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일본도(日本刀)
타치(太刀)나 우치가타나(打刀) 등을 포함하는 일본의 전통 도검이다. 참고로 츠루기(剣)는 양날검을 특별히 일컫는 호칭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왜도(倭刀), 왜검(倭劍)으로 부르기도 했다.
일본도 장인을 토코(刀工, 도공)라고 하며, 카누치(鍛人), 카나치(鍛師), 카타나카지(刀鍛冶), 토쇼(刀匠), 카타나시(刀師) 등으로도 부른다.
본래 일본에서는 백제에서 들여온 환두대도가 그대로 사용되었으나, 이것이 자체적으로 변화를 거쳤고 그 중 일본도의 원형이 되는 "타치(大刀,太刀)"가 등장한다. 이 때의 타치는 한손검인 해외 환두대도와 달리 양손으로 사용하는 것이 많아 고분전중기(古墳前中期 : 기원후 4-6세기)까지 양손 검 타치가 주류였다.
다만, 양손검이지만 모양은 한 손으로 사용하는 직도의 형태였으며 날 길이도 70cm가 채 못 되는 짧은 도검들이었다. 쇼토쿠 태자의 그림 을 보면 칠성검이나 일반 병사용으로 사용된 흑작대도(黑作大刀) 등이 이 시대의 군용 일본도로 보인다.
당대도 기원설 : 당대도가 일본도의 기원이라는 주장주장2을 펼치는 사람들도 있고, 종종 한국의 문화지 기사에도 그런 주장이 인용되는데, 정작 다른 여러 나라의 학자/학예사 중에서 정식으로 당대도를 일본도의 기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아마도 여러종류의 중국발 역사왜곡 중에 하나인 것으로 짐작된다. 애초에 일본의 타치는 당대도가 등장(7-8세기 이후)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였고, 당대도는 곡선이 전혀 없는데다 일본에서 보관중인 당대도 유물은 끝 부분이 펄스엣지 즉 양날이지만, 일본도는 도신자체가 곡선인 외날 도검이다. 쇼토쿠 태자 초상의 도검이 당태도라는 주장도 있으나 애초에 쇼토쿠 태자는 당나라가 아닌 견수사를 보냈으며 당시 그가 가지고 있던 것은 일본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던 "타치"이다. 하지만 이후 견당사가 가져온 당대도(唐大刀)의 레플리카가 일본에 존재한다. 하지만 일본에 있는 당대도 유물의 숫자는 하나 뿐이라 외장구에만 미미하게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일본도는 다시 독자적인 변화를 겪는다.링크 그 과정 중 하나에 해당하는 것이 게누키가타타치(毛拔形太刀)인데 휘어진 칼날과 둥근 칼코등이(쓰바. 정확히는 아오이가타) 등 나중에 등장할 일본도의 형상을 갖추었다. 게누키(털뽑기)라는 이름은 이 손잡이 중앙에 파여진 구멍이 당시의 털뽑는 기구와 비슷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7-8세기인 이때는 도호쿠 지방 국경선 너머로 준동하는 원주민인 에미시들과 조정간의 전쟁이 격화되던 시기로 이때 에미시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쏘며 기동력을 갖춰 전쟁을 했고, 그들이 사용하던 도검을 일본의 무사들이 도입해 마상전투에 걸맞게 휘어진 칼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초기형 타치(太刀)에 해당된다. 헤이안 시대를 거치면서 율령제가 붕괴하고 평민으로 구성된 군단제가 포기되고 지방관아의 자제로 구성된 건아(健兒)제도로 병역제도가 변경되며 자연히 소수정예의 형태로 군사제도가 변화되면서 도검의 형태도 무사들이 사용하는 휘어진 형태로 정착되어간다. 헤이안 말기-겐페이 시대에 이르면 일본도는 18~23cm의 짧은 손잡이를 금속 박판으로 위아래를 덮고 옆에는 어피를 붙이고 80cm이상의 긴 칼날을 가진 마상용 도검의 형태를 가지게 된다.
