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 해군(日本帝国海軍, Imperial Japanese Navy; IJN)
일본 제국 해군 혹은 대일본 제국 해군(일본어: 大日本帝国海軍 다이닛폰테이코쿠카이군, だいにっぽんていこくかいぐん 영어: Imperial Japanese Navy; IJN)은 1869년부터 1947년까지 존재한 일본 제국의 해군이다. 1869년 창설되었으며, 1947년에 일본국 헌법의 부전 조항에 의하여 국제적 분쟁의 해결수단으로 무력 사용을 포기함으로써 해체되었다. 1920년대까지는 영국, 미국에 이은 세계 3위 규모를 자랑하였으며, 항공기와 함대로부터의 공습작전을 위해 해군항공본부의 지원을 받았다. 이명으로는 일본 해군(日本海軍), 제국 해군(帝国海軍), 구일본 해군(旧日本海軍), 구제국 해군(旧帝国海軍)으로도 불린다.
일본 해군의 기원은 아시아 근해에서 타 국가들과 관계를 맺었을 때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중세부터 대항해시대 유럽 열강과 문물 교류가 일어났던 16세기와 17세기에 가장 활발하였다.
에도 시대의 쇄국 정책아래 다시 활동이 시들한 200년이 지난 후 1854년 미국의 간섭으로 다시 문호를 개방하게 되자 일본의 해군은 비교적 낙후되어 있었다. 메이지의 급속한 근대화, 산업화 그리고 일본 황제의 중앙 권력 집권에 힘입어 일본 해군은 1920년경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해군으로 성장하며 제2차 세계 대전때에는 가장 근대화한 해군으로 탈바꿈하였다. 일본 해군은 1895년 청일전쟁과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승장구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 해군과 동맹국들의 공세하에 거의 전멸하여 종전과 함께 해체되었다.
쇄국과 서양학문
1640년부터 200년 이상 일본은 '사코쿠'(쇄국)정책을 선택했다. 서양과의 접촉을 금하고 기독교도를 박멸하고 대양으로 나갈 수 있는 배의 건조를 금지했다. 위반 시에는 죽음의 형벌이 주어졌다. 그러나 나가사키 만의 데지마 섬을 통해 서양의 기술과 과학 혁명에 관계된 대량의 지식이 전해질 수 있었다(데지마: 네덜란드와 교류하던 섬. 일본과 고립시켜 놓음). 서양에 대한 학문, 즉 란가쿠(蘭學, 화란 즉 네덜란드학. 한국의 서학과 비슷한 말)를 통해 일본은 해양 과학 관련 영역에서 최신의 정보를 유지했다. 지도 제작법, 광학, 기계공학 같은 것을 받아들였다. 서양 조선 기술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840년대 후기 도쿠가와 쇼군 시대부터이다.
쇼군의 초기 해군 현대화
1853년과 1854년 미국의 해군 함대사령관 매슈 캘브레이스 페리는 최신의 증기동력 전함으로 무력시위를 하였다. 페리는 마침내 1854년 〈가나가와 조약〉을 통해 일본이 개항하여 무역을 할 수 있게 하였다. 곧이어 1858년 〈미일 화친 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통해 외국인 거류지를 설정하고 외국상품에 대한 최소 관세만을 부과하게 했다.
일본이 외국의 영향을 받아들이는 것에 동의하자마자 에도 막부는 서양의 해양 기술을 소화하려는 능동적인 정책을 개시했다. 1855년 네덜란드의 도움으로 쇼군은 첫 번째 증기동력 전함인 '간코마루'를 손에 넣었다. 이 전함을 훈련과 '나가사키 해군 훈련소'를 설립하는 데 이용한다. 1857년에는 첫 번째 스크류 추진 증기동력 전함 '간린마루'를 얻는다. 막부의 초기 해군 양성 시도는 나가사키 해군 전습소, 고베 해군 훈련소, 쓰키치 군함조련소 등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후 해군 훈련생들은 서양의 해군 학교에 보내져 공부를 하게 된다. 에노모토 다케아키(1862~1867년 네덜란드에서 공부), 도고 헤이하치로, 야마모토 이소로쿠 등 해외유학파 지도자의 전통이 시작되었다.
