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조운(趙雲, ?∼229년)
제갈량의 1차 북벌
한편 유비 사후 군권은 중도호 통내외군사인 이엄이 가지고 있었고 총군권을 가진자는 이엄이나, 중호군 조운으로 역할분배가 되었었다. 제갈량은 북벌에 나서면서 조운은 데려가고 이엄은 강주로 옮긴다. 이엄이 있던 영안에는 호군 진도를 남겨서 이엄에게 통솔하도록 했다. 2인자인 이엄에게는 중요한 요충지인 강주를 맡겼다고 할 수 있다.
전투과정과 퇴각, 전후처리
이후 제갈량이 기산에 출전하였을 때도 동행하였다. 제갈량은 출군하여 야곡도(斜谷道)를 거쳐 우부풍 미현을 점령할 것이라고 널리 헛소문을 내고 본인은 그 반대면인 기산으로 움직인 동시에 조운에게 등지와 함께 의병(疑兵), 즉 적을 속이기 위한 허위(기만) 부대로서 기곡으로 출진하여 가서막게 했다. 조운이 장안 등 옹주의 동쪽을 노리는 움직임을 취하자 조진이 군을 일으켜(제갈량전, 화양국지) 막게 했고 대군을 보내 조운과 등지를 상대했다.(조운전) 즉 조운이 기곡에서 조진의 대군 상대로 시간을 끄는 동안 제갈량의 본대가 군사 배치를 마치고 기산을 제압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조운과 등지에게 촉한의 북벌군 상당수가 주어졌을것인데, 조운과 등지의 병력이 위나라 대장군 조진이 보낸 대군보다 약해서 패할수 밖에 없었다는 조운전의 기록을 보아 북벌군 중에서도 2진, 3진급 많은 수의 약한 병력이 주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위나라 대장군 조진이 촉군이 공격하려는 곳은 미현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주력 대군을 여기다 투입할 정도로 낚일려면 조운의 이름값과 더불어 그를 뒷받침할만 많은 수의 병력이 일단은 요구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진은 분명 대군을 파견했지만, 기곡에서 병력이 적보다 많았다는 제갈량의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 또 기곡의 병력은 유사시 한중과 기타 지역을 방어하는 병력으로도 사용되어야 했을테니 상당한 병력이 조운에게 맡겨졌을 것이고 제갈량 본대가 이끌던 병력은 대비가 안 되어 있는 농서를 공격하여 압도할 수 있는 정예병력들을 주로 데리고 갔을 공산이 크다.
이후 기산에 간 제갈량에게 3군이 넘어가자 위 황제 조예는 대장군 조진을 관우(關右, 함곡관 서쪽)의 제군들을 조진으로 하여금 총감독하게 하여(도독관우제군사) 일제히 진군시켰고(명제기) 조진을 직접 파견해 미현에 진을 치게 했다(조진전), 이는 이 시점까지 조운과 등지의 기곡군을 상대로 위나라가 증원을 해야 했을 정도로 아직 조운이 버티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前趙子龍退軍,燒壞赤崖以北閣道,緣谷百餘里,其閣梁一頭入山腹,其一頭立柱于水中。今水大而急,不得安柱,此其窮極,不可强也,(조운이 퇴군하며 적애 이북의 잔도를 불태운것이 백여리나 되며 지금 물이 많아 기둥을 세울 방법이 없다는 내용) - 수경주
조운과 등지의 병사는 약하고 적은 강하여 기곡에서 패했으나, 군사들을 거두어 굳게 지켰으므로 대패에 이르지는 않았다. 군을 물린 후 진군장군으로 강등되었다. - 조운전
제갈량이 말했다. "가정의 군이 퇴각할 때는 병장들을 서로 수습하지 못했는데 기곡군이 퇴각할 때는 병장이 처음처럼 잃은 바가 없으니 어찌된 까닭이요?" 등지가 말했다. "조운이 몸소 뒤를 끊고 군자와 집물조차 함부로 버린 일이 없으니 병장들을 잃을 까닭이 없었습니다."
조운의 군자(軍資)에 여유분의 비단이 있어 제갈량이 장졸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니 조운이 말했다. “군사에 이로움이 없었는데(이기지 못했는데) 어찌 하사품이 있을 수 있습니까? 청컨대 그 물건들은 모두 적안(赤岸)의 부고(府庫)에 넣어두었다 10월이 되길 기다려 겨울 하사품으로 삼으십시오.” 제갈량이 이를 매우 옳게 여겼다. - 조운별전
“대군이 기산과 기곡에 이르러 모두 적보다 수가 많았는데, 이를 능히 파하지 못하고 격파되었으니 이 과실은 군사가 적은 것에 있는 게 아니라 오직 한 사람(제갈량 본인)에게 있다” - 한진춘추
“신이 재주가 없는데도 외람되게 과분한 자리를 차지하여 직접 모월을 잡고 삼군을 독려했으나, 능히 규율을 가르치지 못하고 법을 밝히지 못하고 일에 임해 두려워하여, 가정에서는 명을 어기는 허물을 범하고 기곡에서는 경계하지 못한 실책을 범했으니, 그 허물은 모두 신이 임무를 준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 제갈량전
“제갈량은 참군인 양양출신의 마속, 비장군인 파서출신의 왕평 및 장목, 이성, 황습등을 선봉으로 하였으나, 제갈량의 지시를 거슬렀으므로 장합에게 격파당하였다. 왕평은 무리를 모아 퇴각의 후미에 섰다. 조운, 등지 또한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亦不利)” - 화양국지 유후주지
그리고 이 싸움에서 조운은 패한다. 중국어로 실리(失利)라는 말은 단순히 '불리하다'라는 뜻보다는 ‘시합이나 싸움에서 패하다’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다만 화양국지에서는 조운이 맡은 기곡전선에 대해 역불리(亦不利)라는 말을 써서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역시 불리했다, 성공하지 못했다'라는 의미로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조운은 조운군에 묶여 있다가 후퇴하던 조운군을 추격하는 조진군을 상대로 손수 뒤를 막아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채로 적애 북쪽 백리 잔도를 불태우고 후퇴한다. 통로인 잔도를 불태워버렸으니 조운군은 피해도 적었으나 다시 잔도를 공사해야했다. 그리고 조운에 묶여있던 조진군은 자유로워졌고 조진은 직접 북쪽에 있는 월지성까지 올라가서 촉에 호응한 반란군을 진압했다.
조운전의 "조운과 등지의 병사는 약하고 적은 강하여(雲,芝兵弱敵彊)"라는 문구 때문에 후대의 창작물에서는 병력에서도 열세인 전력으로 분투했다는 식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한진춘추에서는 오히려 기곡에서 촉군의 병사가 더 많았다는 서술이 있다. 모순은 아니고 말그대로 조운의 군사가 수만 많은 미끼부대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둔전까지 하면서 허위 선전을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애초에 기록에서는 조운의 부대를 의병(疑兵), 즉 적을 속이기 위한 허위(기만) 부대로 표현한다. 게다가 조운과 등지의 병사가 약했고, 상대는 강했다라는 기록을 보자면 군사의 수이든 질이든 확실히 무게감이 차이가 있었고, 제갈량이 조운의 전후 수습에 대해서 고평가 한 것을 보면 불리한 상황에서 분투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큰 피해는 없이 후퇴했지만 잔도를 태웠다는 점이 작용한건지 이후 논공행상에서 강등을 당했다.
