유가 실로 지혜로워 족히 종회를 손바닥과 허벅지 위에서 갖고 놀 정도였으나, 시세에 핍박당하고 운명에 제지되었으니 어찌하겠는가! 강유의 마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漢)을 위하였으니 천년의 세월 동안 단(丹)처럼 밝게 빛나는구나. 진수, 손성, 간보가 그를 폄하한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자치통감 권 78권)
조익(趙翼)의 이십이사차기, 전대흔(錢大昕)의 이십이사고이와 함께 청대사학삼대명저(清代史學三大名著)로 꼽히는 십칠사상권(十七史商権)의 저자 왕명성(王鳴盛)은 다음과 같이 찬(贊)했다.
거짓 없는 참된 마음이 천 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아직도 살아있는 듯하다.(赤心千载如生)
한편 조선의 문신 홍대용의 <담헌서>에서도 강유를 평한 적이 있다.
강유(姜維)는 무후(武侯)의 재주는 없으면서 무후의 사업을 하려고 했으니, 그 뜻은 충성스럽지만, 그가 자신의 힘을 헤아리지 못하여 결국 멸망하게 되었던 것이니, 그것은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요화(廖化)가 이른바 ‘지모(智謀)도 적(敵)만 못하고, 병력(兵力)도 적보다 적으면서 용병(用兵)하기를 싫어하지 않으니 어찌 생명을 보존할 수 있겠느냐?’라는 말은 참으로 알고 하는 말이다. 또한 모사(謀事)를 잘하는 자는 그 근본부터 먼저하고 끝은 나중에 하며, 안의 일부터 급히 하고 바깥일은 천천히 한다. 소인(小人)이 안에서 일을 주선하는데, 장수가 밖에서 성공(成功)한 자는 있지 않다. 그런데, 강유는 정권을 제 마음대로 하는 황호(黃皓)를 능히 억누르지 못하고 저 억센 적에게 뜻대로 하려고 했으니, 지혜롭다 할 수 없다.
강유(姜維)는 양안(陽安)과 음평(陰平)을 방비하고자 했으나 황호(黃皓)에게 저지(沮止) 당했다. 만약 강유의 계획 대로 했다면 등애(鄧艾)가 음평으로 한 걸음도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등애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종회(鍾會)는 스스로 달아나게 되었을 것이니, 촉한(蜀漢)이 이같이 빨리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유(姜維)가 죽을 임시에 꾀한 것은 뜻만은 독(毒)하였으나 계획은 소루(踈漏)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漢)나라에 충성한 마음은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었고 무후(武侯)가 인정하던 것도 손상시키지 않았으니, 또한 아름답다 하겠다.
한 마디로 '제갈량의 능력도 없이 북벌을 하려고 했던 것은 요화의 말 따라 무모했고, 일단 내정을 정비하고 소인(황호)부터 억눌렀어야 했다. 하지만 간신배 황호 같은 무리 때문에 그 계책이 쓰이지 않았던 점도 있고, 마지막까지 노력했던 그 충심은 끝까지 아름다웠다고 할 만하다.'쯤 될 것이다. 또 보면 홍대용은 호삼성과는 달리 변경된 강유의 한중방어선 전략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중국의 근대사학자 여사면은 자신의 저서 《삼국사화(三國史話)》에서 이렇게 그를 평가했다.
제갈량이 죽은 후 촉한은 29년간 더 유지됐다.이 29년 중 앞의 12년 동안은 장완이, 가운데 7년동안은 비의가, 마지막 10년동안 국정을 총괄한 것은 강유였다. 장완과 비의가 국정을 총괄할 때는 위나라를 정벌하는 대대적인 출병이 없었다. 강유는 누차 대병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비의가 항상 그를 막아서 많은 수의 병마를 주지 않았다. 비의가 죽고 난 다음 강유의 일처리가 겨우 비의의 손에서 벗어났으나 역시 큰 공이 없었고 오히려 이로 인해 조국이 피폐해졌다. 당시 그(강유)를 강하게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후의 독서가들도 역시 촉한이 멸망한 것은 강유가 병사를 일으킨 책임이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위나라 제왕 조방이 세워진 후부터 고귀향공이 피살당할 때까지의 21년은 삼국시대로 접어든지 21년에서 41년에 이르는 시간으로 실로 위나라에 여러 가지 일이 많았던 때로서 촉한이 북벌을 해야 한다면 그 기회는 절대적으로 이 기간 안에 있었으며 그 기회는 이르면 이를수록 좋았는데 이르면 이를수록 위나라의 국정이 더욱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간 중 태반은 장완과 비의가 정권을 잡고 있었고 강유가 병권을 장악한 때에 이르러서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그러므로 촉국의 멸망을 강유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실로 억울한 것이다. 장완과 비의에 이르러 응당 비교적 큰 책임이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강유가 군부에서 일하였음에도 그의 군사적 능력에 자체에 대한 평가는 드물고 주로 군대를 동원한 것에 대한 비판이나 성품, 그에 대한 반박이 주가 되고 있다. 즉 이에 첨부된 강유에 대한 평가는 어디까지나 강유의 성품 및 윤리적인 측면에 대한 평가들이니 저 평을 강유의 군사적(혹은 정치적) 능력에 대한 평이라 착각하지 말 것.
