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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이야기

사구(沙丘)에서 병사한 진시황

작성자管韻|작성시간21.11.03|조회수240 목록 댓글 0

사구(沙丘)에서 병사한 진시황

 

 

 

 

 

사구는 중국의 고지명으로 오늘날 허베이성 싱타이시 광종현이다. 역사에서 사구정변은 두 차례 있었다. 기원전 295년 조나라에서 한 번, 기원전 210년에 시황제가 천하 순행 도중에 사망하면서 호해가 제위를 찬탈한 사건으로 또 한 번 있다. 구분하기 위하여 조나라의 사건은 사구의 난, 진나라의 사건은 사구의 변으로 칭하는 듯.

 

진시황은 평원진에 이르러 병이 생겼지만 군신들은 진시황이 죽는다는 말을 싫어해 함부로 말하지 못했으며, 진시황은 몽의에게 산천의 신에게 기도를 드리도록 여러 산을 돌아다닐 것을 명령했다. 진시황은 병이 심해지자 부소에게 돌아와서 상사에 참여해 함양에 안장하라는 내용이 담긴 조서를 썼지만 사자에게 조서를 주기 전에 사망했다.

 

이사는 진시황이 외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인해 모든 공자와 천하에 변란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이 사실을 비밀로 하고 발상하지 않았으며, 진시황의 관을 수레에 싣고 예전에 총애 받던 환관을 함께 타게 해서 가는 곳마다 음식을 올리는 시늉을 하면서 신하들이 예전과 다름없이 국사를 상주하면 환관이 수레 안에서 상주된 일을 허가하는 식으로 속였다.

 

여름철에 진시황의 수레에서 시신이 썩는 악취가 나자 수행관원들에게 소금에 절여서 말린 고기 1석을 수레에 싣게 해서 시신의 악취와 어물의 냄새를 구분하지 못하게 했으며, 직도를 따라 함양에 도착한 후에 발상(發喪)했다.

 

사자가 이르러 편지를 보고 부소는 울면서 안으로 들어가 자살하고자 했다.

몽염이 부소를 제지하며 말했다. 폐하께서 바깥에 계시며 태자를 세우지 않았으며, 신을 시켜서 30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변경을 지키게 하고 공자가 감독하도록 했으니 이는 천하의 중임입니다. 지금 사자 한 명이 왔다가 곧바로 자살하면 어찌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알겠습니까? 청하기를 다시 용서를 빌고 다시 간청한 후에 죽어도 늦지 않습니다.

사자가 몇 번이나 재촉했다. 부소는 사람됨이 인자했기에 몽염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죽음을 내렸는데 어찌 다시 용서를 청한단 말이냐! 그리고 곧 자살했다. -사기 이사 열전

 

이사, 호해, 조고를 포함한 5, 6명 정도의 환관만이 진시황이 사망한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호해는 조고에게 서법, 옥률, 법령을 배운 적이 있어 그를 총애했다. 조고는 호해를 설득하고 이사와 모의해서 진시황이 부소에게 보내는 조서를 뜯고 사구에서 진시황의 유조를 받은 것처럼 꾸며서 호해를 태자로 삼도록 했으며, 부소에게는 한치에 공훈도 없으면서 비방하는 일만 많아 효성스럽지 못하고 몽염은 부소에 대해 바르게 시정하지 못했다는 죄목을 들어 자결하라고 했다.

 

사자의 조서를 받은 부소는 그 내용을 보고 울면서 자살하려고 했는데, 몽염은 부소에게 자신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변방을 지키게 했고 태자에게는 그 군대를 감독하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기에 한 사람의 사신이 왔다고 해서 자살한다면 그 진위를 알 수 있겠냐면서 다시 용서를 간청한 후에 자살해도 늦지 않다고 만류했다. 사자가 여러 번 자살을 독촉하자 부소는 아버지께서 자식에게 죽음을 내린 것을 어찌 다시 용서를 간청하겠냐면서 자살했다.

 

몽염은 명령을 의심해 다시 한 번 명을 내려달라고 청했다가 사자가 몽염을 관리에게 넘겨 양주현에 감금시켰으며, 사람을 파견해 몽염의 자리를 대신하게 했다. 부소가 죽은 것을 안 호해는 몽염을 놓아주려고 했지만 조고는 몽씨가 다시 귀하게 되어 정권을 잡으면 자신을 원망할까봐 두려워했다.