제갈량의 1차 북벌이 끝나고 그 이듬해인 229년에 사망한다. 아무래도 늙은 나이에 너무 무리해서 골병 들어 죽은 듯. 그리고 조운의 사망을 언급해서 후출사표의 위작설이 제기되는데 228년작 후출사표에 229년의 조운의 사망이 언급되어 있다.
죽고 수년이 지나고 나서야 시호를 받았다. 별전을 보면, 유선이 조운은 유비를 따르면서 공적이 컸고 자신이 아기였을 적에 구해 줬으니 조운의 합당한 시호에 관해 의논하도록 했다.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조운의 시호를 지어다가 붙인 사람이 바로 강유로 강유는 조운의 시호를 제정할 때 당양에서의 일을 조운의 대표 일화로 소개한다. 강유는 시법을 살펴 "유현자혜(柔賢慈惠)를 순(順)이라 하고 집사유반(執事有班)을 평(平)이라 하며 극정화란(克定禍亂)을 평(平)이라 하니 조운의 시호로는 순평후(順平侯)가 마땅합니다."라고 했다.
시호법에 따르면 순(順)은 성품에 대한 찬양이다.
慈仁和民(자인화민) : 자비롭고 어질며 백성들에게 온화함.
慈和遍服(자화편복) : 자비롭고 온화하며 두루 복종시킴.
和比於理(화비어리) : 온화한 것이 이치에 비길만 함.
평(平)은 일처리에 있어 공정함을 뜻한다.
法度皆理(법도개리) : 법도가 다 이치에 맞음.
有剛治記(유강치기) : 정치를 행함에 강직하고 기강이 있음.
執事有制(집사유제) : 일을 맡아서 행함에 짜임새가 있음.
治而無省(치이무생) : 다스림에 허물이 없음.
조운의 시호는 순평후(順平侯)로 명백히 무관인데도 조운은 인격과 성품과 공정한 태도로 높게 평가받았다.
황충, 조운은 굳세고 사납고 씩씩하고 용맹하여 아울러 조아(爪牙-발톱과 어금니. 용맹한 무장을 비유)가 되었으니 관(灌), 등(滕)의 무리로다.
정남장군(조운)은 성정이 후덕하고, 정서장군(진도)은 충성스럽고 강직하다. 당시 선발된 병사를 지휘하여 맹장으로서 공훈을 날렸다.
계한보신찬
가장 인정받는 부분은 용맹함. 멀리 갈 것도 없이 정사를 쓴 진수의 평가가 용맹했다는 것이다. 별전까지 보면 일신의 무력뿐만 아니라 공성계를 쓰는 등 나름의 임기응변도 갖춘 용장이었다. 일신시담(一身是膽), 언기식고(偃旗息鼓) 등의 고사성어가 이 조운별전의 공성계 일화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관우, 장비, 마초 등 촉나라의 손꼽히는 명장들도 인물됨과 성격의 흠을 두고 깠던 진수가 조운과 황충만은 고조 유방의 최측근이던 관영과 하후영에 빗대어 매우 높이 평가를 했던 걸 보면 인품 또한 무척이나 좋았던 걸로 보이는데, 촉의 신하인 양희의 계한보신찬에서도 조운은 성정이 후덕했다고 한다. 무장임에도 인격과 성품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케이스. 즉, 조운은 장수의 기본 덕목인 용맹과 냉철함을 겸비한 용장임과 동시에 그 외의 분야에서도 후덕한 인격과 성품을 가진 인물이란 소리다. 이는 자기관리가 매우 철저하단 뜻이기도 하며 올곧은 인간성까지 겸비하여 당대의 뛰어난 인재였다는 것과 마찬가지.
대부분을 유비나 제갈량같은 실세 곁에서 최측근으로 있었던 만큼 어깨에 힘이 좀 들어가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음에도 당대의 평가, 후대 사람인 진수의 견해, 사서에 보이는 행적 모두 조운의 인간성에 대한 지적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인격과 성품, 공정함에 대한 평가가 굉장히 높다. 그만큼 조운은 삼가고 겸손하며 공정하고 후덕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지휘 능력
현재까지 나온 사료에 따르면 조운이 지휘관으로서 한 전선을 맡은 것은 익주정벌전과 1차 북벌의 기곡전 당시이다. 익주정벌전에서는, 제갈량의 형주 지원군 중 조운 휘하 군대가 강주에서부터 북상하며 단독으로 강양군 일대를 평정하였다. 제갈량의 형주 지원군 활약을 과소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만약 제갈량, 장비와 조운이 이끄는 두 개 군대가 양쪽에서 변방을 평정하지 않았다면 유비는 후방으로부터 적들에게 고립될 수도 있었다.
기곡전에서는, 정예병을 차출한 후 남은 병사로 편성한 의군을 이끌고 제갈량의 본대가 작전에 성공할 때까지 적의 시선을 끌어 발목을 잡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가정에서 어떤 등산가가 대형 병크를 터뜨린 후 제갈량의 본대가 퇴각하는 동안 위나라 조진의 주력군을 기곡에 붙잡아두는 임무도 완수했으나, 패전의 피해가 너무 커 의군을 이끈 장수임에도 불구하고 책임추궁을 당했야 했다. 정사에서 조운은 퇴각하는 와중에도 마지막까지 후미에 서서 적과 맞섬으로써 병력을 최대한 온존했다고 하는데, 책임추궁을 당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조운의 직책과 위상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조운은 패전 상황에 상을 받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었으니 억울하다고 느끼지도 않았겠지만.
주로 지휘관으로서의 조운을 평가할 때 익주정벌보단 기곡전투를 참고한다. 이유야 어쨌든 조운은 패장이기 때문에 이와 관련해 더 자세한 사료가 나오지 않는 이상 무분별하게 고평가받기는 힘들지만, 상술했듯 조운 입장에선 변호받을 여지가 꽤 있다.
첫째, 북벌 당시 촉군 최고참급 인물이었던 조운이 주력부대에서 제외되고 미끼부대를 맡은 정황을 살필 필요가 있다. 일단 위나라에 비해 인재가 부족한 촉나라 입장에서는 의군을 맡아 적을 기만할 인재가 조운밖에 없었다. 게다가 미현 지역에서 정예도 아닌 군으로 제갈량의 본대로부터 위군의 시선을 돌리려면 네임드 장수가 필요했는데, 이런 효과를 얻으려면 명성도 자자하고 오호대장군 중 유일하게 남은 조운이 거의 유일한 선택이었다.
둘째, 조운은 패전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도 군대의 와해없이 본국으로 귀환하는데 성공했다. 애초에 가정이 뜷린 순간부터 1차 북벌계획은 사실상 실패였고, 만에하나 조운이 어떻게 이기더라도 전략적으로 얻을 게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운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책은 지더라도 최대한 전력을 보존하는 것이었고 조운은 사령관임에도 후미 방어에 몸소 나서면서 실제로 이 목적을 달성했다.