현대의 평가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대에 있어서 강유에 대한 평가 역시 극에서 극이다. 일단 충신이었다는 건 누구나 인정한다. 단 국력이 약한 촉한을 말아먹은 전쟁광부터 촉한의 마지막 사령관이자 유일한 희망까지 행적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강유까들은 주로 다음과 같이 강유를 비판한다.
• 자신의 실력을 과대평가했다. 미약한 국력과 내치를 고려하지 않은 채 제갈량보다도 더 많이 나아간 무리한 북벌(9차례)탓에 촉은 급속히 피폐해졌다. 제갈량 시절에는 적어도 백성들이 북벌 때문에 피곤하고 지쳤다는 말은 없었는데 강유의 북벌때는 초주가 잦은 북벌로 인해 백성들이 고뇌하고 힘들어하자 구국론을 지었고, 오나라의 승상이었던 장제는 촉한이 망할 시점에 촉한이 환관이 전횡하고 잦은 군사활동으로 백성들은 피곤하고 병사들은 지쳤다며 비판했다. 초주뿐만 아니라 제갈첨, 동궐, 번건 촉 중신 3인방의 연달은 강유 5차례 북벌 후 대장군에서 익주자사로 교체 시도, 이전부터 강유의 북벌을 비판한 장익은 물론 262년 후화전투 출정하는 강유보고 비판하는 요화까지. 촉 조정 전체에서 비판을 들은 점은 깊게 생각할 만한 부분이다.
• 한 나라의 수장이 되기에는 정치력이 부족했다. 강유는 환관 황호의 발호를 누르기는커녕 오히려 참소를 당해 곤경에 처했다.
• 강유는 전략적 식견이 부족했다. 애초에 유비는 한중으로 들어오는 모든 길목을 철저하게 차단하는 방어전략을 수립했고, 이후 위연-오의-왕평이 완성시킨 제법 튼실했던 한중 방어라인을 적군을 한중으로 유인해 격멸하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이는 촉 멸망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능력도 없으면서 호전성만 높았던 그로 인해 촉의 멸망이 재촉됐으니 강유는 망국의 충신이 아니라 나라 멸망의 원인을 제공한 망국의 원흉이었다.
이처럼 강유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하고 있다.
반면, 강유빠들은 위나라 출신의 항장이었음에도(가족도 모두 위에 남아 있었다.) 제갈량의 유지와 촉한 건국의 이념에 따라 부족한 전력에도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내외적으로 험한 조건에도 북벌의 의지를 꿋꿋이 이어간 만고의 충신으로 평가하고, 당연히 상단의 강유까들의 비판 역시 반박한다.
• 하단에서 언급되지만 제갈량 사후 강유의 북벌 규모 자체도 제갈량 시대보다 적게 편성되었고, 9차례나 북벌을 했다고는 하지만 애시당초 이건 연의 설정이고 실제로는 6~7번 정도며 이는 15년에 걸쳐 행한 숫자로 7년간 5번의 북벌을 시도한 제갈량에 비해 더 자주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오해가 생긴 것은 삼국지연의를 포함해 삼국지 관련 소설들 대부분이 제갈량 사후를 아예 생략해거나 매우 간략하게 저술해버리는 바람에 시간 개념과 북벌 횟수 및 규모를 잘못 잡은 경우가 많아서 그렇다. 제갈량과 비슷한 시간 동안 9번 북벌을 나갔다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전쟁광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제갈량의 북벌병력 규모, 출병횟수와 텀을 비교하면 제갈량이 오히려 더 빡세게 굴렸지 강유가 무리한건 아니다. 당장 제갈량 시절에는 매번 10만명씩 동원했는데, 강유는 애초에 제갈량만한 권력이 없어서 1만에서 많아야 몇만명을 부릴 수 있었다. 게다가 1만명으로 자주 북벌한 비의 시절에는 아무말도 없다가 비의가 죽고 제갈량보다 작은 규모로 덜 나갔는데 힘들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제갈량때는 괜찮았지만 강유가 무리해서 촉이 어려워졌다" 라는건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육개가 언급하듯이 촉한은 환관의 전횡으로 내부 사정은 안 좋았지만 망할때까지 병사들만은 정예였고 국방이 튼튼했다. 화핵 역시 적이 서쪽으로 개미때처럼 몰려들었을때 걱정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했고, 촉나라는 토지가 험하고 견고하니 적을 능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으며, 하루 아침에 갑자기 전복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도 못했다. 그리고 오나라인들의 폄하와 달리 촉한은 창고에 비단이 수십만필에 수만의 군사들을 촉한의 염업과 철업에 종사시키면 오나라를 항복시킬 수 있다고 등애가 말할 정도로 경제력만은 쇠하지 않은 상태였다.