 

뒤늦게 몽의가 돌아왔고 조고는 몽의가 법대로 처리해 자기를 위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 원한을 품고 그를 죽이려 했는데, 조고는 호해에게 충성하는 척 하면서 몽씨를 없애기 위해 선제(진시황)께서 현명한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고 했지만 몽의로 인해 태자를 세우지 않았다고 모함하면서 그를 죽여야 한다고 했다. 이로 인해 호해가 몽의를 대의 옥에 가두었고 조고가 호해를 모시면서 밤낮으로 몽씨 형제를 헐뜯고 그들의 죄를 찾아내 탄핵했으며, 자영이 조나라, 제나라 등이 멸망한 이유가 중신들을 함부로 죽였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몽씨 형제를 죽이지 말 것을 간언했지만 호해는 듣지 않았다.

 

호해는 사자를 보내 몽의, 몽염에게 죽음을 내리도록 조서를 보냈으며, 몽의는 정당한 죄명으로 죽게 해달라고 했지만 사자는 호해의 뜻을 알았기에 몽의의 말을 듣지 않고 죽였다. 몽염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있어 그 세력이 진나라를 배반하기에 충분하고 조상의 가르침을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 의리를 지킨다면서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는데, 사자가 명령을 받고 집행할 뿐이라 이 말을 전할 수 없다고 하자 몽염은 한탄하다가 음독자살을 한다.

 

호해는 이 사건으로 최초로 찬탈한 황제가 되었으며, 조고가 낭중령이 되어 나라를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또한 호해는 다른 형제들을 모두 죽였고, 선제(진시황)의 후궁 가운데 자식이 없는 자를 궁궐 밖으로 내쫓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순장시켜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실제 진시황릉 배장갱 중에는 사람이 묻힌 무덤도 여러 곳 발굴되었는데 무덤의 부장품이나 관은 호화로웠으나 유골은 나이도 젊고 건강 상태도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두개골에 화살촉이 박혀 있거나 사지가 토막나는 등 잔혹한 처형을 당한 상태였다. 이는 호해가 죽인 진시황의 후궁들 및 호해의 형제자매들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사기 이사 열전에 보면 호해의 형제 중 유일하게 공자 고(高)는 먼저 죽음을 청했기 때문에 호해가 은혜를 베풀어 고통 없이 자살하도록 허락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 이 배장갱 남자 유골 중 딱 1구만 외상이 없이 멀쩡한 상태여서 이것이 공자 고의 유해라고 추정되고 있다.

 

영호해가 비정상적으로 승계하고 승계 1순위인 장남 부소가 죽은 것은 백성들이 보기에는 너무나도 비상식적인 승계였다. 당장 벽촌의 하층민인 진승조차도 호해의 승계를 두고 “2세(2세 황제, 호해를 가리킴)는 작은 아들로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세간에서는 초나라 항연과 더불어, 부소가 살아서 숨어있다는 헛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마침 진나라의 폭정으로 분노한 사람들은 부소나 항연을 사칭하며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이 사건의 결과가 워낙에 충격적이다 보니 유방과 여후의 행보에도 영향을 준다. 유방은 폐태자를 시도했다가 호해를 거론하며 결사반대하는 숙손통 등 신하들에 가로막혀 포기해야 했고, 여후(厲侯)는 사구정변(沙丘政變)을 그대로 재현하려다가 내전이 벌어지면 감당할 자신 있느냐는 역상의 제지로 그만두어야 했다.

 

사기 이사 열전에 실려 있는 대화의 내용은 옆에서 직접 보고 듣지 않으면 도저히 알기 힘들 정도로 구체적이다. 따라서 저런 사실을 저렇게 명확하게 알아낸 경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곤 한다.

 

물론 상식적으로 당자사들이 최측근들에게 전달했거나, 조고에게 죽을 위기에 몰린 이사가 마지막 발악으로 발설 했거나, 시황제가 붕어할 때 모시던 궁관들이 전달했을 가능성도 다분하다. 다만 정보가 전보다 쉽게 공개되는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도 대통령이 비밀스럽게 하는 말을 명확하게 알 수 없는데, 고대 구중 궁궐의 저렇게 비밀스러운 대화 내용이 알려지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 정도로 구체적인 대화의 내용을 대체 누가 어떤 방식으로 알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그리고 이걸 당사자와 연결고리도 없는 사마천이 어떻게 알았는지도 알 수 없다.