이런 타치(大刀)의 발전 과정 중 누락된 부분이 있다고 여겨져, 이를 와라비테타치와 연관지으려는 시각도 있으나, 이미 더 이전 백제와 신라 가야 등에서 한반도 식 환두대도를 가져와 빌려 쓰던 일본 직도 대도 단계부터 손잡이가 조금씩 뒤로 꺾인 것들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환경에 맞게 서서히 형태가 변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헤이안 시대를 거치면서 율령제가 붕괴하고 평민으로 구성된 군단제가 해체되며 병역도 지방 관아의 자제로 구성한 건아(健兒)제도로 바뀌는 등 군사제도가 소수정예로 바뀌자, 도검 역시 말탄 무사들이 사용하기 좋은 휘어진 모습으로 바뀌었다. 헤이안 말기-겐페이 시대에 이르면 일본도는 길이가 18-23 cm인 짧은 손잡이를 금속 박판으로 위아래를 덮고 옆에는 어피를 붙이고 칼날이 80 cm 이상으로 긴 마상용 도검이 주를 이뤘다.
가마쿠라 시대 말기가 되면 산과 들을 자유자재로 드나들면서 지물을 이용하는 습격과 매복이 잦아졌기 때문에 기존의 기마궁시 전법은 입지가 줄어든다. 몽골과의 전쟁이나 고다이고 천황의 신정부 수립에 관여한 악당(惡黨)의 전법 등 과거에 비해 도보 지상전의 비율이 늘어났다. 또 고다이고 신정부가 붕괴하고 무로마치 막부가 등장하여 남북조 시대에 60여 년간 내전을 벌이는 동안, 도보전이 확대되고 갑옷도 도보전에 알맞게 도오마루(胴丸), 하라마키(腹卷)로 대세가 변하였다. 또 팔이나 다리 부분을 더욱 철저히 방어하였기 때문에 실전용 타치는 자루에 끈을 감아 쥐기 좋고 땀을 흘려도 흡수되어 미끄럽지 않도록 하였다. 우리가 아는 일본도의 모습은 거의 이때 정립된다. 또 갑옷이 중장화하자 금쇄봉 같은 타격무기가 활용도가 늘어났고 나가마키, 오오타치와 같은 커다란 도검들도 많이 쓰이는 등, 이 시기에는 일본도가 전체적으로 크고 무거워졌다.
견해에 따라서는 무로마치 시대의 일본도를 이후의 전국시대보다 더 우월하게 보고, 일본도의 절정기를 무로마치 시대로 보기도 한다. 전국시대에는 오히려 조총 등의 등장으로 일본도의 전술적 가치가 떨어지면서 질적으로도 저하되었다는 것이다.
무로마치 말기에 들어 오닌의 난과 같은 내전이 발발하고 나서는 기마무사 소모는 많아지는데 비해 기존의 기마무사의 공급은 점차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말없이 걸어다니는 하급무사, 뒤이어 아시가루들이 전쟁의 주력을 차지하게 된다. 이때 이들이 사용한 것이 바로 카타나라는 일본도로써 주요 특징은 타치보다 한 단계 낮은 위치의 도검으로써 패용 장치가 없이 허리춤에 끼우고 다녔고 칼날도 2척 1촌(63 cm) 정도로 짧으며 한 손으로 쓰기 적당한 칼이었다. 정확한 것은 우치가타나 문서 참조. 이러한 카타나는 오다 노부나가가 아즈치 성을 건설하여 천하인임을 표명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들어서면서 도보전이 일반화된 전쟁 환경을 감안하여 기존의 타치를 대체하여 사용되게 되고 전체적인 스펙도 타치와 큰 차이가 없어졌다. 이 즈음에는 카타나와 와키자시를 장식을 통일해서 한 세트로 차고 다니는 것도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다이쇼 코시라에, 또는 니혼자시로 부른다. 또 기존의 타치를 패용 장치를 제거하고 카타나의 쿠리카타를 붙여서 허리에 끼워서 차고 다니는 한다치(半太刀) 양식이 등장하기도 했다. 장식성에서 워낙 우월했기 때문에 카타나라도 한다치의 양식을 모방해서 만들기도 하였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는 지나치게 긴 칼을 금지하고 날 길이의 기준을 정했다. 일단 하바키를 제외한 날 길이 기준으로 1척(30.3 cm) 이하는 단도, 1척 이상~2척 미만은 와키자시, 2척 이상은 카타나로 규정했다. 또 카타나의 날 길이는 2척 3촌(약 69cm)를 넘기지 않도록 규정했다. 그래서 기존의 타치를 갈아내서 날 길이를 맞춰 패용하고 다닌 경우도 존재한다. 이와 동시에 카타나와 와키자시를 신분의 상징으로 무사가 항시 패용하도록 규정하였다. 또 실전이 없어지고 일본도에 대한 관념이 의식화되고 장식적인 것이 호평을 받으면서 일본도의 여러 부품에 화려한 투각이나 문양이 새겨지거나 다양한 디자인들이 선보이게 된다. 현대 일본도 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쳐서 카타나에 실전용 외장과 보관용 시라사야를 따로 만든다거나 정비할 때 도침(칼베개)를 이용해서 뉘어놓는 등의 문화가 죄다 이 에도시대에 정립된 것이다. 물론 히고나 사츠마 코시라에처럼 실전적이고 투박한 것도 있었지만 대세는 보다 가볍고 화려하고 장식적인 것이었다.