• 특히 강유가 본격적으로 군권을 잡고 북벌한 시기는 비의 사후 253년부터 10년 정도인데 253년과 257년 북벌은 각각 제갈각의 북벌에 호응, 제갈탄의 난에 호응해서 군사를 출동시켜 위군과 그냥 병력끼리 대치만 시킨 것이고 262년 후화전투는 제대로 된 기록도 없다. 강유의 본격적인 북벌은 위장군 시절의 254~256년간의 북벌이었고 여기서 단곡의 패배를 제외하면 옹주의 위나라 세력을 단 수만의 군세로만 거의 박살을 내다시피 했다. 또 그나마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던 진지 시절이 지나고 황호가 정권을 농단한 이후부턴 강유도 당시에나 지금에나 군사력을 남용한다는 비판받었던 것과 달리 제대로 북벌을 시행한 편이 아니다. 내정에 참여하여 황호를 견제하려 애를 썼고, 답중에서 둔전하며 군량을 축적하고, 한중의 방어시스템을 바꾸는 등의 내정과 군정에 열중한 모습이 더 자주 보인다. 한마디로 대장군 시절의 강유는 오로지 닥치고 북벌만 외치진 않았다.
• 황호의 발호를 누르지 못한 것 역시 비의가 암살당하면서 권력체계가 붕 떠버렸으며, 촉의 사상(제갈량-장완-비의-동윤) 시절만큼의 위상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진지와 유선의 비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애초에 강유가 손을 쓰기 힘들었다.
• 방어전략의 변화의 경우는 촉과 위의 국력 차이가 상당히 큰 상황이기 때문에 꾸준히 방어하고 힘을 모으며 내치에 신경을 쓰며 기회를 노리는 전략은 효과를 보기 어렵고(위도 그동안 잠자고 있을 리는 없으니), 상대를 끌여들여 큰 타격을 입히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기존의 방어 전략에 변화도 없이 다시 공격하는 건 하후무나 조상 같은 멍청이들이나 할 짓이며, 이때 당시 위나라 장수들이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차라리 황호가 이런 중요한 상황에서조차 방해를 놓을 정도로 답이 없는 개막장이라는 것을 간과한게 문제라면 문제지.
뒤떨어지는 국력, 암군 유선과 환관 황호의 환상적인 태클, 뛰어난 정치가였으나 북벌에 관해선 의견이 달랐던 비의의 딴지 등을 짊어지고 장익, 요화등과 고전분투하며 늙어가는 모습에 수많은 촉빠들의 눈물과 지지를 받고 있는 편. 또한 제갈량이 인정한 자신의 후계자라는 점도 그의 인기 상승에 한몫했다. 실제로 삼국지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ex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 등엔 언제나 젊은 얼굴로 매력이 쩔어주신다. 게다가 올라운드 플레이어니 인기투표가 수긍되는 대목이다.
본인에 대한 평가 뿐만 아니라, 라이벌 등애와의 누가 낫냐는 논쟁 또한 삼국지의 대표적인 얘깃거리 가운데 하나다.
일단 정사 기준으로 봤을 때 강유는 등애에게 패배하기만 한 걸로 나온다. 정사 강유전과 등애전 및 후주전에서 대패와 그 여파가 자세히 묘사된 단곡 전투를 비롯한, 많은 전투에서 등애는 강유의 앞길을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 아무리 승자의 역사라고는 하지만 연의 및 후세 매체에서의 라이벌 이미지 치고는 강유가 일방적으로 당한 감이 없지 않다.