 

당연하지만 조고 외에도 영호해와 이사를 비롯해서 그들의 측근들이 현장에 있었고, 아무리 은밀하게 모의해서 유서를 조작한다고 하더라도 이사와 조고 정도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으슥한 산속에 들어가서 밀담을 나눈 후 직접 종이를 구해 와서 손수 먹을 갈아서 글을 쓰고 자기 손으로 도장을 꺼내 와서 찍었을 리는 없다. 물론 시중을 들거나 이런 실무를 담당한 이들은 믿을 만한 측근들이었겠지만, 이사와 조고가 죽고 진나라까지 멸망한 후에도 계속 입을 다물고 있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상술했듯이 이사가 숙청될 때 마지막 발악으로 누설했을 수도 있다. 또 역사적으로 교통이 발달하지 않던 고대에 왕위계승자가 멀리 있다면 바로 가까이 다른 왕족이나 다음 계승자가 추대를 받아 등극한 사례도 있다.

 

때문에 기록과 달리 부소의 자살 명령이 영호해의 조작이 아니라 실제로 진시황이 내린 명령이라는 주장도 있다. 사망 직전 진시황은 당시 태자 부소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말년에 수은 중독으로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하고 의심이 많았다. 더불어 영호해도 비록 작은 아들이었지만 후계자로 유력하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인데, 이 주장이 실려 있는 책이 2009년 발행된 전한 초기의 목간인 조정서(趙正書)다. 여기에는 시황제가 순행 중 위독해지자 스스로 이사, 조고 등과 상의해서 영호해를 태자로 책봉하고 부소를 처형한 후 승하했다고 쓰여 있는데, 문제는 조정서는 객관성과 신빙성에서 논란이 있다는 것. 이 목간의 본문에서 진시황을 가리켜 조나라 출신인 정이라고 깎아내려서 ‘조정서’라는 제목이 붙었고, 진왕이라고 하며 황제 취급도 안 해준다. 신빙성도 논란이 있는데, 개인이 편찬했지만 정사(正史)에서도 최고로 치는 ‘사기’와 사구정변의 기록이 상당히 다른 탓이다.

 

게다가 부소는 착하고 어질어 아버지의 분서갱유를 말렸다가 눈밖에 나서 국경으로 내쫓겼다. 이미 정이 떨어진데다 수은중독으로 정신이 이상해진 진시황이 부소를 죽였어도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여기에는 오히려 만리장성이 중요한 국책사업이라 그에게 맡겼다는 반론이 있고 또 정말 부소가 마음에 안들어 국경으로 내쫓았어도 죽기 전에 마음을 고쳐서 부소에게 제위를 물려준다는 말을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지금으로선 사실에 바탕을 둔 정확한 기록 증거가 나오기 전까진 다소 의심스러워도 당시 역사를 기록한 사마천의 사서를 정사로 삼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황상 여러모로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나 그럴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사서를 부정하는 건 다소 위험한 관점이다.

 