벌써 1863년 외국에 문호개방을 시작한 지 10년도 안되어 일본은 첫 번째 국내 건조 군함 '지요다가타'를 완성한다. 1865년에는 프랑스의 기술자 레온세 베르니를 고용하여 일본 최초의 근대적 해군 병기창을 요코스카와 나가사키에 건설한다. 1867년에서 1868년사이 트레이시(Tracey) 함장이 이끄는 대영제국해군 사절단이 일본에 보내져 해군 건설과 쓰키지의 해군학교 조직화를 돕는다.
1867년에 대정봉환으로 에도 막부가 끝날 때까지 도쿠가와 해군은 아시아 최대였고, 8척 내외의 증기동력 전함을 보유했다. 기함은 '가이요마루'함이었다. '가이요마루'함은 보신 전쟁 중에 에노모토 제독의 지휘로 천황 찬성파가 사용했다. 이 전쟁은 1869년 하코다테 해전에서 정점에 이른다. 이 해전은 일본 최초의 대규모 현대적 해전으로 여기서 도쿠가와 군이 패하고 존황파가 승리한다. 혁명적인 프랑스 철갑 전함 코테쓰는 원래 도쿠가와 측에서 주문된 것이었으나 천황파에 납품되어 이 해전을 끝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창설
1868년부터 천황 중심 체제의 천황이 된 메이지 천황은 일본으로 쇄도하는 미국과 유럽 열강으로부터 일본을 지키기 위해 일본의 산업화와 군사화를 계속 진행했다. 1868년 1월 17일 병부성(兵部省)이 만들어졌고, 이와쿠라 도모미, 시마즈 다다요시,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 왕자가 장관이 되었다.
1868년 3월 26일 첫 번째 해군 사열이 오사카에서 열렸다. 사가, 조슈, 사쓰마, 구루메, 구마모토, 히로시마 지역에서 온 6척의 배가 참가하였다. 이 배들의 총 배수량은 2250톤으로, 프랑스 해군에서 참여한 배 한 척의 배수량보다 작았다. 1869년 7월 제국해군이 공식적으로 창설되었다. 보신 전쟁 2개월 후의 일이었다.
1869년 7월 각 지역의 해군은 해체되고 11척의 배가 폐지된 도쿠가와 막부 해군에 추가되어 제국해군을 형성하는 데 중심이 된다. 1872년 2월 병부성은 육군성과 해군성으로 바뀐다. 1873년 10월 가쓰 가이슈가 해군경(海軍卿)이 된다. 새 정부는 200척의 배로 10개의 함대를 만든다는 야심찬 계획의 초안을 만든다. 이 계획은 자원 부족으로 1년도 안 되어 폐기된다.
프랑스 주네 에콜의 영향
1880년대, 프랑스는 더 큰 단위의 적에 대항하여 순양함이나 어뢰정 같은 작고, 빠른 전함을 지지하는 주네 에콜(청년학파)이라는 독트린으로 인해 주도적인 영향을 끼쳤다.
영국의 조선 기술
영국은 영일동맹으로 돈독해진 사이를 일본제국에 공고급 전함을 통해 알 수 있는데 1번함인 공고는 영국에서 건조되어 일본으로 인도되었으며 2번함인 히에이의 건조에는 기술자를 파견, 건조를 돕도록 하는 등의 편의를 봐주었다.
청일 전쟁(1894~1895)
일본은 해군의 현대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 때에 중국도 외국과의 협력으로 강력한 함대를 건설하고 있었는데, 특히 독일의 협력이 컸다. 또 조선에서의 지배력을 두고 청나러와 일본의 긴장이 고조되어 1894년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그 전에 얼마간의 해상전투가 벌어져 일본 해군은 압록강의 입구에서 황해 해전을 통해 청의 북양함대를 격파했다. 청의 함대는 12척의 전함 중 8척을 잃었다.
항목
러일전쟁(1904~1905)
막강한 전투력을 갖추고 현대화한 일본제국 해군은 러시아제국의 태평양 함대를 황해 해전과 울산 해전을 거치며 격파한 뒤 피로에 지친 러시아제국 발트 함대를 전멸시켰다.
자립적인 해군으로
일본은 강력한 해군 산업을 건설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베끼고 개선하고 혁신한다'는 전략에 따라 다양한 설계의 외국 선박이 깊이있게 분석되었고 사양은 개선되었다. 또 비교 시험과 개선을 조직화하기 위해 선박을 쌍으로 구매하였다. 수년에 걸쳐 모든 급의 배들을 수입하여 점차 일본내 조립으로 그 다음에는 완전한 일본 내 생산으로 전환하였다. 1880년대 어뢰선이나 순시선 같은 작은 배부터 시작하여 1900년대 초에 와서는 모든 전함의 일본 내 생산이 완료되었다. 마지막 구매는 1913년 전함 '콩고'의 구매를 비커스(Vickers)조선소에서 했을 때였다. 1918년경에는 일본의 조선기술이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1920년까지 일본 해군은 세계에서 3번째 규모의 해군이 되었고 해군 발전의 여러면에서 지도적 위치였다.