그렇기에 강유의 북벌에서 승리의 가능성이 있었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일관적으로 예스라 답하기는 어렵다. 물자, 병력, 병종(촉은 보병 위주인데 비해 위는 정촉(征蜀) 기병을 따로 편성하여 운용할 정도였다), 원정 거리 등 물리적인 조건에서 어느 것 하나 위군보다 우세할 것 없는 촉군으로 전쟁을 하기 위해서라면 기동력을 이용, 특정 시점에 특정 지점으로 군의 전력을 이동 & 공격을 집중시켜 상대의 수비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강유가 수로를 이용, 촉군을 이동시켰기에 강유의 촉군이 기동력의 측면에서는 위군보다 뛰어난 전력을 보유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진태, 등애 등의 방어를 볼 때 그가 자신이 원하는 지역에서 효과적으로 전력을 집중, 공격을 감행했다 보기에는 어려운 점도 있다. 일례로 255년의 적도 전투의 경우, 진태의 거짓 소문에 속은 강유가 복병을 엉뚱한 곳에 배치하면서 진태의 적도 구원을 막지 못해 점령을 포기해야 했으며(진태전) 256년의 경우 등애의 방어에 강유가 말렸다고 추측할 수 있다.
결국 강유가 진태와 등애보다 불리한 객관적 요건을 뒤엎을 정도로 뛰어난 점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정사 촉서 종예전에서 강유와 동시대인이자 여러 전투에 함께 참전했던 요화가 262년 무렵의 강유의 후화 전투를 보며 “강유는 적보다 병력과 지모가 뛰어나지도 않으면서 용병(출진)이 끊이지 않으니 스스로를 태울 것이다.”라 평한 것도 이를 어느정도 뒷받침하고 있다.
허나 그렇다고 하여 무조건 강유가 등애와 진태에 비해 뒤떨어진다 볼 수는 없다.
북벌에 있어서는 공명의 시대에 비해 강유의 시대는 인재난이 더 심해져서, 위연, 왕평, 오의 등 숫적으론 부족해도 질적으로는 크게 밀리지 않았던 제갈량 시절의 명장들이 죽거나 노쇠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강유는 총사령관 겸 야전사령관 겸 야전지휘관적인 존재가 되어 홀로 군부를 지탱해 나가야 했다. 인재가 얼마나 부족했으면 촉 내부에서 상당히 아니꼬왔을 항장 출신+외지인+젊은 나이였던 강유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했다. 왕평 역시 강유와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인재 풀이 중간만 됐어도, 왕평과 강유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났어도 쉽게 중용되지 못했을 텐데 둘은 중용을 넘어 군에서 최고위직에 올랐으니 인재가 진짜 부족한 것을 새삼 느낄 수 있다.
또한 강유는 과거 제갈량이 받았던 바와 같은, 촉의 전 국력을 기울인 지원을 받은 적이 없다. 비의 생전에는 1만 명을 한도로 하는 소수 전력만을 부여받았고 비의 사후 대장군직에 오른 이후에도 강유가 지원받은 병력 규모는 '수만 명'을 넘지 못한다. 북벌을 수행했던 제갈량이 동원한 '최소 병력'이 진창 공격 당시의 '수만 명'이었고 최대 10만까지 동원했던 걸 생각하면 본국의 지원 규모는 현저히 적다. 이 시기 촉의 내치를 봐도 비의 사후 전반기에는 유선을 등에 업은 진지가 황호를 끌어들인 형태였고 후반기에는 유선을 등에 업은 황호 단독으로 정국을 주도했다(진지는 258년 사망). 진지 사후엔 그 아래에서 국정은 더 어지러워졌고 강유 자신도 황호가 장악한 성도로 돌아가는 것을 꺼렸다. 그리고 촉 사람들은 매년 전쟁에 시달리느라 심신이 지쳤고, 이기지도 못하는 싸움에 자꾸 끼워넣으니 피곤할 법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언제나 적은 병력으로(1만에서 기껏해야 수만) 몇 배의 물량으로 등애, 진태, 곽회 등 군부 실세들이 죄다 포진한 위군과 싸운 것들을 보자면 진태나 등애 등이 강유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났다고 주장하기 위한 근거가 미흡하다.