셋째, 조운은 제갈량의 본대가 후퇴할 때까지 조진군을 끝까지 붙잡아놓는 임무도 성공했다. 위나라 대장군이었던 조진은 조운이 버티고 있는 미현으로 직접 관중의 병력을 증원군으로 이끌고 가야 했고, 조운을 상대하는 것 이외에 다른 작전을 펼치기는 어려웠다. 정사 조진전에서 마속의 패배 이후에야 조진이 안정군으로 이동했다고 나오며, 자치통감에서 조운의 후퇴 이후에야 조진이 다른 곳으로 지원을 가는 내용이 나온다. 이렇게 조운이 의군만으로 적국의 대장군이자 도독관우제군사인 조진의 병력들을 감당해낸 걸 보면 지휘관으로서 능력도 상당히 높았다고 할 수 있다.
넷째, 조운은 애초에 야전에서 사령관을 맡은 적이 매우 드물었다. 조운은 국경 수비나 야전군 지휘보단 유비나 제갈량의 옆을 지키는 일종의 친위대장 역할로 활약했다. 유비와 제갈량이 조운에게 맡긴 일들을 보면, 조운의 주요 역할은 야전에서의 작전 지휘가 아니라 유비/제갈량를 호위하거나, 군대를 관리감독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전투에 투입되더라도 일군의 지휘관보다는 총사령관인 유비, 제갈량의 직속 돌격대장이나, 별동대, 특임조, 후방 군정 등을 주로 맡았다. 그런데도 목숨걸고 쭉정이 군대를 이끌어 위나라 대군의 눈앞에서 미끼 역할로 버텼던 걸 보면 지휘관 주제에 무능했다고 욕먹을 게 아니라 자신의 특기 분야가 아님에도 임무를 꽤 잘 수행했다고 호평받아야 할 일이다.
연의
행적의 큰 줄기는 따르나 유비군을 주인공 집단으로 묘사하다보니 정사에 없는 부분들이 대거 창작되었다. 특히나 관우, 장비 이상으로 결투 묘사가 많아 수많은 가공인물의 인생을 끝장냈다. 어쩐지 주군이 위기에 빠졌을 때 바람처럼 달려와 구해주는 멋진 역할을 자주 맡는다. 공손찬 휘하로 들어갈때는 위기에 빠진 공손찬을 구하면서 문추와 일대일 싸움을 벌여 쫓아내는데 이때부터 조운 버프가 시작된다.
연의에서는 조운이 잘생겼다는 설정인데, 정사에서는 조운이 잘생겼는지 모르지만 일단은 남자답게 생겼다는 언급이 있다.
연의에서는 유비군 합류가 더 늦춰져서 유비군에 합류하는 시기가 유비가 유표에게 의탁할 때로 변경되었고, 첫 만남과 재회의 과정이 드라마틱하게 각색되었다. 장판파에서는 아이까지 데리고 있으면서 홀로 무쌍난무를 찍는 조운을 위한 에피소드다. 거기다 더해 기껏 구해내온 아두를 유비가 던지며 조운에게 말하길 아이는 또 낳을 수 있지만 그대 같은 장수는 또 구할 수 없다라는 간지폭풍 같은 대사까지 하면서 조운과 유비의 의리를 부각시킨다.
정사에서는 관우, 장비, 마초, 황충이 사방장군에 임명되는데 여기서 조운은 빠져있다. 연의에서는 사방장군에 조운까지 포함되어 오호대장군이 된다.
소시민 두 명의 원수로도 유명하다.사실 두 명만 있는게 아니라 조운 손에 날아간 목 중에 소시민을 찾아보면 미친 듯이 많다. 그것도 대부분 뭐라 말도 하기 전에 댕겅. 국의는 정사에선 원소군의 객장으로 많은 공을 세웠으나 오만해져 처신을 잘못했다가 숙청당한 인물이다. 연의에서는 조운을 띄워주기 위한 희생양으로 조운에게 죽는다. 국의는 어느 쪽이 더 굴욕인지 애매하다. 상장의 잡장화 VS 아이돌 버프 먹은 캐릭터에게 사망
고람은 원소군 장수였으나 관도대전 중 장합과 함께 조조에게 투항했다. 정사에서 이 사람은 이것으로 등장 끝. 연의에서는 여남에서 조운에게 죽는다. 그래도 고람은 분량은 챙겼으니 아주 손해는 아니다.
이릉에서 대패한 유비를 구하기도 했는데 주연을 죽인 것이 바로 이때의 일이다. 조운이 오의 명장중 하나인 주연을 죽이는데 이게 문제다. 이릉대전 이후의 오나라 분량 일부까지 죽여버렸다. 오나라팬들과 주연팬들의 천하의 둘도 없는 원수. 특히 국의, 고람은 일기토 묘사를 넣어서 확실히 버프캐라는 느낌을 주는데 주연은 그런 묘사도 없는걸보면 나관중이 주연까인 듯하다.
막판에는 한덕과 그의 아들들을 죽여 한 일가를 완벽히 파괴함으로써 화려한 마무리를 했다.
물론 이런 사건들은 전부 허구다. 이밖에도 상산초옹 에피소드, 북벌에서의 제갈량과의 환상 듀오, 세심하고 꼼꼼한 이미지, 문앙의 조운재림 등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조운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다.
관우와 비교하면서 조운과 엮이면 손해라는 인식이 있는데 딱히 그런 것도 없다. 특히 안량, 문추가 버프받는 건 관우만의 문제가 아니라 조조군 장수들 때문인데, 연의 상으로 안량, 문추가 조조군 장수들만으로 처리가능한 쩌리라면 굳이 관우를 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서 버프를 받는 거다. 그리고 정사에서도 안량은 정말로 관우 아니면 잡기 드럽게 힘든 괴수였을 가능성이 크다.
유비 사후 촉의 최고참 장수가 되고 나서 남만 정벌때 위연과 같이 멋대로 몰래 나가 금환삼결을 벤다든가 북벌때 남으라 하니 뒷방 늙은이 취급하냐며 제갈량에게 항명을 해 어거지로 선봉을 따내는 등 의외로 호기를 부리는 장면도 나온다.
가족 관계
조운의 아내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썸녀 번씨와는 혼인은 거절했고 마운록이란 아내는 근대에 지어진 소설 반삼국지에서 나오는 오리지널 캐릭터라서 실존인물이 아니다. 손연아(孫軟児)도 민간 설화에서만 나오는 조운의 아내라서 마찬가지로 실존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아들이 두 명 있었다. 장남 조통이 후사를 이었고 관직이 호분중랑(虎賁中郎), 독행령군(督行領軍)에 이르렀다. 차남 조광은 확실히 무장으로서 살았는데 아문장(牙門將)으로 강유를 수행해 답중(沓中)에서 싸움에 임하다 전사했다.