에도 시대 말기에 이르러 쿠로후네 사건과 같은 서양 세력의 침공과 교전이 자주 벌어지면서 막부측은 강무소(講武所) 등을 세워 신식 전술을 교육시키는데 서양인들이 총기에 의지하여 백병전에 무지할 거라 생각하고는 창술이나 검술을 정립해서 가르쳤다. 또 이때 교토와 같은 대도시에서 당시 횡행하던 존왕양이 사상을 주장하던 이른바 유신지사들이 테러나 암살을 반복했으므로 이에 대항한 신센구미와 같은 조직들이 창설, 일본도로 시가지에서 교전을 벌이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이때에는 서양도검과 서양전술의 영향을 받아 그에 걸맞게 개량된 돗페이(突兵)코시라에가 등장하기도 했으며 유럽식의 행어 패용 방식을 따라 서양식으로 패용하기도 했다. 칼자루가 뒤로 가게 하거나 등에 지고 다니는 경우도 볼 수 있었다.
무진전쟁 때에는 주로 총포를 이용한 전쟁이 벌어졌지만 간혹 도검을 이용해 돌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총검 사용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4~5 kg에 달하는 당시의 소총으로 총검술을 하는 것을 일본인들이 상당한 부담을 느껴서라고 한다. 서남전쟁에서는 화력이 딸리고 총탄이 부족한 사츠마 군대의 무사들이 일본도를 이용해 발도 돌격을 수행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는데 평민 장정으로 구성된 당시 일본 정부군이 혼비백산하여 도주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고 결국 정부군 측에서도 무사들로 구성된 경찰 발도대를 투입해 칼에는 칼로 맞서게 되었다. 서남전쟁은 구시대의 산물로 무시된 일본도가 다시 실전력을 증명한 전쟁으로써 이후 일본은 검도를 제정하고 실전군도를 제정하는 등 백병전을 다시 고려하였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에는 16식 해군장교도, 19식 육군장교도(둘 다 세이버)의 양식을 유지한 채로 일본도 칼날을 끼우고 양손으로 쥐는 손잡이를 장착한 양손세이버가 실전군도로써 사용되었다. 1934년에는 초국가주의 열풍으로 일본도 타치 양식을 갖춘 신군도가 등장한다. 1945년 종전 이후 일본도들은 죄다 회수되어 폐기될 위기에 처했으나 전통 공예품이란 측면을 강조하여 겨우 살아남았다. 일본은 날 길이가 15 cm 이상인 날붙이를 무기로 규정하고 소지를 금하지만, 일본도는 전통공예품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소지와 거래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일본 제국 시절 총검을 자주 사용하였지만 상하이, 난징과 같은 일본 제국군에 정복된 곳에서는 중국인들을 향한 100인 베어 처형하기 (100人切り) 등 일본 제국군의 장난과 놀이로 일본도가 사용되었다. 당시 일본 제국군들이 주둔하던 난징에선 중국인을 놀이로 처형할 때 이 일본도로 목을 잘라 처형하였다.
한국에서도 해방전은 물론 해방 후에도 상당히 자주 사용한 듯하다. 참조 해방후 테러, 강도질은 물론 국군이나 빨치산까지 폭넓게 사용하였다.
3. 역사상의 평가
일본도에 대한 평가는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은 11세기의 고려시대부터 일본과 물물교환을 통해 도검을 수입한 기록이 발견된다. 이후 중국 해안지역에의 연이은 왜구 약탈이나 임진왜란에서 드러난 난전에서 일본도의 유용성은 동아시아인들에게 깊게 각인되었고, 징비록이나 명나라의 기록에서도 일본도의 유용함을 논하는 대목은 빠지지 않는다.