강유의 이용 가능한 자원을 진태나 등애가 이용할 수 있던 자원과 비교해보면 강유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다. 강유의 적도 전투 당시 정서장군 진태가 등애에게 합류, 신속하게 구원하는 것 이외에도 강유의 적도 공격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사마사는 양주군과 사마망군을 합류, 적도로 진군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문제는 이 과정, 즉 적도의 상황이 사마사에게 전하여진 뒤 의사결정이 내려져서 군사 행동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단 20여 일만에 이루어졌다는 점. 게다가 사마사의 경우 600리의 거리 이상에서 하게 되는 군사 행동은 하나하나 보고하지 않겠다는 진태의 말을(진태전) 허락할 정도로 진태에게 많은 자율권을 준 상태였다. 음평과 한중 일대를 막기 위해 요화와 장익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성도에 하고서도 1년을 기다려야 했다는 강유의 상황과는 다르다.
등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등애의 요청 역시 사마사와 사마소는 적극 지원했으며, 적어도 등애가 정촉(征蜀)하여 올린 상소문에 대하여 사마소가 거부의 의사표시를 하기 전까지는 등애는 사마 집안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위와 촉의 국력 차이와 더불어 상관과의 관계에까지 진태와 등애가 위 조정 및 사마 가문으로부터 받았던 지원은 강유와 유선과의 관계와는 비교할 수 없다. 한 마디로 강유는 스스로 처음부터 끝까지 없는 것도 만들어내가며 싸워야 했던 입장이었으며, 진태와 등애는 자급자족에는 신경 쓸 필요 없이 충분한 지원을 토대로 하여 자신들의 모든 역량을 강유와의 싸움에 쓸 수 있었다. 즉 진태와 등애, 강유간의 전적 차이를 가지고 세 사람의 능력상 우열을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결론적으로 현대에서 강유와 등애의 능력 비교에 대한 물음에 대하여 등애빠들은 주로 정사에서의 결과를 내세워 등애를 우월하다 주장하고, 강유빠들은 주변 상황 등이 불리한 위치에 있었던 것을 고려했을 때 개인의 능력은 강유가 등애보다 위였을 거라 주장하는 편이다.
다만 빠와 까를 떠나서 삼국지연의가 쓰이기 이전, 당과 송대에 무성왕에게 제사를 지내며 안진경등이 무성왕에게 배향시킬 역대 명장 70여명을 등애는 계속해서 뽑혔지만 강유는 뽑히지 않았으며, 삼국지 후기 인물로는 등애 이외에도 양호와 육항이 뽑혔다. 이때 뽑힌 사람들은 제갈량, 관우, 장비, 장료, 등애, 황보숭, 주유, 여몽, 육항, 양호인데 강유의 스승인 제갈량은 백기, 한신, 이정 등과 함께 상석에 배향되었다. 70여 명 뽑았는데 10명이 삼국지의 인물인 걸 보면 당대에도 삼국지의 인기가 얼마나 좋았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듯. 이해응(李海應)이 작성한 <계산기정>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순조 시기에는 강유도 청나라 태공묘에 배향되어 역시 명장으로 인정받았던 모양이다.
위의 논쟁에 대하여 강유나 등애나 능력은 비슷하였고 등애는 거기에 여건도 받쳐줬다로 결론을 내면 그만이기는 하지만, 과연 이것으로 만족할 사람이 얼마나 될 지...다만 최소한 당대에는 그 정도 입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상 등애가 "강유는 영걸이지만 날 만나 곤궁해진 것"이라 자뻑하자 식견있는 자들이 내심 비웃었다고 한다. 즉 당대 인물들이 보기에 강유가 비록 등애에게 패배했지만 능력이 부족해서 진게 아니었다는 것.
아무튼 이쯤 되면 정사이든 연의이든 삼국지 독자들(특히 강유 팬을 겸하는 촉팬일 경우) 입장에서는 제갈량 시절보다 군사적,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촉의 상황에서도 북벌의 의지를 관철했던 강유의 신념, 또는 자신감은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대단히 궁금해진다. 촉에 대한 충성심인지, 제갈량 개인에 대한 충성심인지, 천수로 돌아가기 위한 사적인 필요성 때문인지, 아니면 이공위수(以功爲守) 즉 선제공격을 행함으로써 위를 견제하는 전략이었는지, 북벌의 목표였던 옹양주 겸병이 가능했는지 아닌지를 떠나서 북벌을 약 30여년 동안 홀로 지속하고 63세 일기로 죽기 전까지 촉을 부흥시키려고 했던 강유의 의지와 충심은 강했다. 그만큼 촉한에서 강유를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딱 하나 옥의 티가 있었는데, 그것은 하필이면 촉의 재건을 위해 손잡은 사람이 종회였다는 점이다. 종회는 위나라 최고의 공신 중 한명인 허저의 아들인 허의를 함부로 참수했다. 이 때문에 종회는 부하들에게 원한을 산 상태였으며 강유는 하필이면 이런 종회와 손잡는 바람에 패하자 항복할 겨를조차 없이 끔살당하고 말았다. 강유와 종회가 패하자마자 끔살당한 대목에서 휘하 병력들이 종회에 대해 얼마나 불만이 컸는지를 알 수 있다.