사실 차남인 조광이 아문장으로 활동한 연도가 260년대 임을 생각해보면 이들의 출생년도가 입촉 이후 상당히 뒤였을 가능성도 있는데 왜냐면 다른 유비의 숙장들인 관장이나 미축 같은 공신들은 손자 대까지 촉한에서 뭔 벼슬을 했는지 기록이 있는 반면, 조운의 자손들은 아들 대에서 이후 얘기가 없는것을 보면 손자가 없거나 촉한 멸망 전에 벼슬을 할 만큼 자라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황충의 아들 황서의 예로 황충이 생각보다 젊었을 가능성이 언급되는데 조운의 자손들도 비슷하게 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한편 청대의 지리지인 강릉현지에 나오는 전설에 따르면 관평의 아내는 조운의 딸 조씨라고 한다. 여기에 따르면 조씨와 관월은 형주가 함락되자 익주로 피신하지 못했고 오나라에 억류된 채로 관(關)씨에서 문(門)씨로 성을 바꾸고 평민이 되어 공안에 숨어 살았다. 이 때 여몽이 배려해준 덕분에 이들이 몰래 숨어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서진의 사마염이 오를 멸하고 삼국을 통일하자 칙서로 관씨로 복권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고 한다. 일단 관평의 후손들이 있다는 사실이나 관월의 존재 자체는 조작이 없다고 인정받고 있다.#
이 일설에 따르면 관평의 아들 관월(關樾)은 조운의 외손자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삼국지연의라든가 평화, 진수의 기록, 자치통감, 배송지 주 등에는 이런 기록이 없어서 둘의 사돈 관계가 묘사되거나 언급되지 않는다. 실제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도 조운의 후손은 조통, 조광 형제만 언급하고 있으므로 확언은 어려울 듯하다.
기록에 관한 논란들
이렇듯 인물됨에 있어서는 흠잡을 곳 없는 훌륭한 인물이었지만 조운의 역사적 기록에 관련해서는 여러 의혹이나 논란이 있는 편인데, 이는 아래에 후술될 내용과 같다.
나이 논란
사서에는 생년이 밝혀지지 않으므로, 연의와 대부분의 삼국지 관련 문학 작품에서 조운은 유비와 관우보다 나이가 어리게 묘사되고, 제갈량과 마초보다 조금 많게 그려진다.
현재 사천성 성도시 대읍현에 가면 조운의 묘가 있다. 그 묘비에는 조운(趙雲)이 한 환제 영흥 원년(153년) 출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이 묘비에 따르면 유비보다 8살이나 더 많단 얘기. 하지만 당대에 가까운 연대를 살아갔던 인물이자 조운의 아들 조광과 같은 시기 같은 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했던 진수가 생년조차 표기 못할 정도로 이미 조운의 생년은 오래 전에 망각되었으며, 묘비는 청나라 강희제 연간에 세워지고 문화대혁명 때 파괴된 것을 1996년에 다시 건립하여 세운 것이다. 따라서 비문의 기록은 삼국지연의나 민간전승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사학계에서는 그를 170 ~ 171년 생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운의 행적을 세세하게 기록한 조운별전에 생년에 기록이 없었거나 혹은 기록했지만 배송지가 신뢰도가 떨어진다고 생각해 기록하지 않은건지는 불명이다, 조운별전의 신뢰성에 의심을 두는 사람들은 이 점을 문제로 제기 하기도 한다.
호위무사설과 실상
일단 조운의 별칭인 일신도시담 호위장군(一身都是膽 虎威將軍)이라는 별명의 '호위'때문에 이것만듣고 호위무사가 아니냐 착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한자를 보면 알듯이 저 호위는 사람을 지키다의 호위가 아니라 호랑이같은 위세를 떨쳤다는 뜻이다. 애초에 별칭이라 한데서 알듯이 저것도 정식관직명이 아니라 그냥 별호 즉 별명이다.
실제로 조운은 정사에서부터 기병부대의 지휘관으로 처음 등장했고, 상술했듯이 전업 호위였던 허저나 전위와 비교해보면 이들이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이상 사시사철 조조 근처에서 떨어진 적이 거의 없던 것과 달리 조운은 지령을 받고 유비의 곁에서 떨어져 여러 군사 업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진수의 기록이나 하후영에 비교된다는 기록을 보면 친위부대의 대장직도 겸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근위대는 어디까지나 유비의 직할 부대이자 정예병들을 뜻하는 것이지, 호위에만 전념하는 부대도 아니다. 비유하자면 개인 경호병들과 수도방위군의 차이다.
일단 이른 시기에 황제를 옹립하며 큰 세력이 된 조조와 달리, 유비는 형주를 차지하기 전에는 그다지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으므로, 군주의 호위부대와 친위부대가 혼용되었을 것이다. 유비 사후에 조운과 유사한 역할을 맡았던 진도의 부대가 성도로 돌아가지 않고 영안에 남은 것을 보면 최소한 유비의 황제 즉위 이후에는 분리된 듯 하나, 결국 영안에 남았다는 의미는 유비의 고참병들을 수도방위군으로 해석하기에도 무리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애초에 직접 군대를 지휘하던 군주들의 경우, 이 둘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들이 지휘한 부대의 성격이 서로 달랐다기보다는, 믿을만한 친족도, 거느린 군대도 많았던 조조는 호위임무와 전투지휘를 각각 다른 사람들에게 맡길 수 있었던 반면, 둘 다 부족했던 유비는 소수의 믿을만한 고참부하, 즉 관우, 장비, 조운이 필요시마다 이리저리 가리지 않고 굴렀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거나 아무리 해석한다고 해도 조운은 호위, 친위부대의 장군이지 개인 경호원인 호위무사는 아니다.
사실 유비가 조운과 같은 침실에 누웠다는 별전의 기록에 비추어봤을 때 이는 신선한 일은 아니다. 조운은 애초부터 유비의 지근거리에서 함께 했다. 물론 지근거리에 있다보면 경호도 겸할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겸하는거지 본업으로 보긴 힘들다. 정사나 별전의 기록을 보면 조운은 허저나 전위처럼 경호에만 전념한게 아니라 폭넓게 활동했다. 게다가 당시 고대 중국에서 신하나 부하 장수가 군주와 한 침실을 같이 썼다는 건 그만큼 군주와 부하의 관계가 돈독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말 그대로 단순히 부하가 군주의 신변을 경호하기 위함이나 그렇고 그런(...) 관계였다는 뜻만 있는 게 아니다.
촉한에서의 위치
관우, 마초, 장비, 황충 다음 가는 서열의 위치. 연의에서 흔히 오호대장군이라 불리는 5인의 위상이 무관으로 촉에서 드높았으니 촉의 무관 중에서는 최상위권의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계급은 기곡 전투에서의 패배로 위연보다 낮거나 하는 등 변동이 좀 있다.
논란이 나온 이유는 복합적인데 연의에 묘사된 모습에 대한 반발, 장수로서 확실한 공이 있는 4인과 달리 눈에 띄는 군공이 없는 조운이 같은 위치에 둘 만한가에 대한 문제, 정사 기록은 부실한데 대부분의 활약상이 상대적으로 신뢰도가 떨어진다고 보는 별전에서 발췌되었다는 것, 조운보다 아래라 여겨졌던 다른 촉한 장수들의 재평가 등이 있다. 특히 위연을 재평가 하는 축에서 이러한 반론을 제기한다. 진도는 기록이 없고, 오의는 인지도가 떨어지고, 왕평은 1세대라기 보단 2세대 축에 드는 장수다. 거기에 오의, 위연 모두 최종 관직이 조운보다 높았다.