기술적인 측면
1905년 쓰시마 해전에서 무선 전신을 세계 최초로 실전에서 사용하다.
1906년 전함 사쓰마를 진수시키다. 당시 세계 최대의 전함이다. 또한 최초로 'all-big-gun' 개념으로 설계, 건조되었다.
'all big gun' 개념: 종래의 전함은 각각의 포가 각각의 사수가 거리, 방향 등을 조정하여 쏘았다. 함포가 점점 장거리화 됨에 따라 함교에서 일괄적으로 지휘하여 쏘는 것이 더 강력하다는 개념이다.1905년에서 1910년 사이 전함의 국내 건조를 시작하다. 1906년 전함 사쓰마의 80% 부품은 영국산이었으나 1910년의 다음 전함 카와치는 20%만이 수입 부품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해군은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을 도와, 지중해에서 수송 호위 임무를 수행하였으며,또한 칭다오 공성전에 대영제국의 해군과 함께 하였는데, 일본 해군은 칭다오의 항만을 봉쇄하기도 하였으며, 태평양에서도 활약하였다.
일본 해군은 1922년에 일본 해군 최초의 항공모함을 건조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해군은 해군성에서 관리되었고, 대본영 군령부의 수장이 지휘하였다. 수적으로 우세한 미국 해군과 맞서 제국해군은 질적 우세를 위해 많은 자원을 투입했다. 결과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최신의 해군을 가지게 되었다. 공격적인 전술의 신속한 성공에 승부를 거는 바람에(만하니안 독트린과 '결정적 전투'의 유혹에서 기인한), 일본은 이렇다할 방어조직에 투자할 수 없었다. 일본은 긴 행렬의 선단을 적의 잠수함으로부터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대잠수함전의 중요한 임무에는 투자를 많이 못해 이에 맞는 특화된 훈련과 뒷받침할 조직이 없었다. 이들은 항공모함을 호위하는 역할을 했다.
일본 제국해군은 전쟁 초기의 그들의 성공을 즐겼다. 그러나 해군, 항공력의 개선과 막대한 산업 총량을 통해 미군은 결국 우위에 섰다. 교역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은 마지못해 잠수함 선단을 사용했던 점과 병참에 실패했던 것도 일본의 패인 중 하나이다.
전함
일본은 전함에 치중하기를 계속하고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전함을 만드는 데 전력하였다. 일본의 수많은 전함들은 모두 제1차 세계 대전형 전함이기에 일본은 현대에 걸맞은 전함으로 개량, 보수 작업을 하였지만 연합국이 제공권을 얻었기에 대공포를 잔득붙혀도 막을수 없었다. 야마토함은 일본 역사상 가장 크고 중무장한 전함으로 1941년 진수되었다. 야마토함의 자매함으로는 무사시함(야마토와 같은이유로 대량의 폭격기와 전투기에 의해 격파당했다)이 있으며 야마토급 전함의 3번 함인 시나노는 항공모함으로 진수하였다(시나노는 엄청난 크기로 일본의 극비여서 사진이 하나밖에 없다 또 격파이유는 잠수함이였는데 원래 속도라면 잠수함이 붙을수 없었는데 엔진 여러개가 고장나고 잠수함이 잔득붙어 어뢰를 맞았다).만약 실제로 전함으로 미국과 포격전을 했다면 이겻을 가능성이 컸다.(대부분의 전투함이 폭격기에 의해 파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반에는 많은 격전이 있었다. 1942년 11월 15일 과달카날 전투에서는 미국의 전함 사우스다코타호와 워싱턴호가 일본의 전함 키리시마를 파괴했다. 1944년 10월 25일 레이테만 전투에서는 미해군 7함대의 제시 올덴돌프 제독이 이끄는 6척의 전함이 가라앉고 있는 니시무라 쇼지(西村祥治) 제독의 전함, 야마시로호와 후소호에 발포하였다. 사실 두 전함은 그 전에 구축함에 의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4년 10월 25일 레이테만 전투 중 이루어진 사마르 해전(Battle off Samar)에서 불충분한 무장에도 불구하고 전함이 아직 유용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항공모함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해군엔 18척의 항공모함이 있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은 4척의 항공모함을 잃게 되고 종전 이후 건조 중이던 항공모함들은 모두 건조가 중단 되어 폐기되었다. 당시의 일본 해군은 동급함인 1번함 야마토, 2번함 무사시, 3번함 시나노를 건조 중이었는데 3번함 시나노호가 항공모함으로 전용하기로 한다. 그러나 본래의 시나노는 전함을 목표로 하던 함이기에 항공기 탑재량이 많지 못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항공기 수리 용도로 사용되었지만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공격 항공모함으로 변모하였으나 이 거대 항공모함 시나노는 3척의 구축함과 함께 추가장비 설치를 위해 3척의 구축함으로 이동중 아베제독의 판단미스로 미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
해군의 항공부대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종전 협상을 끌어내어 현 천황정부를 유지하기위해 가미카제(神風) 특공대를 조직하였다. 원래 바로 전함에 박지 않고 대공포에 의해 멀리가지 못할 경우에 밖는 거였다.