무기가 결국 사용자의 능력에 좌우되는 것임을 고려해보면 약 백여 년 간의 전국시대를 거친 일본인들이 비교적 평화로웠던 조선이나 중국에 비해 단병접전에 있어서 유리한 위치를 점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유가 있다고 한들 당대 일본인들과 맞서 싸운 주요한 인물들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일본도를 위협적인 무기로 인식하였음은 사실이다.
일본도가 제대로 무장을 갖춘 병사들에게는 별 효과가 없다는 말도 있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 갑주 전투에 특화된 폴암류를 제외한 대부분의 무기가 갑옷을 상대로 별 효용이 없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일본도만의 단점으로 보기는 어렵다.
곤이(昆夷)로 가는 길은 멀어서 다시는 통할 수 없으니,
옥도 절단한다는 그 칼을 누가 찾을 수 있으리?
근래에 보검이 일본국에서 나와,
월(越) 상인이 창해 동쪽에서 그것을 얻었다.
물고기 껍질을 장식해 붙인 향나무 칼,
노란빛과 흰빛이 섞인 놋쇠와 구리.
백금에 호사가의 손으로 넘어오니
허리에 차면 요괴를 물리칠 수 있단다.
듣기에 그 나라는 큰 섬에 있고,
토양이 비옥하고 풍속이 좋다고 한다.
그 선조인 서복이 진나라 백성을 속여,
약을 캐러 갔다가 동남동녀 그 곳에서 늙어갔다.
온갖 장인과 오곡을 그들에게 주어 살게 하니,
지금에 이르도록 공예품 모두 정교하다.
구양수(歐陽脩, 1007~1072) 일본도가(日本刀歌)
송나라 시절에 일본과의 무역을 통해 타치(太刀)가 수입되긴 했지만 이때는 실전(군사용) 무기가 아니라 독특한 양식의 외국 칼, 수품 취급을 받았다. 일본도가 실전 무기로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명나라 시대에 왜구가 준동하면서부터였다. 당시 명나라는 이른바 해금정책으로 대외무역을 크게 제한하였는데 무역으로 큰 돈을 벌던 중국과 일본의 상인들이 이에 저항하여 용병을 고용하고 밀무역을 하면서 사실상의 해적 단으로 변화되었다. 여기에 많은 중국인, 일본인 용병들이 한 몫을 잡기 위해 뛰어들면서 명나라 해안에 대한 노략질이 심해졌다. 특히 저장 성 지방의 피해가 막심했다.
이때 절강성에 부임한 군사령관 척계광은 낭선, 등패를 비롯한 신무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왜구의 주특기인 일본도 검술과 돌격을 저지하는 원앙진을 고안하고 기동력 있는 경량 화포(호준포 등)을 채용하고 화승총도 채용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도의 절삭력, 긴 길이에서 나오는 사거리를 보고 일본도의 영향을 받아 쌍수도라는, 화승총병이 백병전시 사용할 무기를 만들었다. 또 일본 검술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투항 왜구에게 검술을 배우는 동시에 1561년에는 일본에서 카게류(陰流) 검술도 수입하여 기술 목록까지 입수했는데, 신유년에 입수했다 하여 신유도법(辛西刀法)이라고도 부른다. 이후로 명나라에서도 일본도를 이용한 검술 연구가 이루어져서 왜도로 창을 이기는 방법을 담은 정종유(程宗猷)의 단도법선(單刀法選)이 출판되었으며 1621년 모원외가 15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2천여 종의 병법서를 참고하여 정리한 병법서 《무비지》에도 '일본음류도법' 과 '왜구도법' 이 기록되었다.