여기에 더해서 정사로 보면 미축, 미방보다 빨리 유비군에 합류한 고참 중에 고참인데 전혀 고참에 대한 우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축은 실질적인 권위는 못해도 명분상으로는 제갈량보다 윗줄로 대우 받았고, 간옹과 손건도 미축에는 못 미쳐도 우대를 받았는데 조운은 이런 면에서 소외된 듯 보인다는 것이다.
거기에 유비의 한중왕 즉위와 더불어 황제에게 올리는 표를 보면 관장마황조로 묶이는 다섯명 중에 유일하게 조운의 이름만은 찾을 수 없다.
평서장군 도정후 신 마초, 좌장군 장사 영 진군장군 신 허정, 영사마 신 방희, 의조종사중랑 군의중랑장 신 사원, 군사장군 신 제갈량, 탕구장군 한수정후 신 관우, 정로장군 신정후 신 장비, 정서장군 신 황충, 진원장군 신 뇌공, 양무장군 신 법정, 흥업장군 신 이엄 등이 120인이 상언합니다. - 선주전
흔히 생각하는 촉한의 최고위 무관 5인 중 한명이라기에는 다른 넷에 비해 권위나 실질적인 네임밸류 그리고 관위 등 모든 것이 부족한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가장 높았을 때를 보면 관우, 장비 다음이었고, 가장 낮았을 때도 위연, 진도보다 서열이 한단계 낮았지만 (당시 위연의 직책은 독전부 행 승상사마 2품 진북장군, 조운의 강등된 직책은 3품 진군장군) 이것도 기곡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강등되기 이전에는 조운의 직책이 2품 진동장군으로 위연, 진도보다 높았다. 실질적으로 위연의 직책이 조운을 뛰어넘게 되는 것은 조운이 죽은 이후인 230년 양계 전투에서 곽회를 격파하고 전군사 정서대장군 가절에 임명되었을 때부터다.
촉한의 장군직 서열은 거기장군, 표기장군 > 사방대장군 > 사진대장군 > 사정대장군 > 사방장군(전후좌우) > 사진장군 > 사정장군으로 분류 할 수 있다. 보통 사방사진사정대장군 등을 기존 장군직에 대(大)자를 붙여 높여부르는 칭호로 알고 있으나 엄연히 다른 관직이다. (위연이 230년에 임명된 직책은 사정대장군의 하나인 정서대장군으로 사정장군 중 하나인 정서장군과는 엄연히 다른 직책이었다.) 참고로 촉한의 관직 서열에서는 사진장군이 사정장군보다 높다. 그 체계가 아래의 잡호장군에게까지 이어지는 모양이며 그 위의 서열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대장군(1품)을 제외하면 전부 다 서열상 2품 관직이다.
1차 북벌 당시 조운의 직책이었던 진동장군은 본래 후한의 관직 체계의 의하면 사진장군 중에 하나로 거기장군 바로 아래의 직책으로 결코 낮은 서열의 직책이 아니었다. 당연히 유비군(촉한)의 군부 내 투톱은 관우와 장비였다. 이후 마초가 합류하면서 둘과 동렬로 평가받았다.
선주(유비)는 익주목을 겸했다. 제갈량을 고굉(股肱, 다리와 팔, 유능한 보좌관)으로 삼고, 법정을 모주(謀主, 모사)로, 관우, 장비, 마초를 조아(爪牙, 손톱과 이빨, 용맹한 장군)로, 허정, 미축, 간옹을 빈우(賓友, 손님과 친구, 친한 벗과 같은 사이)로 삼았다. 동화, 황권, 이엄 등은 본래 유장이 임용했고, 오일, 비관 등은 유장의 인척이고 팽양은 유장에게 배척받았고 유파는 예전에 시기받고 원망한 자이니, 이들 모두를 요직에 두어 재주를 다하게 하니, 뜻있는 선비가 다투어 힘쓰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선주전
유비가 한중왕에 오른 뒤 관우, 장비, 마초, 황충을 각각 전우좌후(前右左後)의 사방장군으로 임명하면서 황충도 같은 열에 서게 된다. 관우가 황충과는 동렬에 설 수 없다고 반발하기는 했지만 비시의 말을 듣고 곧 받아들인다.
이 부분만 보면 열전이 묶인 다른 4명과는 생전에 동렬에 서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입촉 전에는 관우, 장비 다음 가는 장수(편장군)였고 화양국지에서는 조운의 익군장군 직책을 사방장군(전장군, 후장군, 좌장군, 우장군)과 나란히 언급한다.
정리하면 처음은 관, 장, 조의 위치였지만 입촉 때 독립 군벌로 위상이 높았던 마초가 합류하고, 한중전 중 하후연을 죽이는 공을 세운 황충의 대두로 자연스럽게 위치가 뒤로 밀린 것이다. 한중전 이후의 관직을 보면 '관우 (사방장군, 가절월) > 마초, 장비 (사방장군, 가절) > 황충 (사방장군) > 조운' 순이 된다. 이후 진군장군으로 강등되기 전까지 위연 등 보다 위계상 윗줄로서 어디까지나 4인에 미치지 못했을뿐 권위가 크게 부족하지는 않았다.
다만 여기까지의 설명은 조운의 위계상 서열이 어느 정도였는지의 대한 것이고, 조운이 4인과 나란히 설만한 인물인가 아닌가의 설명은 되지 못한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는 조운을 유비의 조아라거나 한고제의 측근이었던 하후영 등에 견주는 등 후한 평가를 내렸으며, 조운을 관장마황과 같은 전에 두어 조운이 이들 4인과 나란히 둘만한 인물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정작 정사 조운전은 별전을 빼면 황충전에 버금가도록 매우 부실하여 현대에는 정사에 기록된 유선을 구한 공 정도로는 4인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만 자치통감은 조운별전의 내용을 긍정하고 있으며 현대의 사학자들도 조운별전의 내용을 온전히 부정하는 학자는 드물다. 따라서 별전과 자치통감에 의거해 조운에 대한 진수의 평가에 문제가 없다는 이들과 아무리 그래도 진수의 평가는 나머지 4인과 같이 두기엔 제고의 여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대립하고 있다.
이외에 조운은 촉한에서 시호를 받았다고 밝혀진 12명 중 한명이다. 조운의 행적에 부정적인 사람들은 시호를 가장 늦게 받은 것에 주목하거나 유선을 구했으니 당사자가 우대한 것 아니냐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말 총애 받은 진지는 사후 바로 받은데다 진수가 직설적으로 총애해서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그 관장마황(그리고 방통)도 사후 수십년이 지난 260년에야 시호를 받을 수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조운이 늦게 시호를 받은 것이 폄하될 이유는 없다.
