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1식육상공격기(G4M)
미쓰비시 G4M 베티는 일본의 쌍발 엔진 육상 폭격기이다. 본래 해군을 위해 제작되었지만 육상 폭격기로 많이 쓰였다.
전장 : 19.94m
전고 : 4.90m
전폭 : 24.88m
익면적 : 78.1
자체중량 : 7000kg
완비중량 : 9500kg
최고속도 : 528km(순항속도 433km)
실속속도 : 120km
항속거리 : 4000~6000 km
승무원 : 7명
무장 : 7.7mm 기관총 4정, 20mm 기관포 1정,
어뢰 1발 or 2000kg 정도의 폭장 or Mxy-7 오카 로켓 특공기
한계 고도 : 9,500m
개전당시 일본해군의 한쪽 날개를 제로전투기가 담당했다면, 반대쪽 날개는 이 G4M 육상공격기(이하 육공기)가 하였다 할 수 있다. 흔히 알려진 “원샷 라이터”, “일식 라이터”라는 별명의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그 특유의 장거리 공격력과 정확한 뇌격에 의해 연합군 함선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역시 다른 일본기와 마찬가지로 개전초에 비하여 후반부로 갈수록 뒤쳐진 성능은 어찌할 수 없었으나, 일본해군에게 다른 선택의 방법이 없었다. 뇌격, 폭격, 수송등의 모든 분야에서 활약했던 육공기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4발엔진이 장착될수도 있었던 1식 육공의 탄생기
중일전쟁 당시 일본해군은 96식 육공기의 능력에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 G3M(코드명 Nell)이라 불리던 이 육공기는 단발기인 함재기들이 갈수 없었던 중국의 내륙에 폭탄의 비를 뿌리고 있었으며, 육군의 폭격기들에 비하여 전혀 뒤지지않는 활약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얘기하는 중경 대폭격의 주인공의 하나가 바로 이 G3M 육공기이다. 그러나 육군의 폭격기에 비하여 한가지 뒤떨어지는 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폭장 능력이다. 800kg의 폭탄밖에 탑재할수 없었던 점은 항속거리는 짧으나 최대 1.5톤의 폭탄이 탑재가 가능했던 육군기에 비해 해군 고위인사들의 맘을 아프게 했던 것이다. 그리해서 1937년 일본해군은 96식 육공기의 제작사인 미츠비시사에 신형기 개발을 의뢰하게 됩니다. 신형기의 개발을 추진하게 된 미츠비시의 혼조기사는 96식 육공기의 파일럿들과 대화하여 96식 육공의 약점을 보완하게 될 방법을 찾게 되었고, 빈약한 무장과 장갑 때문에 더욱 빈약했던 중국의 전투기들에게 쉽게 격추당했다는 불만을 듣고, 이를 극복할 방법을 계획, 4발기의 폭격기 개발을 추진하게 된다.
해군에게의 1차 계획보고 당시 3톤의 폭탄을 탑재할수 있다는 장점을 미끼로 해군을 설득하였으나, 해군은 이에 반대하여 4발 폭격기 1대보다는 2발 폭격기 2대가 더 좋다는 논리로 4발 폭격기 계획을 취소시킨다. 게다가, 혼조기사의 보고에 힘입어 오히려 2발기에게는 무리인 속도 400km이상 항속거리 4,800km이상이라는 엄청난 숙제를 내주게 된다. 그러면서 무장은 96식 육공기에서 발전할 필요없다는 조건을 겁니다. 96식 육공에 사용하던 830마력 킨세이 엔진으로는 도저히 무리였으며, 새로 개발된 1,000마력 킨세이 엔진에게도 무리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기술진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결국은 1식 육공기에게 “라이타”라는 별명을 갖게 해준 주익에 연료탱크를 만드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또한 여송연 형의 기체는 효율적으로 폭탄을 내장하게끔 하였으며, 추가적으로 연료탱크를 장비하여 항속거리를 확보할수 있었으며, 혼조기사의 의지이던 방어력 보완을 위해 방어총좌도 더 만들수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은 428km의 속도와 4,287km의 항속거리라는 불가능으로 생각되던 사양을 만족하게 되었다.
