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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이야기

진시황릉 병마용(兵馬俑)

작성자管韻|작성시간21.11.03|조회수236 목록 댓글 0

진시황릉 병마용(兵馬俑)

 

 

 

 

 

중국 산시성 시안시 린퉁구에 있는 진시황의 무덤으로, 1974년에 병사와 말 등 테라코타 모형(병마용)이 8천 점이나 발견되었다. 발견 이후 지금까지도 발굴이 진행 중인데, 진시황릉으로 추정되는 언덕은 손을 대지 않고 있다. 이유는 저우언라이가 지적했듯, 후손들을 위해서 발굴기술이 완벽해질 때까지 무리하게 발굴하지 않는다고 계획을 중국 정부가 세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진시황릉 하면 떠올리는 병마용갱은 진시황릉 주변에 있는 구덩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진시황의 무덤은 문서 맨 위 사진에 보이는 거대한 언덕이며, 아직 파지도 않았다. 병마용갱은, 무덤을 만든 다음 무덤 주변에 구덩이를 파고 병마용을 넣은 후 다시 묻은 것. 현재 1호ㆍ2호ㆍ3호갱은 관람할 수 있도록 해 놓았고, 산산조각 난 병마용을 복원하는 작업도 볼 수 있다. 1~3호 병마용갱의 병마용들을 복원하는 데만 수십 년 이상이 소요될 듯한데, 더 어마어마한 것은 아직 확인되지 않거나 확인된 지 얼마 안 된 병마용갱이 아직 많다는 사실이다. 병마용갱을 모두 발굴하고 모두 복원하는 데만 수백 년이 걸린다고 한다.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본기에 기록된 진시황릉 관련 서술이다.

9월, 시황제를 여산(酈山)에 매장했다.

九月,葬始皇酈山.

 

시황제가 처음 즉위했을 때에 여산을 공사했고, 천하를 통일하자 전국의 죄수 70만여 명에게 지하수가 3번 돌 정도로 구덩이를 깊게 파게 하고 구리를 부어 외곽을 만들었다.

始皇初即位, 穿治酈山, 及并天下, 天下徒送詣七十餘萬人, 穿三泉, 下銅而致槨.

 

궁궐과 여러 관리, 진기한 보물들을 가득 매장하였다.

宮觀百官奇器珍怪徙臧滿之.

 

장인에게 기계 쇠뇌를 만들게 하여 (묘에)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그를 쏘게 하였다.

令匠作機弩矢, 有所穿近者輒射之.

 

수은으로 여러 개울, 강과 바다를 만들고, 기계로 수은을 주입하였다.

以水銀為百川江河大海, 機相灌輸.

 

위로는 하늘의 모습을, 아래로는 땅의 형상을 갖추었다.

上具天文, 下具地理.

 

인어(人魚)의 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영구히 꺼지지 않게 하였다.

以人魚膏為燭, 度不滅者久之.

 

이세황제가 말하기를 "자식이 없는, 선제의 후궁을 내쫓는 것은 옳지 않다."

二世曰 "先帝後宮非有子者, 出焉不宜."

 

명령을 내려 (그들을) 모두 죽게 하니,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皆令從死, 死者甚眾.

 

매장을 끝내자 누군가 말하기를 “장인이 기계를 만들었고, 모든 노예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 노예가 많아 (사실이) 누설될 것입니다.”

葬既已下, 或言 “工匠為機, 臧皆知之, 臧重即泄.”

 

장례가 끝나고 (보물 등을) 이미 다 감추어 놓자, 묘의 가운데 통로를 폐쇄하고 바깥문도 폐쇄하여 장인과 노예들이 나오지 못하게 하니, 다시는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없었으며, (능에) 풀과 나무를 심으니 (그 모습이) 마치 산과 같았다.

大事畢, 已臧, 閉中羨, 下外羨門, 盡閉工匠臧者, 無復出者. 樹草木以象山.

이상의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진시황릉의 위치 진시황릉의 건설기 간과 동원된 인부의 수 진시황릉의 구조와 매장된 내용물 후궁과 인부 등 수많은 사람들이 생매장을 당했다는 사실 진시황릉의 규모 이에 관한 구체적인 분석은 아래에 서술하였다.

 

사기의 기록이 비교적 구체적인데, 사마천이 진시황릉 내부를 직접 탐험하여 서술했을 리는 없겠고, 기존 기록을 참고해서 썼을 것이다. 유방이 함양에 입성하자 소하가 진나라의 문서들을 수집하고 보관했다는 서술이 사기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에 있는데, 그때 수집된 문서들 중 진시황릉에 대한 것도 있어서 사마천이 참고했으리라 추정한다.