이사가 조고의 유혹에 넘어가 호해를 옹립하지 않고, 시황제가 남긴 유언대로 만리장성 축조 현장에 가 있는 부소가 다음 황제라고 공표하여 부소가 황위를 계승하여 2세 황제가 되었더라면 중국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일단 적서 차별이 심하던 법가 국가 진나라에서 부소는 혈통적으로 진 시황의 장남이자 황태자이므로 정통성에 있어서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또한 만리장성 축조 현장에서 장성 건설에 종사하는 최정예 30만 병력 및 명장 몽염이 절대적으로 충성하고 있으므로 무력으로도 맞설 상대가 없다. 더군다나 부소는 행실도 좋은 평가를 받아서 진승의 세가에서 초나라 출신이던 진승조차도 부소의 경우 적장자라는 위치와 행실 자체를 좋게 평가했고. 때문에 진승과 오광이 초나라 명장인 향량과 더불어 진나라 왕자 부소를 사칭했던 이유가 부소의 평판이 초나라 출신인 반란군들에게도 제법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당대에 세 가구만 남아도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건 초나라 사람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진나라에 이를 갈 텐데도 그런데도 부소를 사칭했다면 부소의 인망이 어느 정도인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대부분의 왕조 국가에서, 국가가 안정되려면 창업 군주 당대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적어도 그 뒤에 2대 정도는 지나야 국가 체제가 안정되고 틀이 잡힌다는 점을 생각하면 진이 망한 것은 호해라는 정통성 부족+막장 2대 군주의 탓이 결정적이었다. 인망 있고 자애롭고 유능하고 관대한 부소가 2세 황제가 되어 시 황제의 가혹한 통치에 지친 백성들을 적당히 위무했다면, 진나라는 중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진나라는 봉건제로 되돌아가버린 대륙에 강림한 항우의 초나라 및 후대에 벼락 출세한 유방의 한나라랑은 달리 주나라 때부터 대대로 내려져온 오랜 열후국이란 튼튼한 전통이랑 기반을 가지고 있다는 강력한 이점도 있었다. 부소가 즉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반란 대신 현 진 제국 체제에 순응하는 길을 택했을 사람이 더욱 늘어났을 것은 분명하다.

 

부소가 명군이나 범군까지는 갈것도 없이 암군만 아니었어도 된다. 아니, 심지어 호해나 다름없는 위인이었어도 진의 재통일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진의 국력은 전국시대 당시 국가체계가 제대로 작동하는 6국의 합종을 6대1 맞짱으로 가볍게 털어버릴 정도였고 이는 진의 멸망시점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진이 멸망한 가장 큰 윈인은 중앙정부가 사실상 붕괴하여 행정체계가 망가진 점에 있다. 봉기 초기 몽염의 30만 정예와 조타의 남방군은 써보지도 못하고 사라지고 각지의 진군은 지휘부재로 우왕좌왕하다 각개격파로 허무하게 소멸된 원인도 중앙정부가 제 기능을 못했기 때문이다. 장초의 대군이 함곡관에 육박하기까지 몇 달 동안 군의 집결은커녕 관중에서 새로 징병조차 못해서 죄수를 데려다 쓸 지경이니 말 다했다.... 부소는 그 존재만으로도 강력한 정통성이 있었기 때문에 호해와 같은 혼란과 숙청은 없었을 것이고 조고와 같은 자에게 지나치게 의존할 동기도 약했을 것이다. 즉 부소가 호해와 능력이 비슷하더라도 진 조정이 큰 혼란 없이 제 기능을 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중앙정부와 행정 체계가 잘 유지되는 나라는 군주가 아무리 폭군이어도 단기간에 망할래야 망할 수가 없다. 시황제가 폭정은 많지만 적어도 이 두 가지는 철저히 유지했다. 부소가 뒤를 이었다면 단기간에 이 두 가지를 망가뜨리기도 쉽지 않다. 제대로 된 국가 체계도 없고 구심점도 없는 반군연합 따위야 시황제의 통일전쟁 상대였던 육국보다 난이도가 휠씬 낮으므로 중앙정부가 진의 국력을 제대로 뽑아 썼다면 어렵지 않게 토벌에 성공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진 제국의 통일은 확립되고 중국사에서 한나라의 역사적 위치를 진나라가 차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럼 현재 한족은 진족이 되었을 테고 한자는 진자가 되었을 거다.

 

진나라의 멸망은 2세 황제 호해의 헛튼소리 뿐만이 아니라 가혹한 법가(法家)에 통치와 온갖 정벌과 건설 공사로 천하를 피폐하게 만들고 민심을 떠나게 한 진시황 및 통일 제국 진나라의 취약성에 한계가 있었다는 반론도 있다. 진승의 난을 시작으로 한 전국적인 봉기는 호해가 즉위한지 바로 다음 해에 일어난 일이다. 아무리 조고와 호해가 막장이라도 단지 1년 사이에 이정도로 폭발적인 파급력을 불러왔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진시황 때부터 곪았던 것이 터졌을 뿐인 것. 실상 호해가 한 것이라곤 혜제(惠帝)처럼 선대가 한 것을 그대로 돌리면서 논 것 외에 크게 없음에도 둘의 경우가 완전히 반대인 것이 누구 탓일지는…. 애초에 진나라의 천하 통일에도 춘추전국시대 각국을 완전히 통합하는 것은 힘들었고 결국 진시황 사후 옛 육국 지역에서는 부흥 운동을 일으킨다. 진나라의 멸망은 그 전례가 없는 천하 통일의 후유증이라는 것.