해군은 크게 만족하여 즉시 양산을 지시하였으며, 양산당시 엔진은 더욱 출력이 강화된 1,410마력 신형엔진으로 바뀌어 작전고도도 4,000m에서 5,500m까지 상승하였다. 또한 높아진 출력을 모두 방호장치에 투자하여 주익의 연료탱크에 자동소화장치, 방탄고무를 설치하였다. 최초양산형은 G4M11형으로, 엔진이 강화된 12형을 합하여 약 1,200기가 생산되었으며, 13형과 15형도 소수 생산되었다. 암튼 이렇게 4발 폭격기가 될 수 있었던 기회를 해군 스스로 차버린 셈이었으니, 전쟁후기 4발 폭격기에 시달리던 일본에게는 아이러니 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프린스오브 웨일즈 격침되다” 이 전투는 사실 96식 육공의 전과라 할 수 있으나, 일부 1식 육공기도 참가를 하였으며, 이 전투를 시작으로 1식 육공기는 연합군에게 알려지게 된다. 일본군의 말레이시아 진공당시, 1식 육공기는 그 장거리 능력을 바탕으로 연합군의 해상 수송로를 차단하기 위해 출격한다. 말레이시아, 싱가폴, 인도네시아, 필리핀 전지역에 걸쳐 출격한 1식 육공기는 당시 연합군의 전투기가 올라오지 못하는 고고도로 침투하여, 목표물이 발견되면 하강하여 뇌격하는 방식으로 많은 연합군의 수송선을 격침하였다. 당시 후방지역까지 일본군이 나타날 줄 예상못한 수송선단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특히 연합군의 잠수함도 후방에서 수상주행을 하다 격침되는 등… 1식 육공기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연합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당시 1식 육공의 기록할 만한 전과로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증원군이 탑승한 선단을 반다만해에서 12척을 격침한 전투, 영국군의 잠수함 1척을 격침한 것, 싱가폴에서 퇴각하는 연합군의 선두선단을 격침시켜 결국 항복을 받아내는 등, 전지역에서 활약하였으며, 특히 진격하는 육군에게 긴밀히 협조하여 항상 근접지원을 한 점은 타국의 해군에 비해 특이한 점이라 하겠다. 당시만 해도 타국의 해군은 육상전투 지원에 대한 전략조차 없었던 시절이나, 일본해군은 중국전의 경험으로 많은 실력과 경험을 쌓고 있었던 것이다. 말레이시아에서 1 : 7의 열세에 있던 육군을 승리로 이끈 일본의 힘 뒤에는 1식육공의 긴밀한 협조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연합군의 1식 육공에 대한 공포가 극도로 높아지게 된 계기가 방생하는데, 맥아더를 철수케 하기 위해 호주에서 출항한 쾌속수송선 1척이 마닐라만에서 연합군의 눈앞에서 1식 육공에게 격침된다. 그뒤 결국 맥아더는 코레히돌에서 PT보트로 탈출하게 되는데, 이때 PT보트의 정장실에는 “Betty를 조심하라”는 글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대규모의 해상탈출작전을 포기하게 되어 결국 필리핀의 연합군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이렇게 된것에는 장거리 공격력을 보유한 1식 육공에 대한 공포가 연합군에게 자리잡고 있었다.
불타는 날개, 공포에서 라이타로의 비극적인 전환
일본군의 뉴기니, 솔로몬 제도 진출 이후 연합군의 작전에 큰 지장을 준 일본군의 전력이 두가지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일본해군의 항모와 1식 육공기였다. 일본해군 항모는 산호해해전, 미드웨이 해전을 거쳐 소모되었으나, 1식 육공기는 라바울을 기지로 하여, 포트모레스비를 폭격하고, 호주북단을 폭격하는가 하면, 무려 6,000km 달하는 항속거리를 이용해 호주로 가는 연합군의 수송선단을 격침하고 있었다.(당시 1,850마력으로 개선된 엔진을 탑재한 G4M22형의 등장) 이를 피하기 위해 연합군의 수송선은 상당한 거리를 우회하고 있었는데, 연합군에게 불길한 정보가 들어오게 된다. 그것은 구아들카낼에 일본군이 비행장을 건설한다는 정보였다.
당시 일본해군은 이미 툴라기를 이용하여 수상비행기들을 이용해 연합군의 동향을 정찰하고 있었는데, 수상기는 폭장능력이 빈약하고, 뇌격능력이 없어서 큰 위협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라바울보다 무려 1,000km나 호주와 가까워지는 구아들카낼의 비행장은 연합군의 수송로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이젠 1식 육공기들이 호주의 목줄을 봉쇄하게 되는 위협에 처한 것이다. 결국 연합군은 구아들카낼의 비행장이 완공되기 전에 기습을 가하여 이를 점령하게 되는데, 이렇게 반격을 하게 된 큰 원인중에 하나가 1식 육공기의 능력이었으니, 당시 연합군에게 준 스트레스가 얼마나 큰 것인지 짐작할 수 있겠다. 또한 구아들카낼의 연합군 공격당시 최초로 반격을 가한 일본군의 항공기가 1식 육공기였으니, 참으로 역사속의 우연이라 하겠다.