잠수함
일본은 미국의 보급항로를 끊기위해 잠수함 작전을 실행하였다. 실제로 많은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일본은 세계 최초로 함재기를 탑재할 수 있는 잠수함을 만들었다. 이 잠수함은 작전 수행 도중 일본이 항복을 하여 연합군에 의해 노획되었다.
일본 제국 시절의 해군. 정식명칭은 대일본제국해군(大日本帝國海軍)이다. 전후 해상자위대가 욱일기와 주요 간부진을 그대로 계승했다.
최고통수권자는 육군과 마찬가지로 천황이였으며 내각에는 권한이 없었다. 그 아래로는 군정권은 해군대신, 군령권은 군령부총장, 실전부대 지휘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담당하는 일종의 과두제 구조였다. 1930년대 당시 셋의 위상은 복잡했다. 해군대신이 명목상 서열이 높았다고는 하지만 황족인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가 군령부총장 재임시기 군정권에 해당하는 병력량 결정권을 군령부로 가져온 이래 해군성은 예산 셔틀로 전락했고, 야마모토 이소로쿠 같은 아이돌이 연합함대를 틀어쥐고 있을 경우는 역시 상급자인 해군대신, 군령부총장도 통제를 못 했다. 이런 기형적 체제는 대전 말기 연합함대 전력이 거덜나면서 군령부의 발언력이 약화되고, 내각총리대신과 연합함대 사령장관을 경험해본 마지막 해군대신 요나이 미쓰마사가 군령부총장 토요다 소에무를 짬으로 누를 수 있게 되고서야 수습되었다. 전시에는 육군과 대본영을 설치했다. 프로이센 육군을 모방한 육군과 달리 일본 해군은 영국 해군을 모방했다. 일본이 섬나라이기 때문에 제해권을 중시하였다.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으로 잘 알려져있듯 육군과 사이가 굉장히 나빴다. 미국 육군과 해군은 태평양 전쟁에서 합동작전을 실시했지만 일본 육해군이 합동전투를 한 것은 과달카날,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과 레이테 만 해전 뿐이었다. 인원은 해군이 훨씬 적어서 육군보다 복지가 좋았는데, 그 때문에 상대적인 박탈감을 육군에서 많이 느꼈다고. 거기다 해군은 여건이 좋고 기술도 배울 수 있어 입대경쟁이 치열했다. 육군에서는 일부 공병, 그중에서도 전문장비를 다루는 분야가 아닌 이상에야 입대부터 전역까지 소총 한 자루만 닦으며 구르기가 일상이었다. 그에 반해 대부분 해군은 어마어마한 기관부 혹은 그에 준하는 기계장치들을 다루는 것이 일이며, 해군에서 막일꾼으로 취급받는 갑판병조차 페인트 도색 등 선박 유지/보수 기술을 익힐 수 있고 전역시 민간에서도 꽤 쓸모 있는 것들이다. 남들이 육군에서 구를 때 해군으로 들어온다면 공짜로 기술을 배워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당시 사회 그리고 현재 21세기의 중진국 혹은 개발도상국에서도 징집병으로 배워온 운전, 정비, 항해 등의 기술로 평생을 먹고 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엄청난 메리트다. 물론 당시 사람들이 전부 이러한 인식이 있는 만큼 경쟁률은 어마어마해 대거 주로 엘리트~준엘리트들이 뽑혀가는 경향이 강했다. 그리고 이는 해군의 선민의식과 귀족화에 한 몫을 했다. 이하 참조.