처음에는 일본도 양식을 그대로 베껴서 생산했다. 이순신 장군이 받은 명조팔사품 중에 대도의 쓰바(鍔)는 일본의 기쿠 양식을 그대로 복제한 것. 하지만 나중에는 명나라 식으로, 중국 양식의 물건으로 대체된다. 이러한 일본도들을 중국에서는 '왜도(倭刀)’라고 불렀으며 청나라 말엽까지 제식병기로도 사용되었다. 화북에서는 양손으로 사용하는 도검이라는 의미로 쌍수대(雙手帶)라고도 불렀는데 박도(朴刀)와 같이 다른 양식의 양손도검도 똑같이 쌍수대라 칭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1627년 정묘호란에서 승리한 후금은 조선과의 교역을 통해 명나라와의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기 시작했는데, 그 와중에 조선인 포로 수천 명을 해방하는 조건으로 왜도 500자루를 요구하기도 했다. 청나라가 중원에 입성한 이후에도 섭정왕 도르곤이 조선에 특별히 일본도를 구해다 바치라 명령한 일이 있었고 조공 물품 중 환도를 일본도로 바꾸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민국 시대에 들어서면 묘도(苗刀)라 불리는 양손으로 잡는 장도(長刀)가 나타나는데 이전의 왜도 양식과는 대동소이하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왜'라는 명칭이 꺼려지게 되자 칼날이 풀의 새싹처럼 가늘고 예리하다는 뜻으로 묘도라 불리게 된 듯 하다. 중국 무술 중에 묘도를 사용하는 무술도 있긴 한데 묘도조차 현대 우슈에서 사용하는 무기들처럼 지나치게 경량화 시켜 잘 휘게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묘도가 최소 130cm가 넘어가는 장도이기에 본래의 방식으로 만들 경우 2kg이 넘어가 우슈 검술처럼 막 휘두르지 못해 구사 가능한 동작이 제한되기에 이런식의 경량화를 시키는 것인데 당연히 다른 우슈 무기술과 마찬가지로 실전성은 무척 떨어진 체조 동작이 되어버린다. 반면에 무게를 제대로 만든 묘도를 사용할 경우에는 상당히 위력적인 모습이 연출되기도 한다.
중국 배경인 무협소설에서도 종종 언급되기도 한다. 보통 중국 배경의 무협물에서는 도는 두껍고 검은 가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도는 검처럼 가느다란 도로 찌르기에도 큰 문제가 없어 검과 도의 장점을 고루 가진 무기로 평가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3.2. 조선의 왜도
조선에서는 왜검(倭劍)이나 왜도(倭刀)라고 불렀다.
일본도에 대한 평가는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은 11세기의 고려시대부터 일본과 물물교환을 통해 도검을 수입한 기록이 발견된다. 다만 고려~여말선초 당시 기록에는 왜구들은 창과 칼을 이용한 단병접전에 능하다는 기록을 제외하고는 딱히 칼의 성능에 관한 기록은 찾기 힘들다. 당시까지만 해도 칼밥 먹고 사는 왜구들이 백병전을 잘한다는 인식은 있었지만 딱히 칼의 성능이 차이가 있었다는 기록도 그리고 고려가 백병전을 못했다는 기록도 없다. 다만 고려 기록이 조선에 비해 굉장히 소략하다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
세종대까지만 해도 일본도는 단지 이국의 특이한 수입품 정도의 위치였으나 조선 중기로 들어서면서 점점 인식이 바뀌게 된다. 오랜 기간 소규모 여진족, 왜구와의 전투 정도를 제외하고 전투를 겪지 않던 조선군은 여진족을 상대하기 좋고 하다며 칼의 평균 길이가 짧아지기 시작했다. 이에 더해 병사들이 창검술 익히기를 소홀히 하게 됐으며 군기시의 병기 관리 역시 소홀해지기 시작했고 일본도의 평가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왜란을 통해 오랜 태평으로 이한 군기 문란과 더해 창검술을 거의 익히지 않았던 것과 평시 병기 관리가 소홀했다는 점, 환도의 길이가 소형화 됬다는 점, 그리고 전국 시대로 역량과 사기가 상당한 수준에 있는 일본 병사들, 대형화된 일본도의 차이로 인해 백병전에서 크게 밀리게 됬고 백병전에서 주로 쓰이는 칼, 정확히는 일본도와 그 검술의 평가가 크게 올랐다.