 

또 하나의 문제점은 부소는 당시 국경 외곽인 상군에 있었다는 것이다. 진시황의 명령 때문에 부소는 상군에서 만리장성 건설 감독을 맡고 있었는데 진나라 수도 함양(咸陽, 오늘날 시안(西安))과 장안(長安) 먼 지역이다. 그리고 가뜩이나 부소는 진시황의 미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는 데다 부소는 왕의 장남일 뿐 정식 계승자 직위인 태자 직위를 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지만 황족 중 누군가가 부소의 승계 유서를 조작하거나 혹은 부소의 계승에 반대해서 함양이나 함곡관의 문을 걸어 잠글 가능성도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함양을 선점한 세력과 몽염 등 부소 일파간의 진나라 내전의 가능성이 높았고 이런 상황에 육국 반란까지 겹친다면 진나라로서는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다.

단, 부소가 왕위를 계승받는 상황이라면 그에 맞는 조치가 함께 취해졌을 것이긴 하다. 예를 들어 시황제가 사망하기 직전에 미리 부소를 함양으로 부르라고 하던가... 그리고 어떤 식으로 가정해도 호해가 황제가 되는 것 보단 리스크가 적은게 사실.

 

초한시대 당시 인물들 같은 경우엔 계포가 ‘진시황이 그렇게 국력을 낭비해대니 진승에게 빌미를 준 거 아니냐?’고 까는 등 호해보단 진시황에게 더 책임을 물었던 듯. 실제로 장한이 처음 한 말이 당장 데려갈 군대가 없다는 것이기는 했다.

 

부소가 육국의 부흥 운동을 진압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함곡관 서쪽으로 후퇴하여 옛날 육국 유민들의 반발을 막아 옛 진나라 본토는 건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이렇게 되면 진제국은 일시 축소되고 전국시대로 돌아가는 형세가 된다. 실제 위의 통일설에서 언급한대로 부소는 다른 지역은 물론 원래 진나라 국민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고, 반대로 호해의 평가가 개판이었던 이유가 행적 자체가 나쁜 이유도 있었지만 적서 차별이 심한 법가 국가 진나라에서 장남을 제치고 황제자리에 오른 것 자체가 엄청난 감점 요소였다. 그리고 진나라 국민들이 호해는 싫어했지만 진나라 왕족 자체를 싫어하지는 않았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는데 우선 조고가 영호해를 제거했음에도 황제로 즉위하지 못하고 진시황의 후손 자영을 황제로 받들어야 했고, 광무 대치 때 유방이 항우를 비난하는 10개 죄목 가운데 진시황의 무덤 도굴과 진왕 자영 살해를 가지고 항우를 비난한 것으로 보아 진나라 왕실에 대한 지지가 제법 남아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고, 이런 진 왕실의 지지는 항복한 자영을 자비를 베풀어준 유방이 옛 진나라 본토인 관중 지역을 빠르게 장악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때문에 진나라 계승 1순위인 부소가 황제 자리를 계승했다면 적어도 과거 진나라 국민들의 민심은 다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진시황의 문제도 크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반란이 터진 건 무능함이 여기저기 널리 퍼진 2대 황제 호해(胡亥) 때라는 걸 고려해보면 적어도 부소의 재능이면 반란해 볼 사람들도 좀 더 지켜볼 수준은 되었을 것이고 부소와 육국의 유민들이 협상을 해볼 여지도 있을 것이며 적어도 함곡관이나 몽염의 군대 등으로 적어도 영호해처럼 단 2년만에 순식간에 망하진 않았을 것이고, 조금만 장기전으로 간다면 진나라 반란군이 초한 전쟁 때 보여준 심각한 갈등으로 자멸하거나 적어도 함곡관을 넘을 동력은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다.