대신 국내 정치에서 입김이 강한 것은 육군이었으니 해군도 아쉬운게 있기는 하다. 전통적으로 일본 육군은 러시아(소련)을 가상 적국으로 판단했지만 해군은 미국을 가상적으로 판단했다.
출신 학교와 학교에서의 성적을 따지는 철저한 학력 절대주의 집단이었으며, 해군의 특성상 외국인과 접할 기회가 많다보니 서양인들에게 무시받지 않기 위해 해군 장교들에게는 상당한 수준으로 교양을 가르쳤던 것이 특징. 그 덕분에 해군의 장교들은 사회 상류층 이상으로 교양을 쌓은 이들이 일반적이었고, 일본 제국 신민들에게 있어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는 해군 내부의 파벌다툼으로 인해 인사 정책이 우왕좌왕할 가능성을 막을 객관적 인사 기준이 학교 성적뿐이었기 때문이고, 육군에 비해 수가 적었기에 1인당 교육비를 더 많이 지출할 수 있었던 덕도 있었다.
또한, 비록 병과사관에 비해 무시되는 면이 없지 않았으나, 비병과사관들인 주계과, 군의과, 기술과, 법무과 등으로 임관하는 2년제 단기사관 대우가 육군 동 병과 대비 매우 좋았다. 병과가 아니면 장교 취급도 못 받았다 같은 건 사병들의 뒷담화 내지는 지휘 계통에서의 배제 등이었지, 일단 자기 계급에 맞는 의전은 확실히 받았고 전투 쪽으로는 무시당했을지언정 자기 특기인 전문 분야 쪽으로는 병과 사관들도 영역을 존중해 주는 편이었다. 아예 병과 사관들과는 반쯤 별세계 사람처럼 여기며 지내는 편이라, 한두 계급 정도면 병과와 비병과 사관들끼리 상호 존대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명문대 출신 고학력자나 정치 및 경제계의 유명 인사의 자제 등이 해군으로 몰리는 효과도 있었고, 이들이 전후 일본의 정계 및 제계에 대거 진출하며 해군을 좋게 평가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삐딱한 엘리트 의식을 낳아 경직되고 폐쇄적인 조직체계가 갖춰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일단 군내부에서의 지위와 대우는 오로지 학력에 의해 결정되었다. 실제 능력은 그 다음 문제. 또한 장교들이 엘리트 의식에 빠진 탓에 사병들은 장교로 진급을 할 수 없었다. 경력이 오래되고 능력 있는 사병들을 그대로 수병, 하사관에서 썩게 만드는 것은 전력손실이라는 이유로 제도가 개편되긴 했는데, 그렇게 생긴 것이 특무사관이라는 특별 계급이다. 하사관에서 능력 있는 인물들을 특무사관으로 진급시켜 특무소위~대위로 임관하여 장교 취급을 해주긴 했는데, 사실상 형식적인 것이었다.
계급장부터가 한 눈에 봐도 일반 위관급 사관과는 구분되도록 디자인 했고, 아직 부임조차 하지 않은 일본해군병학교를 갓 졸업한 견습사관의 지휘권이 특무대위보다 위에 있었을 정도였다. 당연히 장교들로부터도 같은 급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차라리 병조장으로 남는 게 나을 정도였다. 이러다보니 하사관들은 스트레스로 인해 수병들을 상습적으로 폭행했고, 장교 계급 외의 군기는 상당히 막장이었다. 결국 1942년에 기존 특무사관들을 전부 일반사관으로 편입시키고 제도 자체를 폐지, 사병 출신들이 사관이 될 수 있는 길을 아예 막았다. 소좌로의 진급도 특무사관 출신들은 거의 막혀 있어서 해체시까지 특무 출신 소좌는 불과 수십 명, 중좌는 한 자릿수에 불과했고 대좌 이상은 한 명도 없었다. 다만, 이렇게 바늘구멍 수준의 진입 장벽 탓에 의외로 특무 출신 좌관급들은 "그 특무 출신에서 소좌를 달 정도면 인정해줘야 한다."는 인식이 있어, 주변에서 진급에 대해 불이익은 있을지언정 다른 의미로 존경과 대우는 받았다고 한다.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보급의 중요성 자체는 이들도 알고는 있었고 잘 갖춰진 기지에서의 보급은 일본의 경제사정에 비해서 제법 괜찮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영미에 비하면 걸음마 수준이었고, 당장 시급하게 필요로 하는 물자를 제때 전개할 수 있는 능력은 떨어졌다. 거기에 더해서 나치독일의 동맹으로서 기여는 영미보다 미미했다. 그러나 일본 육군과는 달리 상당히 활약했는데 태평양 전쟁 중반까지는 미 해군과 그럭저럭 호각으로 싸울 수 있었다.