예를 들어 문종 1년 실록을 보면 마병이 쓰는 환도를 길이를 1척 6촌, 보병이 쓰는 환도는 1척 7촌 3푼의 길이로 한다고 정하는 기사를 볼 수 있는데 이 시기라면 세종 12년 개정된 영조척(1척 = 31.220cm)을 사용할테니 이로 환산해 볼 경우 기병용의 환도의 날 길이는 약 50cm, 보병용은 54cm 정도에 불과한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영조척은 건물 등에 통용된 척도로 일반적인 길이를 재던 것은 영조척보다 더 작은 주척으로 세종 26년에 개정된 주척(20.795cm)를 사용했다.해당 주척으로 환산하게 되면 기병용 환도는 33cm, 보병용 환도는 36cm이다. 실제로 동래성 출토 유물을 보면 분명히 군사들이 쓰는 환도임에도 전투에 적합한 길이부터 겨우 식칼 정도의 길이까지 다양한 길이가 출토됐고 프로이스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 병사들의 칼이 대체로 짧았다고 한다. 이 시기(서기 1451년)은 일본의 경우 무로마치 시대 전기에 해당하며 이 당시는 남북조 시대를 거치며 일본의 내전이 극에 달했던 직후였던 만큼 일본도 역시 흔히 현대인이 알고 있는 날 길이 70cm 남짓의 우치가타나가 아니라 3척(90cm) 이상의 장검인 오오타치, 또는 80cm 이상의 타치와 같은 형식의 도검이 사용되었기에 그 차이는 더더욱 컸을 것이다.
이러한 일본도의 고평가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다만 조선 후기의 무예도보통지에는 일본, 중국 검술과 함게 조선 검술인 본국검, 예도 등을 실었는데 여기에 뛰어난 칼춤 실력으로 백제 왕을 암살했다는 황창랑의 일화를 언급하며 신라 검술이 가까운 일본 검술에게 반드시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유추를 하기도 했다. 이는 비슷한 무기를 쓰는 특성상 당연히 있을 기술적 유사성 때문도 있겠지만 직접 비교해본 한국 검술과 일본 검술이 큰 차이가 없었다고도 볼 수 있다. 사실 이것이 객관적으로는 당연한 평가인데
현대 검술 연구가들은 일본의 검술 "문화"가 무척 발전했다고는 해도 일본 검술이 타 검술보다 기술적으로 더 우월하다고는 하지 않는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중세든 현대든 팔 2개, 다리 2개, 머리 하나 달린 이상 검술, 특히 양손 검술은 스타일 차이는 있어도 기본적인 기술 자체는 다들 비슷하기 때문이며 이는 기록되어 있는 조선 검술인 본국검, 예도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윗 문단에서 설명한 당시 조선군의 참담한 백병전 능력과 대비된 일본도와 검술의 고평가가 그대로 사회적 상식 같은 것이 되어 그 명성이 후대로도 이어졌던 것이다. 일본도의 성능 역시 기본적으로 환도보다 높게 평가받지만 조선 청도 지역 대장장이들은 일본에서도 신검이라고 부를 정도의 명검을 만든다는 등 상당히 언벨러스한 평가가 양립한다. 제법 상 큰 차이가 없는 일본도를 뛰어넘는 신검 운운을 봤을때 왜란 이후 기본적으로 일본도가 고평가되는 조선에서도 대장장이 따라서 일본도 이상의 환도를 만들 수 있다는 인식이 있었고 이것이 반영된 전설 기록 정도로 생각된다.
어쨌듯든 이렇게 일본도와 검술은 조선 후기에 고평가 되었고 군기시에서도 종종 수입하기도 했으며 무예도보통지에도 조선, 중국 검술과 함게 일본 검술이 실려있다. 왜검에 대한 관심은 중국 역시 마찬가지여서 사신들에게 진상품으로 노획한 왜검을 끼워 보내는 경우가 많았고, 사신들도 가지기를 원했다고 한다. 인조 27년에는 청 조정에서 왜검을 구입해 보내라는 요구가 있었지만 왜인의 병기 무역이 이루어지지 않아 보내지 못했다는 기사가 있다.
요약하면, 여말선초까지는 기본적으로 칼밥 먹고 사는 왜구들이 단병에 능하다고는 해도 고려군 역시 필요하면 평범하게 칼 들고 백병전을 하는 등 양국 검의 성능과 검술 사이에 특별한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들면서 오랜 태평으로 인한 군기 문란, 검의 소형화 등으로 전국 시대 일본에게 백병전에서 크게 밀리게 되었고 그에 따라 일본도와 검술이 고평가되고 이 평가가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하단에 나올 실록 기록에서 볼 수 있듯, 일본도에 대한 고평가는 조선 중기 이후로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당장 일본의 왜검 제법을 배워온 공인에게 상을 내리자는 기사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국방력이 강했던 세종 시대의 기사로 등장하며, 이후 성종때도 여러차례 등장한다.