조운별전의 기록 신뢰성 논란
조운별전은 배송지가 정사 삼국지에 주석을 달면서 참고한 사료 중 하나로 작자와 작성 시기는 모두 미상이다. 배송지가 주석으로 단 부분 이외에는 소실되어서 거의 남아있지 않다. 사실상 정사 삼국지에 주석으로 달린 부분이 현재 남은 조운별전의 전부라고 봐도 좋을 듯.
별전 비판론
조운별전의 신뢰성을 비판하는 입장은 다음과 같이 정사의 내용과 교차검증 가능한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본전(삼국지 정사)에서 선주가 평원상일 때, 조운은 이미 수종하며 기병을 주관했다. 별전에서 이르길 "원소에게 나아가, 조운은 업에서 만났다.", 즉 건안 5년 후에 있는 것이니, 이는 어긋나고 뒤엎는 것이라, 믿을 수 없다. - 하작
조운의 미덕은 모두 별전에 보이나, 본전은 간략하여 이에 미치지 못하니, 어째서인가? - 이광지
제갈량의 상벌은 엄숙하여, 조운은 오히려 호(號)가 낮아졌는데, 그의 아랫사람이 어찌 과분하게 하사품을 받겠는가? 거듭 그것이 그렇지 않다고 밝히기에 충분하다. 별전 류는 모두 자손이 과분하게 미화하는 말이기에, 승조(진수)가 취하지 않은 것이다. - 하작
조운전의 기술이 매우 간략한 반면, 조운별전은 정사 조운전에서는 간략하게 쓰인 내용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조운의 활약을 찬양한 내용이 있어 청나라 사가 하작은 거의 많은 부분에서 비판을 했고, 이광지도 조운별전에 대해 의문을 표했으며 통감집람에서 조차 조운별전의 일부 내용은 이해할 수 없다고 하고 있을 정도다. 이렇게 촉한정통론자에 속하는 사가들의 비판도 있을 정도로 조운별전 자체의 신뢰도는 좋지 못한 편이라 교차 검증이 없이 그대로 믿어버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문제는 진수가 본전에 조운별전의 내용을 제외하고 넣지 않은 탓에 조운의 공적이 거의 모두 조운별전에서 유래된 것이 많다는 것이다. 주석으로 달린 조운별전을 제외하면 우리가 아는 조운의 공은 찾기 힘들다.
타 별전의 경우 그 인물의 일화나 공적을 보조해주는 경우가 많지만 조운의 경우 그 공적이나 공이 모두 조운별전에 기록된 것에서 문제를 삼을 수 있다. 한중전에서의 '호위장군' 일화같은 경우, 황충전, 장익전에서 어떠한 언급도 찾아볼수 없다. 하후란, 장저 등의 인물 또한 정사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기에 타 별전과 같은 신뢰성이나 명확성을 확신할 수가 없는 것이 조운별전의 현실이다.
이에 대해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예로 들기도 하고 자치통감은 분명히 신뢰성이 높은 명사서로 사마광이나 자치통감의 다른 편저자들이 조운별전의 신뢰도를 긍정적으로 봤다는 의의가 있어 별전의 전반적인 신뢰도를 높이는 정도만 의의를 찾을 수 있을 뿐 그렇다고 별전의 신뢰도에 검증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조운별전을 비판하는 모든 사람들이 조운 자체의 능력이나 위치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삼국시대의 기록은 빠르게 열화되었고, 특히 촉의 경우 특히 기록이 적어 후주전에는 진수가 '사관이 없어,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조차 거론하고 있다. 이는 정통성의 입장에서 삼국을 통일한 서진과, 계보가 일치하는 위도 마찬가지라서 위의 오대장 같은 거물도(서황, 장료를 제외한) 정사평에서 사적과 행실이 부합되지 않는다는 진수의 평이 있을 정도다. 특히 무관의 경우는 초기 무장들의 기록이 굉장히 적을 수 밖에 없는데, 조운별전은 이 모든 것을 부정하고 '조운'의 공적을 세세하고 자세하게 서술해 놓았다. 이것만으로도 조운별전은 신뢰성이 낮아질 수 밖에 없다.
별전 옹호론
별전류에 대한 비판이 대부분 조운별전에만 집중되는 것은 문제다. 별전 류라면 화타별전, 순욱별전, 비의별전, 관로별전, 제갈각별전, 우번별전, 혜강별전, 손자별전, 병원별전 등등 후한서, 정사 삼국지에 여러 주석으로 인용된 별전도 많은데 이 별전들 역시 조운별전, 혹은 그 이상으로 기록이 자세하며 조운별전처럼 해당별전에만 나오는 내용들이 있다. 그럼에도 조운별전의 내용만 집중적으로 까는 것은 문제가 있다. 심지어 혜강별전이나 우번별전은 배송지가 인용하며 다른 사서와 내용이 다르다고 했으나 조운별전은 배송지가 그런식으로 비판하지 않았다. 삼국지연의의 버프가 지나친 것에 대한 반동으로 조운별전의 내용을 무작정 신뢰하지 않으려는 경향도 있는 것이다. 거기에 위의 별전류는 일신의 무용을 뽐낸 무장들도 아니고 조운처럼 상대적으로 팬층을 거느린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화제가 되지 않는 면도 있다. 그리고 저들 별전도 이야기에 과장과 살이 더 붙는것이 보여지는데 그에 대한 얘기는 전혀 없다.
게다가 저 별전들 가운데 사마광의 자치통감에 실린것은 조운별전을 제외하고는 순욱이 삼공을 사양했다는 순욱별전의 내용 한 단락과 한중에 있는 제갈량을 정벌하려는 조예를 말리고 팽기라는 인물을 평한 손자별전의 내용뿐이다. 그러나 조운별전의 경우 굵직굵직한 내용들 상당수를 사용한다. 삼국시대 별전류 가운데 자치통감의 편저자들에게 신뢰받은 별전 내용들은 겨우 이 정도 뿐이다. 그만큼 별전류에 대해서 가려서 봤다는 뜻이고 조운별전은 별전 류 가운데 유독 신뢰받은 기록이란 뜻이다.
진수가 비록 정사에서 조운별전을 제외했을지 모르나 조운별전을 의식한 기록이 많다. 관장마황조전에 조운을 다른 4명의 상장들과 같이 포함시킨 것과 진수가 조운을 한나라의 개국공신인 하후영에 비한 것도 그렇다. 당시 조운의 위상이 관장마황에 버금가는 위상인 것도 있고 진수가 조운별전을 의식하지 않았으면 애당초 조운에 대한 상당히 후한 평가를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정사 삼국지 조운전에서 조운이 당양 전투에서 필마단기로 감부인과 아두를 구출한 일화가 하후영이 팽성 전투에서 유방의 아들과 딸들을 뛰어난 기마술로 구출한 일화와 비슷하지만, 인물평에 조운이 유비의 조아와도 같은 존재이며 강직하고 용맹한 장수라고 평을 내리는 것을 보면 정사의 내용만 가지고서는 진수가 왜 이런 평을 내렸는지는 이해가 안 간다는 것이다. 진수가 정사 삼국지 편찬 당시 조운별전에 해당하는 기록들을 읽어봤다는 얘기가 된다.