실제로 개전시 일 해군의 전력은 영국과 미국에 이은 3위였고, 전쟁 초반에는 진주만 공습으로 미 해군의 전함 상당수를 전열에서 이탈시키면서 잠시 동안 미국보다 전력이 강해지기도 했다. 1941년 기준으로 총톤수를 비교하면 일 해군이 18만 톤으로 진주만 공습 때문에 13만 톤까지 떨어진 미 해군보다 우세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도 전략적 능력의 부재, 국력의 차이 등 이유로 미국에게 완벽하게 패배했다. 물론 이런 문제는 따지고 보면 해군 하나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일본 제국이라는 나라 자체의 상대적 후진성에 기인하는 면이 크다.
굳이 기원을 따지자면 도쿠가와 막부 휘하의 수군일 것이다. 막부 수군은 1853년에 이양선이 나타나자 해군으로 정비하였다. 재래식 군선으로 모양새를 갖추긴 했지만 쿠로후네(黑船)를 당할 바는 아니었다. 쿠로후네 사건으로 1854년 강제개항을 하자 도쿠가와 요시노부 근대적 해군이 필요함을 절감, 1866년 대규모 군제 개혁을 실시해 해군 봉행을 설치하고 해군 총재를 뒀다.
당시 일본엔 막부 말고도 각 번에서도 해군력을 조직했는데, 막부 해군은 영국에서 고문단을 초빙해 본격적인 해군을 양성하려고 하였고 동아시아에서 규모도 가장 컸다. 그러나 막부 해군은 제대로 세워지기 전에 대정봉환으로 신정부에 흡수되었다. 1870년엔 육군과 해군이 분리되고 도쿄 츠키지에 해군성을 설치했다. 초기에는 사쓰마가 주도했으며 1876년에 일본해군병학교가 세워진다. 서남전쟁으로 사쓰마가 밀려나면서 일본군 내부에서 육군 중심주의가 강해진다. 운요호 사건으로 조선을 개항시키기도 했다.
청일전쟁은 풍도 해전으로 시작되었으며 황해 해전과 웨이하이웨이 전투에서도 이홍장의 북양함대에게 크게 이겼다. 자세한 내용은 청일전쟁/해군 전투력 비교 참조. 대규모 승전은 러시아 해군 발트 함대를 궤멸시킨 러일전쟁의 쓰시마 해전이 대표적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영국의 요청으로 칭다오에 있던 독일 아시아 함대 추격전에 나서기도 했으며 지중해에서 수송선 호위 업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U-27을 비롯한 독일 제국 해군의 U보트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 잠수함들에게 피격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칭다오 공격 당시 영국군과 협조하여 독일 해군이 방어하던 칭다오 항 봉쇄하기도 하였다. 또한 미국과 협력, 태평양에서 일본 해군은 활동을 개시하기도 하였다.
1941년에는 미국의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했다. 진주만 공습의 대성공으로 상당수의 미 태평양함대 전함들을 전열 이탈시킨 일본 제국 해군은 필리핀을 비롯한 서남태평양 등지를 휩쓸며 전쟁 초반 연합국에 우세를 점했지만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공모함 4척이 침몰한 것을 시작으로 연이은 미 해군과의 해전에서 패배하며 제해권을 상실했고, 끝내 1945년 일본 제국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해군성은 제2복원성으로 불린다. 육군과 달리 완전히 해체되지는 않았는데 이는 일본이 저항하느라 연안에 기뢰를 잔뜩 설치해뒀고 이를 제거할 소해부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해상보안청이 이 임무를 위해 1만 명 규모로 유지됐고 1952년에는 보안대란 이름으로 해상자위대의 전신이 해상보안청에서 분리되었다. 사실상 해상자위대는 일본 해군을 계승했다. 그것도 과거의 악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해군병의 복무기간은 3년, 해군 지원병은 5년이었다.