※ 일본도가 아닌 일본 검술에 대한 기록이 너무 많이 섞여있어서 문서 취지에 맞지 않고, 심지어 일본도나 일본 검술에 대한 언급인지도 불분명한 기록과 출처가 불량해서 신빙성이 의심되는 기록도 많으므로 정리 바람.
의령(宜寧)에 거주하는 선군(船軍) 심을(沈乙)이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서 칼 만드는 법을 배워 칼 한 자루를 만들어 올리니, 일본 칼과 다름이 없으매, 명하여 군역(軍役)을 면제시키고 옷 한 벌과 쌀·콩 아울러 10석을 하사하였다.
『세종실록』 1430년 6월 1일
"우리 나라 공인(工人)이 제조한 칼은 저들의 잘 단련(鍛鍊)된 것과 같지 못하니, 저들로 하여금 시험적으로 주조(鑄造)하게 하여 만약 보통 기구(器具)보다 특이하게 된다면 작은 관직을 제수하고 그들이 잇달아 왕래하도록 허가하여 우리 공인(工人)들로 하여금 전습(傳習)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또 예조(禮曹)에 물으니, 예조에서 말하기를, "시험하여 만들도록 하는 것은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하자, 전교(傳敎)하기를, "갑오년의 예(例)에 의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칼을 만들게 하라."
『성종실록』 1482년 9월 24일 왜인 두로가문(豆老可文)에게 관직을 주고 기술을 전습받자는내용
"군기시(軍器寺)에 간직한 왜도(倭刀)는 아무리 하품(下品)이더라도 몹시 날카로우니(甚銳利) 진실로 군국(軍國)의 중한 기구인데 가볍게 화매(和賣)하는 것은 미(未便)합니다"
『성종실록』 1487년 5월 15일
신(臣)은 왜의 땅에 와 있은 지 3년 동안 왜놈들이 날마다 군기와 창검을 수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후에 항복해 온 왜인 가운데는 반드시 칼을 알아보고, 칼을 만들고, 칼을 갈 줄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니, 충신(忠信)으로 대해 주고 녹봉을 후히 주어 날마다 달구어 만들어 내게 하고, 부산에서 만약 전일과 같이 서로 무역하게 될 경우에는 칼을 잘 알아보는 통역을 시켜 귀중한 물품을 많이 싣고 가서 사 들여오게 하여 창졸(倉卒)간의 사용에 대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간양록』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
도양장(고흥군 도양면)의 농사일에 부리는 소가 7 마리인데, 보성 림정로(臨廷老) 1 마리, 박사명(朴士明) 1 마리를 바치지 않았다. 정명열(丁鳴悅)은 바로 길다란 서화첩(長帖)을 받아 갔다. 이는 정 경달(丁景達)의 아들이다. 갑사 송한(宋漢). 1월 3일에 배 위에서 이번에는 환도 4 자루, 왜놈칼 2 자루를 만 들었다. 아들 회가 가지고 가던 중에(이 뒤에 분실)
『난중일기』1596년 1월
왜경(倭京)에 머물렀다. 군기(軍器)로 소용되는 장검(長劍) 1백 자루를 샀다.
일본에는 다른 나라 사람에게 병기(兵器)를 몰래 파는 것에 대한 금령이 있었다.
평조신(平調信)이 생시에 가강에게 아뢰기를, “조선이 조총과 환도(環刀) 등의 물품을 사고자 하니, 허락해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하니,
가강이 말하기를, “싸움을 당하면 싸울 것이지, 어찌 병기 없는 나라와 그 승부를 겨뤄서야 되겠느냐? 하물며 이웃 나라가 사고자 한다면 어떻게 금지 하겠는가?”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이번에 사는 병기는 조금도 금지함이 없어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매매하였던 것이다.
『해사록』 1607년 6월 6일-8일
상이 김상헌에게 이르기를, "호사(胡使)가 요구한 왜도(倭刀)는 두 자루를 주었을 뿐인데, 부족한 감이 없지 않은가?" 하니,
김상헌이 회계하기를, "별단(別單)으로 준 것은 비록 두 자루뿐이지만 무역한 수량은 거의 200자루에 이르니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부사가 이르기를, "어제 말씀드렸던 국왕께서 보배로 여기시는 왜도를 얻고 싶습니다." 하였다.