게다가 진수는 정사 삼국지를 너무나 간략하게 써놨기 때문에 꼭 해당 열전에 있었어야 할 내용도 주석을 참고하지 않으면 내용을 알 수 없는 상황도 많다. 가령 정사 삼국지 강유전 본전만 참조하면 강유는 그냥 촉한이 멸망한 후 종회의 선봉이 되었다가 종회의 반란에 위군이 분노해서 종회가 죽었을때 휘말려 최후를 맞이한 것 뿐이다. 그러나 정사에 주석으로 달린 한진춘추, 화양국지, 진양추를 참고하면 강유가 종회를 이용해 촉한에 대해 복국을 실행하려고 했으며 그것이 실패하여 죽었고 촉인들이 안타까워 한다는 내용까지 덧붙여진다. 정사 삼국지 본전만 봐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이야기인데 진수는 이걸 빼놨고, 심지어 원소전에는 아예 원소가 명망을 얻게 된 계기인 6년상에 대한 내용이나 원소가 계교 전투에서 공손찬을 어떻게 이겼는지, 공손찬과는 어떤식으로 싸웠는지조차 본전에 싣고 있지 않다. 당장 배송지가 주석을 달게 된 계기도 진수의 정사 삼국지 본전이 너무 간략해서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기 어렵다는 송문제의 지적 때문이었다. 진수가 사적을 쓰면서 중요한 내용을 빼놓음이 적지 않음이 많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본전(삼국지 정사)에서 선주가 평원상일 때, 조운은 이미 수종하며 기병을 주관했다. 별전에서 이르길 "원소에게 나아가, 조운은 업에서 만났다." 즉 건안 5년 후에 있는 것이니, 이는 어긋나고 뒤엎는 것이라, 믿을 수 없다. - 하작
또 하북에 있던 조운의 행적을 설명할 때 잠시 언급했듯이 하작의 지적이 틀렸다는 얘기가 있다. 조운별전에 나오는 조운이 유비를 따르게 되는 시기는 조운이 공식적으로 유비를 따르게 된 시기를 말한다. 실제 조운이 유비가 평원상을 지낼 때부터 따랐다면 반드시 서주 관련 기록에도 나와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당시 조운은 공손찬의 부하였다. 그가 마음대로 공손찬을 버리고 유비를 따랐다고 보기 어렵다.
실제 조운별전 기록을 보면 조운은 자신의 형이 죽자 형의 상례를 핑계로 공손찬을 져버리는데 그러면서 바로 유비를 따르면 세상 사람들의 욕을 먹기 때문에 따르지 못하고 언젠가 다시 만날 걸 기약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 부분은 딱히 조운을 미화한 부분이 아니다. 형의 상례를 핑계로 조운이 유비가 평원상을 지내던 시절에 공손찬을 버리고 낙향했다는 기록일 뿐이다.
이 기록은 정사 삼국지 조운전에 나오는 유비가 평원상일 때 조운이 기병을 주관했다는 기록의 바로 뒤의 일이므로 어긋나지 않는다. 또한 조운은 유비가 서주를 여포한테 잃고 예주목을 하던 시절에도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하다못해 조운과 버금가는 맹장이면서도 기록이 없어서 비중이 낮은 진도조차 예주에서부터 유비를 섬겼다고 기록이 나오는 마당이다. 따라서 조운별전 기록은 정사 삼국지 촉서 조운전에 기술되지 않은 부분을 오히려 보충해준다고 볼 수 있다.
하작은 입촉 직후 논공행상에서 조운의 간언으로 당시 여론을 물리친 것에 관해 제갈량이 주관했을 회의에 한낱 무관의 의견을 들어야 할 정도로 논의가 이루어 지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남의 명성을 가로챈 것이라 하거나, 이릉대전 직전 유비를 말린 것에 관해 대전 후 제갈량이 법정을 언급한 것과 제갈근이 유비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이 조운의 논리와 비슷한 것, 조운의 명성이 법정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들어 별전을 쓴 후손이 모방한 것이라 주장했다. 또 1차 북벌 이후의 포상은 제갈량이 상벌에 엄격함을 들어 조운의 미담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일축하고 있다.
그러나 하작의 의견은 별전은 믿을 수 없는 사료라는 것을 사고의 전반에 깐 상태에서 제갈량의 능력만을 공경하고 조운의 경력이나 능력, 발언권은 지나치게 낮잡아 본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리고 제갈량에 대해 평할 때 상벌에 엄정해 아랫사람들이 포상을 바랄 수 없다고 했는데, 제갈량은 법정이 사적제재를 가해 주위의 탄원을 받을 때 유비에게 필요한 인물이라 그럴 수 없다고 하거나 장완이 죄를 지었을 때 구명을 청하는 등 엄정함만으로 정사를 돌본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한 면만을 보고 다른 면을 보지 못하니 하작의 의견은 중하게 보기 어려운 면이 있다.
한중 공방전의 일신시담 일화의 경우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황충은 별개의 작전을 하러 나갔고 조운은 영채를 나갔다가 황충과는 전혀 관계없이 별개의 공을 세웠기에 황충전에 나오지 않았다고 볼 수 있으며 자치통감에서도 이 기록에서 장익과 장저에 관한 기록에 대해서만 배제하고 있다. 즉 이것 역시 배송지가 1차 검증하고 통감이 2차 검증한 셈이 된다.
통감집람에서 의문을 표한 부분은 제갈량이 융중대를 세울 때 오는 원군으로 삼을 수는 있으나, 도모할 수는 없다고 했는데 유비를 막지 못하고 뒤늦게 법정을 추념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 것으로 조운별전 쪽을 부정적으로 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의문은 위의 유엽이 유비가 오를 칠 것이라고 예상했고 실제로 오를 공격하는 것으로 유비에게는 관우와의 관계가 융중대나 대의보다 우선이었다는 것을 보였기에 해소 가능한 부분이다.
앞서 촉한에 긍정적인 인사들이 조운별전을 부정적으로 본 것을 언급했는데 어느 국가를 좋아하든 싫어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모든 학자들이 별전에 부정적이 었던 것은 아닌데 별전을 주석으로 추가한 배송지나 자치통감에 실은 사마광, 호삼성 같은 인물들은 별전에 긍정적이었다. 이처럼 별전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게 누군가인가에 따라 별전의 신뢰도가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것이 아니니 촉한의 긍정적인 사가들이 부정했으니 신뢰도가 낮다는 주장은 부질없는 이야기다.
정사 삼국지 관장마황조전에서는 관우, 장비, 마초에 대한 평이 매우 박한 반면에 황충, 조운에 대한 평은 그냥 찬양 일색이다. 정사 조운전에 내용만 보고서는 왜 진수가 저렇게 찬양 일색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사 기록만 보면 진수가 관장마황조전을 저술할 때 조운별전은 물론이고 해당 장수들에 관련된 별전이나 가전류의 기록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애당초 기록도 없는데 그거라도 참고하지 않으면 아예 평가를 내리는 거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배송지가 조운별전을 인용할 때도 그나마 신뢰있는 내용들만 추려서 실은 것이다. 실제로는 저 내용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보이나 거의 민간 전설에 가까운 내용들이라 저 내용들만 싣게 된 것으로 보인다. 진수가 정사 삼국지를 편찬할 당시에는 조운별전도 비슷한 시기에 쓰여져서 내용이 훨씬 풍부했을 것이다.