상징 이미지는 벚꽃, 상징 깃발은 욱일기를 썼다.
일본 해군 함선 중 순양함, 전함, 항공모함, 포함의 함수에는 일본 제국의 국장이자 일본 황실의 상징인 국화문장(菊花紋章)이 달렸는데, 나무에 진짜 금으로 금박을 두껍게 씌워서 금색으로 만들었다. 크기가 상당히 컸기에 금박이라 해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비쌌다. 그래서 국화 문양을 함수에 붙이는 작업을 한 인원들은 작업 후 금박을 빼돌렸을지도 모른단 이유로 탈의 상태에서 군의관에게 항문까지 검사받았다고 한다.
포함은 국화 문양을 달았다. 크기는 구축함급으로 작지만 포함은 바다의 대사관 역할을 했기에 국내외 고위급 인사가 승선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포함은 톤수만 작을 뿐이지 대좌가 함장으로 부임하는, 의전서열이 매우 높은 함들이었다. 하츠하루급 구축함 네노히(子日)의 함장이 자신들을 무시하고 지나가는 시무슈형 해방함 쿠나시리(国後)에게 '왜 귀함은 본함에 경례를 하지 않는가.' 하고 따졌다가ㅡ 쿠나시리가 국화 문양을 달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사죄하러 쿠나시리에 직접 다녀왔다는 일화도 있다. 그만큼 국화 문양의 상징성과 영향력은 막강했다.
국화문장은 일종의 계급장처럼 통용되었기 때문에 해군에서 급이 낮은 함선 취급을 받았던 구축함, 잠수함 등 소형함은 감히 국화문장을 달지 못했다.
욱일기를 비롯해 구 일본 해군으로부터 많은 것을 계승한 해상자위대는 의외로 국화 문양은 달지 않는다. 덴노는 국가원수이긴 해도 상징적인 존재일 뿐 아무 실권이 없음을 일본국 헌법에 명시하고 있으므로, 군함을 덴노가 '하사'한다는 건 현 일본의 통치 제도 하에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국화 문양은 과거 제국 시절과 마찬가지로 현재 일본의 국장이긴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일본 황실의 상징이라는 점도 변함없는 데다, 국화문양이 달린 것은 '일본 황실의 소유' 또는 '일본 황실이 하사한 것'이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그렇다. 현존하는 함선 중 국화 문양이 달린 함선은 요코스카에 기념함으로 보존되어 더는 군함이 아닌 미카사가 유일한데, 이것도 진품이 아닌 플라스틱 모조품이다.
수병의 복제는 타국 해군과 거의 차이가 없는 세일러복을 기본으로 했다. 세일러복 칼라의 흰줄이 일반적으로 쓰이는 3줄이 아닌 1줄이라는 점이 특징이며, 해상자위대에선 두 줄로 늘어났다. 수병들 가운데 헌병 임무를 수행하는 인원과 조종사 교육생인 예과연습생 등은 예외적으로 각각 하사관 및 해군병학교 생도 피복과 유사한 복제를 착용했다.
하사관의 복제는 사관과 유사하나, 동정복인 제1종 군장의 경우 사관들이 단추 없이 후크로 여미는 것과 달리 하정복인 제2종 군장과 동일하게 금색 단추를 쓰는 가쿠란 형태의 상의로 되어 있다.
해군 장교의 제2종 군장은 거의 세계 표준인 영국 해군의 하쿠란식 하정복을 본따서 만든 것이다. 반면 동정복은 영국 해군의 더블 버튼 재킷이 아니라 1920년대까지 미합중국 해군 장교용 근무복 형태의 재킷을 사용했다. 이 복제가 시대에 뒤떨어진다 하여, 서구 해군과 동일한 더블 버튼 형태로 바꾸려는 개정안이 1920년대에 올라왔으나, 해군 원로로 추앙받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내가 이 옷을 입고 러시아 해군을 이겼는데 어찌 없앤단 말이냐?" 하며 극렬 반대해 무산되고 종전시까지 계속 쓰였다는 일화가 있다. 무더운 남태평양에서 목을 조이는 모직 로먼 칼라 제복은 꽤 더웠을 것이다. 동예복은 더블 버튼 형태의 모닝 코트에 검정 보우 타이를 착용하는 국제 표준(?)형 디자인이었다.