 

당연히 규모에 걸맞게 거대공사였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즉위 직후부터 작업에 들어가서 통일 이후부터는 총인원 70만 명(추정)을 동원해서 지었지만. 즉위 35년이 넘어서도 완성하지 못하고 진시황이 먼저 죽었다. 이후 2세 황제 호해는 여러 동물과 진시황의 후궁과 그 자녀들, 그리고 인부들을 순장하여 무덤 공사를 끝냈다. 호해가 자기 일가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공자 고(高)는 가족들이 연좌될게 두려워 호해에게 먼저 죽음을 청했기 때문에 호해가 은혜를 베풀어 자살을 허락했다하고 나머지 남자 공자들은 시장에서 참수당하고 공주들은 사지가 찢겨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실제 진시황릉의 배장품(陪葬品) 구덩이에서는 사람이 묻힌 무덤도 여러 곳 발굴되었다. 그중 남자 5명과 여자 2명이 묻힌 무덤에서는 도장 포함된 금, 은 비단으로 장식된 호화로운 부장품이나 관이 발굴되었지만 유골은 나이도 젊고 건강상태도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두개골에 화살촉이 박혔거나 특히 여성시신은 사지가 토막 나는 등 잔혹한 처형을 당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진나라 2세황제 호해가 죽인 형제자매들이나 순장된 사람들의 무덤이라고 추정한다.

 

진시황릉의 부장품은 아직 제대로 까보지도 않았음에도 정말 세계적인 수준이다. 전세계에서 부장품이 가장 많은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토용(土俑, 사람 모양 흙인형)을 많이 만들었는데, 후술할 병용(병사 인형)이 가장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신하들이나 궁중 광대 등 다양한 사람들을 실제 사람 크기로, 사람과 흡사하게 잘 만들어 묻었다. 병마용으로 추정컨대 실제 진나라 궁정에 일하던 사람 수만큼 넣었다고 추정한다. 따지고 보면 진시황릉의 주변부에 불과한 병마용갱만으로 유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판이니 묘 내부의 부장품들은 대체 어떨지 상상조차 안가는 판.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전체를 발굴하면 투탕카멘 발견을 뺨치는 세기의 최고ㆍ최대의 고고학적 발견이 될 것이 틀림없다.

 

병마용은 레고처럼 여러 부분을 만들어 구운 뒤 조립하여 완성하였다는 설과 도자기와 같이 긴 흙막대를 둥글게 쌓아 올리고 같이 만들기는 너무 크고 무겁기 때문에 복잡한 머리나 다리 부분 등만을 따로 붙였다는 설이 있다. 후자의 방식이 더 어렵고 힘들었겠지만 병마용의 크기나 무게를 지탱하고 서있기 위한 사정상 이쪽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부의 강력한 통제가 이루어지던 시기에, 품질관리를 위해서 제작소들은 모든 제작된 물건에 그 이름을 새겨야 했는데, 이 덕분에 역사학자들은 어느 작업소가 병마용의 인형들을 제작하는 데 동원되었는지도 파악할 수 있었다. 완성된 토용은 계급과 역할에 맞춰서 당시 진나라 군사 진형(陣形)을 정확하게 따른 형태로 구덩이 속에 배치되었다.

 

병용은 키가 184cm에서 197cm로 큰 편인데, 장군을 병사보다 크게 만들었다. 병마용은 경무장 보병ㆍ중무장 보병ㆍ궁병ㆍ전차병ㆍ기병ㆍ말ㆍ장교 등 다양한 병과 군인들을 표현하였다. 얼굴은 약 8가지 복제 틀을 사용해 제작하였는데, 기본형에 수염 등 세부적인 변형을 가해 하나하나가 전부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발굴된 갱도 4곳 중 3곳에 모두 병용 8천여 점, 전차 130개, 말 520점이 있다고 하는데, 이미 발굴된 것보다 더 많은 수가 아직 흙 속에 묻혀있다고 추정한다.

 

원래는 실제 사람과 말을 모델로 채색되었으나 수천 년이 지나 발굴될 때 외부 공기와 접촉하자 순식간에 옻칠 코팅층이 바스라지거나 탈색되었다고 한다. 제작 당시 채색하고 옻칠로 마감했는데, 오랜 세월 습기를 머금은 토양 속에 보관되다가 발굴 후 건조한 공기와 접촉하자, 옻칠 코팅층이 건조되어 채색층과 함께 작은 알갱이로 수축했고, 이 알갱이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색도 함께 사라진 것이다. 학자들도 퇴색을 막기 위해 병마용갱 발굴을 미뤄두었다가, 요근래 기술이 개발되어 다시 발굴을 재개하였다. 그 외에도 병마용들은 원래 모두 실물 크기 청동제 무기로 무장하였는데, 오랜 세월 동안 많이 파손되어 무기는 병마용보다는 적게 발굴되었다. 그래도 진시황릉의 알칼리성 토양과 유기물 입자가 적은 환경 덕에 꽤 잘 보존되었다.