다만 강유가 종회와 손을 잡은 것은 사실상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성도 및 전 촉 지역이 점령당하고 촉장들은 군권을 잃어버리고 유선도 위군의 수중에 넘어간 상황에서 강유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포기하고 조용히 여생을 마치든가, 아니면 빠른 시일 내에 위나라 세력을 이용해 내분을 일으켜 촉의 부활을 시도하는 도박 뿐이었다. 시간을 오래 끌 수도 없었다. 오래 끌면 국력이 넘사벽인 위 정부에 의해 촉 영토 전체가 완전히 통제되고 유선을 비롯한 황족들은 위로 갈 테니까. 실제로 성도 반란 이후 촉의 구신들과 황족들은 낙양으로 끌려가고 남아있던 촉장들은 진나라 장수로서 서촉을 다스리는 처지가 된다.
결국 강유는 도박을 선택했고, 이런 강유와 함께 도박에 뛰어들어 위군에서 내분을 일으켜 줄 만한 사람은 종회밖에 없었다. 종회가 아니라면 등애나 위관 급은 되어야 일을 꾸며볼 만 했을 텐데, 등애나 위관이 강유와 편먹고 반란을 일으킬 리 있겠는가. 비록 등애는 사마씨에 대한 충성심은 의심 받았지만, 그래도 자기가 새 왕조를 세우겠다는 야망 따윈 없었고 죽기 전에 삼국 통일을 하고 싶다는 야망 뿐이었다. 또 위관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마씨의 충신이었으니 종회 말고는 답이 없었다. 실제로 강유는 종회를 만나자마자 그의 야심을 꿰뚫어보고 종회를 꾀어 반란을 일으키도록 교묘하게 설득하고 위장들을 다 죽이라고 종용하고 군권을 다시 자신의 손에 들어가게 만드는 등 종회를 철저하게 이용했다.
여담으로 최근들어 한국의 삼국지 팬덤 사이에서 강유가 삼국지 시리즈나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 미소년에서 미청년으로 묘사된 것처럼 잘생겼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고개를 들고 있다. 종회가 강유에게 대하는 모습은 단지 자기 야심에 호응을 해주는 사람에 대한 신뢰보다는 마치 첫눈에 반해서 콩깍지가 씌인 것과 흡사한데, 종회는 실제로 여장 취향이 있는 꽃미남 하안과 친했고, 강유에게 "그대는 공휴(제갈탄), 태초(하후현)보다 훨씬 빼어나다."고 한 발언이 단지 능력에 대한 립서비스가 아니라 외모에 대한 칭찬이었을 거라는 이야기다. 하안과 하후현이야 당대 누구나 다 인정하는 미남이고, 제갈탄 역시 사위 왕광이 아내에게 "장인어른은 미남인데 당신은 왜 그런거야."라고 디스했다가 역관광을 기록이 존재하기에 강유 역시 60대였음에도 종회가 제갈탄과 하후현보다 더 잘생겼다며 립서비스를 하며 반할만큼 미노년이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이에 대해선 ‘아무리 기록이 부족한 촉한이라지만 강유는 그래도 기록이 많이 남은 편인데 외모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음에도 강유의 외모를 좋게 보는 건 비약 아니냐'는 반론 또한 존재한다. 확실히 삼국지 정사의 기록을 본다면 특정 인물을 논할 때 의외로 얼평이 자주 등장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래서 드라이하고 간결한 문체로 유명한 정사지만 미남으로 거론된 인물들을 찾아보면 의외로 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갈량. 주유, 손책, 순욱, 하안, 하후현, 맹달, 원소, 원상, 석포, 마등, 유표, 장온, 하반, 조예, 정보, 장숙, 정이, 여범, 최염, 관녕 등등... 이처럼 당대에 인물을 평가할 때 외모를 중시여기는 문화가 의외로 팽배했고, 또 인물의 외모를 논하는 기록은 별로 드문 게 아니었기에 외모에 대한 기록이 확실하게 남지 않은 강유 같은 경우는 외모로 좋게 평가하기엔 애매한 구석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맹달처럼 유장-유비 진영에 속했을 땐 외모에 대해선 별 말이 없는데 위나라라 귀순하자마자 얼빠로 유명한 조비의 눈에 띄어 사서에 미남으로 기록되는 행운을 얻은 케이스도 있고, 또 역시 얼빠로 유명한, 아니 얼빠의 차원을 넘어서 당대의 꽃미남인 하안과 하후현에게 알랑거리는 등 수상한 기록들이 즐비해 게이가 아니냐는 의혹까지 받는 종회의 무한신뢰를 얻은 강유이기에, 비록 사서상에 강유의 외모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이러한 행간을 읽어보면 외모가 뛰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상상 또한 그리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
사마사와의 대조
삼국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영웅군상들 가운데 라이벌도 있고 친구도 있으며 증오의 관계, 애증의 관계도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그 중에 유독 특이한 두 남자가 있다. 같은 시대에 살았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받진 않았고, 그랬는데도 마치 거울처럼 정반대의 길을 걸은 이들. 바로 이 남자, 촉한의 강유와, 조위의 사마사다.