1943년에는 육상 전투복인 육전의와 디자인이 비슷한 황록색 해/육상 전투복인 제3종 군장이 도입되었고, 기존 제1, 2종 군장은 정복으로만 쓰게 된다. 지팡구 16권 표지의 사관용 3종 군장 육전 소요가 늘어나 함정과 육상에서 함께 입을 수 있는 전용 피복 소요가 제기된 점, 사관용 1, 2종은 옷깃이 목을 감싸는 차이나 칼라 형태라 불편했던 점 등이 도입 사유다. 해군 사관용 3종 군장은 일본군에서 넥타이를 착용하는 몇 안 되는 피복이다.
• 대본영: 해군성(일), 육군성(일)의 상부기관
• 해군성: 일본제국의 해군에 군정기관. - 최고사령관은 대원수인 천황이다. 또 내각에 속한다.
• 군령부: 천황직속의 작전을 짜는 대본영의 기관. - 작전전략과 군사행동, 전시상황에 첩보, 암호제정, 전사편찬
• 해군성외국: 주된 해군함정본부, 해군항공본부, 해군교육본부, 수로부등 다수의 외국이 있다.
• 해군장관 직속교육기관은 초급 장교 양성을 위해서는 해군삼교 (항해, 포술, 수뢰를 위한 일본해군병학교, 기관사관을 위한 해군기관학교, 주계사관을 위한 해군경리학교), 고급 참모 양성을 위해서는 해군대학이 있었다.
• 술과학교: 관할진수부및 교육본부, 해군성교육사에 예속
• 진수부(鎭守府): 해군의 지방조직. - 함정의 보전, 군인군속육성, 내전작전. 진수부 사령장관은 천황이 직례한다.
• 경비부: 후술과 요항부를 개편한 해군지방조직으로 진수부와 동격이지만 전력을 보유하지 않는다.
• 요항부 : 진수부예하의 지방조직
• 함대의 사령장관은 천황이 직례한다.
◦ 연합함대는 2개함대 이상의 함대인 해군작전의 주력이 된다.
◦ 지나방면함대는 연합함대에 비견되는 대함대에서 연합함대에 속하지 않고, 중국대륙에서 해군작전을 개시한다.
◦ 해상호위총사령부도 연합함대에 비견되는 버대에서 연합함대에 속하지 않고, 선단호위를 한다.
◦ 진수부부대, 경비부부대도 독립된 부대에서 관할하는 해역의 방위를 한다.
해군 육전대는 해병대 기능도 했다. 일본군에선 초기엔 필요할 때마다 임시로 부대를 설치하는 식으로 운용했지만 1930년대부터는 상설부대로 전환했다. 내부에 공수부대도 설치해서 1942년엔 첫 공수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종전 직전에 인원 규모는 10만 명이었는데 일본군 해군이 워낙에 강한 지휘권을 발휘했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뭔가를 수행하진 못 했다. 그 때문에 자위대가 생겼을 때 해병대 기능을 갖춘 부대는 계승되지 않았다. 다만 해군이 아닌 육군인 육상자위대 서부방면대에 직속으로 상륙장갑차를 보유한 보통과연대가 도서 지역의 방어를 위해 해상자위대 상륙함정의 지원하에 상륙작전을 실행하며 2014년 기준으로 이들은 수륙기동단이란 이름으로 확대됐다.
육전대는 해군 장교들 사이에선 좌천되는 곳이었고, 사병들이라고 해서 다르진 않았다. 분위기 험악하기로 유명한 일본 해군 내에서도 똥군기 심한 축에 들었고, 사기도 높은 편은 아니었으나, 육군한테 질수없다 마인드로 인해 훈련은 빡센 편이었으며 그에 따라 해병대의 임무로 돋보이는 활약을 하였다. 1943년부터 조선인을 지원제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해군이 이들을 집중 배치한 곳도 육전대였다. 소수의 인원이 기지 경계부대 및 지원부대나 항공부대에도 배치됐다. 해군에선 조선인들의 사보타주 등을 우려, 함선 근무는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는 1945년 광복 이후 건군기(建軍期)에 대한민국 해군이 창설되자 구 일본 해군 출신 인사들이 해군에 합류했다. 그런데 1949년에 해병대가 창설되자 그들 중 대다수를 여기에 몰아넣었다. 선술했듯 함정 근무자가 전무하다시피하여 함정 운용에 도움이 안 되는 대신 육전에는 익숙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 탓에 해병대에는 해군에 비해 유달리 (악습이나 은어 등) 구 일본군 해군의 잔재가 많이 남아 현재까지 골치를 썩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