 

한나라 시대의 몇몇 묘들에서도 토용들이 발견되었으나 규모도 작고 인형의 완성도도 진시황릉의 토용보다 훨씬 떨어진다. 크기도 진시황릉과는 달리 사람이 한 손으로 집어서 들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작다. 발굴된 한나라 시대 묘들이 전부 황릉이 아니긴 하지만, 진시황의 병마용과 비견되는 병마용을 만들려면 국고에서 재물을 퍼부어야 하고, 세밀하게 만드려면 시간까지 많이 들여야 함을 감안한다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은 한나라 시대에 이런 토용을 못 만든 것이 아니라 진시황이 무덤 짓다가 국고를 탕진하게 만든 전례에서 교훈을 얻은 한나라 사람들이 대리만족하는 선에서 끝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토용 말고도 마차의 1/2 크기 청동제 모형(동마차갱), 진시황이 기르던 말(기마갱), 학, 자이언트 판다 등 진기한 동물 수십 마리(동물갱), 부식되지 않도록 돌조각을 엮어 만든 실물 크기 갑옷과 투구 등(개갑갱) 등이 현재까지 발굴되었다. 기마갱과 동물갱에는 동물들을 돌보던 하인의 실물 크기 모형까지 함께 묻혀 있었다.

 

진시황이 죽고 겨우 4년 만에 진나라가 멸망해버렸다. 항우가 이끄는 군대는 함양(咸陽)에 입성하자 진나라 왕들의 무덤을 도굴했다. 당연히 가장 크고 6국의 원성도 가장 많이들은 진시황의 무덤이 도굴 1순위였다. 비록 항우가 도굴했어도 항우조차 진시황릉의 엄청난 규모는 미처 파악하지 못하여 상당히 많은 묘실이 도굴되지 않고 남았다.

 

다만 사기의 항우본기(項羽本紀) 등에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고, 한고제본기(漢高帝本紀)에 광무 대치 중 유방이 항우를 비난하고 항우의 죄 10가지를 나열하면서 진시황릉 도굴을 간접적으로 언급할 뿐이다. 진시황본기에서도 자영살해, 함양학살, 방화, 약탈 등 항우가 함양에서 저지른 오만가지 범죄를 다 나열했지만 진시황릉 도굴은 일언반구도 없다. 진시황릉을 발굴해봐야 알겠지만, 어쩌면 항우가 진시황의 무덤을 도굴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여산 인근에 황제의 무덤이 있다는 이야기만 구전되었을 뿐, 진시황릉은 그 후 2천 년 가까이 잊혔다. 항우가 진시황릉을 이미 도굴하고 파괴했다는 소문이 진시황릉을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청대 이후 고증학의 시대로 접어 들어서 사기(역사책)을 비롯한 대부분의 중국 고전들의 기술의 신빙성을 회의적으로 보는 사조가 생겨났기 때문에, 진시황릉에 대한 사마천의 묘사가 과연 진실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다고 한다. 사마천의 엄청난 기술이 고대인의 과장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던 중 1974년 3월 29일, 양신만(楊新滿)ㆍ양췐위ㆍ양츠파 등 리산(여산) 인근 시양 마을 청년 6명이 우물을 만들고자 땅을 파던 중 도기 조각을 발견했다. 인형 모양 도기 조각과 쇠뇌 청동 화살 등을 더 캐냈지만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린퉁현의 옌자이공사에서 수도시설을 담당하던 팡수민이 우물 작업에 진척이 없자 확인하려고 리산 우물 공사장을 찾아왔다가 흙 속에서 나온 도기인형들을 보았다. 팡수민은 평소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진나라 시대 도기라고 알아보고는 박물관에 알린 덕에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다. 얼마 뒤 도기제 병사 인형 수천 점이 묻힌 거대한 공간(병마용)이 발견되었다. 이후 동마차갱ㆍ기마갱ㆍ동물갱ㆍ개갑갱 등 부장품 구덩이 수십여 곳이 발견되어 진시황릉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문화대혁명이 슬슬 잠잠해지던 시기라 홍위병이 황릉을 파괴하는 일은 일어나지는 않았다.