배송지가 인용한 것을 보면 관련 정사와 교차검증해 보면 앞뒤가 맞는 내용이 있다. 형남 공략전, 한중 공방전과 관련한 조운의 처신과 전공은 딱 봐도 사실로 보인다. 자치통감 같은 기록에서는 하작이 비판한 키같은 내용은 배제하고 북산에서의 활약 등 하작이 비판하지 않았던 기록들을 참조한 부분이 꽤 있다. 게다가 조운별전의 기록중 배송지가 자신도 못 믿겠다고 말한 부분은 없다는 점도 중요하다. 되도 않은 내용이었으면 배송지가 아예 참고하지 않았을 테고 뻥카로 보기엔 세세한 부분이 많아서 전부 지어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단적으로 조운별전에서 조운이 편장군이 된 시기나 형남 정벌 관련 내용을 보면 앞뒤가 맞는다.
조운별전을 비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별전이 연의식으로 조운의 무공을 과장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데 오히려 이들의 주장이 더 과장된 것이다. 조운별전에서 조운의 무공을 강조하는 것은 한중공방전의 일신시담 일화와 1차 북벌에서 손수 뒤를 막아 피해를 줄였다는 부분 뿐이고 심지어 별전에서 묘사한 장판파에서 유선을 구출한 부분은 무슨 연의에서 나온것처럼 조운이 호표기 다 박살내고 아두를 구해왔다는 내용이 아니라 유비의 신임을 강조하는 부분에 불과하다. 일신시담 일화는 하후연을 참살한 황충과 함께 유비의 조아로까지 평가받았던 조운이라면 충분히 있을법한 군공이고 손수 뒤를 막아 피해를 줄였다는 부분은 본전에서도 조운이 불리한 상황에서도 굳게 지키어 대패에 이르지 않았다라는 기록과 합치된다. 오히려 배송지와 자치통감이 인용한 별전의 부분은 언급했듯이 조운의 인품, 군주의 신임, 조운의 정치 부분에 대한 설명을 주로 하고 있다. 이걸 가지고 별전에서 조운의 군공이 연의만큼 과장되었네 주장하는것은 오히려 연의의 시각 때문에 조운별전에 편견을 가진 것이라고 밖엔 판단할 수 밖에 없다.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도 조운별전 부분에 별전 비판에 대한 내용을 실었지만 해당 문단 말미에
그러나 이러한 류의 관점은 다수가 아니며 일부 사학자들에 의해 지나치게 의고한다고 지적받고 있다.
「然而,此類觀點並不多見考,並被一些史學者指過分疑古」
라는 내용으로 마무리했다.
조운이 무관이 아니라 문관이었다는 비판도 조운별전을 통해 나온 것이다. 조운별전을 무작정 부정하면 자신들이 조운별전에서 인용한 사료도 전부 부정해야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조운의 고향인 하북성 스자좡(石家庄) 시에 있는 조운의 사당.
조운 사후 후세에서의 조운의 일반적인 이미지는 용모단정한 미남인데 용감무쌍하고 그 용기에 걸맞는 실력까지 있으면서 사생활에서도 트집잡을게 없으며 윗사람에겐 깍뜻하고 아랫사람에겐 친절하며 그 무엇에도 과욕을 드러내지 않았고 인간관계도 매우 좋은 엄친아아 그냥 사람이 아니구나로 완벽한 인간상으로 묘사된다. 이런 이미지와 그로 인한 인기때문에 수많은 삼국지 관련 매체에서 주로 얼굴마담으로 꼽힌다.
실제 정사에서도 언급이 적고 공도 유비의 적자 구출빼곤 드러낼만한 공이 별로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비 사후까지도 촉나라 실세의 측근으로 꼽힐 정도로 정치적 입지가 탄탄했다. 이는 조운이란 인물이 능력도 능력이지만 공사 양측으로 책잡힐 만한 행동자체를 하지않았고 조운이란 인간 자체가 여러의미로 매력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런 면때문에 조운은 십수세기 전인 송나라 시절부터도 탄탄한 팬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현대에서 재평가가 이루어짐에 따라 몇몇 네임드가 비판되는 와중에도 상술한대로 책잡을만한 흠이란게 거의 없기때문에 대접이 나빠지긴 커녕 가면 갈수록 좋아지고 있어서 일본의 삼국지 인기 랭킹에서는 늘 5위권 안에 든다.
옛날에도 인기가 있었는지 관우와 장비 다음으로 민간 설화가 많다. 특히 옥란백용구에 대한 설화에서 조운의 말이 백마라고 묘사되었기에 이후 '조운의 말 = 백마'라는 설정이 많은 소설과 미디어에 고착되었다. 그 외의 설화 내용은 조운/전설 문서 참고. 이런 설화류에서 등장하는 조운의 특징적인 묘사가 '우람한 풍채와 흰 피부', '상처 하나 없는 깨끗한 몸'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구전 설화들부터가 뭔가 조운은 '완전무결'한 이미지, '미남자' 이미지가 강했던 셈이다.
여담으로, 나관중이 이렇게까지 조운을 띄워준 이유는 나관중의 고향이 조운과 같은 상산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나관중본에는 조운이 아두(유선)를 구하기 전에 주모를 핍박해 죽게 만들어 충신의 사당에 들어갈 자격을 잃었다고 써져 있다. 그리고, 삼국지연의에서 북부 지방의 지리가 틀린 점이 많아 나관중 상산 출신설이 반박되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조운에 관련된 설화가 많았고 그것이 연의에 반영된 점이 많았기에 조운의 활약상을 더 돋보이게 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동양에 비해 삼국지가 비교적 덜 알려진 서양에서도 이 이미지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리그 오브 레전드의 챔피언 신 짜오의 이름/설정/외형적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중국판에서는 조운과 성도 동자(同字)로 조신(趙信)이라고 쓴다. 또한 국내에 "대장군 신 짜오"로 발매된 스킨은 중국판에선 대놓고 이름이 조자룡 스킨이다. "대장군 자르반"은 여포. 둘 다 표절 시비를 걸어도 될 정도로 코에이의 진삼국무쌍에서의 이미지와 굉장히 흡사하다.
관련 속담으로 '조자룡 헌 창(혹은 칼) 쓰듯'이 있다. 원래 뜻은 어떤 것을 매우 익숙하게 다룬다는 것인데 어찌된 것인지 돈이나 물건을 헤프게 쓰는 경우에도 쓰이기도 한다.
위에 언급했듯이 조운의 묘는 쓰촨성 청두에 위치해 있다. 후세의 인기와는 달리 무덤은 의외로 초라한 편이다. 문화대혁명 전에는 명승지였다고 하는데 이 때 사라질 뻔 하다가 간신히 살아남았다고 한다. 조운의 팬인 이현세가 세계테마기행에 출연해 조운의 묘를 방문했을 당시엔 중학교 건물로 쓰이던 사당건물과 봉분만 남아 있고 묘역앞에는 돌과 잡초가 널려있는 모습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