최초의 1식 육공에 의한 폭격은 연합군의 주도면밀한 매복으로 일본군의 큰피해로 끝나게 되는데, 당시 해군함정에서 보고 있던 해군의 고위장교들은 이를보고 몹시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이 육공기들은 포트모레스비 공격을 위한 육상용폭탄을 탑재하고 있어서, 함정에는 큰 피해를 줄 수 없었다. 아뭏튼 이 공격을 시작으로 일본의 1식 육공기는 86식 육공과 더불어 정기적으로 구아들카낼의 헨더슨 비행장을 폭격하는데, 이를 연합군 병사들은 “도오조(일본수상) 타임”이라 불렀다. 육공기는 연합군의 전투기가 올라오지 못하는 고고도로 침투하여 폭격하였는데, 이는 육공기의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었지만, 폭격의 정확성을 떨어뜨리게 된다.
그리고, 이 헨더슨 비행장은 P38과 코르세어라는 걸출한 연합군의 신형기가 보급되자, 1식 육공기 격멸을 위한 기지로 사용된다. P39, P40, 와일드캣등의 전투기가 오르지 못한 고고도를 이들 전투기는 쉽게 올랐으며, 빠른 속력과 강한 화력으로 1식 육공기를 간단히 격추하였던 것이다. 특히, 예광탄과 소이탄을 통상탄과 섞어 쓰던 미군의 방식에 따라 이들 특수탄은 1식 육공기에게 재난의 시절을 안겨주게 된다. 그야말로 조정석빼고 모두 연료통이나 다름없던 육공기는 한두발의 소이탄의 명중으로 불타오르며 격추되고, 이로인해 “라이타”라는 별명을 갖게 된다. 또한 이들 전투기들이 지산의 레이다 기지의 통제를 받으며 적극적으로 수송선을 공격하던 1식 육공기 차단작전에 나섬에 따라, 기존의 방식대로 단기 혹은 3기 편대로 허약한 수송선단을 사냥하던 1식 육공기의 방식이 막히기 시작한것이다. 주익에 자동소화장치를 갖춘 1식 육공기였지만, 연합군 신형기의 화력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한 장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육공기는 솔로몬 공방전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일본육군의 구아들카낼 탈환 작전의 선두에는 항상 육공기들의 폭격이 이루어졌으며,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하던 해군군함의 보호를 위해 거의 완벽에 가깝게 연합군 군함의 접근을 막았다. 또한 연합군의 구아들카낼 수송에 크게 타격을 주었는데, 결국 연합군은 함정으로의 수송을 포기하고 항공수송을 하게 된다. 허나, 이런 활약에 못을 박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야마모토 제독이 1식 육공을 타고 전선 시찰을 가던중에 P38에 의해 격추된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을 계기로 1식 육공의 활약은 크게 줄어들었으며, 결국 모든 육공기가 트럭섬과 필리핀으로 철수하게 된다. 그리고 연합군의 군함과 수송선들이 마음놓고 솔로몬해에 드나들게 되어, 6차에 걸친 해전끝에 일본해군의 군함은 철수를 하고, 구아들카낼 주변의 제해권은 연합군에게 넘어가게 된다.
마지막 영광의 시간
연합군의 필리핀 진공이 가시화 되던 시점, 일본해군은 육공기보다는 생산이 간편한 단발기의 생산에 치중하였고, 그중에서도 제로전투기의 생산에 집중하였으나, 꾸준히 1식 육공기를 생산하였고, 1943년 12월부터 생산된 G4M3형도 최전선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당시 미해군은 필피핀과 대만 근해에서 일본군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벵갈만에서 큰전과를 올리게 된다. 제공권을 탈환한 영국군이 대담하게 인도동쪽의 요충지에 해상으로 수송작전을 벌였는데, 1식 육공의 30기 편대가 출격하여 2만톤급 수송선 2척을 비롯하여 총 11척을 격침한 전과를 거둔다. 그러나, 이전투를 끝으로 일본해군의 항공기는 모두 태평양으로 전용되고, 이 지역은 육군기들이 맡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