 

최초 발견자 중 양신만은 인기스타가 됐다. 몇 년 전 국내 모 프로에도 양신만의 당시 근황이 나왔는데, 나름 유명인사로 관련 책자도 팔고 기념 사인회까지 열 정도로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있으며 현지 기념품 판매소에서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발견 당시엔 중국 정부에서 보상으로 겨우? 경운기 1대를 지급했다고... 진시황릉 발견 전만 해도 그 땅은 작황이 안 좋아 귀신 붙은 땅이라고 불리며 현지 주민들이 기피했던 곳이었다고 한다. 진시황이 자기 무덤에 수은을 들입다 부은 덕분에 무덤 부근 토양의 수은 함유량이 일반적인 토지의 20배에 달한다고 하니 작황이 좋을 리가 없다.

 

2016년, 진시황릉 주변에서 부장갱 4백여 곳에서 실제 동물의 유골과 도기, 청동기로 제작된 동물 등 유물 수천 점이 출토되었다.

 

병마용 주인은 진시황의 고조모라는 설도 있다. 재야 고고건축학자 천징위안(陳景元)은 ❮병마용의 진상❯이라는 책에서 근거 60여 개를 제시하며, 병마용의 실제 주인은 진시황의 고조 할머니이자 진 소양왕의 모후로서 강력한 섭정을 펼쳐 ‘2천 년 전의 서태후(西太后)’라고 불리는 ‘진나라 선태후(宣太后)’라고 주장했다.

 

천징위안은 일반 사병들도 갖췄던 투구를 진시황의 친위군단이 착용하지 않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의상 역시 빨간색과 보라색이 주조를 이루는데 진시황은 검은색을 숭상하도록 법령으로 공포할 만큼 검은색을 선호했으므로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한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한 직후 화폐와 문자, 도량형을 통일하면서 전술운용을 용이하게 하고자 전차의 너비도 통일했는데, 병마용갱에서 출토된 차량들의 바퀴 너비가 일정치 않다고 지적했다. 또한 용맹무쌍하기로 이름났던 당시 진나라 병사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무사용들은 수염을 기른 늙은이 형상에 우울하고 기운 없는 표정이란 점도 의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설은 대부분 고고학자들이 동의하지 않고 반박한다. 위 사진처럼 병마용갱의 1호 용갱에서 발견된 꺾창에 여불위의 이름이나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한 후에 설치한 관청 이름이 새겨진 점, 병마용갱의 바닥에 깔린 벽돌이 진시황릉 곁에서 나온 다른 부장품 구덩이의 벽돌과 동일한 점, 병마용갱 외에도 위에서 설명한 많은 부장품 구덩이가 진시황릉 곁에 있다는 점 등이 병마용갱은 역시 진시황릉의 부속 시설임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고 한다. 채색 문제도 원래 병마용갱의 토용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채색이 되었는데, 발굴 과정에서 사라졌을 뿐 색이 남아있는 일부 인형은 검은색으로 칠한 것이 많다.

 

또한 천징위안이 주장한 투구 문제는 두 가지 설명으로 반박 가능하다. 우선, 진시황릉의 다른 부장품 구덩이인 개갑갱에서는 돌조각으로 만든 모형 갑옷과 함께 투구가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병마용들은 전투에 돌입하기 전 전투준비태세를 갖춘 모습을 모형화한 것이라, 투구를 아직 쓰지 않았다고 형상화했으리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두 번 째로는, 진나라 이후 한나라 시기까지도 무기, 도구의 주류는 청동기였는데, 청동제 무기로 베면 날이 부러지기가 쉬워서 무기의 대부분이 창 같은 찌르는 것이었다. 이에 근거리에서 머리에 칼 등으로 가격을 당할 가능성이 낮아지고, 찌르기 공격이 집중되는 가슴 부위에는 갑옷을 착용하여 방어를 단단히 하는 반면, 투구는 구태여 착용하지 않고 대신 관모를 쓰는 정도에 그쳤다는 설명이다.

 

천징위안이 선태후의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병마용갱 바로 옆의 아직 발굴되지 않은 대형 무덤 또한 선태후 시대 무덤 구조와는 다르고, 오히려 위에 나온 진시황의 자녀 무덤으로 추정되는 배장묘와 구조가 거의 같다는 점도 천징위안의 주장의 설득력을 떨어뜨리는 정황 증거다. 진시황릉 주변에 주인이 밝혀지지 않은 진한대(秦漢代) 왕릉이 아직도 무수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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