우선 서로의 생애를 보자. 강유는 변방 호족 출신으로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으며, 일개 협객에서 군중랑까지 승진하였고, 촉한에 귀순한 후로는 기반도 없이 독고다이 무인의 길을 묵묵히 걸으면서 중앙정계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렇게 30여 년을 오로지 촉한이라는 국가를 위해 멸사봉공하면서 분투하였으나, 끝내 그 충성심을 보답받지 못한 채 참혹하게 죽고 말았다. 반면 사마사는 일급 명문가인 사마 가문 출신으로, 천재적인 군략/정략가 아버지 밑에서 출세가도를 달린다. 강유와 달리 아버지의 기반을 물려맏아 황제를 위협할 정도로 대권을 장악했고, 의외로 일찍 죽긴 했으나 천하는 그가 생전에 닦아놓은 레일 위로 움직였다.
서로의 능력 역시 거울과 같은 정 반대다. 강유는 전술적으로는 당대의 귀재라 할 만했지만 전략은 아주 특출나지는 않아 선배들이 깔아놓은 레일을 착실히 따라 달리는 정도였으며, 정략은 기록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툭하면 촉한 정계의 샌드백이 되는 수준이었다. 반면 사마사는 전술가로서는 애매하지만 전략가로선 당대 일류, 정략 분야에서는 가히 신급이라고 할 수 있었다.
또 강유의 동료들인 장익, 요화, 호제, 동궐 등은 강유에게 의지가 되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그들은 강유의 북벌을 반대하거나 심한 경우 방해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강유에게는 변변한 후계자라고 할 만한 이도 없었다. 말 그대로 독고다이, 외롭기 그지없는 길을 걸어간 남자다. 반면 사마사는 관서 전선의 명장 진태, 등애, 회수전선의 왕기, 사마사의 순욱이라고 할 수 있는 부하등 쟁쟁한 참모진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남동생 사마소가 그의 후계자가 되어 제국창업의 최후 실행자가 되었다.
사상적으로는, 강유는 이상적이고 원칙주의적인 정현의 학문을 계승했다. 사마사는 현학파를 죄다 숙청한 뒤 정현의 학문을 전면 부정하는 왕숙의 이론을 적극 지지했다.
이 두 남자의 결정적인 차이는 다음의 어록들로 간결하게 요약될 수 있을 터이다.
(이러하니 조방은) 천서(황제의 계보)를 잇기에 불가합니다. 신들은 한나라 곽광의 고사의 의거해 황제의 새수를 거두고 제왕으로 삼아 번국으로 돌아가게 하시길 청합니다. - 사마사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며칠만 더 치욕스러운 일을 참아내십시오. 신이 위태로워진 사직을 다시 안정시키고 어두운 해와 달을 다시 밝히겠습니다. - 강유
검각에 관련된 전설
검각에 내려오는 아래의 전설들은 실제 정사에선 강유가 유선이 항복하기 전에 검각에서 성도로 이동하였으므로 성립되지 않는 전설들이다, 이 전설들은 연의에 그 바탕을 두고 있을 가능성도 높다. 물론 정사에서도 분격한 촉군이 칼을 들어 돌을 베었으나 그건 성도 지척인 광한군 오성현에서의 일이지 검각에서의 일은 아니었으리라.
• 강유가 검각으로 와서 진영을 정비하고 요새를 굳게 지키자, 종회의 10만 대군은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등애가 성도로 우회 기습하면서 유선이 항복하였다. 유선의 항복 조서를 받든 강유와 장졸들은 원망스럽고 화가 나서 분통을 참지못해 칼을 뽑아 옆의 돌을 베었다. 그때 그가 자른 돌은 지금도 검각 협곡 안에 위치해 있으며, 사람들은 이 돌을 '감도석'이라 부른다.