『승정원일기』 인조 3년(1625) 6월 12일
오랑캐는 호송관(護送官) 이홍망(李弘望)과 함께 상의하고 사로잡혀간 남녀 1만 2천여 명을 돌려보냈는데, 김진(金榗)ㆍ박유달(朴惟達) 등의 부부도 아울러 이 속에 끼어 있었다. 오랑캐 차사가 압송해 와서 왜도(倭刀) 5백 자루를 요구했다.
『속잡록』 1627년 3월 10일
청나라 장수로서, 우리나라에 관한 일을 맡은 자가 일찍이 일본의 보검을 구하므로, 민간에서 찾아 얻었더니 매우 좋은 칼이 있었다. 공이 이 칼을 받아 감추고, 낭관들을 시켜 다시 다른 칼을 구하게 하였더니, 다시 칼 한 자루를 구하여 올렸다. 공이 말하기를, "비록 처음 칼만을 못하지만 또한 쓸 만하다." 하고, 그것을 청장에게 주었다. 얼마 뒤에 청국 황제가 그 장수의 칼을 보고 다시 구하였는데, 공이 즉시 감추어 두었던 것을 내어주며 낭관에게 말하기를, "그때 내가 이미 이럴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하니, 듣는 자가 탄복하였다.
『연려실기술』 29권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섭정왕이 구하는 특별히 만들어야 할 장검을 일본에서 만들게 하기는 매우 어려운 형입니다. 지금 후한 값으로써 왜관에 머무르고 있는 왜인 장사꾼에게 몰래 도모한다면 이익을 탐하는 무리인 만큼 설혹 받아 가지고 가시 청국에서 보낸 견본처럼 똑같이 만들 것이나 정교하게 만들지 기필할 수 없습니다."
『비변사등록』 인조 25년(1647) 10월 9일
호조가 아뢰기를, "향장검(鄕長劍) 16병(柄)과 향단검(鄕短劍) 8병은 정축년(1637)의 예(例)대로 모두 왜도(倭刀)로 바꾸어 지급해 달라고 하기에 여러 칙사의 차비 당상 역관들로 하여금 거듭 설명하게 하였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정칙이 곧바로 응판색리(應辦色吏)를 불러 말을 전하기를, ‘앞으로 예단의 환도는 모두 왜도를 쓰는 것으로 사유를 갖추어 입계하고 영원히 등록(謄錄)으로 남기십시오.’라고 하면서 몹시 급히 들여보내라고 하였습니다. 그간의 사세로 볼 때 거절하기 어려울 듯하니, 왜도 가운데 보통의 품질로 가려서 바꾸어 지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인조 25년(1647) 10월 16일
상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청사(청나라사신)를 접견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왜검(倭劍)을 사서 보내라는 분부가 있었는데, 소방(小邦)이 힘을 다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근래 왜인이 병기(兵器) 무역을 전혀 허락하지 않으므로, 지금 10년이 되도록 아직 사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그 말씀대로 돌아가 고하겠습니다." 하였다.
『인조실록』 1649년 1월 20일
"신들이 인사하고 나온 뒤에 정사(鄭使)가 이형장을 시켜 신들에게 말을 전하게 하기를, ‘예전에 보낸 환도(環刀)의 견양은 일본에서 제조하기를 도모할 수 없다면 도로 사행 에 부쳐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번에 사은하는 사행을 다시 보내되 그 견양대로 귀국에서 두 자루를 정밀하게 만들고 말을 잘 만들어 보내기를, 「그 견양을 지금까지 머물러 두었던 것은 반드시 어떻게든 왜국에 시도해 보려는 것이었는데, 어찌할 방도가 없어 부득이 본국에서 만들어 보냅니다. 하지만 품제(品制)가 좋지 못하여 매우 황공합니다.」라고 하십시오.’ 하였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이대로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승정원일기』 인조 27년(1649) 1월 23일
倭國刀,背闊不及二分許,架於手指之上不復欹倒. 不知用何錘法,中國未得其傳.
왜국의 칼은 칼등 폭이 2푼(6mm)에 못 미치나, (칼등으로 세워서) 손가락 위에 올려도 기울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두드려 만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중국에는 그 방법이 전해지지 않는다.