 

거기에 호해와 달리 부소는 초나라 반란군 진승이 사칭할 정도로 높게 평가받았기 때문에 협상의 가능성도 높았다. 실제 항우가 금의환향(錦衣還鄕)과 행보에서 보여주듯이 반란군의 목적은 진나라를 멸하고 대체 신통일 왕조 건국보다는 과거 봉건 제도와 육국의 자치권의 부활 정도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호해보다 평가가 나은 부소가 즉위했다면 진나라 황제가 천자가 되는 주나라식 봉건 제도를 다시 도입하는 방향으로 반란군과 협상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부소의 인품을 생각해보면 폭군도 암군도 아닐 테니 대의명분이 없고 그럼 반란이 크게 따를 리도 없을 것이다. 물론 대의명분 없이 병력을 일으킬 수도 있지만 민심은 잃었을 것이고 민심버린 분과 인품 쩌는 분중 누가 최후의 승자였는지 보면 결과는 나온다. 물론 그 민심 버린 분이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장수라는 걸 감안해보면 진나라가 그런 게 가능할 때까지 ‘군사적으로’ 버텨야 한다는 가정이 붙기는 한다.

 

정리하자면 애초에 진나라의 초대 황제인 진시황 대에서 너무 많은 허튼짓이 일어난 것 때문에 나라가 무너지는 건 거의 확정일 수도 있지만 만약 부소가 안 죽었다는 가정이면 몽염과 정예 30만도 고스란히 남았을 것이고 부소의 인품과 군사력 등등을 보면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은 가정이다. 대장군 몽염과 정예 30만 명에게 인정받을 정도에 진나라 최후의 명장이라는 장한도 있으므로 호해와는 다르게 개념인으로 보이는 피를 이은 부소라면 어떻게든 민심을 수습해서 선대의 문제점들을 처리해가며 적어도 진나라를 수습해 서진이 동진으로, 북송이 남송이 된 것처럼 진나라 본토라는 명목은 꽤나 잘 유지 가능할 것이라고 볼 수도 있고, 더불어 항우 등 반진연합군의 개판인 연합 상황을 생각해보면 제 2의 시황제로써 육국의 부흥운동을 평정하고 재통일을 이룩하여 아무 문제없는 평화로운 통치를 했을 가능성도 어느 정도 있다.

 

전국시대 조나라의 무령왕의 정실부인은 한나라 출신으로 그의 아들인 공자 장(公子章)은 무령왕의 뒤를 이을 태자였다. 정실부인이 죽은 후 무령왕은 한 미녀를 꿈에서 만났고 이에 한 대신이 그 형상을 닮은 미녀인 맹요를 바친다. 그 후 맹요도 죽게 되는데 무령왕은 자신을 즐겁게 해준 맹요에게 자신은 준 것이 없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그의 아들인 공자 하를 태자로 세운다. 이렇게 어이없이 폐위당한 공자 장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안양군으로 분봉하고 전불례를 보내여 보좌하게 한다. 그 후, 무령왕은 왕위를 태자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주부의 신분으로 정사에 관여한다. 하지만 보좌관으로 보내진 전불례는 오히려 공자 장의 야심을 자극하여 반란을 부추겼고 한편으로는 무령왕 본인도 무슨 생각에서인지 대군 지역을 공자 장에게 넘겨주어 대왕으로 봉하겠다는, 그러니까 나라를 둘로 가르겠다는 황당한 계획까지 세웠다가 당시 상국이였던 비의(肥義)의 만류로 단념한다.

 

당시 세 부자는 사구 지역에서 따로 별거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공자 장은 비의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비의가 사전에 대책을 세웠기 때문에 혜문왕을 죽일 수 없었고 여기서 제3의 인물인 공자 성과 이태가 군사를 이끌고 난입하여 반란을 제압한다. 공자 성은 무령왕의 숙부뻘 되는 사람으로 무령왕의 호복기사 개혁을 반대하다가 실각당한 인물로 당연히 자신의 지위를 되찾으려는 속셈이었다.

 

결국 실패한 공자 장은 무령왕의 거처로 피신하지만 무령왕도 공자 장을 보호할 수 없었고, 공자 장은 결국 살해당한다. 하지만 사태가 이로서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 공자 성과 이태는 무령왕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였던 만큼 무령왕의 추궁이 두려웠고 그렇다고 직접 죽이기에는 명분이 없다 보니 결국 사구의 행궁을 포위하여 무령왕을 사실상 감금한다. 물론 음식 같은 건 일절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3개월의 포위 끝에 무령왕은 굶어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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