• 억울하고 울분을 참을 수 없었지만, 강유는 유선의 성지를 거역할 수 없었기에 양면으로 된 군기를 거꾸로 걸게끔 명령을 내려 위국에 투항할 뜻을 표했다. 그 양면으로 된 기를 꽂았던 돌은 주가채의 바위 절벽에 남아있는데, 이를 '쌍기암'이라 부른다.
• 그는 장수와 병사들을 소집하여 각기 지니고 있던 병기를 모아 소검산의 한 동굴에 숨긴 다음, 차후에 때를 보아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 왕실을 부흥하고자 했다. 이 동굴을 '강유 도창고'라고 불린다.
• 강유는 검문관을 떠날 때 마고자를 벗고 손수 빨은 뒤, 이를 말리기 위해 산의 바위 위에 널며 반드시 돌아올테니 그때 다시 마고자를 입을 것이라고 맹세했지만, 결국 한 해가 지나고 또 다시 다른 한 해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옷은 돌로 변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검문관 20리 밖에서 큰 바위 위에 널려 있는 마고자의 모양을 볼 수가 있다. 이를 가리켜 '양의암'이라고 한다.
강유의 후손들
《신당서 재상세계표(新唐書 宰相世系表)》에 따르면, 강유의 후예들이 천수 상규에 거주하는 것이 확인된다. 이들의 거주지가 강유의 출신지인 천수 지역인 것을 보아, 아마도 이들은 강유가 촉한에 항복하며 북방에 남긴 가족들로부터 세계가 이어진 것일 터이다. 투항 당시 강유의 나이가 20대 후반이었으니 그 시대에는 이미 가정을 꾸리고도 남았다.
한편 강유는 입촉 이후 재혼을 해서 새로운 가정을 꾸렸는데, 이 쪽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다만 강유가 촉한 황실을 복고하려다 실패하고 죽은 뒤, 성도에 있던 그의 가족들 또한 난리통에 살해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천수에 남은 강유의 가족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불분명하지만 촉에서 새로이 이룬 가족이 몰살당한 것과 달리 이쪽은 명맥이 이어진 걸 보아 몰살당하거나 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 강명(姜明): 강유의 후손, 북위시기 관원, 연주자사, 천수군공(天水郡公)
• 강원(姜远): 강명의 아들, 북주시기 관원 형진이주자사(荆秦二州刺史), 조읍현공(朝邑縣公)
• 강보의(姜寶誼, ?-619?): 강원의 아들, 당고조 시기 장령, 일찍이 태학(太學)에서 공부했는데, 학업에 진전이 없자 그만두고 좌익위(左翊衛)가 되었다. 공로를 인정받아 응양낭장(鷹揚郎將)으로 옮겼다. 당나라 고조가 병사를 일으키자 좌통군(左統軍)에 오르고 영안현공(永安縣公) 작위를 받았다. 우무위대장군(右武衛大將軍)을 지냈다. 송금강(宋金剛)과 싸우다 전사했다. 시호는 강(剛)이다. 좌위대장군, 유주총관으로 추증되었다.
• 강각(姜恪,?-672): 강보의의 아들, 당고종 시절 장령, 시중, 영안군공(永安郡公), 전투로 인한 전공으로 인해 좌상(左相)에 올랐으며, 염입본(閻立本, 중국 당대 초기의 화가, 600 - 673)이 동시기에 그와 더불어 우상이 되었다. 시인이 평론하기를 "좌상은 장수로서 그 위엄은 멀리 사막에까지 퍼졌고(宣威沙漠),우상은 명예로움을 단청에 남겨 후세에 전하였다(馳譽丹靑)라고 말하였다.
• 강협(姜協): 강보의의 아들, 당나라 시기 관원, 연연도호(燕然都護), 하주도독(夏州都督), 성기현후(成紀縣侯), 전서(篆書)와 주문(籀文)을 잘하였다.
• 강수(姜琇): 강협의 아들, 당나라 시기 관원, 하주도독부법조(夏州都督府法曹)
• 강앙(姜昂): 강수의 아들, 당나라 시기 관원, 조의대부전(朝議大夫前),행상서사훈랑중(行尙書司勳郎中),상주국(上柱國)
• 강원(姜還): 강앙의 손자, 당나라 시기 관원, 건주자사(虔州刺史), 장작소감(將作少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